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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0일 오늘의 역사
2021년 경북 영양 일원산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 은거지 발견
경북 영양군에서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 선생의 은거지가 발견되었다.
일월산 정상 부근인 해발 1000m 지점에 자리잡은 이 은거지 터는 숨어 지내기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식수로 사용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우물과 샘물도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수령이 150여년된 살구나무도 당시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여명 이상이 집단적으로 생활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최시형 선생은 1863년 동학 1대 교주인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포교의 명을 받고 영해, 안동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해 많은 신도가 함께 했다 당시 최제우 선생은 관군을 피해 호남지방으로 도피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최시형 선생은 같은 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돼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 같은 해 12월 최제우 선생이 체포되자 대구에 잠입,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의 손길이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에 일월산에서 주민들 증언에 의해 은거지가 발견됨으로써 당시 도피처가 태백산이 아닌 일월산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월산 부근에서 60여년을 생활한 마을주민 권모(63)씨는 "예전에 외할머니로부터 당신의 외고조부께서 이곳 은거지에서 동학당 일원으로 같이 은거생활을 했었다"고 증언했다.
2016년 캐나다 가수 레너드 코헨 세상 떠남(82세).
2015년 헬무트 슈미트 독일총리 세상 떠남
2014년 박근혜 대통령-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한중FTA 실질적 타결 선언
2012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교도소에서 폭동이 발생, 27명 사망 43명 부상
2011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308일 만에 노사합의 타결(정리해고자 94명 복직 1년 안 재취업)로 내려옴
2010년 태국 홍수 사망 181명 이재민 3백만 명
2009년 북한, NLL 침범...서해에서 2분간 교전
2009년 11월 10일 오전 11시 22분쯤 서해 대청도 인근 11.3㎞ 해상, 북한 서해함대 8전대 소속 상해급(級)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내려왔다.
대청도를 모(母)기지로 한 서해 2함대 소속 참수리 고속정 325정과 평택 서해 2함대사령부(2함대사)는 곧 두 차례의 경고통신을 했다.
경고통신을 무시한 북한 경비정이 NLL 남쪽 2.2㎞까지 침범을 계속하자 침범 9분 뒤인 11시 36분 참수리 325정은 북한 경비정 앞쪽 약 1㎞ 해상에 40㎜ 보포스 함포 4발로 경고사격을 했다.
곧이어 북한 경비정은 3.2㎞ 떨어진 곳에서 325정을 향해 50여발의 함포탄 공격을 퍼부었다. 북한 경비정의 선제(先制) 사격으로 참수리 325정은 왼쪽 함교(艦橋)에서 조타실 사이 외부 선체에 15발가량을 맞았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우리 해군 함정들은 즉각 응사에 나섰으며, 피격된 참수리 325정을 포함한 고속정 4척과 후방 수역에 있던 1200t급 초계함(PCC) 2척에서 구경 20·40·76㎜ 함포를 최소 200발 이상 퍼부었다.
해(害)를 입은 북한 경비정은 곧이어 퇴각, 11시 40분쯤 NLL을 넘어 북상했다. 교전이 시작된지 2분 만이었다.
우리 군 당국이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에게 경고사격을 한 것은 2004년 이후 5년 만이며 교전은 2002년 이후 7년 만이다. 교전에 나선 참수리 325정은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때 연평도 인근에서 NLL을 침범해 내려오는 북한 경비정에 직접 부딪치며 밀어내기 작전을 폈던 ‘역전의 함정’이다. 북한의 경비정은 만재배수량 131t으로 우리 참수리 고속정(150t)과 비슷한 상해급 경비정이며 구경 37㎜포 2연장(聯裝) 2문, 구경 25㎜포 2연장 2문 등을 갖추고 있었다.
2008년 '대우건설 인수 청탁' 이주성 전 국세청장 체포
2008년 11월 10일 이주성 전(前) 국세청장이 프라임그룹에서 대우건설 인수 로비 명목으로 서울 강남의 19억원대 아파트 한 채를 받은 혐의로 체포됐다. 이 전 청장은 뇌물 수수 과정에서 세계 최고급 가구와 오디오로 자택의 거실과 안방을 꾸미고, 대금 결제를 건설업자에게 맡기거나, 명절에는 주요 인사들에게 전달할 수천만원대 선물리스트를 건설업자에게 건네 대신 보내도록 하는 등의 수법을 사용했다.
