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하나님
들어가는 말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분명한 한 위로 교회 역사가 고백해 왔고, 성령님께서 엄연히 존재하심을 성서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 성령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이미 역사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임재를 실감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한 위이신 성령 하나님에 대해 간단한 고찰을 해보겠습니다.
Ⅰ. 성령님의 위상
1. 어원적 고찰
하나님의 영을 지칭하는 성령, 곧 거룩한 영에 대해서 구약은 루아흐(hwr)라고 이름하며, 신약은 프뉴마(pneuma)라 합니다. 창8:1이나 출10:13,19이나 민11:31등에 표현되어 있는 루아흐(hwr)는 아무 것에도 거침이 없는 강력한 바람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표현되는 프뉴마(pneuma)는 프네오(pnew)에서 유래된 말인데, 이 pnew는 '숨쉬다', 혹은 '불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입니다. 그러기에 hwr나 pneuma는 '하나님의 호흡'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모든 생명력의 근원이 되며 피조물의 세계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흡'은 하나님의 현현이신 호흡입니다. 그러기에 이 호흡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곧 하나님 자신같이 만들에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곧 신적인 퍼스낼리티를 갖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호흡에 의해 흙의 집합체가 생령이 되었던 것입니다(참조; 창2:7).
완전히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님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주와 관계하시는 하나임의 활동 양식인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제한적인 피조물의 세계에 창조주로서 내재하신다는 것은 그 철학적 사우에 있어서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피조물이 하나님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의 본질을 감안할 때 더 큰 모순에 빠집니다. 이런 양 한계에서 하나임의 호흡이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효과적입니다. 다시 말해 양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전혀 구별되시는, 그래서 세상 저 너머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 하나님과 분리되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 그의 호흡으로써 상관관계를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호흡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세계에 활동하시는 양식인 것입니다. 이런 피조물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인 하나님의 호흡은, 첫째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 세계에 결코 갇히지 않고, 둘째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간섭 없이 자존한다는 모순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피조 세계 저 너머에서 피조 세계와 상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양식인 것입니다. 이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피조 세계에 갇히지도 않으시고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부속물이거나 종속물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흡과 인간의 호흡을 같은 류로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호흡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행위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호흡은 하나님의 한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현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 양식(활동의 한 내용이 아닌)인 것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와 관계하시는 양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흡은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어원적으로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님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곧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한 위인 것입니다. 피조 세계와 상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한 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을 하나님 자신의 존재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 체계를 갖는다면 성령님의 3위로서 하나님 되심을 인식하는 대서 상당한 진전이 기대됩니다. 성부 하나님은 세상의 근원이 되시는 분(fons et origo)으로 이해하고, 성자 하나님은 세상에 내재하시어 인지되시는 분(intelligibility)으로 이해할 때, 성령 하나님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것이 고대 교회 이후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유신론적 철학이나 조직 신학의 태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3위인 성령 하나님의 위격이 차지할 터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까지의 조직 신학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흡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관계하시는 양식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이미 교회가 고백하는 대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한 위로서 성령님의 위상을 확고히 힐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이시며 구원의 주이시고 심판의 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은 그 본질상 무제한적이시고 초 세상 적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한적인 이 세상에다 그 자신의 존재를 참여시키신다는 것이 전통적인 플라톤적 논리 체계에서는 모순됩니다. 이 세상의 근거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적인 존재 양식을 취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적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상관하셔야만 이 세상이 파멸을 면하게 됩니다. 그분의 섭리 없는 세상은 존재의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세상 적인 하나님의 존재가 이 세상 적인 형식으로 현현되셔야만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과 관계하시는 한 그것은 이 세상 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 세상과 상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피조 세계를 파멸에서 구하시며 인도하시려고 이 세상적인 형식으로써 이 세상과 관계하십니다. 그 형식이 하나님의 호흡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이란 본질상 저 세상적인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관계하시는 이 세상적 존재 양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흡이란 저 세상적 하나님의 이 세상적 현현인 것입니다. 본질상 저 세상적인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만나시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모순인 것을 인식하면 피조물 세계와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호흡은 저 세상적인 하나님의 이 세상적 현현이라는 것이 당연시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호흡에서 '-의'로 번역되는 조사는 소유 관계로 파악되기보다는, 기자가 소유격으로 썼든 동격으로 썼든 상관없이 내용 면에서와 존재론적 견지에서는 그것이 동격 관계로 귀결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인 동형 동성설적 수준에서, 인간이 내뱉는 호흡처럼 하나님의 호흡을 하나님께서 내쉬는 숨결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호흡이란 이 세상에 현현하시는 저 세상 적인 하나님 자신의 존재 양식이라고 생각해야 옳은 것입니다. 이래야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호흡이 되시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이라는 성령의 어원적인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분석하면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이심이 분명합니다.
