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변의 의식에서 체화한 문장의 범주
-조영심 시집《그리움의 크기》중심
<시인, 문학평론가> 박철영
시인들의 시집에 실린 시편들을 일람하며 매번 들던 생각이 있다. 언어가 갖는 목적은 문자 이전 소리를 말의 체계로 갖춰 사람들 간 소통을 원활케 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후 구체적인 의사 전달을 위한 문자의 필요가 제기되면서 현재의 언어 체계에 도달한 과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시가 갖는 의미도 현실적인 범주 안에서 찾아본다면 그 존재에 대한 목적이 명징해진다. 소수에 대한 소통보다 다수를 향한 의사 전달 목적에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에게 읽히고 공감하는 시詩에 대한 목적성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의 신뢰와 의미가 갖는 범주의 시간을 포함하여 시가 가져야 할 언어의 깊이가 어느 지점까지 지향해야 하는가는 분명해진다. 시는 소수의 전유물이거나 소수만이 공감하고 소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다양한 사회 환경 속에서 정서적으로 함께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내면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정서를 굳이 시적 의미가 함의된 언어라 해서 특별하거나 난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시의 언어가 시인들만의 독점이거나 변별적 언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현실적으로 변화무쌍한 사회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발현되는 저변의 욕망과 분출하는 인식들의 전환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시대의 사회 현실은 더 그렇다.
계절의 사계처럼 숨골 같은 길목을 지켜 생동의 전력을 다하는 삶들에서 우러나온 한편 한 편의 시가 존재한 과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시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를 좀 더 이해하며 살펴보기 위해 조영심 시인을 선정해 보았다. 한 지역에서 삶의 뿌리를 두고 생애 긴 세월을 살아온 이력처럼 시간 속에 잠복되어 있을 말(시)의 깊이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우려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여백을 문장화한 첫 장의 시편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와도
네 소리가 가장 크다
-<그리움> 전문
일반적으로 ‘그리움’이란 말은 대상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움>이란 시 속 정서로 내장된 울림이 짧은 문장으로 구조되어 있지만, 다의성을 내포한 층위의 여운은 깊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두 행으로 분리된 시구詩句는 한 문장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을 감안했을 것이다. 두 행으로 분리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심리적 간극마저 허용할 수 없다는 정서를 완곡하게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누구에 대한 그리움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앞섰지만, 그 속내가 갖는 진폭의 파동으론 많은 것을 알 수 없다. 시인은 내면의 인간적인 온정에 대한 향수를 근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렇더라도 단 두 행의 문장 말고는 시적 비의랄 수 있는 기미幾微는철저히 숨겨버렸다. 여하한 말이 없다 해도 간명한 문장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진정성을 표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소리 없이 와도”라는 행간은 명징한 말로써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무 때나 찾아올 수 있는 관계라면 상당한 세월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익히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관계라면 사전 약속을 한다는 것이 되레 불편해진다. 여기에서 ‘소리’라는 의미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소리’는 의성어이면서 형상태形象態이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소리’, 즉 ‘말’이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말(대화)이 없다면 많은 불편과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하지만, 어떠한 말도 필요가 없는 사이라면 시인만이 공감할 수 있는 특수 관계란 것을 말해준다. “네 소리가 가장 크다”라는 말에서 처럼 그런 사람이라면 더 큰 울림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소리(울림)의 반향을 온몸으로 감지하고 소통할 수 있는 관계는 사랑일 것이다.
<그리움의 크기>에서 처럼 ‘그리움’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어서 감히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긴 생애가 ‘찰나’라는 시간으로 끝나감을 예감할 때에서야 ‘그리움’에도 ‘크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움’이라는 절대적인 심상도 ‘대상’의 무관심이라면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다. 활동성으로 내장된 직립의 시간마저 잊은 채 ‘그녀’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한다. 그것 만으로도 만족하며 포기해야 하는 “방금 보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울컥/ 보고 싶어지는 온몸이 서늘해지는 그림”처럼 시적 화자를 통해 철저하게 주체에서 타자로 밀려나 버렸다. “다섯 줄 골똘한 단문/ 한 뼘씩 목마른 곡절로 행간을 넓혀가며/ 다섯 장 장문으로 커가는 중인지” 물리적인 시간은 사유 안으로 번진 그리움을 파동으로 길어 올리고 있다. 시인의 시적 정서로 출현하는 숭고한 ‘그리움’은 삶 속으로 들어와 있는 대상을 반영하면서 시적으로 변용되지만, 서정적 범주를 왜곡하거나 우회하지 않는다.
