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우리
근대의 도래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던 작가. 무엇이 새로운 것이고 무엇이 낡은 것인지 날카롭게 갈라 치던 비평가.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시대의 질문에 사력을 다해 대답하고자 했던 사상가. 글쓰기 이외에 다른 삶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했던 생활인. 응접실에 프린트기를 설치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을 찍어냈던 독립출판인.
이처럼 버지니아 울프는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면모를 가졌다. 그를 소설가로 국한해버리는 것은 그래서 너무 협소한 평가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 소설은 여러 쓰기 중 하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안녕, 친애하는 나의 유령”이라는 인사로 시작하는 일기는 울프에게 글쓰기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일러주는 중요한 증거다. 미래에 자신의 일기를 읽어줄 독자를 그는 ‘유령’이라고 칭했다. 마치 카를 마르스크가 다가올 공산주의의 이념을 ‘유령’이라고 부른 것처럼 말이다. 그는 아직 오지 않은 유령을 호명하면서 매일매일 썼다. 그는 쓰기 위해 살았고, 쓰기를 통해 살았다.
남편 레너드 울프와 결혼하기 전 그의 이름은 아델린 버지니아 스티븐이었다. 그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 경은 당대에 꽤 알려진 역사가이자 편집자였다. 이런 아버지의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울프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대학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지만, 어릴 때부터 울프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책을 읽으면서 지식의 세계를 탐닉했다. 문단의 명사였던 스티븐 경은 윌리엄 새커리를 비롯해서 당대의 작가들과 교류했고, 덕분에 어린 울프도 다양한 작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울프는 아버지의 친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울프는 작가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꼰대들”을 비웃었다.
울프의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 역시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 경 못지않게 울프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울프의 부모는 재혼해서 울프를 낳았는데, 줄리아 스티븐은 전 남편 사이에서 조지, 스텔라, 제럴드 등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 런던 사교계에서 유명했던 울프의 어머니는 라파엘전파의 일원이었던 화가 에드워드 콜리 번 존스의 모델을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울프의 외가도 대단했다. 초기 사진기술의 개척자였던 줄리아 마거릿 카메론이 그의 숙모였다. 울프의 부모는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를 형성했던 작가들과 그를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울프가 후일 블룸즈버리그룹에 허물없이 참가해서 다양한 작가들과 교류했던 것도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울프의 생애를 결정한 상상력은 이미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울프의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많은 장면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에게 소설가의 명성을 안겨준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에 의미심장한 진술이 나오는데, 주인공이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장면이다.
울프의 어머니는 그가 열세 살 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뒤이어 언니였던 스텔라까지 세상을 뜨자 울프는 신경쇠약증세를 보였다. 이때 발병한 마음의 병은 생애 내내 그를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소설의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은 울프 자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울프에게 글쓰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잘 알려진 ‘의식의 흐름’ 기법은 울프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기 위한 치유 장치이기도 했다. 이 기법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떠올리게 하지만, 울프 자신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공부하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울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런던으로 피신한 프로이트를 실제로 만났고, 남편과 함께 설립한 호가스 출판사에서 프로이트 표준판 전집을 펴냈다.
때는 1939년 1월 28일이었고 장소는 런던의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였다. 프로이트를 만난 울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히틀러는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프로이트에게 “죄송스럽다. ”고 말한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만일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더 끔찍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짧은 대화는 울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에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읽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울프는 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자신의 글쓰기를 애써 분리하려고 했을까. 그 이유는 당시에 모더니즘이라는 문화운동과 정신분석학은 거의 동시적으로 근대성과 인간 심리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현실 재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혁신적 미학에 바탕을 두었다.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울프는 모더니즘 운동의 중심에서 그 이념을 가장 날카롭게 벼리던 사상가이기도 했다. 물론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는 참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통해 울프와 그의 친구들이 도모하고자 했던 대의다.
젊은 울프는 당시 런던의 외곽이었던 블룸즈버리에 친척들과 같이 살게 되었고, 오빠인 토비 스티븐이 시작한 케임브리지 대학 동문을 중심으로 한 목요 모임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 모임이 바로 유명한 블룸즈버리그룹의 기원인 셈이다.
울프는 여기에서 남편인 레너드를 만나고, 동인들의 도움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발표하게 된다. 회원은 예술비평가 클라이브 벨, 화가 버네사 벨, 소설가 E. M. 포스터, 예술비평가이자 화가 로저 프라이, 화가 던컨 그랜트, 문학기자 데즈먼드 맥카시, 전기작가 리턴 스트레이치, 그리고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였다.
이들 중에서 관심을 끄는 회원은 단연 케인스일 것이다. 케인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과 《화폐개혁론(A Tract on Monetary Reform)》, 그리고 《자유방임주의의 종언(The End of Laissez-Faire)》이라는 책들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경제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후 건설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다.
