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참된 회심>
구원의 마리 헬레나 지음
I. 하느님의 계획
3. 인간의 자유의지(뜻) (2)
하느님의 뜻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뜻)를 주셨고, 주신 그 댓가로 예수님은 고통을 겪으며 죽음까지 겪으셨다. 인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이 자유 없이 인간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강요 받는 사랑은 강요받는 그 시점부터 이젠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한 인간의 뜻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상급으로 어찌나 푸짐한 갚음으로 갚아주시는지, 일은 하느님이 다 하시고도 그것을 마치 인간이 한 것처럼(스스로의 의지로 동의한 댓가로) 높이 쳐 주시는 것이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가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면 저주가 내릴 것이다"(신명기 11,26-28).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이란 마귀가 시킨대로 "너희 스스로가 하느님이 되어라.”를 하는 것이다. 또는 나 스스로가 만든 신들이나 우상화시킨 것들인 축구나, 유행, 노래, 게임 등으로 우리를 열광시키는 것들이다. 넋 놓고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고무풍선처럼 속없이 가볍고 마치 속이 빈 쭉정이 같음을 느끼게 되어갈 것이다. 지금처럼 매스컴으로 여론을 조장하고 휘몰아 가는 시대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 기도 가운데 깨어 있으면서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자신이 그 뜻 안에 잠겨 사는지 아니면 하느님 뜻 밖에서 자기를 즐겁게 할 또 다른 하느님을 찾으며 서성거리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좋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한귀로 듣고 흘러 듣는다.
여기서 우리는 편의상 용어를 정리하기 위하여 하느님 받은 선물인 이 자유의지(뜻)를 제대로 하느님 뜻에 부합하여 사용했을 때의 자기를 하느님의 모상(참 자아)이라 부르기로 하고 하느님 뜻을 떠나 자기 나름으로 스스로의 힘과 방법을 통해 하느님이 되려고 할 때를 가면 쓴 자아(거짓자아, 우상, 자기중심적 자아)라 부르기로 하자. 그러나 이 뜻(자유의지)은 하나뿐이기에 동시에 똑같이 두 모습을 가질 수는 없다.
하느님의 모상(참 자아)이면서 가면 쓴 자아(거짓자아) 일수는 없다는 뜻이다. 어느 한편에 더 중점을 두는가의 비중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다. 회개란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법과 방향으로 자기 스스로 하느님인양 하던 것을 그만두고 참 하느님이신 분(조물주)께 자녀로서의 태도(피조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조물주(하느님) 행사하는 것이 가면 쓴 자아(ego 거짓자아)의 특성이다. 따라서 회개는 외적인 어떤 것 담배, 술 끊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하느님께 대한 반항, 하느님 뜻을 알면서도 슬쩍 자기 좋을 대로 하려는 어떤 것에 대한 욕구, 내 주장, 내 방식을 고집하는 것들을 잘 인식하고 찾아내어 그것을 털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가면 쓴 인간의 뜻(ego)에서 돌아서기 때문이다.
자신의 갈망, 애정, 기호, 생각, 사랑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면 나의 뜻(의지)이, 하느님의 모상(참 자아)쪽으로 흘러가는지 가면 쓴 자아(거짓자아) 쪽으로 흘러 가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어떤 선한 것, 거룩한 것을 가면처럼 둘러쓰고 실제로는 자기(ego)가 잇속을 찾으면서도 잘 모르는 게 인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황님은 이를 “영적 세속성"이라 칭하면서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더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라 그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복음의 기쁨 93항).
예를 들면 거룩한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면서도 자기 이름(명예)을 강론 잘한다는 평을 찾을 수도 있고 열심히 궂은일을 하면서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ego) 착하고 헌신적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면의 지향이 중요한 것이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그 사람의 지향과 동기를 먼저 셈한다. 좋은 지향과 동기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일을 다 못 마쳐도 한 것처럼 셈해주시는 분이다. 어떤 사람은 거액의 큰 애긍을 시사하는데 그 목적은 자신이 자선에 관대한 자라고 보이기 위해서일 때, 하느님 앞에서는 가치가 별로 없다.