오시는가 하여 당신의 창가에 앉았습니다 진득하게 내리는 비는 어느 애통의 시간을 건너가더니 창밖에 내 존재를 밝히던 불빛마저 검게 적시고요
제 노래를 잊은 참새들이 홀로 선 벚나무에 낮고 작은 그림자로 앉자 이 밤도 비로소 쉽게 젖어가는 중입니다
늦게 당도한 여린 빗방울만 멈춤 없이 내 연애의 기억 속으로 흐르고 있어요 바람의 땅에, 빗살이 세워지는 거기에 입술로 당신의 이름을 그려봅니다
당신은 덩그렁 빗살무늬 쇠북, 당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기대었던 나는, 제풀에 겨워 숨결이 풀리고 풀어져 바스러져가는 나무입니다
어찌 나무가 쇠를 견딜까요
당신은 그림자도 없이, 젖을 줄도 모르고 짙은 빗속으로 다시 멀어져 갑니다 그 창살로 나를 치소서
-<회화> 전문
<회화> 속 시행은 비가 갖는 모티프를 심상적 이미지로 활용하여 시적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비가 갖는 속성은 비정형적이면서 수시로 방향성과 강약의 변화를 보여주는 하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저음으로 파고드는 빗소리를 통해 화자의 시적 심상을 압축해서 보여주기에 적합한 상관물로는 제격이다. 첫 행 중 “오시는가 하여 당신의 창가에 앉았습니다”라며 물리적 거리를 최소화하는 노력도 보여준다. 그 ‘창가’는 현실 속 상상의 공간일 것이다. 여기에서 ‘당신’이 오시는가 하여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화자의 초조한 심정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킨다. 사실 올 수도 있겠지만,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상대방과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불안정한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기다림의 시간도 소용없어 일방적 그리움의 애절함만 깊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이 시가 갖는 의미는 시제인 ‘회화’처럼 시적인 것으로의 감각적인 이미지를 심상 안으로 드로잉하여 문장으로 잘 드러냈다는 데 있다. 은근한 정념을 여성적 감성으로 낭비하지 않고 절제된 이미지를 “빗살무늬 쇠북”과 “바스러져가는 나무”라는 상징성으로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덩그렁 빗살무늬 쇠북, 당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기대었던 나는, 제풀에 겨워 숨결이 풀리고 풀어져 바스러져가는 나무입니다// 어찌 나무가 쇠를 견딜까요”라며 체념적인 상황에서 회의적 감상에 빠져드는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 연의 “그 창살로 나를 치소서”라며 강한 탄력성彈力性을 가해 의지의 반전을 매력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화자에게 닥칠 어떤 난관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실존에 대한 존재 의지일 것이다.
첫 시집이 인터넷 ‘중고’ 사이트에 나왔다는 <중고>라는 시를 통해 언어의 가치가 갖는 내면을 심정적으로 조영照影해주고 있다. 시인은 중고 사이트에서 자신의 첫 번째 시집이 검색된다는 것을 알았다. 착잡한 심정이 일순 들었지만, ‘중고’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시간을 초월한 거듭남과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만남과 출발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 천착한다. 시인은 “중고 도서지만 아주 깨끗합니다”라는 홍보 문구를 보면서 “열심히 살아왔으나 아직도 쓸만합니다”라며 자신을 위로하며 “천간 지지의 갑자를 대 여섯 번 도는 동안/ 알게 모르게 훔친 눈물 한 고리쯤 족히 채”웠을 육십갑자를 지나온 생애를 반추하며 삶의 가치를 재발견한다. 헌 것은 버려지거나 쓸모없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초월해 현실을 긍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중고로 나온 첫 시집 <담을 헐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흘러간 시간 속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면서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과거의 것에 대한 소모성과 폐기해야 한다는 헌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진전된 시 의식으로 환기하면서 나약한 현실을 극복하는 기제로 활용한다. 중고 서점에 꽂혀 누군가를 기다리는 상상을 희망으로 환원해가는 흡인력을 보여준다. 그런 시인 정신은 소소로운 일상을 가볍게만 볼 수 없다는 인식일 것이다. 시적 대상을 분별하지 않은 일상에서 문학 자장 안으로 유인하고 시적 사유를 통해 확장해간다.
