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여행기
윤승희
왜 이 여행을 나서게 되었나?
이 여행은 우리가 통전 공부 시간에 배우던 삼국유사라는 책을 더 깊게 배우고 깨닫기 위해 이 여행을 왔다. 특히 삼국 왕들의 대한 전설이 남아있는 곳을 중점으로 둬서 돌아다녔다. 우리의 시조의 얼과 우리의 역사를 직접 보고 느끼며 다녔다. 아직도 몇몇 곳은 내 눈에 선하다. 정말로 여행이 아닌 견학을 목적으로 갔다. 그래서인지 재밌다기보다는 여행이 끝나고 나서 내 머릿속이 꽉꽉 채워진 느낌을 받는 견학이었다.
첫째 날
동대구역에서 ktx를 타고 출발한다. 도착지점에서 만나면 차를 타고 석굴암, 린각사에 가서 관람한 뒤, 저녁 먹고 남자아이들은 선생님네 집으로, 여자아이들은 윤서언니네에서 묵는다.
동대구역 - 우리의 출발지
동대구역에서 만났다. 나는 처음으로 KTX를 혼자서 탔는데, 처음치고는 굉장히 순조로웠던 것 같다. 짐이 무거워서 어깨가 매우 시렸는데 그래도 혼자 탄다는 것에 뭔가 좀 설레는 마음이 들어서 그런지 그런 건 별로 많이 안 느껴졌다.
안은 따뜻했고 앉아있으면 졸음이 왔다. 그냥 눈을 감고 있다가 잠깐 뒤에 부스스하게 떴더니 1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래서 안 씻은 사람처럼 후줄근한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신기한 경험이었다. 창밖을 보니 풍경을 감상하기도 전에 다 지나가 버린다. 엄청 빠른 게 안에서도 느껴진다. 그래서 표가 비싼가 보다;;
군위 삼존석굴 - 바위굴의 부처님들
선생님께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설명을 들었다. 보통 사람들이 소원을 빌 때 관세음보살에게 소원을 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살들의 손 모양에 대한 설명도 잠깐 들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 높은 곳에 척 보기에도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석상을 갖다 놓았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추측도 해보았다. 아마 내 생각에는 굳이 동굴 밖에서 석상을 만들고 힘들게 옮기기보다는 동굴 안에 있던 돌을 다듬어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와중에 옛날 사람들 어떻게 돌을 저렇게 매끈하게 깎지? 라는 생각을 제일 많이 한 것 같다. 신기한 모습에 더 자세히 보게 됐었다. 아미타불의 잔상이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는 느낌이다. 처음으로 간 곳이어서 그런지 다른 곳보다 더 기억이 뚜렷하다. 이름만 들어도
‘어, 나 여기 어딘지 알아’
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린각사 - 삼국유사의 탄생지
린각사는 삼국유사가 만들어진 곳인 뜻깊은 곳인데, 내가 조사를 했던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사를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대부분 선생님이 설명하셔서 그렇지 과거의 내가 후회되었다. 선생님이 대부분 설명을 하셨다는 사실에 안심했는데, 그랬던 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의 필체로 쓴 비석을 사람들이 갈아 마시며 소원을 빌기도 하고 너무 글이 좋아서 베껴가기도 하고 스님을 만만하게 본 사람들이 스님한테 시켜서 베끼다 보니 스님이 화나서 그 비석을 부수고 뭉개버려서 땅에 묻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웃겨서 기억에 많이 남았다. 물론 내가 설명을 한 곳이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내가 설명을 하지 않았더라도 기억에 강하게 새겨질 만한 곳이었다. 내가 조사할 때도 그렇고 삼국유사가 처음으로 제작된 곳이라고 하니까 더 위엄있고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일연스님 (앞쪽) 그림이 너무 친근하게 생기셔서 기분이 좋았다. 뒤쪽 그림은 개인적으로 맘에 안 들었다. 표정이 뭔가 비웃는 듯해서….
윤서 언니네 집 - 돌발상황(목감기)
첫날에는 윤서 언니네 집에서 묵었다.
이때쯤에는 내 목감기가 많이 심해져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정말 아프고 침을 삼키면 돌을 삼키는 것처럼 쓰라렸다. 말을 못 하니까 너무 불편했다.
