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안 길에서
신외숙
전동차 차창 밖으로 낯선 풍광이 휙휙 지나고 있었다.
경철은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 앞에 있는 여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그녀는 보라색 융으로 만든 겨울 외투에 챙이 긴 검정 모자와 검정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아이 칼라는 흉하게 짓뭉개져 있었고 메니큐어는 무지개색 총천연색에다 말장화까지 신고 있었다.
섹시함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유난히 큰 가슴은 얇은 망사로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노랑색으로 물들인 머리칼은 갈기처럼 흐트러져 지푸라기 같다. 여자는 초록색 반지를 연신 매만지며 눈을 내리깔고 있다. 상당히 기분 나쁘고 소름 끼치는 모양새다. 음산한 분위기가 여자의 전신을 휘감고 있다.
경철은 여자에게 눈빛을 쏘아 보냈다. 영적으로 악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는 속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며 여자에게 다시 한번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녀 역시 소름 끼치는 미소로 경철을 쏘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여자는 도로 자리에 앉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콤팩트였다. 그녀는 여봐란 듯이 콤팩트로 얼굴을 두드리며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웃었다. 승객들 중에는 그녀의 모양새를 지켜보며 수근대는 사람도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는 남자 친구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저 여자 아무래도 수상해, 귀신 들린 무당 같지 않니?”
“꼭 마녀 같애, 그 영화에 나오는.”
“사이코 내지는 좀비? 정신병원에서 막 탈출한 여자 같애, 옷차림도 그렇고 저 손가락 좀 봐 구부러진 게 꼭 마귀할멈 같애.”
“그러게 눈빛이 영화에 나오는 드라큘라 눈빛 같애 도대체 뭐하는 여자일까. 평범한 여자 같진 않고 가족은 있을까 직업은 무당?”
“요즘 무당들은 그냥 평범해 보이던데.”
“술집 운영하는 포주 아닐까, 불쌍한 여자들 잡아다가 팔아먹고 화대 챙기고 조직 폭력배와 연계해서 사람도 막 죽이고.”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그들은 귓속말로 말하다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동시에 그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영화에 나오는 흡혈귀, 마녀 형상처럼 보였다. 더 가관인 것은 주변을 둘러보며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까지 내비치고 가만히 웃는 것이다.
가지 가지 하는구나.
사람들은 비웃음을 보이며 흘겨봤다. 여자는 말장화도 모자랐는지 이젠 다리를 꼬기까지 했다. 말장화 위로 허연 허벅지가 보였다. 천박함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혼잣말을 하더니 경철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경철 역시 그녀가 보내는 신호를 알아 차렸다.
전동차는 교각 위를 달리다 다시 시내로 접어들었다. 직사각형 빌딩이 역한 튀김냄새가 역하게 풍겨져 왔다. 포장마차가 꽉 들어찬 거리에서 취객들의 음성도 들려왔다. 도심은 언제나 불야성이다. 언제나 회색지대로 사람들의 마음도 둘로 나뉜다.
선과 악이 흑암과 빛이 언제나 공존한다. 조물주는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고루 햇빛을 주시고 물과 공기를 주시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전동차의 출입구에 섰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전동차는 도심을 벗어나 경기도 외곽지대를 달리기 시작했다.
너른 벌판과 개울물이 보이고 소읍 거리를 지났다. 경철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 깜빡 잠이 들었다. 피곤이 전신을 짓누르듯 몰려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얼마나 잤을까. 깨어 보니 전혀 낯선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큰일 났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안 되는데.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동차는 이미 목적지를 지나 산야가 보이는 종착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는 약간 짜증이 났다. 시계를 보며 출입구를 향해 가는데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꿈을 꾼 듯한 멍때린 느낌이었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가 앉아서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이상하다. 그새 내렸나. 종착역을 알리는 멘트가 나오며 전동차가 멈춰 섰다. 전동차를 막 내리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면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뒤로 홱 돌리는 순간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였다. 그녀가 노랑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그를 바라보는데 손목에 꿈틀 꿈틀 뱀 문신이 보였다.
