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元始祖 自字 成字 先祖의 齋室 陽岳齋 竣工文.
-人物 略史 - 上代系譜 사진 및 '찾아 오는길' : 5매
안녕하세요 ?
존경하는 광주이씨 종원(廣州李씨 宗員)님 !
우리 문중(門中)의
원시조 자자 성자(元始祖 自字 成字) 할아버지의 齋室이
이제야 준공(竣工)을 보게되었습니다.
많은 일가(一家) 여러분의 참석으로
자랑스러운 명예와 자긍심을 키우는
뜻 깊은 자리에 함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 일시 : 2015. 10. 25(日. 음력 9. 13) 10 : 00 ~ 15 : 00
□. 장소 : 京畿道 利川市 麻長面 冠3里 218-1 번지. 양악산(陽岳山 = 陽角山) 중턱,
元始祖 自字 成字 선조의 묘소 아래( 찾아오는 길 : 아래 복사분 참조)
□. 참석자 : 각 파종회 종원 및 전국청장년연합회원과 광역시 광친회원
□. 일정 :
―. 시제 (時祭) : 10 : 00 ~ 11 : 00
―. 준공식(竣工式) : 11 : 10 ~ 12 : 00
―. 중식시간(中食時間) : 12 : 10 ~ 13 : 00
―. 축하공연(祝賀公演) : 13 : 00 ~ 15 : 00
―. 폐회 : 15 : 00
□. 연락처 : 042) 488 -9500. 489 -6088. 010-9981-4020.(김효경 부장)
□. 내년(2016. 5월)에 예정된 '3개광역시(대구. 광주. 대전) 연합광친회' 정기 모임이
본 행사와 통합하여 실시하게 됨에 따라 일정이 앞당겨졌음을
아울러 알려 드리오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 당일 시향(時享) 및
재실 준공식(齋室 竣工式) 행사 운영에 참고하기 위하여
지역 및 파종회, 청장년연합회, 광역시광친회별 책임자께서는 참석 인원을
위 연락처로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廣州李氏 元始祖 自成公 齋室
陽岳齋 竣工文과 人物 略史
신라 17대 내물왕 때 내사령을 지내신 廣州李씨 元始祖 自成公을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관3리 양악산(양각산) 남쪽 금맥의 자리에 영원토록 모시었네.
신라시대의 관직도 소명(疏明)하게 밝히고.
광주이씨를 현창(顯彰)했으니.
아! 높고 넓으신 음덕(陰德)이 내려졌고
위대한 자손이 오래도록 규범(規範)을 지켜서
성(姓)을 받아 천년이 지났으나
시조(始祖)의 상징(象徵)이 남아있고
수많은 자손의 훌륭한 업적들이 화려하게 빛이 났으니.
이러한 조상이 있었기에 이런 자손이 있어서.
이 같은 단(壇)을 만들고 이 같은 집을 지었네.
조상의 영(靈)이 계신데 제사(祭祀)를 그만 둘 수 있겠는가?
자손도 많이 번창했고 조상의 음덕도 한이 없구나.
공손(恭遜)하게 생각하니
자성공(自成公)은 광주이씨 성(廣州李氏 姓)을 받은 始祖여서
만세를 이어갈 기틀을 만드시고
천추(千秋)에 이 같은 업적을 남기시어
세상에 훌륭한 학자가 여러분 나시었고
높은 관직을 지내시고 위국충절(爲國忠節)과 효제(孝悌)의 인재가
대대로 이어졌네.
공손하게 생각하면
혈식군자(血食君子)이신 율정공 휘 이관의(栗亭公 諱 李寬義)는
손수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으시고
많은 제자들에 경전(經典)을 가르치셨으며
이곳 관동(冠洞)에 묘역(墓域)이 아직까지 보존(保存)이 되었고
이곳 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을 받으시니
백대(百代)에 맑은 기풍(氣風)을 남기시고
한 시대에 높으신 학자여서 많은 후손들의 존경심이 지극하며
훌륭한 자손들의 뜻으로 재원(財源)을 마련하니 매우 훌륭한 일이네.
