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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이스탄불 번화가 폭탄테러 87명 사상
2022년 한국-일본, 한국-미국, 한국-미국-일본 연쇄 정상회담
2020년 잠비아 첫 코로나 국가부도,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경기침체로 외채이자 4,250만$(473억원) 못 갚음
2017년 오청성 판문점 JSA으로 귀순
2017년 11월 13일 JSA에서 오청성 북한군 병사가 군용 지프를 타고 MDL로 돌진하다가 배수로에 빠지자 차에서 내려 남쪽으로 뛰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의 총격으로 5∼6군데에 총상을 입었으며 무사히 귀순하였다.
2015년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단체 IS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다발 테러 130명 숨짐
2010년 미얀마 아웅산 수치 여사 가택연금 해제
아웅산 수치 여사, 13일 석방. 지난 7일 20년 만에 총선을 실시한 미얀마 군사 정권은 일주일 뒤인 13일 수치 여사에 대한 가택연금 조치를 해제했다. 수치 여사는 군사정권에 의해 1989년 첫 가택연금 조치를 당한 뒤 15년을 연금 상태에서 생활해왔고, 최근 7년 동안은 줄곧 외부와 단절된 상태였다. 이날 오후 자택 주변의 바리케이드가 치워진 뒤 6시쯤에는 약 5000명의 지지자들이 담장 밖에 몰려왔다. 전통 의상을 입은 수치 여사는 담장까지 나와 “이제는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시기다. 국민 전체가 화합해 노력해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사회는 일제히 환영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및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 각국 지도자들도 환영의사를 밝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수치 여사의 존엄과 불의에 맞서는 용기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토르비오에른 야글란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의장은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을 위해 오슬로를 방문해 달라”고 초청했다.
수치 여사는 지난 1991년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시상식에는 아들들이 대신 참석했었다.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선정으로 불만이 많은 중국 지도자들은 논평을 내지 않았다.
2009년 국민연금, 영국 HSBC 건물 구입
2009년 11월 13일(현지시각) 국민연금이 (현지시각) 영국 런던에 있는 ‘HSBC 타워’를 7억 7250만 파운드(약 1조5000억원)에 매입했다. HSBC타워는 런던의 금융 중심가인 카나리워프(Canary Wharf)에 있는 지상 45층, 지하 4층 규모로 2002년에 세워졌다. 런던 금융가의 상징적인 빌딩이다.
HSBC는 작년 시가총액과 자본 규모 등에서 세계 최대 금융그룹이었고, 올해는 중국의 공상은행에 밀렸다. 투자은행(IB)보다 상업은행 업무를 위주로 해온 HSBC는 현재 세계 86개국에 8500개 지점을 갖고 있다.
HSBC홀딩스는 2007년 5월 HSBC타워를 10억 9000만 파운드에 매각했다가 지난해 12월 8억 3800만 파운드에 되사들인 바 있다. HSBC는 본사 빌딩을 국민연금에 매각한 뒤 앞으로 17.5년 동안 장기로 재임대해 사용하게 된다. 현재 임대료는 연간 4600만 파운드(약 900억원) 규모다.
2008년 종부세 '세대별 합산부과' 위헌
2008년 북한 남측 민간단체들의 대북전단지 살포 문제삼아 남북당국간 직통전화 라인 폐쇄
2008년 평양에서 ‘일본의 역사왜곡 및 독도강탈책동반대 남북공동토론회’ 열림
2007년 동대문운동장 폐쇄, 마지막 경기 2007서울시 고교야구 가을철리그 결승
2005년 제1회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서 삼성 라이온즈 준우승(지바롯데 우승)
2005년 중국 길림성 길림의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의 벤젠공장에서 폭발사고
2004년 경복궁 경회루 40여년 만에 개방
2001년 `수지 김 사건`, 남편의 자작극으로 밝혀져 파문
2001년 11월13일 수지 김사건의 살인용의자로 남편 윤태식씨가 구속됐다.
1987년 1월 홍콩의 아파트에서 부인 수지 김을 살해한 혐의다.
홍콩에서 남편을 북한으로 납치하려다 실패했다는 당시 안기부의 발표 뒤 현지에서 피살된 채 발견됐던 수지김.
당시 '홍콩 여간첩 수지 김 피살사건'으로 불렸던 이 사건은 남편 윤씨가 아내를 살해한 뒤, 싱가포르 주재 북한 대사관을 통해 자진 월북하려다 실패하자 납북미수사건으로 꾸며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당시 단순 살인사건임을 알고도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씨의 지시로 대북관계에 이용하기위해 납북미수사건으로 조작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공소시효 15년 만료를 불과 2개월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2001년 인기 탤런트 황수정,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
TV드라마 ‘허준’에서 ‘예진 아씨’로 출연한 인기탤런트 황수정(여·30)씨가 세 차례에 걸쳐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로 구속됐다.