2. 삼위일체론 적 고찰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교회에 채택된 이래 정통 기독교의 교회는 성령님이 신성을 가지 한 위격으로 믿고 경배해 왔습니다. 삼위일체가 표방하는바 성령님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n)이라는 것인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령님이 하나님의 존재 양식으로서 동일 본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자와 같이 삼위일체의 교리가 확립되어 교회에서 확고부동한 영역을 차지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다루고자 하지 않고 정통 기독교 교회가 이미 고백하고 있는 삼위일체론에 비추어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간단히 시도하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로 인정받는 데까지 교회사에 등장했던 몇 가지의 교설 들을 살펴보면 첫째, 일위 일체론인 unitarianism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교설은 한 분 하나님께서 초월적이면서 동세에 내재적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둘째, 이위 일체론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교설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만의 2위가 일체이라는 생각에서 주장되었습니다. 셋째, 준 삼위일체론이 있습니다. 이 교설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을 성령님이라는 피조물이 아닌 매개적 존재가 결속시켜 준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이들 세 교설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가 되심을 믿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의 본질이나 세 위력을 갖는다(one substance three persons)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께서는 세 종류의 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기능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셋이면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는 초 논리적 내용을 삼위일체의 고리가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homoousion)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요즘의 교회 내에서 생기는 오해들은 대충 2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보다 하위에 두고서 섬김과 고백과 사귐의 대상에서 다른 두 위의 하나님보다 열등시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경향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신 성령님에 대한 바른 태도가 결코 아닙니다.
둘째는 성령 하나님을 신자들의 가처분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입니다. 곧 성령을 섬김과 사귐의 고백의 대상으로서보다는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듯한 오류입니다. 이는 성령님을 신자가 채워 보겠다는 욕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다른 두 위의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시며 결코 신자의 가처분 대상일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이신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이와 같은 것을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인정하는 교회라면 그리고 신자라면 반드시 성령님을 하나님의 한 위로 믿고 섬겨야 합니다만 아직까지 조직 신학이 성령론에 대한 충분하고 명쾌한 이론을 내어놓지 못하는 한계를 우리 교회가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성령 하나님을 경시하거나 격하시킬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요즘 같이 기계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삶이 각박한 현실에서 곤고함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런 때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경험되어지게 하는 바 피조 세계에 관계하시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 하나님과의 사귐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Ⅱ. 성령님의 사역
1. 창조 사역
성부는 창조만 하시고 성자는 구원하신다고 전제하고 성령은 경험되는 주로만 이해하는 반 삼위일체적인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의 시작은 피조 세계의 time table의 어느 시점으로 한정하는 것은 정통 기독교회가 고백하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본질상 하나님의 한 위이시면 그의 활동은 시작이 있을 수 없고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에 관계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성서의 본문으로써 명확하게 근거를 제시하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요구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초보적 단계에서 거치게 되는 사유의 과정이 신인 동형 동성설(Anthropomorphism)인데. 이런 차원의 사유라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이 찰흙으로 공작물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분이 손으로 피조물을 지으신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제한성룰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크기가 우주를 다 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다고 하거나, 아니면 그 수가 우주의 곳곳에 빠짐없이 다 미칠 수 있도록 셀 수 없이 많다거나 할 수밖에 없는데 둘 다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제한성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으로써가 아님 말씀으로써 천지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천지를 지으셔야 '하나님의 손'의 제한성이 절로 극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시작과 끝이 없는 성령 하나님께서 팔짱을 끼고 계시거나, 어디 다른 곳에 가 계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창조는 성부의 사역이 아니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부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서 분리되어 한 부분의 하나님으로 격하되어 창조의 사역을 감당하신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을 높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낮추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조 사역은 피조물을 비롯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피조물과 상관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으로서 성령님의 참여는 자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활동의 시기나 영역을 제한하는 무모한 발상을 더 이상은 금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한 성령님의 삼위일체론 적 이해를 성육신이나 오순절 사건들을 전제로 이해를 시도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피조물 세계의 어느 역사적 시점에서 성령님의 사역의 시작을 찾는 것은 사위 중 한 위이신 성령님을 삼위일체론 적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아니라 성령님의 한 위를 독립시켜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일반적 사역
