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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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침밥을 호텔에서 맛있게 먹었다. 아침을 먹으며 말순샘이 어제 뜨 히우 사(chua Tu Hieu 慈孝寺)에 가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나는 어제 절 연못 가 나무 아래의 백색의 대리석 석가모니불상을 촬영하지 못해 아쉽다고 토로했다. 틱낫한 스님은 8-9세에 불교 잡지 표지 사진으로 실린 풀밭 위 불상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고서 자신도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플럼빌리지의 나무 아래 풀밭의 현무암 불상들이나 뜨 히우 사의 백색 대리석 불상은 스님이 어릴 적 본 그 마음의 불상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말순샘은 틱낫한 스님과 제자들이 2013년에 세 번째로 우리나라에 오시어 월정사에서 4박 5일 명상 캠프를 열었을 때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22명의 일행 중에 틱낫한 스님의 지도를 받은 분이 계셔서 좋았다. 그 때 나는 직장에 연가를 낼 수가 없어서 가족과 함께 서울의 국제선센터에서 열린 하루 명상 프로그램에 참석하였다. 스님이 88세의 노구로 명상 시작만 이끌고 제자스님들이 걷기 명상부터 참여자를 연령별로 나누어 치유명상을 지도했다. 나는 찬콩(眞空) 비구니 스님과 제자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찬콩 스님의 자장가를 들으며 참여자들은 모두 바닥에 누워 잠들었다. 스님은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신 분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에 틱낫한 스님의 첫 제자로 출가하셨다.
<<화>>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뒤에 저자인 틱낫한 스님이 2003년에 두 번째로 우리나라에 오셨다. 억조창생이 깃들어사는 새만금 갯벌에 둑을 막고 간척사업을 벌이는 현장에서, 한 노인이 홧김에 지하철 기차에 기름을 부어 수십 명의 승객이 죽은 대구의 현장에서 생명과 원혼들을 위하여 걷기 명상을 하였다. 밤에는 경북대 대강당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지하철 화재 사고의 참변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하여 반야심경에 나오는 '불생불멸'을 팔정도의 정념(正念 Right Mindfulness, 마음챙김) 수행과 금강경의 '무상(無相)'으로 풀어내셨다. 성냥개비를 긋는 원인을 더하여 불을 일으키고, 구름과 물과 햇빛과 벌목공과 공장...... 우주 전체가 관여해 생긴 종이에 불을 붙이고, 재와 연기와 열기로 흩어질 뿐 종이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생과 사가 없음을 설파하였다. 스님과 제자들의 정념 명상과 무상하고 무아인 연기법 법문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법문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강당의 화단에 떨어진 백목련꽃 이파리를 주워서 들고 갔던 책, <<얼굴에는 미소 마음에는 평화>> 의 갈피에 담아왔다. 그 책은 류시화 시인이 스님의 법문을 선별해 번역한 책이었다. 스님은 설법 중에 허문명이 우리말로 옮긴 스님의 책, <<삶도 없이 죽음도 없이>>를 대중에게 들어보이기도 하며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읽어보기를 권했다.
법문을 동시 통역한 우리나라 스님의 모습도 먼 발치에서 보았지만
그 위의(威儀)와 온화한 얼굴과 명료한 통역에 감명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분은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하여 초기불교를 연구한 미산(米山) 스님이었다. 스님의 유학시절 지도교수는 세계풍속사를 쓴 곰브리치 교수의 아들로 세계빨리성전협회의 회장이었다.
그날 밤, 귀가해 인터넷 서점에서 스님의 영문판 책,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사랑의 마음 가꾸기(Cultivating the Mind of Love)>> 두 권의 책을 주문했다. 앞의 책은 <<틱낫한 불교>>라는 두 번째 우리말 번역이 나왔다. 뒤의 책은 영어 문장이 쉬워서 하룻밤에 다 읽었다. 한역(漢譯) 대승불교 경전들과 한 비구니 스님과 빠진 스님의 사랑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들려주는 서술 방식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스님이 이 책을 집필하며 참고한 문헌은 고려대장경을 바탕으로 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과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빨리어 니까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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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30분에 티엔 무 사와 황릉들을 거쳐 다낭으로 가기 때문에 캐리어를 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베트남의 가장 큰 명절인 설, 뗏(Tet)을 맞이하느라 여기도 출입문에 붉은 종이로 만든 꽃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로비에 걸린 그림들에는 추상적인 터치로 화폭을 분할하는 배경 위에 부모와 자녀의 얼굴이 겹치게 그린 ’가족‘이라는 제목의 그림, 어제 황궁의 오문이나 뜨 히우 사에서 본 종과 별자리와 부부의 얼굴, 해와 사과, 자궁과 음경이 상하좌우에 들어있는 그림이 보인다. 이 그림은 남녀의 사랑으로 우주의 정기를 받은 생명이 탄생함을 말하려는 듯하였다. 빈목 터널 전시관에서도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보았지만, 추상과 구상이 혼합된 특징을 지녔다. 구상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제시하여 그림의 의미와 미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추상으로 구상의 한계를 벗어나 의미와 미감을 무한하게 확장 시키는 기법으로, 현대 베트남 미술의 한 경향으로 짐작되었다. 문인화에서 화제와 그림이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비교되었다.
버스에 오르려는데, 호텔 옆에 있는 건물의 작은 화단에 녹색 잎 사이로 하얀 꽃이 피어나 있었다. 바람개비 모양으로 다섯 꽃잎이 피어나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순결하고 고귀하게 보였다. 코를 가져다 대니 치자꽃처럼 향기가 짙고 달콤하다. 즉각적으로 꽃 이름이 입에서 나왔다. ‘아, 말리화(茉莉花)다!’
내가 본 것은 비타자스민(Vitajasmine)이지만, 말리화는 중국 남부, 인도, 동남아가 원산지로 서양 이름은 자스민꽃이다. 몇 해 전, 런던에 사는 홍콩의 서예가가 아침마다 페이스북에다 올려주는 작품으로 청나라 시인 진학수(陳學洙,1638~1719)의 시, <말리(茉莉)>를 올려주었다.
玉骨冰肌耐暑天,
옥 같은 뼈대 얼음 같은 살결로 더위를 견디고,
移根遠自過江船。
멀리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와 뿌리 내렸네.
山塘日日花成市,
산속 연못가 날마다 꽃동네 이루니,
園客家家雪滿田。
은자의 집집마다 밭에는 눈이 가득하겠네.
新浴最宜纖手摘,
새로 씻은 모습 정말 좋아 고운 손으로 따서,
半天偏得美人憐。
반나절 오롯이 미인의 어여쁨 얻었네.
銀床夢醒香何處,
은빛 침대의 꿈을 깨니 향기는 어디에 있는가,
只在釵横髻嚲邊。
다만 비녀를 상투 가에 비스듬히 늘어지게 꽂았네.
시가 아름다워 말리화라는 꽃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순백의 꽃 사진과 함께 ‘말리화’라는 중국 장쑤성(江蘇省)의 민요가 있었다. 영국 왕실 음악청에서 중국의 가수와 지휘자, 피아니스트를 초청하여 왕실 합창단과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장엄한 음악회를 유투브로 시청하였다. 이 음악회의 서막을 중국 국민이 애창하는 ‘말리화’로 열었다. 마치 나도 그 음악당에 앉아 있는 것처럼, 2시간 동안 흥겹고 웅대한 음악의 향연에 흠뻑 젖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말리화를 보고 향기를 처음으로 맡으면서도, 직관적으로 꽃 이름이 말리화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지금도 그 합창이 귀에 쟁쟁하다. 비 내리는 이방의 아침에, 뜻밖에도 이슬 머금고 피어난 순백의 말리화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생각하면, 지금도 기쁨의 물결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好一朵美麗的茉莉花
한 송이 아름다운 말리화
好一朵美麗的茉莉花
한 송이 아름다운 말리화
芬芳美丽滿枝椏
아름다운 가지마다 향기가 가득하네
又香又白人人夸
향기롭고 새하얀 너를 모두가 칭찬하네
讓我來將你摘下
널 한 송이 꺾어다가
送給别人家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구나
茉莉花呀茉莉花
말리화 아 말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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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역사에서 16세기의 대립과 분열은 막(莫)씨를 몰아내고 레(黎) 왕조를 재건한 뒤에도 찐씨와 응우옌씨의 대립은 거의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레 왕조의 황제는 ‘부어(vua, 帝王)’로 불리며 다이 비엣(大越)의 유일한 지배자로 인정되었으나, 실권은 ‘쭈어(chúa, 主)’라고 불리는 북쪽의 쩐(鄭)씨와 남쪽의 응우옌(阮)씨에게 있었다.
1558년 응우옌 호앙(阮潢)은 훙강 델타 지역의 고향 타인 호아의 친족과 추종자, 군사 등 1,000여 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오늘날 꽝 남(廣南) 성의 꽝 찌(廣治)시 부근인 아이 뜨(愛子)에 정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인재를 중용하고 농민에게 세금과 요역을 가볍게 하며 정착지의 개척에 힘썼다. 그의 통치로 투언 호아(順化; 후에는 프랑스인이 붙인 이름)와 꽝 남의 풍속이 바뀌었다. 도둑이 없어 문을 잠그지 않았고, 외국상인들이 찾아와 교역을 활발히 했다. 군령은 엄격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여 막씨가 쳐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 번째 북쪽을 방문한 뒤에 응우옌 호앙은 남쪽에서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다. 베트남인의 남진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601년 투언 호아 창(倉)을 설치하고, 티엔 무 사를 지었다. 1602년에는 투언 호아보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한 꽝 남(廣南)에 관심을 가지고 여섯째 아들을 꽝 남 영(廣南營)의 진수(鎭守)로 임명하고, 하이 번 관(海雲關)을 넘어서 현지를 답사하였다. 그의 지배 시기에 다낭 남쪽 30킬로미터에 있는 호이안(會安)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진출해 있었고, 그곳은 응우옌씨의 대외무역 항구가 되었다.
1602년 응우옌 호앙은 꽝 남을 방문했을 때 진영 동쪽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가 사찰 건축에 관심을 가진 것은 타인 호아의 무인집안 출신이어서 유교보다는 불교를 신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투언 호아도 홍강(紅河) 델타의 중국식 문화와는 확연히 달라서 1463년부터 1559년까지 진사 급제는 3명이 배출되었을 뿐이다. 쩐 왕조 때 이미 베트남 영토가 되었지만, 이곳의 참파인들은 자신의 풍속을 버리지 않고 고수했다.
응우엔 호앙의 불교 신봉은 대를 이어 응우옌 정권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중국인 승려 대산(大汕)은 집권자 응우옌 푹 쭈(阮福淍, 1691~1725)를 비롯한 응우옌 씨 일족을 모두 불교로 개종시켰다. 그 결과 응우옌 푹 쭈는 궁중까지 불교식으로 꾸몄고, 자신이 ‘불주(佛主)’로 불리기를 더 원했다. 응우옌 푹 응우옌(阮福源) 때부터 불주라는 명칭이 쓰였다. 응우옌씨의 실록인 <<대남식록전편(大南寔錄前編)>>에는 유학이나 유교윤리를 강조하는 기사는 보이지 않고 사찰 건축이나 보수에 대한 기사가 자주 나오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응우옌 푹 쭈는 도읍을 푸 쑤언(富春)으로 옮기고, 자신의 칭호도 총진(總鎭)에서 1693년에는 국주(國主)로 바꾸었다. 1700년대 들어서면서 응우옌씨는 중국의 책봉을 요청했으나, 탕 롱에 레 왕조가 있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1774년에 응우옌 푹 코앗(阮福闊, 1738~1765)은 왕을 칭하고 북쪽과의 관계를 끊었다.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 183~192쪽
흐엉강 남안의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후에의 랜드마크가 된 티엔 무 사(天姥寺)로 향하였다.비옷을 입고 헬멧을 쓴 사람들과 자동차가 어울려 복잡한 도로를 지나서 다리를 건너고, 서쪽으로 강변길을 달렸다. 티엔 무 사가 강이 서북으로 굽어 도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농 모자를 비롯하여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는 빨간 여지, 노란 바나나, 주황색 귤, 옅은 갈색의 용안, 검붉은 망고스틴, 노랗고 굵직한 망고, 공처럼 크고 표면에 삐죽삐죽한 침이 있는 두리안 등 열대과일이 싱싱한 향기를 뿜어내어, 내 눈을 단번에 사로 잡았다.
도자기 파편을 시멘트 기둥에 박아서 만든(嵌瓷) 주련이 박혀 있는 네 개의 높은 기둥 사이로 3개의 문이 길가에 있었다. 문 앞의 도로 아래로 나루가 있고 화려한 용머리를 단 배가 정박해 있었다. 강 건너에서 사람들을 싣고 절에 오는 배가 마치 피안(彼岸)으로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처럼 보였다.
문을 오르니 높이 21미터가 넘는 8각 7층 전탑이 높이 솟아 있었다. 후에의 상징물처럼 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 위의 1층에는 철로 된 출입문이 있었지만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져 있고, 정면에는 층마다 창문이 있고 주련과 편액이 박혀 있었다. 지붕에는 황색 기와가 올려져 있고 뒷면에 길상문이 들었고, 나머지 4면엔 동그란 창이 나 있고 백자 술병 모양의 상륜부를 올려 마감하였다. 그 앞에 서서 베트남 가이드와 우리 부부가 함께 서서 기념촬영도 하였다. 탑 아래 풀밭에는 보라색 루엘리아꽃이 떼를 지어 함초롬이 피어나 빗방울에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탑은 1845년에 티에우 찌 황제(Thieu Tri 紹治帝, 1841~1847)가 모후의 팔순 생신을 맞아 장수를 기원하며 세웠다. 탑의 원래 이름은 자인탑(慈仁塔)이었는데 후대에 푸억 주옌 탑(福緣塔)으로 불리고 있다. 탑 뒤에 있는 비석을 촬영하였다가 여행에서 돌아와 읽어보았다.
카이딘(啓定) 황제가 기미년(1919)에 이 절에 행차하여 하늘 높이 솟은 이 탑에 올라서 층마다 봉안된 부처님께 참배하였다. 사방을 굽어보며 응우옌 황조의 유서 깊은 도성, 후에의 풍광을 굽어보고 칠언율시와 서문을 지었다. 비문은 티엔 무 사가 후에의 명찰이고, 그곳이 고도(古都)의 승경(勝景)임을 잘 보여주었다. 서문은 맹자(孟子)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고 있었다. 응우옌 왕실의 불심이 깊었지만, 응우옌 황조의 통치 이념이 유교이고, 리(李) 왕조, 쩐(陳) 왕조처럼 불교가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유교에 밀려나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뇌음(雷音)’이라는 말이 나왔다. 찾아보니,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석가모니불과 보살들이 살고 있는 천상의 절이었다. 응우엔 황조 시기에도 베트남의 기층문화는 여전히 불교와 도교의 문화가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황제가 티엔 무 사(天姥寺) 푸억 주옌 탑(福緣塔)에 거둥하시어 우연히 율시 한 수를 짓고 서문을 함께 붙임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이른바 역사 깊은 나라라고 하는 것은 노거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누대를 섬긴 원로 신하가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맹자>> <양혜왕장> 하7). 나는 여기에 덧붙여서 이름난 가람의 빼어난 곳이 있어야 역사 깊은 나라라고 말하겠다.