수원지법은 13일 수원지검 강력부(부장 김홍일)가 이 같은 혐의로 청구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황씨는 지난 9일 오전 2시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 강모(33·유흥업소 영업사장)씨 집에서 강씨가 구입한 필로폰 0.03g을 술에 타 번갈아 마시는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검찰은 밝혔다. 황씨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약을 탄 술을 강씨와 마신 적은 있지만 필로폰인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황씨는 이날 오후 5시40분쯤 수원구치소에 수감됐다.
이후, 연기활동을 중단했던 황씨가 뮤직비디오 촬영으로 5년만에 연예계에 복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의 찬반논란이 뜨겁게 일기도 했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 브라질에 415억달러의 구제금융지원을 승인
1997년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와 조순 민주당 총재, 통합당의 대통령후보를 이총재로, 당총재를 조총재로 공식발표
1996년 조선총독부 완전 철거
1995년 8월 15일 민족 정기 확립의 일환으로 시작됐던 구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가 1996년 오늘 완전 철거되었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상에서 완전 철거됨으로써 민족정기 발현의 걸림돌의 하나였던 오욕(汚辱)의 잔재는 이제 사라졌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경복궁 궁궐과 누각 및 홍례문 4000여 칸을 허물었다.
1911년 일제가 초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하기로 결정했을 때 일본 건축가들은 그 부지를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자리나 지금의 서울 시청 자리 등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는 이에 반대, 경복궁을 철거할 것을 지시했다.
1926년 일제가 우리민족의 정기를 짓밟기 위해 경복궁 한복판에 세운 총독부 건물은 일제 침략과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다.
총독부 철거로 자리를 잃은 국립중앙박물관은 2003년 서울 용산 가족공원 10만평 부지에 새롭게 들어서게 된다.
총독부 건물 철거는 많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민족 정기 확립과 일제의 완전한 청산을 위해서 철거해야 한다는 측과 오히려 오욕과 모멸의 역사 현장으로서 치욕의 역사로 남겨야 한다는 측까지 수많은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철거로 결정되고 불탄 경복궁을 새롭게 중건하고 총독부 건물 자리의 중앙박물관은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나 최근 용산의 박물관 자리가 미군의 헬기 연습장이 인근에 있어 소음이 심하고 충돌 위험이 있어 박물관 부지로 적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만만찮다.
1995년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 사임. `일본은 식민통치기간중 한국에 좋은 일을 했다`고 망언
1995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한국 방문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내외가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1995년 11월 13일, 4박5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중국 국가주석으로는 첫 방한이었다.
양 정상은 14일 청와대에서 한중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및 국제정세와 경제협력 증진방안을 비롯한 쌍무현안에 관해 폭넓게 논의했다. 또한 한반도 주변정세에 대해서도 협의, 한반도 평화와 안정이 한중 양국에 긴요할 뿐 아니라 아·태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면서 한반도 문제는 주변국의 이해와 협력하에 남북 당사자간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강 주석은 이어 경제 4단체장이 주최하는 오찬에 참석한 뒤 국회 본회의에서 연설했다.
15~16일 양일간에는 삼성반도체, 현대자동차 등 지방 산업 시설을 시찰한 후,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7일 일본으로 떠났다. 강 주석의 이번 방한은 그동안 경제분야에만 치중해 온 한중관계가 점차 정치·외교 분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93년 파루크 레가리, 파키스탄 대통령으로 선출
파키스탄 의회가 1993년 11월 13일 베나지르 부토 신임 총리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파키스탄 인민당(PPP) 출신의 파루크 레가리 외무장관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레가리 후보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의 표결에서 경쟁자인 와심 사자드 대통령 서리를 1백71대 1백8의 큰 표 차로 누르고 이겼으며 4개 지방의회가 별도로 실시한 표결에서도 크게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펀자브지역 대지주가문 출신인 레가리 대통령은 라호르지역의 명문 아이치손대 경제학부를 마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 유학했다. 1963년에 귀국,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75년 에 상원, 1977년에 하원에 진출해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지아 울 하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1982년에는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돼 4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92년 육군사조직 `알자회` 파문
1985년 대전 제2국립묘지 준공
1985년 콜롬비아 루이스화산 폭발로 2만5000여명 사망
오랫동안 휴면상태로 있었던 남미 콜롬비아 서부의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5399m)이 1985년 11월 13일 폭발해 2만5천명의 사망자와 1만4천여명의 이재민을 냈다.
1902년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화산폭발 이후 금세기 최대의 화산참사로 기록된 이 폭발사고는 사고가 나기 전 폭발조짐이 보였으나 대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만년설이 녹아 홍수로 변함에 따라 그 피해가 더 컸다.
