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시간에 순교자의 저스틴의 변증문을 통하여 2세기의 예배의 내용이 어떠했나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다. 순교의 터 위에서 자란 2세기의 예배는 오늘 모든 현대교회들이 회복하고자 하는 예배의 본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예배였다. 우리는 저스틴의 기록에 근거하여 초대교인들이 모이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예배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2세기의 예배의 이런 구체적인 모습들은 이제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3,4세기의 예배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예배는 감격과 소망 가운데서 더욱 성숙한 예배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3,4세기의 예배를 공부하는 것은 오늘 예배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예배를 위하여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 몸 말
1) 지하에서 발전을 거듭한 예배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서 기독교는 3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단한 길을 멈추지 못하였다. 박해와 이교도들의 공격은 기독교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155년 폴리캅의 순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의 제물로 사라지는 현장을 보면서 그날 그날을 지탱하여 왔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극심한 박해의 칼날 앞에서 위축된 신앙이 아니라, 더욱 굳은 신앙으로 승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승화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서 확인되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오늘의 수난을 딛고 일어서는 날 언제인가 승리의 그날을 하나님이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기도는 뜨거웠고, 찬송은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그것도 화려한 성전이 아닌 비밀의 장소에서 행해졌다.
이 때의 예배를 말해주는 문헌은 매우 제한적이다. 앞에서 공부한 디다케와 클레멘트의 서신은 3세기 이전까지의 예배를 추적하는데 주요한 자료였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될 때까지의 기록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박해의 극치가 모든 예배와 기록의 활동을 지하로 잠기게 했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이 때에 발견되어지는 몇 안되는 문헌은 3세기 초 로마의 유명한 저술가였던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남긴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220년경)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저자가 자기의 지식에 따라 저술한 것이 아니라, 기존 교회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던 것을 주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예배의 실상과 역사를 알아보기에 매우 유용한 자료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본 문헌은 예배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은 세례와 성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제도와 신자생활의 규범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그 외에 3세기 초반의 북시리아에서 유래한 「사도들의 교훈」(Didascalia)(230년경)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220년 경에 죽음)와 오리겐(Origen, 251년에 죽음)의 저술 속에서도 이 시기의 예배에 대한 파편적인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자료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이며, 여기에는 예배에 대한 서술을 중심하여 몇 가지의 변화하는 모습들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1) 첫째, 2세기의 순교자 저스틴의 [변증문]에서는 성찬성례전을 집례하는 집례자가 드리는 기도는 기록된 기도에 제한하지 않았다. “자기의 능력을 다하여” 기도할 것을 권한 바 있다. [사도전승]에서도 기도자가 자기 능력에 따라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오직 정통교리에 맞는 건전한 기도를 바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자는, 앞에서 규정한 바대로,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이다. 앞에서 규정한
기도와 똑같은 기도를 바칠 필요는 없으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암기하여
바치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각자는 자기 능력에 따라 기도할 것이다. 만일 누가
충분히 (길게) 그리고 성대하게 기도를 바칠 능력이 있으면 좋은 일이다. 만일
누군가 기도를 바칠 때, 정도에 맞게 기도한다면, 그를 저지하지 말고 그가 정통
교리에 맞는 건전한 기도를 바치도록 할 것이다”
(2) 둘째, 이 시대는 처음으로 예배의 현장에 찾아 온 사람들에 대하여 철저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교사들 앞에 인도되어 믿으러 온 동기를 확인하고, 그들의 신분을 파악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의 신분이 조각가는 우상을 만드는 일을 포기하도록 하고, 포주, 배우, 기사, 투사, 사냥군, 우상숭배의 제관들은 자신의 직업을 완전히 그만 두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한하여 말씀을 듣는 초신자들의 예배 참석을 허용하여 일정한 기간을 보내게 하였다.
