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두 사람의 제사장 본문:(창4:1-8) 주요내용:심령속성론 요 약 성도의 심령에는 가인과 아벨처럼 두 종류의 속성이 공존한다. 그것은 바로 영혼과 육체,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진리와 비진리, 성령충만과 죄성충만, 영성과 육성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의 속성으로 악의 속성을 이기는 일이다. 그 방법은 예수 믿고 복음에 서서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성령충만 받을 때 이기게 된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듯 육성이 영성을 죽이는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
설 명
◎ 심령의 두 가지 속성
(중요 요점) ☞ 우리 심령 속에는 가인과 아벨처럼 두 가지의 속성이 공존 혹은 지배하려 한다.
1.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가인과 아벨(1절)
2. 하나님 의와 인간 의 양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2절)
3. 진리와 비 진리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3-4절)
4. 성령충만과 죄성충만 열납과 안색이 변함(4-5절)
5. 육성이 나타나면 영성은 죽음 아벨을 쳐 죽이니라(5절)
(본문)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1-8)
(강해) 이 시간에는 '두 사람의 제사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의 아담과 하와의 낙원 추방 이후 이 땅에서 태어난 1세대 곧 가인과 아벨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은 더 이상 화평과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질투와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은 동생을 시기한 형 가인의 동생 살인사건이 비극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될 점은 하와는 여인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녀 낳기를 그토록 갈망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하와의 첫 아들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습니다. 그 증거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는 말씀과 그녀가 지은 '가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즉 여호와란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구속주의 명칭이요(출6:3) 가인이란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로 볼 때 하와는 가인을 낳고 이 아들이 여인의 후손이라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아들 하나를 더 낳게 되자 메시야에 대한 개념에 혼란이 오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후손이란 둘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는데 그 의미는 '허무, 공허'라는 뜻입니다. 어떠하든 하와는 구원자로 오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잉태와 해산의 온갖 고통과 수고를 견디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는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앙과 불신앙의 두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심령 속에도 여러 방향에서 두 종류의 속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두 종류의 속성이란 무엇일까요? 1.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라는 두 속성입니다.
1절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했습니다. 여기 가인과 아벨의 출생 기록이 나타나 있는데 두 사람은 형제이면서도 서로 성향이 달랐습니다. 하나는 땅에 속한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아벨은 거듭난 영적 속성의 상징이요 가인은 육체의 속성의 상징입니다. 물론 자연인도 영혼은 존재하나 거듭남은 없습니다. 이 시간 단순한 자연인의 인간론이 아니라 성도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구성요소를 이해해야 하는데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는 이분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한국 정통신학의 거두 박형룡박사의 조직신학을 보면 "사람은 신체와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다"(인죄론 49p) 라고 구성 요소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삼분설을 비판하면서 "혼과 영의 상이를 고찰함에 실체적인 것과 작용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함과 사람을 삼위일체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다"(인죄론 55p 7-8줄) 고 하면서 다시 작용적 상이와 실체적 상이라는 소제목에서 "삼분설자들은 혼과 영의 작용적 상이를 실체적 상이로 보는 중대한 오류에 빠진다"(인간론 55p 10-11줄)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박형룡박사의 견해를 요약한다면 인간의 구성 요소는 이분설이지만 작용적인 면에서는 삼분설 혹은 그 이상의 다분설도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히4:12의 참 뜻을 밝히려는 찰스 하지의 글 즉 "관절과 골수는 서로 다른 실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같은 실체의 서로 다른 형태들이다. 그와 같이 혼과 영은 서로 다른 국면들 혹은 관계들 아래 있는 동일한 실체의 서로 다른 형태들이다"(인죄론 54p) 라는 글을 인용함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감정과 양심 즉 마음과 양심은 구분은 되나 서로 판연히 다른 실체가 아니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박형룡박사의 정의에 크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구성적 이분설이며 기능에 있어서는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능적 삼분설을 구성적 삼분설로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능적으로 영과 혼을 구별하는 이유는 조직신학에 명시된 대로 다만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의 성향이 상이하고 명확해서 영적 지도를 위해서는 이러한 심리적인 이해가 불가피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영과 혼과 육이라고 했다고 해서 삼분설자가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과 혼을 이야기한다 해서 삼분설자가 아닙니다. 가령 기쁨도 슬픔도 어디에서 출처했느냐에 따라 그 질이 다릅니다. 둘 다 정신적인 분야이지만 성령으로 기뻐할 수도 있고 혹은 혼적으로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귀신에 사로잡혀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는 절제시켜야지 계속하다가는 큰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영적인 특징과 혼적인 특징은 서로 다릅니다. 예를 들면 영적인 특징은 안정적이라면 혼적인 특징은 환경의 영향을 받거나 개성적인 강한 특징을 갖기에 침체 혹은 분주하고 산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혼적인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2. 하나님의 의와 내 의가 공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2절에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가인이 농사하는 일에 대해서는 근본된 토지를 갈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에 따라(창3:17-19, 23)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아벨의 목축업은 선뜻 이해가 안가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육식은 노아 언약 때에야 허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창9:2-4). 왜 아벨은 식용으로 쓰지 못할 양을 일부러 치는 자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대목입니다. 이렇게 양을 일부러 준비해야 했던 것은 장차 속죄 혹은 화목제물로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신앙 때문입니다. 즉 아벨은 자기의 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의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는데 농사하는 자란 '땅을 섬기는 자'를 뜻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분에 충실함을 암시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대로 땀흘려 수고하여 소산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대로 열심히 일해서 소산을 얻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부심이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대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자기 의의 색깔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죽옷 사건에서(창3:21) 보여주신 대로 당시에 이미 제사제도가 보편화되었으리라고 보는데 그럼에도 가인이 땅의 소산을 고집한 것은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함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의와 내 의가 있습니다. 그 믿음 좋던 모세도 백성들이 고기를 주지 않는다고 베옷을 입고 곡읍의 시위를 벌일 때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그들을 책임지는 줄 아는 착각에 빠져 괴로워 한 적이 있습니다(민11:10-15). 이처럼 성도는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따를 위험이 항상 공존하기 때문에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내 의란 나의 선행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입어서 거룩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고후5:17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란 적용면에서는 성령 안에서 새 피조물입니다.