우리 태조 가유(嘉裕) 황제(응우옌 호앙 阮潢; 초대 阮主, 1600~1613)가 산을 가로지르고 시를 읊으며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계획하였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노파(天嫗)를 이곳(투언 호아-후에)에서 만났을 때(1601), 노파가 향 한 심지를 주며 가르쳐주기를, “황제께서 향을 들고 강변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향이 다 탄 곳에 이르러면, 그곳에서 도읍을 이루고 절을 일으킬 수가 있을 겁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황제의 칙령으로 절을 짓고 부처를 모시고 천모산(天姥山) 영모사(靈姥寺)라고 명명하였다.
우리 효명황제(孝明皇帝, 阮福淍, 호 國主 天縱道人, 1691~1725, 6대 阮主)께서는 큰 종을 주조하여 맑은 새벽 좋은 저녁에 쳐서 그 소리가 수십 리 밖에까지 들리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 종은 세상을 깨어 있게 하는 부처님 집안의 큰 보배로다.
우리 세조(世祖) 고(高) 황제(嘉隆, 1802~1819)가 중간에 등극하여 처음에 공부(工部)에 명하여 절의 앞에 법당을 지었는데 대웅전(大雄殿)이라 명명하셨다.
이어서 헌조(憲祖) 장(章) 황제(紹治帝 1841-1847)가 우리 순천(順天) 고(高) 황후의 팔순 장수를 기원하며 절 앞에 7층 보탑으로 도솔천까지 우뚝 솟은 탑 한 기를 (1845년에) 지었으니 장엄하여 강물을 굽어 보고 있다.
기미년(1919) 음력 9월 15일 짐이 가마를 타고 절에 행차하여 예부와 공부 두 부서에 명령을 내려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랐는데, 과거의 금불 7위가 휘황찬란하여 그 광채가 눈길을 사로잡아서, 향을 사르고 예배하였다.
그곳에서 사방을 바라보며 서성이니 몸이 완연하게 뇌음사(雷音寺-서유기에 나오는 영축산 뇌음사로 석가모니가 사는 절.)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아홉 황릉의 아름다운 기운이 울창하고, 남쪽으로 바라보니, 비단 병풍이 구름 속에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 바라보니, 도성의 누각이 눈에 가득 들어오고, 북쪽으로 바라보니, 큰 골의 물빛이 쪽빛이도다. 참으로 우리나라의 이름난 가람으로 한 빼어난 경치이도다. 이에 율시 한편과 서문을 짓고, 깨끗한 빗돌을 세우도록 명하여 기록으로 삼노라.
天姥名藍駕晩來
천모산의 이름난 가람에 가마를 타고 저물녘에 와서,
登臨何啻到天台
언덕에 올라 보니 어찌 천태산(天台山)에만 가겠는가?
七層葆塔冲霄立
칠 층의 보배로운 탑이 하늘 높이 서 있고,
一座空門特地排
한 좌(座)의 절은 경치가 빼어난 땅에 펼쳐져 있네.
伴奐當風澄俗慮
한가함을 벗 삼아 풍경을 맞닥뜨리니 속세의 생각이 맑아지고,
虛無對景淨塵懷
빈 가슴으로 경치를 마주하니 티끌 세상의 마음을 씻어주네.
環瞻勝蹟欽前烈
빼어난 고적을 우러러 둘러보며 선왕들을 흠모하고,
善念功修幾肇培
선한 마음으로 닦은 공덕은 나라의 기초를 북돋우셨네.
카이딘(啓定) 4년(1919) 11월 24일
御製天姥寺福緣塔臨幸偶成一律倂序
孟子曰 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之謂也 予續之曰 有名藍勝跡之謂也
奉我/太祖嘉裕皇帝 以橫山淸吟 決計圖南 世傳/帝遇天嫗于此 贈香一株囑/ 帝持香沿江岸東行 到香盡處可都 都成而寺興焉 勅建寺奉佛 命名天姥山靈姥寺 奉我/顯尊孝明皇帝命崇修鑄大鐘 淸晨良夜扣辰(振) 聲聞數十里外 蓋眞佛家醒世之洪寶也 奉我/世祖高皇帝中興之初 命工部大崇修建前堂于寺 命名大雄殿 曁我/憲祖章皇帝祈我順天高皇后八旬聖壽 遂因寺前築七層葆塔 屼出兜天 一座莊嚴 俯臨江渚/ 己未年季秋十五日 朕乘輦臨幸 命禮工二部 將梯登上 有過去金身世尊七位 燦爛輝煌 光彩奪/目 焚香瞻仰久之 四望躊踟 宛如身在雷音中 西望九陵蔚葱佳氣 南望屛印縹紗雲中 東/望都城樓臺盈視 北望巨壑水色如藍 眞我國名藍之一奇境也 爰成一律倂序 命勒于貞石以爲誌/
天姥名藍駕晩來
登臨下啻到天台
七層葆塔冲霄立
一座空內特地排
伴奐當風澄俗慮
虛無對景淨塵懷
環瞻勝蹟欽前㤠
善念功修幾肇培
啓定四年十一月二十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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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딘 황제가 그곳 티엔 무 사에 행차하여 시를 읊은 때는 1919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종전 협상인 파리강화회의가 열린 이해에 우리 겨레는 잔악무도한 일제의 마수에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3·1 독립 만세 투쟁을 펼쳤다. 베트남도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애국지사들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몇 해 전, 가족이 여름휴가로 설악산 백담사에 갔다. 만해 스님 기념관에 시집 <<님의 침묵>>과 함께 <<영환지략(瀛環志略)>>,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볼 수가 있었다. 중학생 때 <알 수 없어요>를, 고교생 때 <님의 침묵>을 외웠고, 대학에 입학하며 사 본 노란색 표지의 삼중당(三中堂) 문고본 책이 <<님의 침묵>>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화파에게 세계 지리와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 청에서 들여온 <<영환지략>>과 <<월남망국사>>가 그곳에 있는 것은 다소 의외였다.
애국지사이고 개화 지식인이었던 만해 스님은 중국의 루쉰처럼 시와 소설을 발표하고, <<유심>> 같은 잡지를 간행하여 근대의식을 전파하고, 불교의 혁신을 위하여 <<불교유신론>>을 집필하였다. 통도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여 불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권으로 된 <<불교대전>>을 편찬하고 강의를 하였다. 101세에 열반한, 내 고향 마을 출신의 동고당(東皐堂) 문성(汶星, 1897~1997) 스님은 젊은 날, 만해 스님의 지도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뒷날, 만해 스님이 통도사에서 강의를 하다가 써 보인 시를 제자들에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불교계도 민족의식이 깨어나서 친일하지 말고, 독립 투쟁을 전개해야 함을 토로한 시이다.
六穴砲三發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리볼버 권총으로 세 발을 쏜 것이,
勝於讀千卷
(지식인이 앉아서) 책 천 권을 읽은 것보다 낫다.
근래의 선지식 경봉(鏡峰) 선사는 통도사에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울 때, 만해 스님이 <<월남망국사>>를 강의하며, ‘우리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월남처럼 된다’며 눈물을 지으시던 모습을 보고, 상좌 명정(明正) 스님께 들려주었다.
1900년 이전 베트남인들의 대불 항쟁은 전통적 지식인이 주체가 되어 외세에 대한 배타심과 유교적 충성심이 결합된 형태로 전개되었다. 가톨릭 교도에 대한 학살도 이런 과정에서 유발되었다.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적 민족주의운동이 일어나, ‘백성’이 ‘국민’으로, ‘군주’ 대신 ‘국가’의 개념으로 바뀌고, ‘애국’, ‘국가’, ‘동포’ 같은 말이 생겼다. 쉬지위(徐繼畬)의 <<영환지략>>은 세계지리서로, 서양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을 높여 양무운동의 선구적인 업적이 되었다. 량치차오(梁啓超)가 주관한 <<신민총보(新民叢報)>>는 초기 베트남 독립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판 보이 쩌우(潘佩珠, 1867~1940)와 량치차오를 연결하는 매체가 되었다. 변법운동을 주도한 량치차오의 <<무술정변기(戊戌政變記)>>, <<신민총보>>, 미국인 영 앨런(Young Allen)의 <<중동전기본말(中東戰紀本末)>>과 일본인 저서의 한역(漢譯)인 <<일본유신삼십년사>>는 청일전쟁과 메이지 유신에 관한 책으로 일본에 관한 정보를 소개해 주었다. 이들 ‘신서(新書)’를 통해 베트남의 지식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생각해 왔던 것처럼 세상은 위계적 질서에 의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 간의 싸움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베트남의 개혁가들은 량치차오의 예에 따라 유교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대신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초기 베트남 민족주의운동에서 판 보이 쩌우는 왕정을 옹호하면서 무력으로 프랑스 식민정부를 축출하자고 하였고, 판 쭈 찐은 왕정 폐지와 공화제를 주창하며, 프랑스와 대결하기보다는 근대화를 이룩한 다음 독립을 회복하자는 주장을 폈다.
프랑스가 베트남 서부 3성을 무력으로 점령한 1867년에 판 보이 쩌우는 가난한 유생(儒生)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85년 근왕령(勤王令)이 선포되자 학우들과 근왕운동에 참여했지만 무명의 그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과거시험에 전념하여 1900년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대불항쟁에 적극 참여했다. 1901년에는 응에 안 성의 보안대와 모의하여 봉기를 모의하다 발각됐고, 1904년에는 유신회를 조직하고,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써서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정세에 대한 냉철한 이해가 없었고, 독립운동에 따른 복잡한 문제들을 파악하지도 못하였다. 량치차오의 영향을 받으며 진보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05년에 반식민주의 운동의 재원을 마련하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그에게 일본은 메이지 유신 뒤에 개혁 정책으로 서구의 도전을 막아내고,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신흥 강국이 되었고,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유사한 문화를 공유(同種同文同洲)”한 나라로 보였다.
일본에서 먼저 량치차오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량치차오는 일본이 군사개입을 하면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고, 베트남인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또 일본과 프랑스 사이의 불화가 생기기 때문에 무기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대신, 일본 재야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의 아시아주의자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들도 무기 원조보다는 인재 양성이 급선무임으로 유학생을 받아주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뒤에 량치차오는 그에게 두 가지 권유를 했다. 열정적이면서도 비통한 글들을 많이 써서 프랑스의 혹독한 식민정책 아래 베트남이 처한 곤경을 세계에 알리라는 것과 국민의 의식을 일깨우고 전반적인 교육 수준을 높이려면 베트남 젊은이들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권유로 판 보이 쩌우는 <<월남만국사>>를 썼고, 이어서 <<해외혈서(海外血書)>>, <<신월남(新越南)>> 등의 저작을 발표했다.
<<월남망국사>>는 베트남의 반식민주의 운동에서 탄생한 가장 중요한 책의 하나로 베트남 최초의 혁명적 역사서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응우옌 황조의 무기력과 외세의 위협에 대한 뒤늦은 대응을 한탄하면서 근왕운동 시기의 영웅들에 대해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의 억압적인 사회경제정책을 분석하고, 나아가 모든 계층을 망라하는 민족적·반식민 단체의 결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1905년에 출판된 이 책은 이듬해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그다음 해에도 두 가지 번역본이 더 나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 292~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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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연탑을 뒤로 하고 동쪽의 시멘트로 만든 보호 시설 안에 대리석으로 만든 큰 귀부 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응우옌 푹 쭈(阮福淍, 1691~1725)의 글을 새긴 이 비석은 1715년에 중을 중건하고 세운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다. 윤기 나는 귀부의 귀갑에 사람들이 이름 같은 것을 빼곡하게 새겨 놓았다. 귀부 받침 비석 반대편에는 팔괘 문양이 들어간 종이 걸려 있었다. 1710년에 응우옌 푹 쭈가 보시한 종으로 무게가 1,986킬로그램이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응우옌 푹 쭈는 중국 선불교 조동종(曹洞宗 Ts’ao Tung) 30대 법손으로 법명이 훙 롱(Hung Long)이었다. 팔괘가 들어가 있는 것은 유교 문화와 융합된 것으로 우리나라 종에도 가끔 팔괘를 볼 수가 있다. 종각 옆에는 귀부가 없는 비석이 있었다.
각기 창과 도끼를 들고 갑옷과 투구를 쓴 신장이 문 좌우에 지키고 서 있는 중문에는 아치형의 3문이 있었다. 중문 위에는 ‘靈姥寺(영모사)’라는, 동쪽문에는 ‘大慈悲(대자비)’라는, 서쪽문에는 ‘大智慧(대지혜)’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가운데 문 위의 지붕은 솟아 별도의 지붕을 하고 있었다.
중문을 지나니 넓고 긴 마당이 나왔다. 마당 가운데에 붉은 벽돌을 깔아놓은 길을 내고 그 좌우에는 나무와 청화백자 화분이 번갈아 풀밭에 놓여 있었다. 마당 끝에 이중 지붕의 앞 건물과 단층 지붕의 뒷 건물이 붙어 있고, 나지막하고 가로로 긴 대웅전 있었다. 대웅전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는 전후의 두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椽燈) 천장이며 실내는 넓었다. 전실 가운데에 포대화상이 맞아주고, 자주색 기둥에는 황제(응우옌 푹 쭈)가 지은 주련이 금색으로 쓰여 있다. 후실 입구에 국주천종도인(國主天縱道人)이 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쓴 ‘靈鷲高峰(영축고봉)’ 편액이 걸려 있었다. 청나라 강희제의 필체와 닮은 ‘영취고봉’은 응우옌주(阮主)인 현종(顯宗) 효명(孝明)황제로 추존된 응우옌 푹 쭈(阮福淍)가 갑오년(1714) 첫여름 곡우날에 쓴 것이었다. 그 좌우의 기둥에는 바오다이 황제의 섭정 대신인 톤 탓 한(尊室訢)이 지은 주련이 쓰여 있었다.
御製
황제가 지음
萬化瑤源 普四大而咸歸善念
만 가지 가르침의 보배로운 근원,
풍수지화(風水地火) 4대의 중생에게 퍼져 모두가 착한 마음 갖게 하고,
七層寶塔 對兩間而敷錫福緣
칠 층의 보배로운 탑,
강의 양쪽 언덕을 마주하여 무량한 복을 짓는 인연을 널리 펴네.
閱寺碑仰 先王造福之因 水月常圓 光滿三大千世界
절의 사적비를 우러러 열람하니, 선왕들이 복을 지은 원인으로,
수월(水月)이 늘 둥글어서, 그 빛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며,
讀國史記 老嫗現身之語 岳河永固 靈鍾億萬禩基圖
나라의 역사를 읽으니, 노파가 나타나 말하기를,
산하(山河)가 길이 견고하여, 그 신령함이 억만년 나라에 모였네.
輔政親臣 太子少傅 文明殿大學士 賞授一項北斗佩星 扶光侯 尊室訢 恭 紀
보정친신(輔政親臣, 1925년 카이딘 황제 사후 바오다이 황제 시기 섭정한 대신), 태자(太子, 뒷날 바오다이 황제) 소부(少傅 스승), 문명전(文明殿) 대학사(大學士), (인도차이나 식민정부, 프랑스 영예군단(榮譽軍團)의) 일항북두패성(一項北斗佩星) 훈장을 받은 (1928년에 책봉된) 부광후(扶光侯), 똔 텃 한(尊室訢, Tôn Thất Hân, 1854~1944)이 공손히 기록함.
