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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화단(畫壇)에 관한 탐색②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8)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Ⅱ. 작가미상의 고려후기 회화
제65회 연재에서 고려말 화단에 관하여 일차 탐색하였다. 고려말이라고 하면 대체로 14세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현전하는 그림 대부분은 고려불화이다. 지난 제65회에서는 현전하는 불화 이외의 그림으로 작가가 알려진 익재 이제현과 이재 공민왕의 여러 작품을 소개하였다. 이번에는 고려말의 작가미상의 작품 네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1917~1997)[주1] 선생이 자신의 저서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주2] p.90에서 ①「신선과 학」(견본채색, 43.3×28.5cm, 이동주 소장)을 고려말의 작품으로 소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 학예연구실장 이원복은 『미술자료』 제88호(2015.12.)에 실린 논문 ‘고려시대 그림으로 전하는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에서 국박 소장의 「필자미상 선인도」(견본채색, 42.4×25.2cm, 덕수 3289) ②③두 점을 고려후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소개한 바 있다. 국박 소장의 이 작품은 이왕가박물관이 1912년 2월 일본인에게서 구매한 것이다.
한편 필자는 격월간 『한국고미술』 1997년 1·2월호에 「호암미술관 소장의 ‘궁중숭불도’」(견본채색, 46.5×91.4cm)를 고려후기에 ④「고려 국자감과 봉은사(奉恩寺)」를 그린 작품으로 주장한 바 있다.
1. 「신선과 학」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동주 이용희 선생은 자신의 저서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p.90에서 「신선과 학」(견본채색, 43.3×28.5cm, 이동주 소장)을 고려말의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그림의 가운데에는 “푸른 봉우리와 바다의 면에는 신선의 글을 감추었고(碧峯海面藏靈書) 상제(上帝)께서는 신선이 있는 곳을 특별히 고르셨구나(上帝揀作仙人居)”라 쓰고, 좀 거리를 두고 “분황국사에게 드린다(贈芬皇國師)”라고 적고 있다.
이동주 선생은 위창 오세창 선생의 감식안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감식안(鑑識眼, 眼目)을 지닌 분이다. 한국회화사가 체계를 잡기 전에 『한국회화소사』(1972년)와 『우리나라의 옛 그림』(1975)을 저술하였고, 또한 고려불화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일본 속의 한화(韓畵)』(1974)를 저술하였다. 1980년 이후에는 『한국회화사론』(1987)과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1996) 등을 저술하였다.
이동주 선생은 「신선과 학」은 추사와 교유하였던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과 추사의 제자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0-1884)이 구장(舊藏)하던 그림임을 밝힌 바 있다. 따라서 1970년대부터의 동주 선생의 이러한 주장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안 모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회화사』(1980년)에서 이 그림을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신선과 학」, 견본채색, 43.3×28.5cm, 이동주 구장. 사진은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p.90에서 인용.
[사진 제공 – 이양재]
이동주 선생 소장의 「신선과 학」[주3]이 고려후기의 작품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회화사학자는 홍선표 교수이다. 홍선표는 이 작품에 대한 화풍 분석과 함께 작품 제목을 「신선양학도(神仙養鶴圖)」로 명명해 14세기 전후 제작된 고려시대 그림으로 1999년에 언급하였다.[주4]
홍선표는 그 근거로 화풍 분석과 함께 이미 이동주 선생도 언급한 분황국사(芬皇國師)에게 기증된 화면 내 문구로 국사 제도가 고려 초부터 조선 초까지 지속된 사실과 더불어 세부 소재와 양식을 살펴, 작품이 그려진 시대를 14세기 전후로 비정(比定)하였다. 주인공 복식의 옷 주름은 남송대 형성된 마황묘(馬蝗描) 전통, 학의 자세는 당·송대에 정형화된 고식(古式)을 반영하며, 소나무는 원대화풍(元代畫風)을, 바위 처리는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와의 유사점 등으로 고려후기의 작품으로 비정한 것이다.