루이스산을 포함하고 있는 남미 대륙서쪽의 안데스산맥 일대는 환태평양 지진-화산분화가 많은 지역으로 9월경부터 분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다 이날 폭발했다
1984년 중국 산서성 당서기 선거, 중국사상 처음 비밀투표 실시
1982년 레이건, 대(對)소련금수조치 해제발표. 새 동서무역정책 선언
1981년 미국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 2차 발사
1980년 건설부, 동서고속도로(171.5km) 건설계획 확정
1980년 제15차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대회 개최
1974년 아라파트 PLO의장 유엔총회서 첫 연설
1974년 유엔총회, 남아공화국 축출안 가결
1971년 미국 유인 화성위성 마리너9호 화성궤도 진입
1970년 시리아 무혈쿠데타 아사드 국방장관 정권장악
1970년 방글라데시 벵갈만에 해일 사망 30만 명
1970년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에서 시위를 하던 중 분신.자살하다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근무ㆍ 철야작업은 예사였고, 만성 위장병과 신경통·피부병 등도 다반사였다. “사흘밤이나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시다 앞에서 재단사 전태일(全泰壹)은 절망감을 느껴야했다.
그는 1964년, 16세의 나이로 평화시장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만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다. 어린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안해본 것이 없었다.
열악한 노동현실을 자각한 뒤부터는 근로기준법 책을 끼고 살았다. 업주들에게 개선을 요구하고 시청과 노동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싸움도 벌여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무관심과 냉대뿐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 위해 평화시장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는 피맺힌 절규를 쏟아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또 외쳐댔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22세 전태일은 자신을 불태우며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그날밤 10시,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눈을 감았다. “배가 고프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 된다
1966년 일본, 밀월여객기 추락. 신혼부부 11쌍 등 51명 몰살
1964년 포천서 버스에 불 사망 15명 부상 42명
1962년 한국-독일 차관협정 조인
1961년 쿠알라룸프르에서 콜롬보계획 각료회의 개막
1960년 시리아 아무데 영화관 불 사망 152명
1960년 3.15부정선거로 기소된 장경근 전 내무장관이 입원중인 서울대병원에서 일본으로 탈주
1956년 미국, 공공버스 인종차별 위헌 판결
1955년 12월 1일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의 흑인 재봉사 로사 파크스 부인이 버스에 올라타 백인 전용석에 앉았다. 버스 좌석은 앞쪽이 백인용, 뒤쪽이 흑인용이고 중간은 백인이 없을 때만 앉을 수 있었다. 곧 백인전용석이 다 차버리자 운전기사는 그녀에게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몹시 피곤했던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당시 미국 남부에는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흑백 인종이 함께 있지 못한다는 '짐 크로(Jim Crow)'법이 일반적이었고, 이에 버스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운전기사가 승객 자리를 지시할 수 있다"는 시(市)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한해 전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며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를 금지시킨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기억하고 있는 흑인들은 재판 날인 12월 5일 시내버스를 보이콧했다. 파크스는 재판에서 14달러의 벌금을 내고 구금형을 선고받았지만 90%의 참여율에 고무된 흑인들은 26세의 킹 목사를 몽고메리개선연합의 대표자로 선출하고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보이콧을 계속하기로 했다. 결국 파크스 부인은 몽고메리 지방법원의 항소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버스 수입이 65%나 떨어지고 장기화된 시위로 피해를 입은 몽고메리 시(市)는 킹 목사 일행을 제소해 1심에서 유죄를 끌어냈다. 죄목은 보이콧을 금지하고 있는, 1921년에 제정된 반노동법의 위반이었다. 킹은 즉각 항소했다.
11월 13일 법정에 들어선 킹은 낙담했다. 1년 전 파크스 부인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그 판사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킹의 얼굴에는 곧 희망의 빛이 넘쳤다. 조금전 ‘공공버스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후 계속된 인권 운동으로 1964년 공공장소에서의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Civil Rights Act)' 제정으로 이어졌고, 파크스 여사는 '미국 인권운동의 어머니'로 여겨졌다.
1946년 영등포역 구내서 열차충돌 41명 사망
1945년 군정청에 국방사령부 설치, 모병실시
1945년 남북한, 바터제 교역 채택
1940년 소형군용차 지프 개발
제2차 세계대전 초 미국과 연합군은 독일의 월등한 기동력의 원천인 네바퀴 구동차량에 대응할 4륜 구동차 개발에 전력을 다했다.
이후 아메리카 밴텀, 포드, 윌리스 오버랜드사 등 3개사의 치열한 경쟁 끝에 윌리스 오버랜드사가 미국방성과 정식계약을 맺고 최초의 지프 모델인 `MB`가 생산됐다.