프라임그룹이 대우건설 인수를 신청한 직후인 2006년 1월 이 전 청장은 기세도씨에게 “삼성동 인근에 55평 아파트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기씨는 이를 '지시'한 것으로 인식하고 “명의를 누구로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이 전 청장은 측근인 A씨 명의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기씨는 A씨의 처남 명의로 아파트를 구입해 이 전 청장에게 넘겼다고 검찰은 밝혔다.
아파트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기씨는 프라임그룹 측에 50억원을 요구했으나, 프라임 백 회장은 계열사인 프라임상호저축은행에서 20억원을 무담보로 대출해주었다. 대출금은 프라임이 대우건설을 인수한 뒤 5년 이내에 (기씨 소유의 건설업체에) 공사를 주는 방식으로 갚으면 된다고 약속했다. 기씨는 이런 식으로 프라임측으로부터 받은 20억원으로 강남의 55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해 이 전 청장에게 넘겼다.
이 사건으로 부동산을 매개로 하는 등의 새로운 비리 수법이 밝혀지게 되었다.
2005년 제1회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일본 11.10~11.13)
2005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방북
2004년 42세 로저 클레멘스,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7번째 사이영상 수상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42)가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7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클레멘스는 10일(한국시각) 발표된 내셔널리그 사이영 상 투표에서 1위표 23장 등 총 140점을 획득, 97점에 그친 랜디 존슨(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을 물리치고 내셔널리그 최고 투수에 뽑혔다. 클레멘스는 또 지난 78년 당시 만40세로 이 상을 받았던 게일로드 페리의 기록을 넘어서며 내셔널리그 최고령 사이영상 수상자가 됐다.
지난해 시즌 후 뉴욕 양키스에서 은퇴를 선언했다가 이를 번복하고 고향팀 애스트로스 유니폼을 입은 클레멘스는 올시즌 18승(2위) 4패, 방어율 2.98(5위), 탈삼진 218개(5위)를 기록했다. 지난해까지 통산 6차례 사이영 상을 받았던 랜디 존슨은 탈삼진 1위(290개), 방어율 2위(2.60)에 올랐으나 16승14패로 패수가 많아 아쉽게 수상의 영광을 놓쳤다. 클레멘스는 이번 수상으로 1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았다.
2001년 아시아 최대 축구전용구장 '상암구장' 개장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이 2001년 11월 10일 한국 대 크로아티아 대표팀의 경기를 시작으로 문을 열었다. 1998년 11월 착공한 지 3년 만이었다. 6만5555평 부지에 1944억원을 들여 만든 월드컵 경기장은 6만4677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축구전용구장으로 2002년 월드컵 경기 개막 장소이다.
경기장에 들어서면 녹색 그라운드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관람석에서 터치라인까지의 거리가 11m로 잠실 올림픽경기장보다 23m나 짧다. 추위에 강한 ‘켄터키 블루그래스’ 잔디는 3월부터 12월까지 푸른색을 유지한다.
경기장 남북 양쪽에 설치된 가로 25.1m, 세로 9.2m 크기의 대형 전광판은 일본 요코하마 월드컵경기장이나 프랑스 생드니 경기장의 전광판보다 1.5배 밝다. 관람석 90%를 덮고 있는 지붕은 높이 67m로 한강을 상징하는 황포돛배와 방패연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85m 높이의 철제기둥 16개에 연결된 케이블이 지붕을 잡아당기게 만들어 관람석과 분리돼 있다.
2001년 중국 세계무역기구(WTO)에 정식 가입
세계무역기구(WTO)의 제4차 각료회의가 2001년 11월 9일 오후 중동 카타르의 수도(首都) 도하에서 한국을 포함, 전세계 142개국 회원국 대표들과 NGO(비정부기구) 등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됐다.
미국, 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은 이곳에서 13일까지 `뉴라운드(New Round)`의 출범 여부를 결정하는 협상을 갖고, 시장개방을 둘러싼 각국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총성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이번 회의에서 인구 13억의 중국이 11월 10일 오후 WTO 정식회원으로 가입해 글로벌 경제체제에 본격 참여하게 됐다. 대만도 하루 뒤인 11일 회원국 가입을 승인받았다.