흥미롭게도 케인스 역시 프로이트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후일 책까지 집필하는 열성을 보였다. 1930년에 쓴 〈화폐에 대한 논고(A Treatise on Money)〉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배금욕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이론”이라고 명명했다. 이 논고는 큰 주목을 끌진 못했지만, 케인스가 경제의 문제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경제와 심리를 연결하는 발상이 케인스에게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닐 테다. 블룸즈버리그룹이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이들이 인간 심리의 문제에 주목한 것이 반드시 프로이트 때문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울프가 “프로이트 씨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 ”고 쓴 것은 완전히 틀린 진술이 아니다.
이들이 내세운 모더니즘 운동에서 핵심적인 미학적 기법으로 차용된 것은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 ‘다중 관점’ 그리고 ‘시간 왜곡’이었다. 모더니즘 운동의 핵심은 현실을 더 정확하게 묘파하기 위해 전통적인 소설 형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울프의 소설은 이런 모더니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울프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높이 평가했던 까닭도 평소에 자신이 추구하는 미학적 기법을 훌륭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울프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프로이트를 읽은 뒤에 쓴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는 정신분석학적인 통찰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등대로》는 자신의 어린 시절 콘월에서 보낸 휴가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 울프의 이론이 잘 구현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가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울프가 프로이트를 읽고 모더니즘 기법을 창안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정신분석학을 통해 《댈러웨이 부인》에서 실험했던 기법들을 더욱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울프는 인간 마음의 문제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졌을까? 블룸즈버리그룹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울프 자신에게 이 문제는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울프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고, 급기야 남편과 가족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명예 죽음’을 택하게 된다.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 생애를 마감한 울프의 결단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울프의 행동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특유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어린 시절 오빠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그 상처를 직시하면서도 울프는 결코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키지 않았다. 그에게 글쓰기는 그 모든 상처를 넘어서는 냉철한 행동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여성의 차별을 보고, 평생토록 꿋꿋하게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의 문제를 날카로운 산문으로 직조했다.
그의 생애는 결코 가부장적 사회가 부여한 ‘여성적인 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여성이었기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부당한 차별에 맞서 그는 쉬지 않고 글을 읽고 썼다. 그에게 모더니즘은 단순한 문화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공고하게 만들 논거이기도 했다.
울프의 속내가 잘 드러나는 글은 일기와 에세이다. 일기는 소설과 에세이를 위한 원재료였다. 울프는 소설 못지않게 탁월한 에세이를 쓰는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의 에세이는 요즘으로 치면 문화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 당대의 문화현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예리한 분석을 보여준다.
1905년에 쓴 〈에세이 쓰기의 퇴락(The Decay of Essay Writing)〉에서 울프는 교육의 확대로 인해 누구나 손쉽게 글을 짜깁기하고, 읽어야 할 인쇄물들이 홍수를 이루고, 저렴하고 편리한 필기구들이 등장하면서 오히려 글쓰기가 어려워졌다고 진단한다. 이런 울프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에서 기인하는 글쓰기의 문제에 적용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다.
울프가 살던 때는 산업사회 초기의 매체들이 범람하던 시대였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쏟아지는 물량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지만, 당시 런던에 살던 영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난생 처음 겪는 엄청난 변화였을 것이다. 공공도서관이 설립되고, 우편물이 현관에 쌓이고, 신문이 가판대에 진열되어 속보를 전했다. 여기에 더해 만년필과 잉크가 보급되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하얀 종이를 끝없이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울프는 위트 넘치는 문체로 이런 문화현상들을 구석구석 파고든다.
소책자와 팸플릿, 광고와 잡지, 그리고 지인이 보내는 편지와 원고는 우편이나 화물, 심부름꾼을 통해 끊임없이 집으로 몰려온다. 이 모든 정보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지식 생산과 유통의 위기다. 그렇다고 울프가 이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펼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울프는 자신의 시대에 펼쳐지는 광경이 진보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에세이라는 형식을 일컬어 울프는 “거의 모든 에세이들은 나(I)로 시작한다. ”고 말하면서, 이런 일인칭 서술의 관점이야말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사적 에세이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에세이는 ‘아무나’ 쓸 수 있다. 울프의 동시대인들은 조상들보다도 훨씬 더 용이하게 펜을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진보주의자 울프를 발견한다.
그러나 사적 에세이에 대해 그는 냉철하게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인쇄된 말들 아래에 어떤 신탁이나 무오류의 본성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상 그 잉크로 찍힌 글자들이 전달하는 것은 건조한 에고이즘의 표현일 뿐이라고.
