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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미국 유인 달 탐사선 아르테미스 1호 발사
202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꼭 읽어야 할 올해의 책’ 100권에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 선정
2019년 스리랑카 대통령 선거, 독재자 마한다 라지팍사 전 대통령의 동생 고타바야 라자팍사(70세) 당선
2018년 해군 첫 훈련함 한산도함 진수식
해군의 첫 훈련함인 한산도함이 2018년11월16일 오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한산도함은 대한민국 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교육·훈련을 목적으로 건조된 함정으로, 2013년 방위사업청이 현대중공업과 탐색개발 계약을 체결해 건조가 시작되었다.
한산도함은 길이 142m, 4,500t급으로 최대속력은 24kts다. 순항속력 18kts로 7,000마일(12,000㎞ 이상) 이상을 항해할 수 있다.
한산도함은 400여 명 이상의 거주공간은 물론 200명 수용이 가능한 대형 강의실 등 3개의 강의실과 조함·기관 등의 실습실을 갖췄다.
한산도함은 위기시 기본 전투함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76㎜/40㎜ 함포와 대유도탄 기만체계 등도 장착하며, 해난사고시 의무지원, 인원이송 등 구호활동 지원 등의 다양한 임무도 수행이 가능하다.
특히, 국내 군함 중 최대 규모의 의무실과 병상을 갖춰 해상에서 발생하는 대량 전상자의 초기 처치와 후송을 담당하는 전상자 구조·치료함 (CRTS·Casualty Receiving and Treatment Ship)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 전상자 구조·치료함은 해상이나 도서지역에서 발생한 전상자를 수용, 응급처치를 담당하는 “해상 응급실” 역할을 하는 함정이다. 자체 의무시설과 인력, 헬기 갑판을 보유하여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육지의 병원으로 신속하게 이송할 수 있다.
한산도함의 의무구역은 중환자 처치를 위한 대수술실 1실을 포함한 수술실만 3개실에, 진료실과 병실도 갖추었다.평상시 평소 진료실·수술실은 강의실로, 60실 규모(중환자실, 일반병실 구분)의 병실은 실습생 침실로 사용한다.
한산도함은 상륙기동헬기 이·착함도 가능하고 해상작전헬기 2대를 격납할 수 있다.
해군은 한산도가 임진왜란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위치했고, 한산도해전의 배경이라는 점을 고려해 함명을 한산도함으로 정했다
2016년 조류인플루엔자(AI) 발생, 정부의 늑장대처로 12월말까지 2200만 마리의 닭 살처분
2013년 LG전자의 자가용 헬기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 아파트와 충돌 탑승자 2명 사망
2010년 전통가곡.대목장.매사냥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결정
2010년 11월 16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무형문화유산 정부간위원회에서 한국의 전통 성악곡인 가곡(歌曲), 전통 목조건축의 최고 책임자인 대목장(大木匠), 매를 훈련시켜 야생 먹이를 잡는 매사냥 등 3건의 무형문화재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목록에 등재되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은 2003년 채택된 무형문화유산 보호 국제협약에 근거해 탄생한 것으로 ‘긴급보호가 필요한 무형문화유산목록’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번에 등재가 결정된 전통가곡·대목장·매사냥은 각국 무형문화유산 목록집 성격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자국의 국내 목록에 등재된 무형문화유산 중 관련 공동체 등의 동의와 기타 등재요건을 갖추어 신청하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무한대로 등재할 수 있다.
이번에 등재가 결정된 무형문화유산 중 전통가곡은 조선시대의 정가(正歌) 성악곡으로 중요무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되어있으며, 현재 전승되고 있는 가곡은 모두 41곡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대목장은 나무를 다루는 전통 건축의 장인 중에서도 집을 짓는 전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요무형문화재 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사냥은 매를 훈련하여 야생상태의 먹이를 잡는 방식으로, 한국에서는 한로(寒露)와 동지(冬至) 사이의 겨울에 주로 했다. 매사냥에 대한 등재 신청은 한국과 아랍에미리트(UAE)·벨기에·체코·프랑스·모로코·카타르·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스페인· 몽골 등 11개국이 공동으로 했다.
