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이야기
수필집을 발간하고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 걸어가는 발자국이 가볍고 어깨가 덩실거렸다. 구순을 넘긴 어머니이지만 조금은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신문 보시는 것을 낙으로 여기신 분이다.
어머니는 책을 받자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며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셨겠냐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요즘 시력이 떨어져 자신도 글자를 읽을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어머니는 여동생이 오면 읽어주라고 하겠다며 다음을 기약하셨다. 나는 수필 중 몇 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꼭 읽으시라 신신당부하고 돌아왔다.
어머니 집을 방문하면 수필집이 소파 위에 침대 위에 놓여 있다. 처음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아들이 직접 쓴 책이라고 자랑하려고 놓여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읽고 있는 흔적이 보였다. 나는 물었다. “어머니! 책 보세요?” 어머니가 자랑하듯 대답했다. “요즘 시력이 조금 돌아와 책을 본다.” 나는 다시 물었다. “이해되세요?” 어머니는 자신을 바보로 아느냐고 대꾸하셨다. “충분히 이해돼야!”
어머니가 나의 독자가 되다니 너무 기뻤다. 이러던 중 우연히 ‘부모님 전기 쓰기’라는 도서관 프로그램을 만났다. 몇 번이나 망설였다. 명색이 수필집을 두 권이나 낸 작가인데 가오가 있지 초보자나 참여하는 글쓰기 프로그램 따위…… 그러다가 무엇인가 머리를 탁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몇 년 안에 돌아가실 어머니의 기록을 조금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오늘도 어머니를 방문한다. 어머니는 매번 아들이 왔다고 물들어 온 김에 배 띄우듯이 이 말 저 말 마구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듣는 척하면서 듣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더불어 질문까지. 관심 있게 몇 번 되물었더니 어머니는 흥이나 오래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일정한 순서 없이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시작은 언제나 어머니가 긍지로 여기는 학교 시절과 신여성으로서 순천 세무서에 3년 근무하다 아버지를 만난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자랑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지 절대로 약점이 될 만한 이야기는 피하셨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되던 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과정인 4년제 순천여중에 입학한다. 1학년 1학기는 일본어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일본학생과 한국 학생이 섞여 있는데, 한국 학생은 대부분 양조장이나 정미소 등 큰 사업체를 경영하는 부유한 한국인들의 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순천에서 제법 큰 사업체를 경영하셨다.
어머니 위로 오빠가 두 명 있었는데 큰 오빠는 일본 유학을 했고 작은 오빠는 정규 학교 시험에 떨어져 직업훈련소에 해당하는 ‘고토가’라는 곳을 다녔다. 작은 오빠는 여학교에 다니는 어머니를 질투하여 여자들 공부해서 뭐하냐고 짜증을 많이 부렸다.
어머니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가정 형편상 중학교 3년으로 학교를 마쳐야 했다. 외할아버지가 외지에서 트럭으로 물건을 가져오다 전복하는 바람에 크게 다쳐 집안 형편이 엉망이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사진첩에 외할아버지가 승용차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외삼촌도 외할아버지가 직접 승용차를 운전하셨다고 자랑하셨다.
어머니는 여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해방 후 세상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진 이야길 자주 하셨다. 학교도 양분되었다고 한다. 여학교 3학년 때니까 아마 1947년 무렵 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친구들 10명 정도가 월북했다고 한다. 또 일부 선생님도 월북하셨는데 그들 역시도 가장 뛰어난 선생님들이었다고 하셨다.
해방되어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돌아왔는데 큰 오빠가 돌아오지 않아 가족들 모두 걱정했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쯤에 오빠가 돌아와 가족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게 돌아온 이유를 물었더니 구구한 설명을 했지만, 어머니가 추측하건대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 어떤 활동을 하느라고 늦게 도착했다고 하셨고 조금 남다르게 특별했다고 하셨다.
큰오빠는 여순 때 순천지역 철도 사무소 최고 간부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되었다. 외할머니는 조석으로 큰 나무 밑에 물을 떠놓고 아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순천에서 서울까지 외할머니는 애태우며 면회를 다녔다.
나중에 6.25가 일어나자 큰 오빠는 군복에 별을 단 높은 지위를 가진 조선 인민군이 되었고 결국 월북했다. 어느 날 함께 월북하던 군 동료가 오빠의 소식을 알렸다. 북으로 피신하다 어느 산 절벽에서 기력이 떨어져 땀을 흘리며 죽었다고.
어머니는 일본 유학길을 떠날 때 망토를 입은 오빠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미숫가루, 조청 등 각종 먹거리를 가득 챙겨 보따리를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는 어린 여동생에게 너무 자상했던 큰 오빠를 늘 그리워했다. 어머니는 앞뒤 마루며 대청마루, 아름답게 잘 정돈된 외갓집을 늘 자랑했다. 하지만 집안은 큰 오빠가 좌익에 연루된 크고 적은 사건들 때문에 편안하지 않았고 왠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소설 같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끝이 없으나 더 진척은 되지 않고 그 자리를 뱅뱅 맴돌았다. 아쉽지만 구순 넘긴 어머니가 이 정도라도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이야기를 토로하니 감사하기 그지없다.
어머니는 항시 스님이 염주 알 굴리듯 손에 묵주를 가지고 사신다. 그 묵주 매듭 하나하나에 당신의 이야기를 담아 당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과 대화하신다. 그 대화를 엿듣지는 못했지만, 대부분 나를 포함한 당신 자녀들의 안위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다시 또 어머니를 만나면 당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겠다. 올해도 내년도 끝이 없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원할 뿐이다. (2021)
아몬드 나무의 사랑
태양 빛이 제법 봄기운을 알리는 따뜻한 오후다. 몇 명의 문화예술연대 회원과 골동품 수장가아파트를 방문했다. 오래전부터 나와 교유하고 있는 분이다. 약 두 시간 동안 골동품 수집에 관한 얘기를 듣고 소장하고 있는 중국 유물을 살펴보았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오후에 본 예술작품이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생각 끝에 예술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창작을 밥벌이로 하는 전업 예술가에 대해 마음이 쓰인 것이다. 방송이나 신문 지상에서 전해지는 대로 어렵고 힘들 텐데, 코로나-19 상황으로 밥술이나 뜨는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책을 내면서 가슴이 쓰라림을 느꼈다. 몇 년에 걸쳐 어찌어찌 책을 출간했다. 나의 자식 같은 책이 세상에 선을 보였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책을 소개하고 팔면서 자존이 무너짐을 느꼈다. 작가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같이 책을 보지 않는 시대에 단 한 권을 팔기도 힘들었다. 부탁하기 전에 선뜻 책을 사주시는 천사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 수는 가물에 콩 나듯 했다. 너무 곤욕스러워 푸념이 나왔다. 일정량을 소화하고 더는 사달라는 말이 나지 않아 중지했다.
그러던 중 한 예술가의 작품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났다.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과연 위대한 예술가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작품이 유명해지기까지 지속해서 도와주는 누군가가 필요 하느냐?
반 고흐는 동생 부부 테오와 요한나 봉허 사이에 태어날 조카의 탄생을 미리 축하하여 그림 한 점을 그려주었다. 이 그림이 파란 배경에 연둣빛 줄기가 그려진 봄의 희망과 설렘을 담은 그림 ‘아몬드 나무’다. 고흐의 작품 중 ‘해바라기’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런데 반 고흐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숨은 공로자는 동생 테오보다는 제수씨 요한나 봉허라고 한다.
1890년 고흐가 37세의 이른 나이에 자살하자, 형을 지원했던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33세의 젊은 나이에 과로와 죄책감으로 병사한다. 남은 사람은 아기와 봉허다. 막막한 상황이었을 텐데 그녀는 주저앉지 않고 굳은 결심을 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고, 큰아버지는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였다고. 그리고 그 위대한 화가가 너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려준 그림이 ‘아몬드 나무’라고.
영어 교사였던 봉허는 남편과 시아주버님이 나눈 프랑스어 편지를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번역했다. 또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훗날 아들에게 전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전에 고흐에게 우호적이었던 예술가들과도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고흐의 그림을 알리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다행히도 차츰 고흐의 작품을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났고, 드디어 1905년 암스테르담 회고전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술가들이 이 전시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생전 단 한 점 팔렸던 500프랑짜리 그림은(약 250만 원) 전시 이듬해 무려 20배에 달하는 1만 프랑(약 5000만 원)에 팔렸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반 고흐의 작품을 사러 왔고, 반 고흐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봉허는 돈을 목적으로 한 제안은 단호히 거절하고 고흐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작품만을 미술관에 판매하며 컬렉션을 지켜나갔다.
봉허가 죽자, 그 노력은 아들로 이어졌다. 아들은 어머니가 마치지 못한 번역을 완성했고 두 형제의 예술혼을 알리는 데 혼신을 다 바쳤다. 드디어 암스테르담시는 반 고흐 전문 미술관을 완성했다. 1890년 반 고흐가 사망하던 해 태어난 어린 조카는 여든세 살이 되어 개막식 테이프를 잘랐고, 5년 뒤 사망할 때까지 매일 미술관에 출근했다. ‘아몬드 나무’가 이어준 사랑의 꽃이 활짝 핀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감동 이상의 깨달음을 준다. 위대한 작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는 생에 실패했던 한 남자가 예술가가 되어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주며 심금을 울린다. 아몬드 나무에 얽힌 조카 사랑과 봉허의 헌신적인 가족사랑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예술가들이 많다. 다만 우리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창작 활동에 종사하는 가엾은 그들이 풍족한 생활은 아니더라도 생계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아몬드 나무의 사랑’ 같은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창작에 몰두하는 그들을 영혼을 다해 섬기고, 영혼을 바쳐 사랑하고, 영혼과 바꿀 만큼 소중하다고 말할 때, 즉 최선을 다해 나의 모든 것을 내준다고 할 때, 그 영혼은 이타적 헌신의 최대치를 낳아 역사에 남을 위대한 예술가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테오와 봉허가 되어 또 다른 빈센트 반 고흐를 인류에게 선사할 수 있다. (2021)
돌아오지 않는 강
봄이 왔다. 기다림은 꽃망울을 피워 올린다. 봄기운이 사방을 에워싸듯…… 아침에 깨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파트 공동 시설 어린이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른 시간이라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낱같은 봄비가 내렸다. 축축해진 바닥에 제법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물처럼 출렁거리고 어쩐지 센티해졌다. 저 물이 흘러 내가 되고 강이 된다는 자연의 순리를 알면서도 영원히 흘러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사실에 그리움이 무언의 어떤 존재를 찾게 한다.
1954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돌아오지 않는 강 (River Of No Return)’라는 영화가 있다.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뗏목을 타고 가면서, 남녀 주인공이 거센 물살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또 세기의 스타 마를린 먼로가 주점에서 남자들에 둘러싸인 채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부르는 장면은 수많은 영화 팬들의 가슴을 강타했다.