여자만 가는 길이라니
누가 처음 이 길을 걸었단 말인가
길은 걸어야 비로소 길이 되는데
얼마나 많은 세상의 여자들이
스치고 또 스치며 걷고 또 걸어서
여자의 길을 터놓았단 말인가
오로지 여자만 가는 길이라
야생의 험한 것들로부터 안온한 마당 안쪽
초속의 질주로부터 속도 줄인 바닷가 여백 쪽
마음에 붉은 주단을 깔듯 감싸듯 섬기듯
단호한 금지선까지 양쪽에 그려 놓은 길
발걸음 가벼운 여자만 디딜 수 있는
오동도에서 시작된 여자만* 가는 길
분명, 여자만 들어서는 호젓한 길에
저만치 어깨 흔들며 한 사내가 간다
어떤 여자만을 생각하며 가는 것일까
남자의 여자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길에서 길을 잃고 길을 찾듯
여자만 가는 길을 벗어나
인도로 간다 멀리
*전남 여수시 소라면 여자만汝自灣
-<여자만 가는 길> 전문
시인의 가슴에 품은 온정적인 시선은 ‘여자만’의 풍경 속에서 점화된 사유들을 과거의 시간으로 유추해간다. 여수반도의 한갓진 어촌을 답사하며 고조된 마음을 지리적 풍경과 더불어 잊혀진 삶의 근원으로 들여다본다. 시인은 어촌 풍경의 이면에 숨어있는 ‘여자’의 굴곡진 삶을 <여자만 가는 길>을 바라보며 상상한다. 인간의 억제된 욕망처럼 자연의 한 자락으로 편입되어버린 특별한 의미를 그곳을 통해 깨달아간다. 한국의 지명은 풍수와 지리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경우가 많다. ‘여자만’이라는 지명도 그런 시대 의식의 범주에서 명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지명이 갖는 의미를 여자(여성)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여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우리의 전통적 여성상은 힘들고 고단한 생애를 강요당해왔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모성이라는 강한 의지로 견뎌온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강한 집념이자 주체성을 보여주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시인은 호젓한 길이 되어버린 여자만汝自灣을 걸으며 “누가 처음 이 길을 걸었단 말인가”를 자문하며 그 길이 그냥 존재하는 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길은 곧 험난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살아온 이 땅의 어머니들이 걸어온 ‘여자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살아온 절망 속 현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야생의 험한 것들로부터 안온한 마당 안쪽/ 초속의 질주로부터 속도 줄인 바닷가 여백 쪽/ 마음에 붉은 주단을 깔듯 감싸듯 섬기듯/ 단호한 금지선까지 양쪽에 그려 놓은 길”은 절망적인 운명에 당당히 맞선 투혼의 결과란 것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음양으로 조화를 이루듯이 세상살이도 남자와 여자가 공존한다. 그렇지만, 시대를 가리지 않고 부역처럼 강요당한 한恨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몫은 언제나 ‘여자’인 ‘어머니’들이었다. 험난한 환경을 회피하지 않고 살아온 그 길을 묵묵히 받아들인 것이다. ‘여자만 가는 길’은 어느 한순간도 해찰할 수 없는 여자들의 절박했던 삶의 궤적이란 것을 말하고 있다.
