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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4일 오늘의 역사
2021년 향수, 이별노래, 가을편지 부른 가수 이동원 사망
2009년 부산광역시의 실내사격장에서 화재발생 일본인 관광객 등 10명 사망
2009년 11월 14일 오후 2시 26분쯤 부산 중구 신창동 국제시장 근처에 있는 실내 실탄사격장에서 불이 나 11명이 숨지고 5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일본인 관광객 7명과 실내사격장 종업원을 포함한 한국인 4명이 사망했으며, 하라다(37) 씨 등 일본인 4명과 한국인 1명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11명은 육안으로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워 유전자 감식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불에 탔고, 부상자 5명도 모두 중화상을 입었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전신에 85~90%의 화상을 입었을 정도로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이날 화재가 발생한 실내사격장은 신창동 신창동3가 13-1번지 5층짜리 상가 건물의 2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5년 12월부터 277.4㎡ 면적에 5개 사대의 사격실을 갖추고 영업을 시작했다.
불이 날 당시 건물안에는 16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중 일본인 관광객이 11명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국내 여행사를 통해 부산에 놀러와 한국인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남포동과 국제시장 등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참사와 관련해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에게 위로 서신을 보냈다.
2007년 제1차 남북총리 회담(~11.16까지 서울)
2007년 유엔총회 유럽연합이 주도한 사형집행정지촉구결의안 가결. 우리나라는 기권
2004년 석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 세상 떠남
2003년 왜행성 90377 세드나(그림)가 발견되다.
1994년 가톨릭대가 국내 최초로 신장이식수술에 성공하다.
1994년 현대자동차가 태양광자동차를 개발하다.
1993년 전국 6대도시 주유소설치 거리제한 전면 폐지
1993년 SBS 관악산 및 용문산 TV중계소 준공1991 주식회사 서울방송 창립
1993년 한국 고고학의 개척자인 김원룡 박사가 별세
고고학자이며 미술사학자인 삼불 김원룡 박사는 한국 고고학계의 거목이었다. 1961년 그가 서울대에 고고인류학 강의를 개설하기 전까지 한국사 연구는 책상 앞에 앉아 옛 문헌을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로 인해 학문적인 구색을 갖춘 한국 고고학이 등장한 것이다.
옛 무덤을 발굴해서 역사의 올바른 모습을 복원하는 그의 평생의 일은 1947년 개성 근처 법당방 고려고분 발굴부터 시작되어 석촌동 백제고분발굴(1975년 · 1984년), 전곡리 구석기 유적발굴(1980∼83년) 등으로 이어지면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중 가장 걸작인 것은 1971년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 발굴이다.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그는 처음에는 도굴분인 줄 알고 쉽게 시작한 이 발굴에서 무령왕릉과 왕비의 지석과 금관 등 국보급유물 1천여점을 찾아낸 것이다. 이로인해 땅속에서 1천5백년을 묻혀있던 백제문화는 찬란한 위용을 드러내면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다.
김 박사는 1945년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1959년 미뉴욕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서울대교수, 국립박물관장, 고고학연구회장, 문화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고고학개설` `한국고고학연구` `한국미술사` `한국고미술의 이해` 등 58권의 저서와 2백50편의 연구논문을 남겼다.
1991년 소련의 12개공화국 중 7개공화국, 연방 헌법 폐지에 합의
1990년 새 민방 서울방송(SBS) 정식 출범
새 민방 서울방송이 1990년 11월 14일 정식 출범했다. 새 민방의 탄생은 정부가 공민영경쟁체제로 방송정책을 수정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정부는 같은 해 6월 방송구조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국민 감정을 감안, 새 민방의 재벌참여배제 원칙과 특정인의 민방주식 30%이상 소유 금지 등의 기준을 세웠다.
정부는 이 기준에 따라 민방참여를 신청한 60인중 (주)태영을 지배주주로 하는 31인의 민방주주가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태영의 민방주도와 관련, 재벌 배후설, 청와대 관련설 등 의혹이 터져나오면서 일대 파문이 있었다. 새 민방은 1991년 상반기 라디오방송을 내고, 하반기 에 TV전파를 내보냈다
1990년 독일이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의 부칙에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와의 국경으로 인정하는 조항을 넣다.
