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달 방한 때 시복미사를 집전했다. 국내 순교자 124위를 '복자'로 추대했다. 124위에는 '경남' 관련 인물이 5명 포함돼 있다. 마산교구 순교자로 신석복 마르코, 구한선 타대오, 정찬문 안토니오, 박대식 빅토리노, 윤봉문 요셉이다.
이에 천주교 마산교구에서는 오는 20일(토) 오후 2시 창원시 의창구 용지문화공원에서'천주교 마산교구 순교복자 5위 경축대회'를 마련한다. 총 3부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는 오후 2시부터 30분 동안 여는 마당이 마련되며 이후 경축대회가 열린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경축미사가 이어진다.
교구장 안명옥 주교는 "마산교구에 5위 복자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이번 경축대회는 5위 순교복자들의 믿음과 순교정신을 찬양하며 본받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경축대회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순교복자 5명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들여다 봤다.
◇공식적인 공경의 대상 '복자'
'복자(福者)'라는 말이 썩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사전적 의미를 옮겨보자면 '로마 가톨릭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생전에 뛰어난 덕행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어져,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이 된 사람'이다. 경축대회 순교영성분과 위원장인 최종록(55) 대건 안드레아 말을 들어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된다.
"평신도-복자-성인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평신도 중 순교했다고 해서 무조건 복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삶이 있어야겠지요. 또한 순교하지 않았더라도 덕행이 남달랐다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서 오랜 기간 준비를 거쳐 이름을 올리면, 교구청 시복시성위원회에서 다시 조사해서 최종적으로 결정합니다. 복자인 분 중에서 다시 긴 세월을 거치면서 성인으로 추대되기도 합니다."
국내에 성인은 103명이며 복자는 이번에 탄생한 124명이다. 경남에서는 성인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복자는 이번 5명이 처음이다. 여기서 경남이라 하면 천주교 마산교구를 말하는 것인데, 그 영역을 행정지역으로 따지면 밀양·김해 일부를 제외한 도내 전역이라고 한다.
이제 그러면 그 다섯 명의 삶을 만나봐야겠다.
◇낙동강에 남아 있는 순교자 숨결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낙동강변에는 명례성당이 있다. 1897년 경남에 가장 먼저 설립된 천주교회 본당이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1866년 대대적인 천주교박해(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신도들은 낙동강을 따라 나루가 있는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지금의 명례성당 건물은 1938년 지은 것이다. 아담하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 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국내에서는 그리 대접받지 못하지만,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 명례성당 바로 뒤편에 복자 신석복(1828~1866) 마르코 생가 터가 있다. 신석복 생가 터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명례성당이 들어선 지 한참 후다. 어느 개인이 축사로 사용하던 것을 매입해 지금은 명례성지 조성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신석복 기념 성당·전시관·신학연구소·교육관·순례길 등이 들어설 계획이다.
신석복은 소금 파는 장사꾼이었다. 그의 소금 봇짐에는 성경공부와 기도를 위한 것들이 늘 들어있었다. 장터 곳곳을 다니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1866년 천주교박해 때 신석복도 체포됐다. 포졸들이 밀양 명례리 집을 찾았을 때 신석복은 진해 웅천장에 있었다.
신석복은 며칠을 기다린 포졸들에게 결국 체포돼 대구로 압송됐다. 혹독한 문초를 당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저를 놓아주신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라"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1866년 3월 31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는 죽어서도 이곳저곳 떠돌 수밖에 없었다. "천주쟁이들은 사람도 아니다"는 밀양 유지들 반대로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고 강 건너 김해 한림면에 안장됐다. 이후 1975년 김해 진영읍 진영성당 공원묘지로 이전됐다. 오늘날 신석복 생가 터에서 바라본 낙동강은 더없이 좋은 경치를 선사한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옛 시절 신석복이 탄 배가 들어오는 걸 가슴 찢어지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가족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신앙 이상의 의미가 담긴 삶
구한선(1844~1866) 타대오는 함안 대산마을 출신이다. 그는 서양 신부를 모시고 다니며 선교를 했다. 늘 짐을 지고 이곳저곳 다녀야했기에 체력도 좋고 지리에 능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역시 포졸들에게 잡혀 모진 매질을 당했다. 그런데 비명을 일절 지르지 않았다고 한다. 때리는 이들도 이상히 여겨 물으니 "제 늙은 어미가 저 문밖에서 듣고 있을 것이니 아프다 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관아에서 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죽지 않을 만큼 고문당한 후 집에 돌아온 지 7일 만에 눈을 감았다. 나이 23살 때였다. 그의 무덤은 지난 2002년 성역화 사업이 진행돼 함안군 대산면 평림마을에 잘 가꿔져 있다.
윤봉문 요셉(1852~1888)은 경북 경주 사람이다. 할머니 입교로 가족 모두 영세를 받았다. 박해가 심해지자 부산 기장군으로 숨어 살다 이후 대마도로 떠나기로 했다. 일설에는 대마도인 줄 알고 내린 곳이 거제도였다고도 한다. 그는 체포 후 진주로 압송될 때 칡넝쿨을 발 양쪽에 달고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 지금 거제 일운면 지세포에 성지가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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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의 묘./천주교 마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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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문 안토니오(1822~1867)는 진주시 사봉면에서 태어났다. 아내 권유로 입교했다가 45세 때 순교했다. 그의 가족들은 머리가 없는 시신을 가져왔다고 한다. 지금 고향 땅에 있는 그의 묘소는 '무두묘'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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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식의 묘./천주교 마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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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식 빅토리노(1812~1868)는 김해 진례면 사람으로 조카와 함께 참수됐다. 그는 죽어서도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남의 문중 산에 평장으로 누워 있다.
최종록 경축대회 순교영성분과 위원장은 "신앙을 떠나 모진 매질에도 어머니 마음 아플까봐 비명을 참는 아들, 또 혼자 모든 걸 안고 가려는 그들에게서 오늘날 사람들은 많은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