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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일 오늘의 역사
2020년 영화배우 송재호 세상 떠남(83세
2019년 동료 16명 살해한 북한 어민 2명 판문점 통해 강제 추방
2017년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 한종선 씨 형제복지원 진상규명특별법 통과 요구하며 국회정문 앞에서 농성 시작, 927일 만인 2019.5.20. 과거사법 국회 통과
2015년 ‘영국판 쉰들러 리스트’ 니컬러스 윈턴 경 별세
2015년 중국 시진핑 주석-대만 마잉주 총통 66년만의 첫 정상회담(싱가포르).
2010년 미얀마 20년 만의 총선
미얀마에서 20년 만인 2010년 11월 7일 총선거가 치러졌다. 미얀마 군사정권 당국은 총선을 2주 앞둔 10월 21일 국명(國名)을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 에서 ‘미얀마연방공화국(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 으로 변경하고, 국명과 함께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를 바꾸는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나, 정작 총선은 형식적일 뿐 실질적인 민주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비판을 받았다.
총선 당일 불공정 선거에 항의하는 반군 ‘5여단(Brigade 5)’ 에 의해 관공서가 점령되는 등 선거 후유증이 확산되면서 미얀마 군부는 90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얀마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교전을 피해 인근 태국의 국경도시로 2만명 이상의 난민이 몰려드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총선 후 혼란 및 외부의 불신과 비난에 대한 대응 조치로 미얀마 군부는 1989년 첫 가택연금 이후 약 14년을 양곤 시내 자택에 가택연금 되어있던 아웅산 수치 여사를 총선 일주일 후인 11월 13일 석방했다. 그러나 7일 치뤄진 총선 결과 미얀마 군사정권이 지원하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76.5%의 의석을 차지하며, 군부의 힘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아이티서 학교건물 붕괴 사망 89명
2005년 한국·벨기에 확대정상회담(서울)
2005년 감옥에서 사상 첫 복싱 세계챔피언전
감옥에서 사상 첫 복싱 세계챔피언전 태국의 완니 차이세나(27·사진 오른쪽).
복싱 사상 처음으로 감옥에서 세계 챔피언전이 열렸다.
8일 태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7일 태국 파툼 타니주(州)에 있는 클롱 루엉 형무소에서 세계복싱평의회(WBC) 여자복싱 105파운드 스트로(straw)급 챔피언 결정전이 열렸다.
사상 유례없는 옥 중 챔피언전이 열린 것은 챔피언결정전에 출전한 태국의 완니 차이세나(27)가 이 형무소에서 마약사범으로 복역 중인 죄수이기 때문이다. 3회전짜리 아마추어 복싱 경기를 5번 치른 경력이 전부인 그녀는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일본의 기쿠치 나나코(30)와 맞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애석하게도 7회 TKO로 무릎을 꿇었다.
4년형을 선고받은 완니는 형기를 14개월 남겨놓고 있는데 이번 경기에서 이겨 세계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면 가석방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2004년 이라크 임시정부, 이라크 전역 60일간 비상사태 선포
2004년 중국 뤄양 룽먼석굴서 백제불상 첫 발견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2000년 11월 7일 치러진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이 공화당의 릭 라지오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힐러리는 10%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라지오를 크게 앞질렀다.
딸 첼시와 함께 아내의 당선을 지켜본 클린턴 대통령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힐러리는 “남편과 딸에게 감사한다”고 했을 뿐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힐러리는 라이벌인 라지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명도를 가지고 선거를 시작했지만 쉬운 선거는 아니었다.
유세기간 중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그녀 발목을 붙들었고, 선거 막바지에는 이슬람 단체로부터 선거 자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곤경에 빠졌다. 공화당은 이 이슬람 단체가 예멘에서 발생한 미 구축함 콜호 피격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공세를 펴는 무리수를 둬, 역효과를 냈다. 라지오는 뉴욕에 아무 연고가 없는 힐러리를 ‘철새정치인’으로 몰아붙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비해 힐러리는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 등 불리한 이슈는 피해가면서 뉴욕 유태인들의 표를 거머쥔 조지프 리버만 부통령 후보를 선거에 투입해 성공을 거뒀다.