1990년 마초타키스 그리스 총리 방한.
1984년 동작대교 개통. 14번째 한강교로 길이 1,330m
서울 용산구 이촌동과 동작구 동작동을 있는 한강의 11번째 다리 동작대교가 1984년 11월 14일 개통됐다. 이날 준공식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여사 등이 참석했다.
동작대교는 연장 1,330m, 폭40m, 도로교와 지하철 4호선 전철교의 복합교량으로, 그 폭이 한강다리 가운데서 가장 넓으며 도로교는 6차선 차도 23.6m에 양쪽 인도 5m씩이고, 전철교는 복선 11.4m이다. 난간이 알루미늄으로 꾸며졌으며, 조명효과를 위하여 나트륨 가로등을 달았다.
서울시가 한강대교와 반포대교의 과밀교통량 분산효과를 기대하고 1978년 10월에 착공하여 총공사비 550억원을 들여 이날 개통하게 됐다.
1984년 성균관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 264명 민정당사 점거 농성.
1983년 KBS가 이산방송 찾기 생방송을 마감하다.
1983년 중국 조종사 와 수에천, 미그 17기 몰고 대만에 망명
1982년 프로복서 김득구 경기중 의식불명 4일 후 사망
1982년 11월 14일 프로복서 김득구 선수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챔피언 레이 붐붐 맨시니 선수와 WBA(세계권투협회)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를 하고 있었다. 13라운드까지는 난타전이었다.
14라운드 19초가 막 지났을 때 관중의 환호성이 터졌다. 김선수가 맨시니의 강력한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턱에 맞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로프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심판의 카운트는 끝나 있었고 그는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김선수는 급히 데저트스프링스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뇌수술을 받고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99시간 만인 11월 18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AP는 1982년도 ‘스포츠10대뉴스’를 발표하면서 김선수의 사망을 5위로 올렸다.
1981년 경남 울주군 국도서 버스와 트럭 등 3중 충돌. 35명 사상
1980년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 언론통폐합 및 새로운 통신사 설립을 결의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는 신군부의 압력에 못이겨 임시총회를 열고, 신문-방송-통신의 통폐합과 방송의 공영체제화, 유일한 대형민간통신사 신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 통폐합을 결의했다. 이 결의문은 “신문과 방송, 통신을 자율적으로 개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사실은 통폐합 대상 발행인과 경영인을 보안사로 끌고가 통폐합에 이의가 없다는 각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한 전두환 정권의 강압의 결과였다.
각서에 따라 28개 신문, 29개 방송, 7개 통신 등 전국 64개 매체가 14개 신문, 3개 방송, 1개 통신 등 18개 매체로 통합되고 172종의 정기간행물이 폐간됐다. 언론통폐합 조치는 11월 25일까지 해당사별로 절차를 마무리하고 12월 1일부터 개편체제에 들어갔다. 흡수통합 대상이 된 언론기관은 종합일간지 1개, 경제지 2개, 통신 6개, 방송 6개(중앙3 지방3), 지방지 4개 등 19개사(社)였다.
언론통폐합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아일보를 경향신문에, 서울경제는 한국일보에, 내외경제신문은 코리아헤럴드에, 지방지는 1도1지 원칙하에 흡수 통합하고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은 합병, 연합통신으로 발족하며, 동아방송과 TBC는 KBS에 통합한다는 것 등이다. 또한 지방주재 특파원 제도를 폐지하여 신문이 발행되는 지역 밖의 뉴스는 정부지배하의 통신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도록 제도화하는 한편 KBS와 KBS가 주식의 70%를 소유한 준(準)관영 MBC로 2원화함으로써 방송매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1980년의 언론통폐합은 한국 언론계를 뒤바꾼 일대 사건으로, 이때 단행된 언론인 해직 조치로 1,238명의 언론인 강제해직되었다
1977년 한국과 가나가 국교를 수립하다.