WTO 가입에 따른 중국 거대시장의 개방은 `21세기가 제공하는 첫번째 호(好)기회`였다. 인구 13억, 국내총생산(GDP) 1조7백억달러(2000년 기준)의 경제는 누구나 군침을 삼킬 만한 시장이었다. WTO 가입으로 중국의 무역이 2005년에 가면 6천억달러로 늘어나리라고 전망했다. 그 결과 중국이 동북아의 성장과 번영에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는 최근 수년의 추세는 더욱 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2000년 국내 최대길이 서해대교 개통
서해안고속도로 아산만을 통과하는 서해대교가 7년 공사 끝에 완공돼 2000년 11월 10일 개통됐다. 서해대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로 7,310m, 폭 31.4m 왕복 6차선이다. 세계에서는 아홉번째로 긴 다리다.
서해안고속도로의 경기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에서 충남 당진군 송악면 복운리간 아산만 바닷길 20리를 이어주고 있다. 1993년 11월 착공돼 7년만에 완공된 이 다리는 총 공사비 6천7백억원, 연인원 2백20만명이 투입됐다. 이 다리의 꽃은 단연 중앙부분의 사장교(斜張橋)이다. 사장교는 교량가운데 주탑에 케이블을 매달아 교량 상판을 지탱하는 형태다. 주탑의 높이 182m는 서울 여의도 63빌딩과 맞먹는다.
이 다리 개통으로 서울에서 당진까지의 통행시간이 30분 이상 단축된 1시간 10분정도 소요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교통체증이 심각해 시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개통에만 급급해 주변 국도와의 연계망 미비와 톨게이트 시설 부족 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1997년 디지털 TRS 상용서비스 개시
업무용 이동통신서비스인 주파수공용통신(TRS)이 디지털방식으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용서비스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상용화한 TRS 서비스가 중국 상하이 지역에 진출하게 되었다.
TRS 전국사업자인 아남텔레콤은 10일부터 디지털 TRS 서비스인 ‘비즈니스콜’ 상용서비스에 돌입했다. 이 회사는 이를 위해 서울·수도권과 부산·경남권에 교환국 2개소와 기지국 22개소 설치를 완료했다고 10일 밝혔다.
아남텔레콤은 서비스 초기 음성-데이터 통합서비스와 차량위치추적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또 앞으로 무선 신용카드 조회, 무선 팩스/삐삐 수신전환, 음성인식 다이얼, 음성사서함, 인터넷정보서비스, 교통·날씨정보서비스 등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개발, 제공할 계획이다.
아남텔레콤은 지난 5월 전국적 인화물운송망을 구축하고 있는 공영복합화물터미널과 앞으로 3년간 1만대 규모의 ‘비즈니스콜’ 서비스 제공 계약을 체결했으며 유통업 분야의 신세계백화점, 택시운수 분야의 의정부개인택시조합 등과도 계약을 체결했다.
다만 지오텍사 제품을 사용하는 단말기의 경우 차량 장착용인 IMW 모델이 현재 약 300대에 불과하고 가격도 70만원대로 조금 비싼게 흠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남은 현재 22개의 기지국 수를 98년까지 50여개로 늘리고 2001년까지는 교환국 10여개소, 기지국 125개소를 설치해 완벽한 전국적 서비스에 나설 예정이다.
한편 ‘비즈니스콜’ 요금은 표준요금 기준으로 음성서비스는 기본료 월 1만원에 통화료는 10초당 19원이며, 데이터서비스의 경우 기본료 월 1만 5,000원에 통화료는 2,000패킷(1패킷 = 영문으로 32자)까지는 패킷당 3원이 부과된다.
1990년 민중당 창당
1989년 토도르 지브코프 불가리아 서기장 사임. 후임에 페타르 믈라데노프
1987년 최성권 한북수 씨 필리핀 루손 섬에서 납치
1983년 MS, GUI 운용체계(OS) 윈도우 최초 공개
1982년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 사망
스탈린 이후 최장기인 18년동안 소련을 통치해 온 브레즈네프가 1982년 11월 10일 사망했다. 76세였다.
