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정숙이를 만나다..
진짜로 복습한 그 날 이후부터 이번 주 내내 광중인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강의가 모두 끝나면 곧바로 픽 쓰러러 잠을 잤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진짜로 매일 복습을 해댔다.
어떤 날은 미쳤는지 예습도 하는 것 같았다.
드뎌.. 토요일 오후다!
토요일은 정신 건강상 쉬자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끝끝내 광중인 토요일 마저도 나를 데리고 학원을 갔다.
엉덩이에 살찔려고 작정을 했는지 화장실도 가지 않고 나를 붙들고 영어공부를 했다.
광중인 생각보다 영어가 재밌다고 했다.
물론 난 이젠 재미 없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떠난 이후로는..
오후 5시나 되서야 광중이가 먼저 책을 덮었다.
"아.. 으으으.. 곤아! 오늘은 이만 하자!" 길게 기지개를 펴며 광중이 내게 말했다.
"왜? 밤늦게까지 더하지?"
"아냐.. 그래야 되는데 오늘은 약속이 있다.."
"약속? 무슨 약속인데?"
"응?.. 뭐 별거 아냐.. 가자.. 이따 전화할게.."
"그.. 그래.."
재수생들이 차를 갖구 다니는지 토요일 오후에 노량진은 차가 무지하게 막혔다.
6시나 되서야 집에 도착했다.
모처럼 저녁을 집에서 먹는다.
으.. 이 여유..
쩝! 혼자 먹긴 하지만..
포만감에 행복해 하며 배불리 먹은 저녁상을 치우고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여부쇼~"
"나요.."
"잉.. 누구쇼?"
"유성이쇼.."
"유성이냐?"
"그래 이놈아. 요즘 학원 좀 다닌다 매?"
"킥.. 그래.. 좀 다니구 있다.. 왜? 당구 한 게임 돌리자고?"
"지랄.. 내가 이제 50하구는 안친다구 그랬지.. 아무튼 오늘 별일없지?"
"아니 있어.. 공부 해야 돼.. 어..험..."
"지랄.. 오늘 경환이네 집 빈다더라.. 그래서 오늘 알콜좌담회 하기로 했따.. 이따가 경환이네 집으로 와라.. 애들도 다 오기로 했다.."
"그래?.. 알콜좌담회 좋치.. 알겠따.. 이따 보자"
전화통화를 끝내고 마저 치우던 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했다.
요즘 학원 다닌답시고 부모님 얼굴도 제대로 못 봐서 그랬는지.. 설거지를 끝내고 방 청소까지 했다.
난 결혼하면 사랑 받을 거야.. 히..
밤9시가 되서야 경환이네 집에 도착했다.
경환이네는 좀 산다.. 고급주택에.. 암튼 좀 산다..
가끔은 이 녀석이 부럽기도 했다.
초인종은 누르자 경환이가 대문을 열어 줬다.
성큼성큼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 신발이 즐비했다.. 친구놈들이 많이 왔나 부다.
"어이! 곤아.. 올만이다.. 어서와라!" 경환이가 현관문을 연 나를 반겼다.
"그래.. 그래.. 오우.. 세정이랑 명주도 왔네?"
"그래.. 어서 와라.." 명주랑 세정이도 이미 좌담회를 시작하고 있었다.
참고로 친구 명주는 물론 남자다.
중학교때 저기 해남 땅끝마을에서 홀로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하며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던 놈인데 재수없게 우리친구들과
인연을 맺어 동수의 맴버가 된 넘이다.
명주는 소주 한 병이 정량인 아인데... 한병 이상 한 방울이라도 더 들어가면 그 때부터 저기 해남 땅끝마을 애길 항상 해댔다.
"곤아.. 어서 앉아봐잉.. 내 우리 땅끝마을 애기좀 들려 줄라니까.."
"곤아.. 명주 한병 넘었다..킥킥" 세정이가 내게 힌트를 줬다.
"참 오늘 여자친구들도 초대했다" 경환이가 내게 자랑스레 말을 건낸다.
"누구?"
그 때였다.. 내가 누구냐고 경환이에게 말을 건내는 순간 경환이 방의 방문이 열렸다..
아!.. 정숙이닷!
그랬다.. 경환이가 초대한 걸은 다름 아닌 정숙이었다..
은정이도 옆에 있었지만.. 앞에 바로 앞에 클로즈업되어 정숙이가 내게 다가온다..
"아..아... 정.. 정숙..이구나.. "
"참.. 은..은정이도 왔었네.." 내가 말을 더듬고 있었다.
"곤이 왔구나! 애.. 넘 오랜만이다.. 요즘 많이 바쁜가 봐?" 은정이가 방갑다고 내게 뭐라고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안녕.." 심장은 주인인 내 말을 안 듣고 눈치도 없이 쿵쿵 뛰고 있는데 정숙이가 내게 말을 건낸 거 같다..
"그.. 그래.. 안녕.."
"짜식.. 너 지금 떨고 있냐? 쿡.." 경환이 피식 웃는게 이젠 확실히 보였다.
이젠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랐다.
일단은 알콜좌담회에 앉았다.
명주는 세정이를 붙들고 해남 땅끝마을 해기를 해대고..
유성이가 내게 경환이가 내놓았을 양주를 건냈다. 정숙이랑 은정이도 좌담회에 앉았고.. 서로 이런저런 애기를 해대며 웃는다.
유성이 재밌는 구라로 정숙이를 한없이 웃겨 댄다.. 은정이는 나를 가끔 쳐다보는데 정숙이는 단 한 번도 날 쳐다보지 않는다..
별로 술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손이 술잔으로 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경환이가 자기방에서 통기타를 가져나와 아이들에게 노래를 들려준다.
경환이가 몇 곡을 뜯더니 이네 나를 쳐다본다..
"참! 곤이도 기타치지? 자.. 이제 네가 한 번 멋지게 뽑아 봐라!"
경환이가 혼자 술을 마시던 내게 양주가 아니라 기타를 건냈다.
"아니야..안 할래.."
"에이.. 짜식.. 또 뺴긴.. 자 여러분 박수.." 경환이가 아이들을 선동하며 분위기를 이끌어 낸다..
기타를 들었다..
최대한 감미로운 목소리를 만들어 노래를 시작했다.
정숙이가 앞에 있어서 긴장하며 더욱 감미롭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조금씩 우리를 갈라 놓는데~ 어디서 부턴지 무엇 때문인지~ 작은 너의 손을 잡기도~
난 두려워~"
어.. 후렴도 안 넘어 갔는데.. 정숙이가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린다..
우씨~..
"에이.. 술 마셔서 그런지 잘 안 된다.. 여기까지만.." 애들이 우~하며 야유를 보내 왔다.
아이들은 곧 기타 분위기를 접고 포커게임을 해댄다..
"곤아.. 일루 와라! 너도 같이 하자.."
"아냐.. 아니.. 알았어 조금만 이따가.."
게임 할 기분이 안됐다.
자꾸만 눈에 정숙이가 들어왔다..
대략 한 시간 정도가 된 거 같다.. 혼자 청승맞게 홀짝홀짝 된지가..
아.. 술이 취한 거 같았다..
그때 정숙이가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가는 모습이 크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따라 나섰다..
정숙일 따라 나갔다.
현관문으로 따라 나가는데 술이 많이 취했는지 몸이 비뜰댔다.
정원에 서있는 정숙이가 보인다..
그녀에게 다가 간다..
조심스레..
정숙이가 다가가는 내가 느껴질텐데 피하지 않고 하늘을 보고 서있기만 하다.
정숙이 코앞까지 다가 섰다..
"저,...정숙아.."
"왜?"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응?.. 아.. 아니 그..그냥.."
"먼저 들어간다."
어.. 정숙이가 휙하고 들어 갈라구 그런다..
"잠..잠깐!.. 사.. 사랑해!"
정숙이 발걸음을 멈췄다.
"죽도록 사랑한다구!"
"뭐라구?"
잘 못 들었는지 멈춰서 있던 정숙이가 내게 다가온다..
가슴이 벅차다..그런데.. 하두 혼자 홀짝였는지 속은 울렁거린다..
어..어..
"우..욱~~.. 우웨엑~~"
그랬다..
다가온 정숙이 옷에다가 직빵으로 오바이트를 했다..
오 마이 갓!
[제22화] 고백이후
그 날 이후 더욱 정숙이를 보기가 힘들어 졌다.
일주일이 지나도 쪽팔리서 연락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경환이네서 내가 정숙이에게 무슨 짓을 한건지..
이젠 그애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학원에서 수업받다가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그녀에게 오바이트 해대는 모습이 생생히 생각나곤 했다..
최악의 실수도 실수지만..
유성이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정을 배신한 것 같아.. 머리 속이 복잡했다.
"곤아.. 너 저번 주 토요일날 무슨 일 있었지?" 수업이 막 끝나자 광중이 내게 말을 건냈다.
"응?.. 응.. 그게 말이야..." 드러내고 싶은 않은 치부를 광중이에게 속 시원히 털어 놓았다..
"뭐라구?.. 직빵으로다가 오바이트를? 킥킥.."
"웃지 마라.. 난 심각하다.."
"그래..그래.. 알았다..킥킥.. 암튼.. 그리고 네가 얘기한 유성이 문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뭐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마도 너처럼 오래된 감정도 아니고.. 유성인 뭐 지금 너같은 사랑은 아닌 것 같은 데..
용기를 내서 잘해봤으면 좋겠다...네 얘기 들으면 정숙이에게 사랑을 느끼는 거 같은 데.."