1977년 한국과 스리랑카가 국교를 수립하다.
1974년 제1회 세계식량회담, 국제곡물은행 설치 합의
1973년 호남-남해고속도로 개통
전주와 부산을 잇는 호남-남해고속도로가 1973년 11월 14일 개통됐다. 착공 2년 만에 준공되어 이날 개통된 358km의 이 고속도로는 경인, 경부, 호남(대전-전주), 영동(서울-원주) 고속도로에 이어 건설된 우리나라 다섯번째의 고속도로였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전국을 잇는 1000km의 순환고속도로가 형성되어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단축됐다.
개통식은 이날 오전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롯, 3부요인과 관계인사 그리고 현지주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광주 공설운동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에 앞서 박 대통령은 전주 인터체인지에서 호남고속도로의 개통을 기념하는 테이프를 끊고 시승했으며, 남해고속도로의 개통을 기념하는 테이프 끊기 의식이 구포의 제2낙동대교에서 거행됐다.
호남-남해고속도로공사는 전주-순천을 잇는 호남고속도로 181km와 부산-순천을 연결하는 남해고속도로가 각각 완공되어 순천에서 이어지는 것인데 공사에는 내자 2백13억2천2백만원, 외자 4천3백만달러 등 모두 3백78억7천5백만원이 투입되어 완공된 것이었다.
1972년 소설가 주요섭 세상 떠남
1971년 매리너 9호가 화성에 접근하여 다른 행성의 궤도를 도는 첫 우주선이 되다.
1969년 불국사 중창 시작
1963년 아이슬랜드 남쪽 바다 한 가운데서 화산 폭발
5개월 동안 폭발한 화산 때문에 168m의 화산섬 ‘서트지(Surtsey)’가 만들어짐
1964년 한강교 폭파 고(故)최장식 대령, 무죄확정.
1954년 나세르가 주도하는 이집트혁명회의가 나가브 대통령을 해임하다.
1954년 2월 25일 나기브 이집트 대통령 겸 수상이 가말 아부달 나세르 부통령의 압력으로 사임하고 나세르가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나기브는 군사정부의 몇몇 위원들이 나세르를 반대해 27일 대통령에 복직했다.
이후 양파의 권력투쟁은 계속됐고 결국 11월 14일 나기브 대통령은 해임됐다. 육군장교의 암살과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이슬람교도동지회의 음모에 나기브가 관계됐다는 것이 해임이유였다.
수상 나세르가 주도하는 혁명의회는 각의를 열어 나기브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해임하고 이후부터는 나세르 수상이 전권을 잡게 됐다고 발표했다. 나기브는 나세르에게 밀려났을 뿐 아니라 체포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1954년 10월 수에즈 운하 철수에 관한 영국과의 협상으로 많은 신임을 받고 있던 나세르는 수상 겸 혁명군사회의의장이 되어 이집트의 정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나기브와 나세르의 권력투쟁은 나세르의 승리로 끝이 났다. 1956년 6월에는 영국군을 몰아낸 가운데 치러진 이집트 최초의 국민투표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47년 유엔총회가 한국총선거안(독립관련안)을 가결하다.
1925년 쉬르리얼리즘, 최초의 전람회
1922년 BBC가 첫 라디오방송을 하다.
1920년 11월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라디오 정시방송이 영국에 상륙한 것은 1922년이었다. 그해 2월에 마르코니사(社)가 첫 방송을 시작했으나 10월에 영국의 무선통신기 제조회사들이 설립한 영국방송회사(British Broadcasting Company)에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영국방송회사가 처음 방송을 내보낸 것은 11월 14일이었다.
뉴스와 기상예보를 시작으로 점차 음악콘서트까지 영역을 넓여나갔으나 뉴스는 오후 7시 이후에만 방송했다. 이 회사 회장이 운영하는 신문 판매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민영방송으로 유지되던 이 회사가 공영방송으로 전환한 것은 5년뒤인 1927년이었다. “라디오 방송은 다른 기관의 간섭을 받지않는 공공사업체가 운영하는 것이 좋다”는 의회의 권고를 받아들인 영국 정부가 이 회사를 사들여 공영방송으로 만든 것이다. 영국방송협회 즉 BBC(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가 탄생한 것이다.
