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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하루
이향숙
그날 연수는 나를 밀실로 안내하여 눕혀놓고는 여기가 사막의 한가운데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 방의 크기나 분위기를 헤아리기도 전에 눈가리개를 씌워버렸다. 무허가 업소이긴 해도 연수는 배운 사람답게 전문가다운 풍모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그녀의 음성이 찾아온 사람을 평온하게 안심시켰다.
나는 그날 그녀와 언제부터 무슨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뚜렷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여기가 사하라 사막 모래 언덕 위다. 아무도 없다.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래요, 정말 우리 생은 알 길이 없어요. 여기까지 와서 내가 가는 길이 어딘지 궁금해요. 여정은 언제 온전해질까, 그 끝을 만나기 전 명(命)이 쏙 빠져나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미적거릴까 걱정하는 때도 있었어요.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끼기도 하고 가도 가도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다. 사막이라는 말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외롭고 쓸쓸했던 지난 시간은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선 듯했다. 고립감으로 무섭기도 했고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등등 별생각이 다 들었다.
살아간다는 것이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돌풍이 휘몰아 달콤한 것을 걷어가면 불신이 쌓인 틈새를 비집고 경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단맛을 잃고 너희로 전락한 누군가의 자기다움에 대한 멸시와 증오를 필요충분조건으로 하면서 그렇게.
그 말을 듣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몰랐다. 내 어깨를 주무르던 그녀의 손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피부와 근육에 몰려 있던 모든 신경이 잠깐의 침묵으로 자리를 바꾸어 청각으로 이동했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끝내야 하는데, 아쉽기도 전에 끝을 못 봤죠?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의 속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여자처럼 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연수의 손가락에 다시 힘이 실리고 청각과 어깨 사이에서 감각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제초제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했어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살아난 게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도 점점 의심이 가요. 조금 전에 여기 누울 때 그냥 햇빛에 말라 죽으러 왔다고 생각하자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연수 씨한테 뭔가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신(神)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게 느껴져요. 기생충같이 제 감각에 꽉 붙어 있네요.
태초에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는 어땠을까? 하늘 아래 날아다니는 새를 만들었던 신의 손길은 좀 더 세심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신은 자기 피조물과 말이 통했을까. 피조물들끼리의 소통은 어땠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수많은 창조물 중에서 유독 인간이란 창조물은 스스로 진화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걸 보면서 신은 흡족하게 웃고 있을까. 아니면 도를 넘는 인간들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계실까. 신이 만든 창조물에 불과하면서 신이 되고자 했던 피조물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신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나는 무엇인가? 나사라도 하나 빠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연수는 손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는 내 귀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몇 차례 그런 동작이 반복되자 몸에서 꿈틀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불면으로 지치고 무감각해져 있던 몸이 부스스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근육 포의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점점 몸에서 생명 하나가 밖으로 빠져나오려 움직이는 듯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신이 이젠 기적을 행할 차례예요. 벌겋게 달아오른 모래 능선에서 그가 도마뱀 한 마리를 끄집어낼 겁니다. 그의 미물은 태양을 향해 빠르게 움직일 거예요.
탐욕을 채우려는 이들의 감각으로 느껴지면서 이 상황을 조합해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쓴다. 더불어 살기 위해 세상에서 걸쳐야 했던 옷가지를 훌훌 벗어 던진 산중 호수가 좋다. 산속은 오래전부터 살아왔던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하다.
메마른 마음을 뚫고 이상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별난 자신을 향해 나는 ‘누구인가’라고 던져본다. 어쩌면 주변 사람과 닮은 모습으로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왔어도 나는 그들의 경계선 밖에 있어야 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가라앉히기 위해 몸부림친다. 아둔한 머리를 깨우쳐 줄 말을 찾아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궁금증이 해소되기도 하고, 때로는 더한 궁금증을 낳기도 한다.
나는 누구보다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했다. 연수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교양과목으로 수강했다. 그때 심리학 강의가 꽤 재미있고 흥미로워 심리상담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얘기를 듣고 한국교육 진흥협회에서 심리상담사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그는 독거노인이나 취약계층의 심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연수는 심리상담을 하는데 여러 상황을 설정하여 상담 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연수의 작전에 끌려들어 모든 걸 얘기하고 말았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다. 산업의 백미라며 생산에 채찍을 가하는 반도체는 근무 자체가 숨이 막혔다. 끝없이 신제품개발이 되어야 회사가 유지되고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프로잭이 주어질 때마다 누가 좋은 아이디어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낼까? 신경이 곤두선다.
동료들이 신기술을 개발하여 상을 받게 되면 너무도 작아지는 자신이 미워지기도 하고 경쟁에서 낙오될까 봐 전전긍긍하여 출근 도장 찍기가 망설여질 때도 있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오늘 같은 날,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술기운이라도 빌리고 싶다. 그러나 누구에게 술 한잔하자고 말해 볼 사람도 없다. 저녁이면 모두 집으로 가기 바쁜 동료들을 보면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연수였다. 저녁에 집으로 가도 되겠느냐고 한다. 반가웠다. 그러면 집 앞 마트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나는 좀 일찍 도착하여 술과 안주가 될만한 것들을 소쿠리에 담고 있었다. 그때 연수가 나타나 이것저것 식사가 될만한 것들도 담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조명등을 켜고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도 틀었다. 둘이 술을 마시며 지금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던 감정들을 쏟아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갔다. 사막 위에 홀로선 기분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첫댓글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