2010년 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어 있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은 종묘 및 종묘제레악(2001년), 판소리(2003년), 강릉단오제(2005년), 강강술래(2009년), 남사당(2009년), 영산재(2009년), 제주 칠머리당영등굿(2009년), 처용무(2009년)와 이번에 등재된 전통가곡, 대목장, 매사냥을 포함한 11건이다.
2009년 미셜 위, LPGA 프로데뷔 첫 우승
2009년 11월 16일(한국 시각)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과달라하라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로레나오초아인비테이셔널에서 미셸 위(위성미)가 13언더파 275타로 투어 첫 우승을 차지했다. 2위 폴라 크리머(미국·11언더파 277타)와는 2타 차였다.
4세 때 골프를 시작한 위성미는 10세 때 이미 미국골프협회 대회 출전권을 얻었고, 2003년 US 여자아마추어 퍼블릭링크스 챔피언십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다. 큰 키와 화려한 외모, 남자 못지 않은 장타로 ‘골프 천재 소녀’, ‘여자 타이거 우즈’로 불렸으며, 2005년 10월 프로 무대에 뛰어들면서 소니, 나이키와 연간 1000만 달러로 추정되는 계약을 맺어 ‘1000만 달러의 소녀’라는 별명도 얻었다.
지난 2월 SBS오픈에서 2위를 차지하며 부활을 예고하더니, 올해 18개 대회에 출전해 10위 안에 7차례, 준우승 2회를 차지하는 등 상승세를 계속한 끝에 마침내 생애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2008년 북한 미국 2대 1로 꺾고 제1회 FIFA 17세이하 여자축구 월드컵(뉴질랜드) 우승
북한여자 축구는 2007년 제1차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16세 이하) 우승, 2006년 제3차 FIFA 20세이하 여자월드컵 우승, 북한의 김광민 감독은 2008년 아시아 최우수여자축구감독, 리금숙 선수는 2007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올해의 선수
2008년 캘리포니아 곳곳서 큰 산불..LA 비상사태 선포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남부 곳곳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 수백 채의 주택이 불타고 주민 2만여명이 대피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산불로 말미암아 수천 에이커의 산림이 불타면서 발생한 연기가 이날 하루 종일 LA 주변 하늘을 뒤덮고 주요 고속도로가 일시 폐쇄됐다.
LA 북쪽 샌퍼난도 밸리의 실마 지역에서 14일 발생한 산불은 계절성 강풍인 샌타애나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확산, 이날 저녁까지 8천에이커의 산림을 태웠고 500채 이상의 이동식 주택이 파괴됐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이같이 산불 피해가 확산되자 이날 LA 카운티 일원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6일 오후까지 몬테시토 지역의 산불은 대부분 진화됐지만 주택 200여채가 손실된 것으로 밝혀졌다.
2007년 김구 암살 배후 추적해온 권중희 세상 떠남
2006년 신자유주의의 선구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 세상 떠남
2004년 콘돌리자 라이스 흑인여성 최초 미국 국무장관에 선출
2002년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사스)의 첫 발병 사례가 중화인민공화국 광둥 성에서 발견되다.
2001년 윈도 XP가 발매되다.
2000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25년 만에 베트남 방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2000년 11월 16일 지난 1975년 베트남전 종식 이후 25년 만에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 3박4일간의 공식일정에 들어갔다.
클린턴 대통령은 천득령 베트남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베트남은 이제 적이 아니라 우호국"이라고 선언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몰려나온 베트남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8일에는 베트남 전쟁 중 미 공군기가 추락한 하노이 인근 빙푹 마을을 방문, 실종자 유해 발굴현장을 지켜봤다.
베트남전 참전을 기피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집권 이후 베트남과의 화해에 앞장서 지난 1994년 무역제재 해제에 이어 1995년 7월에는 양국간 교역을 정상화하는 무역협정을 체결했었다.
1995년 노태우 전대통령 구속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7시30분 수사관 2명의 호위하에 대검 청사를 나와 검은색 프린스 승용차에 올라 오후 7시56분쯤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도착, 입감절차를 밟고 독방에 수용됐다.