1922년 양정고보생들이 일본인교사를 배척하는 맹휴를 하다.
1921년 최초의 영화 <월하의 맹서> 제작
1917년 박정희 전 대통령 태어남
1915년 아인쉬타인, 상대성이론 발표
1889년 인도 초대수상 자와할랄 네루 태어남
1888년 인도의 정치가 자와할랄 네루( ~ 1964. 5. 27)가 태어나다.
1873년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서 대원군이 물러나다.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1873년 11월 14일. 이미 5년전에 대원군의 내정개혁을 비판하는 상소를 한차례 올렸던 면암(勉唵) 최익현(崔益鉉)이 또다시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유림의 기반이 송두리째 뿌리뽑힌 데 따른 자구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원군에 대한 반기였고 도전이었다. 대원군의 행태까지 낱낱이 고발한 이 상소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한 고종의 뜻과 일치해 대원군의 10년 세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면암은 이후에도 아니다 싶으면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됐을 때는 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며 도끼와 상소를 들고 광화문에 나타났고, 고종이 단발령을 내렸을 때는 “40년 군신의 의리는 여기서 끝났다”며 당당히 외치다 흑산도 유배길을 자초했다.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섰을 때는 붓을 놓고 칼을 들었다.
을사조약 체결후 다섯 매국노를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린 면암은 곧 전북 태인으로 내려가 800명의 문도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결국 일본군에 체포돼 쓰시마 섬(對馬島)으로 끌려가 단식으로 저항하다 1906년말 이국땅에서 순국했다. 타협과 굴절을 거부하고 행동하는 지성으로 일관했던 73년의 삶이었다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간에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다.
1840년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 태어남
1831년 독일 철학자 헤겔 사망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 헤겔이 1831년 11월 14일 콜레라로 사망했다. 1770년 슈투트가르트 출생으로 빙겐대학 신학과를 졸업, 가정교사와 대학강사를 거쳐 셸링사상에 동조하다가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을 내놓으면서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이후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었던 1816년에 둘째 주저 ‘논리학’을 저술했고, 1818년에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 교수로 있는 동안 마지막 주저인 ‘법철학 강요’를 내놓았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됐다.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데 있다. 그의 철학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역사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역사주의적 경향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변증법이라는 사상으로도 다대한 의의를 가졌다. 헤겔은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선정한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716년 독일 철학자 겸 수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세상 떠남
1487(조선 성종 18) 한명회(1415-1487) 세상 떠남
1412년 사헌부의 요청에 의해 부녀가 외출 시 얼굴을 가리도록 조처하다. (태종 12년)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망
'유스티니아누스 대법전' 을 편찬했고 성소피아 대성당을 완성시킨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65년 11월 14일 사망했다. 그는 전임 황제들이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하고 지중해 및 서양 세계 전역에 걸쳐 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고자 영토팽창 정책을 중시한 황제였다.
그는 20년(533-~554) 동안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에스파니아 남부, 그리고 시칠리아, 코르시카 등을 비잔티움에 복속시켰다. 동시에 그는 일련의 내정 개혁을 단행했으나 폐습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폭발, 532년에는 니카 폭동으로 자칫 제위를 잃을 뻔한 긴박한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치세 초기에 이미 시작된 로마법의 재편찬이었다. 흔히 '유스티니아누스 대법전' 으로 알려진 이 법전는 로마법에 규정된 사회생활의 기본 규칙들이 그리스드교 윤리에 따라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그후 수백년동안 비잔티움 뿐만 아니라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민법 역할을 했다.
니카 폭동으로 손상된 성소피아 대성당을 복구한 것도 그의 치적중 하나이다. 5년10개월 만에 완성된 성당은 지금까지도 비잔티움 세계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인정받고 있는 건축물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완성된 대성당의 위용을 처음 접하고 나서 "솔로몬, 나는 그대를 능가했소"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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