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4일 금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레위 23,1.4-11.15-16.27.34ㄴ-37
복 음 : 마태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한겨울에 길고양이가 불쌍하다며 물과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길고양이가 너무 많다면서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부모는 거리의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며 아이한테 저분 덕분에 깨끗이 산다고 말하고,
어떤 부모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돈이 많아도 티 내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부자도 아니면서 돈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곳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를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또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자기의 마음이 끌리는 모습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을 각자 가지고 있기에 더 나은 가치를 찾으면서 살 수 있는 것도 될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 부정하기만 하면 함께 사는 방법이 사라지고 맙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은 혼자서 여행을 가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하고도 말하지 말고 딱 일주일만 지내보십시오.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 해지는지 모릅니다.
평소 과묵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혼자만의 삶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스스로 외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특히 주님과도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 없이 우리는 외로움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과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아직은 더 세상의 것에 집중할 시간이라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목수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 성경 공부에 전념하지도 않았고, 율법학자도 아니었기에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라면서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 당연히 함께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함께하지 못하는 곳에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함께하길 바라는 주님의 뜻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혼자 살 수 없는 우리를 위해 함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도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찾겠습니까?
주님과도 함께해야 하며, 나의 이웃과도 함께해야 합니다.
나의 뜻과 맞지 않다고 해서 거부하는 삶이 아닌,
어떻게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선거 때 대통령 후보들이 자주 찾는 곳들이 있습니다.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시장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서민들은 후보들의 그런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표를 얻기 위한 가식인지 분별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입니다.
대통령이 되면 산업현장으로 시찰을 가기도 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대통령이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7월 전국적으로 호우가 발생해서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이 피해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피해자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높은 곳에서 명령하고, 감독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도자는 무릇 서민들과 함께하는 동반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현장에 있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반은 맞을지 몰라도 국민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을 특별히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그분들의 삶은 후세의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던 베드로 성인이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회개하며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었던 바오로 성인이 있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던 성인들이 있습니다.
성인전을 읽으면 감동의 눈물이 나기도 하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드는 생각도 있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분들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의 나는 작은 고통에도 참지 못하고, 담대한 용기도 없으며,
뜨거운 열정과 굳건한 신앙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친밀감이 가는 성인도 있습니다.
백정이었고, 글도 잘 몰랐는데 어쩌다 교리를 배워 순교의 영광을 얻은 성인도 있습니다.
평생 수도원의 마당을 쓸었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성인이 된 ‘빗자루 수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이 있습니다.
학문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여러 곳으로 복음을 선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생 본당에서 사제로 성사를 충실히 집전했어도 공경받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생깁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 더 나아가 ‘열등감’에서 생기기 마련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사제로서 수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성사 집전에 충실함을 통해 성화의 길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여기저기 본당 특강을 다니면서, 제2의 비안네 신부님들을 많이 만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신부님들 머릿속에는 오로지 본당 교우들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긴급 병자 성사나 장례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할까 봐, 잠시도 본당을 비우지 못하십니다.
뭐라도 하나 생기면, 도움이 필요한 교우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교우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하십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교우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드리고
희망을 드리기 위해 밤잠을 쪼개가며 강론을 준비하십니다.
이런 신부님을 목자로 모신 교우들 표정은 다들 환한 보름달 같습니다.
교우들 표정 보면 즉시 딱 견적이 나옵니다.
그런 분위기에 감동받은 제가 한 마디 인사치레라도 할라치면, 즉시 하시는 말씀,
“우리 본당 교우들이 정말 착하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의 탁월한 모델이요 이정표이신
비안네 신부님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참으로 부족한 사제이지만,
이정표로 삼을 모델이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비안네 신부님께서 탁월한 성인(聖人)으로 자리매김하신 배경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그분이 성인이 되신 비결은? 뭐 엄청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제로서 수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성사 집전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특히 비안네 신부님께서는 오늘 저희 사제들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은 고백성사에 그렇게 충실하셨고, 목숨을 거셨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고백성사의 탁월한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교우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거룩한 영적 생활로 인도하는 데 있어
고백성사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제 생활 내내 고백성사에 올인하신 것입니다.
잘 나가실 때 비안네 신부님께서는 하루 24시간 중에 15~17시간 동안 고백소 안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분에게 고백성사를 보는 교우들의 숫자는 1년에 평균 2만 명이 달했습니다.
