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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9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보스톤 마라톤영웅 함기용 별세
함기용(1930년 11월14일〜2022년 11월9일)는 대한민국의 육상선수이자 행정가 이다
1930년에 출생하여 1950년 4월20일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1946년에 손기정 선생이 이끈 '마라톤 꿈나무 발굴단'에 뽑혀, 마라톤 선수의 길을 걸은 함 고문은, 1950년 4월 19일 보스턴 마라톤에서 2시간 32분 39초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마라톤 입문 4년 만으로, 풀코스를 네 번밖에 뛰지 않은 이력으로 일군 성과였다 2019년서울특별시 전국체육대회에서는 성화 점화자로 선정하였다. 1936년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고(故) 손기정, 1947년에 보스턴 마라톤에서 정상에 오른 고(故) 서윤복 선생과 함께, 한국 마라톤의 영웅이었다
대한육상경기연맹고문 맡았으며, 전 아산기획 회장을 맡았다.
2021년 대구급 호위함(FFG-Ⅱ) 7번함 '천안함' 진수식
대구급 호위함은 우리 해군의 기존 울산급 호위함(FF·1500톤급)과 포항급 초계함(PCC·1000톤급)을 대체하기 위해 건조되고 있는 2800톤급 신형 호위함이다.
대구급 호위함 1번함 '대구함'은 지난 2016년 진수돼 2018년 해군에 인도됐고, 이후 '경남함' '서울함' '동해함' '대전함' '포항함' 등 총 6척의 차례로 진수돼 해군에 인도됐거나 앞으로 인도될 예정이다. 6번함 '포항함' 진수식은 올 9월 열렸다.
통상 해군 함명은 진수식과 함께 일반에 공개된다. 그러나 신형 호위함 7번함이 '천안함'으로 명명된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제6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사를 통해 직접 밝혔다. 문 대통령은 당시 기념사에서 "해군이 2023년부터 서해를 누빌 신형 호위함 이름으로 '천안함'을 결정했다"며 "'천안함'이 영웅들과 생존 장병들의 투혼을 담아 찬란하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해군이 함선명으로 '천안함'을 사용하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앞서 1949년 미국으로부터 인수한 1800톤급 상륙함이 '천안함'('용화함'에서 개명·1959년 퇴역)으로 명명됐고, 이후 1987년 건조한 포항급 초계함의 이름으로도 '천안함'을 썼다.
이 가운데 초계함 '천안함'은 2010년 3월26일 서해 백령도 남방 해상에서 경계 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선체가 반파되며 침몰했다. '천안함 피격'으로 배에 타고 있던 승조원 104명 가운데 46명이 숨지고, 수색구조 과정에서 한주호 해군 준위도 순직했다.
2018년 마르코스 전 필리핀대통령 부인 이멜다 하원의원(89세) 부패 혐의로 징역 77년 선고
2014년 가수 이승철 일본의 입국거부로 도쿄 하네다공항에 4시간 억류됐다가 강제송환됨
2013년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바이엘 레버쿠젠 공격수 손흥민(21세) 함부르크와의 정규리그 경기에서 해트트릭 해외진출 한국선수 첫 기록
2008년 러시아 핵잠수함 오작동 사고로 20여명 목숨 잃음
2005년 제5차 북핵 6자회담 개막(베이징)
2005년 무형문화재 제31호 탱화장 고재석(81)옹 별세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탱화장(幀畵匠) 고재석(高在奭·81)옹이 9일 오전 8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4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6년 출가, 해남 대흥사에서 화승(畵僧) 김일섭의 문하에서 불화(佛畵)를 배웠으며 금호(錦湖), 보응(普應), 일섭(日燮)을 잇는 근·현대 불화의 4대 금어(金魚·불화 제작의 최고봉)로 활동했다.