"그래.. 나도 잘은 모른 것 같아.. 네 말대로 나 정수기에게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을 느끼게 되었나 봐..
사랑이 뭔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그 아이에게 정말 그랬다.. 사랑한다는 그 말을 반드시 그말을 하고 싶었었다.
"아휴~ 이젠.. 다 글렀다.. 오물투척으로 신고나 안하믄 다행인 것 같다"
"참.. 너는 그 때 토요일날 어디 갔다 왔어? 약속있다고 급하게 가던데.."
"소희한테.."
"뭐? 소희? 아.. 그 약속이 소희였었구나?"
"그래.. 그전에 소희한테 연락이 왔었었어.. 토요일날 좀 만나자 구.. 그래서 혹 또 집을 나와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서
만나긴 만났는데.. 만나구 나서야 알았어..그 날 토요일이 소희 아버지가 재혼을 하는 날이라는 걸.. 결국 다른 여자하구.."
"그랬구나..소희가 그 날 마음이 많이 아팠겠다.. 그래 위로 좀 해주지 그랬냐?"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냐.. 그냥 한없이 우는 소희한테 어깨만 빌려 주고 왔다.."
"소희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재회하기를 바랬는데.."
"근데.. 골때리더라.. 소희 어머니는 소희를 안 챙겨.. 그래서 소희가 더 안됐어.. 그런 생각도 들더라..
그 집도 우리 집처럼 돈이 없어서.. 기본적인 생활도 버겨웠다면.. 차라리 가족끼리 더 뭉쳐지지 않았을까 하는..
돈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닌 것 같아.."
"돈이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남아도는 것은 그 두 배나 슬픈 일이다."
"오우.. 멋진 말인데.. 짜식 공부 좀 하더니 그럴싸한 말 두 지어낼 줄 알고.."
"곤아?"
"응?"
"스토이 형 말인데.."
"엉? 그.. 그러냐.."
"나두 국어 공부 좀 한다.."
"암튼.. 광중아.. 우린 돈도 많이 벌자.. 대신 돈에 취해 선 안될 것 같아.. 돈에 취해 진실로 중요한 걸 잃고 살진 말자.."
"음.."
"그리고 우린 지금 어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중한 시간에 서 있는지 몰라.. 20대.. 이제 한 인간으로 자리
잡아야 할 중요한 시기인 거 같아..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현실을 억누루고 있는 돈보다도 꿈..
희망인 것 같아.. 지금 우리가 사회가 만든 틀을 벗어나 더 이상 그 무엇도 선택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 갓 배출된 성인으로
꿈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 또한 없는 거란 생각이 든다.. 우린 우리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지 자신의 청사진을 그려야 해..
꿈.. 희망을 가지고서 말야.."
"말밥이다..암튼 곤이 너는 말 한 번 잘한단 말이야.. 너 나중에 글이나 써봐라"
"글?.. 내가 무슨.."
"왜에..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며.."
긴 얘기가 끝나고 광중이와 나는 손을 꼭 잡았다.. 왠지 무언가를 약속하듯 꼬옥 손을 잡았다.
"참.. 정수기 문제 말야.. 암튼 이번은 네가 큰 실수 한 거 같다.. 그래서 말인데.. 사과하는 의미에서도..
또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의미에서도 네가 정수기에게 꽃을 선물하면 어떨까? 정수기 나이만큼의 장미 꽃을 말야..
그러면 아마 정수기도.."
"장미꽃? 음.. 그럴 듯 한데!"
광중이는 학원선생이 무안할 만큼 수업시간에 강사얼굴을 뚜러져라 쳐다 보았다.
매시간 뚜러져라 쳐다봐서 그런지 어떤 땐 강사들이 슬금슬금 광중의 눈을 피하기도 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광중인 또 픽 쓰러져 잠을 잤다.
도대체 밤에 무엇을 하는지..
우리가 볼 대학시험은 수능이라고 한다.
학력고사가 아니라..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든가? ... 암튼 지능, 아니 ... 수능이란다.
이제 수능시험까지 4개월이 조금 안되게 남았다.
4개월이 안되는 시간.. 차라리 시간이 짧게 남아서 부담이 덜된다..
침 흘리며 자는 광중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다 문뜩 광중이의 말이 생각이 났다.
"장미꽃.."
'장미꽃 갖다 주러 먼저 간다'라는 메모를 광중이 머리맡에 두고 온지 아마도 3시간 이상은 지난 것 같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단지에서 기다리는 게..
21송이의 장미꽃을 자랑스레 손에 꽉 지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3시간이 넘어 간다.. 난 다른 건 몰라두 기다림 하나는 자신있는 놈이다.
3시간이 넘어가도 큰 부담은 없다.
다만 지나가는 행인들의 길게 이어지는 시선이 부담될 뿐.
후.. 4시간이 가까워 지는 거 같다.
밤 10시 반이 넘어서며 밤이 깊게 밝아오고 있다.
멍청스레 계속 서 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아퍼 잠시 벤츠에 앉았다..
그 아이가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여러 번 문구를 바꿔 가면서..
"두..두둑..."
비.. 비가 온다.. 으씨.. 왠 비가 갑자기.. 장미꽃을 들고 몇 시간을 서있는 내가 웃 긴지 비가 많이 온다..
젠장..아파트 단지에 마땅히 비를 피할 곳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
맞자.. 비를 맞자.. 비 맞고 서서 기다리는 네가 그녀에게 더 멋지게 로맨틱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장미꽃 물도 주고..
으.. 춥다... 옷은 고사하고 빤스까지 다 젖은 것 같다.
오히려 빤스를 통한 빗물에 맞장을 뜨는지 똥꾸녁에 땀이 삐질 삐질 날라 그랬다.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들었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뭐야.. 왜 이렇게 안 와?.. 여대생이 뭐하고 이 밤까지 돌아다니는 거야.. 우씨.."
기다림에는 자신있다는 자신감이 비에 젖어 서서히 주눅들고 11시가 넘어서자 막차가 끈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어.. 꽃 사느라.. 택시비도 없는데.."
몸과 마음이 이레 저레 급해져 가고 있을 때였다.
"앗! 정수기 닷!"
뭘 하느라 이렇게 늦게 왔는지.. 지금까지 5시간 가까이 기다린 것 두.. 비에 흠뻑 젖어 있는지도 잊은 체 희미하게 다가오는
정수기가 내게 뚜렷이 보이고 있었다..
"와..왔구나.. 드디어.."
주황색 우산을 든 그녀가 비속을 뚫고 저 앞 정류장에서 점점 내게 가까워 지고 있었다.
비가 우두둑 땅을 쳐대 듯 심장이 내 가슴을 쳐 댄다..
"저..저기.. 정숙아!"
"어.." 불렀는데 쳐다보지 않는다.. 빗소리에 못 들었나 싶어 그 아이 앞으로 달려 섰다.
"정숙아..!"
"어머!.. 곤.. 곤아?"
"어.. 나야.."
"너 여기서 뭐해?"
"어?.. 기.. 기다리고 있었어.."
"누굴?"
"너.. 정숙이.."
"날?.." 그 때서야 내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았는지 정수기는 날 위아래로 쳐다봤다..
"어머! 온통 다 젖었네.. 애 봐.. 너 우산도 없이... 미쳤나 봐.."
"자 받아.." 이제서야 그녀에게 흠뻑 젖은 21송이의 장미꽃을 내밀었다..
"모..모야 이게?"
"응? 꽃.. 비 맞은 장미꽃.. 헤.." 빗물을 너무 많이 먹였는지.. 장미꽃이 축 쳐져 있었다.
"...일단.. 이 우산 써!" 정숙이는 자기의 우산의 반을 내게 내밀었다..
흔쾌히 꽃을 받지 않은 체..
"아니야.. 괜찮아.. 이미 벌써 다 젖었는데 뭐.."
"아이참.. 이리 가까이 오래 두.."
"우선.. 저기 우리 아파트 현관으로 가자" 정숙이가 내민 노란 우산에 엉거주춤 정숙에게 이끌려 현관 쪽으로 걸어간다..
헤.. 어쨌든 한 우산 속에 있으니까 좋다..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장미꽃 향인지 내게 그녀의 향이 느껴졌다.
앞에 보이는 아파트 현관이 넘 가깝다..
이대로 그녀와 좀더 걸었으면 좋겠는데.. 헤.. 아무튼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다..
"늦었어.. 이 우산 가지고 어서 가.."
어?.. 정수기가 내게 머라구 하는 건가?
"엉? 가? 가라구?"
"그.. 그래.. 고만 가..너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나 감기 안 걸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감기 안 걸렸었어.. 잠깐만.. 저기.. 나.. 너 한테 할말도 있고.."
"할말? 무슨 얘긴데?"
"어? 그..그게.. 지금 많이 바빠? 잠깐 걸을까?"
"아니.. 바빠.. 나 지금 많이 늦어서 얼릉 들어가 봐야 되거든.."
할말이 있었는데 이젠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됐다는 말 하고 싶었는데.. 정수기가 두눈 똑바로 뜨고 멍석 깔아 놓으니까..
마음속에 품었던 말이 잘 안 나오고 그냥 감정이 떨렸다..
"그.. 그게.. 저.. 저번에 오바이트 아니 실수..미안했다 구.. 그래서.. 사.. 사과하는 의미도 있고 해서 꽃 사 왔어.."
".. 됐어.. 괜찮으니까.. 아니 사과받아 드린걸 루 할 테니까.. 꽃은 됐어.."
"..... 에이.. 그래두 일부러 사 온 건데.."