노씨는 승용차에 오르기 직전 4백여명의 보도진 앞에서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며 나 때문에 곤욕을 치른 기업인들을 보살펴 달라" 며 "모든 책임을 치고 처벌을 달게 받겠다" 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앞서 대검 중수부는 이날 오후 노씨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 오후 6시51분 서울지법 항소6부 김정호판사로부터 발부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노씨는 재임기간인 1988년 3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과 동아그룹 최원석회장 등 30개 재벌기업체 대표로부터 기업경영에 대한 선처명목으로 모두 2천3백58억9천6백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1994년 해양법에 관한 유엔 협약이 발효되다.
1991년 36개 여성단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발족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결성
1990년 11월16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찾기 위해 37개국 국내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를 결성했다
정대협은 유엔인권위원회의 위안부 문제 상정을 이끌어내고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는 등 다양하고 상당한 결실을 맺었다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는 1992년 1월부터 진행되고 있다
1989년 제4차 남북체육회담, 남북단일팀 명칭 `코리아`로 결정
1988년 삼성전자, 세계2번째로 1MS램 개발
1988년 북한 연형묵 총리, 부총리급을 단장으로 하는 남북정치군사회담 제의
1988년 파키스탄 군정 11년만의 총선. 베나지르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PPP) 승리
1987년 낙동강하구둑 준공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과 명지동 사이의 낙동강 하류를 가로막은 낙동강 하구둑이 1987년 오늘 준공됐다.
2,400미터의 낙동강 하구둑 준공식에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했다.
낙동강을 댐식으로 가로막은 낙동강 하구둑은 국내 최대 규모이다.
둑위에 4차선 도로가 만들어져 교통난 해소에도 큰 도움을 주게 됐다.
낙동강 하구둑은 인근지역 식수난 해결과 쌀 증산에도 크게 기여했다.
1966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 제 179호로 지정된 낙동강 하구 철새도래지는 사하구 다대동에서 강서구 명지동, 녹산동, 천가동을 지나 북구 금곡동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말한다.
사하구 하단동과 강서구 명지동 사이에 낙동강 하구를 막은 둑으로 1983년 9월에 착공하여 1987년 11월 16일에 준공되었다.
총 연장 2.4km에 달하는 이 둑은 하단동과 을숙도 사이의 수문부가 0.51km, 을숙도와 명지동 사이의 토언제가 1.89km로 되어있다. 총 1천 5백 75억원이 투입된 이 하구둑이 건설됨으로써 지금까지 바닷물로 인한 부산 시민의 식수원 확보에 어려움이 해결되었으며 김해평야가 염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부산 - 진해간의 거리가 10km나 단축되었다.
그러나 1983년 부터 시작된 낙동강 하구둑 공사 때문에 이곳의 절반가량인 갈대숲은 완전히 물속으로 가라 앉게 되어 매우 아쉽고 환경 파괴문제로 인한 비판도 만만찮았다
1984년 동양 최장 대호방조제 준공
충남 서산군 대산면 화용리에 완공된 대호방조제가 1984년 11월 16일 준공식을 가졌다. 대호방조제는 길이 7.8km이며 충남 서산시 대산읍과 당진군 대호지면을 연결하는 동양최대의 방조제다.
이날 준공식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해 "농업개발사업을 꾸준히 추진하고, 농외소득증대를 위해 지방중소기업을 육성하는 등 농어촌종합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일 것"이라고 말하고 농경지 확보와 보전을 강조했다.
대호방조제는 다목적 수자원 확보와 농경지 확장을 목적으로 건설됐으며, 이 방조제가 완공됨으로써 간척답 3,700ha, 배후지 4,000ha 및 2,175ha의 담수호를 확보했으며 연간 51,198M/T의 식량증산을 이룰 수 있게 됐다.