전국적으로 탱화장은 광주(무형문화재 제3호)와 전라남도에서 지정했다. 그러나 광주의 송복동이 1998년 사망함에 따라 광주에서는 해제되고, 전라남도 해남의 고재석옹이 그 기능보유자로 보호받고 있었다
2004년 차별과 인종주의에 맞서 싸운 스웨덴 언론인 스티그 라르손 세상 떠남
2001년 일본 자위대, 아프간에 2차대전후 첫 전쟁지역 함대 파견
일본 해상자위대의 함정 3척이 2001년 11월 9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선발대의 임무를 띠고 인도양으로 출발했다. 일본 정부는 8일 안전보장회의를 개최, 정보 수집과 측량 조사를 위해 자위함 3척을 인도양에 우선 파견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자위대가 군사행동을 지원하기 위해 해외에 파견되는 것은 2차대전 이후 처음이었다. 이날 오전 7시께 나가사키현의 사세보항을 떠난 선발대는 구축함 2척과 보급함 1척, 탑재 헬리콥터 4대로 구성됐으며, 승선 병력은 약 700명이다.
이후 25일 함정 3척이 2차 파병됐다. 미군에 대한 물자 공급을 위한 보급함 도와다(8100t급)호와 아프간 난민구호를 위해 파키스탄 카라치항(港)으로 향하는 소해모함(掃海母艦) 우라가(5650t급)호, 호위함 사와기리(3550t급)호가 히로시마(廣島)현 구레(吳)항 등을 출항, 인도양으로 향했다. 이들은 9일 출항한 3척의 1차 함대와 인도양에서 합류, 함께 미군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2000년 국학자 이가원 교수 별세
국학계의 원로 연민 이가원(83) 단국대 석좌교수가 2000년 11월 9일 별세했다. 연민 선생은 가학에서 체득한 한학을 대학 강단으로 계승시킨 이 시대의 탁월한 한학자였다.
지난 1986년에는 평생 모은 귀중한 문화재들을 단국대에 기증함으로써 청빈한 유자(儒者)의 삶을 몸소 실천했다. 연민이 기증한 작품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원본, 겸재 정선의 산수화, 추사 김정희의 낙관 등 3만여 점으로 당시 시가로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퇴계 이황의 14대 손인 연민은 어려서부터 한학에만 몰두하다 뒤늦게 성균관대 국문과에 진학, 신학문을 접했다. 성균관대 국문과 석사 1호·박사1호를 기록하며 모교 강단에 선 연민은 국문학과 한문학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박사학위 논문인 ‘연암소설 연구’는 당시 국문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역저다.
2000년 중국 교개 3왕조(夏왕조-商왕조-왕조周)에 대한 구체적 연표 공식 발표, 하왕조 개국은 기원전 2070년
중국이 그동안 연대가 불분명하던 하(夏)-상(商)-주(周)의 고대 3왕조에 대한 구체적 연표를 2000년 11월 9일 공식 발표했다. 이번 연표는 중국이 1996년 제9차 경제-사회 5개년 계획사업의 하나로 선정, 5년간 2백여명 학자를 동원해 작성한 것이다.
중국 역사 연표는 지금까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근거해 서주(西周)시대 공화(共和) 원년인 기원전 841년을 최고로 했었다. 그 이전 시대에 대한 연표 작성은 사마천 이후 2천여년간 중국 학자들이 노력했지만 개별적 연구여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에따라 중국 정부는 1996년 ‘하-상-주 3왕조 연표조사특별소조’를 구성해 역사학, 고문헌학, 고문자학, 천문학 등 각계 2백여 학자를 동원, 연구활동을 벌였다.
이날 발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치수의 화신인 우(禹)왕은 기원전 2070년 하왕조를 열었고 하왕조는 이후 4백70년간 계속됐다. 중국 학자들은 또 상나라 전기시대는 기원전 1600년부터 1300년까지고 도읍을 은(殷)으로 바꾼 기원전 1300년부터 1046년까지가 상나라 후기시대(은왕조)라고 밝혔다. 서주시대는 기원전 1046년부터 771년까지다. 중국은 이로써 고대왕조의 연표를 기원전 2070년으로 끌어올려 끊어진 고대사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9년 한평생 국내 오페라 개척한 성악대모 김자경 여사 별세
원로 성악가 김자경 여사가 숙환으로 1999년 11월 9일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 여사는 ‘만년 소프라노’였다. “호적이 잘못됐다”며 “나는야 이팔청춘”을 입버릇처럼 외며, 작고하기 전해까지도 고운 한복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우리가곡을 불렀다.
