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한성래
문 외
층간소음 벽을 지나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 벽을 통해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새벽 02시 40분,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고 여자가
걱정된다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 그들의 집
문 앞에 섰다 너무 어둡고 무거운 문, 그 문이
무서워 집으로 돌아왔다 벽을 타고 남자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그 벽을 통해 여자의 신음
소리도 들린다 새벽 02시 50분, 문을 열면 또 문,
또 그 문 열면 문
외출 오랜 잠에서 깨어나 안방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캄캄한 거실을 지나 중문을 열고 현관문을 향해 탈출
했다 한 줌 공간 24층, 그 앞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23 층계 아래로 헐떡이며 쇠줄 와이어가 달리고
있다 늙어버린 엘리베이터의 심장이 쿨럭거리며 멈춘
1층, 좁은 문이 열리고 유리창 밖으로 덩굴장미의
선홍빛 꽃잎들이 바닥에 누워 여름을 지우고 있다
문과 문 사이가 너무 멀다
절박뇨 톨toll-게이트를 지나 아이스커피를 머금고
벌써 120분이나 달렸다 달리고 달리는 짜릿함 뒤로
긴장이 따라왔다 5km라 적힌 휴게소 알림 표지판
앞에서부터 뇨尿를 움켜쥐고 달렸다 무수의 자동차
문이 열리고 여자와 남자가 달린다 각자의 배출구를
향해 달리는 경계의 잔상들이 착륙하며 지나는
뇨尿-게이트에 - 지프를 내리며 움켜잡은 손을 놓고,
소변기의 무색 물줄기 속에 노란 뇨尿를 희석하고,
검은 구멍 사이로 짧은 하루를 쪼로록 비워버리는
- 여자와 남자를 두고 다시 자동차를 탔다
귀가 주차를 마치고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여자와 남자가 침묵하며 서 있다
엘리베이터와 유리문 사이로 내 그림자가 지나가고
열렸다 닫혔다 또는 남자와 여자를 잘랐다 붙였다
그들을 구겨 넣은 문이 다시 열리고 닫히고, 또 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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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
내 머릿속 생각-벌레들이 꿈틀꿈틀 더듬이를 세우고 있다.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보는 미지의 세상은 흥분과 진지함,
놀라움과 웃음으로 나를 파괴한다. 비 오는 창에 등을 대고,
뽀득한 공기를 맡으며, 칠흑 속 네온등처럼 서서 너와 마주
한 시간들, 꽃비 내리는 4월에는 나도 사랑을 읽는다.
2.
키보드 타이핑 열기에 놀란 여름이 더위를 피해 해를 넘고
있다. 나는 웃옷을 벗어던지고 젖은 심장에 낙서를 한다.
*눈물과 웃음은 하나야 ** 네가 나를 벗기면 ***나는 이제
내가 아닌 것이 된다. 라는 너의 말들. 공, 공감.
Warning! 컴퓨터 크락션 소리에 놀란 밤이 채 반도 말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너의 말들. 사랑. 해.
3.
사랑에 쉼표가 빠져 쉬- 마침표가 되고 말았다. 너와 함게
하는 시간 중 느낌표, 물음표, 등등의 기호가 내 주위를
방글거리며 떠다녔지만 쉬- 마침표가 도착하면 너는 ‘안녕’
하고 더 깊은 가을로 떨어진다. 다시는 뽑지 않을 책장 속
으로 박히는 가을들이 슬프다. ‘안녕’과 ‘공감’사이에
놓인 공, 공, 공,,, ‘.’뒤에 나타난 ‘,’가 참 슬프다.
4.
너를 떠나보냈지만, 너의 품으로 보낸 내 두 눈이 아직 돌아
오지 않는다. 돌아올 생각이 없던 그들은 수축한 네 얼굴에
박혀있고, 앞뒤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의 창밖으로 앞뒤
없이 눈이 내리고 있음을 ‘안녕’하고 멀어지는 너의
목소리를 통해 배웠다. 눈 오는 밤과 봄 사이를 뒤만 보고
걷는 그들, 그들을 위해 난 습관처럼 네가 지나간 흔적들을
펼치고 덮고, 또 펼치고
*칼 구스타프 융의 ‘레드북 p361’에서 **슈미트잘로몬의 ‘위험한 철학 p256’에서
***장 그러니에의 ‘섬 p149'에 나열된, <그것Ceia>들 중에서 가져 옴.
한성래
2014년 《모던포엠》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추강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