이런 희생, 저런 선행을 하면 나중엔 자기에게(ego) 이득이 돌아오게 되므로 그 이득에 따라 계산된 선행을 하는 것엔 하느님은 관심이 없으시다. 이렇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는 이 지향, 갈망, 자기 뜻의 선택에 따라 하느님의 모상이 되거나 탈을 쓴 자아(우상)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궁극적 선택이 무엇인지 죽기 전에 살아서 보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다.
"벼락을 맞았습니다."에서 주인공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계속 동시에 두 음성이 나오는 것처럼 듣는다. 겉으로 선행처럼 보이는 행동과, 속으로는 자기 잇속만 생각하는 것을 이중적으로 흘러 나오는 녹음기처럼 본인 스스로가 듣는다. 바로 이렇게 마음속에서 이중으로 흘러가는 것을 객관적으로 제3자가 보는 것처럼 (마치 하느님처럼) 보는 것이 심판이구나 싶다.
이 이중적인 자기 모습이 보통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기 뜻이 자아(ego)와 너무나 하나가 되도록 밀접해 있어서 가까이 사는 타인은 그 사람의 모순된 행동을 보는데 본인은 못 보는 것이다. 그럼 언제 볼 수 있는가? 기도 안에 깊이 잠겨 있을 때이다.
기도가 깊어지면 마음이 고요하고 맑아져서 마치 호수가 잔잔해져 그 주위의 사물을 비춰주듯 영혼이 맑아지면 가면 쓴 자아(ego)가 가로질러가며 수작하고 계획하고 꿍꿍이속하고 있는 것들이 그림처럼 펼쳐질 때 아무 생각 안 해도 저절로 보여져 저건 옳은 줄 알았는데 기도하면서 보니까 틀렸구나! 하며 방향을 고친다.
참된 기도를 하면 이렇게 하나씩 가면 쓴 자아(ego)가 맑은 하늘에 구름처럼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때, 자기의 생각과 하려는 것들이 보여지기에 구름이 얼마나 검고 칙칙한지 아니면 그냥 흘러가는 작은 흰 구름인지도 느껴져 여기에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다가 마음이 맑아졌는데도 어느 탐스런 것이 가로질러 오면 내(자아) 의지가 그것을 좋아하고 욕심 낼 때가 있다. 그때 저건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어야지 하고 자신의 뜻이 그것을 동조하고 위세를 부리는 데도 내버려두면 더 이상 맑게 비추어주질 못하고 다시 자신의 의지(뜻)는 가면 쓴 (거짓)자아와 함께 딱 붙어 일하므로 무엇인가 갑갑하고 찝찝하긴 한데 일이 커질 때까지 가면 쓴 (거짓)자아로 흘러가도 파악을 못하고 끌려간다.
그래도 계속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시점에서 점점 머리가 무겁고 힘들고 맑지 않으면 답답하니까 "아이구 모르겠다. 머리 아프니 그만하자!" 하고 기도가 안 되니까 다 내려놓아 버리는데 내려놓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 다시 기도가 되고, 왜 그 부질없는 것을 붙들려고 며칠간 시간을 허비하고 골몰하고 신경썼는지 그런 자신이 한심하고 그동안 그것(자기욕망)을 따라가느라 하느님 현존을 못한 것이 아깝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는 자는 끝까지 가면 쓴 거짓 자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서 하다가 낭패를 보면 그때서야 아픈 가슴을 안고 후회를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가면 쓴 (거짓) 자아가 하는 것이 실패하는 것은 은총의 때이기도 하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 사람을 보면 딱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지금까지 잘못 선택한 삶을 다 털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잘 변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기 자신이 무얼 원하고 어디로 향해 가는지 빨리 파악하지 못한다. 방금까지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어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는데 어느 틈에 조그마한 것이 거치적거려 속상해 하고 마음이 불편해서 그 작은 것 하나에 마음이 붙잡혀 있음을 본다.