빨강 파랑 노랑색이 뒤섞인 뱀의 형상을 그에게 보란 듯이 들이대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오며 경철의 어깨를 툭 쳤다. 자기를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그는 자석에 이끌리듯 여자의 뒤를 따라 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사 밖으로 나오니 처음 대하는 낯선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선가 장구와 꽹과리 소리가 들리고 곡소리도 들렸다. 취객이 질러대는 괴성으로 째진 여자의 비명도 들려왔다. 장마당이 섰는지 파라솔과 함께 많은 장꾼들의 모습도 보였다. 요즘 시골 장마당은 예전 같지 않다. 텃밭에서 직접 가꾼 농산물이나 산나물을 팔기 위해 나온 사람들은 별로 없고 대형 트럭으로 장마당마다 옮겨 다니며 파는 상인들이 훨씬 많다.
경동시장에서 도매로 떼다 팔면서 산에서 직접 뜯은 나물이라고 속여 파는 경우도 있고 옷이나 장신구 신발은 물론 반찬 종류로 대량으로 구매해 소매로 판매한다. 발색제로 물들이고 각종 인공조미료 첨가해 만든 반찬이 대기 오염과 함께 먹거리로 판매된다.
시골 장마당이라 해서 먹거리가 저렴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산지라고 해서 더 비싸고 위생도 좋지 않다. 한쪽에선 노래자랑 대회를 하는지 엠프 시설까지 가동해 댄스음악이 꽝꽝 울려대고 있다. 어떤 중년 남자는 엿 좌판을 끼고 가위를 쩔거럭 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엿을 팔면서 자신의 사진과 노래가 담긴 CD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 그는 좌판을 내려놓더니 춤까지 추며 노래를 부른다. 자신을 트롯 가수로 소개하며 CD를 손으로 치켜 올린다.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저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이자 예술인입니다.
구경꾼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는 신이 난 듯 춤을 추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CD를 건네며 판매를 유도한다.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지폐가 나오며 CD가 건네진다. 남자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절을 하며 열창을 한다. 박수가 터지면서 노래는 절정을 이루며 앙코르가 터진다.
남자는 손키스를 날리며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눈물이 어리며 허리를 깊게 숙인다. 다시 엿 좌판을 어깨에 메며 길을 재촉한다. 오늘 장사도 성공이다.
국내산인지 중국산이지 출처가 불분명한 농산물을 두고 리어카 상인들은 웰빙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 혼잡한 와중에 점치는 상인들마저 자리잡고서 호객 행위를 하고 있다.
술판이 벌어지고 상인들 사이에 드잡이까지 벌어지고 있다. 양심용 저울이 행로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눈길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자는 상인들 사이를 춤을 추듯 온몸을 흔들며 돌아친다. 행인들을 그녀를 뒤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할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자는 노랑머리를 흔들며 이윽고 국밥집 앞에 걸터 앉았다. 망사로 가린 가슴을 일부러 내보이며 커다란 솥에 있는 선짓국을 손으로 가리켰다. 국밥집 주인은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며 커다란 국자로 국을 휘휘 저었다. 뚝배기에 가득 담더니 또다시 여자의 가슴에 눈길을 주었다.
경철은 여자의 옆에 앉아 똑같은 국밥을 먹었다. 프라스틱 탁자에 막걸리 잔과 함께 깍두기 한종지가 놓였다. 국밥을 먹던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에게 쏠렸다. 술잔을 기울이던 노인들은 일부러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경철에게도 시선이 쏠렸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일까. 자꾸만 피곤이 몰려왔다. 잠시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환시현상이 일었다.
여자의 머리 위로 양갈래로 뻗은 검은 뿔이 보였다. 반달형으로 그건 분명 소뿔이었다. 단단하고 강철 같은 재질의 검은 뿔이 갈기 같은 머리 숲 속에 솟아나 있었다. 언젠가 성경에서 읽었던 짐승의 형상이 생각났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면서 식은땀이 났다.