안쪽 공간의 벽면에는 유리 안에 과거 연등불, 현재 석가불, 미래 미륵불의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고, 그 앞에는 유리상자 속에 석가모니불이 있었다. 그 왼쪽에는 ‘安運慈心’이라는 편액 아래에 연꽃을 들고 있는 보현보살상이 유리 상자 안에, 오른쪽에는 ‘神通智勝’이라는 편액 아래 연꽃을 들고 있는 문수보살상이 역시 유리 상자 안에 모셔져 있었다. 복과 지혜가 넘치며 큰 귀에 미소를 띤 얼굴에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우리나라의 불상은 신라시대의 것이든 조선시대의 것이든 정말 상호가 원만하다. 그런데 티엔 무 사의 대웅전에 모셔진 불보살 상들은 한결같이 마치 등신불이나 부처님의 고행상을 보는 것 같았다. 표정이 딱딱하고 얼굴과 몸매가 작고 야위었고 불빛이 반사되어 번질번질하게 윤기가 흐르는 것이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석가불 앞의 수미단 위에는 녹색의 과일과 노란 귤, 말리화로 보이는 꽃가지를 가득 꽂은 큰 청화백자 화병, 기름으로 불을 밝힌 등잔, 두 화병 바깥에 각기 작은 병, 두 화병 가운데에 굵은 향을 꽂은 청화백자 향로, 큰 촛대가 올려져 있었다. 좌우의 보살상 앞에도 향로, 과일, 꽃병, 촛대가 공양 올려져 있었다. 불단 좌우 벽 앞에도 큰 청화백자 병이 놓여 있었다. 청화백자 병들은 병(甁)과 평(平)의 중국어 발음이 같아서 평안(平安)을 염원하는 장엄(莊嚴)이었다. 상 앞에는 금빛 나는 큰 향로가 놓여 있었다. 특이하게도, 수미단 좌우의 바닥에 생수병을 탑 모양으로 가지런하게 쌓아 놓은 것이 보였다. 신자가 보시한 물품인 것 같았다.
수미단 앞의 낮은 상 위에는 왼쪽에는 상 위에 두고 두드리는 큰 목탁과 손에 들고 치는 작은 목탁이, 가운데에는 백색의 작은 관세음보살상이, 오른쪽에는 우리나라 절에서 볼 수가 없는 큰 놋쇠 좌종(坐鐘)이 있었다. 한 스님이 좌종을 울렸다.
대웅전에서 나와 서쪽 길로 가는데 요사채로 보이는 집 앞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초록색 맑은 물이 가득하고 빨강, 노랑, 하양 색의 잉어 3마리가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었다. 연못가에 자연석을 쌓아 인공의 산을 만들고, 일본식 작은 석등이 있었다. 연못의 자연적인 곡선의 테두리에는 싱그러운 풀밭과 대와 솔, 꽃나무가 피어 심산유곡에 온 것 같았다. 나무 아래의 바위에 ‘靈峯’이라 새겨 놓은 것이 보였다. 연못을 보는 순간 나그네의 마음에는 청징(淸澄)한 운치가 드리우고, 몸은 극락정토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곳을 떠나지 말고 마냥 망중한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연못 곁의 와이(Y) 자 모양의 큰 나무에는 비를 막는 작은 지붕을 만들고 그 밑의 가로 막대기 위에 수탉 두 마리가 각기 다리를 끈에 묶인 채 서서 통에 달린 먹이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동물이지만 막대기 위에서 선 채로 키워지고 있었으니 너무 잔인했다. 계란을 빼먹기 위해 꼼짝도 할 수 없는 공간에 앉아 스물네 시간을 갇혀 있다가 결국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우리나라의 양계장보다는 백배 천배 낫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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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가의 건물에 영국제 낡은 하늘색 오스틴 승용차(Austin Westminster sedan)가 보관되어 있고, 자동차 뒤쪽의 벽에는 틱꽝득 스님이 도로 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가부좌한 채로 앉아서 화염에 휩싸여 있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에이피(AP) 통신 사진기자 말콤 브라운(Malcom Browne)이 촬영한 사진이다. 그는 이 사진으로 1963년 퓰리처상(세계보도사진상)을 받았다.
차의 오른쪽 벽엔 다비 뒤에 타지 않고 남은 스님의 심장을 비구니 스님이 들고 슬픔과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차가 보관되어 있는 방의 입구 처마 밑에는 왼쪽에 다비 후 타지 않은 스님의 심장(사리)이, 오른쪽에 불교협회와 응오 딘 지엠 대통령에게 서한을 쓰는 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다. 두 액자 사이에는 스님의 소신공양을 안내하는 글이 들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이 차로 틱 꽝 득(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 1897~1963) 스님이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의 안 꽝 사원(Ấn Quang Pagoda, 印光寺)에서 판 딘 풍(Phan Đình Phùng, 潘廷逢)과 르 반 두엣(Lê Văn Duyệt, 黎文悅) 두 길의 교차로로 가셨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스님은 연화좌(蓮花座)로 앉아서 응오 딘 지엠(Ngô Đình Diệm, 吳廷琰) 정권의 불교도에 대한 차별 정책과 종교 자유의 인권을 위배하는 것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소신공양(燒身供養)하였다.
In this car The Most Vemerable Thích Quảng Đức went from Ấn Quang Pagoda to the intersection of Phan Đình Phùng street and Lê Văn Duyệt street on June 11, 1963 in Saigon. As soon as he got out of the car, The Most Venerable sat down in the lotus position and burnt himself to death to protest against the Ngô Đình Diệm regime’s policies of discriminating against Buddhists and violating religious freedom.
정토종 승려인 틱꽝득 스님은 내가 태어난 1963년 6월 10일에 그곳 티엔 무 사에서 파란색 영국제 오스틴 웨스트민스터 세단을 타고 사이공으로 갔다. 그리고 사이공의 캄보디아 대사관 앞의 교차로에서 내려 다른 스님이 놓아주는 방석에 앉아 염주를 들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또 다른 스님이 차에서 내린 석유통을 들고 스님의 정수리에 석유를 끼얹었고, 틱꽝득 스님은 성냥불을 켜서 자신의 몸에 불붙였다. 당시 현장에 취재차 와 있었던 뉴욕 타임즈 기자는 목격담을 남겼다.
나는 그 광경을 다시 볼 수도 있었지만 한번으로 족했다. 불꽃이 사람 몸에서 솟구치더니, 몸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머리는 새까맣게 타들어가서 숯이 되었다. 사람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놀라울 정도로 몸은 빠르게 불탔다. 내 뒤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는 소리칠 수도 없었고, 극도로 혼란스러워 메모를 하거나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가면서도 ‘틱꽝득’은 미동은커녕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I was to see that sight again, but once was enough. Flames were coming from a human being; his body was slowly withering and shriveling up, his head blackening and charring. In the air was the smell of burning human flesh; human beings burn surprisingly quickly. Behind me I could hear the sobbing of the Vietnamese who were now gathering. I was too shocked to cry, too confused to take notes or ask questions, too bewildered to even think ... As he burned he never moved a muscle, never uttered a sound, his outward composure in sharp contrast to the wailing people around him.“
-Halberstam, David (1965), The Making of a Quagmire, New York: Random House
“네거리 한 가운데 스님이 홀로 불길 속에 반듯이 앉아 있었다. 불길은 스님 몸을 에워싸고 공중으로 활활 타오른다. 스님 몸에 붓다가 흐른 휘발유로 스님 주변도 불바다가 되었다. 스님 뒤쪽에는 휘발유를 담았던 빈 통이 있었다. 스님은 그런 불길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을 중심으로 한 네거리에는 많은 스님들이 빙 둘러 있었다. 불길이 스스로 서서히 꺼지자 스님의 몸이 숯덩이가 된 채로 남았다. 스님은 연화좌 자세는 그대로였다. 1963년 6월 11일 오전 10시, 사이공 시내 한 네거리에서 있었던 분신, 뒤에 역사는 스님의 분신을 이렇게 일렀다.”
-틱낫한, 《불의 바다에 피어난 연꽃(Lotus in a Sea of Fire)》(1967)
틱낫한 스님의 첫 영어책인, <<불의 바다에 피어난 연꽃(Lotus in a Sea of Fire)>>, 이 책을 플럼빌리지 게시판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격화되자, 틱낫한은 불교 평화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불의 바다에 피어난 연꽃>>은 미국에서 1967년에 출판된(베트남에서는 해적판으로 Hoa Sen Trong Biển Lửa) 이 책은 평화를 위한 그의 단호하고도 과격한 요구였다.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폭격 중단을 바라는 대다수 베트남 사람들에게 준 목소리이었다. 가톨릭의 토마스 머톤 신부는 베트남에 폭격을 더해 갈수록 공산주의자가 더 생겨날 것이라고 하며 이 책을 “폭발적인 작은 책”이라고 묘사하였다. 틱낫한의 첫 영어책이고 미국에서 반전 평화 운동의 물결을 불러왔다.
As war raged in Vietnam, Thich Nhat Hanh became a leading figure in the Buddhist peace movement. “Lotus in a Sea of Fire” published in 1967 in the US (and underground in Vietnam as “Hoa Sen Trong Biển Lửa”), was his uncompromising and radical call for peace. It gave voice to the majority of Vietnamese who did not take sides and who wanted the bombing to stop. The Catholic monk Thomas Merton described it as “an explosive little book” with the power to show America that the more it continued to bomb Vietnam, the more communists it would create. It was Thich Nhat Hanh’s first book in English and made waves in the growing anti-war movement in the US.
1856년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다 낭 항을 점령하고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하면서 베트남은 식민지가 되었다.
1943년의 카이로 회담은 루스벨트, 장제스, 처칠이 만나 동남아를 점령한 일본과의 전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미국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복귀를 반대하면서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해야 한다고 밝혔고, 중국은 전후에 중국과 미국이 함께 인도차이나 독립을 도와야 한다고 대답했다. 한국은 적절한 과정을 거쳐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2차 대전 뒤에 승전국인 영국과 중국 국민당군이 북위 16도를 경계로 일본이 지배하던 베트남에 들어와 일본군 무장 해제를 담당하였다.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미국과 소련이 일본의 식민지인 한반도에 들어와 일본군 무장 해제를 맡았다.
승전국 프랑스는 자신들의 유산임을 주장하며 다시 베트남에 들어왔고, 호치민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는 하노이에 무혈 입성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1946년부터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 종결 때까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있었다. 제네바협정으로 북위 17도 선을 분계선으로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3년 안에 남북 베트남 동시 선거로 통일 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1955년에 남부 베트남에 괴뢰 정권을 급조하였다. 대통령은 응오 딘 지엠이었다. 그는 부패하기가 이승만보다도 심하였다. 베트남 민중은 남부 베트남 해방 전선을 결성하여 미국과 그 꼭두각시 정권과 항전하였다.
응오 딘 지엠의 가톨릭 옹호, 불교 차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불교도들은 거세게 저항하였고, 베트콩과 협력하는 불교계를 응오 딘 지엠 정권은 폭압적인 탄압을 하였다.
베트남 인구의 70~90%가 불교 신자들이었지만 가톨릭 소수자인 응오 딘 지엠은 공공 서비스, 군인의 진급, 토지 할당, 사업 안배, 세금 면제 등에 가톨릭을 우선하는 차별 정책을 시행하였다. 베트남 정부의 많은 장교들이 진급 때문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마을 자위대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무기가 제공되었고, 군대에서 몇몇 불교도들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하면 승진이 거부당했다.
몇몇 가톨릭 신부들이 운영하는 사병(私兵) 조직에서는 정부의 묵인하에 가톨릭으로의 개종, 불교 사원을 약탈, 폭격하고, 파괴하도록 강요 받았다. 몇몇 불교도 마을들은 도움을 받거나 전략촌으로 이주 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집단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프랑스가 불교에 부여한 사적인 지위 때문에 공적인 불교 행위들을 하기 위해서는 인가를 받아야 하는 규정이 폐지되지도 않았다. 가톨릭 교도들은 공적인 부역에서 면제되었고, 미국의 구호물자들은 가톨릭 교도들이 다수인 마을에 우선적으로 분배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최대의 토지 소유자이었고, 면세 혜택을 누렸으며,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토지는 토지 개혁에서 면제되었다. 바티칸의 백색과 금색 깃발이 정기적으로 남베트남의 모든 주요한 공공행사에 걸렸고, 응오 딘 지엠은 국가를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였다. 이명박이 서울과 부산 등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사찰들이 망하기를 기도하고, 불교계의 수장인 지관 총무원장 스님을 경찰이 검문하며, 도로명 주소를 만들며 불교식 이름을 삭제하는 등의 종교 차별을 했던 것과 최근의 아무 대통령이 가톨릭 편향적인 문화 정책을 편 일은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불교도들의 불만이 베삭 날에 불교 깃발을 달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에 분출했다. 불과 며칠 전에, 가톨릭 교도들에게 지엠의 형인 응오 딘 툭 대주교 생일에 바티칸 깃발을 달도록 장려했었다. 불교도 군중이 그 금지령에 항의했고, 베삭 날에 불교 깃발을 달며 정부의 금지령을 거부하였다. 정부 군대는 저항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였고, 9명이 죽었다. 지엠은 그 죽음에 베트콩을 비난하며 책임지기를 거부하여 불교도의 항의와 종교 평등을 요구를 부추겼다. 지엠이 불교들의 요구를 승낙할 뜻이 없자 저항의 강도는 높아졌다.
불교계의 리더이었던 틱꽝득 스님이 마침내 불교 수호를 위하여 소신공양하기에 이르렀다. 소신공양의 사건으로 전 세계에 응오 딘 지엠 정권의 악랄함과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알려졌다. 인과응보라고 하였던가? 케네디의 사주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응오 딘 지엠 형제는 피살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네디도 암살되었다.
2차 대전 뒤에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남북이 분단되고,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관리들을 그대로 기용하고, 일제와 다를 바 없는 보리 공출을 강요하여 농민을 착취하고 실업자, 물가, 식량 배급 등에서 실정을 하여 민중과 사회주의 독립 운동 세력의 10월 항쟁, 제주 4·3과 여순 10·19 항쟁을 촉발시켰다. 미군정은 경찰, 군대, 미군 씨아이씨, 서북청년단 등을 동원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수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앞세운 반공 친미 국가를 급조하였다. 이승만은 국민보도연맹을 만들고 6·25 전쟁이 일어나자 방방곡곡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하였다. 해방 후 6·25 전쟁 시기까지 학살한 민간인이 무려 80만 명을 헤아리고, 좌익의 우익에 대한 보복으로 20만 명이 학살되어, 무려 100만 명의 민간인이 동족의 손에 죽었다.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해 국회가 헌법에 의해 만든 민족 반역자 조사 및 처벌 위원회(반민특위)를 경찰을 동원해 탄압하고 국회의원을 구속하며 헌법을 개정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고, 평화통일을 말하는 조봉암을 정적으로 사형시키고,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발포하여 학살하고, 하와이로 도망 가 죽은 이승만은 일찌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서 탄핵되었다. 6·25전쟁이 나자 서울 시민들을 두고 대전으로 도피하고, 수많은 피난민이 건너는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이승만의 이른바 정화유시로 불교계에는 대처·비구 간 분쟁이 일어났고, 청담스님과 문성스님 등의 노력으로 석가탄신일이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야 크리스마스처럼 공휴일이 되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쫓겨 온 기독교도들은 반공을 신념으로 삼았고, 한경직 목사는 서북청년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 사찰들은 기독교 친화적인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에 의하여 기독교계와 가톨릭에 넘어갔다.
박정희 유신독재 뒤에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신군부는 자신들을 지지하기를 거부하는 불교계를 탄압하였다. 새벽에 총칼을 든 군인들이 전국의 사찰들을 군홧발로 짓밟고, 스님들을 무차별로 끌고 가 지독한 고문을 하며, 사찰 재산을 빼앗는 ‘10·27 법난’을 자행하였다. 고문과 억울함에 할복 자살을 기도한 스님도 있고, 고문으로 온 몸이 망가져 앓다가 죽은 스님도 있다.그럼에도, 불교계는 만해 스님이 <<님의 침묵>>을 집필한 백담사에 일해 전두환을 머물게 하고, 심지어 전두환은 뻔뻔하게도 극락보전 현판까지 썼다.