1983년 PLO반군, 아라파트 최후거점 점령
1983년 소련 `특무부대` 창설
1983년 소련, 미국기술 훔쳐 순항미사일 개발
1982년 국내 처음 근대2종경기(수상,육상) 개막. 우승 강석인
1982년 아시아경기연맹(AGF), AGF를 해체하고 새로운 아시아올림픽 평의회
(OCA) 창설키로
1981년 연합통신, 제1회 전국신문-방송발행인 및 편집-보도국장회의 개최
1981년 미국-중공 공동경제협의회 개막(북경)
1977년 장성탄광 갱도에 화재, 46명 사상
1976년 세계 희귀조인 황새, 제주 성산포서 발견
세계적인 희귀조 황새 1마리가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포에서 발견됐다. 이 황새는 1976년 11월 16일 성산포수산고 양어장에 나타나 수만마리의 황로, 백로, 왜가리 틈에 섞여 지내는 것이 목격돼 언론에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 황새를 1971년 4월 충북 음성군에서 쌍으로 살다 밀렵군에 의해 짝을 잃은 암놈 황새로 추정했다.
천연기념물 199호인 황새는 1920년대까지 세계적으로 40마리정도였던 것이 2차대전후에는 차차 줄어 1958년에는 21마리, 1966년에는 9마리뿐인 것으로 보고됐다.
황새는 황새목 황새과의 조류로 몸길이는 약 112cm정도이며 날개길이는 약 66cm정도이고 온몸이 순백색이지만 날개 끝의 깃털과 부리는 검은색이다. 황새의 서식지는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및 북아메리카의 북부를 제외한 전 세계이다. 또한 황새는 명관이나 명관근이 없어 울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길조로 여겨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서해와 충북 일대에서 번식하던 텃새였으나 6·25전쟁과 1960년대쯤 밀렵으로 모두 희생됐다.
1975년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와 모리타니아가 분할키로 합의
1970년 파키스탄 태풍과 해일로 150만명 사망
1969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첫 등장
1962년 프랑스와 영국이 콩코드기 공동 개발을 합의한 이후 7년만에 콩코드 여행기가 선을 보였다.
민간여객기 사상 최초로 음속의 벾을 뚫었던 콩코드기가 첫 선을 보인 것은 1969년이다.
속도 마하2(시속 1370마일)에, 난기류보다 높은 고도 6만피트 상공을 비행, 빠르면서도 쾌적한 여행을 제공해왔다.
이번에 사고가 발행한 뉴욕․파리 노선은 지난 77년부터 운항이 시작됐다.
콩코드기는 상업용 여객기로서는 두번 세계신기록을 갱신했다.
즉 92년 지구를 32시간 49분만에 일주했고, 3년뒤엔 그 기록은 31시간 27분으로 줄였다.
운항을 시작한지 31년이 지났음에도 1979년 착륙 때 조종 실수로 타이어가 펑크난 것이 유일한 사고였다.
그러나 2000년 7월 25일 오후4시45분쯤(현지시간) 파리 샤를 드골공항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소속 콩코드기가 이륙직후 공항 부근 고네스 마을의 호텔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승객-승무원 109명과 추락현장에 있던 마을주민 4명 등 총 113명이 사망했다.
30년 무재해의 기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1965년 소련, 금성탐사를 위한 `금성3호` 발사
1962년 콜롬보계획 14차 자문위 한국가입 가결
1962년 프랑스 총선, 드골체제 확립
1960년 미국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 사망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서 비비안 리와 석양 아래에서 환상의 키스신을 벌였던 할리우드의 대스타 클라크 게이블이 1960년 11월 1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9세였다.
특유의 미소와 큰 키, 넓은 어깨는 희대의 바람둥이로서의 구성요소를 완벽히 구비한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모와는 달리 미국 오하이오주의 석유 광부 아들로 태어난 클라크 게이블은 생후 7개월 만에 모친을 잃고 홀로 계모의 손에서 키워졌다. 10대 시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극단의 심부름꾼, 전화설치공, 신문 배달부 등의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시골 극단의 뮤지컬 한 편에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이기도 한 조세핀 딜런을 만나 철저한 연기수업을 받으며 최고의 배우가 되기 위한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년)' 을 비롯,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등에 출연하며 자타 할리우드 최고의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1959년 대구 국제백화점에서 화재 300여 점포 소실
1957년 64개국 공산당-노동당 회의. 모스크바에서 개최
1952년 미국 수소폭탄실험 성공
1949년 외자구매청 신설
1945년 44개국의 교육문화회의에서 유네스코 헌장 채택
영국과 프랑스가 주최국이 되어 44개국 간에 연합국 교육문화회의를 개최, 여기에 과학이 첨가되어 1945년 11월 16일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헌장(유네스코헌장)이 채택됐다.