여자는 막걸리를 병째 들고 벌컥 벌컥 마셨다. 병을 흔들어 보이더니 이번에는 소주를 달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여자의 눈은 쾡하니 뻥 뚫려있는 듯했다, 움푹 패인 눈에 슬픔과 분노가 가득해 보였다. 주인이 소주를 갖다 주자 그녀는 경철의 잔에 콸콸 쏟아붓더니 어서 마시라고 손짓을 했다.
경철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떠올렸다. 이제 갓 신학대학을 졸업한 그는 시골 교회 전도사로 부임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여느 목회자와 달리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신학대학으로 진학한 케이스였다. 세상에서 우왕좌왕 번민하고 타락하다 마지막 코스로 접어든 길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출석할 때부터 꿈꿔온 길이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신학교 4년을 마쳤고 군종장교로 군 복무도 마쳤다. 그리고 일부러 자청해 중소도시인 OO 읍에 있는 교회 전도사로 자임해 가는 중이었다. 그로선 첫 부임지인 셈이었다.
사례비가 얼마인지 따지지도 않았고 교세 역시 파악하지 않았다. 그에겐 남다른 도전정신 즉 개척의지가 있었다.
그는 여자가 내미는 술잔을 받아서 조용히 대접에 따랐다. 그리고 여자를 따라 이곳에 발걸음을 한 것에 깊은 후회를 했다. 아무리 영적 호기심이 발동해도 그렇지 쓸데없이 영력을 낭비하다니 그는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이미 인사불성으로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벌써 술병이 여러 개째 비워지고 있었다. 경철은 주인에게 값을 지불한 뒤 역사 쪽을 향해 걸어갔다. 시장 통로를 지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고 악다구니 소리를 들었다. 세상은 돈이라는 매개체를 두고 아귀다툼하는 거대한 영적 전쟁터였다.
인과관계(因果關係)도 경쟁구도 속에 먹히고 마는 이상한 구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경철이 전철 역사로 들어서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였다. 뒤에서 악다구니 치는 여자의 고함이 들렸다. 마치 귀신 울음소리 같은. 그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쪽을 향했다.
그녀였다. 여자가 보라색 융 외투를 집어던지며 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욕설과 원한 맺힌 악다구니가 뒤섞여 발작증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불에 데인 듯 놀라 서둘러 전동차를 향해 뛰어갔다. 여자도 기다렸다는 듯이 날랜 발걸음으로 그의 뒤를 쫒았다.
그러나 여자는 개찰구에서 멈춰섰다. 지갑과 핸드폰이 사라진 것이다. 여자는 거의 실성하듯 울부짖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동시에 경철의 발걸음은 전동차에 오르고 있었다. 흡사 악몽이라도 꾼 듯 경철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핸드폰 전원을 켰다.
부임지 교회에서 여러 차례 카톡이 와 있었다. 그는 곧장 답신을 보내고는 유투브를 열었다. 주옥 같은 설교가 여럿 올라와 있었다. 차창 밖으로 낯선 도심 풍경이 지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로 걸어갔다. 생전 처음 대하는 역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내린 곳은 조금 전 그가 내렸던 소읍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거대한 강줄기가 보이고 팬션과 상가가 밀집된 관광도시였다. 비록 지명은 읍내였지만 여느 중소도시 못지 않았다. 특별히 관광지구로 지정된 코스도 있었다. 케이블카와 레일바이크도 있었다.
생각보다 유동인구가 많을 것으로 보여 이 정도면 황금어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철은 스마트폰으로 네이버 지도를 주소를 입력한 뒤 빠르게 걸어갔다. 교회는 상가를 지나 공터를 지난 뒤 논밭 사이를 지나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생각보다 교회 규모가 컸다.