김 여사는 한국 오페라계 산 증인이다. 오페라 ‘토스카’ 아리아처럼,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간 한국 최초 프리마돈나였다. 1917년 황해도 개성에서 목사의 외동딸로 태어나 이화여전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했다.
1948년 1월 국제오페라사가 임원식 지휘로 명동 옛 국립극장서 공연한 한국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춘희)’에 여주인공 비올레타로 출연, ‘영원한 춘희’ 애칭을 얻었다. 1948년 뉴욕 줄리아드음악원에 유학해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했고, 1958년 이화여대음대 교수로 귀국, 1983년까지 많은 성악인재를 길러냈다. 김 여사가 1968년 창단한 김자경 오페라단은 한국 직업오페라단의 대명사다. 첫 공연 ‘라 트라비아타’를 시작으로 정기공연 56회, 소극장공연 600회의 억척무대를 꾸렸다.
창단 무렵만 해도 직업 오페라단이라곤 ‘김자경’ 뿐이었으니, 이땅 반듯한 성악가 치고 연습실 겸했던 서울 대신동 김여사집에서 먹고 자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애칭대로, 그가 지난 8월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서 공연한 ‘라 트라비아타’가 마지막 무대가 됐다. 스스로 “오씨(오페라)와 재혼했다”던 여장부. 짬짬이 완성한 서예작품과 동양화로 전시회를 열어 오페라 제작비를 만들겠다던 성악대모가 이날 갔다.
1996년 한국불교연 이사장 이기영 박사 별세
한국불교학계의 거목인 이기영 박사(74)가 1996년 11월 9일 별세했다. 이기영 박사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불교로 개종, 원효사상 연구에 일가를 이룬 원로 불교학자이다.
1922년 2월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한 이 박사는 1943년 경성대 예과를 수료하고 같은 해 법문학부에서 수학했다. 개화주의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인 부친 추강 이종준 선생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기독교는 이박사의 영원한 신앙이 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 1960년 가톨릭학교인 벨기에 루벵대로 유학가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장남인 그는 동생과 누이 모두를 가톨릭 신자로 만들었으나 정작 자신은 나중에 불교에 들어선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 불교학 연구의 초석을 다지는데 삶을 바쳐왔다. 그는 동국대 영남대 국민대 교수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3부장,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며 후진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지난 1974년엔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해 한국불교연구원을 창립, 지금까지 운영하는 한편 숨을 거두는 날까지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불교방송 이사, 법보신문 고문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96년 금호미술관 개관
새로운 미술문화의 중심지가 될 금호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개관했다. 1996년 11월 9일 금호그룹의 금호재단이 설립한 금호미술관은 서울 관훈동에 있던 금호갤러리를 확장한 것으로 80억원을 들여 2년 만에 연면적 1백80평, 지하3층 지상4층 규모로 완공했다.
미술관은 작품 수장고의 항온항습 시스템 및 이산화탄소를 이용한 화재진압 시설을 설치해 최적의 작품관리가 가능하도록 했다. 금호미술관은 지방작가를 발굴, 지원하고 독특한 문화를 반영하는 지역 미술전을 열어 문화의 과도한 중앙 편중 현상을 해소하는 한편, 역량있는 신예. 기성작가전과 동시대 미술을 진단하고 전망하는 기획전을 통해 우리 미술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취지하에 1989년 관훈동에 개관됐었다
1991년 이브 몽탕 사망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명배우이자 가수인 이브 몽탕이 1991년 11월 9일 심장마비로 향년 70세에 사망했다. 몽탕은 1921년 이탈리아의 몬수마노라는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공산당원이었던 부친이 파시스트에 쫓겨 프랑스 마르세유로 거처를 옮기면서 세 살 때부터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그의 본명은 이보 리비다.
