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인생은 다양한 순간들과 추억들로 채워진다. 어린 시절의 나는 높은 산에 올라가 사다리를 놓고 장대를 뻗으면 별도 달도 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순수하고 꿈 많았던 그 시절, 하늘은 가까웠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나갔다.
얼마 전, 청춘마트에 들렀다가 오래된 기억의 한 조각과 마주쳤다. 저 멀리서 머리가 하얗게 센 두 사람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어린 시절의 소녀의 형부와 언니였다. 세월의 흔적이 그들의 얼굴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옛날 과자를 납품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 떠올랐다.
비록 그 소녀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그녀는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송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았다. 마치 잊고 있던 옛날 앨범 속 사진처럼, 그 소녀는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아름답게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쉬움으로 남은 추억이 지금도 떠오른다.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봄방학 때의 이야기다. 동네 입구에 있는 모교 초등학교는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친구들과 매일같이 그곳에서 어울려 놀곤 했다.
어느 날, 학교 입구에 택시가 멈췄고, 그곳에서 처음 보는 소녀가 내렸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우와!"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함 속에서 며칠이 흘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혹시 그 애 좋아하냐?" 친구 영철이가 물었다.
"그런데 누구일까?"라고 답했다.
"학교 옆 구멍가게 하는 애기엄마 동생이래. 근화여고에 입학한다던데, 잘해봐."라며 나에게 작은 불씨 하나를 지폈다.
그 소녀는 내게 처음으로 설렘이란 감정을 가르쳐 주었다. 소녀에게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하면 만나줄까?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졌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소녀는 큰 사람 같고, 나는 무지렁이 같았다.
어느 봄비 내리던 날, 나는 친구의 방을 찾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10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편지 한 장 적어줘."
친구는 전생에 문학 소년이었나!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언어의 마술사 같았다.
"잘 되면 보답해라,"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학교 앞 가로등불이 켜져 있었다. 소녀가 타고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소녀가 나타났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편지를 전했다. 뒤돌아오는 발걸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읽어보기나 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 까만 밤이 하얀 밤이 되었다.
두 번째 편지는 말하지도 않았는데, 친구가 꽃 편지봉투에 담아줬다. 고마웠다. 비 오는 밤, 길모퉁이에서 우산을 든 소녀가 나타났다. 떨리는 마음에 꽃 편지봉투를 강제로 맡기듯 소녀에게 건넸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말 한마디 못하는 내가 미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눈앞에 서 있는 소녀를 보았다. 너무나 그리워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소녀가 먼저 내렸다. 나는 시간을 두고 내렸다. 조금 걸었다. 갑자기 나타난 소녀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저기요, 도망만 가지 말고 이야기 좀 해요."
나는 한순간에 만감이 교차했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주눅이 들었다. 소녀는 내 손을 이끌고 그녀가 머무는 대문 앞까지 갔다. 소녀가 웃었다. 아름다웠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소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고, 나도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우리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갑자기 소녀의 형부가 나타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형부는 밥도 안 먹고 뭐 하냐며 다그쳤다. 만남을 뒤로하고 나도 집으로 향했다.
하늘에 별도 달도 따다 주고 싶었다. 영화를 보러 갈까? 바다를 보러 갈까? 계획에 부풀었다.
식목일 날,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다가왔다.
"그럴 줄 몰랐네요. 저에게 도대체 왜 그랬나요?"
두서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울며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방문 종이를 뚫고 방 안을 보고 있었어요. 언니가 오는 걸 보고 도망쳤다는데 제말이 아닌가요?"
소녀는 나를 의심했다. 나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소녀는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만을 내쉬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까? 소녀 언니의 모략이라 생각했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 후로 소녀와 마주칠까 피하고 또 피했다. 오해보다도 소녀가 흘린 눈물이 내겐 더 아팠다.
피우지도 못하고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래도 잠시나마 소녀도 나를 사랑했겠지. 이름도 묻지 못한 그 소녀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 나는 소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모두 시간이 흐르며 변하지만,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소중한 기억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억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이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 소녀와의 사랑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지지 않는 한 송이 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첫댓글 이광호 선생님, 순수한 첫사랑의 글 잘 읽었습니다. 필력이 좋으세요. 시와 수필, 소설 등 많은 글들을 읽어보시면 글쓰기가 한층 쉬워질 것입니다. 기대가 됩니다.
김미진 올림
그리운 날의 편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