새로 신축한 2층 건물로 산뜻하고 시설도 잘돼 있었다. 사택도 깨끗하고 주변 환경도 좋았다. 그는 교회 본당으로 들어가 천천히 둘러본 뒤 담임목사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그는 6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상당히 노쇠하고 활기찬 모습은 전혀 없고 어딘지 주눅든 표정이었다.
말소리도 힘이 없고 기력이 쇠잔해 보였다. 그는 경철을 보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딜 가나 목회 현장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교세는 크지 않지만 이곳에서 목회 경험 쌓다가 목사 안수도 받으시고 더 큰 곳으로 나아가서 사역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잠깐 당황했다. 뭔가 예상이 빗나간 느낌이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몸이 좀 많이 안 좋습니다. 본 교인 외에도 휴가철이면 외지인들도 와서 예배 드리고 영적으론 혼탁한 곳입니다. 영분별 잘하시고 힘껏 사역하시다 보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숨이 가쁜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힘든 일들이 많을 겁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마시고 기도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가장 힘든 싸움이 영적 전쟁 아니겠습니까. 지치지 마시고 여기서 목회경험 쌓으시면 앞으로 어딜 가셔도 잘 견디고 승리하실 겁니다.”
위로인지 경고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이미 다 각오한 터였다. 담임목사에게 단단히 주의를 들은 그는 사택으로 가 짐을 푼 뒤 주변 길 산책에 나섰다. 어딜 가도 풍광이 좋았다. 푸른 삼림과 강가 풍경도 환상적이리만큼 아름다웠다. 가끔 등산객들도 나타나 유투브 촬영도 해 갔고 카페도 성업 중이었다.
경철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물좋고 산좋고 공기 좋은 곳이라더니 바로 그거였구나. 역 근처에는 2일과 7일이면 오일장도 선다고 했다. 이런 곳이면 교인들의 인심도 좋고 별 문제 없으리라. 그러나 방금 전에 들은 떠올라 긴장이 됐다. 어차피 내민 발걸음 닥치면 닥치리라.
어떤 문제도 헤쳐나가며 영적 근력을 키우리라. 기도와 말씀으로 어떤 난관도 물리쳐 나가리라. 그에겐 뚝심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달관된 고난에 대한 저력과 끈기 투지심이었다. 사역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성공이나 출세를 위한 욕심은 없었다.
아직 젊은 나이라 그런지 대범하고 활기찬 면이 더 많았다. 사역은 고난의 연속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종갓집에 시집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다 외아들이 신학대학 졸업한 것을 두고 영적으로 승리했다며 기뻐하던 어머니였다.
총명하기로 소문났던 어머니도 집안의 가혹한 핍박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던 적도 여러번이었다. 낙심과 절망이 몰려올 때면 아들이 목회자 되는 걸로 위안을 삼곤 했었다. 영적 근력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단다. 절대로 세상 영광 구하지 말고 여자 조심해라.
어머니는 어린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네 목회자로 성공하기 보다 작은 밀알이 되어 살겠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또 말했다.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말아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 그 말을 마음의 심비(深秘)에 새겼다.
경철은 어머니의 기도에 늘 힘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머니는 천국에 계신다. 이제 비빌 언덕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경철은 주변 풍광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형통을 바랐다. 그 역시 고난이나 불통은 원하지 않았다.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불상사를 목격하고 들은 적이 있었다.
멀쩡히 성실하게 잘 사역하는 목사를 은퇴 후 사례금을 주지 않기 위해 모함을 씌워 내쫒는다거나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퇴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교세가 줄어들자 책임을 물어 해임한 경우도 있었다. 사모가 암으로 투병하면서 더 이상 교인들을 돌볼 수 없자 해임당한 일도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어서 마음만 굳게 먹고 사역한다면 고난도 이겨내기 마련이었다.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사역지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고 믿었다. 경철은 아직 젊은 나이라 그런지 패기와 자신감이 있었다. 상처 받는 일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철갑옷을 입고 물리칠 작정이었다.
주변 길을 산책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는 샤워를 한 뒤 성경을 읽었다. 욥의 고난을 두고 판단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은근히 판단하고 즐기는 경향이 있다. 인과응보를 들먹이며 자신과 고난은 전혀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며.