둔촌공 휘 이집(遁村公 諱 李集)에 대한 당시 위인(偉人)
목은 이색(牧隱李穡)은 “성인(聖人)의 도를 얻은 사람”이다.라고 했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는
“세속을 초월하여 고결(高潔)한 경지에 있는 사람”으로 표현했으며,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은 “호연(浩然)의 기(氣)를 체득(體得)한 사람이다.”
라고 말했으며,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은
“의사(義士)로서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호정 하륜(浩亭 河崙)은 『둔촌 잡영(遁村 雜詠)』에서
그 머리말을 쓰면서 회상한 글을 보면,
“선생의 용모(容貌)는 장중(莊重)하고 강의(剛毅)해 보였으며
기품(氣稟)은 꽉 짜이면서 준수(俊秀)하였고
음성(音聲)은 옥(玉)이 구르는듯 하면서 명확하고 유창(流暢)하여
나는 내심 몹시 기이(奇異)하게 느꼈었다.” 라고 그 인품을 말했다.
"당시에 왕실은 점차 기울어져 가고 사변(事變)은 자주 일고 있었는데도 충
성(忠誠)과 효도(孝道)를 다 이루었고 참고 참아 가면서
인정(人情)과 의리(義理)를 극진하게 이루었으니
그 뜻은 금석(金石)과도 같고 기백(氣魄)은 하늘에 닿을것 같다." 라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評했듯이 지극한 효심과 혼란한 나라 정세에
걱정을 아끼지 않던 충정(忠情) 한(限)이 없으셨다.
휘 이당(諱 李唐)의 넷째 아들인 휘 자령 십운과공(諱 自齡 十韻科公)
공은 휘 건(虔)으로 개명하였으며 호(號)가 퇴촌(退村)으로 고려말에 판서에 오르시고,
그 증손인 휘 두신(退村 諱 斗信)은 조선조 초에 문과급제하여 공조판서에 올랐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손자인 경성도호 부사 휘 경유(諱 耕유)는 단종왕의 12인 순절신으로
현재 순절제신사적(殉節諸臣事蹟)에 수록되어있고,
그 아들 3형제까지 화(禍)를 당하였다.
휘 경유의 조부 퇴촌 휘 두신(退村 諱 斗信)은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숙종왕 때 복권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둔촌의 3남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장남 탄천 휘 이지직(炭川 諱 李之直)은
태종조에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며 형조참의(刑曹參議)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에 이르렀고,
차남 휘 지강(文肅公, 諱 之剛)은 우참찬 겸 대사헌(右參贊 兼 大司憲),
3남 휘 지유(牧使公, 諱 之柔)는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네,
이른바 "삼자팔손구문과(三子八孫俱文科)"라고 하여
세 아들과 여덟명의 손자가 문과에 올라 판서(判書)를 지냈고,
아울러 그 후손이 나날이 번창(繁昌)하여 동양(東洋)의 명문가(名門家)를 이루고
훌륭한 정훈(庭訓)을 남기시어 대대로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배출했네.
또한 고려조 문신 석탄공 휘 이양중(石灘公 諱 李養中),
그 아우 암탄공 휘 이양몽(巖灘公 諱 李養蒙)은
어린시절부터 芳遠(朝鮮朝 太宗)과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었으나
고려 충신(忠臣)으로 역모(逆謀)와 거리를 두고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杜門洞)에 은거
72현으로 남아 절의(節義)를 끝까지 지킴으로 杜門不出이라는 말이 비롯되게 하였고,
역사의 인물로 두분의 음덕을 기려 재사명(齋舍名)을 고덕재(高德齋)라 銘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송백(松柏)같은 公의 높은 절의(節義)가 태산(泰山)같음을
후손에게 기리 깨우쳐 공경(恭敬)의 念을 갖게 하였네.