"받은 걸루 할께.. 할말 다 했지?"
"어? 어.. 어"
"그럼.. 나 늦어서 먼저 올라 갈께.. 조심히 가.. 나 간다~"
내가 어떻게 무슨 말을 했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그녀가 벌써 엘리베이터 앞으로 총총히 간다..
어.. 아직 안 끝났는데.. 그 앨 불러 세우고 싶은데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한 벨 음을 내자 그녀가 바로 탄다..
나를 쳐다보지 않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감정도 없이 늦지 않은 속도로 닫혀 버린다.
"후..."
이럴려고 온 게 아닌데.. 또 바보처럼.. 힘 없이 뒤돌아 선다.
현관 한쪽에 세워 둔 그녀의 우산이 보인다.
아직 우산의 빗물도 다 안 떨어 졌는데..
정수기가 먼저 올라가고 멍하게 남은 내 마음처럼 빗물이 흐르는 장미꽃 21송이를 우산 옆에 놔둔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산 꽃인데..
근 5시간 동안 좋아하게 됐다고.. 진짜로 네 모습이 내 마음에 잠겨 있다고 말하자 되뇌였는데..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발걸음을 서서히 아주 천천히 돌린다..
"아.. 아저씨!..잠깐.. 잠깐만 욧!"
정수기 동네여서 그런지 정류장을 무정히 지나가는 막차 버스를 겨우겨우 잡아 타고 12시 가까이야 신사리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온통 버스 안을 빗물로 가득 채워 놨다고 버스기사 아저씨가 힐끔힐끔 나를 노려봤다.
우.. 그래도 다행이다.. 평소엔 그렇게 지겹던 신사리가 막차에서 내린 나에게 무지하게 반갑게 다가왔다.
흠뻑 젖었지만 정수기의 냉소함에 목말라 하는 가슴을 적시고파.. 오늘은 비오는 날이니까 발걸음을 할매 포장마차로 향해본다.
"할매!.. 으.. 오늘 나 물에 빠진 생쥐 됐어.."
"인석아!.. 왠 비를 이렇게 맞았어! 그 꼴로 뭣 하러 왔어.."
"비오는데 내가 왜 안 와.. 비가 안 왔으믄 안 왔지.."
"우선 따끈한 우동이나 한 그릇 말아 줘! 아직 저녁도 못 먹었어.."
할매가 몸 좀 풀라며 후딱 말아 준 우동을 한 젓가락 집는데 구석에 왠 놈이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처량스레 혼자 소주를
훌쩍거린다..
"킥.. 저놈도 오늘 나처럼 비 맞았나?"
"어라.. 많이 본 놈 같은데.. 모자 때문에.."
"탁!!"
오홋!.. 놈이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마시던 소주잔을 힘껏 빡시게 바닥에 내리쳤다..
젠장... 인.. 인상이 안좋다..
그..놈이.. 아주 서서히.. 모자의 창을 들어 올린다.
씨.. 떨.. 떨린다..
오홋!
놈의 눈빛이 날 향해 씨이~익 웃는다..
"어라..! 광중이닷!"
[제23화] 진로변경
재수생활 한 달째만에 처음으로 결석을 했다.
어제 넘 무리를 했는지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감기에 아니 독감기에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감기 걸린 것도 사랑에 걸린 것도 그저 신기했다..
앓으면서 내내 생각 드는 것은 아픈 몸이 아니라 정숙이었다.
"곤아!.. 어허... 이녀석 열 봐라.."
"곤아!.. 곤아!"
"으.. 에.. 예.. 아부지.."
"너 몸이 불덩이 같어! 안되겠다.. 병원에 가야겠다.."
"아.. 아녜요.. 괜.. 괜찮아요..."
걱정이 되서 출근도 미루시며 지켜보던 아버지께서.. 넓은 두 팔로 나의 몸을 일으키고 계셨다..
으.. 쪽팔리게.. 아버지 힘드실까 봐 얼릉 일어 날려구 하는데.. 어라.. 몸이 말을 잘 안듣는다.
어.. 정신이 없다..
병원에 한 6시간 누웠었나 부다..
아마도 간호사가 말도 없이 엉뎅이에 주사도 놓고 뭔 짓을 했는 갑다.
바쁘실 텐데 아버진 병원에서 날 퇴원 시키시고 집에까지 바래다 주신다..
"인석아!.. 사내자식이 몸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요즘 무슨 일 있어? 걸리지 않던 감기를 걸리고 끙끙 앓어?"
"아녀요.. 아무튼 죄송해요..아부지"
"일 때문에 이만 나가 볼 테니.. 오늘은 오버 좀 하지 말아라.."
"헤.. 예..다녀오세요"
아부지는 점심식사도 거르신걸 잊으신 체 그렇게 또 일을 하러 나가신다..
으.. 이게 웬 난리인가.. 아부지께 지송스럽께롱... 내가 어제 그렇게 비를 많이 맞았나?
어.. 난 비에 강한데.. 비오는 날은.. 내 날인데..
조용히 누워 생각해 본다..
내 가슴속에 어느쯤에 정숙이가 있는지 가늠해 본다.
정수기 몸무게가 보기보다 꾀나 나가는지 깊이 잠겨 있어.. 쉽사리 깊이를 셀 수가 없다.
혹시 유성이가 이미 정수기를 진짜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떻게 내가 유성이에게 그럴 수 있을런지..
아님.. 확.. 배신을 해 버릴까.. 아냐.. 내가 어떻게 유성이에게 .. 동수클럽에 이러다 재명 당하는 건 아닌지..
정수기랑 아무 상태도 아닌 유성이가 걱정됐다.
"따르릉~"
"따르릉~"
"여부쇼.."
"마!.. 집에서 뭐해? 전화해도 안받고.. 무슨 일 있어? 학원도 안 오게..?"
"어.. 광중이구나.. 아냐.. 뭐 무슨 일은.. 어제 술이 과했는지 좀 잤어.."
"어? 머 어제 우리가 얼마나 마셨다고 그래?"
"너 공부하기 싫어서 땡땡이 친 거지?"
"그..그래.. 땡땡이 쳤다.."
"킥.. 나도 쳤다.."
"뭐라고? 광중이 너도 안 갔어?"
"아니 가기야 갔지.. 근데 점심시간에 땡땡이 치고 나왔어.. 니가 없으니깐 도저히 혼자 못 앉아 있겠더라.."
"미친넘.. 오늘 진도 나 갈켜줄 생각은 안 들디?"
"안 든다.. 내가 어떻게 널 가르키냐? 나 지금 어디 좀 간다.."
"어디?"
"응.. 알아볼게 좀 있따.."
"그래? 뭔데 학원까지 땡땡이 치고.."
"이따가 얘기 할께.."
"그래라.."
광중이 전화를 받고 내심 걱정이 들었다..
재수 첫날이후 진짜 공부 열심히 했는데.. 혹시 한계를 느끼고 포기하는 건 아닐까 하고..
밥만 먹고 잠도 재대로 안자면서 공부하는 거 같은데..
성적은 안 오르니..
하기야.. 학교를 다닌 둥 마는 둥 한 녀석에게 재수생활로 끌어들인 게 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조폭이 될 녀석에게 다른 길을 보여 준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광중이는 내내 한 달이 넘도록 나 때문에 그렇게 지독히 열심히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대학을 간다는 자체를 불가능으로 인식하며..
잡념에 빠져 잠시 눈을 감은지 한 30분 정도가 지날 때였다.
"따르릉~"
"아하함... 왠 전화야.. 여보쇼?" 전화벨소리에 잠을 깨 수화기를 들었다.
"나다.. 아직 자냐?"
"어?.. 과.. 광중이?"
"그래.. 몇 시간을 자는 거야.. 7시가 넘었는데.."
"엉? 벌써 저녁 7시가 넘었어?.. 어.. 한 30분 잔 거 같은데.."
"고만 일어나고.. 나와라"
찌뿌둥한 몸이 오늘은 고만 쉬자고 학원도 안 갔는데 오랜만에 백수로 돌아가 늘어지게 쉬어 보자고 넌 날 잊은 거냐고
아우성을 치는 몸뚱이를 억지로 이끌고 추리닝 바람으로 신사리 소공원에서 광중이를 만났다.
"어.. 여기야!" 벤츠에 앉아 있던 광중이가 날 보며 손을 들어줬다.
"그래.. 오늘은 저녁시간에 신사리에서 보네.."
"곤아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어디 아팠냐?"
"아니다.. 낮잠을 오래 자서 그렇다.. 참.. 오늘 어디 갔다 온다며.."
"그래.. 좀 갔다 왔지.. 우선 앉아라" 우선 앉으라며 광중이 자신이 물고 있는 쭈쭈바와 똑같은 쭈쭈바를 내게 내밀었다.
"뭐냐?"
"일단 빨아라.."
"그.. 그래 다음엔 난 부라보콘으로 사라.."
"곤아.. 나 결정했다.."
"뭘? 나 부라보콘 사주기로?"
"실은.. 너한텐 조금 미안한데.. 내일부터 너랑 가는 길이 조금 다르게 될 것 같다."
"엉? 그게 무슨 소리야?" 내게 말하는 광중이의 모습이 사뭇 진지해 긴장이 됐다.
"너! 혹시.. 포기 할려구.. 그러냐?"
"미친넘! 내가 이제와서 포기 왜 하냐.. 어떻게 한 결심인데.. 나 체대 갈 작정이다."
"어? 체대? 체대가 뭐야?"
"으응.. 체대입시 말야.. 대학교에서 체육과를 가는 거지.."