‘그런 강이 있지,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강
때로는 평화롭고, 때로는 거칠고 자유로와
사랑은 유랑자, 돌아오지 않는 강 위를 유랑하지
(중략)
이 노래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서사(敍事)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삶은 돌아오지 않는 강과 같은 슬픈 사연을 숱하게 만들고 노래한다며.
1970년대 초반 중학교 시절, 단체 관람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그 후 TV 명화극장에서도 보았고 최근에 유튜브를 통해 중간 중간 다시 보며 그 옛날 감동을 그대로 되살려 보기도 한다. 나는 왜 옛 영화를 종종 되돌려 보는 것일까. 이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우리의 삶을 포용하고 아우르기 때문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희미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가면 언제나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그 애를 마주치고 싶었다. 로또에 가까운 확률이었던지 서울을 무던히도 올라다녔지만, 우연히 만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언제나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하얀 종이에 착할 선(善)과 꽃부리 영(英)을 크게 적어 건너던 애였다. 처음에는 흑석동과 신촌을 오가며 대학 신문과 ‘Reader’s Digest’나 ‘Time’을 읽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지나고 친해지자 손을 잡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지식인의 고뇌며 알지 못할 이야기를 허공에 날리며.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영화처럼 목숨을 건 거친 뗏목 항해에서 얻어지는 아름다운 사랑 같았다. 그 사랑을 가능케 했던 순수함이 숭고했다. 그리고 튼튼하게 내일을 약속하고 있었다. 이 세 가지가 잘 어울려 우리의 미래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번은 여름방학 때 그 친구가 내 고향 순천에 내려왔다. 고장의 명소라는 선암사나 낙안읍성 등 여기저기를 안내하고 싶었다. 승용차가 없던 시절이라 교통편이 퍽 신경 쓰였다. 힘들어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비췄는지 그녀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너를 만나러 온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순천역에서 배웅하는데 너무 아쉬워 차표도 없이 함께 기차에 올랐다. 구례에서, 곡성에서, 남원에서, 내려야지 하다가 서울까지 따라 올라갔다. 뒷날 공부는 하지 않고 여학생 뒤꽁무니만 따라다닌다고 부모님께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욕을 얻어먹어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배웅이 좀 길었을 뿐이라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 ‘그리움’이란 뭘까 하는 물음이 자주 떠오른다. 장소나 물건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가장 간절한 그리움은 아무래도 불쑥불쑥 솟구치는 ‘사람’이다.
‘돌아오지 않는 강’의 거친 물살이나, 남녀 주인공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들이 잊히지 않는 여운으로 지난 기억을 떠오르게 하듯이 청승맞게 내리는 봄비도 옛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우리의 기억도 지금 내리는 봄비도 돌아오지 않는 강에 또 다른 사연을 보태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질 것이다.
‘사랑은 유랑자, 돌아오지 않는 강 위를 유랑하지……’ 마를린 먼로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돌아오지 않는 강의 물결 따라 아득하게 울려 퍼진다. (2021)
역사의 반복
오래된 신문에서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전임 대통령들이 나란히 서서 찍은 기념사진을 보았다. 매우 인상 깊었다. 그날 전임 대통령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최선이라며 통합과 축하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특히 공화당 출신 부시 전 대통령은 “당신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이라며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했다.
이 감명 깊은 기사가 작금(昨今)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또 퇴임이 얼마 남지 않는 대통령의 장래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상생의 길은 사라진 지 오래다. 끝없는 악순환이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한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미륵을 자처하며 ‘쇼’를 벌이던 궁예가 입바른 소리를 한 승려 석총을 처형할 때의 명대사다.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마구니가 끼었구나. 관심법으로 보았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소승은 어려서 불문에 입문하여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미륵만 배워왔사오나 폐하와 같은 미륵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오늘날 거짓을 말하고 계시오이다. 낙원도 없고 극락도 없소이다. 거리엔 굶어 죽은 시체들과 오갈 데 없는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고 있소이다.”
“저자는 지금 마구니의 더러운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다……. 내 군들은 무엇을 하느냐? 저 입을 철퇴로 으깨주어라.”
“조정에 사악한 간신들만 들끓고 있으니 어찌 폐하의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막히지 않겠사옵니까……. 폐하, 나라가 이미 깊이 병들어있사옵니다. 백성들은 더는 속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직도 저 요원한 ‘북방(北方)의 세계’를 논하지 마시고 죽어가는 백성과 나라를 구하시옵소서. 그 길만이 살길이옵니다……. 다시는 백성을 속이지 마시옵소서!”
“무엄하도다……. 저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단칼에 목을 내리치거라.”
“거짓 미륵이시여, 그대의 세상은 이미 끝났소이다. 이미 새로운 미륵이 나타나 내일의 세상을 준비하고 있소이다. 거짓 미륵이시여, 저주를 받을 것이외다.”
이미 정신이 돌아버린 궁예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간언하는 석총의 절규가 폐부를 찌른다. 하지만 철퇴를 맞고 쓰러져 피투성이가 된 석총보다 보기 괴로운 것은, 궁예가 정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저 고개를 숙이는 고관대작들이다. 그들은 눈을 질끈 감음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고 백성 위에 군림했다.
‘태조 왕건’의 주인공은 물론 왕건이지만, 실상 드라마를 주도하는 건 궁예다. 드라마는 그의 광기를 통해 말세 의식 속에서 태어난 권력, 종교로서의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궁예는 애꾸이고,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는 지도자로서의 치명적 약점을 상징한다. 그는 되레 비판 세력을 꾸짖는다. “네가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봉사가 되었기 때문이야.”라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 정사(政事)와 관련한 고도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길바닥에서 백성의 손에 명이 끊긴다.
왜 우리는 20년 전에 방영된 이 드라마를 밤마다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으로 다시 보곤 할까. 공영방송에서 대하 사극이 실종돼 볼거리가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당대와의 시차와 관계없이 정확히 권력의 속성을 겨누는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옛날 B.C 시절의 동굴벽화에 “요즘 아이들은 싹수도 없다.”라는 글이 있다고 한다. 인간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는가. 오늘도 숙명적으로 ‘역사의 반복’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보다. (2021)
달고나의 유감
성당의 자매님들과 커피숍에 갔다. 주문하는데 서로 계산하겠다고 난리다. 오늘은 모처럼 내가 쏘겠다고 하니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저녁 시간이어서 커피 주문을 망설였다. 한 자매님이 ‘달고나 커피’를 권한다. 그게 뭐냐고 물었다. 자매님 왈(曰) “요즘, 엄청 인기 있어요!”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벨이 울리고 커피가 우리 앞에 놓였다. 수백 번 저어야 한다고 해서 계속 커피를 젓다가 맛을 보았다. 흐물흐물한 맛은 설탕물인지, 엿 녹인 물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사소한 일상이지만 항시 도전은 어렵다. 역시 익숙한 게 좋다. 하지만 요즈음 ‘달고나 커피’라는 말이 눈에 자주 띈다. 자주 들으니 차츰 달고나에 익숙해진다. 누군가가 달고나 커피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설명하고 싶다.
뜨거운 물에 커피 가루와 설탕을 듬뿍 넣고 수백 번에서 수천 번까지 저어서 거품을 만든 뒤 물이나 우유에 타 먹는 것이 ‘달고나 커피’다. 거품기를 이용하는 대신 직접 팔이 빠지라 힘들게 저어야 한다는 게 달고나 커피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테이크아웃 전문점은 400번을 직접 저어야 한다는 수제 달고나 대신 달고나 과자 조각을 커피 위에 얹어서 판다. 오로지 당(糖) 충전에 불과하다.
‘달고나 커피’는 커피 믹스처럼 한국에서 개발된 챌린지 커피다. 한 때 커피 믹스가 전 세계를 강타한 것처럼, 달고나 커피도 해외로 소개되어 대표적인 한국 커피로 자리 잡을 전조를 보인다. 그리고 코로나 19사태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요즘 더 인기가 있다.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젓는 순간 단순노동에 집중하기 때문에 우울함과 잡념이 사라지는 효과도 있다.
이렇게 달콤함에 취했다가 문득 섬뜩해진다. 만약 삶에서도 달콤함만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는 그의 에세이 『평생 이어질 좋은 기분』에서 달콤한 악마를 경계하라는 교훈을 전한다. 류가 만난 20대 초반의 잘생긴 카레이서는 술도 영화도 파티도 데이트도 사양하는 삶을 산다. 이유는 이렇다. 자기도 이성과 놀고 싶고 그게 얼마나 즐거운지도 잘 안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다며, 레이스에서 멋진 기록을 내면 정말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좋은 기분이 평생 이어질 것 같은 일을 해내고 싶다는 뜻이다. 결국, 내 안으로 들어오는 달콤한 맛으로만 우리의 삶이 영위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입에 쓴 약이 병에 좋다는 속담처럼.
다른 예를 들어보자. 고교생 친구들이 함께 공부한다. 한 30분가량 공부를 하더니 힘들다며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는 말. “나는 역시 공부보다는 음악이 맞는 것 같아.” 그 학생의 음악적 재능을 응원해주고 싶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이 든다. 공부보다 음악이 맞는 게 너뿐일까. 대부분 학생 모두 영어나 수학 문제 풀이보다는 음악 감상이 더 달콤하지 않을까. 대학 시절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혼잣말로 늘어놓던 넋두리가 있다. ‘학문과 가난과 사랑으로 청춘이 가지만, 나는 기쁨으로 가득하다.’ 달콤함이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말을 했었을까.
주변에는 달콤함이 널려있다. 진지하고 어려운 이야기는 외면받기에 십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휘발하더라도 유행을 좇는 이야기만 좋아한다. 달콤한 악마가 유혹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클럽이나 포차에서 술을 마시고 몸을 흔들어 대는 단순한 달콤함만으로 혼탁하고 어려운 세상에 빛을 밝힐 촛불이 될 수 없다.
대학 시절 아마추어 밴드 생활을 하면서 기타를 친, 음악을 사랑한 친구가 있었다.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랜만에 기타를 꺼내 기억을 더듬어 예전의 노래를 연주했다고 한다. 처음은 코드 진행이 잘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 힘들고 지루하지만 몇 번 연주하다 보니 놀랍게도 몸이 기억하고 있던 코드 진행과 움직임이 돌아왔다. 고생 끝에 연주를 끝내고 나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가 잊었던 연주 실력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는가. ‘달고나 커피’를 젓는 몇 배의 각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달고나 커피의 기쁨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민과 고통이 필요하다. 여유가 생기면 공원을 산책하거나 동네 상점과 식당에서 장을 보고 간단한 외식을 하는 정도의 단순한 달고나에 그치지 말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해보자.