광릉부원군 우봉 휘 이극배 영상(廣陵府院君 牛峰 諱 李克培 領相)은
충희공 우의정 휘 인손(忠僖公 右議政 諱 仁孫)의 5형제 중 장남으로
재간과 도량이 크고 깊고 뜻과 생각이 견고했으며 경학(經學)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행정재능도 겸비하고 사사로이 손님을 받지 않았고 가무(歌舞)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고,
북방 야인정벌(北方 野人征伐)에 출전하였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흉년에 진휼사(賑恤使)로 활약하고, 관찰사를 두번,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두루 거치고, 병조판서를 네번이나 역임하였으며,
세종대왕으로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왕을 섬기면서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고 도덕정치를 실천하며
남에 얘기를 먼저 듣는 영상으로 유명하시네.
차남 휘 극감(次男 諱 克堪)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고 廣城君.
삼남 휘 극증(3男 諱 克增)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올라 廣川君.
사남 휘 극돈(4男 諱 克墩)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을 역임 廣原君.
오남 휘 극균(5男 諱 克均)은 좌의정(左議政)을 지내 廣南君으로 封君되시었지요.
충정공 동고 휘 이준경 영상(忠政公 東皐 諱 李浚慶 領相)은
조선중기 명재상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광양군 세좌(廣陽君 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시며,
증조는 형조판서 좌익공신 광성군 문경공 극감(廣城君 文景公 克堪)이고,
우의정 충희공 인손(右議政 忠僖公 仁孫)의 현손(玄孫)으로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화(禍)를 당하시게 됨에 이에 연좌되어 형 윤경(潤慶, 崇德齊公, 兵曹判書)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는 고난을 겪으시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6세 때부터
재종형 탄수 휘 이연경(灘叟 諱 李延慶)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우시고,
1531년(중종 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1558년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되시고.
공의 어짊과 관찰력이 탁월하여 수행한 공로 중에
훈구파(勳舊派)에서 사림파(士林派)로 정치권력이 옮겨가는 과도기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1572년(선조 5년) 임종 전에 국가경영에 관한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차(遺箚 :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箚子= 上疏文>)를 올리시어
그 중 붕당(朋黨)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難局)에 빠질것이라는 내용이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李珥), 류성룡(柳成龍)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으나,
이 예언(豫言)은 몇 년 후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현실화되어
동고 영상(東皐 領相)의 관찰력이 옳았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시는 등
명재상으로 기록되었다.
한음 휘 이덕형 상공(漢陰 諱 李德馨 相公)은
충희공 우의정 이인손,
좌의정공 휘 극균(左議政公 諱 克均) 부자가 정승을 지냈는데,
공에게 5대조이신 이극균이 연산조 1504년(甲子年) 억울한 화(禍)를 입은바 있다.
한음상공은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뛰어나서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淳厚)하면서도 조심성이 있어
8세에 즈음해서는
어렵고 의심스러운 점을 지껄이는 짓이 어린이가 하는 짓이 아니었으며,
15세가 되기도 전에 뛰어나게 성취하였는데,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때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 이산해의 작은 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하며,
한음 상공은 선조대와 광해군 때 두차례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국난의 위기상황 중에
정치, 외교, 군사, 사회 등등 분야에서 활약하신 혁혁한 공로는
역사의 인물로 그 위대한 업적이 역사 책에도 기록된
선조(宣祖)는 임진왜란을 평정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중흥의 대업을 회복하였는바,
한음상공에 대한 뭇 사람들의 칭송은 드높았으며 이어 선조는
덕을 같이한 이와 협심해서 위아래가 함께하여 오직 나라만을 위하고 일신을 바친분 중에
한음 이덕형 상공(漢陰 李德馨 相公)이 실은 제일이었다.라고하시었다.
특히 한음 상공의 부인 한산이씨(韓山李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 내려 자결하는 절의를 지키셨다.