1998년 조용필 음악30년 콘서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조용필 음악 30년’ 콘서트는 진정한 대중의 스타란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게 만든 감동적 무대였다.
1998년 11월 7일 조용필은 음악 30년을 기념하는 대형 콘서트를 가졌다. 4000석 극장을 가득 메운 공연은 ‘창밖의 여자’가 실린 1980년 1집부터 최근 발표한 17집 ‘야망’까지 조용필 음악 발자취를 자료화면으로 엮은 5분짜리 영상쇼로 시작했다. 관객은 정장 차림 40-50대 중장년 부부부터, 친구나 연인끼리 온 20대 젊은이들, 이 공연을 보려고 일부러 한국을 찾은 일본인 팬도 3백여명이나 됐다.
3일간 계속된 공연에서 관객들은 극장이 떠나갈듯 환호했고, 뜨거운 현장 열기는 10대 인기 댄스그룹 공연장을 방불케 했다. 1시간40분으로 예정했던 공연은 계속된 “앙코르!” 함성에 2시간으로 길어졌다. 한 공연기획자는 “가수는 콘서트를 정기적으로 해야 관객층이 두터워진다는 정설을 보여준 공연”이라고 말하고 “조용필 공연은 절정에 오른 느낌”이라며 “공유할만한 문화적 체험이 드문 우리나라 중산층의 대중문화 사랑을 이끌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열성 여성팬 수십명은 조용필 얼굴을 보려고 공연이 끝난 뒤 1시간 넘도록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1997년 김영삼대통령, 신한국당 탈당
1997년 유학자 류정기 옹 별세
명곡 류정기(88) 도산서원장이 1997년 11월 7일 별세했다. 명곡은 평소 유교의 근본진리 속에서 인류를 구제할 사상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
유림의 고장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전통 유가식 교육을 받은 고인은 독학으로 학문세계를 정립했다. 일제 시절 3개월 만에 일본어를 익힌 뒤 와세다대학을 3년 간 다닌 것이 유일한 근대적 학교교육 경험이다. 영어와 독일어도 독학으로 익힌 그는 자연과학은 학교에서 배워야하지만 인문과학은 독학이 더 좋은 방법인 듯하다고 피력했다.
고인은 `중용사상의 연구` `민주주의론` `유교학원론` 등의 저서를 통해 유교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활용을 널리 알렸고, `필수 천자문`을 펴내 한자 병용론을 역설했다. 또한 `논어신강` `맹자신강` 등 고인의 원전주석서는 동양사상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필독서로 꼽힌다. 고인은 대구대, 충남대 교수를 역임했고 생의 말년까지 동양고전 주석서를 집필했다.
1993년 대전 EXPO 폐막
1992년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두브체크 사망
1968년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1992년 11월 7일 숨졌다. 향년 70세였다. 두브체크의 일생은 불운의 이상과 실패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1921년 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18세에 공산당에 입당한 뒤 2차대전 중엔 공산당의 나치 유격전에 참가, 두 차례 부상하기도 했으며 1958년 소련공산당의 정치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 10년 뒤 체코 공산당의 제1인자가 됐다. 공산당 제1서기가 된 두브체크는 체코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접목시킨 ‘제3의 방법’을 모색했다.
두브체크의 개혁의지는 마침내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자유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조약군은 체코를 전격 침공, ‘프라하의 봄’을 좌절시켰으며 그 후 축출된 두브체크는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약 20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1989년 체코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하벨에게 패배한 뒤 상징적인 연방의회의장이 됐다.