4대강을 파괴하여 여름이면 강물을 독성물질이 넘치는 ‘녹조 라떼’를 만들어 수중 생명을 죽이고, 사람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며, 토건업자들의 이익을 챙기고, 부자 감세로 서민들의 삶을 힘겹게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한 이명박 정부에 항의하여 문수 스님이 유서를 남기고 낙동강에서 소신공양하였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배, 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 분단과 전쟁, 냉전체제와 미국의 반공 정부 수립과 독재자, 민중의 저항과 민간인 학살, 전통 종교인 불교와 제국주의가 전파한 가톨릭과 개신 기독교, 소설 등신불과 현실의 소신공양… 망국의 고도, 후에의 흐엉 강 가에 있는 티엔 무 사의 그 파란색 오스틴 세단 앞에서 나는 베트남과 우리나라 역사의 구조가 너무나도 닮아있음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베트남 민족의 역사는 우리 겨레의 자화상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베트남에 의료 봉사를 갔다가 베트남 현대사 공부를 하고 베트남 정부가 인정한 호치민 평전을 쓰기도 하였던 송필경이 쓴 책, <<왜 전태일인가>>에서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을 서술한 대목을 읽고서, 약간 수정하여 여행 전에 계림역사기행 카페에 올렸다.
6·25전쟁 이후에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미국은 1955년, 베트남을 분단한 후 북쪽 호찌민 정권에 대항할 남쪽 괴뢰 정권을 급조했다. 미국이 선택한 인물은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이었다. 한반도에 골수 친미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세웠던 것처럼, 미국은 남베트남에 이승만과 여러모로 닮은 지엠을 대통령으로 앉혔다. 민족주의자로 자처한 지엠 또한 철저한 친미 반공주의자이며 반프랑스 탈을 썼지만 프랑스 식민에 협력했던 인사들로 정부를 꾸렸다. 지엠의 통치는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이 셋의 악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하였고 또한 그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엠의 동생 응오 딘 뉴는 직함이 단지 대통령 고문이었지만, 실제로는 배후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CIA 자금으로 편성된 특수부대가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있었다. 뉴는 그 특수부대를 자신의 사병으로 부렸다. 뉴의 아내 ‘마담 뉴’는 사실상 퍼스트레이드 노릇을 했다. 시아주버니인 지엠이 독신이었기에 마담 뉴가 베트남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정부 요직은 지엠 친척들 차지였다. 지엠 일족은 가톨릭 신자였다. 형은 가톨릭 대주교 응오 딘 툭이었다.
베트남은 인민의 8할 이상이 불교 신자다. 지엠과 정부 고위층들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 교육을 받은 탓에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다. 권력과 부를 극소수의 가톨릭인이 독점했다. 남부 베트남의 민중은 남부베트남해방전선을 조직하여 응오 딘 지엠 정권과 싸웠다. 미국의 지배를 받는 남베트남 민중의 저항은 거셌다. 남베트남의 수많은 감옥에는 정치범이 10만 명에서 15만 명을 헤아렸다. 한 감옥에서는 정치범 약 5천 명에게 독약을 탄 음식을 먹였고, 그래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남베트남 민중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자 무장 게릴라를 조직했다. 1960년 12월 20일, 북베트남과 아무런 관계없는 자발적인 전사들이 모여 <민족해방전선>을 만들었다. 미국이 ‘베트콩’이라고 비하한 이 무장 단체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괴뢰정권을 곧 무너뜨릴 듯 위협했다.
갓 취임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어떻게 해서든 남베트남을 사수했어야 했다. 혹시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젊은 케네디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괴뢰 정권에 무기 공급을 확대했다. 미국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침략하자 남베트남 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계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흘려보내는 정보의 장막에 가려져 베트남 민중이 겪는 고통의 실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몸을 불사른 스님은 틱꽝득(釋廣德 Thich Quang Duc) 스님의 속명(俗名)은 람 반 팟(林文發; Lâm Văn Phát)이다. 1897년 베트남 중부 아름다운 해변마을 나짱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했다. 일곱 살에 출가해서 남베트남 각 지방에 포교하며 평생 31좌의 절을 지었다.
부와 권력을 손아귀에 쥔 베트남 가톨릭 세력은 불교를 탄압했다. 많은 사찰을 닫게 하고 승려를 해산했다. 이는 정권 부패를 비판하던 불교계에 대한 보복이었다. 지엠 일족은 베트남을 가톨릭 나라로 만드는 것을 사명이라 믿고, 저항하는 불교도를 모조리 체포해서는 갖은 고문을 했다. 절을 봉쇄하고 수돗물과 전기 공급 심지어 음식까지 차단했다. 남베트남 각지에서는 불교도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부 젊은 승려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과 물밑에서 조용히 연대하고 있었다.
1963년 5월 1일부터 9일까지 ‘부처님 오신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베트남에서는 가장 신성한 날이다. 그런데 성모 출현 라방(La Vang*** 월성 수정) 성당의 낙성식과 시기가 겹쳤다. 그 행사에는 응오 딘 지엠 대통령과 동생 뉴 고문 부부, 형인 툭 대주교가 참석하기로 했다. 그 성당에 가려면 베트남 중부 도시 후에를 통과해야 했다. 후에는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으며 베트남 불교의 중심지다.
후에의 거리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저게 무엇인가?" 하고 대통령이 물었다. "불교 깃발 입니다."고 수행원이 대답하자, 곧바로 전국의 불교 깃발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깃발을 내릴 수 없었다. 항의 데모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후에 시민들의 불만과 저항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후에 시장은 깃발을 올려도 된다고 라디오 방송에서 약속했지만, 결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을 바꾸었다.
1963년 5월 8일 불교 깃발을 걸고 가는 긴 행렬을 향해 군의 장갑차가 돌진하며 발포했다. 우리의 5·18 민주화운동과 비슷했다. 14명이 중상을 입고 8명이 죽었다. 아이들도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 여덟 명의 위패 사진은 사이공으로 옮겨져 싸 러이 사(Xá Lợi Pagoda, 舍利寺)에 모셔졌다. 사이공 거리는 마치 들끓는 기름 가마 같았다. 불교도의 데모는 점점 격렬했다. 군대는 물대포를 쏘고 최루탄을 던졌지만 진압하지 못했다. 데모의 선두에 선 것은 젊은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비폭력으로 일관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틱꽝득 스님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태우는 소신공양을 결심했다.
아침 10시 꽝득 스님은 십자로에 앉아 불길에 휩싸이면서 15분 동안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감로인(甘露印) 수인을 한 채였다.
스님의 유해를 불교 깃발에 싸서 ‘싸러이’사(寺)로 옮겼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군대가 출동하여 싸러이사를 가시가 박힌 철조망으로 봉쇄했다.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사람들은 흠뻑 젖은 채 언제까지고 돌아가지 않았다. 싸 러이 사(Xá Lợi Pagoda, 舍利寺) 본당엔 관을 준비했고, 검게 탄 유해를 천에 싸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찻잎을 넣어 두었다.
다음날 싸러이사에는 1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일터며 가게며, 학교를 일제히 쉬고 물처럼 몰려들었다. 6월 20일 이른 아침, 틱꽝득 스님의 유해를 화장터로 옮겼다. 부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들끓었다. 관에 다이너마이트가 장치되어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지만, 화장터까지 이어지는 7킬로미터의 길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9시였다. 아침이 이른 베트남에서는 이미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틱꽝득 스님의 유해를 소각로에 옮겨 디젤 연료를 사용한 4,000도의 불로 6시간 태웠다. 그런데 심장만은 타지 않았다. 다시 연료를 보충하여 오후 3시에서 오후 5시까지 태웠으나 심장은 타지 않았다. 영국 비비씨 방송(BBC)이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n)’는 '영원의 심장(Eternal Heart)'이라고 보도했다. 스님의 심장을 싸러이사에 안치하기로 했다. 또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모두가 울면서 '영원의 심장'을 우러렀다. 아, 이게 현대 신화인가?
지엠 정권 각료들은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타오르는 스님의 모습은 전 세계 신문 지면에 머리기사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충격을 받고 전율했다. 그리고 베트남 국내에서는 '영원의 심장'에 대한 열기가 번져갔다. 지엠은 매우 당황했다. 이대로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못 받게 될지도 몰랐다. 우선 '영원의 심장'을 어떻게든 없애야 했다. 그래서 비밀경찰 두목을 싸 러이 사로 파견했다.
두목은 '영원의 심장'에 황산을 뿌렸다. 하지만 심장은 녹지 않았다. 비취처럼 단단해졌고, 비밀경찰이 그 심장을 가져가려고 했다. 승려들은 '영원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 금속 용기에 담아 구리줄로 단단히 봉인하고 나서 사이공 시내의 스웨덴 은행에 맡겼다. 거기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하노이 국립은행으로 옮겼다. 지금은 사이공(호찌민시)에 돌아와 카이 호이 다리 근처에 있는 국립은행에 보관하고 있다.
틱꽝득 스님 소신공양 이후 정부의 탄압은 더 심해졌다. 8월 21일 계엄령이 내려진 한밤중, 특수부대가 베트남 각지의 절을 습격하여 1,400명에 달하는 승려들을 일제히 체포했다. 후에에서는 100명에 가까운 승려와 불교도들이 죽었다.
틱꽝득 스님! 농민의 아들이 일곱 살에 출가해서는 올곧고 정직하고 진지한 승려가 되었다. 1963년, 스님은 예순여섯의 노령임에도 불교도들의 데모나 단식에 참여했다. 5월 초 탄압은 더욱 과격해지고 후에에서는 잔인한 학살이 일어났다. 스님은 후에에서 있었던 학살을 두고 말씀을 남겼다. "이 가슴 아픈 사건을 앞에 두고, 베트남공화국 헌법과 응오 딘 지엠 대통령이 주장하는 민주법치, 공동, 공진(共進) 사회의 노선에도 명기되어 있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그 이상을 위한 투쟁에 베트남 불교도는 일어서야 한다. 정리(情理)에 맞는 투쟁을 위해, 규율을 지키고 비폭력적으로 온건하게, 베트남 불교 승려들은 이 베트남 불교에서 일찍이 없었던 국면을 맞이하여, 투철한 의지를 가지고 진정한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
5월 27일 스님은 베트남 불교연합회에 스스로 몸을 불사르겠다는 '소신공양 청원서'를 제출했다. 불교연합회는 지도자 열다섯 명의 지도자가 있다. 이들이 최종 결정을 한다. 분신 허가를 신청한 청원서는 이 지도자들에게 제출했다. 스님은 지엠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나, 비구 꽝득은 복화사(Phước Hòa Pagoda 福和寺***월성 수정) 주지입니다. 우리나라 불교가 고난의 때임을 보고,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불교가 멸망해 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 한 몸 불살라 불교를 지키는 공덕을 행할 수 있기를 기꺼이 청합니다. …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안락하기를 기도합니다. 눈을 감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감히 응오 딘 지엠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국민을 위해 종교 평등의 정책을 실행하고, 조국을 길이 지키도록 말입니다. 대덕 스님들, 스님들, 승단의 구성원들, 재가불자들에게 진심으로 청합니다. 불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일치단결하고, 희생을 감내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1963년 6월 4일 사이공에서 비구 꽝득 올림"
스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불타서 만약 뒤로 쓰러져 하늘을 보면 우리들의 투쟁은 성공하고 평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엎드려 쓰러지면 불길한 징조이니, 그때는 해외로 도망하라" 제자들은 다짐했다. “스님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시아인 단 한 사람의 정신력으로 전 세계를 떨게 만드는 것이 우리 역할이다." 남베트남 정부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유린해 오는 미국에 항의하기 위해 가솔린을 뒤집어쓰고 제 몸을 불사르기로 결심했다. 스님은 분신의 목적을 단 한 줄로 적었다. "우리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스스로 이 몸을 불사른다."
서구 언론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했다. 서양인들은 분신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었다. 분신이 의미하는 커다란 사랑과 희생적인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신공양은 대승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성스러운 법화경(法華經, Lotus Sutra)의 극적인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제23품 약왕보살품에서 보살, 즉 깨달은 존재는 붓다에 대한 열렬한 희생으로 자신의 손가락과 발가락, 팔을 태우고 그리고 끝내는 자산의 신체 전부를 태운다.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다.'라고 했다. 따라서 소신공양은 모든 종교 행위 가운데 가장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틱꽝득 스님과 다른 사람들의 희생은 대승불교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만이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의미를 갖는다.
개인적인 좌절이나 절망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살하고도 다르다. 프랑스에서 국제 참여불교 운동의 지도자로 주목받는 활동을 펼친 틱낫한 스님(Thich Nhat Hanh; 1926〜)은 당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적 도덕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세계 이목을 집중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은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려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틱꽝득 스님의 분신은 현대 불교의 사회적, 정치적 특징을 강력하게 드러냈다. 화염 속에서 죽어가며 좌선하고 있는 승려 모습을 통신사와 텔레비전이 보도했고, 이어 36명의 다른 스님들과 1명의 재가 여성 신도가 분신함으로써, 지엠 정권을 향한 불교도들의 고통과 저항의 메시지를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겼다. 그러나 이들 죽음의 불교적 의미를 대부분의 서구 시청자와 논평가들은 놓쳤다.
승려가 정치적인 저항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을까? 이 스님들은 대중들의 감정을 대변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극단적인 행동가들인가?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이 전통적인 수행의 하나였는가 아니면 정도를 크게 벗어난 것인가?
베트남의 대승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비구계를 받으려는 사람은 승가의 250계를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면서 작은 점 크기로 자신의 신체를 태운다(연비燃臂). 이는 격렬한 고통을 경험하면서 말한 맹세는 '마음의 모든 진지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더 큰 무게를 가질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되찾으려는 불교인들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은 불교인들이 정치적 목표와 종교적 목적을 하나로 봤기 때문에 이들이 언제든 공산주의자와 연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불교계는 남이나 북, 또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불교계의 가장 큰 목적은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자는 데 있었다.
지엠 대통령의 친동생이자 비밀경찰 총수인 응오 딘 누의 부인 '마담 누'는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까지 휘둘러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런 '마담 누'가 승려들의 분신을 보고, "중의 바비큐라니, 재미있네. 하지만 그 중은 모순이야, 반미라면서 미제 가솔린을 사용했잖아.", "그래봐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바비큐들"이라는 독설을 외신기자들에게 퍼부었다. 결정적인 악수였다. 이 망발은 전 세계 언론을 탔고, 이를 듣고 분노한 시민과 학생 데모대가 날마다 사이공을 휩쓸었다.
베트남의 혼란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미국이 감춘 베트남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이 그토록 꺼려했지만, 이 사건으로 베트남 문제를 비로소 유엔에 상정했다. 케네디 정권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난 지 1년도 채 안되었고, 앨리버마주에서는 흑인 데모가 막 일어났다.
그런 시기에 분신을 계기로 남베트남이 펄펄 끓는 기름 솥이 되었다. 미국은 지엠 정권을 밀어주는 게 헛일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미국은 결국 지엠 정권을 단념하고 베트남에 직접 개입하기로 했다. 1963년 11월 1일 CIA가 면밀하게 배후 조종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엠은 대통령 궁에서 도망쳐 중국인 거주 지구에 숨어 있다가 들켜 자신의 경호원에게 살해당했다. 다음날 지엠은 피투성이 사체로 승용차 트렁크에 처박혀 있었다. 동생 누도 살해당했다.