(3) 셋째, 세례 후보자의 훈련은 매우 철저하게 관리하였고, 세례를 받는 날에 준비는 어느 시대보다 철저히 요구하고 있었다. 초신자로 말씀의 예전에 3년간 참석한 후에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인을 닮아 가는 생활을 계속했는지를 인도자가 증언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례 전에 잡귀를 쫓아내는 축귀식(exorcism)을 갖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례 일에는 몸을 정결하게 하고, 여성의 경우 월경이 있을 때는 다른 날에 세례를 받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세후보자는 전날 밤 철야를 하면서 성경을 읽고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그들이 예비자로 있는 동안 성실하게 살았는가? 과부를 공경하였는지? 병자들을
방문했는지? 매일 선행을 실천했는지? 인도자는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행한
사람만이 복음을 듣게 할 것이다.....세례를 받게 될 사람들은 주간 다섯째 날에
목욕하고 씻어야 한다. 월경 중에 있는 여자는 분리되어 다른 날에 세례를 받게
할 것이다. 세례를 받게 될 사람들은 안식일의 준비 일에 단식할 것이며...축사식이
끝나면 그는 그들의 얼굴에 숨을 내쉬고, 그들의 이마와 귀와 코에 십자표시를
한 다음 그들을 일어서게 할 것이다....그들은 밤 내내 성경을 읽고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합당하게 된 사람은 같은 시간에 예물을 바치는 것이 타당하다”
(4) 넷째로 [사도전승]에서는 세례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례수는 디다케에서 가르친대로 생수나 흐르는 물을 사용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현지에 있는 물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 번의 질문과 대답이 있어질 때마다 한 번씩 물에 잠기도록 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 교회의 사도적 전승과 세례와 영생을 믿는가의 질문에 “예, 그렇게 믿습니다”의 대답을 하면 한번 침수 시켰다. 두 번째는, 성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수난과 부활과 재림, 그리고 육신의 부활을 믿는가의 질문에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두 번째 침수를 시켰다. 세 번째는, 성령과 성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는지의 질문에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세 번째의 침수를 시키는 형태를 가르치고 있다.\
물에서 나오면 집례자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성유를 바릅니다” 하면서 집례자의 손에 기름을 붓고 수세자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전능하신 주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성유를 그대에게 바르노라”하였다. 그리고 집례자가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입맞춤을 하면서 “주께서 당신과 함께” 하면 수세자는 “또한 사제와 함께”를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5) 다섯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생활은 이 시대에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박해시대의 신앙이란 기도 속에서 아픔을 이기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은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하루에 3시, 6시, 9시의 세 번씩의 기도를 드리고 거기에 더하여 새벽과 황혼의 기도를 선호한 바 있었다.
사도전승에서도 사도들의 가르침대로의 시간대 기도의 내용까지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오전 9시 기도에는 주님이 못 박히신 시간이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보혈이 바쳐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거기에 연관된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정오의 기도에는 십자가에 달려 온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의 본을 받는 기도를 하였다. 오후 3시에는 주님이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돌아가신 주님의 죽음을 통해 구원받은 의인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본받아 기도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을 닭이 우는 시간으로 정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새벽기도회의 뿌리가 이미 이러한 기도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하고 있음이 입증된다.
“남녀 모든 신자들은 아침에 잠에서 일어나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기 손을 씻고
하나님께 기도한 다음 자기 일을 하러 가도록 하라.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일이 있으면, 가르치는 사람을 통하여 자기가 듣고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그곳에 가는 쪽을 택하도록 하라....
가르치는 사람을 통해 성령께서 너에게 전해 주시는 것들에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모든 이는 영이 꽃피게 되는 곳인 교회에 가는 데에 열성을 다할
것이다....수탉이 우는 시간에 일어나 기도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리
스도를 부인하였는데, 우리는 믿음으로 그 분을 알아보았으며, 죽은 이들이 부활
할 때에 있을 영원한 빛에 대한 희망을 갖고 이 날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여섯 번째로, 성찬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철저히 관리되었던 예배였다. 지금의 일부 교회에서는 성찬 성례전에 세례교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경우들이 발생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가 질서 잡아가던 2세기 이후에는 세례교인이 아니면, 성만찬을 나눌 수 없다는 관례가 철저히 준수되었다. 특별히 240년에 죽은 터툴리안의 경우는 성찬예전이 시작이 되면 세례교인만 한 방에 모이도록 하여 참여의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3세기 예배에 빠르게 영향을 미쳐 공식적인 관례로 채택되었다.