진정 우리에겐 진지한 고통을 감수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2020)
더 걸어야 할 길
퇴직 후 첫 날, 직장에 다닐 때보다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서두를 일이 없어 벌떡 일어나지 않았다. 자리에서 누워 이른 아침 할 일을 찾느라 눈을 깜빡거리며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는 몇 년 전 퇴직했다. 지금은 순천 해룡면 앵무산 기습에 터를 잡고 야인 행세를 하는 듯 살고 있다. 실은 문명의 이기를 다 누리면서. 남다른 점은 2년이나 3년 간격으로 책을 써 주위에 돌린다. 최근에 발간된 책이 인상 깊어 책장을 뒤졌다. ‘갈 곳 없는 시간 100권의 책’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었다. 책을 펼쳐 서문을 읽기 시작했다. 인생 2막의 첫길에 유익한 지침서가 될 거라는 은근한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밥벌이를 멈추고 소원대로 놀기만 하는데 무미하다며 ‘책 읽기’와 ‘글쓰기’로 돌아왔다는 요지였다. 그는 읽기와 쓰기가 갈 곳 마땅치 않은 난감함과 예민한 마음을 달래 주었고, 자신의 영혼을 위한 자가 치유의 방편이었다고 한다. 작년에 책을 받아 읽을 때 나 자신의 미래를 본 것 같아 울적했는데 그 예감이 여지없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서문을 반복해 읽다가 이러저러한 생각을 멈추고 새벽 어두운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에 늘 다니던 길도 시간과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어제와 달랐고 또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다. 간간이 얼굴에 부딪히는 쌀쌀한 바람에 폐부가 서늘했다. 가슴 한구석에서는 감사의 물결이 용솟음쳤다. “감사합니다. 노력 이상으로 더 받았습니다. 혹시 너무 많이 주셔서 힘든 일이 생길까 걱정입니다.”라고.
산 중턱에 도달해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새벽녘의 시가지를 내려 보았다. 깨어나는 천지 만물은 새롭고 경이로웠다. 오늘도 저기에 사는 수많은 사람이 또 다른 삶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지금 이 시각을 재촉할 것이다. 끝없는 사념이 머리에 들락거리다 인상 깊었던 영화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와일드(Wild ·2015)’라는 영화다. 하이킹 경험이 없는 주인공은 겁도 없이 자기보다 큰 배낭을 메고 멕시코 국경에서 출발하여 미 대륙을 종단하고 캐나다 국경에서 끝나는 4300km나 되는 ‘꿈의 트레일’이라고 불리는 PCT에 도전한다. 왜 이 험난한 길을 혼자서 걷는 걸까. 무슨 사연으로……
주인공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힘이 되었던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며 약과 술로 자신을 망가뜨렸다. 그리고 무작정 나선 PCT 종주로 자신을 치유하고 싶었다. PCT는 강도는 물론, 위험한 들짐승과 마주칠 수도 있고 탈진한 채로 죽을 수도 있는 길고도 험한 길이다. 경험이 없는 주인공은 몸도 마음도 벼랑 끝까지 몰린 채로 혼잣말을 하며 터벅터벅 걷는다.
그렇게 몸과 마음 모두 탈진한 채 야생을 걸은 지 94일째, 주인공은 드디어 종착점에 도착한다. 구체적인 조언을 건네는 사람도 없었고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수없이 자문하고 걸었을 뿐. 그렇게 텅 비운 후에야 깨달음에 도달한다. ‘무성한 슬픔의 숲에서 나를 잃어버린 후에야, 숲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아냈다.’라는 명구를 만들며…….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는 학생들을 대하던 교사가 아니다. 이순(耳順)이 훨씬 넘은, 건강이 전부라고 부르짖는 필부에 불과하다. 오늘도 무사히 이 산을 오르내릴 힘만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아직 힘이 있다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몸이 그댈 거부하거든 몸을 초월하라’ ‘내겐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 가야 할 길이 있다.’ 에밀리 디킨슨과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을 되뇌며 계속 한 걸음씩 발을 떼어 본다. 발을 떼는 한 걸음이 더 걸어야 한다는 나의 결심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발을 떼며 결의를 다지는 일이 이 순간 나의 호흡이며 삶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사랑이다.
어쩌면 지금 나는 절망의 숲에서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갈 곳 없는 시간, 나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친구의 표현처럼 또는 영화 속에 주인공이 탈진하며 야생을 걸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듯 그것이 ‘더 걸어야 할 길’이면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한다.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의 탐구를 완성하는 일이다. 신발 끈을 묶으며 다시 길을 떠나고 싶다.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2021)
상식이 통하는 세상
사립지회 첫 모임 개최 통보가 휴대폰 메시지에 떴다. 지난해 마지막 모임에서 얼떨결에 맡게 된 분회장 임무가 시작되었다. 오래 전 지회 활동 때도 나이에 걸맞지 않았는데 이순(耳順)의 나이에 다시 활동하게 되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첫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도중 지회장은 생산업체 직원 2명을 소개했다. 우리는 그들의 상황을 경청했다. 단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슴 아픈 사연이 절절했다. 야근과 잔업에 시달리다 손가락이 절단된 산재를 노동자 잘못으로 몰아대는 고용주의 어처구니없는 처신에 분노가 치솟았다. 광장의 민주 횃불이 만들어 낸 현 정부 아래에서도 이런 비극적인 일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예수를 믿고 그 분의 삶을 닮아야 한다고 맹세하는 신앙인이다. 이번 토요일도 일요일도 온통 성당에서 보냈지만, 이틀 동안 나의 입술은 단 한 번도 어렵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내 자신과 자녀의 안위를 빌고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위안을 청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정마다 형편이 다르지만 요즘 주거 시설이 좋아지면서 계절을 극복하는 기술이 날로 발전했다. 엄청난 추위에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자신만의 따뜻한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와 가족의 평온함만을 추구하는 일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웃의 추위나 어려움을 걱정할 줄도 모르고 어려운 이웃 이야기도 무덤덤하게 듣는 그런 사람이.
내가 누리는 이 삶이 어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된 것이겠는가. 주변 사람들 덕분에 살아가면서 나는 어느새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소아적인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노동자들의 호소가 메아리가 되어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내가 믿는 하느님 덕택으로 많은 것을 받은 자가 되었으니 이제 내가 믿는 하느님처럼 불쌍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누고 그들의 편이 되도록 하자, 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 마음도 잠시일지 모르지만.
회의를 마치고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맛있는 코다리찜 전문식당이다. 식탁에 요리가 들어오자 노동자들을 생각했던 마음은 뒷전이요, 부지런히 식욕을 채우기 시작했다. 식사 도중 손님 중 한 여성이 옆에 앉은 선생님께 다가와서 제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학창시절 선생님의 말씀을 잊지 못한다고 인사했다. 나는 그녀가 잊지 못한 선생님의 어록이 궁금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은 자칭 작가가 된 뒤로 예전보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훨씬 많아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생님이 무엇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기억해요?” 그녀는 대답한다. “저는 1994년도에 선생님으로부터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말을 들었고, 지금도 선생님의 말씀을 잊지 못해요.”
선생님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도 가르침도 다 잊었다. 하지만 학생은 여고를 졸업한 지 20년이 훨씬 지나도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옆 선생님같이 학생들에게 감명을 주고 세상을 올바르게 보도록 가르친 선생이었을까. 내가 살아왔던 행적과 대비되어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담임을 맡았고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사죄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씁쓸함만 가득한 채 다른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서둘러 일찍 식당을 빠져나왔다.
올해 ‘분회장’이라는 내게 걸맞지 않은 커다란 옷을 또 하나 걸쳤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2018)
자금성 해프닝
출근하여 컴퓨터를 켜고 직장 메신저를 확인했다. 오늘은 수능 모의고사 날이다. 수업 대신 시험 감독을 하니 한가할 것 같았다. 여유 시간을 잘 활용하리라. 어제 쓰다가 완성하지 못한 수필을 마무리하리라 다짐했다. 이어 휴대폰을 꺼내어 문자를 확인했다. 카톡에는 아침 시간에 여러 통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런 메시지를 발견했다. “윤석열은 ‘부동시(좌우시력 편차)’로 군 면제^^! 울 아들은 국립대학병원 진단서 정식 기록 ‘부동시’ 판정 그래도 현역 입대! 육군 만기 병장 제대” 쓴웃음이 나왔다. 아버지가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했으면 이런 글을 올렸을까. 나도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과연 우리 사회에 ‘평등·공정·정의’가 있는지.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군 생활이 생각난다. 나는 서울 수도경비 사령부 소속으로 필동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외출을 허락받고 모교가 있는 흑석동을 찾아 동창생들을 만났다.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다음 버스 다음 버스 하다 귀대 점호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약 3분 정도 늦었다. 단 3분 때문에 얼차려를 받고 벌로 밤새 선임병 대신 보초를 썼다. 다음날 한숨도 자지 못해 얼굴이 누리 땡땡 부은 나에게 선임병들의 위로는 단 한마디. “영창 안 간 것 다행으로 생각해라.”
사람의 기억은 참 신비롭다. 지워지고 잊은 줄 알았는데 필요에 따라 이렇게 생생하게 되살아나 닭살 솟듯 소름이 확 몸에 퍼졌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단톡방에 문학모임 회장님으로부터 메신저가 왔다. 코로나19가 완화되어 월례회를 갖고자 하오니 의견 주시고 좋은 장소 추천해주라고. 아직 ‘거리두기’를 더 철저히 지켜야 하는 사회적 대의 때문인지 회원들의 의견 개진이 없었다. 지난 달에도 모이지 못했기 때문에 문집 발간 등 토의 사항이 많을 것 같았다. 나는 연향동 자금성 2층이 넓어 거리두기에 좋다고 추천했다.
곧 총무님이 새로운 장소를 추천했다. 맛깔스러운 음식 사진까지 보내며 의견을 물어보았다. 나는 금방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회장단이 나름 계획이 있었는데 괜히 주책없이 끼든 모양이었다. 문자를 보냈다. “아무도 추천 안 해서 용감히 추천했는데 이제 저는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장소까지 제가 신경 쓸 나이가 아니네요.” 얼마 되지 않아 한 회원이 문자를 보냈다. “제가 토요일에 자금성에서 선약이 있는데, 가능하면 양다리 걸치고 싶습니다만~” 즉시 회장단은 자금성을 모임 장소로 공지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는 얼마나 공정하게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평등·공정·정의의 칼을 제멋대로 빼고 닫아 버리지는 않은지. 나와 같이 자금성을 원한 회원은 우리 지역의 최고의 수장이다. 응당 대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공정의 문제가 이렇게 대두되고 있는 요즘, 모든 것을 쉽게 종결하는 상황이 무척 아쉬웠다. 그분이 양다리를 걸치기 위해 자금성을. 그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나이 들어 물러난다는 나의 표현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빛나는 대목을 잊지 않고 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말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에서 빚어지는 일마다 겉옷 아래로 삐져나온 속옷 마냥 더 흉해 보인다. 누구를 위하는 척만 할 뿐 실제론 역겹고 지겹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런 자들은 차라리 쇼 비즈니스에 진출하라고 권하고 싶다. 연예계는 ‘국민을 위해서’를 거짓으로 외칠 일이 없는 곳이며, 뽐내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아무 흉이 안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2020)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헤밍웨이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속표지에는 한 편의 시가 적혀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존 던의 시다. 왜 헤밍웨이는 이 시를 인용했을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람은 그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중략)
누구의 죽음이든 나를 줄어들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서 저 조종(弔鐘)이 울리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말라.