"체육과? 한번정도는 얘길 들은 건 같다만.. 네가 체대입시를 치겠다구?"
"그래 곤아.. 오늘까지 알아볼 만큼 알아봤다.. 그리고 오늘 결정도 했다.. 그래서 네게 이 얘기하고 들어 갈려구 잠깐 보자 했다."
"당황된다. 임마.. 갑자기.."
"한 달 넘게 학원에서 공부하며 생각해 봤어.. 이제 한 3개월도 안 남았는데 내가 대학을 갈 수 있을런지.. 그건 불가능 하겠더라..
하지만 고생만 지지리 하는 어머니 생각하면 이대로 포기하긴 싫다.. 저번에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녀석을 만났는데 그 친군
체대입시를 준비한다고 하더라구.. 그때까지 난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래서 그날부터 조금씩 알아봐 오던 중이였다.."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빨리 결정해버렸어?"
"나..운동은 자신있다." 광중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하기야.. 운동성만큼은 나도 인정을 하지..타고났지.. 타고났어.. 대학교에 조폭과가 있으면 넌 무시험 입학 및 장학생일 텐데.."
"오늘 결정 망설임 없다. 그리고 더 바쁘게 공부해야 될 것 같다. 학과공부도 해야 되고.. 체대입시종목도 준비해야 되고..
그리고 운동으로 가는 거라면 서울대도 갈 자신있다.. 음.. 가장 중요한 건 어머니 소원을 들어 드릴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하기야.. 인문대학을 반드시 가야 되는 건 아니지.. 아마 네 어머님도 네가 대학을 들어갔다는 자체로 크게 좋아 하실 꺼야..
그럼.. 언제부터 체대입시란 걸 시작 할 참이냐?"
"내일부터!"
"짜식.. 내일부터는 밤늦게까지 학원에 같이 못있겠네?"
"그럴 꺼다..곤아.. 괜찮지?"
"그럼.. 나야 널 덜 보면 더 도움되지.. 풋."
"광중아.. 암튼 잘했다! 잘 결정했다.. 그래 넌 아마 체대라면 서울대도 갈 수 있을 꺼야.."
"킥.. 그럼 나 대학생이네.."
"오홋!.. 김광중 꼴통이 대학생이라!.."
"참.. 곤아.. 오늘 저번에 친 수학시학 점수 나왔더라.. 자.. 이거 네 점수 표다."
"허..허험.. 저번 수학문제가 30문제였던가..? 너 내 성적표 안 봤겠지?"
"4문제 맞췄더라.."
"누가? 니가?"
"니가."
"내가?.. 광중이 너.. 너는?"
"허..험.. 어.. 허허험.."
"아이.. 자식이 왜이래? 몇 점인데 그래?"
"6개 맞췄다.." 광중이 목에 힘을 주며 4개 맞춘 날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오홋!.. 30문제 중 여..여섯개나?"
"너.. 공부 좀 해야겠더라.. 허.. 허험.. 수학은 나보다 니가 꼴통인 것 같다.. 그럼.. 나 간다. 낼 보자!"
"역시 넌 대단해.. 저번에 3개 맞추더니.. 얼마나 됐다고.. 100% 상승! 광중아! 넌 천재였을지도 몰라!"
먼저 앞서가던 광중이 잠깐 발을 멈춘다.
"곤아!.. 너 그거 아냐?"
"응?.. 뭐?"
"나.. 두 문제는 풀었다는 거.."
"말..말도 안돼.. 이런 치사한 자식!"
"히.. 낼 보자!"
[제24화] 무서운 놈
어제 결석을 했는지라 오늘은 일찍 갔다.. 몸도 다 풀리고.. 근데 정작 중요한 맘은 하루를 쉰다 해서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정수기와 어떻게 풀 것인지... 아니 유성이와 먼저 풀어야 한다..
아.. 아마도 오늘은 내가 제일 먼저 학원에 도착할 것 같다.
"어! 광중아.. 으메 언제 온 것이여? 7시도 안됐는디.."
"히.. 나도 좀 전에 왔다.."
"너 아침잠도 없냐? 매일같이 이렇게 일찍 일찍 오게..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도 아니구.."
"사실은 나 아침마다 어머니가 파실 야채하구 과일 띠러 다녀.."
"엉?.. 아..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매일같이 일찍 일찍 왔구나.. 많이 피곤하겠다."
"괜찮어.. 아직 한참 젊은데 뭐.. 어머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짜식..."
"참.. 광중아 오늘부터 운동하겠네?"
"그래.. 오늘부터다."
"물건 띠는 것도 그렇구 넘 무리하는 거 아니냐?"
"무리? 무리하고 싶다.. 이제 꽉채 운 삶을 살아 볼 참이다.."
"무서분 넘.."
수업시간 내내 광중인 학원 선생님이 무안할 정도로 집중해서 듣는다..
"이렇다 이녀석 진짜 대학 가는 거 아냐?"
4교시부터 슬슬 땡땡이 치는 재수생들이 보인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나 부다.. 누가 볼세라 후다닥 뒤로 안 돌아 보고 나간다..
항상 지정석인 냥 4번째 줄 구석 2번째 자리에 앉은 서진이란 여자애는 오늘도 역시나 잔다.
밤에 급한 볼일이 있나 부다..
참, 서진은 그다지 이쁘지는 않은데 우리반에서 가장 이쁜 척을 하는 아이다.
근데 서진은 항상 밤8시가 되면 학원 옆에 있는 사육신묘에 갔다.
아니 항상 그 시간이 되면 없어지는데 우리 반 학생들이 몇 번이고 서진이 그 시간에 사육신묘에 홀여니 가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시간에 여자 몸으로 홀로 사육신묘에 가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그 소문 이후에도 몇 번이고 우리 반 학상들에게 발각된 터라 그 소문은 사실이 되어 서진이 정신이 나갔다는 둥..
입시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미쳤다는 둥.. 오밤중에 사육신묘에서 귀신으로 둔갑 한다는 둥.. 사육신중에 한명이
조상이었을거라는 둥.. 별해 별 얘기가 난무했다.
아무튼 서진을 그 시간에 항상 사라졌다가.. 밤10시나 되서야 학원에 돌아오곤 했다.
아마 공주병 비스무리한 걸 걸린 서진은 자기가 제일 예뻐서 사람들이 말을 안거는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볼 땐..
무서워서리 학상들은 말을 못 붙였다.
"자자 점심시간 지났다고 졸지 말구 정신들 차려!"
예순이 가까워 보이는 지리강사님이 또 들어오자 마자 목청을 높이신다..
그 지리강사 할아방은 뭐래나?.. 젊은 시절 자기가 어디 지방 조폭이었다고 항상 얘기한다..
매일 하는 얘기라 누구도 그리 귀담아 듣지는 않지만 그래서 인지 더욱 흥분하며 조폭 얘길 해댄다..
"이놈들.. 조폭이었단 걸 아직도 못 믿겠다는 거여?" 지리강사 할아방이 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할아방은 이내 이짝 끝에서 저짝 끝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시며 자신의 청년시절 얘기를 한다.
광중이와 난 모든 강사들 중에서 이 할아방 강사를 가장 좋아한다.
수업시간 중 반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자신의 얘기를 해대는데.. 넘 재밌었다..
"내가 젊었을 때 활법을 익혀서 보통 20대 1로 싸우고 그럈어.. 그러면 거구 열댓놈들이 내 활법에 휙휙 나뒹굴곤 했었지."
"그래 이 참에 내가 아주 보여 주지. 보여줘.."
할아방이 지시봉을 교탁 위에 놓더니 자신의 발을 맨 앞 좌석에 올려 놓는다.
이내 양말을 벗고 바지를 쭉 걷어 올린다..
"자.. 이거 보여 이놈들아!" 할아방이 무릎 가까이 있는 작은 상처를 가르키며 또 시작했다.
"이.. 상처가 말이여.. 내가 열댓놈하고 붙다가 칼 맞은 칼자국이여! 칼자국!"
칼자국치곤 상처가 넘 작아 보였는지 맨 앞줄 발이 올려진 책상에 앉은 여학생이 얘기했다..
"에이.. 아닌 거 같은데요.. 칼자국 상처가 뭐그리 작아요?"
"뭐.. 뭐여 이놈아?.. 시방.. 상처를 보고도 못 믿겠다는 것이냐?.. 환장하것네.. 상처가 작은 건.. 작은 건..
세월이 많이 지나 다 아물어서 그려.."
"안되겠어 이놈들.. 내가 발차기 한 번 보여 줄텐께.. 잘들 봐 잉!"
할아방이 발차기를 한다며 다리가 아닌 목하구 어깨를 수차례 왔다갔다 돌리더니 아까 말대답한 여학생에게 다친다고
책상을 뒤로 쭉 물려 낸다..
"헙!"
있는 힘껏 올린 할아방의 다리는 자기 무릎에서 약간 더 올라갔다..
"자..! 보..보여? 일자로 쭉 뻗은 거.."
"킥킥.." 조는 사람 빼고 전학생이 다 웃었다.
"그리고 아직 또 젊은 시절의 한 가닥이 남아서 아직도 이 나이에 술을 먹으면 내가 한대빡을 마셔!"
"술 마시고 집에 들어 가잖냐? 그라믄 아침 일찍 아들놈이 몸 좀 생각하라는 잔소리를 해대며 꿀물을 한잔 들고 들어와..
글믄 내가 그 아들넘 보러 뭐라 그랴는지 알어?"
"내 항상 이렇게 얘기현다.."