경철이 신학교 원서를 썼다는 사실을 두고 주변사람들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갓집에서 웬 목회자? 어머니는 가족 중에서 유일한 후원군이었다. 그 외에 교회의 어르신들과 선배 목회자가 있었지만 모두 멀리 떨어져 있거나 선교사로 파송돼 있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아 카톡으로 이메일로 소통하면서 소식을 이어갔지만 한순간 소식이 두절되기도 했다. 그런데 신앙관과 목회관이 투철할수록 고난과 역경이 많았다. 그리고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진실한 의인들은 항상 세상에 빛이 되었다.
고난 없는 승리는 없다.
그건 그의 지론(知論)이었다. 며칠 후 그는 교회에서 정식으로 부임 인사를 하고 사역에 들어갔다. 몇 명 안되는 청년부를 맡았지만 담임목사의 병원행이 잦아짐에 따라 교인들 심방도 했다. 교인들 대부분은 농사를 짓거나 상인들이 많았다. 교회 출석도 불규칙했고 헌금 액수도 작았다.
전도사인 그의 사례비도 당연히 작았다. 하지만 숙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만큼은 교회에서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인들과 거리를 두고 행동했다. 선배 목회자들로부터 많은 노하우를 전수 받아서였다. 지나친 친절도 경계했다. 이단들의 출몰에 대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젊고 잘생긴 전도사에 대한 자매들의 유혹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산에 캠핑이나 여행 왔다가 잠시 들린 손님(?)들이었다. 세파에 물들지 않은 전도사의 모습에 마음이 끌려 몇 번 더 예배 참석했던 뜨내기 교인들이었다.
근처에 있는 고급 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교제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앙상담을 핑계로 끈질기게 통화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중에는 절세 미인도 있었고 장래가 촉망되는 전문직 여성도 있었다. 유혹하는 수단도 다양했다. 경철은 난감했다. 이런 유혹이 닥치다니 전혀 생각지 못한 다양한 시도 앞에 흔들리는 순간도 발생했다.
그러나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담임목사가 사망한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몇 안 되는 장로들은 모여서 새로 올 목사 청빙에 들어갔다. 신임 전도사는 졸지에 임시 당회장이 되어 주일 수요 금요예배는 물론 새벽 예배까지 인도하게 되었다.
몸이 열 개라고 모자랄 판이었다. 게다가 고령층이 대부분인 교인들의 장례식도 줄이어졌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상황에 이를 때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교인 중 젊은 과부와 절친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30대 초반으로 미모였고 죽은 남편의 빚을 떠안아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모두가 그녀의 처지를 외면하고 멸시하자 교회에 찾아와 전도사에게 하소연 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경철은 교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그러나 평소에 그녀의 행실이 좋지 않았는지 경철에게까지 비난이 쏟아졌다. 선의가 왜곡돼 악의적인 소문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힘겹게 달려온 결과치고 너무나 허망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힘든 기색을 보여도 관심 가져 주는 교인은 한명도 없었다. 젊으니까 괜찮겠지 싶은 모양이었다. 섭섭한 마음이 몰려오면서 어느날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읍내 병원으로 그를 데려 간 것은 그녀였다. 교회에 봉사하러 왔다가 그를 발견해 구급대를 불러 병원으로 급송한 것이다. 그는 의사의 긴급처치로 회복됐지만 마음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는 처음으로 장로에게 너무 힘들어 사역을 접고 싶다고 말했다.
장로는 그제야 그에게 위로의 말을 하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곧 후임 목사가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청빙돼 온 목사는 목회를 시작한 지 6개월도 안 돼 인근에 중소도시로 가버렸다. 자신은 목회 스타일이 아니라며 계산적인 사고를 내비쳤다.