<모천 가는 길>은 “한 겹 또 한 겹/ 겹겹이 푸른 안개를 헤치며/ 앞인지 옆인지 여긴지 거긴지 발치를 분간할 수 없는 길로/ 그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그것 같아/ 짓무른 안개의 허리를 틀어 길을 냅니다”처럼 안개가 가득하다. 길을 나서는 시간이 이른 아침이었을 것이고 안개가 걷히지 않은 시간임을 알게 한다. 이미 시인은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태이고 그곳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시각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심리적인 화자의 정서를 대변할 수도 있다. 시인의 심상 안에만 존재하는 생명의 근원일 수 있는 ‘모천’이라는 장소는 영원히 당도할 수 없는 곳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안개가 당장 걷힌다 해도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만이 알고 있는 ‘모천’ 가는 길은 “안개가 안개를 삼키고 내가 안개를 삼키고/ 다시 안개가 나를 삼켜/ 이미 들어선 길 놓친다 할지라도/ 햇살과 달그림자와 별빛으로 각인된 내 모천의 숨길만은/ 지워지지 않는 생과 생의 일방통로”여서 한번 들어서면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시인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조영심 시인의 시를 구조하는 언어 속 사유가 감각적인 현상을 포획한 것이지만,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중에서 소요逍遙한 내면 의식은 이미 단순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시적 대상이 다양한 주변적 사유로 전환되면서 주유하고 변주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곳에 이르는 길이 하, 소삽한 꿈결일지라도/ 기어이 내가 당도할 거기”라며 가는 길을 멈출 기미가 없다. 그것은 진력을 다한 표정에서 체현되는 긍정을 동경하는 진실한 언어란 것을 말해준다.
방죽안댁 청상 우리 외할머니
동네 초상이 나자 꽃상여 꽁무니에 대고
누구라도 들을세라 가만가만
입말로 그렇게 달싹거렸던 것인데
어린 자식 넷 놓고 가버린 지아비
징용 가 돌아오지 못한 큰아들까지
굴곡마다 낀 생의 녹슨 액운을
징 소리 하나 없는 푸닥거리로
독경 외듯 불러내는 액땜인 것인데
-<드라이브 스루> 부분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가 ‘코로나-19’로 더 복잡해졌다. 특정한 곳에서만 사용된 ‘드라이브 스루’라는 방법이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을 확인하는 검사 방법의 편리한 수단으로 도입되면서 우리에게 낯익은 일상어가 되어버렸다. 그런 방법을 조영심 시인은 오래전부터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도로를 달리다 ‘영구(상여)’ 차를 보면 차의 속도를 줄이면서 “나의 액운도 다~아 가져 가주시오~”라며 망자에게 주문했던 것이다. 그런 방법은 오랜 관습으로 시골에서 상여가 나가면 상여를 따라가며 망자와의 이별에 대한 슬픔을 함께했다. 그러면서 생에 대한 질곡의 전환을 구복 하는 마음을 얹어 보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듣고 자랐기에 영구차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따라 했던 것이다. 현대인의 의식에서 지워졌을 법한 관습은 외할머니의 전언으로 답습된 것이다. 외할머니가 살아온 가족사에서 기인한 “어린 자식 넷 놓고 가버린 지아비/ 징용 가 돌아오지 못한 큰아들까지” 연이은 고난의 시간들을 극복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너무나 절박한 것이었다. ‘방죽안댁 청상’이란 고통을 평생 감당하면서도 시인에게는 언제나 다정다감한 ‘외할머니’로 기억된 삶도 그래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시인은 지금껏 해온 방식을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외할머니 방식대로 해온 주문을 “부디 모든 것 탈탈 털고 편히 가시오~”라며, 망자에 대한 이승의 고단함을 한껏 위로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묵언인 구복적인 주문은 당연히 읊조릴 것이다. 할머니로 비롯된 말에 담긴 언어의 생명력은 끝없이 변용되어 긍정적인 의식으로 누군가에게 전언될 것이다.