성령님의 사역은 성육신이나 오순절 사적 이전에도 있었고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성령님은 윤리적 통찰력의 근원이 되시기도 하며(참조; <삼하23:2 ; >단4:8,9) 순결하게 하는 원동력이시기도 합니다(참조; <사63:10 ; >슥12:10). 사시들의 영웅적 자질을 갖게 하는 데도 구원이 되며(삿13:25), 전쟁에서 지략을 출중케 하여 승리하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참조; 신34:9). 심지어 예술적 재능의 원천이기도 한 예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참조; 출36장).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이성에 있어서 문화와 문명을 창달할 수 있는데, 이 이성이 성령에 의해 인간에게서 발현된다는 것이 욥32:8,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히 성령은 인간이 일반적인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구원사적 사역
죄 된 인간이 조를 자복할 수 있는 것이 인간 자신의 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성령님께서 깨우침을 주시매 인간이 그것을 수용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성령은 일깨워 줍니다(참조; 12:3).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참조; 마16:17). 성령은 죄 된 인간을 깨우치시고 가르치시어 하나님 앞에 자복케 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은 갖가지의 은사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제공함으로 연약한 신자들이 굳건히 서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님의 종이 될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하여 줍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진노 아래 있는 인생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되돌리는 일을 성령께서 감당하시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곧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서 그의 종이 되도록 인생들로 하여금 조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도우시는 것입니다.
Ⅲ. 성서에 예시된 성령 사역의 예들
1. 구약에서의 예들
1) 하나님의 활동에 관계하시는 경우
히브리의 기자들은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앞으로 무엇을 이루어 나가실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서는 피조물의 세계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로 인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63:10-14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신실치 못함을 슬퍼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야훼의 인격적 임재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사40:13-18까지의 예를 본다면 하나님의 신이 야훼 자신을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대해 설명하다가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18절)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의 활동은 하나님 자산의 임재로 인정되어 있습니다.
2) 창조에 관계하시는 경우
창1:2의 하나님의 신은 무형의 카오스에 질서와 생명을 부여하는 창조적 힘입니다. 시33:6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입 기운 곧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님의 사역임을 분명히 드러내어 줍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는 창조에 관계하시는 바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의 관계 양식으로서 하나님의 동일 본질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종말론적 상황과 관계하시는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마지막 날을 기대하며 그 날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성령님에 사로잡힐 것을 종말론적인 희망을 안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극복되어야 할 현실의 처참함과 비참함 그리고 하나님과의 괴리성은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물 붓듯 함으로써 마침내 그들이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종말론적 기대에는 항상 하나님의 신이 관계하시는 것을 성경의 기록들은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전격적인 간섭 아래서 새로운 세계 질서에 의해 복을 누리게 될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신이 가계함의 전형적인 예가 사44:3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는 하나님의 신은 가히 창조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종말에 당연히 관계하시는 것입니다.
4) 심판과 관계하시는 경우
시51:10,11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힘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생각과 뜻이 아님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구약은 여로 곳에서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은 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베푸실 마지막의 날에 거뜬히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일반 백성들이 한결같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한계 상황의 돌파를 위해서 '위에서부터 성신이 부어질'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참조; 사32:15). 이렇게 위에서부터 성신이 비 오듯이 부어지면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 가운델 거뜬히 걸어갈 수 있어서 마지막의 심판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감 시키는 경우
구약은 한 개인의 탁월한 능력에 의해 그가 위대한 일을 했다는 식의 표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쓰임의 용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하나님께서 능력과 기능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나 예언자나 선지자나 영웅이나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들의 쓰임의 용도에 맞게 능력이나 지혜나 힘이나 지략이나 용기 등을 공급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만 예언을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감화시키고 있어야만 합니다.