2. 「신선과 학」과 「필자미상 선인도」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의 전 학예연구실장 이원복은 『미술자료』 제88호(2015.12.)에 기고한 논문 「고려시대 그림으로 전하는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 『神仙과 鶴』과 일괄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서 국박 소장의 「필자미상 선인도」(견본채색, 42.4×25.2cm, 덕수 3289) 두 점을 고려후기의 작품으로 소개하며 이 작품이 고려후기의 작품을 논하는 기준작품으로써 「신선과 학」을 제시하고 있다.
국박 소장의 「필자미상 선인도」 두 점은 이왕가박물관이 1912년 2월 일본인 카와하라 도미타카(河原富貴)에게서 30원에 구매한 것이다. 당시로는 상당한 거액을 주고 매입한 그림이다.
「필자미상 선인도」, 견본채색, 42.4×2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원복은 「신선과 학」, 그리고 이 두 점의 그림을 포함한 “세 점의 공통점은 화면 바탕에서 하단과 중앙의 심하게 박락(剝落)된 부분과 꺾인 부분의 일치, 화면에서 차지하는 인물의 비중, 고목(古木) 아래 인물을 등장시킨 수하인물(樹下人物), 나무 둥치와 괴석 등 바위의 입체감, 시선의 높낮이는 있되 주인공의 얼굴 표현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 상단에 상서로운 구름의 표현으로 나무의 윗부분이 가려진 점, 경사진 선과 하단 모서리에 점한 삼각형 둔덕과 더불어 지면 공간이 선명히 구획되는 점 등을” 들고 있다.[주5]
이원복은 이 세 점의 작품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소견(所見)하고 있다.[주6]
첫째, 이들 세 그림은 크기와 재질, 화면구도와 공간구성, 필치, 기법, 등장인물이 취한 자세, 불에 그슬린 흔적, 조선시대와는 구별되는 얼굴과 피부의 설채(設彩) 등 모두에서 공통점이 두루 감지되어 화풍의 유사함을 넘어 동일한 필치로 동일 화가의 그림이며, 일제 강점기 때까지 한 곳에 전해온 그림들임이 분명하다.
둘째, 고려시대 「오백나한도」와 「수월관음도」 등과 비록 복색은 다르나 인물의 자세와 괴석 등 세부 묘사와 얼굴 등의 조선시대와 구별되는 설채(設彩), 화면 구성에 이르기까지 화풍에서 친연성(親緣性)이 감지되어 이동주의 언급처럼 고려시대 그림으로 비정함에 꽤나 긍정적이다. 세부에서 보이는 청록산수 채색을 포함해 화풍 측면에선 불화 및 흔치 아니한 간송미술관 소장 류자미(柳自湄, ?~1462)의 「지곡송학(芝谷松鶴)」이나 강희안의 유작인 「교두연수(橋頭煙樹)」와 「청산모우(靑山暮雨)」 등과 연관돼 시대 비정은 고려후기에서 그 하한을 조선 초까지 비정하게 된다.
셋째, 이 그림의 국적은 일본이나 중국은 아닌 우리 것으로 봄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엄밀하게 말해서 비교검토의 대상이 될 만할 고려시대 일반감상화를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어서 이 시대 화풍에 대한 특징 등 우리의 인식은 빈약하며 제한된다. 비록 몇 안 되는 고려시대 화적이나 이들과 소재나 구성 세부 비교를 통해서도 이 점은 확인된다.
3. 「호암미술관 소장의 ‘궁중숭불도’」, 또는 「고려 국자감과 봉은사」
이 그림을 안 모 교수는 조선전기 병풍의 일부분으로 주장했다.[주7]
한편, 필자는 1996년에 호암미술관에서 주최한 조선전기국보전에서 이 그림을 관람한 후 이 작품에 관한 필자의 관점을 격월간 『한국고미술』 1997년 제1호(통권 재4호)에 기고한 바 있다.[주8]
- 조선시대의 ‘궁중숭불도’는 절대로 아니다
필자가 알기에는 조선전기에 사용한 궁궐은 1394년에 지어진 경복궁과 1405년에 완공한 창덕궁, 그리고 1418년에 지어진 창경궁 등 세 곳이 있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숭불을 하던 시기는 1550년을 기점으로 한 15년간의 시기로서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궁궐은 창경궁이다. 그러나 창경궁은 둘째치고서라도 조선전기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그 어디에도 이러한 배치를 한 건물구조는 없다.