(7) 일곱째로, 성찬성례전의 특별한 부분들의 시도와 정착이 나타나고 있다.
세례를 받고 새롭게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빵과 포도주의 성물 외에 젖과 꿀과 물을 받게 하였다. 이 때의 젖과 꿀은 이집트를 벗어나 약속된 땅을 찾아 나선 것의 의미를 수세자들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즉 죄의 속박으로 얼룩진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들어오게 된 것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물은 세례성례전의 은혜를 다시 음미하게 한 것이었다. 이 때의 성찬 성례전의 장면을 다음의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감독자는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이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이다. 감독자가
빵을 나누어서 그 조각을 각 사람에게 주면서, ‘이것은 천상의 빵인 예수 그리
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하면, 받아 모시는 사람은 ‘아멘’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그들에게 주고, 그 다음 젖을 주고 그
다음 꿀을 줄 것이다. (포도주) 잔을 주면서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라고 말하면, 받아 모시는 이는 ‘아멘’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각자는 온갖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바르게 생활하며, 교회를
위해 열성적이며, 배운 바를 행하며, 신심을 향상시키는 데에 전력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핍박 속에서 신앙을 지키던 지하시절의 기독교 예배는 어느 시대보다 철저하였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면, 이들은 예전의 제반 행위의 엄숙한 이행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실천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박해라는 수난의 세월동안 이들이 직면한 것은 예배자체의 순서나 내용보다는 예배를 드려야 할 장소의 문제였다. 이들은 기독교가 자유를 얻고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예배의 처소는 가정집이나 채석장 사갱, 토굴, 카타콤 등 외떨어진 야외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서 드린 예배였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배의 열정과 정신은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것이었다.
2) 3-4세기의 예배 순서
250년에서 350년간의 약 100년간은 많은 박해 속에서 신앙을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의 ‘비밀집단’으로 행동하면서 신변안전과 믿음의 고유성을 지켰고, 예배생활을 계속하였다. 이 때에 가졌던 예배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터툴리안과 같은 지도자에 의하며 수찬 자격을 엄격히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즉 엄격한 심사와 훈련과정을 거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성찬 성례전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래서 초신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말씀의 예전에만 참석하고 부제의 지시에 따라 밖으로 나가 해산하였다. 이러한 절차가 있은 다음에 입교인들만 남아서 다음에 이어지는 성찬 성례전에 계속하여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토록 예배하는 무리들까지 선별하면서 드렸던 이들의 예배 형태를 맥스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예배를 위한 인사
인사(Salutation)
집례자: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혹은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회중: ‘또한 사제(목사)와 함께’
말씀의 예전
성경봉독(Lections): 율법서, 예언서, 사도행전, 복음서, 서신서
시편송(Psalms): 성경봉독 사이 사이에 불려짐
알렐루야(Alleluia)
설교
연도(Litany): 입교자(초신자)를 위하여
자비송(Kyrie):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초신자 해산: 세례 교인만 남게 함
성찬 성례전
연도: 신자를 위해(산자와 죽은 자를 위해)
자비송(Kyrie):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평화의 입맞춤(Kiss of Peace)
봉헌: 헌금
성물봉헌
성찬상 준비와 포도주에 물을 섞음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
집례자: ‘여러분들의 마음을 높이 드십시오’
회 중: ‘우리가 주께로 마음을 드나이다’
집례자: ‘주께 감사를 드립시다’
회 중: ‘이것이 적당하고 올바른 것입니다.’
성찬기도(Consecration Prayer)
예비기원: 창조주의 섭리에 대한 감사와 찬양
삼성송(Sanctus):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천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나이다.
오, 주여, 하나님께 영광이 있어지이다.