그는 흐루시초프의 뒤를 이어 당 제1서기에 취임한 1964년 10월 이후 18년동안 소련의 지도자로 군림, 국제긴장 완화와 평화공존 이른바 ‘브레즈네프노선’을 추진해 왔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소련의 국민생활은 완만하게 개선되었지만 ‘정체의 시대’도 있었다. 농공업 대책은 결실을 보지 못했고 1975년 흉작때는 생산고가 많이 떨어져 제2차대전 후 최악의 식량부족에 시달리기도 했다. 공산당 간부의 고령화로 특권층의 부패가 만연하기도 했다. 외교면에서는 동서 긴장완화에 힘써 SALT(전략무기제한협정)I과 II를 타결하기도 했다. 스탈린과 같은 공포정치는 행사하지 않았지만 반대파를 정신병원에 감금시키도 했다.
1979년 최규하 대행 특별 담화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지 보름이 지난 1979년 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시국에 관한 특별 담화문'을 발표한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우선 국가보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최 권한대행은 담화문에서 헌법에 규정된 시일 내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특별 담화는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사회안정과 국가 안보를 위해 발표됐다.
1979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77년 한국여자배구 월드컵대회서 최초의 소련팀 격파
1977년 북한외교관, 밀수사건으로 노르웨이서 추방
1973년 자카르타서 제1회 신생국경기대회 개최
1965년 문화대혁명의 발단이 된 눈문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 문회보에 발표
문화대혁명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논문이 1965년 11월 10일 4인방중 한명인 요문원에 의해 일간지 ‘문회보’에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논문은 이틀뒤 ‘해방일보’에도 실렸다. 이것이 그후 10년에 이르는 ‘문화대혁명’의 봉화였다. 논문은 ‘4인방’의 지원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암묵적인 지지하에 작성됐다. 해서파관(해서가 관에서 파면 당하다)은 수도 북경의 부시장으로 명대사 전문가인 오함이 1960년에 썼던 경극 각본의 타이틀이다. 요문원의 논문은 그것을 비판한 것이다.
해서(海瑞)는 황제가 백성을 돌보지 않는 것을 충간했기 때문에 노여움을 사서 파면, 투옥된 명조 가정제(1507-1566)시대의 고관이다. 요문원은 논문에서 ‘해서파관’과 이것이 쓰여진 당시의 우익적 풍조를 연결시켜 비판을 전개했다. 즉, 요문원은 오함이 해서를 미화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봉건시대의 공직자를 긍정해서 묘사한 오함은 지주계급국가를 미화해 혁명을 불필요로 하는 계급조화론을 선전했고 ‘해서파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에 반하는 독초라고 지적했다.
국내적으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유소기 등의 실권파에 몰리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의해 고립되고 있던 마오쩌둥의 지지와 묵인하에 이 논문이 게재되었다는 사실을 당시로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해서파관’은 반당분자인 팽덕회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통해 실권파에 대한 정치투쟁을 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마오쩌둥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기자협회보 창간
1963년 설악산에 불(6일간 불탐)
1961년 최고위, 장면 전총리의 연금 해제와 불기소 발표
1956년 진보당 창당. 위원장 조봉암, 간사장 윤길중
제1공화국 민주당 창당에서 배척된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이 1956년 11월 10일 서울시 공관에서 진보당 결당식을 가졌다. 이날 결당식에서는 책임있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정강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조봉암, 간사장에 윤길중 등 임원을 선출했다.
그러나 정강정책중 특히 `평화통일론`과 그 구체적 방안으로써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은 북한이 주장하는 ‘중립국 감시위원단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과 같다는 혐의로 1958년 2월 정당등록이 취소됐다. 그후 조봉암은 자유당 정권에 의해 날조된 간첩혐의로 사형에 처해졌고 당은 해체됐다
1955년 메디칼센터 설치결정
1952년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 사표제출
1951년 미국 뉴저지-캘리포니아간 직통 전화 최초 성공
미국 뉴저지주 전화 가입자들이 새로운 번호를 받았다.
기존의 다섯 자리 고유번호에 두 자리 지역번호를 받은 것.
전화 교환수의 도움 없이도 자동으로 가입자끼리 연결해주는 장거리 자동전화(DDDㆍ Direct Distance Dialing)가 첫선을 보인 순간이다.
이전까지 장거리 통화는 교환원를 통하는 간접 방식.
연필깎이 손잡이같이 생긴 전화 레버를 돌려 교환원을 호출한 다음 상대방 번호를 알려주면 교환원이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옛 방식은 대기시간이 길었다.