어떤 때는 붙잡혀 있는지도 모르는 체 있는데 누군가 “왜 마음이 상한일 생겼어요?" 인사할 때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서 주님께 감사 찬미 쏟아지게 드렸는데? 참 이상도 하다. 이렇게 혼잣말을 할 때가 많다.
하느님께 마음을 열었는가 싶었는데 어느 틈에 마음이 닫혀 버린 것이다. 이 변화를 빨리 파악하면 회개도 쉬우련만 기도 안에 있지 않으면 이 변화를 감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으로는 애정, 갈망, 원의, 취미, 기호가 가는 쪽으로 나의 의지가 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내 의지(뜻)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원하고 이끌리고 있는 대상이나 사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 의지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이끌리는 대상이 하느님 쪽이면 큰 복인데 하느님이 하지 말라는 쪽으로 이끌리고 있고 그걸 좋아하고 사랑하면 본인과 주위 사람이 큰 고통을 겪는다. 이를 병든 의지라고 말한다. 정상적인 아닌 선택을 하기에, 영혼이 병들어 병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현대는 온 인류가 병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혼과 육체에 해로운 것을 좋아하고 추구하고 열광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그의 뜻(인간의 의지)이다. 이 뜻이 병들면 하느님과 반대되는 것을 원하기에 그 사람은 병든 사람이다. 인간은 그의 뜻이 가는 대로 따라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뜻(의지)이란 무엇인가?
"뜻은 생각이 아니면서도 그의 정신자세에 생명을 주고, 눈이 아니면서도 그의 시선에 생명을 준다. 왜냐하면 뜻이 있으면 눈이 보기를, 즉 사물을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눈이 있어도 생명이 없는 눈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뜻은 말이 아니지만 모든 말에 생명을 주고 손이 아니지만 활동에 생명을 주고, 걸음이 아니지만 걸음에 생명을 준다. 또한 사랑이나 소망이나 감정이 아니지만 사랑과 소망과 감정에 생명을 준다(천상의책 16권 2.7-8).
이 뜻이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 할 수 있다. 손과 발, 눈, 귀는 이 뜻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 보고, 듣고, 내 뜻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관심을 끄고 쳐다보거나 알려 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마음(뜻)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표현하는 것을 자주 듣고는 한다. "뜻하는 바가 있어서" 이것을 시작했다... 저 사람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뜻과 원의, 마음은 같은 동의어로 쓰일 때가 많다. 저 사람은 자기가 한 번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끝까지 해… 그리고 원하는 것을 꼭 얻어내! 이것은 그가 무엇을 원하면 그의 온 존재를 다해 그 목적에 투신하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다.
또 어떤 사람이 시작은 해 놓고 하다 그만두는 걸 보면 "저사람은 할 마음(뜻)이 없어” 하고 그만큼 그 일에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뜻(의지)은 원의, 욕구, 갈망을 통제할 수도 있고 이것들과 하나 되어 움직이기도 한다.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밤인지, 새벽인지, 지금 만날 때인지 생각지 않고 그 갈망에 따라 만나러 갈 수도 있고 곰곰이 따져보면서 지금은 참는 것이 먼 안목으로 보면, 양쪽 편에 이롭다고 생각 되면 희생을 하고 갈망을 접기도 한다. 이 자기의 갈망과 의지가 옳게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식별하게 하는 해주는 것이 영혼(양심)이다. 영혼이 눈멀고 잠들어 있으면 욕망대로 이끌려 가 불행한 선택을 한다. 잠든 영혼을 깨우는 것은 기도와 단식,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 영혼은 3가지 능력이 있다. 기억, 이성, 의지로 영혼의 상부능력이라 부른다.