조영심 시인은 풍경으로 다가오는 일상을 독특한 언어 감각으로 수수하여 시적 사유를 확장해간다. 시인의 ‘발을 묶’었다는 ‘타드랑’ 때문에 시선도 경계를 넘어서 버렸다. 여행하다 보면 낯선 사람들이 다루는 악기의 이색적인 ‘소리’를 지나치지 못한다. 그것은 모처럼 얻게 된 자유라는 시간을 풍성하게 해주는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런 여정 속 시인도 매혹적인 풍경에 마음이 동했을 것이다. 우선 <타드랑, 발을 묶어> 속 ‘타드랑’이 무엇인가 궁금해졌지만, 만족할 만한 자료가 없어 타악기의 한 형태라고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의 손을 통해 악기가 내는 소리를 타고 묘하게 진동해오는 전율을 느끼려는 순간 또 다른 ‘한 남자’의 불편한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림자와 오버랩되어 나타나는 “모자에 떨어지는 동전과 동전의 틈새로, 넘너리 바닷가에 걸쳐두고 온 하늘 한 자락이 찢겨져 여독처럼 쌓이는데/ ~~중략~~/ 무엇이 저들을 묶고 있는가 한 평 남짓한 악기 좌판, 판을 접고 펴는 일밖에 다른 재주가 없었을 낡은 옷소매로 하나 둘 초저녁별이 뜨고”라며 이내 자리를 떴겠지만, ‘타드랑’이라는 악기가 내는 파찰음은 오래도록 시인을 불편하게 한다. 어찌하랴. 그것도 현실 속 삶의 ‘소리’란 것을 깨닫게 된다. 각성한 자아보다 더한 생존의 한 자락을 놓칠 수 없어 ‘소리’라는 매개체에 ‘묶’여있는 사회의 불편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 연주자처럼 현대인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우울한 심상이 “타드랑 리듬이 내 발걸음마다 타드랑, 저녁 어스름 기어들고 오늘도 갈 길은 멀고도 멀어 타드랑 타드랑” 악기가 내는 소리가 더 애틋하다. “타드랑 타드랑”이란 의성음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은 고된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귀환하는 데 피로만 한껏 긴장시킨다. 살다 보면 애틋한 일들이 다반사다. 그것을 인생살이라고 하지만, 다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런 곡절 많은 일상을 체면처럼 자신의 육화 된 슬픔으로 느끼지 않으려 할 뿐이다.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며 위로한다. 밤하늘에 뜬 달이 천체를 반으로 정확하게 나누었다는 <동짓달 초여드레>의 시 속 정경은 그런 면에서 같다.
동지 지나 섣달 그믐께쯤엔
꺾였던 빛 태어나듯 흐렸던 물 되 맑아지듯
동지 초여드레 몸 풀던 국맛을 떠올릴 수 있을까
당신도 당신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제는 웃음마저 실실 흘리는 당신을
동짓달 긴 달그림자에 매어 두고
느리게, 꾹꾹 쓸어내리는 밤
-<동짓달 초여드레> 부분
사람은 출생을 인연으로 혈연적으로 만났지만, 생로병사라는 과정을 거쳐 다가오는 이별이라는 수순을 피해 갈 수 없다. 흔히 그것을 노화라거나 노쇠함으로 말하지만,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분이 피붙이라면 고통은 배가된다. 화자의 어머니는 치매의 고통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을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식일 것이다. 그 관계 사이에 존재한 사랑이라는 매개체는 매우 관념적이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일상에 좋아하던 국 한 사발 챙겨드린 것 말고는 없다.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신산辛酸한 마음을 웃음으로 환기하려는 슬픈 열망이 컸지만, “한 점 구름 빈 가지에 내려앉아/ 두 손 맞잡고 눈 맞추는 모녀가 살가워”진 순간마저 애처로운 것이다. 당신의 생일날을 기점으로 세월 저편의 적막처럼 추억되는 아련함만 더 깊다. 밤이 길어 가만히 있어도 몸이 추워질 시, 공간을 구획하는 ‘동짓달 초여드레’를 통해 생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본다. 당신의 “생일날엔 시루 구멍을 잘 메꾸어 주어야” 한다는 “물 되 맑아지듯”한 고운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화자는 실어증 환자처럼 “이제는 웃음마저 실실 흘리는 당신”을 안타까워하며 가슴으로 소통하고 있다. 시인은 온몸으로 소통하려 한 대상을 분별하지 않는다. 시적인 삶을 현실과 구분하지 않고 산다는 방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다양한 환경들이 시적 대상 속 사물이거나 문학적인 인식으로 자연스럽게 혼입 된다. 그것은 시인의 삶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주변적인 대상을 변방이 아닌 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잊히거나 지나간 시간을 기억해낸 것도 사랑에서 기인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항쟁’의 촉발 지점인 여수 신월리가 ‘넘너리’로도 불린 듯하다. 제14 연대 주둔지였던 ‘넘너리’의 역사성이 담긴 <넘너리 연가>를 통해 시인은 ‘여순항쟁’의 참화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못다 한 말들을 발굴해낸다. 그 시대를 살다 처참하게 죽음으로 매몰되어 버린 한 맺힌 말들이 아직도 바람이 불 때마다 풀썩거릴 것 같은 곳이 ‘넘너리’이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느닷없이 소용돌이에 싸잡힌 생떼 같은 목숨들”의 억울한 생애를 애도하며 “그 어떤 구실도 너를 입막음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숙연한 마음을 올린다. 교감을 통한 인식의 확장은 삶에 대한 관심과 깊은 사유의 결과다. 따라서 조영심 시인의 시적 화두는 ‘사람’에 있고 그 사람들이 행동으로 이행하려던 ‘말’을 경청하는 데 있다.