결국 두브체크의 ‘인간적 사회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의 세계에 대한 이상적이고 순수한 비전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1991년 SBS TV방송, 시험전파 발사
1990년 보리사브 요비치 유고 대통령, 동구권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방한
1990년 유태인방위동맹 지도자 카하네 뉴욕서 피살
1984년 신병현 국무총리 권한대행 취임
1983년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공사 따내
1983년 11월 7일, 동아건설이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규모인 32억 9700만 달러의 대수로공사를 리비아에서 수주, 현지에서 계약을 체결했다.
대수로공사는 지름 4mㆍ총길이 1872km의 송수관을 묻어 하루 400만t의 물을 공급, 사막을 옥토로 바꾸기 위한 리비아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2년5개월전 공사 정보를 사전에 귀띔받은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은 사내에 비밀전담반을 설치ㆍ운영하고 21차례나 해외출장을 다니며 직접 뛰었다.
통수식은 연인원 1100만명이 동원되고 550만대의 건설 중장비가 투입된 대역사 끝에 1991년 8월 28일 리비아의 벵가지에서 가졌다. 가다피는 이 공사를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격찬했다. 동아건설은 1989년 2차 공사까지 수주하는데 성공, 1996년 9월 1일에 2차 통수식을 가졌다.
1983년 한국-파키스탄, 국교수립
1982년 서아프리카 오트볼타에 쿠데타
1982년 레바논, 한국에 파병요청
1980년 미국 영화배우 스티브 매퀸 사망
1980년 정치풍토쇄신위 발족. 위원장 김중서 대법원장
1979년 우리나라 첫 일란성 다섯 쌍둥이 태어남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 분만실에서 일란성 다태아로서는 한국 최초인 여아 5쌍둥이가 태어났다. 광주시 동구 계림3동 이모 여인(31)이 임신 7개월째(190일) 만삭증세를 보여 지난 2일 시내 광산동 송산부인과를 찾아 진찰했더니 양수 과다증세가 나타나 전남대 의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전남대 의대 산부인과 의사팀이 X선 촬영을 한 결과 다태아라는 점이 확인됐습니다. 이에 의사팀은 산모의 건강을 위해 조산을 권유했습니다. 산모는 1분 간격으로 여아 4명을 낳고, 또 3분 뒤에 여아 1명을 더 낳았습니다.
다섯 쌍둥이는 인큐베이터에 옮겨져 간호를 받았으나 5명 모두 몸무게가 620g밖에 안 된 미숙아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출산 하루 뒤인 8일 5명 중 3명은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통합지휘하는 군사지휘기관인 한미연합군사령부는 1970년대 초부터 유엔군사령부의 기능축소와 더불어 한국의 방위능력이 향상되면서 창설이 검토되어 오다가 1977년 제10차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설치를 합의하였다
이후 한미 고위장교로 구성된 창설위원회가 조직되어 세부시행계획을 작성하였고 1978년 제11차 안보협의회의에서 양국의 합의로 설치된 한미 군사위원회의 전략지시에 의해 그해 11월7일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사령관은 미국군 대장, 부사령관은 대한민국육군대장이 맡도록 되어 있다
한미 연합군사령부는 상위기관인 한미군사위원회를 통하여 양국의 국가통수 및 지휘기구로부터 전략, 작전지침을 받아 그 기능을 수행한다
즉 한국에 대한 적의 도발이 있을 때 UN과의 토의없이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양국군의 힘만으로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현실화한 것이다
1975년 해군기동연습서 함대함미사일 시험발사 성공
1973년 국민복지연금법안 확정
1972년 닉슨 미국대통령 재선
리처드 M. 닉슨 대통령은 1972년 11월 7일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일반 유권자표의 61% 라는 압도적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재선됐다. 닉슨 대통령은 50개주(州) 중 49개주를 석권, 선거인단 5백21표를 확보해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를 압도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맥거번의 급진은 보수적인 미국민들에 의해 제동이 걸렸지만 맥거번의 등장은 변화를 추구하는 미국 정치의 새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고 그의 공약은 닉슨의 공약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닉슨 대통령은 1946년 캘리포니아주에서 공화당 하원의원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상원의원을 거처 1952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 39세의 젊은 나이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1960년 대통령선거와 1962년 캘리포니아지사선거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1968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1년 가수 배호 세상 떠남
1970년 인천지역 간첩 생포 및 사살사건
인천 율도 발전소 예비군 초병이 해안에서 침투하는 괴한을 발견하고 수하하자, 초병을 살해하고 도주. 출동한 군 병력이 1명 사살, 1명 생포. 피해(전사 2명, 부상 2명)
1962년 주은래, 인도가 중국의 주장선을 인정한다면 국경선에서 중국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통고