20일 뒤인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도 댈러스에서 총격을 당해 죽었다. 베트남전쟁 개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케네디도 11월 22일 겨우 1,000일의 임기만 채운 채 암살당했다. 그러나 ‘마담 누’는 금은보화를 이고지고 사이공을 탈출하여, 파리에서 은밀하게 살다,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송필경, <<왜 전태일인가>>(살림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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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꽝득 스님이 타고 갔던 오스틴 세단 차를 보고 북쪽으로 갔다.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호위병들처럼 절의 울타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공 모양의 열매가 달려 있고 참나무처럼 생긴 나무가 보였다. 여행 뒤에 찾아보니, 포탄나무(砲彈나무 Cannon tree)이다. 대웅전 앞뒤의 마당에는 분재들이 많았다. 빗방울이 맺힌 장미도 있고 너른 풀밭에 바위들을 배치한 정원이 있었다. 선불교 사찰이라서 그런지 일본 사찰의 정원을 닮았다. 흐엉강 가에 남북으로 장방형으로 생긴 언덕에 자리잡은 사찰 경내의 북쪽 끝에 8각 7층 승탑이 있었다.
법련(法蓮) 거사님을 따라 사람들은 합장을 하고 탑돌이를 하며 예배를 하였다. 탑의 정면에 박혀있는 작은 비에는 “佛曆二五三二己巳年 孟春/ 嗣臨濟正宗四十二世 重光靈姥國寺住持 諱 上澄 下源 號敦厚 律師和尙之塔/ 門徒弟子七衆等 奉立(불기 2532년 기사년 음력 1월에 임제종의 정통을 잇는 42세 법손이고 다시 일어난 영모국사의 주지이며, 휘가 윗자는 징이고 아랫 자는 원이고 호가 돈후인 계율을 주는 화상(戒和尙)의 탑을 문도 제자 칠중 등이 받들어 세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탑을 세운 불기 2532년 기사년 맹춘은 서기 1989년 음력 1월이다. 현재 국제적으로 공통으로 쓰는 불기는 1956년 네팔의 카두만두와 룸비니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의 총회에서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1957년이 불기 2,500주년이 되었다. 한국은 이 때 처음으로 대표를 파견하였지만, 그 결정이 와전되어 1956년이 불기 2500년이 되어 지금까지 쓰고 있다. 한국의 불기는 국제 불기보다 1년이 빠른 것이다. 불기는 부처님의 탄생이 아니라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한다. 한중일티베트 등의 북방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불기 3000년을 썼다. 그리고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스리랑카 등의 남아시아에서는 음력 4월 보름날을 웨사카(Vesak)라고 하여 부처님의 탄생일이다. 이 날은 성도, 열반의 날이기도 하다. 한국과 중국, 대만, 홍콩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매년 음력 4월8일(일본은 양력 4월15일)을 ‘부처님오신날’로 기념한다.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27개국 대표들이 모여 창설한 세계불교도우의회(WFB)의 창립대회에서 법륜(法輪, Dhammacakra(p), Dharmacakra(s))을 불교의 상징 마크 채택, 6색의 세계불교기(旗) 제정, 소승(小乘 히나야나 Hinaya) 대신 상좌(上座 테라와다Theravada) 불교 호칭 사용 등의 결의 되었다. 불기(佛紀) 통일문제도 상정되었으나 남·북방 간의 대립이 워낙 거세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차기 대회의 현안으로 넘기게 됐다.
탑에 사리가 모셔진 스님은 중국에서 전래된 베트남 선불교 임제종 42세 법손이고, 다시 빛난 티엔 무 사의 주지이고 휘가 上字는 징(澄)자이고 下字는 원(源)이며 호는 돈후(敦厚)인 계율을 주는(律師) 화상(和尙)이다.
화상은 산스크리트어 'upādhyāya'(팔리어 upajjhāya, 우파다야(鳥波陀耶))의 음역이고 중국에서는 주로 ‘계화상(戒和尙; 계를 주는 승려)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일본에서는 승려의 관명(官名)으로 쓰여 주직(住職:주지) 이상의 승려를 화상이라 불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 통용되었다. 승려가 되기 위하여 출가한 사미(沙彌)와 사미니(沙彌尼)는 교사 2명을 모셔야 하는데, 1명은 화상이고, 1명은 계사(戒師)이다.
화상은 역생(力生)으로도 번역되는데, 스승의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능히 법신(法身)을 장양(長養)시키고 공덕을 쌓아 주며 혜명(慧命)을 길러 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화상은 제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책을 읽히고 가르치기 때문에 친교(親敎)라고도 한다. 이 화상은 불교의 3사(師)인 은사(恩師) · 법사(法師) · 계사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나, 특히 은사의 의미가 가장 크다.
화상은 여섯 가지 자격을 구비해야 한다. ①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10년 이상 되었고, 신심(信心)이 돈독하며 정진(精進)이 깊어 헛된 생각이 없는 자, ② 계(戒)와 신(信)과 정견(正見)을 갖추었고 박식한 지혜가 있는 자, ③ 병든 제자를 잘 간호할 줄 알고, 악한 행위를 법(法)답게 처리하고 범죄를 판단할 줄 알며, 악행을 짓지 못하도록 하는 능력이 있는 자이어야 한다. ④ 사소한 학습은 직접 교육시키고 초보적인 범행(梵行)과 율(律)을 지도할 수 있으며, 이견(異見)이 있을 때는 법(法)에 따라 처리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 ⑤ 계율에 대해서 상세히 알며, 죄의 경중을 잘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자, ⑥ 계 · 정(定) · 혜(慧) · 해탈(解脫) · 해탈지견(解脫知見)이 몸에 배어 타인이 스스로 따라서 성취하게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 등이다.
화상의 의무를 화상법(和尙法)이라 하여 규정하고 있다. 화상은 설법 · 질문 · 훈계 등을 통하여 제자를 섭수(攝受:받아들여 가르침을 내려 줌)하고 사랑으로 보호하여야 한다. 제자가 바루〔鉢盂〕 · 법의(法衣) 등의 승물(僧物)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를 직접 주거나 다른 이로 하여금 주도록 하여야 한다.
대중생활(大衆生活)에서 제자가 화합을 깨뜨리면 대중의 뜻에 따르도록 지도하며, 병이 났을 때에는 간호를 하고, 이사를 하고자 하면 짐을 옮겨 주고, 나쁜 소견을 내면 가르쳐 버리게 하고 착한 소견에 머무르게 하는 등 의무를 지켜야 한다. 화상과 제자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와 같으며, 엄격한 규제 가운데 자애(慈愛)와 친애(親愛)의 정이 가득한 인격적 관계 위에 세워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법휘 징원(澄源)은 부처님 진리와 자비행의 맑은 근원이라는 의미이고, 법호의 ‘돈후(敦厚)’는 유학의 총론인 <<중용>> 제27존덕성장(尊德性章)에 나오는 말이다. 유·불의 융합을 잘 보여주는 호이다. 후덕한 덕성(慈悲行)과 깊은 학문(禪敎學)을 겸비하라는 의미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봉화의 처가로 가면서 도산서원에 들렀다가 퇴계 선생의 웅혼하고 점잖은 붓글씨를 사왔다. 손자 안도의 소장인이 찍힌 그 글씨 ‘敦厚崇禮(돈후숭례)’를 액자로 표구하여 전세 얻어 사는 단칸방에 걸어두고 살았다.
아~ 위대하도다! 성인의 도여! 성인의 도는 지상 어느 곳에나 흘러넘치는 듯하여 만물을 잘 발육시는도다! 만물이 드높게 자라 하늘에 이르도록! 성인의 도는 진실로 넉넉하고 크도다! 예의가 삼백 가지나 되고, 위의가 삼천 가지나 되는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람을 기다린 연후에나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는 모이어 결정되지 아니 한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반드시 問學을 통하여 도를 실천한다. 광대함을 지극히 하는 동시에 정미함을 극진하게 탐구하며, 고명함을 극한까지 밀고가는 동시에 일상적 중용의 길을 걸어가며, 옛것을 내면에 온양(溫釀)시키는 동시에 사회적 예를 존숭한다. 그러므로 덕성과 학문을 겸비한 자는 윗자리에 거해서는 아랫사람에게 교만하게 행동치 아니하며, 아랫자리에 있게 되면 윗사람을 배반치 아니 한다. 나라에 도가 있게 되면 언변으로 정사에 참여하여도 높은 지위에 오르기에 족하고, 날라에 도가 없으면 은거하여 침묵하여도 온 세상이 그를 용납하기에 족하다. 시에 가로되, “이미 도리에 밝은데 또 지혜까지 있으시니, 그 몸을 잘도 보전하시는도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大哉聖人之道! 洋洋乎! 發育萬物, 峻極于天.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待其人而後行. 故曰: “苟不至德, 至道不凝焉.” 故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古而知新, 敦厚而崇禮. 是故居上不驕, 爲下不倍. 國有道, 其言足以興; 國無道, 其黙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탑 앞에 세워진 동서 편의 문기둥에는 주련이 앞뒤로 들어 있었다. 앞면의 주련은 스님 생전의 모습을 표현하였고, 뒷면의 것은 입적 뒤의 경지를 칭송하고 있었다.
入不退金城 衣鉢優遊 隨機說法(東外)
물러남이 없는 금성(金城; 절)에 들어와,
스승의 법을 이어 깊이 공부하고,
상대에 따라 알맞은 법을 설하셨고,
登無進寶塔 春秋自在 任意參禪(西外)
나아감이 없는 보탑(寶塔; 깨달음)에 올라,
일생 걸림이 없었고,
뜻 가는 대로 참선을 하셨네.
西天掛錫 靈姥懸甁 何處去歸 澄源尊者(東內)
달마대사는 서천으로 주장자에 짚신 한 짝 걸고 가셨고,
신령한 노파는 병(甁)을 걸어 놓았는데,
어디로 돌아가셨는가 징원(澄源) 존자여!
舍利飛香 浮屠藏色 此城安住 敦厚高僧(西內)
사리는 향기가 날리고,
탑에 그 몸을 갈무리하였으니,
이 절에 안주하신 돈후(敦厚) 고승이여!
그런데, 지대석에 상다리를 조각하여 탑이 상 위에 모셔진 것처럼 보였다. 재작년 12월에 미영샘의 팔공산 기성리의 농장에 찾아갔다가 보았던 통일신라 석탑 기단부의 안상(眼象)이 본래 상다리를 새긴 것이라고 한 계림샘의 설명이 기억났다. 앞에서 본 비석의 받침돌이나 비석의 귀부 밑에도 상다리가 있었고, 심지어 종을 설명한 안내석에도 상다리를 조각하였다. 안상의 기원이 고귀한 것을 땅에 놓지 않고 상에 올려 두는 관념에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복연탑은 기단이 단순하게 장방형 돌을 쌓아 만들었다.
티엔 무 사의 입지가 남한강 가에 전탑이 서 있는 신륵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높이 솟은 푸억 주옌 탑(福緣塔) 서쪽 담장 곁에 서서 남서쪽을 돌아 흘러가는 흐엉강(香江)을 굽어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 옥빛 강물은 억만년을 말없이 베트남의 대지를 적시며 호호양양(浩浩洋洋) 하게 바다를 향하여 굼실굼실 흐르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가장 장쾌한 풍광이었다. 그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그 풍경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가슴에도 담았다.
절에서 나와 주차장의 화장실을 이용하려는데 가이드 흥이 지폐를 빌려주었다. 단위를 보니 1만 동이었다!
7
티엔 무 사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 흐엉강 남쪽에 있는 응우옌 황조의 뜨득(嗣德) 황제(1848~1883)의 능원(陵園)인 겸릉(謙陵)으로 갔다. 버스가 문 앞에 서자, 여인들이 중절모를 한 아름 안고 와서 5달러에 팔았다. 품질도 좋고 모양도 멋있는데 가격은 쌌다. 관유샘은 밤색의, 법련 거사님은 회색의 모자를 샀다.
겸릉은 구 시가지 경성(京城)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4킬로미터에 있는 향다현(香茶縣) 장춘사(場春社)의 겸산(謙山)에 위치한다.
능원의 문은 독립문을 닮았는데 삼층의 높은 지붕이 올려져 있어서 위용을 과시하였다. 문미에 ‘務謙門(무겸문, Vu Khiem Gate)’이라고 양각한 석재 편액이 박혀 있었다. 무겸문을 들어서니 호수 가의 안내판에 뜨득 능원의 약도와 안내문이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이 안내문과 일본인이 <<대남일통지(大南一統志)>>를 인용하여 설명한 글을 읽어보았다.
우리가 간 곳은 뜨득 황제의 겸릉(謙陵)과 르 티엔 안 황후(Le Thien Anh, 儷天英皇后)의 겸수릉(謙壽陵) 능원이다. 1864~1867년에 3년 공사를 하여 겸산(謙山) 아래에 조성한 이곳은 처음에는 이궁(離宮)이었고, 황제 사후에 능원이 되었다. 능원은 1,500미터의 석재 담장(城壁)으로 둘러쳐져 있고, 12헥타르의 부지에 50개 건물이 침전과 능묘 2구역에 있다. 능원 출입문은 서쪽에 무겸문(務謙門), 남쪽에 상겸문(尚謙門), 동쪽에 자겸문(自謙門)이 있다.
능원의 남쪽에는 1.5헥타르의 면적의 유겸호(流謙湖, Luu Khiem Lake)가 있는데 호수가 동북쪽으로 좁고 길게 이어진다. 호수의 북쪽 가에 유겸사(愈謙榭, Du Khiem Pavilion)가, 호수의 동쪽 가에 충겸사(冲謙榭, Xung Khiem Pavilion)라는 정자가 있다. 여름에 연꽃이 가득 피어나면 정자에서 물가로 내려갈 수 있는 작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호수의 동쪽에 3개의 다리가 있는데, 순겸교(循謙橋)・천겸교(践謙橋)・유겸교(由謙橋)이다. 호수 가운데에 부겸도(浮謙島, Tinh Khiem Islet)라는 작은 섬이 있으며, 섬에는 아겸정(雅謙亭)・표겸정(標謙亭)・낙겸정(樂謙亭)이 있다. 호수와 정자와 다리와 섬과 나무와 연꽃이 어우러져 드라마틱한 풍경을 연출한다.
능원의 서쪽에는 침전(寝殿)이 있고, 그 동북쪽에는 능묘가 있다. 중국 고대에 능묘에 제사를 위한 건물인 침전을 같이 설치하였다. 명대에는 침전의 뒤에 능묘를 일직선으로 설치하는 직렬식(直列式)으로 배치하였다. 베트남 응우옌 황조에서는 민망제(明命帝)의 효릉(孝陵)이 명대의 능침제도를 받아들여 일직선으로 배치하였지만, 티에우 찌 황제(紹治帝, 재위 1841~1847)의 창릉(昌陵)에는 능묘와 침전을 나란히 배치하는 병렬식(並列式)으로 배치하였다. 이후 카이딘 황제(啓定帝, 재위1916~1925의 응릉(應陵)이 직렬식으로 정할 때까지 병렬식이 정식(定式)이 되었다.
침전의 정면에 상부에 작은 누각이 있는 겸궁문(謙宮門, Khiem Cung Gate)이 있다. 문 안의 중앙에 뜨득황제의 위패를 봉안한 화겸전(和謙殿, Hoa Khiem Temple)이 있다. 화겸전의 좌우에 예겸랑(禮謙廊), 법겸랑(法謙廊)이 있고, 화겸전 북쪽에 양겸전(良謙殿, Luong Khiem Temple)이 있다.