"됐따.. 이놈아!.. 가서 냉수나 한 사발 떠와!"
"이놈무 자식이 아비가 아직 펄펄한걸 모르고 감히 꿀물 나부랭이를 드리밀구 난리여.."
"자.. 고만들 하구.. 일단 수업 들어 가자구..허..험!.."
이제야 끝났는가 부다.. 오늘은 저번보다 더 흥분해 하시는데 광중이랑 우스워 죽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할아방의 '활법'은 특공 무술이 아니라 뼈 맞추는 법이였다.
지리시간 이후는 국, 영, 수 지리한 과목들로 재수가 만만치 않음을 느끼며 참아 내고 있었다.
지루한 마지막 강의까지 끝나자 광중이 서둘러 가방을 챙긴다.
"광중아.. 너 잠깐 쓰러져 잘 시간인데 뭐하냐?"
"응.. 오늘부터잖아.. 운동."
"그렇다고 쉬지도 않고 바로 가?"
"그래.. 난 이제 땀을 흘릴 테니 너는 떡을 썰어라. 간다!"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라!"
광중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주고 서둘러 나갔다.
잠깐 잘 시간인데 광중이 저러고 가는 모습을 보니 평소처럼 편히 잠이 오지 않을 꺼 같아 잠시 바람이나 쐴 겸 학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곤이 올라왔네?"
"아.. 호철이형.. 잠깐 바람이나 쐴까 해서요.."
"왠일이야? 이 시간이면 너랑 광중이 잠잘 시간 아닌가?"
"헤.. 맞죠.. 오늘은 잠이 안 와서요.."
"같이 커피나 한잔하자.. 내가 뽑아 갖구 올께.."
커피 한잔으로 호철이 형은 많은 얘기를 들려 준다.
호철이 형은 아니.. 나이가 31살이니까.. 아저씨다.
형은 올해 초까지 직장생활을 한 직장인 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형. 직장 잘 다니지.. 왜 이제와서 대학을 갈려 그래?"
"직장? 직장생활 참 오래 했지.. 근데 오래하구 있었는데.. 사회라는게 내가 생각하던 거하고는 너무 많이 다르더라구.."
"왜? 돈도 벌고 인정도 받았을 테고 좋지 않았어?"
"혼자 자취하느라고 많이 모으지도 못했어.."
"형 돈 때문에 그만 뒀어?"
"아니.. 직장이란게.. 내가 겪은 직장이란게 너무 달랐어.. 내가 배웠던 거 하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나름대로 많은 꿈을 가졌지.. 근데.. 내가 아무리 밤을 새며 열심히 해대도 고졸이란 신분으로 대졸을 따라 잡을 수가 없더라구..
풋.. 난 학벌주의가 뭔지 몰랐던 거 쥐 뭐.. 정말 열심히 했었어.. 그런데 막상 승진의 꿈을 꾸면 고졸은 승진대상자가 아니라구
하더구나.. 대졸과의 갭은 아니 그건 신분이었어.. 그리고 내가 원치 않은 떳떳치 못한 접대, 뇌물같은 부조리한 것들이 너무
많았어. 내가 너무 순진 했었나 봐.."
"음.. 그랬구나.. 그래서 형 직장 때려 치우고 대학간판 따려 하는 거구나.."
"아니.. 나 대학교를 간다 해도 직장생활 안 할 꺼야.."
"어? 그럼 뭐 할려구?"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음..."
"곤아 너도 나 보단 아직 젊잖니? 사회가 정해 놓은 대로 무조건 간판을 따려하지 말고 그것부터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봐..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네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네가 뭘 좋아하는지를 말야."
"으응... 알았어.. 참 형은 뭐하고 싶은데?"
"난.. 난 말이야 자연을 연구 해 볼 꺼야.. 난 자연이 너무 좋거든.."
"아하.. 형! 만약에 형 만약에 말야 혹시 대학 떨어지면 어떻게 할꺼야?"
"풋.. 그래 떨어질 수도 있지.. 그러면 다시 한 번 도전 할꺼구.. 그래도 떨어지면 고향에 내려가 자연에서 약용 식물을
재배해 볼 꺼다.."
형은 사뭇 진지했다.
대학은 떨어질지라도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 좀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며 살아갈 것 같았다.
늦은 밤.. 학원의 야자가 끝나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쓸쓸했다.
광중이가 없어서 그런지..
[제25화] 노예되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
백수시절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것처럼 시간이 흘렀는데.. 공부랍시고 학원을 다니니 그렇게 덧이던 시간이 쏘나기가
되어 내리 붓는다.
니가 무슨 얼어죽을 공부냐며..
일주일치 밖에 공부를 못했는데 시간은 씨이익 웃어대며 한 달을 훌쩍 보내 버리곤 했다.
수학을 포기하는 대신에 국어와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국어는 그나마 한글이래서 그런대로 해 나갔지만 영어는..
무슨 놈의 단어가 그리도 많은지 영어지문은 쉽사리 내게 뜻을 비춰 주지 않았다.
양놈들은 어떻게 그 많은 단어들을 알고 있는지 심히 신기스러울 따름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슨 놈의 단어가 한 단어에 여러 개의 뜻을 지니는지.. 젠장 할.. 아는 단어인데도 영어지문은 가끔씩 날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놓고 재밌다고 키득키득 되곤 했다.
가끔은 여대생인 정수기가 위대하게 보이기도 했다.
모처럼 만의 토요일 오후.. 예전백수 생활로 돌아가 해피하게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을 떄였다.
"따르릉~"
"우씨.. 누구야.. 여부쇼~" 간만에 해피함을 깨는 전화를 짜증스레 받아 들었다.
"..."
"흠.. 여부쇼.. 말을 하쇼.."
"나야!"
오잉! 수화기에 들린 목소리가 여자다!
"누.. 누구?"
"나 정숙이야!"
"어? 저.. 정숙이?"
"이 시간에..자니?"
"아.. 아니.. 자긴.. 뭐 좀 생각 좀 하느라고.."
"참.. 요즘에 공부한다며? 잘돼?"
"어? 아하.. 그.. 그냥 끄적대는 거지 뭐.. 그런데.. 왜.. 왠일이야.. 전화를 다 주고?"
"오늘 저녁에 뭐하니?"
"오늘 저녁에? 어.. 명주랑 해남 땅끝마을 가보기로 했는데.."
"그 약속 취소해!"
"엉? 취소 하라 구?"
"이따 내가 너 만날꺼니까 취소 하라구.. 왜? 싫어?"
"아.. 아니.. 싫긴.. 근데.. 왜..?"
"6시에 내가 신림동으로 갈테니까 사거리 저번에 봤던 커피숍에서 봐!"
"참.. 그리고 나올 때 제일 예쁜 반명함 사진하구 네 도장도 가져와!"
"반명함 사진하구 도장? 왜?"
"아니 뭐 좀 할께 있어서.. 꼭 갖구 와야 돼.. 알았지?"
"저..저기.."
'뚜뚜뚜..'
전화를 그담새 끈었는가 부다.
쩝! 급하기는..
근데 애가 갑자기 왠일일까? 왜 보자가 하는 걸까..
저번에 그 망신을 줘놓고.. 아직 덜 풀렸나?
또 예전의 직빵으로 뿜어낸 오바이트 사건과 장미꽃 사건이 눈앞에 아른 아른거렸다.
말도 안된다고 아우성을 치며 날뛰는 명주와 가까스로 통화를 끝냈다.
아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머리에 무스를 발랐다 날라리 같이 넘어가 다시 머리를 감고 때 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딱아 냈더니 얼굴이 후끈거려
스킨을 발랐다 얼굴이 넘 따가워 다시 세수를 했다가 양치질을 하고 발을 씻다가 다시 옷을 다 벗어 던져 샤워를 하다
겁도 없이 정작 커피숍에 6시 30분에야 헐떡이며 도착했다.
"허헉.. 클랐다.. 우씨.. 뭔 지랄을 한다고 오늘까지 이런 다냐.."
커피숍에 도착하자 설마 했던 정숙이가 굳은 표정으로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정숙아!"
"지금 몇시니?"
정숙이가 좀 화났는 갑다.. 애랑은 왜 이렇게 꼬이냐..
"미안.. 미안해.. 내가 좀 늦었지?"
"30분이 좀이니? 뭐하다가 늦었어?"
"어? 어엉.. 공부하다 복습 좀 할께 있어서..공부하다 보니깐.."
"그래도 그렇치 무슨 남자가 매너가 꽁이니? 주문해.."
"꽁?.... 그.. 그래.."
"난 카프치노~"
"난.. 꽁치.."
"응? 꽁치?"
"엉? 아..아니 커..피"
주문한 카프치노와 일반커피가 나올 때 동안 한마디도 왕래가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정숙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그래.. 말해.."
"너 나 좋아하지?"
"엉?"
"왜? 아니야?"
" .. " 갑자기 물어서 대답이 잘 안 나왔다.
"솔직히 말해봐.. 나 너 좋아하니까.."
엉? 정숙이가 지금 뭐라고 한 건가? 날 좋아한다고.. 한 건가?
"지..지금 장난하는 거지?"
"..."
"지.. 진짜야?"
"..."
"엉?"
"진심이야.. 몰라.. 왜 내가 네게 마음이 가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도 네가 보고싶어.."
"..."
"너.. 너는?"
오홋! 요..용기가 샘솟음 친다.
"그래 나 너 좋아해.. 옛날부터"
"역시 그랬었구나.. 너 예전부터 나 많이 훔쳐봤지?"
"엉? 아.. 아니야.. 훔쳐본 거 아니야.. 그냥 쳐다봤지.."
