한동훈씨!
37년 前, 6月10日!
어제가 무슨 항쟁, 어떤 의미의 날이며 자네는 그 시절 어디서 무얼 했으며 그 후 누구 德으로 살아오다가 홍준표 선배한테 입으로 쥐어 터지며 내가 당신 주댕이 때문에 하나님께 罰받게 됐는지 아는가?
함께 아래 기록물이나마 공유할 것을 제의하는 바이요.
거친 표현 하나님 벌 받을 각오여유.
칠흙같이 어둡던 그 시절 제1야당 통일민주당 순환보직 원칙깨고 10여년 간 선전부장직에서 최류탄 가스 마시며 투쟁 했고 90년에 3당합당으로 팔자에 없는 여당되어 역시 순환보직 없이 이름도 빛도 없이 오직 소속정당 민자당ㆍ한나라당의 승리와 우국주자들 당선만을 위하여 땀ㆍ눈물 뿌리는 일선전사들 정신교육 훈련 시키는 중앙교육원(연수원) 연수부장과 교수로 7년간 12月 찬바람 마시며 전국을 훑었노라.
우리 항상 건강하기로 약속해유.
아직 건강하기에 상일동역 發 05시 반 첫 차로 일터로 이재갑니다.
대북전단 보내기와 똥ㆍ쓰레기 오물풍선 받아 챙기기로 유구한 5천년 역사 위에 지울 수 없는 겨레의 수치를 자초한 후랴달늠들아!
날씨 따뜻한건 땀 흘리면 되지만 땅 속에서 남북한 특히 남쪽 정치권 작태에 넌덜머리 나서 당장 뒤집어 엎어버리겠단다.
♡ 추가 질문 /
☆ 今年이 文民民主主義 出帆 몇 주년여? 이게 다 누구德여?
문민정부 또는 김영삼 정부는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이 이끌었던 정부다.
제6공화국 2기 정부로 1993년 2월 25일 출범해 1998년 2월 24일까지 5년 간 존속하였다.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집권 정부 중 하나임을 암기하라.
1. 22대 총선 결과 소감과 김건희 법정에 세워 재판받게 하는 것 반대하나?
2.아직도 '운동권세력청산이 시대적 소명'이란 소신에 변함 없는가?
3. 총선 다시하면 승리하거나 자네가 국힘당 대표출마 하리라는 일부 넉빠진 자들 예측에 따를 참인가?
(그렇다면, 그래서 총선 승리커나 자네가 대표선출 되면 나 지구떠나 하늘이건 지옥이건 이재갑니다.)
97년12월 이회창선수 패배 야당되어 천안연수원에서 근무 중 연수원 폐쇄, 上京 후 98년 봄부터 쐬주 맥주 양ㆍ약주 심지어 우리고향 특산 한산 소곡주도 다 끊고 오직 막걸리만 그것도 서울장수 막걸리만 26년간 고집스럽게 ㆍㆍㆍ
등산 때와 모임 때만 마시던 걸 10여년 전부터는 격일로 마셨던게(그것도 일터관계)
작년 부터는 매일 1병씩 거의 매 끼니마다 마시는 중독자로.
어느 빈소에 문상가건 배낭에 서울장수지참.
서울장수없는 식당 모임가면 가게가서 사다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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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6ㆍ10항쟁 37주년인 어제저녁 '作心 3日'과의 전쟁선포.
이재갑이 서울장수 斷酒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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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전두환 정부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 운동을 지칭하는 단어로, 6월 민주 항쟁, 6월 민주화 운동, 6.10 항쟁[ 등의 거룩한 날 이름으로 불린다.
1987년 4월, 전두환은 남은 임기가 1년도 안되어 임기 중의 개헌이 불가능하니, 현행 5공화국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특별 담화로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는 가뜩이나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열망하던 사람들의 반발을 끌어냈다. 대다수 국민은 직선제로의 복구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선언을 계기로 제도권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하였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시작된 권위주의 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서구 수준의 자유민주주의가 쟁취되었다.
나도 아내를 윤씨처럼 손잡고 가고픈데 핸드빽이 빵꾸나서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또한 다른 민주 혁명과는 다르게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로 군부 독재 정권을 쫓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이 평가받는 시민 항쟁이기도 하다. 시민 항쟁이 일어나면 대개 공권력의 폭력 남용에 의한 내란, 쿠데타, 폭동 등의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6월 항쟁은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할 지언정, 전반적인 치안은 양호했으며 사상자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당시 취재를 나선 외신 기자들도 이 점에 주목을 했다.
그래서 세계 민주주의 역사의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6월 항쟁은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시민들의 힘(People's Power)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이른바 '제3의 민주화 물결'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