광남군 충장공 휘 이광악(廣南君 忠壯公 諱 李光岳) 將軍은
정효공 탄수 휘 이연경(貞孝公 灘叟 諱 李延慶)의 손자로서
조선 중기 무신으로 활약중 임진왜란 때 진주성 1차전 승리의 선봉을 필두로
영호남은 물론 그후 기외지역을 포함 100여 차례 전투에 참여하여
공로를 이룸에 따라
임진왜란 승전의 선무공신(宣武功臣) 18명중 한분으로 선정되었으며,
그리고 전라병마절도사, 훈련원도정, 경기방어사 재임 중에
특히 함경도 병마절도사시에는 여진족 정벌에서 혁혁한 전승(戰勝) 등으로
일평생을 국난극복에 뛰어난 忠節을 다한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이시었다.
문익공 귀암 휘 이원정 이조판서(文翼公 歸巖 諱 李元禎. 刑曹, 戶曹, 吏曹判書)는
당대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약 40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고,
현재 종가에는 고문서 . 전적류 약 2500 점이 보관되어 있으니,
3대에 걸친 고신류(告身類 : 敎旨類)가 300장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재직시 도체부(都體府) 설치와 조세제도(租稅制度) 개설 및
인재양성(人材養成)에 힘쓰며 주장한 그 업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아버지는 사간원 사간 휘 도장(諱 道長)이시고,
문익공의 아들 휘 담명(諱 聃命)은
경상도 관찰사 재직시 기근에 처한 백성을 구한 일로
훗날 그를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워 진것은
지금까지 전해 져 내려오는 매우 유명한 일화로 이어지고 있다.
내첨사판관 휘 이수완(內僉寺判官 諱 李秀莞) 양진재공(養眞齋公)은
5대조 둔촌으로부터 高祖 형조우참의공 청백리 휘 지직,
曾祖 우의정 충희공 휘 인손(諱 仁孫), 祖父 좌찬성 광원군 휘 극돈(諱 克墩),
아버지 병조참의 휘 세정(諱 世貞), 아들 휘 유창(諱 維昌), 손자 등등
9대에 걸쳐 한번도 빠짐없이 문과에 급제를 하였으며
조선역사에 보기드문 내력을 이루게 한 청렴강개한 성품과 효행으로 인망이 높았으며
전라남도 보성(寶城)의 입향조(入鄕祖)이시기도 하다.
충주. 해주 목사공 어은 휘 이만형(忠州. 海州 牧使公 漁隱 諱 李萬亨)은
광릉부원군 휘 극배(廣陵府院君 諱 克培)의 7대손으로
충후정직(忠厚正直)한 성품에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도덕문장이 당세에 칭송을 받았고,
함열 현감을 거쳐 충주. 해주목사 재임시에 흉년으로 기근이 왔을 때에
'동짓달에 보리 줄기 하나에서 두가지가 오르는 일이 생겼다.' 라고 하여
이에 백성들이 이르기를 어진 정치로 백성을 교화하고
크게 덕을 베푸시어 '양맥공', 청백리라 불렀다. 大田地域 入鄕祖이시다.
정암 휘 이종훈(正菴 諱 李鍾勳) 義士는
젊은 시절부터 동학농민운동, 갑진개혁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하며
1919. 3. 1 운동 33인 민족대표 중 최고령으로 참여하였으며,
천도교 혁신파(天道敎 革新派)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고려혁명위원회에 고문으로
죽는날까지 일제 압제하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자랑스런 義士였다.
일몽 휘 이수택(一夢 諱 李壽澤) 義士는
칠곡 출생으로 서울 普惠學校를 중퇴하고 1919. 3. 1. 운동참가 후,
만주로 망명 吉林省에서 金元鳳, 尹致衡, 韓鳳根, 李鍾岩, 尹世胄, 李成宇,
郭在驥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의 주요기관을 습격, 친일분자 암살 등 독립운동을 전개,
1924년 국내에 잠입 밀양폭탄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2년 6개월 옥고를 치렀네.
대통령 표창. 건국포장 애국장 추서받은 열혈 독립운동 의사이시다.
