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毒殺)
"난 니가 몸도 이렇게 쇄약한 상태에서 끌려가는 꼴 못 봐."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하냐... 똑똑한 니가 좀 알려줘봐..."
"죽어 줘..."
독살(毒殺)
"니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세상엔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존재 하는거야. 난 이런 식의 대우,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하겠지. 워낙에 잘나신 인물이라.. 우리같이 무식하고 몸으로 나서는 놈들은 우스워 보이나보지? 허나.. 니네들은 인텔리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내가 볼 땐 그저 친일파일 뿐이야."
"이런 식으로 날 자극하면 조국해방이 하루라도 일찍오나? 차라리 공부를 한자라도 더 하지 그래?"
"이 개새끼가!!"
계상은 신원의 멱살을 잡았다. 신원은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도 전혀 기죽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매섭게 계상을 노려보았다. 조금은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도 올라가 있었다.
"계상이 형! 이거 놔. 그만해!!"
태우와 호영이가 계상이의 손을 놓아보려 힘을 써댔지만 윤계상은 꽤나 화가 난 듯 쉽게 멱살을 풀지 않았다.
윤계상과 안신원은 어릴 땐 꽤 사이가 좋았다.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소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같은 곳을 지원했으니 어쨌든 꽤 가까운 사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 그들이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올라가며 조금씩 갈라서기 시작한 것은 독립운동 전선이 꽤나 차이가 났던 이유에서였다.
계상은 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보면 꽤나 흥분하는 성격을 지닌 탓에 싸움도 여러번 했었고, 중학교땐 순사들한테 검문도 많이 받았다. 다소 과격한 면도 있었지만 그 뒤에는 한번 정을 붙인 것엔 쉽게 인연을 끊지 못하는 의리가 있었다.
그런 계상과는 대조적으로 신원은 머리를 잘 썼다. 한번도 싸움에 휘말리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항상 좋은 결과를 이끌어 냈다. 매우 이성적으로 냉철한 면이 있어서 다소 그의 차가움에 친구들도 고개를 내젓곤 하지만 그 역시 계상과 마찬가지로 정은 많았다.
계상과 신원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이미 교내에서도 지하독립운동조직이 개설되어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독립이 오게 하기 위해선 일부 선각자들의 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급진론파와, 교육을 통하여 밑에서부터 독립의 열기를 끌어올려야 된다고 생각한 준비론파가 그 큰 흐름을 잡고 있었다.
계상은 급진론파에 들어갔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는 총대를 메어야하고 그 총대는 자신이 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상은 선배들과 매일 밤 동지들을 소집하고 태극기를 그리며, 암살의 계획이나 운동을 어느 곳에서 시작할지를 계획했다.
그와 반대로 신원은 준비론파에 소속되었다. 신원이 생각하기에는 이성적으론 지금 현실에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인력의 낭비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명이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주로 젋은 청년들이고 결국 몸이 약한 아녀자와 노인, 아이들만 남게 될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지하고 일본의 교육에만 길들여져 있으므로 인텔리들이 그들을 교육시켜야 했다. 신원은 선배들과 야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특별하게 부딪혀야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준비론파의 소극적인 태도는 급진론파에선 분명 친일에 가까운 행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때부터인가 두 파는 급속도로 멀어졌고, 결국 계상과 신원역시도 멀어지게 된 것이었다.
"너희같은 새끼들은 다 매국노야.. 아냐?!!"
"계상이형! 왜 그래!! 우리들끼리 싸우면 어떡해!!"
반 친구들은 예전부터 둘이 자주 싸웠던 모습을 봐왔던 터라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이번처럼 주먹이 오갈 험학한 분위기는 한번도 없었던지라 다들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무식한 놈들... 힘으로만 밀어붙인다고 해방이 되냐?"