통화량이 많아지거나 장거리라면 30분 이상 기다리는 경우도 많았다.
산간 벽지나 오지의 가입자들은 교환대를 여러 차례 거쳐야 했다. 당연히 통화 품질도 나빴다.
교환원의 수작업 과정을 없앤 DDD는 곧 미국 내 11개 도시로 퍼지고 바다를 건넜다.
미국이 주도한 '북미 전화번호(North American Numbering Plan) 규격화' 사업에는 미국과 캐나다, 카리브해 일대의 도서국가 등이 참여해 양질의 국제전화망을 구성했다.
전자화가 진행되고 휴대폰 사용이 크게 늘어도 장거리 통신망의 일부로서 DDD는 여전히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역번호가 없어지면 첨단기기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DDD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71년 3월. 서울과 부산을 교환원 없이 통화할 수 있는 광역통신망으로 묶었다.
서독의 차관으로 1965년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예산부족으로 지연을 거듭해 6년이 늦춰져서야 DDD시대가 열렸다.
시외전화의 전화번호 앞자리에 '0'이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출발이 늦었어도 한국은 1990년 중후반부터 유무선 통신강국으로 꼽힌다.
광섬유 케이블, 전자동교환기 설치 등 인프라에 투자한 덕분이다.
1951년 미-영-불-터키 방위기구 설치계획을 발표
1950년 한-미 화폐환율 2,500대 1로 인상
1942년 소련군, 대독일 공세 강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인 스탈린그라드 전투 !
1942년 오늘 !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점령하고 있는 독일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해 카프카스 지방의 유전을 장악하려 했던 독일군 !
겨울이 다가오고 보급품이 줄어들자 위기에 빠졌다.
소련군은 이 틈을 타 독일군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면서 맹공격을 펼친다.
독일군도 거센 저항을 했지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석 달 뒤인 1945년 2월 !
독일군은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채 마침내 항복했다
1939년 일제, 창씨개명제 공포
창씨개명은 신사참배와 조선어 폐지에 이은 일제 ‘황민화 정책’의 완결편이었다.
따라서 창씨개명의 목적은 조선의 전통적인 부계혈통 관계를 해체시키고 일본식의
씨단위 국가로 만들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흐려놓으려는 것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을 없애 징병제를 수월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도 시급한 일이었다.
1939년 11월 10일 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적용되던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기본법규)’을 개정해 창씨개명을 구체화시켰다.
1940년 2월 11일부터 6개월간 신고하도록 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신청률이
7.6%에 불과하자 일제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당시 총독부는 ‘창씨개명은 강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고 이에 대해 2002년 일본
자민당 아소 다로 의원은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먼저 원해서 시작됐다”는 발언을
했지만, 총독부는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인들의 저조한 신청를을 높이기 위해 압력을
가했다. 2003년 8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견된 일제시대 부산의 지방재판소장이
관내 기관장들에게 창씨 신청률이 저조하다면서 주민 전원의 창씨 신청을 독려한
사실이 담긴 행정문서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6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사람이 인구의 80.5%에 이르렀다.
하지만 창씨개명 기간동안 이에 대한 반발로 전남 곡성의 유건영과 같이 자살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자녀 입학부터 가족 취직, 행정서류 접수까지 온갖 일이 걸려 있어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 중, 자신의 창씨개명을 비하하여 성을 ‘이누노코(犬子·개새끼)’
라고 하거나, 김(金)은 가네다(金田) 가네무라(金村)라는 식으로 흔적을 남기거나,
(崔)는 요시야마(佳山) 식으로 파자(破字)하는 방법이 등장했다.
창씨개명제의 공포는 조선인들이 일본인으로 혼동하기 쉬운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1911년 10월 공포한 조선총독부령 124호 ‘조선인의 성명개칭에 관한
건’과 함께 일제의 동화정책 속에 차별을 내포한 것이었다. 일제는 가족관계를
해체시키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며 식민지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하는 근거로서 이름의 ‘차이화’를 사용한 것이다.
1938년 케말 파샤 터키 초대 대통령 사망
터키의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가 재임중이던 1938년 11월 10일 이스탄불에서 사망했다. 파샤는 고급관료에게 붙는 칭호로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다. 1934년 터키 국회가 증정한 칭호 ‘케말 아타튀르크’로도 불리웠는데 이는 ‘터키의 아버지’란 뜻이다.