도대장 성제 휘 이백래(都大將 省齊 諱 李白來. 寶城 출생) 義士는
한말 화순쌍산(韓末 和順双山) 항일 의병활동시 도대장 이백래가 주축이 되어
湖南 倡義所에서 왜경에 대항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한 공적이 혁혁하였고,
창의소 자리는 호남의병뿐만이 아니라
한말 의병사에 빛나는 문화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함께한 廣州人은 위 창의소 독립운동 활약에
이병화. 이홍래. 이용래. 이용식. 이용태. 이용식. 이양재. 이경원.
이남재. 이정재. 이종학 등이었으며,
이들 독립의사 중 특히 광주인 3인조인 이홍래. 이용태. 이종학 등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척왜상소(斥倭上訴) 상경하여
대종교 창시자(大倧敎 創始者) 羅喆. 오기한. 임병찬. 최익현. 이훈 선생들과 함께
을사 5적에 대한 주살을 모의하고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암살하기 위해
寺洞 安家에 은신 저격하였으나 실패함에 체포되어 이종학은 교수형을 받았다.
이들은 이듬해 호남창의소 항일의병을 지휘하여
전남 일대 독립군 자금 준비, 왜병의 기관 습격, 친일파 제거 등
독립운동 의병활동을 계속 하였다.
기외에도
운암 휘 이병택(雲唵 諱 李秉澤. 충주 출생).
단암 휘 이용태(丹菴 諱 李容兌. 충주출생.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추서)
여산 휘 이용준(如山 諱 李容俊. 충주출생.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휘 이종건(諱 李鍾乾.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님 등이
조국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으로 목숨을 걸고 희생된 의사들이시다.
광주이씨의 수 많은 인재들이
그 시대마다 文.武에서 보여준 국난극복(國難克復)을 위해
뛰어난 충절을 다해 일생을 바친 이들을
어찌 다 열거 할 수 있을까 만은 돌이켜보면,
조선의 학통을 이끄신
광안군 정효공 탄수 휘 연경(廣安君 貞孝公 灘叟 諱 延慶) 선생은
"典故方 3권"에 보면 유현연원도(儒賢淵源圖) 상에
성리학 창시자 圃隱 鄭夢周로부터 冶隱 吉再, 江湖 金淑滋, 佔畢齋 金宗直,
寒暄堂 金宏弼, 靜庵 趙光祖로 이어지면서
탄수 휘 이연경(灘叟 諱 李延慶) 선생의 문인(門人)으로는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이지란(李之蘭), 이산보(李山甫),
養心堂 趙晟(양심당 조성), 윤정숙(尹鼎淑),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 후에 영의정), 주천 강유선(舟川 康有善), 중계 심건(重啓 沈鍵),
숭덕재 윤경(崇德齋 潤慶. 후에 병조판서), 동고 준경(東皐 浚慶. 후에 영의정)... ,
등등의 인재를 배출한 자품(姿稟)이 높고 덕망(德望)과 지조(志操)가 있어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고 시종 불변(始終 不變)한 사림(士林)의 스승이셨다.
영남 유림의 대가인 석담 휘 이윤우(石潭 諱 李潤雨),
예조참판 복암 휘 이기양(伏菴 諱 李基讓),
조선후기 정통 성리학자 묵헌 휘 이만운(默軒 諱 李萬運) 선조님이 계신가 하면,
청백리 가문(淸白吏 家門)을 이끄신 분들로서는
이조참판공 휘 지(吏曹參判公 諱 知),
려말조선초 문신 형조우참의공 탄천 휘 지직(刑曹右參議公 炭川 諱 之直),
대사헌 및 이조참의공 휘 중경(吏曹參議公 諱 重慶),
대사헌 및 공조판서 휘 하원(工曹判書公 諱 夏源),
한성판윤 농은 휘 의만(漢城判尹 農隱 諱 宜晩, 忠正公 東皐 浚慶 相公의 5代孫) 등이 계시며,
임진왜란 때
충장공 휘 광악 장군(忠壯公 諱 光岳 將軍)과
관서부원수 장렬공 휘 윤덕(關西副元帥 壯烈公 諱 潤德),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하고 정묘호란 때 안주성(安州城)에서
전사한 충민공 휘 상안(忠愍公 諱 尙安) 등등,
조선조(朝鮮朝)에
문과 급제자가 1백88명, 무과 급제자 2백 74명을 내었고,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6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네.