신원이 이죽거리며 말했고 결국 계상의 주먹이 나가고 말았다. 신원이 나가떨어지며 안경이 산산 조각났고, 그 파편에 얼굴이 긁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쯤되자 반친구들도 웅성되며 싸움을 말리려 했다.
"안신원... 오늘로서 얼굴 마주 대하는 것도 마지막이다."
신원은 계상을 노려보며 피를 주먹으로 쓸었다.
"나... 학교 그만둔다. 공부 열심히 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해라. 일본 앞잡이 짓은 그만둬라.. 넌 똑똑하니까 내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겠지.."
"계.. 계상이형! 뭐야? 왜 말 안 했어?!"
호영이가 당황하며 계상이를 바라봤다.
"어차피 난 공부해봤자 쓸모 없어. 차라리 빨리 선배님들과 함께 현장에 뛰어드는 게 나아... 잘 지내라. 다들.. 니들도 이제 그만 교실로 돌아가..."
반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계상은 가방을 들었다. 신원은 고개를 숙이고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피는 계속 흘렀지만 신원은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계상은 태우와 호영이에게 어차피 계속 만나게 될 것이라며 인사를 하고는 학교를 나섰다. 길가의 잡화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교복 입은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새겨본다. 까만 모자, 까만 차이나식 교복, 그 위에 검은 망토까지.. 다시는 입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학교란 건 그만 두게되어도 그만인 줄 알았는데 왠지 좀 씁쓸하다.
"신원군. 이번에 실린 거 좋던데? 점점 실력이 느는구만.."
"감사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신원은 대한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신문사에 들어온 것이다. 처음엔 기자로 시작했지만 그를 눈여겨본 국장의 제의로 그는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소설을 쓸 때까지만 해도 한글을 국민들에게 전파하고, 계몽주의 소설로서 국민을 개화시킨다는 의지가 있었지만 왠지 그는 요새 점점 더 기운이 없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밤에 악몽을 꾸며 일어나기도 했고 손이 너무 떨려 타이핑을 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과연 해방이 오긴 오는 것일까.. 이대로 영영 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번엔 말인데, 연애소설을 써보지 그래?"
"연애... 소설이요?"
"계몽주의라고 해서 연애가 들어가지 말란 법있나? 김동인 선생도 그렇고 이광수 선생도 그렇고, 사랑이란 소재는 범국민적인 관심사니까 말이야. 일단 사람들에게 흥미를 이끌게 해야되잖아. 그래야 우리 신문도 많이 팔리지.."
"... ..."
"자네도 지금 한창 젊을때라 연애의 감정이 끓지 않나? 뭐.. 여자친구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내용의 소설은 어떤가?"
"글세요... 전... 아직은 일이 더 중요합니다."
"자네는 다 좋은데 그게 탈이야. 차가운 이성이 있으면 응당 뜨거운 가슴도 있어야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사는가? 조국해방? 과연 우리가 늙어 죽을때까지 이뤄질까? 벌써 40년대에 들어섰지만 내 생각엔 50년대, 60년대에도 어려울 것 같아. 아니, 이대로 영원히 일본에 포섭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선생님께선... 자신이 조국해방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
"전 요즘 그것에 확신이 없어졌습니다. 항상 제가 옳다고만 생각했는데 요샌 잘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 나가볼까 생각중입니다..."
"신원씨... 이리와봐요..."
대한신문에서 유일한 여기자인 서진희가 조용히 신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신원은 그녀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 가다말고 주위를 살펴보고는 신원에게 속삭였다.
"신원씨...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예? 뭔데요."
"내 아는 동생놈이 운동을 하거든요.. 근데 요즘 그쪽에서 한 명이 배신을 했나보더라구요. 덕분에 그쪽은 완전 쑥대밭이 됐어요. 순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다 잡아갔는데 다행히 몇몇 사람들이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하던데, 이름이나 얼굴 생김새까지 다 불어가지고 길거리조차 돌아다닐 수가 없는 형편인가 봐요. 그래서 지금 한 명은 우리 집에 숨겨주고 있는데, 혹 신원씨도 집에 숨겨줄 수 있나 해서요.."