이는 1942년 10월 유럽 여러나라의 문교장관들이 런던에서 문교장관회의를 열고 전쟁으로 파괴된 교육시설 및 문화재를 복구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촉구하는 결의를 하자, 미국이 이에 동조하여 1944년 국제기구안이 제시됨으로써 설립이 구체화되었다.
유네스코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약칭으로 교육, 과학, 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하여 국가간의 이해를 돈독히 하고 협력관계를 촉진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전을 확보하려고 하는 국제연합의 전문기구이다. 사무국은 파리에 본부 사무국이 있고, 세계각국에 지역사무소가 있다.
1945년 유네스코 창립총회
영국과 프랑스가 주최국이 되어 44개국 간에 연합국 교육문화회의를 개최, 여기에 과학이 첨가되어 1945년 11월 16일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헌장(유네스코헌장)이 채택됐다.
이는 1942년 10월 유럽 여러나라의 문교장관들이 런던에서 문교장관회의를 열고 전쟁으로 파괴된 교육시설 및 문화재를 복구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촉구하는 결의를 하자, 미국이 이에 동조하여 1944년 국제기구안이 제시됨으로써 설립이 구체화되었다.
유네스코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약칭으로 교육, 과학, 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하여 국가간의 이해를 돈독히 하고 협력관계를 촉진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전을 확보하려고 하는 국제연합의 전문기구이다. 사무국은 파리에 본부 사무국이 있고, 세계각국에 지역사무소가 있다.
1940년 나치스, 바르샤바에 '게토' 설치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격리하기 위한 '게토'(Ghetto)가 1940년 11월 16일 바르샤바에 설치됐다. 게토는 소수 인종이나 민족 또는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내의 한 구역을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1179년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교의 교류를 금지한 제3회 라테라노공의회에서 발단하여 1280년 모로코에서 회교도들이 유대교도를 강제로 분리이주 시키면서 형성되었다. 바르샤바에 설치된 게토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수용소로 보내기 전 강제 이주시킨 유대인 집단촌이다. 원래는 프라하에 설치할 예정이었으나 학살 계획이 임박해오자 급히 바르샤바 시내에 설치했다.
둘레에는 3m 높이의 콘크리트 벽이 설치된 4㎢의 공간에 50만 명의 유대인들은 열악한 위생상태 하에서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식사량도 독일인 평균(2,400㎉)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쳐 결국 1942년 7월까지 기아와 질병 등으로 12만명이 이곳에서 죽어나갔다. 나치에 의해 설치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죽음의 도살장이었다면, 게토는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대기실이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비명과 시체만이 난무했다.
게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게 학살 수용소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은 1942년 7월 22일이었다. 그해 9월 12일까지 약 30만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남아있는 대부분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히틀러는 "바르샤바의 게토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1943년 1월 18일 두 번째 강제 이주가 시도되자 최초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비밀리에 무기를 확보하며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유대인들은 SS대원을 20명이나 살해했지만 그 댓가로 1,000여명의 유대인을 잃어야 했다. 1943년 4월 19일,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SS대원들이 다시 들이닥쳤다. 권총, 수류탄, 화염병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유대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 사이 죽어간 유대인은 1만 3,000명을 헤아렸다.
1938년 영국, 이탈리아의 이디오피아 병합 승인
1933년 미-소 외교관계 수립
1929년 프랑스 정치가 클레망소 세상 떠남
1919년 일본 낭인들, 항일중국학생들을 폭행(복주사건)
1918년 헝가리 공화제 선언
1908년 동양애국부인회, 부인병원 설립
1908년 보이스카우트 창설
스카우트 운동은 1907년 영국의 베이든 포엘경(Lord Baden Powell)에 의해 시작되었다.
베이든 포엘경은 1889년 남아프리카의 마페킹 전투에서 어린 소년들에게 척후활동을 시켰고, 그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한몫을 하였다.