위 선조님들 외에도
문. 무(文 . 武)와 예(藝)에 뛰어 나신
수많은 선조님과 종원님들이 계시기에
시대는 변해도 광주이씨 문중이 사회로 부터 존숭을 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학문 계열의 인문학 및 자연과학과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법조, 의학..,등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뛰어난 인재가 속출되어 있음을 어찌 다 기록하랴 만,
아래 이 시대에 걸출한 인재 세 사람을 배출하였네.
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하는 행정부 수반인
제29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신 이수성(李壽成) 종원은
전 서울대학교 총장.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민주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등과
특히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직을 수행할 때
효창원에 白凡記念館을 신축 하는데 예산 확보 등 큰 역할도 하셨네.
사법부의 수장인
제14대 대법원장 이용훈(李容勳) 종원은
전 대법관을 역임하시고 전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등과
특히 대법원장 재임시에는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 신뢰 받는 공정한 재판,
미래를 준비하는 사법부를 만드는데 앞장을 섯다네.
(주)삼영화학 명예회장이시고 (재)관정교육장학재단 명예이사장 이종환
(冠廷敎育奬學財團 名譽理事長 李鍾煥, 94歲) 종원은
스위스가 특별한 자원없이 세계 최고의 부(富)를 일궈낸 비결이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는데 자극을 받아 인생의 목표를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인재들이 없도록 돕는 사업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로 평생 모은 개인의 재산 대부분인 8,600억원을
30여년 동안 5,500여명에게 국외유학 및 국내장학금으로 제공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개인장학재단을 만들어 낸 자랑스런 문중의 별이다.
더욱이 인권을 세우기 위한 도덕,
그리고 정치, 경제, 국방, 과학, 사회, 문화,예술, 체육...등등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국가 발전에 기여한 광주이씨 종원이
혁혁(赫赫)한 공로(功勞)를 세우는 일이
곳곳에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나고 있음은
모두가 훌륭하신 선조님의 음덕(陰德)으로 이루어 짐이
하늘의 뜻을 스스로 알고 있음이 아닌가 하며,
앞으로 8,000만 한민족의 숙원이요.
세계 자유인(世界 自由人)의 바람인
한반도 자유평화통일 성업(韓半島의 自由平和統一 聖業)에 기여하는 큰 일꾼이
廣州李씨 門中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네.
광주이씨의 특별한 화수회(花樹會)의 정신도 매우 아름답구나.
이 일을 이룩하려고 논의(論議)가 정해졌고
감당할 수 있는 재원(財源)이 마련되어서
주춧돌을 놓을 때부터
제사를 모시는 것을 생각해서 마음속으로 설계를 하고
커다란 집을 상상하면서 묘역 앞에 터를 잡고 갑오년에 시작 했으니
윗대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한량(限量)이 없고
후손에게 물려주는 뜻도 끝이 없는 일이네.
잇달아 기술자를 불러서 건축의 책임을 주니,
주위에 아름다운 산들은 하례하는 기색이 더해지고
옥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물소리 더욱 맑은 메아리로 들려오니 산수의 풍경은
공자(孔子)님 고향의 풍경과 흡사하고
묘역을 가꾼 나무들은 주자(朱子) 고향의 운치와 같네.
지형은 높은 것 같으면서 아늑하니 항상 무지개가 서린 풍경이고
산은 멀면서도 아름답고 鮮明하니 제비와 기러기 소리 수시로 들려오고.
사안석(謝安石)의 고향인 동산에 자손이 살아가는 것과 같이
이곳에 자손이 살고 허자춘(許子春)의 남쪽들과 같은 농지에
제사를 받들 곡식이 생산되고,
소나무 목재에 조각을 한 집은
요(堯) 임금님 때에 수편(隨便) 같은 기술자가 시공(施工)을 하고
부연(附椽)을 달아서 장식을 하니
맹자님 때 공수(公輸) 같은 솜씨 군(群)이 완공을 하게 되었네.