"아... .... 그래요...."
"물론 위험한 일인 건 알아요. 하지만 신원씨... 그 사람들.. 우리보다도 더 어린 친구들도 많아요. 다.. 잡혀가서 엄청나게 고문당하고 있을거예요.. 난 여자고, 겁도 많아서 뒤에서 밖에 도와주질 못해요. 이런 식으로라도 힘이 되고 싶어요. 신원씨나 저나 매일 얘기하던 조국해방의 길은 이런 걸 꺼예요."
신원은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원은 평상시와 똑같이 단편 소설을 신문에 실었다. 이번 편은 연애가 들어간 소설이었다. 어렸을때부터 사랑했던 두 남녀는 영원히 함께 하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점차 크면서 남자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좁은 것인가를 깨닫고는 여자를 버려둔 채 홀로 일본 유학을 결정한다.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며 매일매일을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몇 년뒤에 돌아온 남자는 방탕한 생활로 이미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졌고 심한 성병으로 인해 죽을 날이 몇일 남지 않았다. 여자는 매일 남자의 곁에서 간호를 해주지만 남자는 이미 정신이 나가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결국 남자는 죽어버리고 여자는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것을 결심하여 의술을 공부하는 것을 암시로 끝을 맺는다.
"진희씨... 여기예요..."
신원은 진희에게 손짓을 했다. 진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십미터쯤 떨어져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냥 신원의 뒤를 쫓아갔다. 그런 진희의 십미터쯤 뒤로는 두 남자가 모자를 쓰곤 고개를 푹 숙이고 역시 모르는 사람인냥 뒤쫓아간다.
신원이 골목 끝에 있는 자신의 집 대문을 열어둔 채 조용히 방으로 들어선다. 그 뒤를 진희가, 그 뒤를 그 두 남자가 이어서 들어간다.
"정말.. 고마워요.."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지 진희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신원은 그런 진희를 토닥여주고는 그 사람을 다락으로 올려보내려 했다.
신원은 혼자서 방 한 칸에 부엌하나 그리고 화장실과 다락이 하나 딸린 조그만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락 창문은 다 큰 성인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아 큰 액자로도 충분히 가릴 수가 있었다.
"먼저 인사부터 해야죠.. 이쪽은 제 아는 동생 지훈이구요. 이쪽은... 윤.. 윤...."
"윤계상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며 약간은 쉰듯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신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를 바라봤다. 계상 역시 신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안... 신원? 신원이야? 맞아?"
반가운지 계상은 신원을 버럭 안았다.
계상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신원은 가슴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젊은 날의 그는 매우 활기차 보이고 기운이 넘쳤다. 항상 자신감에 차있었고 의리도 있었다. 물론 가끔 가다 울컥 하는 성질 때문에 싸움도 많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쇄약해 보였다. 눈밑도 어두웠고 살결은 거칠어 보이고 입술은 하얗게 터져있었다. 자신을 안는 그의 몸이 너무나 말라서 신원은 놀랐다.
"너... 왜 이래... 어디.. 아픈거야?"
예전에 싸웠던 일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아픈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조금... 조금 아파. 별거 아니야..."
계상은 애써 웃었지만 한눈에도 그가 살날이 그리 오래 남아있지 않은 것만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지훈과 진희는 진희의 집으로 돌아갔고, 계상은 다락으로 몸을 숨겼다. 신원은 누워 있는 계상이 편할 수 있게 자신의 이불과 벼게를 다 올려주고 어둡지 않게 초도 올려주웠다. 심심할까봐 책도 여러권 올려주었다. 그리곤 액자로 창을 가려놓았다.
"악성 폐렴이래요.."
다음 날, 진희는 조심스레 신원에게 계상의 상태를 전했다.