<오지의 여자>도 그렇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말’로 읽어낸다. ‘오지’라는 개념은 문화 혜택을 쉽게 받을 수 없는 사각지대로 일반적인 편의 시설이 없는 곳보다 더 열악한 환경을 가리킨다. 눈뜨면 하늘만 보인다는 “하늘 말고는 모두 오지겠지”라는 말처럼 ‘오지’라는 그곳은 불편함보다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 불편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만 보며 ‘오지게’ 독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그 여자’의 시간은 고통 속에 갇혀 끝날 기미가 없다. “제 둥지 밀어낸 사내 대신/ 밤낮 허리 못 펴고 살아온 삶”이어도 “남의 젖은 이야기에 제 설움 섞는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 “살날 받아 놓아 살짝 눈꼬리 흔들렸”다는 그 여자의 지독한 삶을 가슴 아파한다. 외부 환경 속의 ‘오지’보다 자신의 마음 안 ‘오지’에 스스로 갇혀 사는 “오지게 오지에 사는 그 여자”는 자신의 처지를 결코 비관하거나 슬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여자의 리얼한 삶을 시적인 것으로 환기하면서 이내 가슴이 아픈 유정한 마음이 서정이라면 그것도 죄다. 사람 찾는 곳에서 세월을 지키고 있는 나무 한 그루에도 정신을 부여한다.
사찰에 심어진 팽나무가 상징한 것은 세월의 유구함만은 아닐 것이다. 팽나무가 먼저 망해사 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듯 진묵 대사가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당연하게 사찰이 들어선 이후 팽나무가 심어졌을 것이다. 오랜 고찰인 망해사는 만경강이 끝나는 지점인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다. 망해사를 창건하고 부처님을 모시듯 팽나무를 모신 것이 지금의 망해사 팽나무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은 망해사와 팽나무를 분리하지 않고 상관성으로 인식하면서 <망해사 팽나무>라는 시제를 올렸다. 인간의 욕망으로 들어선 망해사보다 먼저 터전을 잡아 생명의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 팽나무에 연연하는 것은 표면적인 풍경만을 진술한 시가 아니기에 그렇다. 시인은 이면에 감춰진 시행 속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팽나무와 망해사와의 친연성보다 상관성을 생각하고 있다. 시인은 서해 노을 지는 바다를 지켜보았던 것은 망해사가 아니라 수백 년의 세월 동안 키를 키워 성장해온 팽나무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연히 망해사의 사찰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목적에 충실했을 것이고 그에 상관없는 팽나무는 “천년을 흐르던 강, 물길이 가로막히자 빈 강가엔 메마른 어제의 시간이 흐르고 더듬더듬 저녁이 찾아오면, 우두커니 허물어져 가는 강쪽으로 몸을 비틀어 귀를 모았을 것이”라며 만경강과 서해 망망한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주변적인 삶의 고통을 표면화하고 있다. 종교라는 욕망이 인간의 삶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팽나무가 사라져 가는 주변적인 환경을 수렴하고 있다.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는 우리 모두에게 묻는 화두이다. 종교를 초월해 누구나 궁금한 것이어서 그것에 대한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한 존재의 영역을 이루는 말의 ‘소리’를 다 내놓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에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생명체로 공존한 대상까지 포함된다. 시인은 “사라진 것들은 어느새 깊은 어둠되어/ 참나무 숲속 계절을 넘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과거의 사라진 존재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달라져야 한다. 사라지는 것, 즉 존재의 부재가 아닌 존재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말’의 유구가 아닌 전언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결국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삶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마음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와락, 고삐에 끌려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어룽진 무늬만으로는 당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첩첩 접힌 내심의 두께로는 당신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하여, 당신의 눈가에 번지는 웃음에 두 점을 찍고