조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2년 전 선친의 장례미사가 있었다. 예식을 마치고 애도의 전송을 받으며 운구차가 장지를 향해 떠나려고 할 때 앞마당에 위치한 성당 종이 울렸다. 고인을 위한 마지막 인사였다. 풍파 가득한 세상에서 수명을 다 누리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선친을 위한 슬프디 슬픈 장송곡으로 들렸다.
오늘은 생각이 바뀐다. 그날 울렸던 조종(弔鐘)은 아버지의 아들인 나는 물론이고 그날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모두를 위해 종이 울렸을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한 폴란드 농민이 유대인을 자기 집 땅굴 속에 숨겨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 유대인은 땅굴에서 나왔다.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폴란드인은 영웅 대접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초청되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왜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유대인을 구해 주었나요?” 그는 답했다. “저는 유대인이 뭔지 모릅니다. 저는 그저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 뿐입니다.”
농부는 유대인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하지만 사람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구했다. 우리는 농민의 용감한 행동을 인간 본성의 힘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인류를 구성하는 일원이고 인류의 모든 병폐도 우리의 일부분이다. 옆 사람이 괴로워할 때 나도 괴로운 감정을 느껴야 하고, 옆 사람이 실수를 저지를 때 나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코로나19 발생을 처음 외부에 알렸다가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 코로나19로 숨진 중국 의사 리원량(李文亮)을 어느 작가가 언급했다. “우리가 리원량처럼 호각을 부는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호각 소리라도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호각 소리라도 듣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개인의 행복만 찾는 사람이 아니라, 배려와 헌신 그리고 관계 회복 등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곳곳에는 종과 호각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제 누구를 위하여 종과 호각이 울리냐고 질문하지 않겠다. 바로 당신을 위하여 울린다고. (2020)
우동 한 그릇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이라는 책을 친구로부터 소개받았다. 가난을 아름답게 그려내 수많은 독자의 가슴에 눈물과 웃음을 선사했고, 감동에 굶주렸던 현대인에게 ‘감동 연습’을 시켜 주었다는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따스한 감동의 수작(秀作)이 새해 첫 달 친구의 선물이라 절로 기분이 흐뭇했다.
일본은 매년 마지막 날 ‘해 넘기기 우동(소바)’을 먹는 풍습이 있다. 홋카이도(北海道)의 어느 우동 가게, 12월 31일 늦은 밤에 어린 두 아들과 어머니가 들어와 미안해하며 150엔짜리 우동 1인분만 주문한다. 행색이 초라한 세모자에게 무뚝뚝한 주인은 주방에서 우동 반 덩어리를 더 넣어 1.5인분의 우동을 내온다. 주인의 서비스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세모자는 푸짐한 1인분의 우동을 너무도 맛있게 나눠 먹는다. 150엔을 지불하고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하는 그들에게 주인 내외는 목청을 돋워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그다음 해도 가난한 세모자가 찾아와 미안해하며 우동 1인분을 주문한다. 그다음 해 마지막 날에는 주인 내외가 세모자를 기다린다. 그새 200엔으로 오른 우동 값을 메뉴판에는 150엔으로 고쳐 그들이 앉았던 테이블에 예약석 팻말을 올려놓았다. 10시 반이 되자 지난해보다 더 자란 아들들과 변함없이 낡은 코트를 입은 어머니가 웬일인지 우동 2인분을 시킨다. “우동 2인분!”이라고 맞받아친 주인은 주방에서 둥근 우동 세 덩이를 뜨거운 국물에 넣는다.
그리고 주인 내외는 무심한 척 세모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그날이 마침 죽은 아빠의 빚을 다 갚은 날이라고 하며, 막내아들이 작문으로 발표한 ‘우동 한 그릇’이란 글의 내용을 얘기한다. “우동집 아저씨와 아줌마가,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큰 소리로 용기를 북돋아 주신 일. 그 목소리는 ‘지지 말고 살아라! 힘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요. 그래서 어른이 되면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주인 내외는 계산대 깊숙이 몸을 웅크리고 한 장의 수건 끝을 서로 잡아당길 듯이 붙잡고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세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러 두 청년을 데리고 들어선 노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 우동… 3인분입니다… 괜찮겠죠?” 타지로 가서 의사가 된 큰아들과 우동집 주인이 아니라 은행원이 되어 나타난 막내.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1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동생과 지금까지 인생 가운데에서 최고의 사치스러운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포로의 우동집을 찾아와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세모자와 주인 내외의 따뜻한 마음에서 삶이란 얼마나 연약하고 소중하며 또 예측 불가한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삶은 권리가 아니라 매일 주어진 의무이면서도 귀중한 선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출세를 하여 나만 잘살면 된다는 무인지경의 세상과 견주니 가슴이 쥐어뜯어진다.
돈은 세상살이의 전부가 아니다. 순자(筍子)는 ‘복이란 어떤 행운이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없는 생활이 이어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설파했고,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의 저자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가진 것보다 덜 원하면 부자, 가진 것보다 더 원하면 가난’이라고 강조했다.
언젠가 어머니 댁에 방문하여 작가로서 미래의 계획을 기쁘게 알려 드렸다. 어머니는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시며 한마디 했다. “책 잘 써서 인기 얻고 많이 팔려고 애태우지 마라. 그냥 편히 살아라.” 어머니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왠지 ‘인기 얻고, 많이 팔려고’라는 말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애태우지 마라는 뜻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대로 살아야지 지나치게 잘 하려고 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는 염려였을 것이다. 용쓰지 마라는 말이나, 거북이나 달팽이 걸음으로 살라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방학이 되어 외가를 방문할 때 학교도 안 다니고 책 한 권 읽지 않은 외할머니는 말했다. “사람은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 “사람 허울을 하고 있다고 다 사람이 아니다.” “그 짓이 사람 짓이냐,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사람이 그러면 쓰간디.” 얼마나 사람다움을 강조하셨는지 모른다.
섣달 그믐날 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던 도중에 배웠다. 눈을 감고 ‘반짝반짝, 반짝반짝’ 입술에 중얼거리면 마음속의 어둠에 별이 떠서 밝아진다고. 그래서 ‘우동 한 그릇’의 이야기가 반짝반짝 머리에 떠오르면서 고통 받고 슬프게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이 바로 나와 너의 얼굴이고 우리의 얼굴이라고 여기게 한다.
다가오는 새해엔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무심하지 않기를 굳게 다짐해 본다. (2019)
1도 없다
최근에 아내로부터 질타하는 문자를 받았다. 평소에 자주 받은 터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1도 없다.’란 글귀가 낯설었다. 의미야 쉽게 알아차렸지만 왜 이런 비문을 쓸까 의아했으나, 너무 화가 나서 그렇겠지 하고 지나쳤다.
텔레비전을 켜니 국회에서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 의원이 “그럴 가능성은 일(1)도 없습니다.”라고 불과 몇 분 사이에 여러 번 반복했다. 나는 ‘1도 없다.’라는 말을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하는가, 살펴보고 싶었다.
2014년 한국어가 서투른 캐나다 국적의 한 가수가 “하나도 모르겠다.”라는 말을 “1도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후 한 걸그룹이 ‘1도 없어’라는 노래를 부른 뒤 대유행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은 맞춤법상으로는 ‘하나도’를 ‘1도’로 바꿔 쓸 수 없다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하나’는 뒤에 오는 ‘없다’ ‘않다’ 따위의 부정어와 호응하여 ‘전혀’ ‘조금도’의 뜻을 나타내는 명사이므로 숫자 1을 ‘하나’ 또는 ‘일’로 읽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했다. 국어사전도 명사(名詞) ‘하나’와 수사(數詞) ‘일(1)’을 엄연히 구별하고 있다.
요즘 ‘1도 없다.’는 표현을 젊은 세대가 많이 쓴다고 한다. ‘하나도’는 그렇게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모국어의 품격(品格)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1도 없다’라는 발언이 마음에 걸린 또 다른 이유는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흘 논쟁’ 때문이다.
8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자 사흘과 관련한 해프닝이 온라인을 달궜다. ‘8월 17일 임시공휴일 지정…… 사흘 연휴 완성’. 바로 이 온라인 뉴스 제목과 댓글 때문이었다. 이런 댓글이 우르르 달렸다. “15, 16, 17일 삼일이지 왜 사흘이야?” “토, 일, 월 3일인데 왜 사흘이라고 뻥치냐?” 사흘을 3일이 아니라 4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댓글로 정답을 알려주자 심지어 우격다짐도 벌어진다. “왜 굳이 사흘이라고 표현해서 사람들 헷갈리게 함?” “3일을 왜 사흘이라고 쓰느냐?” 라고 했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나도 사흘을 의아하게 생각하여 질문한 적이 있어 선생님이 정확히 알려 줄 때 얼굴을 붉힌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사흘’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진풍경마저 벌어졌고, 급기야 자기 고백적 놀이로까지 확장됐다. 슬픈 사연은 이 고백이었다. “나는 사흘을 기다릴 테니 고민하고 답을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흘째에야 전화했고 나는 받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멀어져 갔다. 오늘에야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사랑마저 갈라놓은 사흘이 무척 안타까웠다. 정말 그놈의 사흘이 문제였다.
누군가는 교육의 실패라며 목청을 높인다.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주관식 국어 시험에 1일·2일·3일 등을 순서대로 나열한 뒤 우리말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하루·이틀·사흘·나흘·닷새·엿새·이레·여드레·아흐레·열흘. 한국어의 계통을 밝힐 때 이 수사(數詞)들은 기초 어휘이다. 일이삼사는 한자고, 하나둘셋넷은 한국어다. 셋을 알면 사흘로의 연상이 자연스러운데, 사를 먼저 떠올리면 헷갈린다.
프랑스 파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어린 사무엘’을 우린 기억한다. 잠옷 바람의 어린아이가 무릎을 꿇고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이 그림을 보면 바로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오늘도 무사히.’ 버스나 택시 운전석에 흔히 매달려 있던 이 그림과 글귀는 종일 운전하는 기사님의 안전을 기원하는 가족의 마음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언어생활도 매 순간 기도하는 마음처럼 ‘오늘도 바르게’라는 염원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을 줄일 수 있고 품격도 높일 수 있다. (2020)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중국에선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표현한다. 2000년 왕가위 감독은 이 화양연화를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리첸(장만옥)은 라디오에 신청한 ‘화양연화’라는 노래를 들으며 차를 마신다. 바로 옆방에 차우(양조위)가 있다. 두 사람은 벽으로 가로막혀있다. 카메라는 연이어 라디오와 리첸을 비추고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지나 차우를 비춘다. 벽은 사랑하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현실의 장애를 상징한다.
카메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그 시간 속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잡아낸다. 또 그 시간 속에서 망설이는 그들의 사랑을 애틋한 시선으로 표현해낸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도 이리 지나가고 있음을 영화는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이때가 이들의 화양연화다.