여름에는 폭염이, 겨울에는 혹한이 찾아오는 아르스의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고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교우들은 하루 온종일, 혹은 이틀, 사흘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41년간의 혹사에 시달리던 비안네 신부님은
1859년 7월 29일 17시간 동안 고백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외치셨답니다.
“여기까지! 나는 이제 그만이다!”
급격히 건강이 악화 된 그는 닷새 후 8월 4일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주된 업무인 성사 집전에 충실함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다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회당은 악의와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란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들끓었다.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한 것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것은 예수님을 헐뜯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 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우리 이웃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거절하고 몰아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섣부른 앎이 병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법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뿐인 나의 인생 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내세우는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하지 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 금지' 스티커가 붙어 있답니다.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자기 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뿌리 깊은 선입견은 대상을 왜곡되게 보게 하는 색안경이 되어 진실을 가립니다”(함께야).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기도를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확 달라져 오신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묻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어디서 얻으셨는지 잘 압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코로나도 그 성장을 꺾지 못한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국민 가게라 불리는 ‘다이소’입니다.
보통 다이소는 일본 것이라고 여기고
팔리지 않는 싸구려 제품을 파는 곳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1,000원짜리로 질 좋은 제품을 팔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이소가 전국 모든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을 합친 숫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1,500여 매장에서 연 매출 3조 원에 달하는 성과를 냅니다.
1,000~5,000원짜리를 팔아서 그 정도 매출이 나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1997년 천호동에 1호점을 열 때, 한국에서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이 팽배했고
‘1,000원짜리 팔아서 뭐가 남겠어!’라는 생각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50대 이상보다 2330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숍이 되었습니다.
저도 ‘1,000원짜리가 뭐 품질이 좋겠어?’라고 생각했다가
실제로 방문해보고는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없는 게 없고 가격에 비해 품질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이소 신화를 이룩한 박정부 회장의 그러한 지혜와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지혜와 힘은 자신 안에서 샘솟지 못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저절로 똑똑해지는 사람 없고 음식을 먹지 않고 에너지가 솟는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지혜와 힘은 외부로부터 온 것입니다.
박정부 회장은 45세에 회사를 사퇴하고 먹고살 일이 막연하여 무역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일본 100엔숍을 접하게 됩니다.
미국엔 1달러숍이 있고 유럽에도 그러한 회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일본 다이소에 납품하며 배운 것과 유럽을 다니며 공부한 것들을 바탕으로
10년을 준비하여 천호동 1호점을 엽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가게가 될 리가 없다고,
특별히 서울 잘 사는 동네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 말렸지만,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용기는 오히려 잘사는 나라에서 더 건전한 소비를 한다는
지혜를 획득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이런 지혜와 힘은 분명 이미 그러한 사업으로 성공하고 있는
선진국의 상황을 보고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적은 믿음의 힘으로 이뤄집니다. 믿음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누군가의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박 회장의 지혜와 기적 같은 힘은 바로 외국의 성공을 믿고 잘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노력한 결과가 지금의 다이소를 만들었습니다.
박정부 회장이 한국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역업을 하며 외국의 상황을 공부하고 배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만 하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고향에만 갇혀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배우고 공부하셨습니다.
그런 시간을 무엇이라 할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바로 이 기도의 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쇄국정책으로 잘 살 수 있을까요?
기도는 하느님의 지혜와 힘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기도의 힘을 믿을 수 있어야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에게 한 수녀님이 먹을 것이 떨어졌다고 할 때
“그럼 가서 성체 앞에서 기도하세요”라고 하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러자 정말 학교 파업으로 남게 된 부식을 수녀원에 가져온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과 기도를 믿는 것은 하나입니다.
기도를 통해 모든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을 수 있음을 믿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기도하면 다 깨달을 수 있고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음을 믿읍시다.
기도를 믿음과 주님을 믿음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악령을 쫓아내시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저 사람이 어디서...?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그의 형제들은...?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현 캐트린 수녀
조금 안다는 이유로 질문이 많구나.
아는 게 병이지
저러다 아는 게 죄가 될라.
조심해야겠다.
때로
나도 안다고 침 튀기고 목에 핏줄 세우더라.
부끄럽다.
내가 아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이다.
[출처] 마태 13,54-58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