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 동냥
심청전에 나오는 심봉사는 젖동냥을 받아 딸 청이를 키웠다.
그런 청이는 자라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데
권선징악의 대표적 이야기 중 하나다.
옛날엔 먹고살기 어려워서였던지
산모가 젖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한다.
그래서 젖동냥으로 키우는 일들이 많았다는데
나도 또한 그런 경우였다.
그래서 그 사연을 아래에 붙여본다.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밤은 고요하고 방은 물로 시친 듯합니다
이불은 개인 채로 옆에 놓아두고
화롯불을 다듬거리고 앉았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화롯불은 꺼져서 찬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오히려 식지 아니하였습니다
닭의 소리가 채 나기 전에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였는데
꿈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그려. / 만해 한용운-
지난밤 설친 잠을 보충한다고
일찌감치 잠자리를 펴고 누워보았다.
가슴을 아래위로 쓸어내리다가
다시 뒤뚱거리기도 하면서 잠을 청해 보지만
눈은 왜 그리도 말똥말똥하던지.
이 밤도 이렇게 놓치고 말았으니
이것은 무슨 변고란 말이냐.
군에 입대하여
외출을 허락받을 정도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나 보다.
주머니의 돈 몇 푼 확인하고는
남대문 시장을 찾았다.
나일론이 한참 유행하던 때라
나일론 셔츠와 카키색 바지를 하나 사 입고
다시 염천교 아래를 찾아갔다.
구두거리라고도 하는 그곳에서 기성화 한 켤레 사 신고
본능적으로 달려간 곳은 나의 태어난 고장
인천의 백마장 어느 거리였다.
난리를 피해 시골로 내려간 후
이제 처음이니 벌써 15년의 세월이 흘렀나 보다.
"아이고 난석이 아니냐?"는 반가운 인사 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고
이내 들른 곳은 길자네였다.
등에 업고 있는 아기를 건사하느라
벌써부터 얼굴 한편에 버짐까지 핀 그네는
반가움 반, 어리둥절 반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엉덩이를 반쯤 마루에 대고 걸터앉았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네의 동생 소식만 어물어물 묻고 말았다.
어느 교육대학 재학생으로
방학을 맞아 여행을 갔다는 소리에
고개만 끄덕이다 귀대하고 말았으니...
이녁아
나의 어릴 적 집 옆에는 길자네가 살았더란다.
하도 가난하여 내 아버지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던
동갑내기 그 길자네.
그네 아버지는 내 아버지와 친교가 깊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 언젠가 돌아가셨다지.
그분의 아내가 홑몸으로 길자와 그 동생,
그리고 전쟁고아인 양아들 하나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아녀의 몸으로 미제 물품을 팔아가며
세 식구를 건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랴.
길자는 내가 그네를 찾았을 때 그 양 오빠와 이미 결혼해
아기 하나를 업고 있었는데...
이녁아
내 어머니는 젖이 부족하였었다는구나.
하여 나는 길자 어머니 젖을 많이도 빨아먹었다고 하지.
그러니까 한 여자의 젖을 한쪽은 길자가,
다른 한쪽은 내가 다 빨아먹고 빈 쭉정이를 만든 셈이구나.
이 말을 듣던 순간 내 머릿속에는
길자네를 자주 드나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더구나.
이녁아
내가 제대한 후 결혼을 하던 해
길자 어머니를 초대하였었지.
내가 초대하였는지,
아니면 내 아버지가 초대하였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참 반가운 만남이었다는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지.
몇 해 전 길자네가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는 말을 듣고는
찾아볼 생각도 했다만
이런저런 일로 미루어오다가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이녁아
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길자 어머니는 살아 계신지,
이제는 그것이 궁금하구나.
내 어머니가 시집살이 서러움을 풀어놓을 때
턱 밑에서 정성스럽게 받아 들으셨다던
그 작고 빈약했던 길자 어머니...
얼마 전엔 나의 후배가 인천교육청에 출장 중이라기에
어디엔가 선생님으로 있을 길자 동생 정임이를 찾아 달라 일렀지.
그 대답은 경인지역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선생님은 안 계시다는구나.
아마도 나보다 두어 살이나 아래 일터이니
이젠 퇴직하였으리...
아, 이제 나는 내 어머니를 잃고
다시 길자네 까지 잃은 셈이 되는구나.
찾을 수 있다면 내 아이의 출산 소식도 일러둘 참이었는데
나의 추억 더듬기는 이것으로 끝이 난 모양이니
간밤의 가슴 쓸어내림은 여기에도 연유할 게다.
이녁아
길자네를 만난 들 내가 어쩌겠느냐.
그러나 생각나는 사람들을 품고 속 알이 하는 것 보다야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런들 또 누가 있어 무어라 하랴.(어느 봄날의 단상)
언젠가 이 글을 올렸더니
지금도 백마장에 산다는 어느 여성회원이 길자네를 찾았다 했다.
바로 자기의 외사촌 언니라는 거였는데,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게 해 달라 했더니 그러마고 했지만
눈이 빠져라 하고 기다린 끝에 온 답신은 이러하였다.
"이제 만나서 무얼 하게?"
나의 추억 찾기는 여기서 끝났으니
차라리 추억 속에 살걸 그랬다.
카페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인연들로 얽히고
때로는 잊지 못해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다.
모래알 같이 모여 하루살이 같은 생활을 해나간다 하지만
그리운 사람을 심어놓을 일이다.
그에 더해 그리워하는 사람도 심어놓을 일이다.
그래야 싸늘한 방 안에 홀로 누워 있어도
훈기를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첫댓글 위 사진중에 난석선배님과 길자님이 계신것 같습니다
"이제만나서 무얼하게" 는 기다리다 지쳤다는 의미로도 들립니다
큰형과 막내이모와는 1살차이라 큰형은 외할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20대초반에 요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군병장 시절에 한 번 만나긴 했으니
다행인데요
또 드나들고 싶데요.
아~~심정을 울리네요
네에^^
석촌 형님!
그렇다고 박통이 큰형수 젖을 먹고(동냥으로) 자랐다고
다 까발리면 제가 쪼금 창피하지요.
하이튼간 형님의 사연, 잘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삭제하렵니다.ㅎ
리얼하게 한다는게 너무 나간 모양입니다.
@석촌 삭제까지 할 필요는 없구요.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박민순 ㅎㅎ
그래도 댓글들은 남아있으니
리얼성은 그대로 유지되니까요 뭐.
제가 성격이 까칠한 연유가 따뜻한 모성을 지닌 어미를 못만난 탓이 큽니다 제어미는 짐승의 어미보다 못했으니까요 젖이 말라 다른 어미의 가슴팍에서 키웠어도 친어미의 안개같은 모성으로 제대로 성장하던데 어째 저는 젖은 먹였되 눈 흘김으로 얻어 먹었지 싶습니다 그나마 막내는 그 웬수같은 젖도 못먹고 자랐지요
아이구우~~
옛시절......
힘들게 살았던
하지만 우애는 그시절이
더 좋았던거 같읍니다
그렇기도 하지요.
그래도 길자씨를 찾아 보았어야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은 도리로..........()
그러게요.
그런데 이젠 늦은거같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