얼마 전 벚꽃이 지던 공원을 걸으며 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요즘 나의 삶이 어쩜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물었다. “로또에 당첨될 만큼 좋은 일 있어?” 나는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 ‘아무렴 어떤가. 행복이 별거랴. 별일 없이 소소한 것이 행복이다.’라고 자위했다.
돌이켜보면 하늘이 보우하사 큰 날벼락은 피했지만 인생의 매 순간이 갈급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영어 선생 사십 년이 만만치 않았다. ‘수능영어, 수능영어’하면서 얼마나 목이 탔는가. 또 도움도 되지 않는 자식 걱정에 얼마나 가슴을 애태웠는가. 고통과 불면의 점철이었다. 이제 더는 수능영어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애들에게 무엇 하라고 역정 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별일 없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여유 있고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어느 강연에서 나이 60부터 75세까지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나의 시간대다. 삶이 결코 공정하거나 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생각에 따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과거의 상처도 입에서 가볍게 나오면 지난 일에 불과하다.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갔으므로 이제 내 탓으로 조용히 수용할 시간만 남은 것이다.
인생을 살며 겪는 불행을 상처로 인식하면 행복해지기 어렵다. 인생에서 부는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내게!’가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중요한 건 상처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상처의 시간을 잘 다독여 보내는 것이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니 양지바른 곳의 꽃은 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늘 속의 꽃은 아직 한창 개화 중이었다. 일찍 피니 일찍 질 뿐, 그저 때가 다를 뿐이다. 악착같이 좋은 점을 발견해내는 그 마음이 ‘화양연화’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마음을 영화 속 주인공, 리첸과 차우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의 순간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고 싶다.
열정 페이
유명 패션 디자이너의 직원 월급 명세서가 SNS에 올라왔다. 야근 수당을 포함해 수습 10만 원, 인턴 30만 원의 급여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수습·인턴 직원에게 턱없이 낮은 임금을 주는 패션계에 관행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고용주는 원하는 일을 하게 해 줬으니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명 ‘열정 페이(熱情 Pay)’라는 옹색한 변명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일 자체가 경험이니 적은 월급 혹은 무급이라도 불만을 품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에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냉소도 담겨있다.
‘열정 페이’에 대해 알고 나니, 나 자신의 ‘열정 페이’는 없는가 생각이 든다.
직장 생활의 가장 큰 동인은 매월 정해진 날에 지급되는 ‘봉급’이라는 유형의 대가다. 교직에 근무했던 나는 학생을 가르쳐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대가가 큰 힘이 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대가가 없었다면 계속 40년을 달릴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순(耳順)이 되어 오직 하나의 ‘열정 페이’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바로 글쓰기다. 앉으나 서나 잠을 자나 깨나 온통 문장 속으로 달려갔고 나름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가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말 그대로 열정이 타올라 컴퓨터 자판 앞에서 몸서리치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나의 삶과 사유를 담긴 내 글로 누군가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글을 써서 카톡방에 올린다. 지인 중 누군가 “공감합니다. 감명받았습니다.”라는 감사의 문구를 보내 줄 때 나의 수고는 전부 보상을 받은 셈이 된다. 열정의 대가는 감동이었고 그 보상은 다시 열정을 불렀다.
어느덧 글쓰기를 시작한 지도 5년째다. 자주는 아니라도 때론 글을 쓰고 나누는 일들에 감동하였던 초심이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곤 한다.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저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이 충만했던 순수의 시절은 가고 눈으로 보이는 실질적인 대가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글쓰기의 무용론이 머리에 하나의 싹이 되어 깐죽거리며 말을 걸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종국적인 목표는 책 출간이다. 나는 이 목표를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이루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목표를 생각하면 마음이 갈급해지고 소인배가 된다. 글쓰기의 수고가 열정 페이로 보상받았다면 책 출간은 열정 페이 플러스 내 호주머니 돈이 투자되기 때문이다. 즉, 쓰는 일은 열정 페이로 감당한다지만 책 출간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너무 어려웠다. 항시 ‘팔릴만한 글’이 되어 출판사가 수용하겠느냐는 경계가 나를 경직시켰다. 글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쥐어짜는 글이 되었다. 모든 글은 내 속에서 나온 체화된 것이어야 하다는 말이 멀어지기 시작했고, 다시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한숨만 짓게 했다.
겸손과 과정 그 자체를 즐겼던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 공명하는 감동 자체만으로 충만하도록 노력하겠다. 작가 서미현은 ‘날마다 그냥 쓰면 된다.’라는 책에서 ‘글을 잘 써서 ‘무엇인가 되어도 좋지만, 꾸준히 써서 ‘더 나은 나’가 되어도 좋다.’라고 서술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보수나 대가가 없더라도 열정 하나로 글을 쓰고 책으로 묶겠다.
꾸준함에 대한 매일의 다짐을 열정의 불쏘시개로 지피며, 오늘도 ‘열정 페이’로 글을 쓴다. 그러할 수 있는 이 시간과 상황을 사랑한다. 나에게 푸른 냄새가 여전히 풍기도록.
최고의 양생(養生)법
시카고 대학 교수인 심리학자 뉴가튼 교수는 “오늘의 노인은 어제의 노인보다 훨씬 건강하며 노련하고 젊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라며, 노인을 세 그룹으로 분류했다. 첫째로 55세 이상 75세 미만의 젊은 고령자를 뜻하는 YO(Young Old) 세대, 둘째로 75세부터 85세 미만까지를 뜻하는 OO(Old Old) 세대, 셋째로 85세 이상의 초고령자 Oldest 세대다.
현재는 YO든, OO든, Oldest든 모두 대중문화 소비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YO 세대는 고학력,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 재산과 분별력을 가진 AS( Active Senior)로 신중년이라 불릴 만큼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그는 현 나이에 0.7을 곱하면 대충 한 세대 전의 나이 감각과 비슷하다는 기분 좋은 이론을 발표했다. 지금의 60세는 한 세대 전의 42세, 70세는 한 세대 전의 49세, 75세는 느끼는 나이가 53세 정도라고……
뉴가튼 교수의 이론으로 내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정확히 45세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힘이 솟았다. 그런데 순간 가슴 한구석이 매쳤다. 아무리 한 세대 이전보다 건강하고 훨씬 젊다 하더라도 나이 들어가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현직에 있을 때 그렇게 열정적이고 당찼던 신부님이 은퇴하신 후 불과 몇 년 만에 뵈면 한숨이 푹 나올 정도다. 그 낭랑한 목소리는 다 어디로 가고 응석 부리는 꼬마 아이로 변해있는지, 세월이 무섭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지난날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도 몇 년 후 나를 만나면 똑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겠는가. 결국, 개인차는 있겠지만 모두 늙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도 생명이 붙어있는 한 활기차고 멋지게 늙어 갈 수는 없을까.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정복한 사람은 몽골의 칭기즈칸(1155-1227)이다.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즈칸은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행복한 삶을 살다 갔을까.
칭기즈칸은 죽기 몇 해 전 산속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전진교(全眞敎)의 도사 장춘진이 그를 찾아왔다. 이전에도 칭기즈칸은 이 도사에게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고 들어 몇 번 뵙기를 청했었다. 두 사람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도사님, 도대체 어떤 불로장생(不老長生)의 묘약이 있습니까?” “양생(養生)의 방법은 있지만, 불로장생의 묘약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양생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바르게 먹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 양생법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읽고 ‘불로장생(不老長生)’과 ‘양생(養生)’에 대해 그리고 뉴가튼 교수의 말처럼 젊어진 세상에 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숙고하게 한다.
불로장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 누구도 자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양생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제각각 자기가 최고라고 앞다투어 비법을 세상에 공개한다.
원래 양생이란 무엇인가. 건축에서 콘크리트가 굳을 때까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해 주고 충격을 받거나 얼지 않도록 보호하거나 관리하는 일을 말한다. 사람에게 양생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병이 낫게 조리하는 일도 포함된다.
마음을 바르게 먹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 최고의 양생법이라는 장춘진의 말이 가슴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욕심을 조금만 내리면, 더 건강하고 행복해질 텐데…….
엄청나게 늘어난 삶의 길이에 최고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욕심을 줄이라는 말이 가슴에 뜨끔하며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퇴직 후, 매일 5시간 (오전 3시간 오후 2시간 또는 오전 2시간 오후 3시간) 쓴다거나, 매년 한 권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집필 원칙을 조정해 보겠다. 모두 부질없는 욕심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일주일에 혹은 한 달에 단 수필 한 편 쓴다고 하더라도 편안하고 행복함을 우선으로 삼겠다. 그것이 최고로 잘 사는 양생(養生)법이 아니겠는가.
탱자꽃 같은 삶
진달래나 개나리, 벚꽃이 한바탕 지나간 자리에 하얀 탱자꽃이 피어오른다.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지난가을 직장 동료가 노랗게 익은 탱자 두 개를 주었다. 독특하고 은은한 향기에 취한 적이 있어 그런지 아침 산책길에 눈에 밟혔다.
문득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어릴 적 탱자나무집 아들과 친했다. 친구 집 담장은 온통 탱자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초여름 하얀 탱자꽃이 필 때 옆을 지나면 꽃향기가 은은했다. 가끔 친구 과수원에 놀러 가 가시에 찔려가며 노란 탱자를 따서 갖고 놀거나 간간이 맛본 기억이 있다. 잘 익은 노란 탱자는 시지만 약간 달짝지근한 맛이 상큼하다.
명절이나 상갓집에서 윷놀이할 때 쓰는 윷은 대개 단단한 탱자나무 가지로 만들었다. 갯고둥을 잡아다가 삶은 후 깔 때 탱자나무 가시를 사용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탱자 향기는 좋지만 먹을 수가 없어서 게으름을 피울 때 ‘탱자 탱자 논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배우 윤여정이 탱자꽃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한바탕 화려함이 지나간 자리에 은은히 피어오르는 하얀 모양새가 꼭 그의 모습과 삶을 연상케 한다.
그는 여느 영화 시사회에서 밝혔다. “60살이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작품을) 하겠다, 돈 상관없이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평범한 주인집 할머니 등 조연으로 주가 높은 배우가 선뜻 선택할 만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게다가 무료로 출연도 했다. 배우의 사회적 성취라고 할 만한 지표들,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대작이라거나 스타 감독, 높은 개런티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것이다.
하얀 탱자꽃윤여정은 흥행이 쉽지 않은 이른바 작은 작품들에 많이 출연했다. 이번에 신진 무명 감독의 저예산 영화인 <미나리>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사회적 성취를 이룬 결과는 아이러니하면서도 극적이다. 세속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 같은 것까지 비운 결과가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1970년대 초 일본에서 출간돼 스테디셀러가 된 <계로록>(戒老錄)의 저자 소노 아야코는 잘 나이 드는 비결의 주제어를 몇 가지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단념’이다. 최근 나온 에세이 <무인도에 살 수도 없고>에서도 그는 단념을 “인생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지혜로운 어른만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적었다.
