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악한 꽃은 없다, 48×60㎝, 종이에 먹과채색, 2020
■ 파리와 시인
막대한 유산 탕진뒤 금치산자 묶여
글쓰기 이어가다 ‘악의 꽃’펴냈지만
詩 6편은 삭제당하고 고소까지 당해
삶은 절망·슬픔뿐이라고 결론 짓고
실어증 걸린뒤 46세 나이로 요절
10여년뒤 ‘상징주의 개척자’재평가
서정주의 ‘화사집’이라는 시의 해설에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등장한 걸 본 적이 있다. 조선반도의 시인이 멀리 프랑스 시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꽃배암’과 ‘악의 꽃’이 서로 바라보는 구도다. 설마 싶었는데 연대기를 따져보니 ‘악의 꽃’이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은 1956년. 전후의 폐허 속에 이런 책이 번역 출간됐다니 놀랍기만 하다. 서정주 하면 ‘신라와 불교’의 정신세계가 단골 메뉴였는데 거기 보들레르가 끼어들었다는 것을 이해할 만했다.
‘악의 꽃’, 프랑스의 한 젊은 시인이 낸 첫 번째 시집은 이토록 세계를 강타했고 세기를 두고 시어(詩語)로 피고 또 피어났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시들이었길래? 한마디로 모든 기성 질서와 관념을 갈아엎는 전복적 시들이었다. 그중 부도덕성이 가장 심한 6편의 시가 삭제되면서 급기야 고소까지 당한다.
그런데 ‘악의 꽃’은 흡사 그의 시에 나오는 거대한 새 ‘앨버트로스’처럼 대양을 건너 산맥을 넘었다. 스무 살 무렵의 시로 지진을 일으킨 또 한 사람의 시인 칠레의 네루다가 ‘스무 개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로 세계에 분홍빛 사랑의 불을 질렀다면 30대의 보들레르는 그 대지 위에 선혈 낭자한 붉은색 꽃을 피웠다. 죽음과 파멸을 예고하는 붉은색으로.
“시가 있기 전 사람이 있었다. 그리하여 시란 그가 토해내는 한숨이고 중얼거림이다”라는 말처럼 ‘악의 꽃’이 있기 전에 물론 청년 보들레르가 있었다. ‘악의 꽃’을 피울 만큼 그 사람 보들레르 또한 악했던가. 그건 모르겠지만 선악의 문제로 다룰 수 없을 만큼 그는 복잡한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를 지상의 화원에 핀 한 송이 저주받은 꽃으로 생각했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환자들로 가득한 동토 위의 병동과 같았고 다만 누구는 난롯가에 앉아 그 온기를 얻어내려 바둥거리고 누구는 창가에 앉아 한 줌 햇빛에 의지하고 있을 뿐, 시들어가는 생명으로 어둠이 덮쳐오는 하늘을 응시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랬다. 그는 처음부터 세상의 어둠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슬프고 우울하고 뒤틀리고 절망적인 세계였고 그래서 그는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든’이라는 시를 남기기까지 했다.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는 마음의 절규로 피어난 꽃 한 송이가 바로 ‘악의 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집 ‘악의 꽃’에는 막상 같은 이름의 시가 없다. 사악하다 싶은 시어들도 없다. ‘악의 꽃’은 잘해야 ‘축복’ 혹은 ‘아름다움’의 반대편에 서 있는 어휘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무엇보다 위악적으로 그린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아직 20대였는데 아버지는 60대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가 여섯 살 무렵 고관이었던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곧 재혼했는데, 군 고위직 출신의 남자였다. 새아버지는 생부 못지않게 어린 보들레르를 정성으로 보살폈다. 게다가 재력가였다. 문제는 한사코 삐딱하게 자라나는 문제아 보들레르였다. 부친은 그를 값비싼 사립학교와 왕립 중학교에 진학시켰지만, 그는 퇴학당한다. 머리는 좋아서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는 합격했지만 그는 대학 대신 세상을 떠돌았다.