17세 때 본명을 이브 몽탕으로 바꾸고 가수로 데뷔한 그는 카바레를 전전하다가 23세 때 파리 물랭 루즈에서 6살 연상의 에디트 피아트를 만나면서 국민적 가수로 성장했다.
그는 ‘고엽’을 비롯한 수백곡의 주옥같은 샹송을 불렀으며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 ‘영원을 볼 수 있는 맑게 개인 어느날’ 등 50여편의 영화에 출연, 전세계적으로 폭넓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에디트 피아트, 마릴린 먼로 등과 염문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다가 세계적인 여배우인 시몬 시뇨레와 1951년 결혼한 몽탕은 1950년대 시뇨레와 함께 공산주의에 동조하며 진보적 좌익사상을 피력,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던 그는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에 충격을 받고 반공주의자로 전향해 죽을 때까지 전체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는 샹송가수나 명배우의 경지를 뛰어넘어 자유와 정의를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했던 ‘거인’이었다.
1991년 소방의날 제정
소방의 날은 1948년 이후 정부가 시행한 불조심 강조 기간에서 유래했다. 정부는 불조심 강조 기간이 시작되는 11월 1일이면 소방 유공자를 표창하는 등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다만 당시 소방서는 지금처럼 조직화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전국 행사가 아닌 지역 단위로 불조심 캠페인 등의 기념행사가 열렸다
소방의 날이 전국 규모로 정착한 것은 1963년부터다. 내무부 주관으로 11월 1일 소방의 날 행사가 전국 규모로 개최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런 형식이 정착되어 서울에서 소방의 날 기념 거리행진이 열리는 등 규모가 점차 확장되었다. 1991년 12월 <소방법> 개정과 함께 '소방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1963년 소방의 날 행사를 제1회로 포함했으며 날짜를 11월 9일로 변경했다
11월 9일로, 날짜는 119구조대를 상징한다.
1990년 메리 로빈슨, 아일랜드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
이혼과 피임 합법화를 주창해온 좌익계 변호사 메리 로빈슨 여사(46)가 1990년 11월 9일 여성으로서는 아일랜드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로빈슨 여사는 여성과 소수집단의 권리를 지지하는 강력한 소신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지난 1969년 불과 25세의 나이에 아일랜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역사적으로 개신교 대학인 트리니티(삼위일체)대학을 나온 첫 카톨릭신자였다. 그는 이 대학의 최연소 법학교수였고 최연소 상원의원이었다. 발리나시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우세한 매우 보수적인 지방에서 자랐으며, 의사였던 부모는 그를 다른 4명의 남자형제들과 똑같이 키웠다.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공직생활에 뛰어들었다.
그는 지난 1970년 상원에 피임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도입하고 그 후 법안통과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쳤으며, 1976년엔 이혼의 합법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으로 피임은 지난 1979년 정식 혼인한 부부에 한해서 허용됐으며 1985년에는 18세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허용됐으나 이혼만은 지난 1986년에 실시한 국민투표로 여전히 금지됐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동독 군인들이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리고 서독으로 넘어서고 있다.
동서 분단과 냉전체제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 9일 붕괴됐다. 동독내의 개혁열기가 비등하고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대규모 이주가 계속되자 동독 스스로 분단의 벽을 허문 것이다.
베를린 장벽은 지난 1961년 8월 에리히 호네커의 감독 아래 설치돼 동베를린 시민들의 서베를린으로의 탈출을 막았다. 장벽은 폭 50m의 완충지대가 있는 66㎞의 이중철망과 55㎞의 단선철망, 25㎞의 콘크리트벽 등으로 구성됐다. 이 장벽과 구조물들을 제거하는데 4백명의 전문가가 달라붙어 3년이 소요됐으며 1억마르크의 돈이 들었다. 제거된 흙과 시멘트는 무려 75만t이나 됐다.