사간장(斯干章)에서 말하는 대나무가 둘러선 모습을 칭송하고
높은 기둥에 날아 갈 것 같은 규모로 지어서 기와 덮고
흙 발라 준공하니 화려한 모습 이루어졌네.
후손이 제사 올리니 장미 꽃 이슬에 손을 씻고 향(香) 피우고
축 읽는 의식(儀式) 다 이루며 먼 조상(윗대 선조) 잊지 않고 받드는 것은
자양(紫陽) 선생의 훈계를 따른 것이고
해마다 제사 올리면서 재물을 준비하는 것은 箕子(기자)님의 풍속(風俗)이라네.
경건하고 화목하게 줄지어 옛 모습 갖춘 분이어서.
패옥(佩玉) 소리 들리면서 좌우에서 정성으로 돕고
원로 분은 질서 있게 의젓한 모습 지으시니
신라왕의 능 같이 묘는 여천지무궁(輿天地無窮)토록 존재할 것이고
자손들의 추모 정성(追慕 精誠)은 공자님의 묘 같이 이어갈 것이다.
집을 지어 조상을 모시는 자리 만드니
조상의 영(靈)이 강림(降臨)할 것이다.
광이문중의 인재들이 펼쳐온 찬란한 역정을 이루 다 옮길 수 없어
위와같이 줄여 간략하게 기록함을 양해 바라오며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온 광이문중의 자손이 더욱 번창할 것을 바라는
육위(六位)의 글귀로 된 아랑곡(兒郞曲)을 아래에 옮겨 길(吉)함을 노래부른다.
동으로 향해 아랑곡 불러본다.
금 까마귀가 들어있는 태양이 동창에 붉게 비치니
밝은 광채가 새 집에 먼저 들어오네.
선명한 하늘의 기운이 땅의 서기와 융합이 되고.
서쪽으로 향해 아랑곡 불러본다.
금으로 생긴 산봉우리에 무지개 채색이 서려서
온 세상 놀빛이 묘역에 서리니
아침에는 봉황이 울고 저녁에는 란 새가 운다.
남으로 향해 아랑곡 불러본다.
팔도의 중앙에 위치해서 모든 것을 다 구비했으니
금수강산이 아름답고 화려한데.
속리산에서 올라온 용이 돌아앉은 곳이라고 말을 하네.
북으로 향해 아랑곡 불러본다.
광주이씨 관향의 고을은 서울의 인근인데
한 넝쿨에 열린 많은 자손 팔도에 퍼져서
화려한 가문의 명성 영원토록 전해질 것이다.
하늘로 향해서 아랑곡 불러본다.
저 푸른 하늘 한량없는 복을 내리시어
해마다 화수회가 번창하고
온 성씨가 영광이 생기고 위씨(韋氏)보다 더 장한 친목을 도모할 것이다.
아래쪽으로 향해서 아랑곡 불러본다.
산 아래 평평한 옥토가 있어서 모든 곡식들이 풍년이 들고
거기에 옥(玉)을 심어 자라나니
영원(永遠)토록 패옥(佩玉)을 울리는 자손(子孫) 끝이지 않을 것이다.
준공 후(竣工 後)에 엎드려 바라는 것은
하늘의 정기(精氣)가 서린 곳이라 복(福)이 내리고
땅의 영기(靈氣) 모여서 상서(祥瑞)로운 발복(發福)이 나니
어진사람 때를 지어 태어나서
세상을 바로잡는 기풍(氣風)을 만들고 모두와 화합(和合)하여
백성에 은택(恩澤)이 되는 일을 해서
몇 십대의 오래된 조상에게도 향념(向念)을 가지게 되면
조상(祖上)의 은덕(恩德)이
만대 천대(萬代 千代)까지 보호(保護) 받도록 간절히 기원합니다.