우리 인생에서의 기쁨은 특별한 일이나 사건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 있다. 지우고 버리고 잊음은 참으로 중요하다. 나이가 들어가며 좋은 게 있다. 험한 말로 뻔뻔스러움이요, 포장하면 어떤 성과도 잘못도 시간이 가면 다 별것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네 발 밑을 파라. 그곳에 맑은 샘물이 흐르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얀 탱자꽃 같은 삶이다.
스틸 앨리스
세 아이의 엄마, 사랑스러운 아내, 존경받는 교수로서 행복한 삶을 살던 한 여성이 어느 날 희귀성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행복했던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당당히 삶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다짐한다. “지금이 내가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거야.” “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저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젊은 나이에 치매에 걸린 사람의 삶을 그린 소설 ‘스틸 앨리스(Still Alice)’의 이야기다. 작품은 앨리스가 병에 걸리게 된 시점부터 시작하여 병이 진행되는 과정을 펼치고 있다. 과거, 가족, 심지어 자신의 존재 등 기억과 삶이 사라져 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가치’와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앨리스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심리 언어학자였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의사소통에 뛰어났던 그녀가 어느 날부터인가 강연 중 익숙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25년간 살던 동네에서 길을 잃는다. 자신의 자랑거리였던 기억력, 언어, 지각 능력을 잃어 가고,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과 그런 자신을 당황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수치심을 느낀다. 마치 투명 인간인 양 자신 앞에 두고도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앨리스는 사회에 더는 속해있지 않다는 외로움을 겪는다. 치매 환자의 삶을 통해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존재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살아간다고 하지 죽어간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인물을 통해 우리의 삶을 재고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소홀히 여겨왔던 삶의 많은 부분을 상기시키고, 진짜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책을 읽고 2년 전 돌아가신 선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생 건강하고 의욕적으로 활동한 분이 8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정신이 깜빡깜빡한다고 호소했다. 하신다. 또, 들리지도 않는 옆집의 보일러 소리가 시끄럽다고 한 밤중에 옆집 주인을 만나 항의하겠다며 양말을 찾곤 했다.
치매의 초기 증상같아 선친을 모시고 병원을 찾았다. 복잡한 절차를 마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 심리 테스트와 비슷한 검사를 마쳐야 했다. 먼저 선친과 심리 상담사의 질의응답을 마치면 보호자인 내가 질문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상담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온 아버지가 내 옆자리로 앉더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긴다.”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질문인데요?” 아버지는 혀를 차며 “수준 낮은 희한한 질문만 한다.” 아버지는 계속 자신을 치매 환자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웃음이 새나왔다.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언행은 어딘가 모르게 전과 같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치매환자의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나마 처방 약이 병의 진행을 더디게 해 몇 년을 가족과 함께 버티게 했다.
TED 강연에서 노인학자인 앤 배 스팅(Basting) 박사는 치매가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일을 묻는 대신 창의적이고 정답이 없는 열린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예컨대 호숫가를 걷기 좋아했던 치매 환자에게 “그때를 기억하나요?”라고 질문하는 대신 “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줄래요?”라고 질문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가족들은 언어를 잃어버린 치매 환자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책을 읽은 뒤에도 “(나는) 여전히 앨리스(Still Alice)”라는 제목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맴돌았다. 더불어 마지막 몇 년 치매를 앓던 선친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치매에 걸렸어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사회, 그렇게 되도록 지원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 우린 무엇을 어떻게 실행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치매는 더는 먼 이웃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스므륵한 어느 날 우리가 모두 맞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어두운 손님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치매 유병률(有病率)은 약 10%로 80만 명 정도가 치매를 앓고 있다고 한다. 치매는 나이가 들수록 발병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인구 고령화가 심화하는 20년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치매로 고통받는 사람이 약 200만 명으로 전망된다. 치매로 인한 고통은 치매 환자 본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장기간에 걸쳐 인지 기능과 일상생활 수행 능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의료비 등 부양 부담이 굉장히 높아진다.
이러한 치매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우선 환자 본인과 가족이 논의 주체에 포함되어야 한다. 또, 치매 환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역사와 가치는 무시되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 아닌 가족과 사회에 부담이 되는 존재로 전락할 때 상실감과 두려움에 대처할 역량을 키우지 못한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가족의 일원임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꽃이 색색으로 피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나 당신의 인생은 시간을 쌓아 켜켜이 터를 다듬어 주변을 튼튼히 만드셨으니 당신의 희생과 헌신이 그 어느 것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께 전하고 싶어졌다.
영화 명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울리도록 인상 깊다. 종종 읊기도 하여 외울 정도로 익숙하다. 영화 명대사다. 우리는 왜 명대사에 열광하고 떠올릴까. 입말이라 짧고 쉬워서일까. 피와 살이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의 육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일까.
영화 ‘머니볼’, 통계에 기반한 구단 운영으로 미국 프로야구계에 혁신을 일으킨 주인공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직 제안을 거절한다. 구단을 운영하는 내내 강조했던 ‘합리적인 선택’을 왜 정작 자신은 내리지 않는가. 엄청난 연봉을 받을 수 있는데.
빌리는 세상에는 돈 말고도 추구해야 할 뭔가가 있다고 믿었다. 그 뭔가가 뭔지는 모르지만. ‘더 쇼’라는 곡이 흐른다. 인생은 미로, 사랑은 수수께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혼자서는 할 수 없네…. 노래의 결론은? “그냥 쇼를 즐겨요.” 뭐라 해석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의 주인공.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 답을 알 수 없다. 다만 노래가 답한다. 그냥 인생이라는 쇼를 즐겨요.
영화 ‘대부’ 시리즈에는 명대사가 잔뜩 나온다. 관객이 최고로 꼽는 대사는 ‘대부3’에서 대부 마이클이 조카 빈센트에게 후계자 교육할 때 나온다. 조카가 잔뜩 화가 나 경쟁자에게 복수할 방법을 떠들어대자 마이클은 “안 돼!” 하며 이유를 설명해준다. “절대로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져.” 누군가를 미워하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헷갈려, 자기 일이 낭패를 겪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1997년 영화 ‘재키 브라운’의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 두 중년 남녀는 악당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이제 이별을 앞둔 상태다. 서로 호감은 있지만, 미래를 함께하려니 피차 부담스럽다. 여주인공은 사기극에 끌어들인 일을 놓고 자신을 오해할까 봐 남주인공에게 말한다. “난 당신을 이용한 적 없고, 당신한테 거짓말한 적도 없어요. 우리는 파트너였어요.” 그러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하는 남성. “난 56살이에요. 내가 한 일을 두고 남 탓할 순 없어요.”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니, 들어본 지 오래된 말이다. 관객은 반한다. 자신도 남을 탓하지 않는 희망을 품고 싶다며, 늦기 전에 저렇게 의연한 사람이 되며 성숙해지고 싶다고.
영화 ‘레이더스’다. 인디아나 존스 박사(해리슨 포드)는 나치와 싸우며 성궤를 찾는다. 모세가 십계명 판을 담았다는 물건이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구한 유물을 미국 정부가 비밀 창고에 집어넣더니 존스 박사더러 손을 떼라 한다. 존스 박사는 정부 요원들과 회의를 마치고 분통을 터뜨린다. “멍청한 관료들! 자기들이 뭘 가진 건지 몰라.” 그런 그에게 연인 마리온(캐런 앨런)이 건네는 말. “당신은 왜 뺏긴 것만 생각하나…. 난 내가 가진 것을 알지.” 그리고 술 한잔하러 가자고 한다.
몸 건강하네! 기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시간도 한참 남아 있네! 좋은 술 한 잔 사 마실 여유도 있네! 내가 성궤처럼 유일무이한 물건을 놓친 것도 아니잖아? 소중한 내 마음을 울화로 채우지 말자고 다짐한다.
인간은 참 이상하다.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른다. 여태 갖지 못한 것, 놓친 것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한다. 중요한 걸 빼앗겼다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느낄 때, 이 대사를 읊으며 내가 여전히 지닌 것을 살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기도는’이란 짧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기도는 없는 것을 불평하는 게 아니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아들에게 말한다. “너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No plan. 왜냐, 계획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또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다 상관이 없는 거야.” 요즈음 코로나 19로 힘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빵 터뜨리고 슬쩍 꼬집는 영화 명대사에 사람들은 더 아우성친다.
글쓰기를 생각하며
퇴직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직장 다닐 때는 집이 휴식의 공간이었다. 이제 갈 데 없어 집에 머무니 갇힌 기분이다. 집에만 있으니 할 일 없어 우울증 걸릴 것 같다고 푸념하던 선배들의 말이 떠오른다.
어느 전직 교수가 운명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퇴직했을 때 이 나이에 뭘 하겠느냐고 미리 포기하지 마라. 퇴직하고 바로 뭐든 시작하면 현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배우느라 재미있고 한 10년 하다 보면 전문가 되어 사회적 지위도 얻는다. 전직(前職)은 아무 소용없다. 현직으로 즐길 직업을 만들어라.”라고 하셨다.
난 주변에서 “넌 글 쓰니 지루하지 않겠다.”라는 부러움의 눈총을 받는다. 그때마다 “날마다 글만 쓰냐?”라고 대꾸한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를 생각하면 가벼운 미소가 입가에 감돈다. 퇴직하기 전부터 ‘돈 안 생기는 또 하나의 연금’으로 생각해 왔다. 글쓰기에 한 오 년 매진하다 보니 반풍수는 되는지 팔자에 없는 작가 소리도 듣는다. 작가 또는 수필가라는 이름으로 평생 현직이라고 우쭐거리며 즐기면서 열심히 쓰겠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어렵고 힘들다.
오늘도 글을 쓴다. 이런 얘기를 써도 될까, 어느 정도 깊이 쓸까, 고민한다. 사소한 것이 뭔가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될까, 하는 생각. 많은 감정이 얽혀 있는 이야기라 평가에 대해 두렵다는 생각. 온종일 쓰고 지우기를 되풀이한다. 이것들은 글쓰기를 방해한다.
다른 글쓰기의 방해물은 ‘내 안의 부끄러움’이다. 특히 에세이를 쓸 때 그렇다. 에세이의 매력은 진솔한 나 자신과 만남에서 시작한다.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솔직한 작가의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진솔한 고백이다. 그래서 에세이의 감동은 바로 온갖 가면을 벗고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에세이의 특징은 바로 작가를 직접 눈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끼게 해야 한다. 사소한 이야기조차 사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글쓰기의 힘이다.
이런 글쓰기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나름 ‘집필 원칙’과 ‘글쓰기의 의식’을 만든다.
첫 번째 집필 원칙으로는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이해하기 쉽게 쓴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선 나 자신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살아야 한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들을 자주 보고, 많이 경험하도록 하겠다.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쓰기 위해서도 나의 삶이 단순하고 어렵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자긍(自矜)을 지키고 스스로 치유를 위해 쓴다. 두 번째 원칙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삶에서 자긍이 있고 치유할 수 있는 태도와 실천이 있을 때 그런 글을 쓸 수 있다.