동서독의 화해분위기는 이미 지난 1963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기해 베를린장벽을 일시 개방,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 인적교류 즉, 주민왕래를 실현시키면서 시작됐다. 이것은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은 분단국 최초의 자유왕래였다. 이를 계기로 양측간에 설치된 ‘철의 장막’은 차근차근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동서독은 교류협력을 통한 민족공동체 의식을 공고히 해나갔다.
첫 인적교류가 이루어진지 1년도 채 안돼 동서독은 1964년 부활절을 계기로 자유왕래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1964년 서독은 서독국민이 제한없이 동독내 어느지역도 방문할 수 있다고 선포했고 동독은 60세이상 연금수혜자에게 서독방문을 허용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양독간의 꾸준한 교류가 계속되는 가운데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 정책을 펼치고 동구권에 민주화 개방화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동서독 통일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1989년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쪽 국경을 개방하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몰려들면서 동독의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가 됐다. 여기에 피난민을 10만 명으로 예상한다는 서독 콜 총리의 발언이 알려지자 동독에서의 탈출은 현대판 엑소더스로 발전했다.
동독의 각 도시에서도 연일 반정부 데모가 이어졌다. 10월 2일 1만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민주화 시위에 유화적인 에곤 크렌트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거세졌다. 시위세력은 10월 30일에는 50만, 11월 4일에는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마침내 11월 9일 , 소련은 동독에 비공산 정권이 들어서도 용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그날 저녁 7시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포함해 모든 경계를 전면개방한다고 발표했다. 동베를린 시민들은 밤10시부터 검문소를 넘기 시작했다.
1989년 중국 최고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 국가주석직 사임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85)이 유일하게 갖고 있던 당(黨)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했다. 1989년 11월 9일 제5차 당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의 사의 표명이 수락돼 이날 공식직책에서 완전 은퇴하게 됐다.
이날 이루어진 인사변동의 핵심은 말할것도 없이 중국권력의 실질상의 무게중심이라 할 수 있는 당중앙군사위 주석자리가 등소평이 6.4천안문 유혈사태 이후 후계자로 지목한 장쩌민(江澤民)으로 바뀌었다는데 있다. 이 자리를 놓고 장쩌민과 군사위상두부 주석이던 양상쿤(楊尙昆)이 경합, 결국 덩샤오핑의 권력승계 계획에 맞선 양상쿤이 권력투쟁에 패배했다.
덩샤오핑은 6·4천안문 유혈사태라는 상처를 중국인에게 남겼지만 그 전후에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78년부터 시작된 덩샤오핑시대는 개혁-개방의 시대로 중국의 개혁을 주도하면서 지금의 경제대국으로 나아가는 중국을 만든 장본인이 됐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했고, 사회주의라는 바탕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경제개혁을 잘 이끌었다.
그러나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정치개혁은 외면, 뒤늦게 개혁에 나섰으나 과감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는 고르바초프에게 밀려 서서히 인민들로부터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덩샤오핑의 시대는 천안문광장 시위때부터 끝나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사임으로 장쩌민은 당총서기와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모두 장악하게돼 덩샤오핑에 이어 최고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됐다.
1989년 한국-멕시코, 경제과학 및 기술협정 체결
1989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군사위 주석에 선출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1989년 11월 9일 중국 군사위 주석에 선출됐다.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에 이어 장쩌민 총서기가 권력의 핵심요직인 군사위 주석직을 승계함에 따라 그는 중국을 이끌어 갈 제3기 지도자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1989년 6월 제13기 4차중전회에서 총서기에 임명된 이래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노리는 양상곤, 진기위 등과의 3파전으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해온 장쩌민은 이날 5차중전회의 공식발표에 따라 중국 권력의 양대 기둥인 당과 군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등소평의 후계자로 확정된 셈이다. 이로써 장쩌민은 1980년 무명으로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 1982년 당중앙위원에 임명된지 7년만에 권력의 정점을 차지했다.