갑자기(나는 배운 적은 없지만 어깨너머로 들은)그 무슨…원시인인지 뭔지 말을 못 해서 멸종됐다는 원시인도 생각나고, 언어 장애인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도 나고. 진짜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윤서 언니의 어머니가 생강차를 타주셨는데. 그거 먹고 엄청 많이 나아졌다. 앞으로 감기들면 생강차는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너무 쓰고 정확히 마늘에다가 도라지랑 양파랑 뜨거운 콜라 섞은 맛이어서 절대로 먹을 것 같지는 않다)
이것저것 먹고 놀고 씻고 자고 했다. 집에서 묵게 해주신 윤서 언니네에게 고마운 마음이 많이 든다.
둘째 날
윤서 언니집에서 선생님과 남자아이들을 만나 고령의 대가야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후 장기리 암각화와 김해의 수로왕릉, 허황후릉, 구지봉을 들른 뒤 울산역에서 김성준 오빠를 만나 경주 숙소, 스토리펜션으로 향했다.
대가야 박물관 - 순장..꿈에 나올것 같다.
대가야 박물관에서 순장에 대해서 배웠다. 거기 직원분께서 알려주셨다. 순장은 조건이 있어야 순장으로 인정이 되는데, 자신의 윗사람과 같이 묻혀야 하고, 타살로 인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타살이라는 증거들을 보여 주셨었는데 정말 소름 끼치고 잔인했다. 두개골이 부서져 있고, 생매장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도 많이 보였다. 왜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윗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까지 죽여서 같이 보냈을까? 라는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서로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했어야 했던 것 같다. 자기보고 죽으라면 못 죽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그냥 무참하게 해치니까 언짢은 마음이 든다. 왕도 그런 걸 말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억지로 죽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생각하게 만드는 역사였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는 없었으면 좋겠다.
울산역 - 상봉(?)
울산역으로 잠시 자가격리를 하던 성준 오빠를 데리러 갔다.
나는 솔직히 울산역으로 가던 줄 몰랐는데 다 도착하고 나서야 상황 파악을 했다. 갈 때 멀미가 조금 났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울산역에 도착했을 때
“여기 뭐야, 왜 왔지? 울산이 어디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에 기억은 희미한데, 오빠가 멀리서 손을 흔들 때 다 같이 손을 허우적대면서 흔들었던 것 같다. 그 오빠는 남은 날은 얼마 없는데 짐은 엄청 많고 무거워 보였다. 갑자기 차 안이 시끌시끌해진다. 난 다시 돌아갈 때 아주 많이 졸아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졸아서 멀미는 가셨다.
숙소에서 출발해서 반구대 암석화, 주상절리, 문무대왕릉, 불국사, 석굴암, 나정 등의 우리나라의 역사가 깊이 깃든 곳을 여러 군데 돌아다녔다.
반구대 암석화-두둥실화
어떻게 석기시대 사람들이 그런 자세한 그림을 그릴지 신기했다.
너무 정확해서 무섭기도 했다. 그때 당시에 사람들이 고래를 잡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예상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더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한 사람이 고래의 좋은 부위를 가져간다던 말에 크게 공감하고 안도(?)했다. 그림이 엄청나게 잘 그렸다고 하기보다는 인상깊고 기억에 오래 남는... 그런 그림이였다. 특히 고래 그림은 꿈에 나올 것처럼 어떤 고래만의 특히 사항을 잘 그려 넣어서 그런지 내가 알던 고래와는 다른데 뭔가 더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사람은 줄을 [찍-]그어서 표현하거나 졸라맨을 그리는데, 예술적이게 그린 그림 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그림들보다 훨씬 더 정이 가는 것 같았다.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마음이 든다. 신기하기도 하고, 푸근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정말 좋았다.
나정-슬픈 상황
나정은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는데,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전설적인 곳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는 것에 좀 기분이 언짢았다. 어이가 없고 예전에 나도 이런 곳을 몰랐다는 사실에 역사를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박혁거세의 이름도 ‘박’과 ‘혁거세’라는 두 개의 명사가 똑같은 뜻이라던데 그 점에서 왠지 모를 신비함을 느꼈다. 옛사람들은 어느 것 하나 함부로 안 하고 꼭 뜻을 넣는 것 같아서 대단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라면 그렇게까지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그냥 멋있는 이름하나 착~! 붙여주고 멋있게 불러줄 텐데, 왕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왕이 아니라 시민 중 10명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해도 의미부여를 해서 지어줄 것 같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나정은 그냥 보기만 해도 씁쓸한 곳 이었는데 어서 사람들이 이곳을 발견하고 다시 예전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었으면 좋겠다.