양겸전은 정전(正殿)과 전전(前殿)이 한 전각을 이루는 베트남 특유의 이중연결식(二重連結式) 건물로 되어 있다. 양겸전의 동편에 오페라를 상연하는 명겸당(鳴謙堂), 서편에 황제의 옷이나 비품들을 보관하는 온겸당(温謙堂)이, 뒤쪽의 좌우에 종겸원(従謙院), 용겸원(用謙院)이 있다. 양겸전의 후방에 익겸각(益謙閣)이 있고, 또 궁문의 좌측에 지겸당(至謙堂)이 있다. 지겸당의 우측에 의겸원(依謙院)과 지겸원(持謙院)이 있다.
침전의 동북쪽에 뜨득 황제의 능묘가 있다. 뜨득 황제 생전의 이궁이 황제 사후 뜨득 36년(1883)에 능 이름을 겸릉이라 하였다. 현궁(묘실) 아래에 널을 파고 그 위에 석관을 설치하였고, 석관 앞에 석궤(石几)를 두었다. 황제의 시신은 석관에는 없고 현궁에 안치되었다.
능묘 둘레에 담장(葆城)이 있고 전방에 동비(銅扉;구리문)가 설치되었으며 담장 밖에 비정(碑亭)이 세워져 있으며 그 좌우에 화표주(花表柱)를 설치하였다. 배정(拜庭)에는 계단이 있는데 앞에 시위(侍衛), 코끼리, 말이 늘어 서 있다. 능묘의 남쪽 바깥에 소겸지(小謙池)가 있는데, 유겸호의 물을 끌어들였다.
르 티엔 안 황후(Le Thien Anh, 儷天英皇后)의 경수릉(謙壽陵)은 담장 안에 있는데, 겸릉의 오른쪽에 있다. 성태(成泰) 14년(1902)에 겸수릉이라고 하였다. 능의 현실(玄室)에 널을 두었고, 담장(葆城) 앞에 배정(拜庭)으로서 계단을 설치하고 좌우에 화표주를 세웠다. 주변에는 석조 난간을 설치하고, 화분을 두었다.
쟌똥 끼엔 푹 황제(簡宗毅皇帝)의 배릉(陪陵)은 겸릉 안에 있는데 겸수릉의 동쪽에 있다. 뜨득 황제의 생질인데 양자가 된 끼엔 푹 황제(Kien Phuc 建福, 재위 1883~1884)의 능묘이다. 겸릉을 둘러싸는 담장(城壁)에 좌산(左山)이라고 부르는 인공의 작은 산을 쌓았는데, 그 위에 배릉이 있다. 배릉이라는 이름처럼 겸릉에 딸린 모양으로 규모가 작다. 끼엔 푹 원년(建福, 1885)에 능명을 배릉이라고 하였다. 현실에 늘을 설치하고 보성(寶城)으로 두른 것은 겸릉과 같은 제도이다. 침전은 능묘와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정전은 끼엔 푹 황제의 위패를 봉안한 집겸재(執謙斎)이고, 앞쪽에 전전(前殿)이 있다. 집겸재는 침전으로서는 집겸전(執謙殿)이라 하지만, 후방에 미겸루(彌謙樓)가 있다.
겸릉에는 ‘겸손할 겸(謙)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33번이나 등장한다. 겸산 아래에 능원을 조성하였기에 이름에 모두 겸자를 넣었던 것일까? 뜨득 황제는 생전에 겸손의 미덕을 가졌던 황제이었을까? 진경산수화를 대성한 정선의 아호는 겸재이다. 정선은 주역을 통해 음(흙산)과 양(바위산)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 땅을 그려내는 산수화 화법을 완성하였다. 퇴계 선생이 고종명(考終命)을 할 때 제자들이 주역점을 치니 괘사가 ‘謙, 亨. 君子有終.’이었다. 도올 선생은 이 괘사를 “겸의 덕성을 지닌 자는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다. 신에게 제사지낼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사람들과 제사음식을 같이 향유할 수 있다. 군자는 이 괘의 괘주인 제3효에 해당된다. 강정(剛正)한 군자로서 오만에 빠지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군음(群陰-5개의 음효)을 거느린다. 이러한 군자의 겸손한 덕성은 끝까지 변치 않는다”라고 풀었다(<<도올주역강해>>).
간하곤괘(艮下坤上)의 지산(地山) 겸괘(謙卦)에 대하여 역경 <대상전(大象傳)>에는 “땅속에 높은 산이 들어있다. 그 모습이 겸괘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낮은 자세 속에 높은 덕이 가려져 있다는 뜻이다. 군자는 이 겸괘의 모습을 본받아 많은 것을 덜어내어, 적은 것에 보태고 사물의 높고 낮음을 잘 저울질하여 그 베풂을 평균적으로 행한다. 이것은 공평한 정치를 행한다는 뜻이다(地中有山, 謙. 君子以裒多益寡, 稱物平施.)”라고 하였다.
부자 감세를 하여 천문학적 세수 부족을 초래하고, 물가가 올라 실질 월급이 감소하고 서민의 살림살이가 강퍅해지며, 아이엠에프 금융위기 시기에도 없었던 연구개발 예산이 삭감되고, 항의하는 학생을 ‘입틀막’하는 ‘왕’이 어느 나라에 살고 있다. 응우옌 황조의 황제 중 가장 오래 통치한 뜨득 황제의 겸릉에 와서 겸괘의 가르침을 겸허하게 배워야 할 사람이다.
겸괘는 주역 64괘 중에 거의 유일하게 육효가 모두 좋은 사람들뿐이다. 한 효도 나쁜 효가 거의 없다. 동방인의 문화에 있어서 겸양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가치인가를 말해준다. 고조선대륙의 사람들은 용맹스럽고 진취적이며 잘못한 자들을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넓은 빈 벌판처럼 그 마음이 항상 비어있고 겸손하고 서로 양보할 줄을 알았다. 한국인의 품성은 아직도 이런 공동체정신의 기반 위에 있다(도올주역강해).
여행기를 쓰며 자료를 검색하니 화겸전에 걸린 그림 액자에 티에우 찌 황제의 제화시(題畫詩)가 쓰여 있었다. 티에우 황제가 이궁인 이 곳에 늦가을날에 행차하여, 충겸사에서 태평소 연주를 들었거나 명겸당에서 상연된 오페라 공연을 시청하며 지은 시로 보인다. 당나라가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하여 서쪽의 토번이나 돌궐 같은 북방의 유목 민족과 전쟁을 거듭하던 시기에 장안성의 역관들이 부르던 서역의 ‘마하곡’을 태평소로 연주한 장면을 보고 읊은 시이다. 태평소는 우리의 농악에서 화음 악기로 가락을 이끌고, 음역이 높아서 예전에는 군대에서 신호용으로 쓰던 악기이다. 충무공의 시조에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에서 호가가 태평소인데, 중앙아시아에서 전래한 악기이다. 시와 태평소 연주, 이궁은 응우옌 황조의 황실 문화와 격조를 잘 보여주었다. 신라의 동궁과 월지와 닮은 명소가 겸릉이었다.
御製 秋咏
황제가 지은 시. 가을을 읊음
胡笳
태평소 곡조
西京(言魯)(諸)譯自延年
장안성의 여러 역관 절로 장수하여,
原就摩訶一曲傳
원래 익혔던 마하 한 곡을 전하네.
撥霧征鴻聲嘯葉
안개를 헤치며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소리 나뭇잎 퉁소이고,
嘶風邊馬駭吹莄(?)
울부짖는 바람에 변방의 말 놀란 울음 풀피리이네.
登樓此調情懷切
누각에 올라 듣는 이 곡조는 정회(情懷)를 절절하게 하고,
出塞之聲氣慨然
변방으로 나가는 소리 기개가 그러하였네.
德化仰憑遺烈在
덕화를 우러러 의지하는데 선황(先皇)의 남긴 매움이 있고,
于斯永見息狼煙
여기서 길이 낭자한 연기를 보네.
紹治乙巳恭錄
티에우 찌 을사년(1845)에 공손히 씀
8
유겸호의 첫 인상은 정말 아름다웠다. 호수 가운데에 나무가 무성한 섬이 있고 호수 가에는 정자가 있어서 그 운치가 그윽하여 단박에 여행자의 몸과 마음은 상쾌해졌다.
황제의 생전 공간을 보여주는 침전은 능묘에 딸린 건물이라 여기고 호수 가를 따라 동북쪽의 능묘로 갔다. 능묘는 황제의 사후 공간이다.
계단을 오르니 배정이 나왔고, 좌우에 각기 문신 2명, 무신 2명, 말 1마리, 코끼리 1마리의 석상이 있었다. 사모(紗帽)·단령(團領)·혁대(革帶)·흑화(黑靴)의 복식을 한 문관이 홀을 두 손으로 잡고 있고, 투구를 쓴 무신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문관복에는 용 무늬가, 무관복에는 귀면 무늬가 들어 있었다. 석상들은 도열하여 영원한 안식에 든 황제의 영혼에 예를 표하고 있었다. 능묘의 담장은 섬세한 무늬가 들어가 있고 투각된 녹유전(黃釉塼)과 석재로 쌓고 녹유(綠釉) 막새기와로 마감하였는데, 화려하고 섬세하기 그지없었다.
배정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니 웅장한 비정(碑亭)이 나왔다. 비정은 사방에 아치문이 나 있고 이층 기와지붕을 올리고 역시 섬세하게 투각된 벽돌을 가지고 외벽을 쌓고 내부에는 황제의 색인 황색으로 칠하고 운룡문을 그려진 기둥이 있었다. 상(床) 무늬 받침석에 용 무늬 머리돌을 올린 큰 비석은 한자가 작아서 내용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비 앞의 영문 요약문을 읽어보았다.
황제는 어릴 적부터 즉석에서 시를 짓는 재능을 보였기에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아서 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몸이 약하였고 20세에 천연두를 앓았다.
황제에 즉위하기에는 나라가 침략에 직면해 있고, 그는 아직 어렸고 몸이 약했다. 그는 나라를 위하여 그의 형제들을 탄핵하였다. 남베트남에서 프랑스에게 패전한 것도 약점이 되었지만 그것은 오랜 평화로 인하여 관료들이 비겁하고 게을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그를 억눌렀고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주변의 가족들이 사는 건물과의 연계성과 풍수학의 원리 때문에 겸릉의 위치를 여기에 자리잡았다. 이런 까닭으로 건축물들이 복합된 이곳을 겸궁이라 이름하였고, 황제 사후에 겸릉이라 하게 되었다. 이 구역의 모든 건축물들은 겸자로 명명되었다. 이 복합 공간을 건축하는데 참여한 관리, 군인, 노동자들은 급료를 제대로 받았다.
그는 부끄러움이 많고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도덕과 신중함에 대해서는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는 태도와 황제의 책무를 수행함에 겸양의 미덕을 가졌다.
비문은 문자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의 견해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문을 읽는 사람들이 그의 생각들을 이해하지 않았다면,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문 요약
황제는 민망 황제의 제도를 따르고 별다른 개혁을 하지 않았다. 응우옌 황조의 실록인 <<대남식록(大南寔錄)>>, 응우옌 황조의 인물평전인 <<대남열전(大南列傳)>>, 베트남 역사의 기원부터 레 왕조 말까지의 편년체 역사서인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 베트남의 지리와 풍물을 기록한 <<대남일통지(大南一統志)>> 등의 책을 편찬한 것은 최대의 업적이었다. 즉위 첫 10년 동안 전국에서, 특히 북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에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 겸릉을 조성하는 공사를 벌이는데 불만을 품은 관리들이 1866년에 황제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반란으로 황조는 쇠락하게 되고 근대식 무기를 가진 제국주의 프랑스에게 굴복하게 되었다.
비정의 뒤에 화표주가 좌우로 높이 서 있었다. 영문 안내판을 보니 화표주를 오벨리스크로 적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나 중국의 화표주와 다르게 이집트 피라밋 앞에 세워졌던 오벨리스크와 닮았다. 오벨리스크가 중국의 화표주의 연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건축에 시멘크를 쓰거나 오벨리스크를 닮은 화표주는 서양의 문화를 일찍부터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비정 뒤로 가니 반달 모양의 연못, 소겸지(小謙池)가 나왔다. 황매화 나무의 가지마다 빗방울이 맺힌 샛노란 꽃이 피어나 있었다. 소겸지를 돌아서니 병풍처럼 입구를 가리는 병풍체(屛風砌, 照壁)이 있었다. 수(壽)자가 큼지막하게 원안에 들은 장식으로 들어 있는 화려한 조벽 뒤에 집 모양의 장방형 석곽(石槨)이 있고 그 앞의 석궤(石几) 위에 향 심지들이 꽂혀 있는 향로가 놓여 있었다. 겸릉에는 어디나 꽃과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싱그러운 숲이 능원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9
겸릉에서 돌아나와 동남쪽에 있는 응우옌 황조 12대 황제인 카이딩 황제(재위 1916~1925)의 응릉(應陵)으로 갔다. 응릉은 공사 기간이 11년(1920~193)이었다. 프랑스 현대 건축의 재료인 시멘트, 철, 강철, 청회색돌(Ardoise)과 베트남 전통의 모르타르(회), 테라코타 등을 가지고 지었다. 응릉은 0.75헥타르의 면적에 세로 117미터, 가로 48.5미터이며 계성전(啓成殿)은 유럽 중세의 성채 모양의 건축물이다. 프랑스에 의하여 옹립된 카이딘은 1922년 마르세유에서 열린 식민지박람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왕궁의 건중전(建中殿)을 바로크 양식으로 지었다. 계성전 역시 유럽 귀족의 저택처럼 지었다. 베트남은 우기에 비가 많이 내리는 열대 지방인지라 여기도 시멘트로 지은 건물에 이끼가 쓸고 색이 모두 검게 변해 있었다.
가파른 계단은 4개의 용(카라) 조각이 3칸으로 나누어 놓았다. 계단 위에 3문이 있다. 가운데 문에는 현대식 철 대문이 달렸다. 첫째 테라스 좌우에는 경비 인력이 머무는 집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3문의 패방(牌坊)이 있고 그 안쪽의 테라스에 너른 배정이 조성되어 있었다. 배정의 앞 부분에는 좌우로 각기 문관 2명과 무관 2명이 앞줄에, 농을 쓴 병사 6명, 말 1마리, 코끼리 1마리가 뒷줄에 서 있었다. 배정의 뒷 부분에는 가운데에 화려한 비정이 있고, 그 좌우에는 첨탑 모양의 화표주가 있었다. 비문은 글씨가 작고 잘 드러나지 않아서 읽을 수가 없었다. 다시 계단을 통해 2곳의 테라스를 오르니 5째 테라스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계성전이 나왔다. 좌우의 아치형 출입문과 가운데에 3개의 창문이 아치형으로 나 있었다.
침전과 능묘를 겸하고 있는 계성전 안으로 들어가니 좌우에는 경호원을 위한 공간이고 중앙의 공간은 계성전이다. 계성전의 앞 부분 공간은 편액 밑에 카이딘 황제의 사진 액자를 위패 대신 모신 공간이 있었다. 사진 앞에 제단이 있었고, 사진 뒷부분의 공간은 황제의 금박 동상이 석곽 위에 올려져 있고, 동상 위의 천장에는 용 그림이 그려진 닫집이 있었다. 석관 아래 지하 9미터 공간에 시신을 모신 현궁이 있다고 하였다. 동상 뒤의 공간은 역대 선황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다. 계성전의 앞부분 공간의 천장에는 9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고, 사방 벽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연꽃, 모란, 필통, 붓, 화분, 서가 등 황제의 사후 생활 공간을 꾸미는 병풍 그림이 아시아 각국에서 가져온 도자기나 병의 조각으로 만든 모자이크로 만들어 놓고, 사방 벽에 주련도 있었다. 기둥이나 동상의 기단이나 제단 등에는 온통 용을 알록달록한 색깔의 도자기 파편을 박아 넣어서 모자이크로 그려 놓았다. 그 정교하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서쪽의 경호원 공간에는 황제가 생전에 소장하였던 각종 장식용 도자기, 사진, 황금 의자들이 있었다. 그중에 인상적인 것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승리의 여신이 월계수 가지를 들고 있는 도자기이었다. 전임 11대 황제가 프랑스에 대항하다 축출당하고, 프랑스에 의하여 옹립된 카이딘 황제는 친불파 인물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계성전에서 나와 앞을 굽어보니 역시 전망이 좋은 명당이다. 계성전 좌우 문에 붙여놓은 대련(對聯)을 읽어보았다.