이렇게 혹사하며 이런 대접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목회를 접고 말겠다. 그리고 자기가 목사가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뜻이 아닌 부모의 선택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목사 안수를 받지 말든가. 새로운 담임목사가 오기까지는 3년 6개월이란 세월이 흘렀다.
경철은 그동안 목사고시에 패스했고 막 안수식을 앞두고 있었다. 목회 철학이 뚜렷한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또다른 비전을 향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총명했고 친화력이 있어 교인들과의 유대관계도 돈독하게 잘했다. 목사는 언제든지 떠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하며 개척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동네 대소사에 쫒아 다니며 일을 도와 주고 전도해 교인 수도 증가시켰다. 아이도 태어났고 순탄대로가 이어지는 듯했다.
그가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아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부목사가 되어 사역했다. 새로 온 담임목사는 온유하고 열정적이었다. 교인들의 신망도 두터웠고 교세도 커졌다. 신임 전도사가 부임해 왔지만 6개월만에 떠났다. 말로는 외국 유학이라고 했지만 시골이라 답답해 싫다는 게 이유였다.
시골에 계속 있다간 대도시로 나갈 기회마저 놓치고 그러면 원하는 목회를 못 할 것 같다고 했다. 경철은 한편으론 부러웠다. 떠날 수 있는 용기, 어느덧 현실에 적응하다 보니 개척의지마저 사라진 것일까. 그는 문득 사역지를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싶었다.
세상은 불공평한 듯 보여도 심고 거두는 법칙은 변함이 없었다. 헛된 소문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고 진심도 마찬가지였다. 경철은 힘들 때마다 초임 전도사 때 담임 목사로부터 들은 조언을 생각했다.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아픔과 상처의 영적 전쟁의치열함에 대해서.
사역은 고난의 연속이다.
겉으로는 초연한 척해도 생활고는 힘들었다. 매달 받는 사례비는 저축할 여유분이 전혀 없이 빠듯했다. 아내는 변변한 옷 한가지 해입지 못하고 아이는 흔한 태권도 학원 한번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상의 끝에 결정했다. 좀더 나은 사역지를 구해 떠나자고.
여러군데 청빙원서를 넣었고 아내와 함께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그중 한곳에서 연락이 왔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몇 명이 설교를 통해 결정됐는데 인근에서 멀리 떨어진 중소도시였다. 유동 인구도 많고 교세도 결코 작지 않았다. 더 이상 아이의 학교 문제를 두고도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고 아내도 만족했다.
그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양 어깨에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마음이 안정되니 사역도 순풍에 돛단 듯이 순항되었다. 아내의 적극적인 내조로 교인들로부터 두터운 신망도 얻었다. 그는 지난날 선배들의 고언도 까마득히 잊은 채 안전만을 위해 질주했다.
그의 명설교는 유투브를 통해 생중계 되었고 조회 수도 증가했다. 시쳇말로 안전빵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신의 은총이라 여겼고 거기에는 자신의 노력과 의(義)도 포함돼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공부도 잘해 전교 수석을 차지했다. 어느날 그는 교인들 집을 심방하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길가 모퉁이에 웬 거지가 고개를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때에 찌든 옷에 찢겨져 속살이 훤히 내비쳤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울고 있었다. 나이가 육십은 넘어 보이는 여자 노숙자였다. 숨죽여 울던 여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자기 머리칼을 쥐어 뜯으며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외면하며 지나갔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열어 급하게 연락을 취했다. 경철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떤 이끌림이었을까. 그는 거지 여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교인들은 그의 행위에 거부감을 나타내면서도 가만히 지켜봤다.
속으론 일정도 바쁜데 쓸데없는 일로 지체하는 목사가 이해가 안 갔다. 늙은 거지 여자는 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장 차림의 잘생긴 중년남자가 손을 내밀자 빤히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사시는 곳은 어딥니까?”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발에 머리에 맨발이었다. 다리에는 피고름이 흘렀다. 경철은 여자의 표정에서 기억의 편린이 떠오르는 듯하다 이내 사라졌다. 옆에서 아내가 거들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여자는 배를 가리키며 배고파 죽겠다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일어서려다가 도로 고꾸라졌다. 교인들은 웅성거리며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먼저들 가십시오.”