"그럼... 살 가망성은 없는 건가요..."
"아마도..."
진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가끔 그가 각혈을 할지도 모르니 주의깊게 봐달라고 신원에게 당부했다.
"그래도 상황에 따라 건강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 사람 그렇게 쉽게 갈 사람은 아니라고 지훈이가 그러던걸요... 의지가 굉장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오로지 해방을 위해서 자신의 젊음을 다 받친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흔한 연애한번 안 해보고 말이예요..."
"너... 글 잘 쓰더라. 니 소설 몇 개 읽었다.."
그 좁은 다락에 누워 하루 종일 지루하게 있는 계상인지라 신원은 신문사에서 돌아오고 나면 그를 잠시 방으로 내려 눕혀놓곤 하였다. 밥만큼은 편하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되어서 신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꽤 긴 시간동안 그를 방에 방치해 두었다.
"어... 그래?"
"응... 나.. 도망다닐 때.. 신문에서 니 글 실린 거 봤어... 성공했구나 싶었지. 역시 똑똑한 놈은 다르다, 이런 식으로도 니 의사를 전달할 수 있구나 하고... 니 말이 맞는지도 몰라... 내가 혼자 난리치면 뭐하냐... 해방이 될 기미는 보이지도 않고...."
".... ....... 계상아.... 난..."
"죽기전에 조국이 해방된다면... 난 정말 소원이 없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내 청춘을 허무하게 보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허무하게 보내지 않았어. 절대로."
계상은 신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왠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넌 좀 부드러워졌어... 예전엔 앙칼진 고양이 같았는데..."
"넌 좀 약해졌어... 예전엔 나한테 주먹도 날렸었는데..."
둘 다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보니 우리 어릴 때 메뚜기랑 잠자리 구워 먹었던 거 생각나냐? 난 가끔가다가 그게 생각나더라. 그럼 그냥 웃음이 나더라고..."
"응.. 생각나...."
"그러고보면 나 참 유치했어. 왜 널 친일파로 매도했을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는데.."
신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계상아. 난 친일파나 마찬가지야...
그 후로 두 사람은 밥을 같이 먹었다. 계상은 호영과 태우도 역시 무사하며 두 사람은 여기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은거하고 있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은 건강해서 다시 독립운동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곧 대규모 집회가 열릴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계상은 그때까지 건강을 되찾아서 꼭 그 운동에 참여를 하겠다고 했다. 신원은 말리고 싶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까봐,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 후로 한 달이 지났지만 계상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다락에 누워있었고 신원이 돌아오면 방으로 내려와 사람이 그리웠다는 티를 마구 냈다. 가끔은 신원의 어깨를 주물러주기도 하고 밥을 차려 주기도 했다. 신원에게 장난을 치고 쉬지 않고 떠들어대기도 하였으며 가끔 신원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기도 하는 등, 계상은 신원과 매우 친근하게 지냈다. 그런 계상을 내려다보며 신원은 더욱더 계상을 보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원씨. 큰일 났어요."
진희가 신원이를 급하게 끌고 와 얘기를 꺼냈다.
신원은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혹시 계상이가 발각되기라도 한 것인지.. 너무 떨려서 진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신원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태우씨랑 호영씨랑 발각됐어요..."
"예?"
"불심검문에 걸렸나봐요. 마침 몸 속에 태극기를 지니고 있었나봐요. 두 사람 다 지금... 모르겠어요.. 설마 지훈이나 계상씨에 대해서 불진 않겠지만.. 그래도요.. 사람이란게 그렇잖아요. 고문같이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얘기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훈이도 그렇고 계상씨도 그렇고 좀 더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지훈이야 건강해서 도망이라도 갈 수 있지만.. 계상씨는... 도망가긴... 힘들 것... 같으니까... 신원씨가... 잘... 좀... 흐흑...."