일생을 다룬 수많은 전기들이 발간되지만 진실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 울프의 진단이다. 왜냐하면 울프가 보기에 끔찍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보통은 피하기 때문이다. 가장 용감한 이들도 자기 자신 앞에 서기 두려워 도망치거나 눈을 가려 버리기에 솔직하게 자신을 까발리는 전기는 발견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울프에게 에세이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쓰기 장르지만, ‘아무렇게나’ 쓴다고 성공적인 글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에세이의 딜레마가 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정작 에세이 자체가 난감해져버렸다. 이 문제는 작가로서 울프의 딜레마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울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쓰는 에세이의 문제다.
에고이즘이 꽃을 피우면서 등장한 사적인 글쓰기는 음악이나 문학, 또는 다른 예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특정 대상에 대한 개인의 호불호를 표현할 뿐이다. 비평이랍시고 쏟아지는 글들도 진리 따위야 무엇이든, 어떤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지극히 사적인 평가를 남발하기에 바쁘다. 이런 울프의 진단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울프가 오늘날 SNS에 난무하는 ‘사연들’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근대가 낳은 증상이기도 했던 사적인 글쓰기를 울프는 비난하기보다 긍정한다. 어쨌든 만년필로 글을 쓸 수 있는 당대의 조건은 울프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사하는 물적 토대이기도 했다. 이런 울프의 태도는 “나는 뿌리 내렸지만 흐른다. ”는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더니스트로서 울프는 영원한 무엇을 신봉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 소설은 중요하다. 울프가 “모던 픽션”이라고 불렀던 모더니즘 소설들은 이런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구성하는 미학적 성취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울프에게 소설이라는 글쓰기 자체의 의미를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울프에게 소설은 무엇이었을까? 울프는 고리타분한 비평가들에 맞서 평생 모던 픽션을 옹호했다. 울프에게 모던 픽션은 급변하는 세계를 담아낼 묘안이었다. 혁신적인 장치가 아니면 ‘나’에 대한 이야기만 넘쳐나는 시대에 소설은 제대로 ‘진리’를 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울프가 왜 ‘의식의 흐름’을 소설의 기법으로 차용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겠다. 울프에게 중요했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흐르는’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울프는 난무하는 ‘나’에 대한 신변잡기들이 무미건조하고 답답한 소음이라고 생각했고, 그 ‘나’의 아래에 감춰져 있는 무수한 다른 ‘형상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나’는 특정 장소와 시간에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제약을 뛰어넘어 흐르는 것이었다.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시간성에 속해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과거를 말하고 미래를 말하지만, 항상 현재에 있다. 현재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를 살게 되고, 미래로 나아간다.
이런 울프의 의도를 이해하면, 왜 ‘의식의 흐름’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다를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울프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상상력이지 분석이 아니었다. 둘은 욕망이 곧 자아의 원천이라는 사실에 동의했지만,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 달랐다.
울프에게 소설은 마음의 작동을 보여줄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것이었다. 사적 에세이에 대한 비평에서 울프가 인정하듯이, 근대는 바로 ‘나’를 중심으로 구성된 에고이즘의 시대였다. 모두가 ‘나’를 주장하는 시대는 이율배반의 상대주의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이 허무하고 냉소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울프가 붙든 것이 바로 ‘모던 픽션’이었던 것이다.
21세기 한국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다는 것은 모더니즘 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 한권을 읽는 행위가 아니다. 그는 일기를 썼고, 소설에 그 이야기를 담았다. 일기와 소설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었다면, 에세이는 남의 이야기를 읽고 쓰는 일이었다.
울프의 글쓰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울프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던지는 물음은 정보 과잉의 시대, 상호 충돌하는 가치들이 이율배반의 냉소주의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반문으로 되돌아온다. 울프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 사사롭고 더 많은 정보로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쓰기와 읽기를 묵묵히 실천한 그의 노력은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울프는 글쓰기를 하나의 실험으로 생각했다. 실험으로서 수행하는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이자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였다. 울프는 소설의 창작 과정을 고스란히 일기에 기록해놓았는데,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써갔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을 쓰기 위해 숱하게 번민했던 흔적을 일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울프는 문학이론에 맞춰 글을 쓰거나 미리 청사진을 그려놓고 소설을 창작하는 것을 거부했다. 어떤 방법을 정해놓고 글을 쓰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에 ‘의식의 흐름’은 단순하게 소설을 쓰는 방법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글쓰기의 형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의식, 다시 말해서 몸의 작동이 글을 쓰는 것. 울프는 그렇게 온몸으로 밀고 가는 글쓰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발행일 : 2018. 02. 28.
저자 이택광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워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에서 문화비평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 한국의 숨겨진 문화 구조, 사회적 문제와 모순 들을 드러내고 분석하는 글을 써왔다. 지은 책으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마녀 프레임》,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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