四面獻奇觀 風景別開宇宙
사면에서 바치는 기이한 경치, 풍경이 또 다른 우주를 열었고,
億年鍾旺氣 江山長護儲胥
억만년 모인 왕성한 기운, 강산이 길이 지키고 쌓아서 기다렸네.
風景無邊 萬狀神奇天作合
풍경은 끝이 없고, 만상은 신기하니 하늘이 만들어 모아 놓았고,
江山有主 千秋福蔭地留餘
강산은 주인이 있고, 천추의 그윽한 복을 땅이 남겨 두었네.
10
카이딘 황제의 응릉을 보고 나와 이번에는 서쪽으로 흐엉강을 건너 민망(明命) 황제(1821~1840)의 능원인 효릉(孝陵)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 숲과 풀밭이 있는 평지를 걸어 들어가니 독립문에 삼층의 지붕을 올린 좌홍문(左紅門)이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언덕처럼 보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아주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물과 산과 숲이 어우러진 풍경에 마음이 저절로 평화롭고 윤택해졌다.
배정(拜庭)에는 서쪽의 높은 단 위에 비정(碑亭)이 있고 그 아래 좌우에 각기 유리상자에 들은 청동 기린, 문관석2(남쪽), 무관석2(북쪽), 칼을 든 시위석3, 마석(馬石)1, 상석(象石)1이 도열해 있었다. 비정의 비석은 상을 조각한 받침 위에 세워져 있는데, 본래는 글씨에 금칠을 하였다고 한다. 비정을 지나서 4단의 테라스를 올라서 황색 유리 기와의 지붕 가운데에 다시 작은 지붕을 올린 현덕문(顯德門)이 솟아 있다.
테라스의 가운데에 열 지어 놓여 있는 큰 화분에는 분홍색 베고니아꽃이, 분재에는 동백꽃처럼 생긴 붉은 꽃이 비를 맞아 더욱 신선하여 보였다. 현덕문을 들어서니 이중처마의 침전인 숭은전(崇恩殿)이 있었다. 숭은전 마당에도 청화백자 화분에 분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황제와 황후의 영혼을 모시는 침전의 내부는 생전의 생활 공간만큼이나 화려하였다.
붉은 칠을 한 기둥에는 금색으로 구름과 용 무늬가 그려져 있고, 바닥은 황색, 흑색의 타일에 가까운 벽돌이 깔려 있었다. 붉은 색과 노란 색을 칠한 벽에는 화초와 함께 황제의 시구(詩句)들이 곳곳에 들어 있어서 특이하였다. 시구들은 심지어 용마루에도 화초나 ‘壽(수)’, ‘囍(희)’, ‘福(복)’ 같은 여러 가지 길상 문자, 비파, 포도, 부채 등의 길상 문양과 함께 들어 있었다. 비정의 이층 외벽에는 화병과 시구가 번갈아 들어 있었다.
“陰順陽調佳節候
(음양이 조화로운 아름다운 절기에,)
水淸石秀好風光
(물은 맑고 돌은 빼어나 좋은 풍광로다.),
膏漆樹色三分秀
(윤기 나는 수목의 모습은 세 푼 빼어나고,)
旭曳湖光一帶長
(해가 끄는 호수의 물빛은 하나의 긴 띠를 이루네.),
風恬氣靜澄池水
(바람은 잠잠하고 날씨는 고요하여 연못물은 맑고,)
雨洗塵淸秀石峰
(비가 씻고 먼지가 맑아서 돌봉우리는 빼어나네.)”
민망 황제가 얼마나 문예를 사랑한 군주였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벽에는 응우옌 황조의 바다와 섬의 주권을 명시한 문서, 황제의 옥새가 찍힌 회시(會試)의 고시관(考試官) 임명장 등 여러 가지 문서들, 민망 황제 생전에 사용한 법랑(琺瑯) 그릇, 민망 5년에 주조한 청동 드무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대남일통지(大南一統志)>>의 지도도 있었다. 오늘날 베트남의 지도에 한자로 지명이 동쪽 해안선을 따라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숭은전의 뒷문 계단을 내려가 다리를 건너 이층 누각인 명루(明樓)에 올라갔다. 삼단의 기단 위에 벽돌로 벽을 쌓고 황유리 기와 처마를 두르고 그 위에 목조 이층집을 올리고 황유리 기와 지붕을 올렸다. 용마루에는 용과 보병(寶甁)을 올려 화려하게 장식을 한 건물이다. 황제의 영혼이 올라서 주변 경관을 보며 휴식하는 공간이다. 명루에서 다시 서쪽 계단을 내려가니 초승달 모양의 신월지(新月池)가 있고 그 가운데에 총명정직교가 놓여 있었다.
다리의 앞뒤에 철로 만든 방문(坊門)이 서 있는데, 앞쪽 문에는 ‘正大光明(정대광명)’, 뒤쪽문에는 ‘聰明正直(총명정직)’이라는 편액이 들어 있었다. 다리 건너편에 소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며 자라 있는 큰 봉분이 보였다. 다리가 불편하고 주변에 일행들도 보이지 않아서 황제의 능을 바라보기만 하고서 거기서 돌아 나왔다.
신도의 남쪽 모서리와 징명호의 북쪽 테두리 사이의 길을 따라 배정까지 걸어 나왔다. 호수와 숲과 풀밭이 어우러지는 능원을 우산을 쓰고 걸어 나오니 나무 아래 호수 가에는 보라색 루엘리아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나 있었다. 언덕 위에는 오벨리스크를 닮은 화표주가, 징명호(澄明湖)의 남쪽 호안(湖岸)에는 반원형의 진수도(鎭水島)에 허회사(虛懷榭)가 있던 자리가 보였다. 찰나의 삶을 살고 억만년의 안식을 취하는 황제의 능원에는 정자와 호수와 산과 숲과 꽃이 어우러져 결코 쓸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 내리는 호수 가의 호젓한 오솔길을 걸어 나오자니 암탉이 병아리들을 품속에 품고 이방인을 경계하며 꼼짝을 않고 서 있었다. 어릴 적 봄날이면 콩깍지를 쌓아 둔 헛간의 둥지에서 암탉이 달걀을 품었고 마침내 병아리들이 부화하였다. 노랑털이 난 병아리들을 데리고 뒤란의 장독대 곁 담장 밑에서 부지런히 흙을 파헤치며 새끼들을 키우던 암탉이 생각났다. 민망 황제의 금계산(錦雞山) 효릉(孝陵)에서 50년 전 내 고향집의 봄날 풍경이 불현듯 소환될 줄은 몰랐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품고 있는 지극한 모성애의 그 모습은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흐믓하고 고귀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베트남 여행에서 본 수탉들은 한결같이 몸집이 작고, 다리가 묶여 있거나 조롱에 가둬져 있으며, 빗속에서 생기를 잃고 힘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사람도 여자들이 생업을 책임지고 남자들은 동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하였다. 내란과 외침이 끊이지 않아서 남자들은 전쟁터에 끌려 나가 희생된 사람이 많아서 그러한 문화가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에서 돌아와 수박 겉핥기로 관람하며 촬영해온 사진들을 보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가이드 윤 실장은 국적이 베트남이 아니라서 버스에서 주로 설명하고, 현장에서 문화유산을 보며 길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민망 황제와 효릉과 관련된 자료들을 구글 베트남에서 검색하여 읽어보았다. 현장에서 촬영한 영문 안내판은 간략하기도 하지만, 한문으로 명명된 건축물의 이름이나 개념어 들이 모두 알파벳으로 되어 있어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본어 자료, 유인선의 <<베트남의 역사>> 외에 효릉을 주제로 쓴 김지혜의 미술사학 석사 논문(2019년 서강대)이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국력이 베트남 문화유산 연구에까지 미치고 있어서 반가웠다.
민망 황제는 1832년 참파를 병합하고 남북 베트남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1838년 청과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호를 비엣남(越南)에서 다이남(大南)으로 바꾸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남교단(南郊壇)을 황성 남쪽에 짓고, 캄보디아에서 시암 세력을 축출하고 캄보디아를 통제하에 두며, 청과 대등한 입장에서 제국 질서를 추구하였다. 아편전쟁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만큼 국제 사정에 밝았지만, 후대 황제들은 조공과 책봉이라는 유교적인 세계관과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폐쇄적이었다. 이는 프랑스 등의 열강 세력과교역 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였다.
그는 문예 군주로서 청의 건륭제 시가 정경(情景)을 그대로 묘사하고 시어(詩語)가 다듬어지지 않다고 비평하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어린이들에게 <<충경(忠經)>>, <<효경(孝經)>>, <<소학(小學)>>을 가르치게 하고 <<명명정요(明命政要)>>를 저술하여 자신의 유교 이념을 밝히고, 지배계층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른 가례와 가훈을 보급하였다. 각지에 문묘(文廟)를 세우고, 1834년에는 ‘敦人倫(돈인륜, 인륜을 돈독히 함)’, ‘崇正學(숭유학, 유학을 받듦)’, ‘愼法守(신법수, 행동에 신중하여 법을 준수할 것)’ 등의 10조 훈요(訓要)를 반포하여 유교 통치 질서를 강화하였다. 민망제는 대내적으로 황제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응우옌 황조의 권위를 높였지만, 지방의 관리나 호족은 자신들의 권한이 축소되고, 농민들은 전쟁이나 군역에 동원되어 불만이 높아서 반란이 빈번히 일어났다. 농민에게 분배한 공전은 생계에 미치지 못했지만 세제 개혁이나 토지 개혁은 없었기에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민망제는 1826년에 자신의 능지를 구하기 위해 여러 사당에 금옥(金玉)을 바치고 길지를 찾아서 그림으로 보고하게 하였다. 1839년 여문덕(黎文德, Le Van Duc, 1793~1842)이 안빙읍(安憑邑) 금계산(錦雞山)을 능지로 보고하였고, 금계산을 효산(孝山)으로 명명하였다. 이때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841년 소치제가 능묘 조성을 이어갔고, 음력 7월에 시신을 안장하고 능호를 효릉이라 올렸다.
효릉은 경성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9킬로미터 거리에 있으며, 향다현(香茶縣) 안빙사(安憑社)의 금계산에 있다. 주례 등의 능묘 제도에 의하여 조성된 효릉은 명의 제도를 빧아들여 조성하였다. 효릉은 신도의 중심축에 배정, 비정, 침전, 능묘를 일직선에 두는 직렬식 배치, 봉분을 만드는 제도에서 뜨득 황제의 겸릉처럼 침전과 능묘를 좌우로 나란히 두는 병렬식과 석곽을 두는 능묘 제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카이딘 황제의 응릉은 직렬식과 석곽이 혼합되어 있다.
효릉의 전체 면적은 15헥타르이고, 효릉 둘레의 담장(城壁)은 전체 길이가 433장(丈, 1,732m)이고 높이는 3.6미터이다. 동서의 중심축인 신도(神道)에 40개의 건축물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문인 대홍문(大紅門)의 남북에 각각 조홍문(左紅門)과 우홍문(右紅門)이 있다. 대홍문을 지나면 배정(拜庭)이 나타난다. 이 배정의 좌우에 각기 청동기린, 석상, 석마, 석문관, 석 무관, 석시종이 도열해 있다. 배정 서쪽에 비정(碑亭)이 석대(石臺) 위에 있다. 비정 안에 민망 황제의 업적을 기록한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가 있다. 비정을 지나면 황제와 황후의 침전인 숭은전(崇恩殿)이 인공의 소산(小山)인 봉신산(奉宸山) 위에 있다. 숭은전의 동문은 현덕문(顯徳門)、서문은 홍택문(弘澤門)이다. 숭은전의 뒤쪽에 중도교(中道橋), 좌보교(左輔橋), 우필교(右弼橋)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명루(明樓)가 인공의 소산인 삼재산(三才山) 위에 있다. 명루의 뒤쪽에 초승달 모양의 신월지(新月池)가 있다.
신월지 가운데의 총명정직교(聰明正直橋), 우측에 언월석교(偃月石橋)가 있다. 총명정직교 동쪽에 정대광명(正大光明; 朱文公文集)이라고 쓴 패방이, 서쪽에 총명정직(聰明正直; 春秋左氏傳)이라고 쓴 패방이 세워져 있다. 총명정직교를 지나면 황제 능묘의 입구에 보성문(寶城門)이 있고, 그 안에 봉분(封墳)이 있다. 봉분의 지하에 황제의 시신을 안치한 지궁(地宮)이 있다. 봉분에 소나무를 심었고, 그 둘레에 보성(寶城)인 석벽(石壁)을 둘렀다.
신도(神道)의 동서 중심축 위에 있는 배정부터 명루까지의 좌우(남북)에 너른 징명호(澄明湖)가 있고, 징명호 바깥은 산이다. 좌우의 징명호를 연결하는 부분이 명루 앞이고, 그 위에 명루와 숭은전을 연결하는 3교가 있다. 봉분의 우(남)측에 의산(懿山) 우종방(右從房)이, 봉분의 좌(북)측에 정산(靜山) 좌종방이 있다. 좌종방 동쪽에 덕화산(德化山) 순록헌(馴鹿軒)이, 그 동쪽에 개택산(闓澤山, 園澤山) 영방각(靈芳閣)이, 그 동쪽에 도통산(道統山) 관란소(觀瀾所)가, 그 동쪽에 복음산(福蔭山, 福聚山) 추사재(追思齋)가, 숭은전 남쪽 징명호의 남쪽 호안(湖岸)의 진수도(鎭水島)에 허회사(虛懷榭)가, 명루 좌(남)측 징명호 물가에 조어정(釣魚亭)이 동향하여, 명루 우측(북)측 징명호 물가에 사의산(斜倚山) 영량관(迎凉館)이 동북향 하여 있었다. 신도 좌우의 이들 호수, 산, 정자 등이 효릉을 하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고 있다.
11
민망 황제의 효릉에서 돌아나와 버스는 이제 다낭으로 달려갔다. 하이번관 터널을 지나고 진주를 양식하는 석호가 바다처럼 넓었다. 산 기슭의 고가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창문 너머로 태평양으로 길게 뻗은 손짜 반도와 반달 모양으로 굽은 다낭만의 해안선과 도시의 건물들이 흐릿한 비안개 속에서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차가 멈춘 곳은 도로변의 큰 식당 앞이었다. 1,000명은 수용할 수 있는 큰 식당이었다.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식당의 정면에는 ‘경기도 다낭시 명동식당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수백 명의 한국 사람들이 줄을 서서 비빔밥 그릇에 음식을 담았다. 나는 상추, 양파 등의 채소를 고추장으로 비비고 카레를 얹어서 맛있게 먹었다. 월남 빈대떡인 반세오와 쌀국수·채소·고기 튀김을 함께먹는 분짜 같은 베트남 음식도 곁들여 맛보았다. 다낭에 오니 비가 개고 기온이 섭씨 20도 정도로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감기 기운이 가라 앉아서 밥맛이 좋았다. 점심밥을 먹고 나오니 식당 앞의 도로가에는 한국인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백색의 버스가 길게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점심밥을 먹고 1시간 30분 달려 간 곳은 참파국의 유적지, 미썬(My Son)이었다. 다낭의 서남쪽 4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탁 반 호(Thach Van Lake)로 흘러드는 하천의 상류 계곡에 미썬 유적지가 있었다. 투본 강 하구에 있는 호이안보다 위도가 조금 남쪽이다.