그 다음은 오관으로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으로 하부 능력이라 한다(도표 1 참조).
하부 능력은 보기 아름답고 예쁜 것이 있으면 바라보려 하고 듣기 좋고 달콤한 음악이 나오면 저절로 귀를 기울이고, 만지기에 보드랍고 촉감이 좋으면 즐거워한다. 그러나 상부능력인 의지(뜻)가 다른 것에 몰두해 있어 이런 것에 관심을 끄면 마음에 안 들어오기에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뭘 들었었는지 남지 않는다. 마음(뜻)은 하나이기에 동시에 두 가지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 뜻이 하느님 뜻에 부합한 것만을 즐거워하며 듣고, 보고, 말하는데 맛스러움을 둔다면 이 뜻이 하느님과 하나 되어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나 하느님 사랑을 가리는 구름장이 없어 맑고 투명하다.
그러나 하부능력이 하느님 뜻을 떠나 각각 자기 즐거운 대로 따라 가도 영혼이 내버려 둔다면 그것을 영혼의 무질서라 한다. 시각에 즐겁고 유쾌한 것을 하루 종일 보고 있거나, 즐겁고 달콤한 음악이 좋다고 할 일 모두를 제쳐놓고 종일 음악만 듣고 있다거나 한다면 하느님께서 오관을 주신 목적대로 합당하게 쓰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을 제쳐놓고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 보고, 듣고, 즐기는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인양 하는 것에서 돌아서서, 그것들을 자기 자리에 배치하는 것이 회개, 정화라 부른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뜻에 위반하는 오관을 바로 잡으라 하는데 이게 감성의 밤이다. 그것은 "감성에 오는 어떤 맛이든 순수 하느님의 존엄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이를 끊고 빈 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가르멜 산길 1권 13.4).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실 때 아버지의 뜻을 좇는 일 외에는 어느 낙도 가지지 않으셨고 가지실 마음도 없었다. 다만 성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당신의 음식이요 양식이라 하셨다. 그러면 이 오관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인가? 조금 전에 말한 하느님의 영광과 존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들을 맛이 있음직한 것이 있다 하자.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나 당신을 섬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좋아하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다. 또 보아서 즐거울 무엇이 있다 하자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면 그런 것을 좋아하지도 보지도 않는 것이다. 또 말이나 다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감각의 전 영역에 걸쳐 좋이 피할 수 있거든 그같이 하고, 피할 수가 없어 감각의 무슨 느낌이 인다 해도 누틸 마음이 없으면 그만이다. 이와 같이 감성의 맛을 끊고 비워서, 마치 어둠 속에 두는 것처럼 힘쓰며 조심히 걸어 간다면 단시일 내에 크게 진보할 수 있을 것이라 성인은 단언한다(가르멜 산길 1권 13,4).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이처럼 다 피해갈 수 없기에 같은 자리에 함께 있게 되는데 음악이나 영화를 함께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감각은 듣자마자, 보자마자 좋아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데 내 뜻이 할 일은 그것이 하느님 영광이 아니라고 보이면 감각의 무슨 느낌이 인다 해도 누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누린다'를 '맛들인다, 맛본다'로 표현해 보면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듣고 보아서 감각의 무슨 느낌이 일 때 그것을 맛들일 마음이 없으면 상관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뜻이기 때문이다. 그냥 흘러가게 두는 것이다. 그 맛을 붙잡지 말고.....
맛 볼 (누릴) 마음이 없는 것은 내 뜻이 하는 것이기에 내 뜻이 원치 않으면 아무리 야하고 자극적인 것을 보아도 그것이 십자가가 될지인정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누리고 싶은 그렇 마음(뜻)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 보고, 듣고 싶은 욕구(뜻)를 비워 없애버리면 감각의 기능은 어둡고 빈 것이 된다.
-다음에 계속
(참된 회심/ 구원의 마리 헬레나 지음/ 기쁜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