글을 마치면서
종원의 일원으로서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사서(史書)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하여 소사(小史)를 이기하였고
아울러 양악재 건축으로 대종사에 큰공을 희생적으로 이룬것은
율정공대종회 도유사 근수(栗亭公大宗會 都有司 根守)님이
그 동안 원시조 자성공(元始祖 自成公)의 재실이 없는 것을
평생 부끄럽게 생각하여 오던바 자비(自費)로 완공하게 되었음을 밝히며,
종친의 한사람으로서 감동을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거룩한 종사에
몇자 첨어 하는 바입니다.
2015. 10.
광성군 문경공 휘 극자 감자(廣城君 文景公 諱 克字 堪字)의 18代 孫
廣州李씨 대전지역종친회 수석부회장 겸 광친회장 明鍾(鍾字 行列) 書.
위 사진 3매 설명 :
-.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관3리 산 218 - 1번지.
양악산( = 양각산 = 陽角山)에 2015. 10. 25일 준공을 앞두고 있는
廣州李씨 원시조 자성공(元始祖 自成公)의 재실 양악재(陽岳齋) 모습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원시조 자성공의 묘소 및 재실이 있는 위치가 표시된 "찾아 오는 길" 약도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광주이씨 상대계보(上代系譜)입니다.
첫댓글 글 잘읽었습니다만 한가지 청백리는 5인이 아니라 6인으로 정조때부터 청백리로 추서 되었으나 사양하다 철종임금에 의해 청백리로 추서 된[한성판윤 의만공]이
있습니다 역사적사실을 과장은 말아야겠지만 축소도 하면 안되죠 역사적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용바라며
광이회보8월호 청백리기사를 참조하시여 수정바랍니다
正載 21대(동고천미공계의만공의손) 님 !
아 ! ~
모르고 있었던 부분을 알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위 자료들은 인터넷 검색상에서 찾은 것이오니 오해 없도록 바랍니다.
훌륭한 선조의 역정이 더 많이 그 발굴자료가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그 누가 선조의 위업에 대하여 축소하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
님은 전에 대전에 거주하신다는 댓글을 보고
전화 번호를 알려 드린적이 있습니다.
위 원시조 재실 준공식 내용에 전화번호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시조 제실을 마련한것에 대하여 후손으로 축하감읍합니다...원시조 연구는 중요하며...우리 문중의 뿌리를 알고 선양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감사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사재를 들어서라도 원시조를 상징하는 무엇을 생각했는데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의 아들은 다섯아들이고 전부 문과 등과했으나 현존 아들은 둔촌과 자령의 아들 손입니다..자령은 후에 개명하여 휘 건으로 호는 퇴촌이며, 고려 판서입니다..
연동(추증 판서 )-봉로(추증 영의정)를 거쳐 諱 斗信(은 둔촌집안의 16극 1용 1두과 같은 항렬로, 세종조 문과, 工曹判書이며 후에 계유정난에 삭탈관직,피화 장흥에 유배되었습니다.추증 영의정) 넣어주길 바랍니다.
십운과공파 파시조 휘 자령이 빠짐
이민영 종원님 !
위에 댓글로 지적하신 내용
"십운과공 虔으로 개명 건..., 휘 두신 공조판서 건...등
그 손자 경성도호부 부사 경유의 계유정난 순절신...등
숙종왕 때 복권후 영의정 추증 건 ...등등
십운과공파 이천희 도유사와 이주일 문화유사와 전화하여
보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발문이든 축문에서, 후손기록 열거는, 諱 漢공과 팔극/3원항렬과 같으신 율정공등과 후손 ,諱 당公의 둔촌공과 팔극/3원후손, 諱 당公의 십운공과 諱 두신, 삭암탄공파의 시조 諱 양몽과 후손, 諱 양중과 후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민영 님 !
늘 모르고 있는 선조의 훌륭한 업적을 가르쳐 주신데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함이 많은 제가
훌륭한 선조의 약사를 올리려하니 미흡한 점이 많네요.
고맙고 감사한 마음
다시 한번 전해 올린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0.25.에는 만사 제쳐두고 꼭 참석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