<임읍은 중국 한 대의 녓남군(日南郡)의 뜨엉 럼(象林에서 하이 번까지의 사이에 있었다. 참파국은 본래 임읍(林邑)인데 192년에 건국되었는데 중심지는 호이안 부근의 짜 끼에우(Tri Kieu; 참파어로 심하푸라Simhapura; ‘사자의 도시’)이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도와 가까웠기에 그 영향을 받았다. 해안선을 통하여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부남(扶南, 眞臘)과의 교류로 임읍의 문화는 인도화되었다.
임읍은 단일 국가가 아니라 베트남 중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한 소국들의 연합체이었는데, 인드라푸라(다낭 부근), 아마라바티(꽝남, 꽝응아이), 비자야(빈딘), 카우타라(Kauthara, 카인 호아, 나짱), 판두랑가(판랑) 등의 소국이 있었다.
284년에 중국의 오에 사신을 처음으로 파견하였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교주를 해안선을 통하여 자주 침략했다. 남조 송의 태수 단화지는 종각을 부장 삼아 임읍의 수도를 함락하고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10만 근이 넘는 황금불상을 약탈하고, 일남(녓남)을 되찾았다.
수는 603년 원정으로 이불자(李佛子)의 난을 평정하고 금은보화를 약탈하기 위해 605년에 임읍까지 침략하였다. 이때 수는 당주, 농주, 쑹주 등 3개 주를 세우고, 임읍의 18왕의 금상을 빼앗았고, 임읍왕 팜판찌는 수와의 조공관계를 회복하였다.
당 초기 당과 임읍의 관계는 사신 파견을 통해 안정적이었다. 653년 비크란타바르만이 즉위하였고 아들 비크란타바르만 2세까지 국가 통치는 안정적이어서 미썬(My Son)에 많은 사원이 세워졌고, 지배 영역이 남으로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국호 임읍 대신에 환왕(環王)과 빈동룡(賓童龍)이 사서에 나타나고, <<월남사기전서>>에는 858년을 기점으로 국호 참파(占城)을 사용하였다.
참파국은 당 말에 국호를 점성으로 고치고 전성기를 맞았다. 영토를 하이번에서 화잉썬까지 확장하고 수도를 꾸앙 남(Quang Nam)성 탕빙(Thang Binh)현의 인드라푸라(Indrapura; 다낭 부근)에 정하고 궁전, 사원, 사탑을 세우고 875년 대승불교도 받아들였다. 이후 송과 다이 꼬 비엣의 딩왕조와 대외관계를 맺었다.
982년 레환은 점성의 수도 인드라푸라까지 친정하여 성지와 궁전을 파괴하고 무수한 금은보화를 빼앗고 많은 포로를 잡아왔다. 독립왕조 기간 처음으로 점성을 침략한 전쟁이었고 처음으로 민족주의를 드러낸 전쟁이고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을 침략한 전쟁이었다. 이후부터 점성은 베트남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하여 1697년 멸망 때까지 쇠퇴의 길로 빠졌다.
1301년 참파는 쩐 왕조에 사절을 보냈고, 곧, 상황 년 똥(仁宗)이 참파를 방문해 9개월을 머물렀다. 심하바르만 3세는 년 똥의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다고 하였고, 녀 똥은 이를 받아들였다. 쩐 왕조의 문인들은 중화관념으로 야만에게 공주를 보낼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고, 심하바르만 3세는 1305년 100여 명의 사절단을 보내 금은보화를 혼례 예물로 보내고, 오(烏 꽝 찌)와 리(Thia Thien Hue 里) 2성의 할양을 제의했다. 1306년 후옌 쩐(Huyen Tran 玄珍) 공주가 참파로 출가하자 문인들은 국어시로 공주를 한나라 때 흉노족에게 시집간 왕소군(王昭君)에 비유하여 풍자했다.
오와 리 두 주가 아무리 넓다고 하여도
후옌 쩐 공주 한 사람이 그 수십 배의 가치가 있는 것을
다음 해에 두 주는 각기 투언 쩌우(Thuan Chau 順州), 호아 쩌우(Hoa Chau 化州)로 바꾸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영토는 중부의 요충지인 하이 번 관(deo Hai Van 海雲關)까지 확대되었다. 심하바르만 3세가 1년 만에 죽자, 참파 풍습대로 왕비도 산채로 왕과 함께 화형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쩐 칵 쭝(杜克終)을 조문단으로 파견하여 공주를 구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참파는 이 지역을 되찾고자 계속 도발을 하였다.>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에서
발췌
이 사건을 소재로 틱낫한 스님은 동화, <<Hermitage Among the Clouds>>(고정아 옮김 ·김수경 그림, <<미소 짓는 두 스님>>, 파랑새어린이, 2003)를 썼다. 베트남이 20만 명의 군대를 캄보디아에 보낸 일에 ‘베트남의 아들과 형제 수십만 명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땅에서 죽고 죽이게 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스님이 공주를 평화의 사도로 묘사하였다. 탈출한 공주는 출가수행자가 된 아버지, 죽림(竹林)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비구니가 되어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는 줄거리이다.
<쩐 왕조의 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참파왕 쩨 봉 응아(Che Bong Nga 制蓬峨)가 1360년에 등장하여 그의 치세 30년 동안 쩐 왕조는 참파의 침입을 받았다. 1390년에 그는 탕 롱을 향하여 북진하던 중 질책을 받은 신하가 변심을 하여 그가 탄 배를 쩐 진영에 알려주었다. 쩐 왕조의 군사는 화총(火銃)으로 그 배를 집중 공격했고, 그는 전사했다. 화총의 사용으로 두 세력 간의 힘의 균형은 깨지고 베트남쪽으로 기울게 됐다.
베트남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과 안정의 시대를 열었던 레(黎) 왕조의 타인 똥(聖宗)은 유교이념을 강조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참파가 사대를 거부하며 1470년에 10여 만의 군대로 호아 쩌우를 습격했다. 타인 똥은 참파의 침공을 끝내고 참파를 유교화하기 위하여 26만의 군대를 동원했다. 비자야를 함락하고 왕과 처첩을 생포하였고 3만여 명을 포로로 잡고, 4만여 명이 살육당했다. 참파 장군 보 찌 찌(Bo Tri Tri, 보지지)눈 판두랑가(Phan Rang 판랑)로 도망가서 참파 왕을 칭했다. 이후 참파는 본래 영역의 5분의 4를 찾지 못했다.
응우옌 호앙이 남쪽 변경에 군사를 집중시키자 참파는 1611년 꽝 남 남변을 공격했다. 이에 응우옌 호앙은 꾸 몽 관을 넘어 푸 옌 성을 점령하고 지배했다. 1653년 참파 왕이 푸옌을 침범했고, 응우옌 푹 떤(Nguyen Phuc Tan 阮福瀕)은 참파인 훙 록(Hung Loc 雄祿)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3,000명의 군사로 참파군을 공격하였다. 참파 왕은 기습 공격에 도주하여 판 랑 강(song Phan Rang 潘郞江)에 이르러 항복하였고, 판랑강 이북은 응우옌씨가 지배했다. 참파는 도읍을 남쪽 빈 투언 성(tinh Binh Thuan)의 판 리(Phan Ri)로 옮겨야 했다.
응우옌씨가 카우타라를 점령한 지 39년이 지난 1692년 판두랑가의 참파 왕이 카우타라를 침범하여 주민을 약탈하였다. 1693년에 응우옌 푹 쭈(阮福淍)는 군대를 보내 참파 왕을 생포하고 판두랑가를 영토로 편입시켰다. 판두랑가는 베트남식 이름으로 개명되고, 참파 왕의 동생과 그의 세 아들을 관리로 임명되었으나, 참파인은 베트남식 복식의 착용 등 베트남화를 강요당했다. 그러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이듬해 참파 왕의 동생을 번왕(藩王)으로 삼아 자치를 허용했다.
1832년 10월 민 망 황제는 빈 투언 성(省)에 판두랑가를 통합했다. 이로써 참파 왕국은 멸망하였다.>
-유인선, <<베트남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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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티켓을 살 때까지 기다리며 미리샘이 가져온 타이레놀 감기약 두 알을 얻었다. 햇빛은 화창하였지만 기온은 조금 차가웠다. 걸어서 붉은색 벽돌로 쌓은 아치 쌍문이 세워져 있는 다리를 건너서 미썬 유적지로 들어가는 전동차를 나누어 탔다. 유적지 입구에서 내려 다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길가에는 맷돌을 닮은 요니와 링가를 겹쳐 놓은 식수대가 보이고, 반갑게도 봉선화 꽃밭도 있었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계곡에는 황토물이 가득 흘러내렸다.
유적 입구에 춤 공연장이 있었다. 벌써 관광객들이 좌석을 가득 채웠다. 나는 뒷자리 기둥 뒤의 자리에 앉아서 보았지만 앞이 가려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달마다 음력 16일에 공연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춤 공연은 신들이 사는 미썬 계곡의 전설, 그 연대기를 재현한다는 광고판이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긴 옷을 입은 아가씨들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추는 춤, 머리 위로 불쑥 솟은 모자와 배꼽과 사지가 드러나는 옷을 거친 남녀 무용수들이 어울려 손가락과 발가락을 섬세하게 놀리면서 우아하고 섹시한 춤을 추고, 수건을 머리에 두른 악사들이 북과 피리를 연주하였다. 성덕대왕신종의 헌향천상과 닮은 의상을 하고 압살라 춤을 추는 여인들은 비천이 천상에서 하강하여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머리띠를 두른 남자 악사는 태평소와 닮은 악기를 부는데 호흡이 얼마나 긴지 1분가량을 길게 소리를 내었다.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져 간 참파국의 문화를 그 공연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미썬 계곡은 산으로 에워싸인 곳으로 추위와 바람과 더위가 없어서 신들이 편안하게 거주하는 신성한 장소이었다. 계곡 북쪽에 동서로 3기, 남쪽에 1기의 힌두교 사원 유적이 분포하였다. 놀랍게도 이곳에도 폭탄이 투하되었고 4곳의 구덩이가 신전 유적에 남아 있었다.
3년 전에 인도네시아를 답사하며 크고 작은 많은 힌두교 신전 유적을 보았기에 미썬의 힌두교 사원 유적에 큰 흥미는 느끼지 못하였다. 온전한 건물이 없었다. 밖에 노출된 연꽃 받침의 링가, 참파 문자로 된 비석들이 있고, 벽면에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만큼 파괴된 압살라도 보였다. 링가는 시바신의 화신인 동시에 왕권의 상징물이다. 춤추는 시바신 조각, 난디, 사자상 등이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석조 건축이었던 인도네시아의 사원과 다른 점은 붉은 벽돌로 신전을 건축했다는 점이었다.
입장권의 뒷면에 쓰인 안내문을 읽어보았다. 미썬 유적은 4~13세기에 지어졌다. 고대 참파인들은 벽돌 건축술로 명성이 높았는데, 모르타르 없이 벽돌을 고르고 촘촘하게 쌓았다. 신, 성직자, 압살라, 동식물과 희생을 벽돌이나 돌에 생동감 있고 세련되게 새긴 것에 미썬의 가치가 나타난다. 토착 문화와 힌두교의 예술과 건축에서 문화 교류와 통합의 사례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동남아시아 문화사에서 참파 왕국이 생생하게 나타나기에 199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여행 뒤에 촬영한 사진으로 안내문을 읽어 보았다.
Group C 8-12nd century
그룹C 8~12세기
Together with group B, this was a complex of monuments for worshiping God-King Srisanabhadresvata.
그룹 B와 함께, 그룹 C는 신들의 제왕, 스리사나바드레스바타(Srisanabhadresvata)를 숭배한 기념물 복합체이었다.
The major temple C1 was rebuilt in the 10thand the 11thcenturies, dedicated to the human statue of the God Shiva(This standing Statue of God-Shiva is being exhibited in Da Nang Museum of Cham Sculpture). This was the only temple with boat-curved roof with parasols covering the altar and walls without patterns, which was typical for Cham architecture after the 11thcentury.
주요 신전이었던 C1은 10~11세기에 중건되어 시바신의 인간상에 봉헌되었다.(시바신의 입상은 다낭의 참(Cham) 조각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C2(10th and 11th centuries) was the only tower-gate with interior decorations, indicative of how Cham temples structure changed from wood to brick. Four bricked-posts at each corner with their upper parts bigger than the lower parts indicate the change from wood pillar to brick pillar. Storage C3(11th century) had two rooms which was designed for the technical reason, bearing the roof pressure and was different to one-room storage. B5, C7 was one of the oldest constructions of My Son, dated 8th century. The tower C7 gives solid evidence of the development of Chmapa temple architecture.
C2(10~11세기)는 실내 장식들이 있는 유일한 첨탑 문이었고, 참 신전들의 구조가 어떻게 목재에서 벽돌로 변해갔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하부보다 상부가 더 큰 네 모퉁이의 벽돌로 쌓은 지주들은 나무 기둥에서 벽돌 기둥으로 변해간 것을 보여준다. 창고 C3(11세기)는 지붕의 하중 같은 기술적인 이유로 설계된 2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고, 1개의 방을 가진 창고와는 달랐다. B5, C7은 8세기까지 올라가는 미썬의 최고(最古) 건축의 하나이었다.
D2(11th and the 12th centuries) bore the same structure and fuctions as that of D1; which was a place for meditation and praying of the C1 temple.
C1 신전의 명상 및 기도를 위한 공간인 D2(11~12세기)는 D1과 똑같은 구조와 기능들을 지녔다.
Located in the south of My Son, Sacred My Son Mountain/ Mahaparavata or Rang Meo is special for its shape as Garuda Sacred Bird-the God for peace and wealth. The Sacred Mountain is landmark to located My Son Sanctuary. It can be seen from any directions from the land to sea of Amaravati Chmap Kingdom(which is now Quang Nam province).
미썬의 남쪽에 있는 미썬 성산/ 마하파라바타(Mahaparavata)나 랑 메오(Rang Meo)는 평화와 부의 신인 가루다와 같이 생긴 모양 때문에 특별하다. 이 성산은 미썬 성지에 위치한 랜드마크이다. 지금은 꽝남 지방에 있는 이 산은 참파 왕국 아마라바티(Amaravati)의 뭍이나 바다의 어느 방향에서나 볼 수가 있다.
신전 위에서 굽어보니 서양인 젊은 여성 둘이 맨발로 민소매 옷을 입고 고풍스러운 신전의 잔해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압살라들이 살아난 것만 같았다. 불편한 다리로 언덕 위에 있는 마지막 유적을 보고 입구로 나왔다. 한참을 기다리니 전동차가 왔다. 입구까지 걸어나올 수가 없어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 서양인들과 동승하였다. 내 옆자리의 백인 남자는 헝가리에서 왔는데 부인이 베트남인이라며 자랑하였다.
미썬 유적에서 돌아나와 다낭으로 돌아오니 어둠이 내리고 7시쯤에 첫날 점심을 먹었던 그 식당에서 삼겹살로 저녁밥을 먹었다. 식당에서 파는 베트남 술을 일행이 권했지만 나는 본래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으니 먹을 수가 없고 대신 아내가 몇 잔을 먹었다. 산타 럭셔리 호텔(Santa Luxuary Hotel)에 도착하니 밤 8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