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30
어제 버스로 정읍(교육지원청)에 가면서 민지에게 문자를 넣었다. 민지는 내가 담임을 맡았던 반 아이다. 그 해 전교조 전남지부는 담임반 아이들에게 써준 생일시와 편지를 한 권의 작은 책자로 엮어 지부참실대회에 참석한 선생님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나로서도 더할 수 없이 고맙고 값지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정읍에 가는 버스 안에서 그 책을 읽다가 문득 민지가 생각난 것이었다. 민지에게 써준 생일시는 다음과 짧은 글과 함께 맨 처음 소개된다.
민지는 조용하고 말썽부리지 않고 따듯한 눈빛을 가진 아이다.
그 아이와 조붓한 시간을 가진 것은 아이가 아팠을 때였다.
학급의 말썽꾸러기들과 씨름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민지를 병원에 데려갔다가 오면서 나는 행복했다.
소통을 하는데 교사가 노력하지 않아도
고통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이 있다.
힘들고 지칠 때 찾아가 쉴 수 있는 아이들
그들에게도 교사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그들과 우정의 관계를 나누다보면 이른바 문제아들만 사랑하게 되는
역차별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해 민지는 몸이 많이 아픈지 조퇴를 해달라고 했는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터라 더 걱정이 되어 조퇴증을 써서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런데 얼굴빛이 너무도 창백했다. 그대로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학교 근처 동네 병원에 데려가 친찰을 받게 하였다. 의사는 민지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민지는 광양에서 스쿨버스를 타고 다녔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꽤 먼 거리였다. 의사는 링거를 맞고 갔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민지가 링거를 맞는 동안 나는 잠시 민지 곁에 앉아 있다가 학교로 돌아왔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급한 원어민 서류를 청에 보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병원에 갔을 때 민지는 아직도 링거를 맞고 있었다. 링거를 맞고 있는 민지의 눈은 무척 따듯하고 평화로워보였다. 민지의 눈을 깊이 오랫동안 바라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나는 민지의 눈을 매일 같이 들여다 보곤 했었다. 아침 조회시간과 수업시간마다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며 일이초 가량 서로 눈을 바라보곤 했었으니까. 그러한 일종의 교육적 행위로 인해 역차별의 오류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던 것이다. 민지는 단 한 번도 말썽을 부린 적이 없어서 나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기회가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역차별의 오류에서 한 걸음 더 벗어날 수 있었다. 민지 덕이었다. 얼마 후 민지의 생일이 돌아왔다.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곽민지!
매일 아침 출석을 부를 때마다
네 번째로 눈을 마주치는 우리 반 4번 타자
넌 알고 있을까?
사랑하는 일이나 살아가는 일이나
때로는 지치고 힘에 겨워
잠시 쉬어가고 싶을 때
네 눈 속을 오래 들여다 보곤 했다는 것을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음성보다 먼저 지어지던 수줍은 미소
마치 호수에 돌을 던지면 생기는 볼우물 같은
그 환한 동그라미 속으로
풍덩 빠지고 싶었다는 것을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할머니께서 묻자
넌 호떡 장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지.
그런 작은 꿈 말고
좀 더 큰 꿈을 가져보라고 하자
유치원 교사에서 명예도 있고 돈도 잘 버는
대학교수로 네 꿈이 커져 갔다지
지금은 간호사가 되어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연세가 많으신 분들
그래서 건강이 안 좋은 분들
곁에서 도와드리고 싶다고 했구나.
작은 꿈이든 큰 꿈이든
네가 드리워놓은 시원한 그늘 속으로
나처럼, 누군가 와서
편히 쉬웠다가 갈 수 있었으면!
어제의 정읍교육지원청 한 공간에서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에 나는 이 생일시를 낭송했다. 그리고 나의 심각했던 역차별의 오류에 대한 고백도 함께 했다. 어제 만남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소규모로 그것도 카페라는 사적(?)공간에서 만나다 보니 그랬을 테지만 하루가 지난 지금도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의 모습이 생생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다. 하루 몇 시간 잠깐 강사와 연수생으로 만났지만 그 이상의 의미와 추억이 만들어진 것 같다. 다른 선생님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 중 한 선생님은 마지막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오늘 연수는 다른 때와는 달리 강사 선생님의 삶을 엿볼 수가 있어서 더 생생하고 좋았어요!"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고맙고 푸근하고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올해 갓 교사가 된 새내기 선생님의 고마운 배려로 차를 함께 타고 편하게 집에 도착하니 작은 규모의 특이하고 멋진 연수를 기획하신 이경희 장학사님께서 문자를 보내오셨다.
색다른 독서토론을 경험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새내기 샘들께 아이들과의 관계를 세우는데 많은 깨우침이 일어났으니라 생각됩니다.
가족과 편안한 추석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20FA3359CF87760E)
첫댓글 "단 한 번도 말썽을 부린 적이 없어서 나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기회가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 그렇지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 정말로 관심과 사랑이 목말라서, 존재가 있다고 외치고 싶어서
말썽을 부린다는 사실을 한 참 잊고 있었다는. 추석쇠고 학교 독서모임에서 읽어 주어야겠네요. 추석 잘 쇠세요.
정말로 관심과 사랑이 목말라서.....그렇지요. 그런데 저의 경우엔 그런 생각이 조금 과했었나봐요. 그러다보니 다른 한쪽에 눈 멀어 역차별을 하게 되었구요. 그나저나 바람난달팽이님! 여전히 바람을 피우고 계시나보군요. 하하. 내일이 시월이네요. 함께 걸었던 벌교 포구 갈대밭이 그립네요. 언제 훌쩍 벌교에 가서 전화할께요. 샘도 해피 추석되세요!!
샘, 오랜만이시네요! 추석 연휴 즐기실 수 있길요^^
글을 읽으며 제게 역차별을 당하고 있는 아가들을 한참 떠올려 봤어요... 가장 먼저 학창시절 제가 떠오르고, 그런 제게 따스한 손길을 한없이 내밀어 주셨던 5학년 담임 선생님 생각도 많이 났구요. 맘이 따뜻하지네요^^
샘 손길도 따듯할 거여요.^^
솔내님도 말썽을 좀 부리지 그러셨어요. 하하. 맘이 따뜻해지셨다니 제 맘은 뜨거워지네요^^.
이번 연수 함께한 분들 복 받았네요!^^
제가 더 복 받았지요. 하하.
제게도 민지같은 아이들이 많았겠지요? 낭만샘 덕분에 남은 시간 동안은 역차별의 오류도 생기지 않도록...신경?쓸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저도 퇴임 전에 늦게라도 역차별의 오류를 자각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지나간 과거야 어찌할 수 없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서로가 좋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많은 연수와 강의를 들어도 강의하시는 분의 삶이 드러나고 나눈 적이 얼마나 있었나 되짚어보게 되요. 교육청의 연수 시스템과 관계의 문제도 다시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구요.
예 그런 점에서 이번 연수는 저도 샘들 못지 않게 오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연수기획도 중요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