케말 파샤는 청년기부터 혁명단체에 가입하여 개혁에 관심이 많았다. 1911년부터 1912년까지는 이탈리아∼터키전에 참가해 공을 세워, 전후 불가리아의 소피아 대사관 무관이 되었다, 1차대전에도 참가, 다아다넬즈 해협 지대의 겔리볼루에 상륙한 영·프 연합군을 격파하는 등의 공을 세워 대령으로 승진했다.
1차대전후 그리스가 이즈미르 지방을 침입하자 케말 파샤는 ‘애나토울리아 루멜리아 권리 옹호단’을 조직, 이에 저항했다. 결국 소련의 도움으로 그리스군은 사카리아에서 물러났다. 그 후 터키는 연합국과 로잔조약을 체결, 터어키 공화국을 설립할 수 있었고 케말파샤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케말 파샤는 대통령, 최고군사령관, 국민회의 의장, 국민당 당수를 지내며 터키 근대화에 공헌했다.
1937년 브라질 신헌법 공포. 독재 성립
1934년 중국 국민정부군, 서금 점령
1921년 시인 남궁벽 세상 떠남
1920년 조선교육령 개정 공포
1919년 김원봉 의열단 창단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의 길림에서 황상규의 지도와 김원봉의 주도로 단원 13명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되었다. 창립 단원의 거의 반수는 경남 밀양 태생으로, 대부분 밀양 동화학교 출신이었다.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공작을 주 임무로 삼았는데, 암살 대상과 파괴 대상을 명확히 한정하고 있었다. 특히 의열단은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총독부와 총독, 그리고 식민통치기관들을 직접 겨냥한 거사에 주력했다.
의열단의 초기 의거들로는 밀양 폭탄 사건, 박재혁 의거, 최수봉 의거가 있다.
밀양 폭탄 사건은 김원봉과 이성우가 1920년 5월 폭탄 13개를 의류상자 속에 섞어서 부산으로 보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당시 김원봉 외 2인을 제외한 의열단원 전원이 국내로 잠입하여 거사를 준비했는데, 6월 16일 서울 인사동에서 회의 중에 경기도 경찰부 경부 김태석과 부하들의 급습을 받아 곽재기, 이성우, 황상규, 윤세주 등 6명이 체포되었다. 부산과 마산으로 내려간 단원들도 잇따라 검거되었고, 폭탄 13개, 권총과 탄환 등도 모두 압수되었다. 이 사건으로 총 20명이 검거되어 15명이 기소되었으며, 곽재기, 이성우는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의열단이 거사에 처음 성공한 것은 1920년 9월 14일 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서장을 절명케 한 사건이었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박재혁은 상하이로 건너가 1920년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쓰시마 섬을 거쳐 부산에 들어온 뒤 고서상으로 위장하고 부산경찰서를 찾아갔다. 서장과 마주앉아 고서를 꺼내는 척하던 박재혁은 폭탄을 꺼내 안전장치를 풀고 마룻바닥에 던졌다. 서장은 폭탄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고, 병원으로 옮기는 중 사망했다. 박재혁도 무릎뼈에 부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1921년 5월 단식투쟁 끝에 순국했다.
밀양 폭탄 사건 당시 검거망을 벗어났던 이종암, 김상윤은 최수봉, 최경학을 포섭하여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게 했다. 최수봉은 1920년 11월 김상윤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이종암과 김상윤이 제조해준 폭탄 2개를 받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조회 시간에 이를 던졌다. 2개의 폭탄 가운데 하나는 터졌지만 위력이 크지 않았고, 하나는 터지지 않았다. 최수봉은 결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21년 7월 8일 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1915년 동경 유학생 이광수, 신익희, 장덕수 등 조선학회 설립
1914년 함경도에 홍수 사상 629명 피해가옥 28,414호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체결
1905.11.10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임명하여 우리 나라에 보내서 정부를 협박하여 강제로 맺은 다섯 개 조항으로 된 조약.
조약의 내용은 외교권의 접수, 통감부의 설치, 한국 황실(皇室)의 보호 등으로 되어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의 대외 교섭이 끊어지고 통감 정치가 실시되었다.