장쩌민은 총서기로 임명되기 이전부터 온건한 테크노라트라는 평을 받아왔다. 영어와 소련어에 능통하며, 이붕보다 더 개방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왔다.
1988년 조지 부시, 제41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
미국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가 1988년 11월 9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압도적인 차로 민주당의 듀카키스 후보를 누르고 제41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시 후보는 4천7백15만9천3백49표를 획득, 40개주에서 승리, 전체선거인수 5백38명 가운데 당선에 필요한 2백70명보다 1백56명이 더 많은 4백26명을 확보했다.
미 공화당은 이로써 40년 만에 연속 3期 집권하게 됐다. 현직 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1836년 마틴 반부렌 대통령에 이어 152년 만에 처음이었다.
부시는 당선이 확정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승리에 대해 “유권자들의 판결은 분명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민주당은 대통령선거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상하원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 민주당의 의회 지배는 변함없게 됐다.
1987년 민주당, 임시전당대회서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후보로 추대
1983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일본 방문, 나카소네 수상과 회담
1981년 노태우 정무장관 유럽-아프리카 13개국 순방 등정
1979년 한국인 선원 20명 탄 일본화물선 일본 근해 침몰, 실종 사망 18명
1970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 사망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이 1970년 11월 9일 사망했다. 1890년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차 대전 때 일선 장교로 참전했다 부상당해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2차 대전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직을 수행하다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런던으로 망명, 그곳에서 대독항전을 독려하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했다.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의 수반, 총리, 국방장관 등을 역임했다.
1947년 조직한 프랑스 국민연합(RDF)이 1951년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했으나 1953년 이를 해체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1958년 6월 다시 총리가 된 드골은 그 해 9월 28일 마침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킨 제5공화국을 발족시켰다. 1958년과 1965년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드골은 NATO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기치로 내걸며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섰고, 캐나다에서는 퀘벡의 독립을 부추겼다.
드골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싫어하는 우익 정치인이었고 다소 독재적인 정치 성향을 띠었지만 사망 후에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그의 ‘위대한 프랑스‘ 건설을 지지하고 있다.
1966년 경북선 철도 개통
1965년 마르코스, 필리핀대통령 당선
1965년 11월 9일 실시된 필리핀 제6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국민당의 대통령후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당선됐다. 이번 선거에서 양당이 내건 선거공약은 대외정책보다도 국내문제인 ‘부정부패의 일소(一掃)’였다. 따라서 오랫동안 고질화된 부정부패에 시달리던 필리핀 국민들은 마카파갈 당시 대통령을 불신하고 마르코스 상원의장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마닐라 출신인 마르코스는 1949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이래 12년간 정치활동을 해왔다. 선거유세기간중 그는 1분간 평균 20번의 악수를 교환하면서 미모의 부인 이멜다 여사와 군중속에서 필리핀 국가를 부르는 등 이색적 선거운동을 벌려 인기를 모았다. 제2차대전 때는 항일 레지스탕스의 선봉장으로 필리핀인 중 가장 많은 무공훈장을 탔다. 또 필리핀 사상 최고득점으로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수재이기도 했다.
그는 12월 30일 취임식에서 불법과 병폐를 일소하기 위해 단호한 정책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1964년 한일회담 와해 및 사회혼란 기도 간첩단 사건
1964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수상에 선출
1963년 일본, 우우타에서 탄광폭발 458명 사망
1961년 에쿠아도르 부통령 아르세메뇨, 대통령으로 승격 선서
1960년 캐네디, 미국 대통령 당선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가 1960년 11월 9일 제3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뉴 프런티어(New Front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미국 국민의 헌신적인 협력을 호소하여 공화당 후보 R.M.닉슨을 누르고 승리했다. 아일랜드계로도 가톨릭으로도 미 최초의 당선이었고, 부통령 자격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제외하면 미 역사상 최연소였다. 선거 결과도 20세기 선거 중 가장 박빙의 승부(49.7% 대 49.5%)로 기록되었다.