진희는 울음을 터트렸다. 신원은 그녀를 안아 다독여줬다.
"신원씨... 저 무서워요... 흐흑... 무서워..."
신원도 울고 싶었다. 다만 신원은 자신이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계상이 아픈 몸으로 잡혀가서 온갖 모진 꼴을 당할 걸 생각하니 정말 울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말하면 너도 곧 잡혀가게 될 거란 말이야.. 물론 태우나 호영이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 놈들은 지독한 놈이라 어떻게든 너나 지훈씨의 존재를 알아낼 거란 말이야..."
"... .... 다 끝났구나... 이렇게... 다 끝났어..."
"계상아..."
계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이던 태우와 호영이까지 잡혀갔다고 하니 그는 이미 삶의 의미를 잃은 듯 허무하게 웃었다.
신원은 계상을 불러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난 니가 몸도 이렇게 쇄약한 상태에서 끌려가는 꼴 못 봐."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하냐... 똑똑한 니가 좀 알려줘봐..."
"죽어 줘..."
계상은 잠시 그런 신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실인지 아니면 이게 다른 무슨 의미인지를 알려는 듯 신원의 눈을 바라보다가 곧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살아있으면 뭐하겠냐... 어차피 병든 몸이고.. 여기에 있어봤자.. 너도 위험하고... 그래.. 죽는 게 낫겠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내가... 독약을 구해올게..."
신원은 일어섰다. 그리곤 밖으로 나갔다.
계상은 잠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죽는 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정말 허무했다. 여태까지 무엇을 하였나? 추억이 될만한 학창시절도 없다. 연애도 해본 적이 없다. 오로지 지하에서 매일 숨어 다니며 독립운동만을 생각해왔다. 해방도 보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 계상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계상아... 여기..."
신원은 계상 앞에 앉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계상은 쉼호흡을 한번 한 후 신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곤 앞에 놓인 것을 바라보았다.
"신원아... 이건... 그냥 술 아냐?"
"어. 맞아. 술이야..."
"이게... 무슨 독약이야?"
"옛말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 주색을 밝히면 수명이 단축된다고... 매일 술 마시고... 색에 탐닉하게 되면 저절로 일찍 죽게 될 거야. 특히 너 같이 병약하다면 더욱 더..."
잠시 계상은 생각을 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주색을 탐닉한다는 건 또 뭐고...
"신원아.. 무슨 뜻인지 잘... 나는..."
"매일 술에 찌들어 살고, 나랑 관계를 가지면 일찍 죽게 될거야. 장담하건데.. 지금 니 몸 상태론 한달도 못 넘길거야..."
계상은 신원의 말대로 매일 술을 마셨다. 밥은 거의 먹지 않고 안주거리를 조금 먹을 뿐이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매일 신원을 안고,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잘 알 순 없었지만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자꾸만 신원을 탐하게 되는 것이었다.
"신원아... 이리 와... 한번만 더 하자..."
계상은 신원의 등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묻었다. 이미 그의 등에는 빨간 정사의 자국들이 선명하게 나있었다. 계상의 두 팔이 신원의 가슴 밑으로 파고들어 그의 어깨를 꽉 하고 움켜 쥐었다. 신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계상은 조금도 신원을 배려해주지 않고 바로 들어섰다. 신원도 처음에 무척 괴로워했던 것과는 달리 많은 관계로 인해 익숙해졌는지 별 고통없이 계상을 받아들이고 곧 그의 작은 움직임하나에도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고는 하였다.
"신원아.... 얼굴 보고 싶어..."
