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슬픈 삐에로의 자화상, 29×40㎝, 종이에 먹과채색, 2020
■ 파리 몽마르트르
20대부터 명성과 부 쌓은 화가
물감 마르기도前 팔려나갔지만
평론가들로부터 평생 외면받아
날카롭고 폭력적인 검은 선묘
분노의 힘으로 할퀸 붓질일까
광대 얼굴엔 화가가 겹쳐보여
“여기까지다” 끝내 세상과 작별
“저것이 베르나르 뷔페의 집입니다.” 오래된 몽마르트르 올라가는 길목의 단아한 이층집 한 채를 가리키며 당시 한 한국인 미술평론가가 말해줬다.
“생각보다 작네요?” 했더니 그가 웃으며 말한다. “미안, 그의 많은 집 중 하나입니다. 섬 하나가 통째로 그의 것이기도 했죠.”
“집을 모으는 취향이 있었나 보군요.”
“가난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허기에, 전쟁으로 쫓겨 다닌 기억으로 집에 집착했던 것이 아닐까 싶군요.”
“지금 저곳에 그가 살고 있나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죽었죠. 바로 얼마 전에요. 온 세상이 떠들썩했는데 모르고 계셨군요. 저와 만나기로 했는데 그 며칠 전 떠나버렸어요, 그것도 자살로, 투르에 있는 또 다른 집에서 스스로 비닐봉지를 얼굴에 씌워 질식사했죠.”
미술평론가는 파리의 한 미술잡지 발행인이자 뷔페의 절친 파트리스 드라페리에르라는 사람과 가까이 지냈고, 그를 통해 뷔페와의 만남이 약속돼 있었는데 불발됐다는 것, 그리고 그가 죽기 전 열렸던 가르니에 갤러리의 전시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날 뻔했으나 만나지 못했다는 것 등을 장황하다 싶을 만치 설명했다.
몽마르트르 언덕을 함께 걸으며 내가 물었다. “그토록 성공한 화가가 왜 자살을 했을까요.” 질문하고 보니 약간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성공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죠. 그는 20대 때부터 유명한 화가였고 엄청난 명성과 부를 쌓게 됐으니까요. 스스로 그 무게를 감당해내기에 지친 게 아니었을까요.”
문득 카를 마르크스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이를 악물고 가난을 극복하는 사람은 무수히 봤다. 그러나 부(富)를 이겨낸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게다가 파킨슨병을 앓았는데 이를 한사코 숨겼죠. 우울증이 있었음이 틀림없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마지막 한숨처럼 내뱉은 말도 “이젠 지쳤다”라고 전해진다.
미술평론가는 시종 정신 분석적 태도로 뷔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제 추정이지만, 그토록 우레같은 명성과 엄청난 부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로부터 평생 외면받았다는 점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 평단에서는 유독 그에 관해 아주 냉담했고 에둘러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죠. 무려 만 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린 데다가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팔려나가 ‘재벌화가’라는 별호가 붙은 것도 비호감의 원인이었을 겁니다. 당연히 시기와 질투는 평생 양발의 신발처럼 함께 다녔겠고요. 오죽했으면 전시 때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미술평론가들을 향해 그의 아내가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부었겠습니까. 화가 자신도 ‘비평가라는 무리의 악평이나 냉담함으로 내 붓은 꺾이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을 경멸한다’고 했을 만큼 그는 불특정 다수의 사랑은 받았지만 평론가들과는 불화했죠.”
그때 문득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우울하고 폭력적인 그의 검은 선묘들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분노는 나의 힘이었던 셈이군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그 대표적인 다산(多産)작가 베르나르 뷔페의 작품은 아닌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평론가들이 헛발질한 것이었을까. 상업작가, 상품화가, 판박이 매너리즘의 기계적 되풀이라던 뷔페의 작품은 살아생전은 물론 그가 떠나고 나서도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몰랐다. 식기는커녕 더 달아올랐다. 초창기의 ‘어둠을 응시하려 했던 눈’과 ‘인간에 대한 고뇌와 성찰’은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사물마다 날카로운 선만을 오버랩시켜 영혼 없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조롱도 그 불길을 잠재우지 못했다.