케네디는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 출생으로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1946년 매사추세츠주 제11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투신한 후 1952년 같은 구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됐다. 36세이던 1953년 재클린 부비어(24세)와 결혼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1957년 ‘용기있는 사람들’이란 책을 써 퓰리처상을 받는 문재를 보였다. 그리고 처음 도전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케네디는 6,883만 명이 투표한 선거에서 겨우 11만 표만 앞선 간발의 승리라는 것을 의식해, 1961년 1월 20일의 취임에 앞서 닉슨을 찾아갔고 참신한 정책 아이디어를 그러모았다. 취임 후에는 계속 뉴스를 만들어 국민에게 다가갔다. 백악관 기자회견은 웬만하면 생중계했고, 기자회견은 늘 재치와 임기응변으로 넘쳤다. 비록 쿠바 침공 실패로 국제적인 망신을 사긴 했지만 미국적 이상을 실현할 젊고 용기있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1963년 11월 암살될 때까지 불과 2년 10개월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케네디는 핵전쟁을 무릅쓰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복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1963년 7월 소련과 부분 핵실험 금지조약을 성시키고 인종간 갈등이라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늘 희망과 낙관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그 덕에 오늘날까지도 케네디는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미국을 대공황의 수렁에서 건져낸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인에게 자신감을 찾아 준 레이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
1957년 캄보디아 중립법 공포
1957년 소련-인도 경제협력협정 조인
1954년 크메르 독립
1953년 캄보디아, 프랑스로부터 독립
1949년 미국,영국,프랑스 3국 외무장관, 독일문제 회담
1947년 서정주 시인의 시 `국화 옆에서` 경향신문에 발표
1945년 파리서 2차대전 배상회의 개최
1945년 중국 국공내전 시작
1942년 미국, 프랑스와 단교
1938년 나치, 유태인학살 시작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에 의해 주도된 유태인 학살이 1938년 11월 9일부터 독일 전국토에서 자행됐다. 한 유태인 청년이 7일밤 파리 소재 독일대사관원을 사살했고 유태인 전체가 이 범죄에 가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반쯤 미쳐 날뛰던 나치정권은 이날 밤 전독일의 유태인 교회와 상점, 주택에 불을 지르고 수만명의 유태인을 체포했다. 4백여명은 현장에서 무자비하게 살해됐다. 경찰집계에 의하면 814채의 상점, 171채의 주택이 파괴됐고 191채의 유태교 교회가 방화됐다.
이같은 일련의 유태인 박해는 주로 SA대원에 의해 자행됐는데 그들은 이날 밤에만 3만5000여명의 유태인을 체포,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38년 일제, 경제경찰제도 실시
1937년 일본, 상해점령
1926년 이청천 만주에 고려혁명사관학교 세움
1925년 히틀러 '친위대(SS)' 탄생
독일 나치스의 준(準)군사조직인 '친위대(SS)' 가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경호를 위해 1925년 11월 9일 탄생했다.
SS는 독일과 유럽을 정복하려는 히틀러의 계획에 일조했다.
SS의 책임자는 광적인 인종주의자인 헤인리치 힘러였고, 대원들은 독특한 휘장을 단 검은 제복을 착용했다.
활동은 국내외 정보수집, 첩보활동, 경찰업무 등이었다.
SS는 처음에는 300명의 대원으로 출발했으나 나치 집권당시에는 5만명이 넘는 규모로 확대됐다.
1939년에는 25만명으로 증가했다.