고기 파티-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사실상 제일 기억이 뚜렷하고 좋았던 시간이었다. 선생님 먼저 드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아차’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거와 별개로 고기가 너무 맛있었다. 다행히 탈도 걸리지 않았고 그냥 배불렀다. 마지막에 김치볶음밥 만들어 먹었는데 그럭저럭했다. 흘리고, 쏟고, 널브러지고 등등 많은 실수와 일이 있었는데 뒷정리와 나머지 일도 다 잘 끝냈다. 좋았다. 정말 배터지게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난 아무것도 한 일 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했던 것 같아서 미안해진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이 나도 일 좀 많이 해야겠다 싶다.
숙소에서 출발해 월성과 안압지를 지나 첨성대와 계림으로 간다. 대릉원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신경주역에서 헤어진다.
넷째 날
첨성대-슬픈 상황 2
예뻤다. 사진이 감성 있게 나온다. (가을은 감성의 계절이지). 엄청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수학여행을 온 사람들 같았다. 나이대가 저마다 달랐었는데 아무튼 예전에 한 번 와봤던 곳이었는데, 그때는 봄이었다. 그때도 생각나면서 더 자세히 보게 된다. 그때는 어려서 그냥 첨성대도 사진만 찍고 돌아서고, 제데로 보지 않고 지나쳤는데 이번 기회에 더 깊게 볼 수 있었다. 흠집도 군데군데 나 있고, 약간 기울어진 것 같기도 했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수학여행을 온 듯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있었다. 나이도 다양했다. 그때 선생님께서 사람들은 첨성대만 구경하고 그 바로 옆에 있는 계림이나 월성은 가지 않는다고 말해주셨다. 생각해보니 정말 대부분의 사람은 그랬다. 나도 예전에 첨성대에서만 있고 다른 곳은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계림’과’월성’을 이번 알 여행으로 인해 새로 알게 된 곳이다. 왠지 무언가를 잘해도 더 잘하는 사람에게 묻혀서 자기 빛을 못 내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주역-드디어
여행이 끝난 후 신경주역에서 헤어졌다. 여행이 생각보다 짧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시 ktx를 타는데 왠지 저번보다 더 익숙한 느낌이었다. ktx 안에서 숙제를 하자니 너무 졸려서 처음에는 열심히 하다가 나중에는 계속 열심히 졸았다. 여행이 끝나도 계속 여운이 남아돈다. 선생님이랑 다른 선배님들, 친구들이 한 설명 중에 계속 마음에 남는 설명이 여러 개 있다. 다음에 또 간다고 해도 흔쾌히 간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갈 때보다 돌아갈 때 짐이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특히 역에서 나갈 때 계단을 올라가면서 지금 이대로 어깨가 나가서 쓰러져도 옆에 날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조금만 줄일걸 하는 생각만 50번 넘게 들었던 것 같다. 다음번에는 ‘꼭’캐리어를 쓸 수 있는 방안을 세웠으면 좋겠다.
도착-숙제의 연속
윤찬이네서 동물농장 과제를 하다가 밤늦게 잤다. 다들 거의 2시쯤에 잤다. 나는 다음날 스케줄 때문에 8시에 일어났었는데 신기하게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문학반이 묵었던 곳은 ‘작업실’? 이라는 곳이었는데, 그 집 주인이 외국으로 가서 몇 년째 대신 쓰고 있다는데 정말 집 구조도 신기하고 인테리어도 너무 예쁘다. 아무튼 작업실에서 묵을 수 있게 해주고 음식을 제공해주신 윤찬이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는 10쯤에 일정 때문에 먼저 출발했다.
숙제는 역시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14살 인생에 벌써 “인생….참 쓰다”라는 생각이 든다.
알 여행을 돌아보며
(새롭게 알게 되고 마음으로 깊이 느낀 점)
나는 이번 알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첨성대, 나정. 그곳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정은 박혁거세라는 우리나라에서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왕이 태어난 곳이다. 하지만 나조차도 나정이라는 곳이 우리나라에 있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그곳이 어딘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해도 잘 가꾸기라도 해야 했는데 우리들은 그곳을 그냥 방치해 둔 채로 관심도 없었다.
첨성대는 정확히 말하면 첨성대가 아니라 첨성대의 옆에 있는 월성과 계림의 이야기다.
그곳들도 나정같은 신세로 첨성대라는 곳의 유명세의 묻혀 다들 잘 가지 않는다. 첨성대에서 기념사진만 차르륵 찍고 다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순장이라는 잔인한 풍습도 그렇고, 우리나라 역사의 관해서는 참 슬픈 일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지금껏 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대우도 후회한다.
재미있고 좋은 추억 많이 만든 견학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