계상은 신원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뱉어내듯 말했다. 술에 취한 그의 숨은 달짝찌근하게 신원의 귀에 달라붙어 신원으로 하여금 절대 거역하게 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신원은 잠시 계상에게서 떨어져 나와 몸을 돌려 계상을 바라봤다. 얼굴이 잘 보인다며 계상은 술에 취해 웃었다. 제 정신일 리가 없지만 신원은 묘하게 그런 계상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날만큼 기뻤다. 왠지 사랑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원의 가느다란 두 다리가 계상의 팔에 걸리더니 위로 붕하고 떴다. 허리가 약간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 그대로 계상이 들어왔다. 신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계상의 눈빛 때문에 신원은 자신의 표정이 너무나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보기 흉하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신원은 어색한 표정으로 굳어있었다.
"니가 이렇게 이쁜 줄 알았으면... 진작에 먹어버릴 걸 그랬어..."
코끝이 시큰해져오는 것 같아 신원은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술에 취해서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데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 기억할 순 없다.
계상의 움직임이 꽤 오래되자 긴장해있던 신원의 표정도 조금씩은 풀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표정을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신원은 깨달았다. 곧 신원의 입에선 야릇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계상은 그런 신원을 보며 더 흥분하는 듯 보였다. 계상의 움직임이 한층 더 과격해졌고 신원은 절정과 함께 정신을 놓았다.
"계상아... 배 안 고파?"
눈을 뜬 신원이 계상을 향해 말을 걸었다. 계상은 알몸으로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손엔 술병이 들려있었다. 왠지 정말 그에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신원은 갑자기 겁이 났다.
계상쪽으로 몸을 옮긴 신원이 계상에게 안기자 계상 역시 신원을 안아주었다.
"신원아... 나... 죽기 싫어... 그냥 지금처럼... 계속 살수는 없는 걸까..."
"... ..."
"너랑... 그냥... 이렇게 살순 없는걸까..."
신원은 결국 계상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굳게 결심했지만 역시 마음은 생각되로 되지 않는다. 계상은 그런 신원을 꼭 안아주고 키스해 주었다.
두 사람은 알몸으로 몇날 몇일을 방안에서만 지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지도 모르고 다만 술과 잠자리에만 정신을 팔았다. 계상은 눈에 띄게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과연 신원의 말처럼 계상은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신원은 계상의 유골을 들고는 뿌려줄 곳을 찾아 헤맸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에게 허무만을 안겨주웠던 이 세상 어디에도 그의 유골을 뿌릴 만한 곳이 없었다. 그나마 그에게 고향이 제일 행복한 곳일 것 같아 고향을 찾아가려 했으나 이미 그 곳엔 마을이 없어진지 오래였다. 철길이 났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원은 계상의 유골을 몽땅 다 먹어버렸다.
자신 몸 속에 있을 때 계상이 제일 행복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서 였다.
입가에 뭍은 하얀 가루를 털어 내고는 신원은 바로 신문사로 향했다.
오늘은 마침 검문을 위해 일본 순사들이 신문사로 오는 날이었다.
신원의 초췌한 모습에 기자들과 순사들까지도 의아하게 그를 보았고, 그에게 시선이 모인다고 생각한 순간, 신원은 가슴속의 태극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순사의 총은 정확하게 신원의 머리를 관통했고 안신원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세상을 떠났다.
안신원의 시신은 서진희가 거두웠다. 그녀는 신원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머리가 좋은 신원은 한번도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해 본 일이 없었다. 비록 즉흥적이라 보일 지라도 그는 항상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순사들이 온다는 것까지도 알고 미리 그런 행동을 계산했던 것일까? 준비론자인 그가 그런 과격한 행동을 미리 계산에 두고 있었단 말인가?
서진희는 기자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신원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주인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집세를 빼서 그 돈으로 모조리 술을 산 것 같다고 말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왜 그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아주머니는 혀를 찼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쾌쾌하게 나는 시큰한 냄새들에 기침을 몇 번 한 그녀는 방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러나 수 없이 굴러다니는 술병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 해 여름엔 그들이 그렇게 바랬던 해방이 왔다.
그러나 윤계상과 안신원의 죽음은 그리 괴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윤계상이 안신원에게 당한 독살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독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