"나..네가 나 좋아하는 거 느꼈어.."
"곤아?"
"응?"
"우리 사귀자.."
"오홋! 사.. 사귀자구? 진짜?"
"대신에 네가 처음에 날 거절한 게 괴씸해서 조건이 있어!"
"조건? 무슨 조건인데?"
정숙이 조건이 있다고 말하자마자 핸드백에서 뭘 끄낸다.
선물을 준비했나? 역시 여자들은.. 어 난 아무 것도 준비 못했는데..
"곤아.. 자 이거 받아 봐.." 정숙이가 핸드백에서 꺼낸 뭔가를 내게 건낸다.
"이게 뭔데..?"
"노비문서!"
"오잉! 뭐 노..비..문서..?"
"그래! 노비문서!"
정숙이의 손끝을 통해 건내진 건 선물이 아니라 주민등록증같은 신분증이었다.
주민등록번호.. 이름.. 어? 노비문서증이라고 써있다..
주민등록증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노비 문서증이였다!
"뭐.. 뭐야 이거.. 사귀자며?"
"그래.. 근데 일단은 넌 괴씸죄가 있으니까 노비부터 시작해.. 그리고 오늘부터 나 만날 때 내 이름 부르지 말구 마님이라고
불러야해.. 넌 내 노비니까! 알았지?"
"참.. 노비증 뒷면 좀 볼래?" 정숙이가 시킨대로 노비증 뒷면을 돌려 봤다. 오홋!
"소리내서 읽어봐 봐"
"시.. 싫어.. 쪽팔리게.."
"나 가?"
"본인 이곤은 윤정숙의 노비임을 자처하고 윤정숙님을 마님으로 성실히 모실 것을 정히 각서하나이다 ( 인 )"
"잘했어.. 동의하지?"
"야아.. 이게 다 뭐냐.. 언제 이런걸 준비했어? 에이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떻게 노비야.. 요즘세상에.. 쪽팔리게.."
"왜 싫어? 나 별로 안 좋아 하나 보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구.."
"정말 좋아한다면 이런 것도 못해줘? 그리고 넘 실망 마.. 노비생활 열심히 잘해내면 남자친구로 승격도 되니까.."
"아이 그래도 이런걸 내가 어떻게 하냐.. 그리고 머슴도 아니구 노비가 뭐야.."
"머슴이랑 노비랑 같은 거야.."
"엉? 그.. 그런가.. 헤.."
"싫구나.. 알았어.. 그럼 할 수 없지.."
어.. 정숙이가 핸드백을 챙기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 버린다.
"먼저 갈께.."
"엉? 자.. 잠깐.. 아.. 앉아 봐.. 왜 벌써 가.."
"싫다며..?"
"후.. 아.. 알았어.. 알았다 구!"
"헤.. 곤아! 자꾸 튕기지마.. 좋으면서.." 정숙이 다시 핸드백을 자리에 놓는다.
"자.. 가지고 오라했던.. 반명함 사진하구 도장 줘 봐"
"아..그게... 사진은.."
"왜 안 갖고 왔어?"
"후.. 아니다.. 갖구 왔다. 자."
사기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진짜 싫은데 반명함 사진과 도장을 꺼내 놓고야 말았다.
"호.. 갖구 왔으면서 빼기는.." 정숙이 이내 또 핸드백을 만지작 거리더니 풀과 인주를 꺼낸다..
히잉.. 난 저 핸드백이 싫다.
"사진은 내가 잘 붙여 줄께!" 정숙이 이내 사진의 뒷면을 한 꺼풀 벗기더니 풀칠을 해댄다.
"자.. 예쁘게 잘 붙었다.. 너두 봐봐 예쁘지.."
"어..어.. 이쁘다.."
"자 뒷면 각서란에 도장은 이 인주 묻여서 네가 찍어! 본인 도장은 본인 스스로 찍어야 하거든.."
강제였다.. 이건.. 도장을 함부러 찍으면 안된다고 마음속 깊이 메아리가 외쳐 왔으나 정수기의 째려보는 눈빛에 이미
도장은 찍혀져 가고 있었다.
"자아! 다됐다..헤 곤이도 수고했어! 어머.. 이렇게 하니까 노비증 너무 예쁘다.. 완벽해..
이제부턴 넌 내 착한 노비야.. 알았지? 이제부턴 마님이외엔 다른 여자 쳐다봐서도 안 되는 거 알지?"
"히.. 저.. 정숙아..?"
"정숙이라니.. 무험하게 마님! 마님해봐! 얼르응~~"
"후.. 꼭! 그래야 돼?"
"노비생활 충직히 해서 남자친구로 신분상승하기 싫은가 보지?"
"마.. .... 마님.."
"호..호.. 호.."
"이따가 커피숍 나가서 이 노비증 코팅하자.. 알겠지? 그리고 이 노비증은 항상 휴대해야해 내가 너 만날 때마다 검사
할 꺼야 알았지?"
"흑흑.. 그.. 그래.." 그렇게 토요일 저녁쯤에 난 노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씨...
"참.. 다음엔 꽃 사올때 장미꽃 사지 말구 후리지아로 사와.. 나 후리지아 좋아하니까.."
"그.. 그래.."
"자.. 가자 곤아! 오늘 마님이 노비 얻은 기념으로 우리노비 맛있는 거 좀 먹여야 겠다.. 뭐해.. 어서 일어서..호..호.."
세상을 삼켜도 시원치 않을 사나이가 얼떨결에 한 아낙네의 노비가 되어 가는 순간이었다.
[제26화] 연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노비가 된 이후 일주일 중 받침있는 요일은 빠지지 않고 마님께 부름을 받았다.
부름을 받은 날엔 그 지긋지긋한 커피숍을 항시 들락 거려야 했고.. 자긴 이미 대학생이라며 날 그 사람 많은
커피숍에서 과외를 시키고 그랬다.
으.. 이게 왠 개망신..
대신 수학만은 자신있다고 절대 그애 앞에서 수학 교재를 내놓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어제 토요일은 받침이 없는 날이고 하니 토요일은 쉬어야 한다고.. 날 풀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멍석말이 당해
먼지나게 맞을 뻔했다.
그래도 재수생활 한다고 나머지 받침이 없는 날은 건들지 않아 주었다.
뭐라나? 힘 쎄고 무식한 먹쇠보다 재빠르고 똑똑한 머슴이 낫다 했다.
저번 커피숍에서 노비증에 도장을 찍은걸 그 날 이후 내내 후회하며 항상 휴대해야 한다고 받침있는 날 마다 검사하는
통에 태워 버릴 수도.. 관가에 신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숙이와 아름다운 애듯한 사랑을 꿈꿔 왔었다.
근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노비가 뭔가? 머슴이?
숙이의 너무나 하얀 피부와 선한 눈망울, 갸냘픈 입술, 해맑디 맑은 웃음..
내겐 이상형 그 자체였고 신비였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성격이 지랄 같았다.
노비문서에 도장이 찍힌 3일 후부터 그녀는 영웅본색이 아닌 마님본색의 마성을 드러냈다.
일주일을 눈물로 참아 내고 직인날인의 그 날로부터 10일째 되는 날에서야 비로서 나는 직인날인의 그날을
내 인생의 '시일야방성대곡'의 날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2주전 토요일엔 마님이 마님 섬기랴, 공부하랴 바쁜 머슴을 포식 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무섭게 해대며 날
토요일 아침 일찍 나오라 했다.
"저..저기.. 나 오늘 학원 가야되는데.."
"으음.. 이상타.. 토요일은 빠져도 될 텐데.." 정숙인 종합반의 생리를 꾀 뚫어 보고 있었다.
"아니.. 그게.. 내가 가고 싶어서.."
"음.. 괜찮아 하루 정도는 쉬어야 머리가 맑아지지..호호호"
"나.. 공부할 것도 많이 밀렸는데.."
"그래? 잘됐네.. 나도 오늘 report 써야 하는데.. 같이 도서실 가자!"
"아.. 아냐.. 난 학원으로 갈 꺼야.."
"호오.. 나 안보고 싶은가 보지..? 벌써 다른 노비랑 눈 맞은 건 아닐테고.."
"눈은 무슨.. 토요일인데 어머님 도와서 빨래두 하구 반찬 만드는 것도 좀 배우고 그렇지.."
"뭐라구? 벌써 나보고 살림이나 배워 두라고?"
"살림을 못하는 여자는 집에 있어도 행복하지 않으며, 집에서 행복하지 못한 여자는 어디를 가도 행복할 수 없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래?"
"정숙아?"
"왜?"
"스토이형 얘긴데.."
"스토이형이 누군데?"
"톨스토이형 말야.."
"뻥치지마.. 톨스토이 같은 그런 대 문호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아무데서나 뻥치구.."
"쩝!..아님 말구.."
아무튼 옛 백수의 기지를 발휘해 오후 늦게까지 늦잠을 자리란 부푼 꿈은 그렇게 쉽게 깨지고 말았다.
니가 도대체 학원안가도 되는 날에 왜 늦잠을 안 자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대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그녀를 아침에 만났었다.
"안.. 안되겠어.. 너 요즘 반항끼가 부쩍부쩍 느는 거 같애.."
"응?... "
신사리에서 만났던 그 날 아침은 순대볶음을 먹었다. 아니 마님께서 먹였다.
흐..흑.. 오후에 점심으로 백순대를 먹자 했다.
흑흑흑... 저녁에 마님께서 순대국 두 그릇을 시켜 자기 한 그릇 나 한 그릇을 연인처럼 맛있게 먹고 먹이고 있었다..