다윗은 삼하23:2에서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능력은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골리앗을 이기고 왕이 되어 위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이 그를 감동시키어 그를 이끌었기 때문임을 다윗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왕상22:24의 경우를 보면 거짓 선지자인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치면서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가야가 참으로 선지자면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이 자신을 떠나서 미가야에게 옮기었느냐고 대듭니다. 거짓 선지자인 시드기야마저도 자신이 선지자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떠나지 않아야 함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11:29에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감동해야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나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신께서 역사하심으로써만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통치자나 영웅도 성령의 감화와 인도에 의해서만 자신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음이 구약성서에는 수차례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영웅들의 육체적 힘의 원천은 야훼의 성령임을 구약은 증거 합니다(참조; <삿6:34 ; >삿15:14). 성령님의 힘이 사고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물리적인 에너지로까지 작용함을 구약성서는 증거합니다(참조; <겔2:2 ; >겔11:24).
6) 이스라엘 공동체에 관계하시는 경우
성령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느 백성하고만 관계하시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로서 이스라엘 전체를 사역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것이 구약의 여러 곳에서 예시되어 있습니다. 사4:5에는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앞에는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라는 표현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를 덮으시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개인을 감동하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인도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초림하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굽어보시며 통탄해 하시던 것과 상관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신약에서의 예들
1) 복음서에 예시된 경우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도 성령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이끄심을 볼 수 있는데,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요한과 시므온 등이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가 차매 성령께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 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수태를 고지해 줍니다(눅1:35).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예는 복음서에서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장면은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들이시면서 역사를 뚫고 오신 것처럼 하나님이 한 위이신 성령님께서 피조물이 형체를 입고서 비둘기처럼 임재하심을 보여 줍니다(참조; 눅3:22).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께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는 사건이 막1:1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3:28-30까지의 기록에는 성령님의 훼방에 대한 예수 자신의 말씀이 기록되러 있는데, 이 말씀은 성령님에 대한 성자의 중요한 언급입니다. 구원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서는 신앙 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반드시 역사하셔서 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셔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성령님께로 부터의 이끄심을 얻지 못하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의나 지혜로써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는 없고 다만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는 인도하심을 거역하지 않음으로써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도행전에 예시된 경우
사도행전은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적 임재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연관짓고 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행16:17을 보면 예수의 영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남겨진 그의 제자들을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항상 함께하신다 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영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상 생활 중에 같이 경험했던 자로 그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행2:33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예수님의 영은 바로 예수께서 보내시마 약속하신 그 성령님임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 하늘로부터 비로소 내려오신 것이 아님은 베드로의 설교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님은 구약 예언들의 영감이 되었고 영웅과 통치자들을 인도하셨던 그 성령님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참조; 행2:16-21).