더욱이 이 그림에서 보이는 중요한 건축물 두 채에는 지붕에 청색(靑色)을 칠하고 있다. 이것은 건물이 청기와 집이라는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전기의 왕궁에서 청기와를 올려 지붕을 만든 건축물은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뿐이었는데, 건물 배치가 이 그림에서와는 다르며, 문정왕후시기의 궁중에서의 숭불은 창경궁에서 이루어졌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이 그림이 조선전기의 궁궐을 그린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건축물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청기와를 올린 건축물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더군다나 그림의 하단부에서 보이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 모습이라든가 길을 가는 모습은 궁궐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거리를 그린 모습이며, 궁궐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수문장이나 방어 관련 시설이 전혀 없다. 즉 이 그림은 건축물 안에 그려진 인물들과 길을 가는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운 그러한 위치의 건축물을 그렸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그림을 조선후기의 궁궐도를 연상하여 병풍에서 잘린 그림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 그림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궁궐을 그린 것이 절대로 아니다.
- 이 그림의 현상(現狀)
이 그림은 세 폭의 비단을 이어 붙였다. 오른쪽 첫 번째 견본과 두 번째 견본 사이의 연결 부위가 손상되어 그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전하는 이 그림은 견본채색으로, 그 크기는 세로가 46.5cm이고, 가로가 91.4cm이다. 조선 비단의 한 필 길이는 1,635cm이고, 그 폭은 32.7cm이니, 비단을 46.5cm 이상의 길이로 잘라서 가로로 세 폭을 연결하면 32.7×3=98.1cm가 될 것이나, 세 폭을 연결 비단의 연결 부위를 생각하면 한 폭의 넓이가 31~32cm는 될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이 작품 원래의 가로 크기는 98.1cm보다 작은 95~96cm가 되었을 것이다. 청색 기와 건축물을 그린 두 건물은 그림 중간부의 견본에 그리고 있다. 이것은 비단을 연결하여 고려불화를 그릴 때 주불(主佛)은 중간에 그리고 좌우로 연결한 부위에는 협시불(脇侍佛)을 그리는 것과 같은 고려불화 제작 수법의 일부가 보인다. 즉 이 그림은 궁궐도일 수가 없으니 병풍에서 잘린 그림이 아니라, 이대로 상하좌우와 그림 폭, 특히 폭1과 폭2의 연결부가 4〜5cm 정도 잘려나간 그림이다.
이 그림은 남쪽에서 북측을 내려다본 조감도로 그렸다. 그림에서 보이는 건축물을 그린 화법을 살펴보면 이 그림은 보기 드문 계화(界畫)이고, 나무를 그린 수지법(樹枝法)에서는 해조묘(蟹爪描)를 보여주고 있다. 진전에서는 춤을 추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책을 읽거나 담소하는 모습도 있으며, 커다란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무엇인가 분주하고 활기있는 분위기를 표시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림에는 주칠(朱漆)을 한 크고 작은 상(床)이 열다섯 개 이상이 그려져 있어, 마치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으로 보인다.
- 이 그림을 재검토하여야 한다
필자가 1996년도 12월에 탈고하여 격월간 『한국고미술』 통권 제4호(1997년 1월 10일 발행)에 기고한 「긴급제의 <이 작품은 재검되어야 한다> - <몽유도원도>와 조선전기 국보전에 전시중인 호암미술관 소장의 <궁중숭불도>」에서 제시한 논리의 정수는 아래와 같다.
이 그림에 나타난 “건축물의 구조 역시 불당 전용이라고 볼 수가 없도록 큰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림 상부의 건축물은 사찰로, 하부의 건축물은 현판과 묘사된 풍속화적 요소를 미루어 살펴보건대 교육기관으로 보이므로, 이 그림에 나오는 건축물은 사찰과 서원(書院) 겸용의 국가적 건축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고려시대에 사찰과 서원이 아래위로 붙은 건축물이 개성에 꼭 한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개성 봉은사(奉恩寺)와 성균관의 전신이라고 할 수가 있는 국자감(國子監)이다.