셋째는 매일 5시간 이상 쓰고 매년 한 권의 결과물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한다. 이 원칙은 은근과 지치지 않는 끈기를 무한히 필요로 할 따름이다.
다음은 글쓰기 의식(ritual)이다. 글을 쓰는 일이 하루하루의 삶의 흔적이다. 어쩌면 운명처럼 여겨지기까지도 한다. 글을 쓰지 않거나 독서 등 글을 쓰기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한다면 자아를 잃은 것 같아 불안하다. 일관되게 나를 잡아 주고 글쓰기 동력이 될 수 있는 나만의 의식(ritual)이나 습관을 만들고 싶다.
일본의 소설가 아사다 지로(70)는 글쓰기 습관(의식)에 관해 이렇게 썼다. ‘매일 다다미방에서 기모노를 갖춰 입고 글을 씁니다. 다다미방에는 360도로 빙 둘러서 자료를 둘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런데 다다미방에 앉아서 글을 쓰려면 바지를 입고서는 오래 앉아 있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앉아서 글쓰기에 굉장히 편한 기모노를 입죠. 특별히 무게 잡으려는 게 아니고, 글을 쓰는 유니폼일 뿐입니다. 축구 선수나 야구 선수가 유니폼 입듯이.’
나의 글쓰기의 의식은 매일 성당 회의실에 설치된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쓰고, 시작하기 전에 성당에서 10분 이상 묵상하며 스스로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물음이 될 것이다. “언제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이냐?” “왜 너는 글을 쓰고 글을 통한 목표는 무엇이냐?” “60년대 중반인데 5년 후 삶의 목표는 무엇이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렇다.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어떻게 글로 잘 증언할 것이냐?”
술과 커피
어린 시절 술과 커피를 맛보았다. 혀에 대자마자 쓰기만 했다. 왜 어른들은 쓴 것을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게 인생의 맛이다. 먹다 보면 달다.” 그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집에 아이들이 술과 커피를 혀로 맛보며 이맛살을 찌푸릴 때, 선친의 말씀을 알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서 ‘먹다 보면 달다.’라는 말이 새록새록 머리에 남는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는 주인공 장발장이 무려 19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다. 고작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친 것은 절도죄와 기물 파손 죄. 사냥하러 다녀오던 길이라서 총을 소지하고 있어, 단순 절도가 아니라 강도죄. 첫 재판에서 5년 형이었는데, 4번이나 탈옥을 시도해 가중(加重)죄. 법적인 논리로만 따져보면 그가 받은 처벌은 법을 근거한 이성적 판단이었다.
하지만 장발장은 가련했다. 고아인 그를 키워 준 누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농장에서 일을 했다. 겨울이 되어 일감이 없어지자 사냥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허탕이었다. 집에 돌아가다 진열장에 놓인 빵을 보고 굶주린 조카들의 얼굴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빵을 훔쳤다. 또, 작품에서 장발장을 올바른 길로 이끈 것은 수감 생활이 아니라, 은 식기를 훔친 그를 너그럽게 감싸준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었다. 한없이 마음의 심연에 흐르는 감성적 판단이었다.
절박한 상황에 부딪친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고민하게 한다. 흔히 이성(理性)은 삶의 핵심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성이 언제나 반드시 좋은 것일까. 감성도 우리의 삶에 중요하다. ‘이성’과 ‘감성’을 대립하는 개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흠이 없는 완벽한 이성이란 존재할 수 없고,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배제함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요일 성당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함께 식당에 간다. 밥을 먹으면서 과음은 아닐지라도 술을 곁들인다. 식사가 끝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누군가가 카페에 가기를 제안한다. 낮술에 정신이 흐트러져서 머리칼을 빗질하는 것처럼 커피로 이성을 가다듬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새로운 노멀일까. 술과 커피는 구분되면서도 연결된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커피의 세계’와 ‘술의 세계’로 구분해 보자. 커피의 세계는 이성이 지배하고, 술의 세계는 방출된 감정이 지배한다. 커피의 세계에서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정의와 진리와 질서를 추구한다. 술의 세계에서는 희로애락을 겪고, 사랑과 우정을 고백하고, 사죄와 용서로 상처를 달랜다. 술은 감정을 흐르게 하고, 커피는 잠 못 잘 정도로 우릴 각성한다. ‘감성과 술’ 그리고 ‘이성과 커피’라고 연관 지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요즘 우리 사회에 술집이 줄어들고 카페만 대폭 늘어나고 있다. 갈수록 술의 세계가 쪼그라들고 커피의 세계가 비대해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성이란 괴물이 사람의 여린 감정을 무수하게 짓밟고 있으면서도 당연한 것처럼 세상을 유린하는 지도 모르겠다.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했다는 것 너무 자랑하지 않았으면 한다.
곳곳에 고소, 진정, 악다구니, 음해, 악플, PC 논쟁이 난무하다. 관용, 이해, 소통, 공감을 말하면 위선이라 백안시당한다. 그 이성적이다고 하는 것이 살벌하고 각박하다. 술과 거피를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몰아내야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보완해 줄 때 더 건강한 구성원을 가진 아름다운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오늘 누구와 술 한 잔 커피 한잔 나눌까 고민해 본다.
발사 조준
한 해를 돌아보는 시기가 되니 여러 생각이 감돈다. 그중에서도 해보지도 못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가장 가슴 한구석에 오래 머무른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내일로 미루면서 산다. 바쁜 오늘 때문에 당장은 급해 보이지 않는 일 같아 내일로 미룬다.
하지만 내일로 미루면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영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젊은 시절 짝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오래 간직되는 이유도 그렇다. 시도해 보지도 못한 아쉬움과 후회 때문에 평생 가슴에 간직하며 산다.
최근 수제 떡볶이를 판매하는 아저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기자가 인터뷰 전 아저씨가 운영하는 사이트나 포스팅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의 게시물 수가 수천 개에 육박했다. 수제 떡볶이 사업을 하면서 꾸준하게 SNS를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궁금했다고 한다.
기자가 아저씨를 만나자마자 꾸준하게 포스팅을 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SNS를 소통 창구로 매일 올리시던데 힘들진 않으세요?” 그의 답이 걸작이었다. “블로그 강의를 들었는데 수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었어요. ‘여러분, 1일 1포 스팅 힘드시죠? 힘드셔도 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가늠하는 것이 아니고, 시도해야 하니까요.’ 해보지도 않고 가늠만 하고 있다간 아무것도 안 된다는 말에 머리를 탁 맞았어요. 그래서 조금만 틈이라도 있으면 포스팅을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문학회 모임에서 한 동인이 질문했다. “2020년의 가장 승자가 누구인지 알아요?” 모두 선뜩 답하지 못했다. 질문을 던진 그는 두리번거리더니 승리한 듯 빙긋이 웃으며 답을 알려 주었다. “2019년에 무리해서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이어요.” 모두 수긍하는 표정이자 더 흥이 났는지 한마디 더 보탠다. “저질러야 남는 것이 있어요!”
집에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는데 수제 떡볶이 아저씨의 인터뷰와 모임에서 친구의 말이 귓가에 떨어지지 않았다. ‘저질러야…….’ 나 자신의 경우도 작년에 몇 번 해외여행의 기회가 있었다. 매번 시간이 돈이 하면서 미루고 미루었다. 결국 미루고 고대했던 올해가 되니 모든 것이 막혀 버렸다. 조준만 하다가 새가 다 날아가 버린 셈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조준 발사’가 아니라 ‘발사 조준’이 되어야 한다. 저지르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간이 되면 다 수습되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 아닌가.
성당 자매님 이야기도 생각이 난다. 2017년에 처음 해외여행을 갔는데 하필 간 곳이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근처 모로코였다. 당시는 비행기 표도 3개월 할부로 갈 수 있었다는 호시절 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때 저지른 것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고.
평생 영어 선생으로 살면서도 항상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한 한마디다. “영어를 말하기 위해선 입을 크게 벌리고 영어를 큰소리로 자꾸 말해야 합니다.” 조금 어색해도 직접 말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소극적으로 주저주저한다.
그럴 때마다 학생들에게 역설했다. “여러분, 말하세요. 외국인이 된 것처럼 발음을 굴리세요. 자꾸 자기가 외국인인 것처럼 발음을 굴리고 큰 목소리로 영어를 따라 하세요. 처음에는 건방 떨고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는데 금방 영어 발음도 달라지고 영어도 정말 잘하게 됩니다. 영어를 말할 때 문법 등 요모조모를 따지지 말고 그냥 뱉으세요. 이미 난 외국인이고 영어 발음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발음을 마구 굴리세요.”
직장에서 가끔 어느 기관에서 홍보를 나온다. 청자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상품으로 유혹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때 무언가를 얻어 가는 사람은 ‘손을 번쩍 드는 사람’이었다. 손을 번쩍 드는 사람에게 기회가 먼저 주어졌다. 맨날 손부터 먼저 드는 동료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는 정답을 알아?” 동료는 말했다. ‘아니, 그냥 일단 들어 보는 거지.’ 준비된 사람들이 손을 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생각할 땐 손을 드는 사람들 대부분은 일단 저지를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저지르고 수습하라.’는 말이 있듯이 어설프고 부족해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하면서 고쳐나가면 되니까. 특히 요즘같이 빠르게 변화하고 명확한 정답이 없는 시대에는 어차피 완벽한 결과나 정답을 알 수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정답 따윈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의 정답은 ‘하는 사람’만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특권 아닐까 한다.
인생
퇴직하고 첫 주말을 맞이하였다. 직장에 다닐 때보다 백수가 더 바쁘다고 하더니 일정이 빡빡하다. 토요일은 서울에서 지인 자녀의 결혼이 있어 전세 버스를 타고 다녀와야 하고 일요일 일정도 만만치 않다.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기도와 명상을 그리고 서울 갈 채비를 마치고 시간을 보니 아직 여유가 있어 책장에 꽃인 책을 한 권 꺼내어 읽었다.
책은 그리운 작가 최인호 베드로 님의 ‘가족’ 이었다. 듬성듬성 몇 편을 훑어보다가 ‘잘가라, 게리쿠퍼’라는 수필을 제목이 재미있어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주책없이 퍽퍽 울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글을 알리고 싶어 얘기를 짧게 줄여 보았다.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사는 것이 이골이 나서 웬만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성품에도 불구하고 난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두 폭으로 갈라졌다’라는 성경의 구절처럼 내 영혼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폭으로 찢어지며,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따금 녀석을 위한 기도를 올리면서도 내가 드리는 기도가 하느님께 과연 전해져서 녀석의 병이 씻은 뜻이 쾌차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친구로서 그를 위한 제일 나은 방법은 몇 마디 따뜻한 말보다 하느님이 주는 평화를 깨닫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머리가 좋고 아는 것이 많은 지식인은 하느님을 인간들이 만들어낸 편의점이나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편지를 썼다. 가톨릭 사상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화를 적었다. 어느 날 정원에서 절망에 빠져 울고 있을 때 어디선가 ‘책을 들고 읽어라’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 노랫소리를 계시처럼 느낀 성자는 탁자의 성경책을 들고 읽었는데 한눈에 들어온 성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워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나는 진정 녀석이 ‘빛의 갑옷’을 입기를 원했다. 잔 다르크보다 더 용맹한 그리스도의 십자군이 되길 원했다.