한편 전 국민의 애국심에 불타는 반대 운동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1904년 경부선 철도 완공
경부선이 1901년(광무5)에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착공하여 1904년 11월 10일 완공, 개통됐다. 길이 445.6km, 1898년에 조선정부로부터 경부선 부설권을 받아낸 일본이 조선인을 부설공사에 인부로 강제동원하고 침목 등의 목재를 남벌해서 사용하는 등 약탈적인 방법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싼 값으로 건설됐다.
조선민족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부설된 경부선은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으로 일본과 연결되었으며, 1906년(광무10) 경의선과도 연결되어 신의주까지 직통했다. 1911년부터 한(韓)-만(滿)간에 직통급행을 운행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제선이 되었으며, 1913년 시베리아라를 거쳐 유럽 각국과의 화물운송을 담당했고, 1933년에는 부산-심양사이에 국제급행 ‘히카리’를 운행, 이듬해는 장춘까지 연장했다. 또 1939년 부산~북경 사이에 국제급행 ‘고아’ ‘다이리쿠’를 운행하고 같은 해 복선을 준공했다.
1891년 프랑스 천재 시인 랭보 사망
프랑스의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1891년 11월 10일 37세로 항구도시 마르세이유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인 베를렌느와의 동성애, 지독한 음주벽과 방랑벽, 아프리카에서의 무기 밀매상으로 이어진 기이한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이미 16세에 천재 시인으로 등장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로 불리면서 반항과 방랑의 짧은 인생을 보냈지만 ‘취한 배’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등의 시들을 통해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초기의 습작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15세부터 20세 사이에 쓴 것들이다. 1870년 16세 때 샤를빌 중학교에 새로 부임해온 젊은 교사 이장바르에게 문학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어머니와 평범한 시골생활에 대한 반항심에서 당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와중에도 불구하고 1870∼71년 사이에 파리와 벨기에로 3번이나 가출했다 돌아오기도 했다.
1871년 5월 그는 시인으로서 특이한 방법론적 각성을 경험했다. 그는 이것을 이장바르와 친구에게 써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보는 사람의 편지’(1871)이다. 그 해 여름에는 12음절 100행으로 된 장시 ‘명정선’을 썼으며, 1872∼75년에는 그의 시경의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1872)을 발표했다.
1888년 유럽열국, 아프리카 노예무역 금지결의
1871년 스탠리, 리빙스턴 구해내
리빙스턴은 5년간이나 바깥세상과 소식이 끊겨 있었다. 16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1856년 이미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고, 탐험기가 7만권이나 팔려나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유명인사였다. 사자에게 물려 평생 왼팔을 들지 못하면서도 아프리카의 동서를 육로로 가로질러 대서양과 인도양을 모두 바라보고, 발견한 호수를 ‘빅토리아 호수’로 이름지어 여왕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토록 알린 것도 리빙스턴이었다.
그런데 네 번째 탐험길을 떠난 1866년부터 소식이 끊긴 것이다. 뉴욕헤럴드가 그를 찾기 위해 통신원 스탠리를 파견했다. 1년이나 밀림 속을 찾아헤맨 스탠리가 1871년 11월 10일 그를 발견했을 때 리빙스턴은 영양실조와 말라리아로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둔 처참한 모습이었다.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 “예, 당신을 이곳에서 만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이 짧은 대화에서 서양인들은 지금까지도 감동을 느낀다고 한다.
스탠리는 5개월 뒤 떠나고 리빙스턴은 현지에 남아 나일강의 수원을 찾다가 2년 뒤인 1873년 5월 1일 현지에서 숨졌다. 선교와 노예무역을 뿌리뽑기 위해 아프리카에 온 지 33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주민들은 그의 심장과 내장을 빼내 아프리카에 묻고 주검은 말려서 미라로 만들어 영국으로 보냈다. 미라 시신은 1874년 4월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1851년 근대 발생학의 창시자인 영국의 동물학자 밸푸어 출생
1775년 대륙의회 결정으로 미국해병대 창설
1759년 독일 극작가 쉴러 출생
1728년 영국 시인 골드스미스 태어남
1541년 스위스 의학자 겸 화학자 파라셀수스 사망
1483년 독일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출생
1453년 계유정란 발생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이 당시 훈로(勳老)였던 김종서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유정난이라 한다.
1389년 고려, 지진 발생
BC289 맹자 세상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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