1962년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사망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는 그를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이라 했고, 포드 대통령의 부인 베티 포드는 그를 ‘귀감’으로 삼았다고 했다. 열 살 때 고아가 돼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는 운명적으로 루스벨트가(家)의 여성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삼촌이었고,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먼 친척 오빠였다. 그가 다섯 아이를 키우며 내조에 충실하는 동안 남편은 상원의원, 해군성 차관보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현모와 양처를 꿈꿔온 그의 결혼생활은 1918년 남편과 자신의 비서 루시 머서와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이때부터 둘은 평생토록 껍데기만 부부였다. 의례적인 자리 외에는 별거했고, 식사도 따로 했다. 1921년 루스벨트가 소아마비에 걸리면서 엘리너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남편을 대신할 정치적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이제 독립적인 공인이었고 남편과는 정치적인 동반자였다.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엘리너는 신문에 칼럼 ‘마이 데이(My Day)’를 쓰며 때로는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고 또 때로는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정치적으로도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의회에서 증언을 하고, 또 기자회견까지 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루스벨트가 또 다른 여성과 사랑을 속삭일 때 엘리너는 AP통신 여기자 로리나 히콕과 동성애에 빠졌다.
루스벨트가 죽은 뒤에도 그는 미국의 유엔대표로 활약했으며 유엔 인권위 의장으로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했다. 1950년대, KKK단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부를 찾았던 당찬 여성이었다. 1962년 11월 7일, 그녀가 죽었다. 침대 곁에는 버지니아 무어의 시 '프시케'가 놓여 있었고 책상에는 '1918'이 쓰여 있었다. 엘리너가 남편의 외도를 알았던 해였다.
1955년 부산 초량동 공설시장에 불 점포 518개 주택 57동 불 탐
1955년 영국 애틀리 노동당수 사임
1953년 발칸3개국, 조약부속의정서에 조인
1953년 막사이사이, 필리핀대통령에 당선
1952년 레바논, 부녀자에 참정권 부여
1950년 유엔안보리, 한국대표 초청안 가결
1945년 함흥 학생반공의거
1944년 루즈벨트 미대통령 4번 째 당선
1932년 제2차 쌍성보전투
1931년 강서성 서금에서 중화소비에트 임시중앙정부 수립. 주석에 모택동
1923년 대전에서 전국형평사대표자대회
1922년 소련, 코민테른 기념 중앙 라디오 본 방송 개시(소련 라디오방송 정식 개시)
1921년 이탈리아, 국가파쇼당 창당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발생
볼세비키가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러시아 `10월혁명`에 성공했다.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오전 10시, 트로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블라드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일어난 2월혁명 이후 러시아는 지주-부르조아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망명중인 스위스로부터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파인 볼셰비키였지만 꾸준히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레닌의 강력한 요청으로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됐다. 11월 6일 새벽2시, 임시정부 수상 케렌스키가 볼셰비키 신문 인쇄소를 봉쇄하자 트로츠키는 전 부대에 무장봉기를 명령했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적위대가 전화국, 정부청사 등 주요 거점을 무혈 점거했다. 그날밤 열린 제2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미 대세는 다수파인 멘셰비키에서 소수파인 볼셰비키로 기울어 있었다. 곧이어 2차 소비에트 대회가 끝난 7일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가 러시아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를 지배한 혁명군은 11월 8일 새벽2시, 드디어 동궁이 함락시켰다. 소비에트 대회장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오전 6시,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레닌이 기초한 대회선언이 낭독됐다.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이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농민의 정부'가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의회민주주의를 심어보려는 많은 사람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도 훨씬 무자비한 공산당의 독재가 수립되어 70여년이 지나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됐다.