나중에 녀석의 누이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지만 녀석은 편지를 수십 번 읽고 읽을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가를 듣고 성경 구절을 낭독해달라는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고 한다.
두 번째 편지를 보낼 때쯤에 녀석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내 편지하나 만을 믿고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준 녀석이 얼마나 고마운지, 어디서부터 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길에서 잠시나마 길동무가 되었던 친구의 선물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주고, 녀석의 마음을 열어 빛의 갑옷을 입혀주신 하느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를 깨닫고 그것이 고마워서, 나도 퍽퍽 울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 날 녀석 누이의 연락을 받았을 때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 왔지만 나는 슬픔보다는 녀석이 마침내 그리스도 품 안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졌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자들 좌우명처럼 오늘은 네가 먼저 내 곁을 떠났지만, 내일은 내 차례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네가 먼저 천상에서 나를 위해 기도를 해다 오. “오늘은 그대, 내일은 내 차례.”
최인호 작가는 ‘내일은 내 차례’를 원고지에 적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암에 죽어 갈 자신의 운명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작가 다음의 내일은 또 누구 차례가 될 것인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버스 차창 넘어 기지개를 펼치는 바깥 봄의 풍경은 인생이라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했다. 불과 몇 페이지에 불과한 한편의 글이 이렇게 큰 파문이 되어 내 마음을 빼앗아갈지 미처 몰랐다.
결혼식에 참석하고 순천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미 밤의 어둠은 손님처럼 찾아와 깊어졌다. 한참을 가다 작년에 어느 모임에서 만난 서정란 시인으로부터 자작시 한편을 카톡으로 받아 몇 번 읽었다. 제목은 ‘인생’이었다.
‘인생은 계획하다가/ 어어 하다가 반성하다가 후회하다가/ 후딱 간다
너무 심각할 필요도/ 너무 엄숙할 필요도/ 너무 나를 얽맬 필요도 없이
그냥 강물처럼 흘러가며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이 아닐까?’
결혼식을 축하하는 소임이 부여된 하루의 시작과 끝이 ‘인생’이라는 화두와 더불어 왕복 10시간에 이르는 버스 길이 지루하지 않고 숙연해졌다. 나의 문학이 추구하는 정점도 결국은 인생과 결부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산다는 것에 대해, 행복과 성공에 대해, 인생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져 본다. 그중에서도 인생이란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며 성공과 실패가 공존하는 과도기를 보내는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작은 행복이 끝나면 큰 고통이 찾아들기도 하고, 성공했다고 기뻐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다른 시련이 찾아든다.
또 행복은 무엇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나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나는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성공은 어떠냐. 주어진 인생의 100리 길을 다 달려간 사람이 성공한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성공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대신 최선을 다해 달려간 사람은 실패도 성공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인생을 잘 산 사람인가. 인생 전체를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사람이다. 자신을 위해 산 사람은 30%의 성공을 차지할지 모른다. 그러나 함께 최선을 다해 공동체의 기쁨을 나눈 사람은 60%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성공을 베푼 사람은 90% 이상의 성공을 찾아 누린다.
어쩌든 새로운 인생길에 출발한 한 쌍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커플 하느님의 축복으로 좋은 가정 이루었으니 아름다움을 흠뻑 만끽하며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하는 행복한 인생길 걷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너의 인생은 행복하고 성공으로 가고 있냐고?”
지친 나에게 위로를
재미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나 자신을 하나의 사물로 빗대어 표현한다면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이모저모 생각하다가, 한 여성의 푸념이 떠올랐다. “왜, 누구 집을 가던 베란다 구석에 하나씩 있지. 꽃도 열매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화분. 그게 꼭 나 같아.”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 일과 살림에 치여 발을 동동거리며 살아간다. 손바닥만 한 화분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기분이다. 자신의 지친 영혼이 꽃도 열매도 맺지 못하고 흐느적거린다고 슬퍼했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 귤나무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이지만, 이혼한 아내에게 양육비도 주지 못하는 신세다. 푼돈 벌며 무력하게 살던 어느 날, 어머니 집을 를 방문한다. 그리고 노후한 집의 마당에서 귤나무를 발견한다. “고등학교 때 내가 심은 거잖아. 많이 자랐네.” 엄마는 “꽃도 열매도 안 생기지만 너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물주고 있어. 그래도 애벌레가 이 잎을 먹고 자랐단다. 기특하게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지친 아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최근에 친한 친구가 자신이 직접 쓴 책 한 권을 보내왔다. 제목이 찡 했다. ‘갈 곳 없는 시간 100권의 책’ 남부럽지 않는 세상 것을 다 갖춘 친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직 후 소원대로 놀기만 하는데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굴 보러 가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방내 100권의 책으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이토 다카시(일본의 언어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혼자가 되는 시간의 즐거움, 고통을 극복하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
내 자신도 역시 하나의 사물에 빗대어 보니 일에 치인 여성이 말라비틀어진 무엇이듯, 생계를 위협받은 소설가가 귤나무이듯, 나도 그 범주에 벗어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앞으로 친구처럼 갈 곳 없어 글을 읽고 쓰며 마지막을 맞이해야 하는지 생각이 무성해졌다.
지난 시절 직장과 가정에서 동동거리다가 나이만 먹었다. 20대 초반에 들어간 직장도 거의 물러날 시점이 되었다. 참 오랫동안 질기게 버터 냈다고 하지만, 누군가가 정년퇴임이라는 축하를 보낸다면 극구 사양하겠다. 내가 지켜낸 자리에서 용케 죽지 않고 견뎌낸 것 외에는 별 성과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런…….
한 번은 옆 동료에게 “요즈음 저가 ‘기둥’ 같아요.”라고 말했다. 상대는 눈을 동굴이며 무슨 말인가 의아했다. 나는 설명했다. “직장에서 나이 들었다고 저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목석(木石)으로 여겨요.” 그는 즉시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간 얼마나 고생하셨는지요. 편하게 있다가 가시라고 조심해서 그래요.” 하며 위로해 주셨다. 감사한 위로는 감사할 뿐 뒤틀린 마음은 여전히 언짢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저녁 늦은 시간에 우연히 화보에서 인상 깊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시니어 여성들이 앞 다투어 멋진 포즈를 뽐내는 사진이었다. 전업주부이거나 경력이 단절된 시니어 160여 명이 모델로 참여한 패션쇼였다. 돈을 받고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닌데 나이에 맞지 않게 왜 모델에 도전했을까.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모시며 살아왔다는 한 60대 참가자가 “이제는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기 싫어요. 나를 위해 살아보고 싶어서 용기를 냈습니다.”라고 말할 때, 순간 곁에 있던 모두들 눈시울을 붉히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모두들 활짝 웃으며 오늘은 살아있는 듯, 황홀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를 충분히 어림잡을 수 있었다. 사람에게 자존·자긍의 소중함을.
다시 나로 돌아와 돌이켜 보았다. 코로나19로 ‘일상의 소중함’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가 허투루 살았더라도 잘 버텨낸 지난 나의 일상이라면 전혀 보잘것없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존·자긍이 가슴 한구석에 솟아올랐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고 ‘세상은 넓다.’라는 말에 안중도 없이 살아 온 나에게 고생 참 많았다고 지친 나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밤 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기특하다’ ‘애썼다’ 보듬어 주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나 자신이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가 내 화신의 애벌레를 꼬물꼬물 자라게 하여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꿈을 꾸게 할 것 같다. 힘내자, 또 한 달이 한 해가 간다.
하느님의 대본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신지도 벌써 삼 년이 흘렀다. 기일 날 제사상 위에 놓인 아버지의 사진을 우둑하게 한참 바라본다. 그리움은 이러저러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버지를 마주하고 살아 계실 때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편지를 마음에 써 본다.
아버지를 이 지상에서 다시 만나 뵐 수 없다는 것이 도저히 수긍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오실 것 같습니다. 방문하면 집 문간방에 앉아서 나를 반가이 맞아주실 것만 같습니다. 점심 사겠다, 용돈 주신다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뇌리에 쟁쟁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우리 사람이란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사는 동안에는 서로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아니하고 그리 바쁜 일도 없으면서 사랑도, 슬픔도, 기쁨도, 마음도 듬성듬성 나누는데,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면 이렇게 애가 타고 아쉬운지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음은 눈먼 장님의 세계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살아 있을 때의 기쁨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푸념해 봅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연극 무대입니다. 하느님은 그 연극 무대의 각본을 쓰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창조력을 갖고 있어 모래알처럼 많은 이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 각각 그 인생에 합당한 희곡을 써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인생 무대에 태어나는 한 그 누구나 하느님의 배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흙으로 하나의 인간을 만들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영혼을 불어넣는 순간부터……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의 세계는 하느님의 대본을 따라 연기하며 살아가는 무대입니다. 막이 열리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은 시작되는 것이며 막이 내리면 우리의 연기도 끝이 납니다. 하느님의 대본은 단 하나의 대사도 중복되는 일이 없는 독창적입니다. 단 나오는 주인공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무대에 하나의 새로운 배우가 태어나려면 그를 배게 하는 아버지와 그를 낳은 어머니는 불변의 고정 배역입니다.
수많은 배우가 하느님이 쓰시는 대본에 항상 나타나는 불변의 배역을 맡으면서 죽어갔습니다. 당신도 이 역을 맡기 위하여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이 무대에 내려오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형제를 키우고 이 세상에서 그 지지리도 드센 고생과 싸우면서 하느님의 대본대로 충실히 연기하셨습니다. 막이 내리면 분장을 지우고 본래의 자신이 되어 돌아가는 무대 뒤의 배우처럼 아버지는 아버지 역할의 분장과 육신의 무대 의상을 벗으시고 훌쩍 어디로 가셨습니다.
지상의 배우로 존재하셨던 아버지의 의상은 천주교 묘지에 묻혔습니다. 하나의 연극이 끝나면 손뼉을 치고 뿔뿔이 제 갈 길로 가버리는 관객들처럼 모두 뿔뿔이 헤어져 갔습니다. 조명은 내리고 객석은 어둠뿐입니다. 아버지의 연극이 끝났으므로 이제 극장은 텅 비고 다시는 막이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는 아버지의 공연 일자를 기념하여 알리는 묘비명 하나가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묘비명에는 당신이 낳은 자식들의 이름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 자식들도 아버지처럼 부모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운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다. 또 가슴이 아프거나 절실한 슬픔도 밀려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유는 아버지와 이별하였다는 생각보다는 언젠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함은 하느님의 대본을 조금이라도 이해했기 때문이랄까요. 아버지 편히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