정수기는 삼시세끼 순대를 먹이고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며 나를 집으로 드려 보냈었다.
기억에 남을 것 같아 좋아라 하며..
신림동은 순대로 유명하다. 특히 순대타운으로..
나.. 순대 좋아했지만.. 그 날로 순대 끊었다.
[제27화] 난닝구 사건
순대사건이 지나고 그 다 다음 주인가 그랬을 꺼다.
정수기 아니 마님이 밤늦게 전화를 주셨다.
"고니야!.. 너어.. 내일 너 입는 런닝셔츠 있잖아.."
참고로 마님은 날 노비로 삼을 그 날부터 고니라 불렀다.
"런닝셔츠? 난닝구 말이야?"
"난닝구가 뭐니? 런닝이라 해야지.. 우리 고니 아직 천한기질이 남아 있구나?"
"뭐..뭐라고? 천한기질?"
"아.. 아니.. 미안..실수! 암튼 내일 네 런닝 입구 있는 거 입고 있는 거 한장 뺴고 다 갔구 와.. 알았지?"
"엉? 난닝구를 다?"
"그래..전부다.."
"난닝구를 뭐하게?"
"어허.. 마님 하는 일에 머슴이.."
"우씨.."
"낼 학원 끝나고 늦게라고 울 집 앞으로 갖구 와야 돼.. 쪽팔림 택시타구 오구..헤.."
애가 또 왜 이러나 이번에 절대 들어주지 말자!
그래 초반에 기를 잡자!라구 굳게 다짐했는데 그 날 밤 꿈에 순대를 먹었다.
삼시세끼를..
후..
다음날 밤 어젯밤 꿨던 악몽을 상기하며 배낭가방에 꾸깃꾸깃 쑤셔 넣어 난닝구를 쪽팔려 얼릉 택시를 주서 타고 정수기에게
갖다 주고 마는 만행를 저질렀다.
그 날 입고 있던 난닝구를 한 5일쯤 입었을까?
마님도 쪽팔렸는지 택시를 타고 와서는 내 난닝구를 되돌려 줬다.
씨~이익 웃으며..
"절대로 절대로.. 내가 런닝 사줄 때까지는 이 런닝만 입구 다녀야 해! 착한 고니 알았지?"
"그래.. 뭐.. 난닝구 입는데 뭐 어려울 께 있냐.."
그리고 마님은 실실 웃으며 바로 돌아갔다.
"제가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왜 실실 돼... 내 얼굴만 봐도 좋은가?.. 히.."
집에 들어와 배낭을 풀었다.
내가 보냈던 난닝구들이 고스란이 잘 있었다.
5일동안 난닝구를 못갈아 입어 배낭을 풀자마자 한 장을 꺼내 난닝구를 갈아 입었다.
갈아 입고 거실로 갔다.
아부지와 엄마가 드라마를 뚫어 져라 보고 계셨다.
"밖에 누구 왔었냐?"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시며 아부지께서 내게 물으셨다.
"아..아뇨.."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예.."
"곤아.. 공부하느라 피곤 할 텐데.. 과일 좀 깍아 줄까?"
엄마가 공부하느라 피곤해 보인다며 과일 애기를 하시며 드라마에서 나를 바라 보셨다.
그러다 내 난닝구를 보신다.. 어.. 엄마 눈이 커진다..
"어.. 곤아! 너.. 난닝구가 그게 뭐냐?"
"예? 난닝구요? 난닝구가 왜요?"
흠짓 놀래하는 엄마의 눈길을 따라 난닝구의 중앙 아래.. 배꼽 있는데를 보았는데..
별생각 없이 보았는데..
난닝구 중앙 아래 배꼽에는 이렇게 미싱으로 큼지막하게 박음질 되어 있었다.
'정수기꺼'
"오..마..이..갓.."
엄마의 눈이 더더욱 휘둥그래 지신다..
"뭐..뭐야! 난닝구가? 곤아! 난닝구에 왜 그런게 새겨져 있니?"
"아..아..아하.. 이거요?"
"그래.. 그게 도대체 뭐야?"
"이게..이..이게.. 아! 정.. 정수기 회사에서 준거예요.. 선물로.."
"정수기 회사에서?"
"헤..예... 정수기 회사에서요.. 저번에 길에서 선물로 주더라고요... 헤.. 저 이만 들어가 볼께요.."
"정수기회사에서 난닝구를 선물로 줘?"
아부지.. 엄마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뒤에 따라오고 있음을 느끼며 얼릉 내 방으로 숨어 기 들어 갔다.
후.. 정수기랑 사귀는 거 장난 아니다..
이름만 '정숙'이다..
[제28화] 슬픈 소희
난닝구 난도질 사건이후 난 난닝구를 길게 쭈욱 펴고 바지를 치켜 올려 입는 버릇이 생겼다.
미싱질 당한 난닝구 몇 벌을 칼로 고생고생 하여 미싱질을 강제로 뜯어 내 받침없는 날에 입고 다녔다.
혹시라도 받침있는 날은 광중이에게 들킬새라 여간 난닝구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됐다.
난생처음으로 광중이 학원에 지각을 했다.
그것도 4교시가 지나서야 겨우 학원에 도착했다.
"어이! 뭐야.. 왜이리 늦게 와?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어?.. 어.. 아니야.." 광중이 피곤을 얼굴을 하고 내게 대답을 했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지?" 자리에 앉는 광중에게 다시금 되물었다.
"그래 보이냐? 면도 했는데.. 어젯밤에 소희 만났어.."
"소희 아직도 만나?"
"사실은.. 어제 소희가.."
"소희가 왜? 또 가출 했구나?"
"자살을 시도했어.."
"뭐,, 뭐라고? 자살을!"
"그래.."
"후.. 그랬었구나..소희가 어쩌다.."
"저번에 말했지만, 소희 아버님이 다른 여자하고 재혼 했었잖냐.. 그리고 지금까지 엄마랑 지내고 있었나 본데..
소희 어머니도 화낌에 그러셨는지 다른 남자를 만났었나 봐.. 소희는 그래도 아버님이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어..
가족이니까.. 가족이란게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소희가 어제 낮에 아버지 사는 집으로 갔었나 봐.. 그리곤 밤에 약을 먹은 거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소희
아버지가 소희의 마지막 남은 소원 아니 희망을 꺾었나 봐.."
"후..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래 소희는 깨어났어?"
"겨우..어젯밤에 소희랑 통화한 게 천운이지.." 광중이 힘없이 대답을 이였다.
"다행이다.. 천만 다행이야.. 소희가 무슨 죄가 있길래.. 소희가 안됐어.. 그나저나 소희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응? 나?.. 뭘.. 소희에 비하면 행복한 놈이지 뭐.. 소희네 가정을 보면 느끼는 게 많아.. 울 부모님이 비록 가난 때문에
숨이 턱에 차도 끝끝내 우리 가정을 지켜 오시며.. 우리를 지켜 오신 게.. 예전에 몰랐는데 너무나 감사 드린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가 부모가 되서 부모님 나이에 이르러서도 부모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꺼야..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의 마음을.."
"참.. 예전에 말야..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인가? 동네에서 애들하고 다방구하구 놀다가 넘어져서 머리에 피가 난 적이 있거든..
그 때 내가 내피에 놀라서 엉엉 울면서 엄마한테 갔더니.. 엄마가 머리에 된장 바르고 난닝구로 질끈 묶어 주시더라구..
그래서 난 이게 뭐냐구.. 막 엄마한테 화를 냈던 기억이 있어..훗.. 그땐 엄마가 얼마나 서운한지.. 계모인줄 알았다니까..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엄마가 화를 내는 나를 보며 우셨던 거 같아.. 한참 젊었을텐데.. 얼마나 가난했으면...
그 젊은 엄마의 마음의 얼마나 아팠을까하는 생각이 이제야 조금씩 든다..풋.. 그래서 난.. 중학교 올라갈 때까지 된장하구
난닝구가 만병통치약인 줄 알았어..킥킥"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까 너하구 나하구는 난닝구하고 무슨 인연이 있나부다.."
"왜? 너두 난닝구로 치료 했었어?"
"아.. 아니.." 순간 난닝구에 대한 정수기의 만행을 실토 할 뻔 했다.
"광중아.. 소희가 있는 병원에 한 번 가 봐야 겠다.. 참! 오늘 받침없는 날이지?"
"짜식.. 벌써 애처가가 다 되 가지고.. 마!"
"헤... 나도 모르게 그만.. 길들여 지나부다.. 웅.. 클랐다.."
"난.. 퇴원 할 때까지 매일 가볼 참이다!"
"그래? 와.. 지극정성이네.. 마! 그러다 정들겠다.."
"그래도 날 찍은 부킹파트너 아니냐.. 비록 나이트에서 만났어도 파트너는 파트너지.."
"후.. 클랐다.. 그나저나 너하과 나하구는 여자운이 별로 없는 갑다!"
"엉? 정수기가 왜? 네가 원했던 이상형이잖아! 하얗디 하얀 피부에 얼굴도 예쁘장한데.."
"하얗면 뭐하냐.. 성격이 좋아야지.. 광중아.. 너는 여자 사귈려면 성격부터 봐라잉!"
"킥.. 왜? 정수기가 성격이 좀 그러냐?"
"아..아니! 그런 건 아니고 좀 지랄쟁이 같아서.."
"풋!.. 그러냐? 그런면 헤어져라.. 킥킥"
"아니야.. 나 그래도 정수기.. 좋아해.."