SS는 그후 경찰과 인종 업무를 담당하는 일반SS와 일반 군대보다 강도높은 훈련으로 최신 무기와 전투 장비를 두루 갖춘 무장SS로 분리됐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타 인종을 증오하도록 세뇌받은 SS대원들은 2차대전에서 거리낌없이 유대인, 정치범, 집시, 소련 전쟁포로, 폴란드 지도자 등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2차대전 패배후, 전범을 재판하는 뉘른베르크재판에서 범죄단체로 낙인찍혔다
1920년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
1920년 단찌히 자유시 선언
1919년 김원봉 의열단 조직
1919년 11월 9일 중국과 만주 지방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항일독립단체인 의열단이 결성되었다.
암살․파괴 등의 테러를 일으켜 민중폭동을 선동한다는 의도를 가진 소수 결사단체로서 제1차 행동으로 1920년 9월 '부산경찰서투탄의거', 11월 '밀양경찰서투탄의거', 1921년 9월 '조선총독부투탄의거', 1922년 3월 '상해황포탄저격의거' 등의 격렬한 암살․파괴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곧 개인적 테러 활동의 한계가 드러났고, 1924년 사회주의․무정부주의가 유입되면서 탈퇴자가 생겼다.
또한 의열단 내부에서도 그 동안의 성과에 비해 희생이 컸다는 반성이 일어났고, 국내의 대중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이에 맞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이에 1925년 소수에 의한 폐쇄적 비밀결사의 틀을 벗고, 대중 조직에 기반한 무장투쟁노선으로 전환했다.
1926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확대․개편해 활동했으나, 1927년 의열단으로 환원되었다.
1932년 10월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를 개교해 민족혁명의 간부 양성에 주력하다가 1935년 7월 5일 조선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재미대한독립당․ 뉴욕대한민단․미주국민회․하와이국민회․국민동지회 등 민족주의단체가 통합해 조선민족혁명당이 출범됨으로써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18년 독일 노동자 혁명, 빌헬름 2세 퇴위
1918년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사망
1918년 11월 9일,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및 평론가로, 평론 ‘입체파 화가’, ‘신정신’은 모더니즘 예술의 발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시칠리아 왕국의 퇴역 장교였고,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출신이었다. 로마에서 출생한 그는 19세 때 파리로 나와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초기 작품인 시편이나 단편소설에는 당시 여행에서 얻은 인상과 이국의 전설·민화를 주제로 한 것이 많으며, 첫사랑인 영국 여성과의 실연을 감상적으로 노래한 장편의 시도 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M. 자코브, A. 살몽 등의 시인과 피카소, 브라크 등의 화가와 함께 새로운 예술운동을 시작하여, 입체파, 야수파 화가들과 친교를 맺고 여러 잡지에 시·평론·소설을 기고하였다.
새로운 예술과 정신의 고취자이며 실행자인 그의 시에서는 중세 이래 19세기까지의 서정적인 시에서 볼 수 있는 애정·별리·회한 등을 다룬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으나, 그는 확실히 20세기의 새로운 예술창조자의 한 사람이었다.
1917년 창덕궁에 불남
191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배우·발명가 헤디 라마르 태어남
2차 대전 초 작곡가 조지 안실과 함께 연합군 어뢰의 무선유도체계 개발, 라마르의 무선보안 신호체계는 와이파이, CDMA, 블루투스 기술의 기초가 됨, “헤디 라마르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구글, 2014년 국립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오름, 독일의 오늘은 발명의 날
1905년 13도 유생들, 일본공사의 횡포 통박 성명
1899년 소파 방정환 출생
1878년 도산 안창호 출생
1874년 전두엽절제술을 개발한 포루투갈의 신경학자 에가스 모니스 출생
1872년 미국 보스톤에 대화재. 850명 사망
1841년 영국의 왕 에드워드7세 출생
1818년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 출생
1799년 나폴레옹, 쿠데타에 성공
1796(조선 정조 20) 『화성성역의궤』 완성
1801년 김종수가 화성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 6권, 부편(附編) 3권의 10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에 걸친 화성성곽의 축조는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뜻에서 정조가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에게 편찬을 명령,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이어 1801년(순조 1) 9월에 인쇄 발간되었다.
755년 중국 당 나라 안록산의 난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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