허물어진 절반의 왼 입술을 꼭짓점 삼아 외심을 더듬어 봅니다
밖으로 난 둥근 생각의 연장선으로 당신의 처음을 그려 봅니다
지붕 한 채의 살림을 끝막음 지우는 막새
당신의 생이 가락가락 서까래 받치기 위한 도리
헛배로 질끈 동여맨 기둥 없는 쪽 살림의 반 기둥
동트기 전부터 밤 이슥토록 납작 엎드린 하루
한 계절을 들락거릴 겉보리 한 말
이산 저산 풀뿌리로 넘어온 보릿고개
간절한 말을 새김질로 되삭이는 힘
더듬어 길지도 짧지도 않은 한 생의 무게중심
누가 그 무거운 사명을 당신에게 주었을까
바람결로 번지는 당신의 미소
저기, 고이지도 흘러넘치지도 않는
-<얼굴무늬 수막새> 전문
긴 호흡만큼 유려하지 못한 글을 전개하면서 시 <얼굴무늬 수막새>에 대한 조급한 미련이 깊어졌다. ‘수막새’에 새긴 ‘얼굴’과 그 표정에 숨겨진 ‘소리’가 추구한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대체적으로 조영심 시인의 시는 단전을 모아 수행하듯 묵상하며 호흡을 다독여야 읽히는 시다. 본래 수막새는 여러 용도에 따라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었다. 귀면상이나 해맑게 웃는 얼굴이거나 연꽃 모양 등 당시의 필요에 의해 수막새가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얼굴무늬 수막새’는 한국적인 전통 가옥에서 기와지붕을 완성하는 데 사용한 기와의 한 종류이다. 수막새를 시적 대상으로 초대하여 천착한 사유가 그 공방을 터전 삼아 살다 간 사람의 내력까지 세세한 목록으로 출현되었다. 현재를 뒤집어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치환해가는 진정함이 시인의 현시적 욕망이 아니기에 ‘시적인 것의 아우라’를 확장하여 시의 주체로 표출해준다. 가마터에서 물레를 돌려 ‘수막새’를 만들어 적당히 마른 표면에 그려 넣었을 장인의 손길과 달리 머릿속은 “한 계절을 들락거릴 겉보리 한 말/ 이산 저산 풀뿌리로 넘어온 보릿고개”를 걱정하며 먹고사는 문제에 골몰했을 것이다. 매번 살만한 세상을 염원하며 수막새에 얼굴을 새겼지만, 형상처럼 주체가 되지 못한 장인을 불러낸다. “바람결로 번지는 당신의 미소”가 세상을 변화시킨 표상임을 말해준다. 시인은 펜 끝으로 복원한 수막새의 표정에서 못다 전한 말들을 “밖으로 난 둥근 생각의 연장선으로 당신의 처음을 그려”내고 있다.
지금껏 조영심 시인의 시들을 열독 하면서 서두에서 밝혔듯이 일상에서 천착한 삶을 숙성한 사유로 체현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다양한 시적 대상 속의 정경들이 각기 다르지만, 내면을 관통하고 있는 삶의 지표로 일관된 유기성을 함의한다. 형상화된 시적 언어들이 표면적인 현실만을 말하지 않고 언어 행위보다 더 깊은 내면에 있다는 것도 말해준다. 언어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보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 가에 대한 관심으로 바라본다. 조영심의 시는 감각적인 오감에서 접점을 형성하지만, 이면적 감성의 심연을 바탕으로 한 말의 힘인 ‘소리’의 근원을 상기시켜준다. 표면 속에 감춰진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인의 눈빛을 상상해볼 때 그 눈빛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이력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시대의 중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표정이어서 인간적 존엄을 갈망하는 속말들은 가슴에 묻어두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보고 듣고 찾아가며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 삶을 살다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말’을 찾아내는 노력을 보여준다. 평이한 언어를 정제된 시어로 재생하듯 저변(민중)의 사라져 버린 언어들을 재현하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진중한 작업이다. 그 작업은 일상처럼 맞닥뜨리는 것이어서 마침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