일제식민지 시기 말기에 개성박물관장을 지냈던 고유섭(高裕燮, 1905~1944) 관장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麗史 誌第七 五行一의 仁宗 十年(1132년) 八月 戊子條에 ‘大雨, 漂沒人家, 不可勝數, 又水湧奉恩寺後山上古井, 奔流入國學廳, 漂沒經史百家文書’[주9]라 한 것이 그것이다. 이로써 보면 奉恩寺는 國子監보다 윗자리에 上下로 連絡되어 있던 것을 알수 있으니‥‥‥, 下半은 國子監 자리요, 上半 奉恩寺 자리로 推定할 수 있다.”[주10]
“고유섭 관장이 국자감과 봉은사의 위치에 관하여 언급한 이러한 것을 보면, 이 그림에 나타나는 상반은 사찰의 기능이요, 하반은 교육기관의 기능이란 건축물 용도와 같으며, 그림의 왼쪽 상부에 묘사된 하천은 큰 비의 피해를 언급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과 들어맞는다. 즉 이 그림에 하천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큰비에 하천이 범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고려의 국자감은 태학(太學)으로 성종11년(992년)에 국자감(國子監 : 최고 유교 교육기관)으로 확장한다. 처음 국자감은 태평동(지금의 개성 역전동 일대)에 있었는데 1089년(선종6)에 지금의 개성 고려동의 성균관 자리로 옮긴다. 옮긴 자리에는 고려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의 별궁(別宮)이 있었는데, 순천관(順天館 : 외국 사신들이 들르던 숙소)과 숭문관(崇文館 : 교육기관)으로 변천되어 오다가, 1089년에 태평동에 있던 국자감을 옮겨온 것이다.
국자감은 충렬왕 원년(1275년)에 국학으로 격하했다가 충렬왕 24년(1298년)에 성균감으로 개칭하였고 충선왕 34년(1308년)에 성균관으로 격상한다. 이후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국자감으로 격상하였다가 공민왕 11년(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개칭한다.
이후 조선초에 이르러 고려 태조를 모신 진전을 훼파하면서 봉은사는 혁파되었고, 왕건의 청동상은 현릉 뒤에 파묻었으며, 고려 성균관은 개성 향교(鄕校)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교마저도 전소(全燒)하였으며, 1602(선조35)년부터 8년에 걸쳐 고려 왕실과 불교의 색채를 제외한 상태로 수준을 낮추어 복원하므로, 현재의 복원된 건물에서는 고려시대의 본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림의 왼쪽 상부 귀퉁이에 하천이 그려져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 개성 봉은사는 고려의 가장 중요한 국찰(國刹)이다
“개성 봉은사는 고려 태조의 진전(眞殿)[주11]이 있는 매우 중요한 국찰이었다. 이 그림에서는 다른 사찰들과는 유독 달리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오른편으로 대웅전 규모로 큰 또 한 채의 건축물을 그려 넣고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이 고려 태조의 청동상을 모신 진전일 것이다. 사진의 청동상은 개성 현릉(왕건릉) 후면에서 출토한 것으로 개성 봉은사 진전에 모셔졌다가 조선 세종조에 묻은 것이다. 고려 때는 이 나체의 청동상에 어의(御衣)를 입혔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대웅전이란 명칭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과 임금이 조회를 여는 궁궐의 건물에서만 쓸 수가 있다. 즉 사찰에 대웅전 규모의 건축물이 나란히 두 채가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 태조의 청동상을 모신 진전이 있는 봉은사 이외에는 그 가능성을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물론 이는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 그림에 그려진 건축물이 봉은사와 국자감이라는 전제(前提) 가설(假說)에 따라 『고려사(高麗史)』와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에서 언급하고 있는 봉은사에 관한 기록과 맞추어 보면, 대웅전 오른쪽의 건물은 일찍이 효사관(孝思觀)이라 하였다가 공민왕 22년(1373년)에 경명전(景命殿)이라 개칭한 이른바 진전(眞殿)이고, 그림의 중앙 부위의 삼문(三門)은 안으로부터 승평문(昇平門) 황문(黃門) 태정문(泰定門)이 된다.”