지프는 다용도라는 뜻의 `제너럴 퍼퍼스`(general purpose)의 앞글자 GP를 따서 이름지어졌다. 또 `jeeep`라는 기묘한 소리를 내는 만화주인공의 강아지가 유행한 것에서도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지프는 소형4륜 자동차로 구동력이 강하고 구조가 간단하여 주로 군용으로 사용됐다. 또, 가파른 길을 올라가거나 시냇물을 건너가는 데에도 유용했다. 특히 지프는 2차 세계대전 중 66만대를 생산하여 전쟁에 투입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전후에는 건설, 농업, 레저용으로 민간인들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프는 현재 아메리칸 모터스사가 등록상표를 가지고 있으나 많은 자동차 회사와 라이센스계약을 체결해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1933년 독일 총선거에서 나치스 대승
1921년 안창남, 한국 비행사 최초로 저공 비행에 성공
그는 1921년 22세의 나이로 일본 항공국에서 실시한 제1회 비행사면허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하고 그 이듬해 12월 경성악대(京城樂隊)의 우렁찬 환영의 주악과 5만 군중의 환호성을 받으며 여의도 상공에서 쌍엽 비행을 한 최초의 한국인 파일러트(Pilot)이다.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의 자전거
그가 여의도 상공 곡예비행을 무사히 마친 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노래이다.
우리의 민요 청춘가에다 가사를 그렇게 바꾼 것으로써 이른바 <안창남 비행기>로 알려진 노래인데, 그 당시 이은상(李殷相) 작사 <사우(思友)>와 함께 한국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애창곡 중의 하나로 유명했었다.
그 노래는 어느덧 동네에 일본 순경이 나타나기라도 할라치면 아이들은 그 순경의 등 뒤에다 대고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를 일부러 크게 불러대면 꺾여진 민족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는 데 한몫을 차지하였던 노래이기도 하다.
일본한테 땅을 밟히고 인권을 무참히 유린당해야만 했던 치욕의 시절에 유행된 <안창남 비행가>는 당시의 울분을 달래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최초의 한국인 파일러트였던 안창남이 지닌 민족성, 그가 비행기 추락으로 서른 한 살의 생을 마칠 때까지 가슴속 깊이 파묻고 다녔던 통곡의 한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를 후세의 우리들은 꼭 기억해 볼필요가 있다.
1921년 미국-영국-프랑스-일본, 태평양방면 영토권보장조약 조인
1918년 여준 등 중광단인사 39명 만주에서 독립선언서 발표
1918년 오스트리아 공화국 선포
1908년 나비연구가 석주명 출생
1907년 프랑스 자동차 제작자 폴 코르뉘, 헬리콥터를 설계, 최초 시험비행에 성공
1903년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 사망
1893년 비타민 K의 연구로 유명한 미국 생화학자 에드워드 도이지 출생
1887년 주미공사 박정양 일행 향미(向美)
1887년 트라팔가 광장에서 ‘피의 일요일’(그림) 충돌이 일어나다.
1868년 이탈리아 작곡가 로시니 사망
1851년 영국-프랑스간 최초의 통신케이블 설치
1850년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출생
1947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돌격소총인 AK-47을 개발.
1538(조선 중종 33) 경주 사고 불에 탐
1460년 포르투갈 항해왕자 엔리케 사망
앤리케는 근대 세계를 탄생시킨 선구자였다. 포르투갈 건너편의 모로코 해안선 이남으로 항해해본 적도 없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항해왕자 엔리케라 불렀다.
그는 부친인 주앙1세 국왕이 다스리던 다소 후진적인 작은 나라 포르투갈에서 세째 왕자로 태어나 세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과 가장 부유한 해외 무역로를 만든 사람이었다. 엔리케는 약관 20세에 국왕, 두 형과 함께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에 있는 북아프리카 해적들의 기항지인 세우타를 점령했다. 세우타의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해 국왕은 세째 아들 엔리코를 세우타 총독에 임명했다. 엔리코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슬람 세계의 동쪽과 남쪽 경계선 너머에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주민들이 살고 있을 것이며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교 특히 프레스터 존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문제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프리카를 남하해 돌아가면 그들을 만날수 있을 것이며 그곳에서 양쪽에서 이슬람 세력을 협공하면 그들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정도로 신앙심도 깊었다. 엔리케는 휘하의 함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남쪽으로 항해하라" 하지만 14년동안 아프리카 보자도르 곶 남쪽으로 진출한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항해길이 험난했다.
그러던중 1434년 휘하 선장 가운데 한 사람인 질 이아니스가 신형 선박 카라벨을 타고 보자도르 곶을 돌아 귀환했다. 새로운 항해 시도를 거듭하던 1460년 엔리케는 사망했다. 아프리카 해안선이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보고를 막 올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354년 기독교 사상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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