보들레르가 성년이 된 후 새아버지는 독립적으로 혼자 살아보라며 큰 재산을 쥐여주는데 그 돈으로 센강의 생루이섬에 호화로운 거처를 마련한 채 본격적인 방탕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이었던 흑인 혼혈의 무명 여배우에게 빠져들면서 관능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같은 20대였던 우리의 시인 이상이 기생 ‘금홍’과 살림을 차리며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69’라는 다방을 운영하기도 했던 것처럼, 그는 막대한 재산을 2년 남짓 동안 탕진해 버리는데, 보다 못한 부모는 법원을 통해 그를 금치산자로 묶어버린다. 바야흐로 성년이 됐지만 후견인의 도움 없이는 돈을 쓸 수 없도록 조치한 것.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는 정치적 신념 같은 것도 없이 반항의식에서 파리의 2월 폭동 혁명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질풍노도의 20대를 지나면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글을 썼다는 점이다. 스물네 살 때 ‘1845년의 살롱’을 출판하면서 처음 미술평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특이한 것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문인들은 거의 모두가 미술평론에 한 발을 담갔다는 점이다. 미술평론은 어쩌면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 나가기 전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 와중에 대륙 넘어 가난한 알코올 중독의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 출간하기도 하고, 여배우 마리 도브랭과의 열애를 거쳐 살롱의 연상 마담 사바티에에게 빠져 그를 성모처럼 추앙하는 시를 쓰기도 한다. 그러다 급기야 1857년 펴낸 것이 시집 ‘악의 꽃’이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파리를 넘어 전 유럽을 들끓게 했고 현저히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해 6편의 시가 삭제된 다음 몇 년 후에야 다시 출간된다. 이 무렵 미술평론을 넘어 예술 전반의 평론을 시작해 화가 들라크루아의 문학적인 그림들과 음악가 바그너론 등을 평한 평론집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집 ‘파리의 우울’을 내게 되는데 시와 에세이의 중간 형태를 띤 ‘파리의 우울’은 단검처럼 치고 들어오는 ‘악의 꽃’에 비하면 한결 우아하고 부드러운 문체를 하고 있었다. 그새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새아버지는 사망했고 필명은 높아갔지만 삶의 형편은 궁벽으로 떨어졌다.
이제 곧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잘 가라, 너무도 짧았던 여름의 눈부신 빛이여….
‘가을의 노래’에서 30대의 그는 이미 온갖 신산한 삶의 여정을 지난 노인처럼 돼 있고 삶은 살아보니 결국 절망과 슬픔뿐이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썼다. ‘이쯤에서 작별을 하자꾸나, 잘 가라 세상이여’라고. 그러다가 기이한 질병의 하나로 여겨졌던 실어증에 걸리게 되고, 마흔여섯 살에 파란만장한 이승의 삶과 실제로 이별하게 된다.
그렇게 죽어 묘원에 묻혔던 그가 관에서 다시 불려 나온 것은 사후 10여 년이 지나면서부터였다. 예컨대 보들레르의 재평가가 일어난 것.
도덕 붕괴주의자, 불온하고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 그리고 퇴폐문학의 상징이자 금치산자로서 기피인물처럼 됐던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에 재조명이 이뤄졌고 그가 자신을 이어 나온 랭보나 말라르메 시인들의 교사로서 상징주의의 문을 연 첫 시인이라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줄곧 세상의 어둠과 허무만을 응시했던 그에게 사후에 꺼지지 않은 빛의 관이 씌워진 것이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와 ‘악의 꽃’
1857년 파리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그 ‘끔찍한 불온함’으로 보들레르는 출판업자 오귀스트 폴레 마라시스(Auguste Paulet-Malassis)와 함께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하고, ‘악의 꽃’은 가장 문제가 된 6편의 시가 삭제된 채 1861년 재판된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자신의 시집이 복권돼 빅토르 위고나 바이런의 책들과 서가에 나란히 꽂힐 날이 있을 것이라는 내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술이라는 것은 본디 ‘도덕적 타락 위에서 피어나는 꽃’ 같은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의 작품에 침을 뱉었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다시 책을 펼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악의 꽃’에는 ‘앨버트로스(Albatross)’라는 거대한 바닷새 이야기가 나오는데 창공을 유유히 날던 이 우아한 새가 뱃사람들의 갑판 위에 잡혀 묶인 채 그 아름답고 큰 날개를 노처럼 질질 끌게 된다고 묘사하며 대양을 큰 새처럼 날아야 하는 자신이 지상에 묶여 온갖 조롱과 비아냥을 듣는 것과 같다고 썼다. 시집 ‘악의 꽃’은 이처럼 생에 대한 거부와 연민을 담은 30여 편의 시로 이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