그림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여러 편액(扁額)이 보이지만 일부 문자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네 점의 편액이다. 그러나 현재 이 편액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문자를 참조할 만한 고려의 다른 기록은 없다.
「고려 태조 왕건상」. [사진 제공 – 이양재]
〇室(?) 南北間門(?) 南別堂(?) 上〇〇(?)
- 이 그림은 조선 문정왕후 시기의 ‘궁중숭불도’가 아니므로, 제목을 다시 정하여야 한다
위에서 고찰한 것에 따라 필자는 이 그림은, 1308년 성균관으로 격상한 이후에, 그리고 1362년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기 이전에 그려진 고려시대 14세기 전반기의 그림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조선의 궁궐을 그린 것이 아니므로 ‘궁중숭불도’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림의 제목을 다시 정한다면 『고려 국학과 봉은사』, 또는 『고려 국자감과 봉은사』, 『고려의 옛 성균관과 봉은사』로 불려야 한다고 본다.
필자가 이상에서 논한 「고려 국자감과 봉은사」 그림을 16세기 중반 문정왕후 때의 ‘궁중숭불도’라고 주장한 분의 반론을 기대한다. ‘궁중숭불도’라고 해도 16세기 중반의 ‘궁중숭불도’가 아니라 문정왕후로부터 2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 14세기 전반기의 고려 왕실의 국찰에서 있었던 숭불도이기 때문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보았듯이 홍선표 교수는 1999년에 이동주 선생 구장의 「신선과 학」을, 그리고 이원복 전 국박 학예실장은 2008년에 국박 소장의 「필자미상 선인도」 두 점을 고려후기의 매우 소중한 그림으로 논증하고 있다. 또한 필자는 ‘궁중숭불도’로 주장하여 온 「고려 국자감과 봉은사」를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고려후기의 기록화라는 관점을 재차 논하였다.
작품을 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세히 관찰하여 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관점이 나온다. 필자가 통탄하는 것은 중국에는 송원명(宋元明, 10세기~16세기)의 고서화들이 수두룩하고, 일본에도 400년이 넘어가는 고서화가 수두룩한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임진왜란(1592년) 이전의 고서화가 희소하다는 사실이다. 국내에 있는 임진왜란 이전의 고서화는 불화를 포함하여 100여 점이나 될까?
그러면서도 남아 있는 임란 이전의 고서화를 걸핏하면 폄훼(貶毁)하는 학계와 화상들의 병폐는 심각하다. 그림을 잘 알아서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척하기 위하여 폄훼하는 기가 막힌 현실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회화사학자 홍선표 교수와 이원복 전 국박 학예실장의 연구 시도는 우리 회화사 연구에서 매우 고무적인 학구적 현상이다. 이에 두 분에게 이렇게 인터넷 공간을 빌려 심심한 존경의 뜻을 표한다.
주
[주1] 이용희(李用熙, 1917~1997)는 “전(前) 국토통일원 장관이며 국제정치학계의 태두이다. 정치학자이면서 한국화에도 조예가 깊어 정치학과 한국회화사 연구의 두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본과 중국의 시각에서 벗어난 본격적인 한국회화사 연구에 한 맥을 형성하면서 한국미술사학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안목 높은 원로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한국회화에 대한 연구성과는, 특히 일본에 있는 한국 작품들에 대한 철저한 실증적 추적을 한 것이며, 조선 초기의 화풍으로 대변되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생각, 겸재와 단원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화풍의 발흥에 관한 해석 등을 들 수 있다.
미술사학에 관한 저술로는 아호인 동주(東洲)라는 필명으로 『한국회화소사』(1972, 1996 중간), 『우리나라의 옛 그림』(1975, 1996 중간), 『일본 속의 한화(韓畵)』(1974), 『한국회화사론』(1987),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1996) 등을 저술하였다.