1915년 월북 사학자 김석형 출생
1913년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 사망
1913년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출생
1911년 국세징수령 공포
1908년 어업법 반포
1903년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로렌츠 출생
1901년 청나라 정치가 이홍장 사망
청말의 정치가이자 군사중심의 근대개혁운동인 양무운동의 주역 이홍장이 1901년 11월 7일 사망했다. `의수`라는 호를 가진 이홍장은 중국 안후이성에서 태어났다. 1847년에 진사가 되었고, 1859년에는 중국번의 막료가 됐다.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자 장쑤순무로 발탁되어 상하이지방 보호에 큰 활약을 했다. 군사공업 등의 근대공업 건설에 공을 세웠고, 나라 안으로는 화북지방의 농민반란 진압에 힘썼으며, 밖으로는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신으로 열강들을 서로 견제해 나가면서 열강과의 관계에서 양보와 타협의 양면정책을 펴기도 했다. 1870년부터 25년간 직계 총독 겸 북양 대신으로 재직했다.
텐진조약, 시모노세키조약, 신축조약 등의 조약체결에도 한몫하는 등 외교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1882년에는 조선에 위안스카이를 보내 일본의 진출을 막았고 묄렌도르프, 데니 등의 외국인 고문을 보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도 개입했다.
1879년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출생
비극적인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1879년 11월 7일 남우크라이나의 부유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트로츠키는 오데사대학에 입학했으나 혁명운동에 가담하면서부터 1940년 8월 멕시코에서 피살될 때까지 투옥과 탈출 그리고 망명을 반복했다.
본명이 래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테인인 그가 가명인 트로츠키를 사용한 것은 1902년 시베리아 탈출을 목적으로 한 위조여권을 만들면서부터였다. 독일어 `트로츠`는 반항, 완고, 고집, 과감, 기민 등을 뜻한다. 실제로 트로츠키의 일생도 그의 이름에 걸맞는 생활이었다.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불화, 학교에서는 선동가, 독재치하에서는 혁명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인민의 적인 반혁명분자, 자본주의로부터는 위험한 혁명수출업자로 낙인찍힌 채 지구상의 어느 정권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며 유랑생활만을 거듭한 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트로츠키는 1인자가 되기에는 덕이 모자랐고, 2인자로 남기에는 너무나 열정적이었던 혁명가였다.
1898년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나 1902년 탈주에 성공, 영국으로 망명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속에서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으나 1906년 다시 체포됐다. 1907년 다시 탈주, 국외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통일을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191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17년 2월 혁명후 귀국, 외무인민위원, 군사인민위원, 정치국원을 거쳤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과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스탈린과는 1905년부터 영구혁명론과 일국사회주의로 대립했다.
두 사람의 노선투쟁이 권력투쟁으로 확대되면서 전권을 쥐게 된 스탈린은 1929년 트로츠키를 국외로 추방하는데 성공했다.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거쳐 1937년 1월 트로츠키가 마지막 정치적 피난지로 정착한 곳은 멕시코였다. 그러나 KGB의 집요한 추적은 그를 놓아주지 않아, 1940년 8월 20일 KGB가 보낸 한 밀사에 의해 멕시코 코요아칸 자택에서 피살됐다.
1876년 한글학자 주시경 출생
1867년 마리 퀴리 부인 출생
1856(조선 철종 7) 추사 김정희 세상 떠남
1840년 러시아의 동물학자 알렉산드로 코발레프스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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