이 군인생활에서 그는 소년들의 민첩성과 용감한 활동에 깊이 감동을 받았고, 귀국 후 소년들을 위한 훈련법을 연구, 1907년 브라운씨섬에서 야영을 실시, 스카우팅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활동](Scouting for boys)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1908년 영국에서 보이스카우트를 창설하였다.
스카우트(Scout)란 명칭은 <척후(斥候)>를 뜻하는 말이다
1907년 오클라호마, 미합중국에 편입
1906년 토지-건물전당(典當)집행규칙 발표
1904년 제중원(세브란스병원) 낙성식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이 남대문 밖 도동으로 옮겨져 새로 준공되었다.
제중원은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앨런이 정부의 후원을 얻어 1885년 서울 재동에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원래 이름은 광혜원(廣惠院)으로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 모체이기도 하다.
1904년 존 앰브로즈 플레밍이 진공관을 발명하다.
1903년 목포 부두노동자 파업
1903년11월16일 목포항의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이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40여 일 동안 계속된 이 파업은 1898년 2월 파업을 시작으로 매년 되풀이된 파업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었으나, 반제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는 점에서 그간의 단순한 임금인상 투쟁과는 성격이 달랐다.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1897년 10월 네 번째로 개항한 목포는 당시 전국 최대의 대일(對日) 미곡 수출 항구였다.
1903년 파업의 발단은 일자리 알선 대가로 부두노동자들로부터 임금의 10%를 뜯어온 십장들이 그 해 8월 소개비를 20%로 올리며 중간착취자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한 데 있었다.
노동자들이 십장 수취율 인상에 반대하며 십장제 폐지를 요구했음에도 일본인 자본가와 경찰은 십장들을 거들고 나섰고, 이에 따라 11월16일 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파업은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친일 상인들 사이의 폭력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12월14일 일본 군함과 군대가 목포에 들어와 파업 진압에 나섰어도 사태는 잦아들지 않았고, 마침내 조선 정부가 개입해 십장 선임에 노동자들이 참여하도록 하고 상납금을 재조정한 뒤에야 노동자들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 11명에게는 끝내 체포령이 떨어졌다.
1900년 세계최초로 시민이 창설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제1회 콘서트 개막
1899년 청-프랑스, 광주만 조차조약 조인
1869년 수에즈 운하 10년간의 공사 끝에 공식 개통(1859.4.25.-1869.11.16.)
이 운하에 의해 지중해와 홍해가 연결되고,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가 나누어진다.
운하길이는 지중해의 포트사이드(부르사이드)로부터 남쪽 수에즈 만까지 168㎞이며, 부하이라트알만질라(멘잘라 호)·부하이라트앗팀사(팀세 호)·알부하이라알무라(비터 호) 등의 물을 이용한다. 프랑스에 의해 건설되어 1869년에 완공된 이 운하는 유럽과 인도양 및 서태평양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항로가 되었다(→ 수에즈 운하 회사).
운하 서쪽에는 나일 강 저지대 삼각주가 있고, 동쪽에는 지대가 높고 지형이 험난한 불모지인 시나이 반도가 자리잡고 있다. 수에즈 지협은 다양한 지형으로 되어 있다. 남쪽에는 풍화와 침식을 견디어낸 수많은 석회암 및 석고지형이 여기저기 그 모습을 현저히 드러내고 있고, 앗팀사 호수에서 남서쪽으로 나일 강 삼각주 중앙부와 카이로까지 뻗은 좁다란 계곡(앗투마이 계곡) 또한 두드러진다.
처음에 이 운하는 수심 8m에, 폭은 바닥에서 약 22m, 수면에서 57m였다. 계속된 수로 확장공사를 거치면서 1967년에 이르러 수에즈 운하는 수로 폭이 가장 좁은 곳이 54m, 수심은 운하 전체가 일정하게 거의 12m(간조)에 달했다. 1978년 이 운하에는 하루 평균 58척의 선박이 통과했다. 수에즈 운하 공사로 인해 과거 수에즈 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던 이 지역 일대에 촌락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1967년 6월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중에는 거의 모든 주민이 소개되었으며, 주거지도 큰 피해를 입거나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1975년 운하가 다시 개통되면서 이 지역 일대의 재건사업이 시작되었고, 다른 곳으로 소개되었던 주민들도 1978년까지는 거의 모두 옛 거주지로 돌아왔다. 1975~80년에 또 한 차례의 운하 확장공사가 있었고, 그 결과 지금은 흘수 16m의 선박들까지도 운항할 수 있다
데베르소이르와 앗팀사 호수, 포트사이드에 새로운 우회수로들이 건설되었고, 수로의 꺾어진 부분들이 최소 회전반경 5㎞의 직선로로 개축되었으며, 비터 호수의 정박지들은 수심 및 수로폭이 확장되었다.