베드로가 백성의 자로와 관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때 그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써가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림으로써 담대히 외쳤다는 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분위기로 보아 너무나도 당연합니다(참조; 행4:8). 베드로만 그렇게 성령 충만으로 외친 것이 아니고 무리가 다 그러했다는 기록이 같은 장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가 서로의 삶을 전혀 격의 없이 하나 되어 나누는 광경이 32절 이하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가적인 관심은 성령님에 사로잡히어서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그것입니다. 성령님이 세계적인 선교를 인도하시고 감독하시는 능력임을 보여 주는 사건을 빌립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경우로 대변해 줍니다. 행8:29에는 빌립이 세계적 선교를 위해 이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나라는 지시를 받은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개인과 공동체가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아서 다가올 성취의 시대를 향해 복음을 증거하고 삶을 나누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장면들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3) 바울 신학에 예시된 경우
롬8:9-15까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에 대하여 언급하다가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기독교회의 이해의 틀로 접근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님을 병행해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로써 바울은 고후13:13에서 '주 예수', '하나님', '성령'의 교통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8:26에는 성령께서 탄식하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바울도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성령님과의 관계를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바울이 성령님이나 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 충분한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거나 성령님의 체험에 대해 가벼이 생각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엡5:18에서 바울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지상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 나라에로 들림을 받는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 구원에 대해 확실한 보증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구원받음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없다면 신자의 삶은 불안과 고통과 안타까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불확실성에서 확고부동한 보증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구원 얻기를 원하는 신자의 지상 생활에서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이 보증을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 고후1:2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살면서 구원에의 확실한 보증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사역 중에서 구원에의 보증, 곧 그리스도 안에 견고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인 쳐 주시는 확실성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사로잡힌 현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장래의 추수가 부분적으로 시간의 질서를 뛰어넘어 이미 실현된 것으로서 '첫 열매'라고 바울이 표현한 것을 본다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바울의 혜안을 감탄치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성자의 사역이나 성령의 사역이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마지막 추수 때에 들림을 입게 하는 그것인데, 그 추수의 첫 열매를 성령께서 성령에 사로잡힘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한적이긴 하지만 현재에 이미 맛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 목회 서신 등에 예시된 경우
교회 내에서 여러 이단 사설에 사로잡힌 자들이 분란을 일으킬 때에 그들에 대한 징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교회 내에서 누가 믿음을 떠나서 귀신이나 미혹하는 영을 좇을 것인가까지 아시고 일러주실 것이라는 말씀은(참조; 딤전4:1) 흐트러진 교회 공동체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데 충분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의 예언적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까지 역사하신다는 말씀은 오늘날에도 성령에 사로잡히지 못하고 악한 영을 좇는 교회사적 현실을 볼 때 큰 가르침을 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신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참조; 히9:14). 성령의 사역이,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구원주로서 이 세상의 죄를 지시고 승리하시는 그 일에도 제한 당하시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 가현설이라는 이단적 교리가 난무할 때 <요일4:2 >은 성령의 사역이 심오한 국면까지 감당함을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인성으로서 성육하심을 믿는 그것을 성령께서 주장하신다고 합니다. 성도의 생활과 관계되는 거의 모든 경우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써 가능하거나 온전케 된다는 것을 목회 서신이나 그밖에 신약의 기록들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Ⅳ. 성도와 관계하시는 유형
1. 존재의 근거
성령의 인도 없이 자연인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고전12:3 >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성령은 자연인인 인간이 성도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되십니다. 성도라는 존재의 근거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계시와 이성과의 연속성에 대해 조직신학은 이론이 분분합니다만 성서는 이와 같이 분명히 말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성서는 이를 단연코 거부합니다. 세상의 어는 주구도 성령의 인도함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유로 주를 만났든 지간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는 그를 성도일 수 있게 하는 성령님의 근원적인 사역을 감사해야 합니다.
2. 일깨움의 주체
성령께서는 하나인의 백성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일깨워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지식의 신임을 성서는 말합니다(참조; 사11:12). 한편 성령께서는 장래의 일을 알게 하시는 역사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참조; 요16:13). M.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인데 이 세계 내 존재가 세계 밖에서 준비되어 있는 장래의 일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장래의 일을 믿음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재림하실 주를 알고 있고, 심판하실 주를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의 내재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닌 성령께서 장래 일을 알게 하심의 사역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은사의 수여자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면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늘나라의 세계를 맛보면서 세상에 휩쓸려서 세속화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이 세상의 자연 질서에 대해 초월적인 선물을 주셨습니다. 곧 성령의 갖가지 은사를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신앙에 유익을 주므로 사모해야 합니다.(참조; <고전 12:7>).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뜻대로 맡겨야 합니다(참조; 고전12:11). 자의적인 필요나 요구에 의 해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사를 많이 받은 것이 곧 신앙심의 척도인 양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경시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이 악한 세대에 전 존재가 노출되어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종 됨을 세상에 알리고, 세상의 종 되지 않고 임박하게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성도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고전12:8-10에 기록되어 있는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 등의 은사를 성도들에게 수여하십니다. 이 수여의 목적은 예수께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에 그의 종들이 그의 나라를 대망하며 마지막 때까지, 곧 그가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잘 견뎌내어 그와 같이 부활과 하늘나라에도 들림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예수의 영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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