3. 우리 심령에는 진리와 비진리가 공존합니다.
3-5절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신지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벨의 제사가 율법에 부합하게 아주 진리에 입각한 제사임을 감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가죽옷 사건에서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내셔서 아담에게 가르쳐 주셨고 그 진리가 그 후손에게 전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이 드린 양들은 원문을 보면 여성명사 단수로서 한 마리의 암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림을 보아 아무렇게나 드리지 않은 대단히 진리적인 것입니다. 이는 속죄제이거나 화목제을 가리키는데 두 가지 제사의 제물은 암컷도 가능하며(레3:6, 레4:32) 모두 기름을 제단에 드려 태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도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케 한다는 측면에서 속죄제의 성격을 아울러 포함하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롬3:25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했고, 요일2:2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오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곡식으로 드린 가인의 제사는 소제인데 소제란 잘못된 것일까요? 소제도 율법에 명시된 제사로 하나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극빈자에게는 이것이 속죄제로서 인정되었습니다(레 5:11-13). 그렇기 때문에 소제는 피 없는 제사이기는 하나 단독적으로는 드려지지 못하고 오직 피의 번제와 함께 드려지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제사를 드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3절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그 다음 4절을 보세요 "아벨은 자기도" 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기도" 란 가인이 먼저 드렸음을 잘 암시합니다. 이로 볼 때 가인의 제사는 피 없는 제사로서 비진리적이었습니다. 꼭 그가 드려야 한다면 아벨이 드릴 때 함께 드려야 했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히11:4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한 이 말씀에 나타난 믿음의 의미 역시 진리적인 제사였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데 진정이란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하신 말씀에 입각해 볼 때 당시에도 하나님께서 피의 제사를 요구하셨음을 암시합니다. 이로 볼 때 아벨의 제사는 진리대로 드려졌고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한 이 구절을 종교개혁지 루터와 칼빈은 "아벨처럼 나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렸다면 …" 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제사가 잘못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나답과 아비후와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도 진리와 비진리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설 때는 진리이지만 인간의 생각이 나를 지배할 때는 비진리입니다. 그래서 밖의 거짓 선지라도 조심해야 하나 내 안의 거짓 선지자가 더 문제입니다. 진리 따라가야 삽니다. 비진리 따라 가면 죽습니다.
4. 우리 속에는 성령충만과 죄성충만 때로는 악령이 지배하려고 합니다.
4절 하 반절로 7절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 열납하다는 의미는 '응시하다, 주목하다' 로서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가치 있는 것으로 주목하여 보사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열납 가부를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셨는지 모르나 고대의 방식상 하늘로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을 가능성이 많습니다(레9:24, 왕상18:38, 대상21:26, 대하7:1). 그런데 아벨과 그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제물도 불사르셨지만 성령의 불이 아벨의 심령에도 임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열납된 제사가 되어야 성령의 불이 임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아벨에게 성령과 기쁨이 충만했으면 형인 가인이 시기할 정도가 아니라 아주 죽이고 싶을만큼 되었을까요?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열납함을 받지 못한 가인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분노와 악으로 가득 차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성도도 성령충만하다가도 죄성으로 충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7절에 죄를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는 맹수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데(벧전5:8) 이는 죄의 능동성과 강렬성을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다스려야 하는데 어떻게 다스립니까? 그 방법이 7절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하신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칼빈과 루터는 '아벨처럼 나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면' 으로 주석했습니다. 즉 성을 온전한 제사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고 항상 신령한 영적 제사를 드려 성령충만함에 거할 때 죄를 이기게 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잠16:6에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신령한 제사를 드리므로 성령충만하여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성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세속에 깊이 심취될 때 내적 문제나 가정불화나 기타 환난이 발생합니다.
그런가 하면 육성이 영성을 죽이는 일이 있습니다.
8절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나간 역사의 한 사건에 지나지 않고 우리 심령 속에도 진행되고 있는 사건임을 아십시다. 벧전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바이지만 얼마나 육성을 따르다가 영성을 죽였습니까? 육성 따는면 영성은 죽고 영성을 따르면 육성은 죽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육신이 좋다는 대로 하다가는 시험이 듭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뿌리를 남겨놓으셔서 다시 소생케 하여 주심입니다. 이제는 성령으로서 죄성을 죽이는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혹시 영적 상태가 타락한 이스라엘의 상태는 아니지 살펴보십시다(사1:2-9).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와가 두 아들을 낳고 보니 두 종류의 속성이 있었습니다. 즉 이 두 종류의 속성이 자기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 속에는 두 종류의 속성들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영을 따라 사십시다. 이제는 하나님의 의로 사십시다. 이제는 진리로 사십시다. 이제는 성령충만하십시다. 영성으로 죄성을 죽이십시다. 그래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받으실만한 아름다운 제물이 되어 온전히 하나님께 열납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