내가 가장 큰 규모의 그의 작품을 만난 것은 작년 초여름 서울 예술의전당 ‘베르나르 뷔페, 나는 광대다’ 전시였다. 그는 평생 유독 많은 ‘삐에로’ 연작을 그렸다. 자의식의 투사였을까. 광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거기 화가가 보였다. 웃고 있지만 울 듯 말 듯 슬퍼 보이는 다른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이젠 지쳤다”는 마지막 고백은 행복한 듯 울고 있는 광대의 고백은 아니었을지.
그러고 보면 그의 날카롭고 검은 선은 그의 유약하고 불안한 심리를 가리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선은 나의 칼, 나를 욕하는 자들은 모두 이 칼에 찔리게 될 것이다”라는 무언의 선언 같은 것.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여기까지다”라며 스스로 죽음을 초청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게 온 죽음은 ‘베르나르 뷔페 다시보기’를 불러왔고 뜻밖에도 멀리 일본 쪽에서부터 열광하게 된다. 일본의 버블 경제 때 기업들이 그의 작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일본의 탐미적 신경 줄을 건드렸던 것일까. 그의 날카로운 선에서 무사의 칼 같은 섬광이라도 보게 된 것일까. 베르나르 뷔페에 대한 일본 쪽 열풍은 이렇게 역으로 유럽을 강타했다. 인상파에 대한 동풍이 역시 일본 쪽으로부터 바다 건너 불어왔던 것과 유사하다. 몇백 점의 광대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진 베르나르 뷔페를 생각하다 보면 다분히 자전적인 작품 ‘가면의 고백’을 쓴 미시마 유키오(平岡公威)가 떠오른다. 열두 살에 단편을 썼고 십 대 후반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마흔 살이 되기 전 세 번씩이나 노벨상 후보까지 올랐지만 역시 스스로 ‘죽음’을 불러 피의 의식을 치르며 생을 마감했다. 너무 많은 부(富)가 어둠의 그림자를 함께 데리고 오듯 너무 이른 성취 또한 예술가에게는 독배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면 베르나르 뷔페의 검은 선들은 또 하나의 ‘가면의 고백’이고 ‘내면의 절규’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술평론가의 말에 의하면 그는 평소 사람의 무리를 한사코 피하려 했고 가급적 그의 개인전에까지 나타나지 않으려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나 비평가의 그림자라도 보일라치면 ‘이크, 뛰자’ 하는 식이었단다. 신병(身病)을 비관하며 아내 외에는 누구와의 만남도 피하려 했다는데 죽음의 길에서는 그 마지막 동행자마저 제외됐던 모양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전시 ‘나는 광대다’에는 베르나르 뷔페 일생의 필모그래피가 붓질 속에 녹아있었다. 인생의 시련과 영광, 기쁨과 좌절의 몇 바퀴를 돌면서 쏟아놓은 한숨과 환호, 비판과 눈물과 분노가 분출돼 있었다. 엄청난 부를 거머쥐고 당대 파리 최고의 미녀라는 아내와 살며 세계 각지로부터 몰려오는 딜러들을 처리할 비서진까지 거느린 그가 절규처럼 내뱉은 그 말은 역설적이게도 ‘이젠 지쳤다’였으니 삶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베르나르 뷔페의 성공과 좌절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1928∼1999)의 충격적인 최후는 그의 생애만큼이나 화제였다. 그는 이미 소년 시절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화가였다. 17세 때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다’는 그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첫 개인전을 화랑이 아닌 파리의 작은 서점에서 열었지만 거칠고 사나운 선묘와 고운 색채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그의 그림들은 곧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쓴 시인 랭보에 비견될 만큼의 명성을 얻었다.
마치 고슴도치나 밤송이처럼 날카로운 선으로 외곽을 그린 다음 내부를 채색으로 채우는 방식은 마치 동양화의 수묵채색화를 연상시키기도 했고 곧 파리를 넘어 세계 전역으로 그의 애호가층이 넓어졌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함께 비평가의 혹평들이 쏟아지면서 작가는 깊은 좌절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고 그 위에 신병이 겹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