1831년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사망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1831년 11월 16일 콜레라로 사망했다.
“전쟁에 관심 있는 사람이 보고 후회하지 않을 책을 쓰겠다”는 결의하에 클라우제비츠는 12년 동안 원고를 썼다. “살아있을 때는 결코 출판하지 않겠다”고 했던 부끄러움 많던 천재의 말대로 이 책은 그가 죽은 다음해 부인에 의해 출간됐다.
1780년 프로이센에서 출생한 그는 12세때부터 군대 생활을 시작해, 21세 때에는 사관학교에서 병학을 배웠다.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했으나 프로이센이 패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조국을 등지고 러시아군과 함께 반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했다. 이처럼 생애 대부분이 나폴레옹 1세의 군사적 전성기와 맞물려 있어 군인으로서 클라우제비츠의 생애는 불우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길 ‘전쟁론’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가 한직인 육군대학 교장으로 재직했기 때문이다.
1643년 상중 혼인 금지
1532년 스페인 프란시스코 피사로, 잉카제국 침략
1532년 11월 16일 스페인의 군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기습적으로 황제를 체포했다. 피사로는 186명의 군사와 37마리의 말을 이끈채였고 황제는 군사 3,000을 거느린 채였다.
황제는 계략에 의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결박당했으며, 수천에 이르던 황제의 군사는 스페인의 총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다.
황제를 감금한 피사로는 황제의 몸값으로 황금은 건네받은 뒤 이듬해인 1533년 8월 29일 황제를 스페인 왕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했다. 그해 11월에는 수도인 쿠스코를 점령해 잉카제국을 무너뜨렸다. 피사로는 코르테스와 함께, 흔히 콘키스타도레스(정복자들)라고 불렸던 16세기 스페인의 약탈적 모험가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다. 잉카는 종족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군주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잉카제국은 오늘날의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서 남으로 칠레까지 아우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절대 군주를 정점으로 한 계급사회였고 철저한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였지만,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튼실했다. 그래서 잉카제국의 정체(政體)를 `신권적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신석기문명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로마에 비길 만한 전국적 도로망도 갖추었고 뇌수술을 할 정도로 과학도 발달해 있었다. 특히 석조건축은 쌓아올린 돌 틈으로 면도날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밀했고, 큰 지진도 이겨낼 만큼 견고했다 .잉카제국을 정복했던 피사로는 1541년 6월 26일 피살됐다.
1308년 동성동본의 결혼금지
우리 사회에 이 성과 본관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신라말에서 고려초로 추정된다.
중국의 한식씨성(漢式氏姓)제도를 들여와 모방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왕실의 박 석(昔) 김 3성과 이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 6성 등이 생겼고 고려때 성씨가 일반화되면서 본관제도도 자리잡혔다.
신라시대에는 이성혼(이성혼)보다 동성혼(동성혼) 근친혼(근친혼)이 많았다.
왕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동성혼 근친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성혼을 법률로 금한 것은 고려후기 성리학(성리학)이 들어온 후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동성불혼(부혼)이 관습법으로 자리잡으면서 동성혼은 철저히 금지됐다.
민법의 동성동본(동성동본)금혼 규정은 이런 배경에서 유래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금지되어 온 동성동본 혼인 금지는 1997년 7월 16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동성동본간 혼인을 금지한 민법 제809조 1항에 대해 사실상 위헌에 해당하는 헌법불합치라는 결정이 나왔다.
이로써 금혼조항은 개정될 때까지 법률효력이 정지되며 2만쌍에서 최고 20만쌍으로 추산되는 사실혼 관계의 동성동본 부부들이 이날부터 법적부부의 지위를 찾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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