감사기도: 구원에 대한
성찬제정의 말씀(Word of Institution)
회상(재현)의 말씀(Anamnesis)
성령임재를 위한 기도(Epiclesis)
대중보기도(Great Intercession):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및 주님의 기도
성체분할(Fraction)
거양성체(Elevation)와 배찬(Delivery)
성찬 후 감사기도
부제의 기도(연도)와 사제의 간단한 중보기도
병든 자와 불참자를 위한 성물(떡) 보관(Reservation)
폐회(Dismissal)
3) 첨가된 예배순서의 특성들
3-4세기의 예배는 2세기에 있었던 예배와 비교할 때, 예배의 기본 성격과 구조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되어 있는 점에서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의 부분이 첨가되면서 예배의 발전이 시도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 먼저는 봉사자들이 성물을 봉헌하고 거기에 손을 얹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가졌던 인사(Salutation)부분이다. 지금의 축복(강복선언)에 해당하는 부분이 예배의 시작에서 먼저 행하여졌다. 그런데 인사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교환되던 인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보아즈는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수확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인사하였으며, 그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룻 2:4)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인사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보편화 되었으며,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시작을 표시하고, 교회의 기도에 선행하는 인사가 되었던 것이다. 3세기의 예배에서 이것이 사용된 것은 그 실제적인 기원이 불명확하다 할지라도, 인사가 이미 2세기 말엽에 교회에서 통용되었음을 증거해 준다. 아무튼 이 순서는 당시의 그리스도인의 만남이 이룩되는 순간마다 서로를 축복하는 관례가 예배 안에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둘째는,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의 순서로서 감사의 정신을 고조시키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게 하는 순서였다. [사도전승]에는 이 순서는 성물에 집례자가 손을 얹고 감사를 드린 후에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의 인사를 한 후에 이어서 회중과 함께 마음을 드높여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도록 하였다.
(3) 셋째는, 삼성송(Sanctus)의 등장이다. 이 순서는 이사야(사 6:3)와 요한(계 4:8)이 환상 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의 실존을 부르짖음에 근거한 것이다. 클레멘트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이것이 사용된 것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 발전 과정을 추적할 수는 없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외치는 이 순서는 3세기의 예배에서는 보편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주의 만찬 동안에 사용되었으며, 특별한 감사의 기도(성찬 기도)의 시작을 표시한다.
(4) 넷째는, 사제나 부제가 예배드리는 무리들이나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후에 회중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노래하는 “기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이다. 이 순서는 회중들이 그들을 위하여 드려지는 기도에 동참하고 그 간구에 함께 함을 표시하는 응답이었으며 매우 보편화 된 순서로서 이 때에 정착되었다.
(5) 다섯째는, 예배에서 사제들에 의하여 드려진 봉헌기도나 또는 일반기도 후에 회중들과 함께 주님이 가르치는 기도를 드리는 순서이다. 이 순서에서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기도의 최고의 모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6) 여섯째로,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나타난대로 3-4세기의 예배에서는 성찬기도가 완벽하게 내용과 그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성찬기도는 대략 “여는 대화”(Opening dialogue)--> 서언적 기도(Preface):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광범위한 감사-->성찬 제정사(Word of Institution)--> 아남네시스(Anamnesis)--> 성령강림의 간구(epiclesis)-->영광 찬양(Doxology)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7) 그 외에도 시편을 비롯하여, 알렐루야, 사가랴의 축송, 시므온의 노래 등이 예배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예배 중에 분향하는 순서들이 교회마다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이 때의 분향은 일반적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던 구약의 헌물 사상이 이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3. 나가는 말
이상에서 본 3-4세기의 기독교 예배는 모두가 모진 박해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의 교회가 유의할 것은 그 환난과 핍박이 기독교의 예배를 움츠려들게 하거나 퇴보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보다 깊은 의미와 내용을 담은 예배를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의 예배는 제도권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예배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누리게 되는 특권으로서의 예배를 드렸다. 그러하기에 거기에는 감사와 감격이 언제나 수반되었다. 비록 그들이 직면한 환경은 어두웠지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소망 속에 이어진 그들의 예배는 언제나 밝고 엄숙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희미한 추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 속에서 실증되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고, 그에게 드리는 예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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