[주2] 이동주,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1996, 시공사.
[주3] 이동주, 『한국회화소사(韓國繪畫小史)』(瑞文堂, 1972)에는 이 그림이 원색도판으로 뒤표지를 장식했고, 10년 후 개정 증보판에는 도판 10으로 실었다. 이 작품에 관한 보다 양질의 도판은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시공사, 1996), pl. 54, pp. 88-91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주4] 홍선표, 「高麗時代의 일반회화의 발전」, 『朝鮮時代繪畫史論』(문예출판사, 1999), pp. 157-158.
[주5] 이원복, 「고려시대 그림으로 전하는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 『神仙과 鶴』과 일괄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미술자료』 제88호, p.120. 2015년.
[주6] 이원복, 위의 논문. p.123.
[주7] 안휘준, 『옛 궁궐 그림』 pp.24~25., 빛깔있는 책들 198, 1997, 대원사.
[주8] 필자, 「긴급제의 <이 작품은 재검되어야 한다> - <몽유도원도>와 조선전기 국보전.에 전시중인 호암미술관 소장의 <궁중숭불도>」, 격월간 『한국고미술』 1997년 1호(1월 10일 발행, 통권 제4호) pp.82~85. 이번에 쓴 필자의 ‘신 잡동산이’ 제68회 연재의 ”3. 『호암미술관 소장의 ‘궁중숭불도’』, 또는 『고려 국자감과 봉은사』”에서는 1997년도의 논고를 정정(訂正) 및 증보(增補)한다.
[주9] 번역 : “10년(1132) 8월 무자, 큰비가 내려 잠기거나 떠내려간 민가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또 봉은사(奉恩寺) 뒷산의 오래된 우물에서 물이 솟구쳐 나와서 국학청(國學廳)으로 쏟아져 들어가 경(經)·사(史)·백가(百家)의 문서가 잠기거나 떠내려갔다.”
고유섭 관장이 예를 든 『高麗史』 誌第七 五行一의 仁宗 十年 八月 戊子條의 기록이외에도 『高麗史』 世家卷第八 文宗十五年 六月 二日 기사에서도 봉은사와 국자감이 연이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즉 “六月 癸丑 王如奉恩寺, 遂詣國子監, 謂侍臣曰, “仲尼百王之師, 敢不致敬?” 遂再拜.” 번역 : “6월 계축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가 그 길로 국자감(國子監)에 거둥하여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공자[仲尼]는 모든 군왕의 스승이니 감히 공경을 다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왕이 두 차례 절하였다.”
[주10] 고유섭, 『송도고적』 P.107., 1946, 박문출판사. 인종10년(1132년)에 국자감이 있었던 장소는 고려 성균관 자리는 현재 고려동의 고려박물관 자리이다. 고유섭이 말한 “太平町 103번지에서 116번지로 120번지에 끝나는 地域”에 국자감이 있던 시기는 1089년 이전이다.
[주11] 『高麗史』 世家 卷第二十一 神宗 六年 九月 기사에 “九月 甲午 崔忠獻詣奉恩寺, 祭太祖眞殿, 仍獻衣襯.”이라 하였다. 번역 : “9월 갑오 최충헌(崔忠獻)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에 제사를 지내고, 이어 의복을 시주하였다.” 이 기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하여 준다. 고려 태조에게 의복을 시주하였다는 언급이다. 즉 이 기록은 봉은사 진전은 어진(御眞)보다는 태조의 청동상(靑銅像)을 모셨기에 청동상에 입힐 의복을 시주하였다는 점을 방증하는 기록이다.
봉은사에 안치되었던 태조 왕건(王建)의 청동상은 1992년에 고려 태조의 릉인 현릉 옆에서 발굴한 바로 이 청동상이다. 이 청동상이 고려 태조 왕건의 상이라는 것을 처음 주장하여 규명한 역사학자는 북의 학자가 아니라 남측의 서울대 국사학과 ‘노명호(1951~)’ 전 교수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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