교인들은 모종의 의견을 눈빛으로 교환하며 뒤돌아섰다. 경철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경철은 교인들을 보내고 나서 여인과 잠시 대화를 이어 갔다. 집도 없이 떠돈 지는 10년도 넘었고 가족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살다가 지속되는 폭행에 견디다 못해 도망쳐 나왔다. 그런 그녀에게 악마의 손길이 뻗쳐온 건 20대 초반의 일이었다.
혼미한 정신을 비집고 그녀는 누군가의 꼬임에 빠져 산속에 있는 이단에게 접수되었다. 치외법권 지대인 그곳에서 그녀는 생지옥을 경험했다. 그곳은 한마디로 광란의 집단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자들의 공동체였다. 그녀는 어떻게 그곳을 탈출해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간절히 평안을 원했다. 경철의 아내가 그녀를 일흐켜 세웠고 사택으로 데려와 목욕부터 시켰다. 옷도 꺼내 입히고 행선지를 물으니 당연히 없다고 했다. 그녀는 생전 처음 맛보는 식사를 하면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평안하다고 말했다. 더 머물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인근에서 멀리 떨어진 재활센터에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응했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택을 나서기 전 경철은 그녀에게 안수기도를 했다. 험한 세상 잘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좋은 만남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기도가 끝나고 나서 경철은 여자의 인상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 신임 전도사 때 전동차 안에서 보았던 그흉측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와 상반된 인상이라 안심은 되었지만 불쌍한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아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기는 교회 사택이라 더 이상 모실 수가 없어요, 재활센터도 좋고 어딜 가시든지 생활하시다 어려운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아무도 그 누구도 믿지 말고 주님만 믿고 의지하세요, 제가 드리는 말씀 아시죠?”
여자는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호소하듯 말했다. 고아출신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끔찍한 상처 이야기였다. 고아 친구 꼬임에 빠져 이단으로 들어갔다가 심신이 망가진 채 탈출한 이야기와 거지꼴이 되어 헤매다 수십 리를 걸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다.
그런데 돈을 들고 돌아서는 그녀의 눈빛에서 이상한 기운이 발견되었다. 교활한 웃음이 입가에서 번지며 경철과 아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상한 일은 이후에 벌어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툭하면 교회로 노숙자나 동네 불량배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떼거리로 찾아와 먹을 것과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교회에 불을 지르겠다고 하고 갖은 협박을 다했다. 한번은 목사관 사택 창문을 부수기도 하고 대예배 때 나타나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교인들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스트레스에 강박증까지 발생했다. 거의 매일 초긴장으로 살다보니 담대했던 아내도 불면증과 우울증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더 괴로운 건 교인들 사이에 알 수 없는 괴담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경철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전혀 해석할 수 없었다.
자신과 아내는 불쌍한 영혼을 향해 선행을 베풀었을 뿐인데 돌아온 건 고난과 상처였다. 핍박과 협박과 괴담이라니, 억울하고 분통 터질 노릇이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학폭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사건도 발생했다. 아이는 이곳이 무섭고 싫다며 다른 곳으로 이사 가자고 졸라댔다.
아내가 우울증 때문에 교인들 앞에 나서기를 꺼리면서 사모에 대한 악소문도 돌았다. 부부 사이가 안 좋은지 사모가 우울증에 걸렸다더라. 아내는 못견디게 괴로워했다. 그동안 아내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교인들도 소문에 동참하고 있었다.
교회에 횡횡한 소문이 돌면서 떠나는 교인 수도 늘어났다. 심신이 괴롭다 보니 설교도 맹탕식이었다. 짜깁기식으로 전에 했던 설교에 내용만 살짝 바꾸거나 남들이 했던 뻔한 설교를 되풀이하는 식이었다. 설교가 끝나면 교인들은 인사 한마디 없이 돌아서 나갔다.
어떤 교인은 다가와 노골적으로 말했다. 목사님 오늘 하신 설교 지난번에 하신 것과 똑같은 거 같아요. 말속에 비웃음이 숨어 있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힘든 내색을 했다. 아무리 화장을 해도 우울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여자 노숙자가 다녀간 이후 매일 악몽에 시달리면서 소화불량 증세까지 나타났다.
이제 목사 부부 이야기는 교인들 사이에 점차 회자되기 시작됐다. 괴담은 괴담대로 악소문은 발을 달고 퍼져나갔다. 제대로 된 확인절차도 없이 그야말로 헛소문이었다. 그러나 경철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해봤자 통할 리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교인들도 그것이 헛소문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소문은 근원지도 없이 퍼져나갔고 그러자 이번에는 교회 중직인 장로들 사이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그의 은퇴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이미 예정된 수순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린 경철은 아내와 함께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영력이 고갈되고 몸과 마음이 탈진된 상태였다. 아들은 빨리 이곳을 떠나자며 매일 졸라댔다. 그는 기도하다가 고난의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생각하다 여자 노숙자를 생각했고 신임 전도사 시절 전동차 안에서 만났던 여자 괴인을 떠올렸다. 그러다 통장 안에 든 잔고를 생각했고 자신의 나이와 미래를 생각했다.
이미 오십줄에 들어선 나이라 새로운 부임지를 찾기도 애매했다. 영적 혼미는 계속되었고 은퇴 압박도 거세졌다. 차라리 훌훌 털고 떠나자 생각하자 아이가 걸렸다. 곧 대학도 들어가야 하는데 걱정이 안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기 위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폭에 시달리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불안증세를 떨치지 못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이는 이곳만 떠나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며 매일 호소했다. 경철은 십자가 앞에 엎드리면서 오랜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묵상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체이면서 왜 끝까지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하지 않았을까.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증명하라.
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누굴 구원하겠다는 것인가.
네가 그리스도냐 유대인의 왕이냐.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조롱과 비웃음을 왜 끝까지 참아냈을까. 나 같으면 당장 내려와서 비웃는 무리들을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을. 나 같았으면 고난 대신 영광을 택했을 것을. 그렇다. 난 십자가 대신 영광을 구했던 것이다. 안정된 평화 보장된 목회 미래에 집중하였다. 경철은 뒤늦게 후회했다. 회개 기도가 터져 나오면서 영적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편안하게 안주하기보다 항상 떠남의 자세로 사역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살았다. 사역은 고난의 연속이다. 그는 자신의 안일함을 깨닫고 눈물의 회개기도를 했다. 교회에서 나가라면 나갈 작정이었다. 이미 아내와 아이와도 합의된 사항이었다.
잠시 안식한 뒤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 어디든 가리라. 그는 모든 걸 내려 놓기로 했다. 당회에서 경철의 사퇴는 결정이 됐고 새로운 담임목사 청빙 건도 통과되었다. 그는 사택으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아내와 아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어디든 가리라.
언젠가 들었던 선배 목회자의 말이 떠올랐다. 목회 사역은 고난의 연속이다. 그동안 정들었던 사역지를 떠나는 것은 슬펐지만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떠나는 것도 축복이라 생각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상처와 억울함도 많았지만 경철은 가족과 함께 흔쾌히 떠남에 동의했다.
그들이 탄 자동차가 떠날 때 몇몇 교인이 배웅을 해주었다. 참았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그들의 떠남은 너무나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진행되었다. 그동안 살던 동리가 시야 밖으로 점점 사라질 때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길가에서 만났던 여자 노숙자였다.
그녀 얼굴 위에 신임 전도사 시절, 전동차 안에서 만났던 여자 괴인의 얼굴이 오버랩 되고 있었다. 경철은 예견하고 있었고 그 어떤 평안함이 마음속에 차오르면서 기쁨이 넘쳤다. 그들보다 앞서 떠났던 이삿짐은 정처없이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