"짜식.. 그래.. 성격도 좋지만 사랑이 있어야 해.. 무엇보다도 사랑이"
"맞다.. 광중아! 그만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점심을 먹고 광중인 수업시간에 많이 졸았다.
어제 소희 때문에 잠도 제대로 안잤는 갑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이번에 나이트가 아니라 병원으로 자살을 시도한 소희를 만나보러 갔다.
버스를 타는 내내 광중이는 졸았다.
한없이 조는 광중이를 보고 소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버스에 내려 광중이가 안내해 병원으로 소희가 입원 중인 병실에 다다랐다.
걱정스런 맘에 쉽사리 문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광중이 문을 조용히 열 때였다.
왠 중년 아저씨가 누워 있는 소희를 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소희 아버님인 듯 하다고 광중이 소삭였다.
순간 저.. 저런 나쁜 시끼..라고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오는데..
고개를 돌린 소희 곁에서 그 남잔 슬프도록 오랫동안 흐느꼈다.
우린 병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들어 가면 안될 것 같았다.
그토록 슬프게 흐느끼는 소희 아버지의 아니 절름발이 어른의 눈물의 의미는 뭘까?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내내 그 남자의 병실에서 흘린 눈물이 머리 속에 아른거렸다.
[제29화]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다
정수기의 머슴으로 제법 길들여 질 때 쯤 잊은게 있는 걸 깨닳았다.
아니 먼저 풀었어야 하는데..
아! 우정을 이렇게 쉽게 잊어버렸다니..
유성이에게 먼저 애기를 풀었어야 했는데..
제대로 결정도 못한 체 어물어물 거리다 벌써 노비로 되어 있어 버려 한 번씩 사귄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었다.
유성이가 정수기를 사귀어 볼꺼라는 사실 조차 잊고 있었다.
이런.. 난 우정을 소중히 하는 사나인데..
벌써 내가 정수기를 모시고.. 아니.. 사귀고 있으니..
내겐 제법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까맣게 유성이를 생각지 못했다니..
유성이를 만나야 한다!.. 그가 먼저 정수기에게 접근을 했는데 중간에 내가 가로챈 꼴이 된 것이다..
어쩌나.. 유성이가 정수기를 괜찮게 보기만 했을까?
아니.. 많이 좋아했을지도 몰라.. 정수기를 만날 때 유성이의 눈빛.. 수작들...
아니.. 어쩌면 사랑 할 지도 몰라.. 그럼 어떻게 되지? 내가 친구의 우정을 배신해 버린 건가?
말도 없이? 후...
왜 진작 유성이에게 말하지 못했는가? 우.. 후회막급이다.
유성이 맘속에 정수기가 이미 깊이 들어가 있으면 이 일을 어쩌나?
그렇다면 유성이 내게 아니 친구에게 실망해 친구관계가 끝날지도..
유성이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 되어 머리를 아프게 해왔다.
그래! 유성이를 만나야 한다. 난 사나이가 아닌가?..
풋.. 사랑보다 우정이지 암.. 우정이고 말구..
아니.. 그럼.. 마님.. 아니 정수기는?
후... 이게 왠 드라마도 아니고 사랑과 우정사인가..
"따르릉~"
"여보쇼?"
"누구냐?" 유성이가 언제나 그렇게 짧게 전화를 받았다.
"나다. 곤"
"왜?"
"어엉.. 오늘 뭐하니?"
"아무것도 없다."
"유성아.. 저기..저녁에 좀 보자!"
"왜? 50다마수로 또 당구치자고?"
"엉? 그.. 그래 당구도 치구.."
"이젠 50이랑 안친다니까.."
"술 한잔 하자..오랫만에.."
"니가 살꺼냐?"
"그.. 그래 내가 살께!"
"몇시?" 유성이가 만남에 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체..
"7시30분"
노량진 재수생들이 오늘 또 차를 갖구들 왔는지 무슨 놈의 차가 그리도 많은지..
유성이를 만나기로 신사리에 8시에 되서야 도착했다.
후.. 오늘 그렇치 않아도 미안한 판국에..
유성이를 만나기로 한 신사리 소공원에 도착하자 유성이 담배를 뻐끔뻐끔 거리고 있었다.
"유..유성아!"
"주글래?"
"미..미안.. 재수생들이 차를 가져오는 바람에.."
"뭐라구?"
"아.. 아냐.. 차가 좀 막혔다구"
"뭐 살꺼냐?" 유성이 맛있는거 사면 용서 한다는 눈빛으로 내게 물어왔다.
"짜식.. 뭐 먹고 싶은데?"
"음.. 오랜만에 순대타운가서 순대 먹을까?"
"응? 순대? 나.. 순대 끊었다."
"미친넘.. 순대가 담배냐 끊게?"
"아이.. 그런 게 있어.. 순대말구 다른 거 골라.."
"흠.. 너 오늘 돈 좀 덤비냐?"
"응? 그래 좀 덤빈다."
"그럼 갈비 사라!"
"가자! 오늘은 소갈비 산다!"
지글지글 타 익어 가는 소갈비로 미안한 맘을 대신 할 순 없었다.
유성인 이게 왠 갈비냐며 마냥 기분 좋다했다.
"많이 먹어.. 유성아.."
"너 오늘 돈 줍었냐?"
"유성아!"
"왜?"
"아..아냐.. 소주 한잔 받아라!" 미안함을 담아 소주를 한잔 가득히 따랐다.
유성이에게 정수기 얘기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저렇게 착하디 착한 유성이에게 어떻게 내가.. 후..
"유성아! 너 혹시 여자 안 사귈꺼냐?"
유성이 말이 많아지는 분기점인 소주 한 병이 반이 넘어갈 시점에 유성이에게 말을 건냈다.
"우히히.. 여자.. 사귀어야지.. 암 사귀어야 징.. 외로워 죽겠어.. 왜 한 명 소개 시켜주게? 이쁘냐?"
"아.. 아니" 역시나 유성인 소주 한병 반이 넘어가자 말이 길어졌다.
"너는 안 사귀냐? 참.. 요즘 재수하는데.. 학생이 공부해야지.. 그리고 너 아는 여자도 별로 없잖아? 혹시 학원에서
한 명 찍은 애 없냐?"
"응? 없어.."
"난 한 명 사귀어 볼 여자 있는데..히.. 잘 안될 것 같기도 하고 넘어올 것 같기도 하구.. 에이 여자는 너무 어려워.."
드디어 유성이 중요한 얘기를 취중에 흘리기 시작했다.
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자..
"유성아.. 나도.. 아..알아.."
"엉? 내가 은정이 한테 대쉬 한 거 너도 아냐? 킥킥.. 은정이가 쉽사리 대답을 안 해 준다! 기집애가 넘 튕겨서
좀 짜증난다.. 헤.."
"어? 뭐.. 뭐라고? 은정이?"
"왜? 너도 안다며.. 경환이 한테 들은 거 아냐?"
"어..어..그래.. 그래.."
아! 유성이 뭐라고 하는 건가? 방금 은정이라 했는가? 이게 우찌 된 일인가? 저..정수기는?
"곤아! 한잔 더 따라라.. 클랐네.. 한병 반 넘으면 나 말 많은데.. 나 말 많아 졌냐?"
"아.. 아니야.. 별로 없어.."
"아줌마! 요기 갈비1인분 더 줘요! 소주도 한병 더요!" 유성이가 부담없이 잘 시킨다.
"유..유성아! 저번엔 정수기 좋아하는 것 같던데.."
"정수기? 음.. 예쁘장히 괜찮았지.. 뭐 꼭 좋아한 건 아니야..히.. 한참됐나? 저번에 한 번 집에 바라다 주면서
살짝 떠봤는데.."
"봤는데?"
"꽝!이지 뭐.. 싫데.. 그래서 말라구 했어.. 뭐라고 했더라.. 맘에 있는 다른 남자가 있다나.."
나다!..
"어엉.. 그랬구나.."
"킥.. 쪽팔렸지.. 근데.. 지금 생각하니까.. 잘된 거 같아.. 괜히 어설프게 그냥 그냥 사귀는 것보다..
안 사귀는게 낫지.."
"음.. 그랬구나.. 은정이는 어떻게?"
"음.. 나 사실 예전부터 은정이 좋아했거든.. 근데 기집애가 하두 튕겨대서리.. 커..억.. 너두 한잔 받아라.."
"그래.."
"근데 이번에는 은정이가 쪼금 꼬리를 내린 거 같아..헤헤.. 잘하면 진짜 사귀게 될 것 같다.. 넌 은정이가 어떻냐?
예쁘지? 그치? 너 혹시.. 은정이 한테 흑심 같은 거 없지?"
"없.. 없지잉.. 당연히 없지.. 내가 어떻게 은정이를 넘봐.. 네가 있는데.. 아무렴 그렇고 말구.."
"난.. 사.. 사실.. 정수기가 괜찮던데.."
"우헤헤.. 정수기? 하기야 이쁘긴 예쁘지 새 하얗안 피부에.. 음.. 니가 정수기 같은 스타일 좋아하는구나..
그럼 한 번 해 봐.. 보나마나 안될테지만.. 아까 얘기했지만 정수기 좋아하는 사람 따루 있데.."
"저기.. 유성아! 그럼 되든 안되든 내가 함 대쉬 해도 상관 없냐?"
"진짜? 그래 봐라.. 근데.. 아마 어려울 껄.. 정수기 눈 높아.. 그리고 아마 성격도 좀 그럴 껄.. 헤헤..
사귄다해도 당해내기 힘들꺼당..킥킥.. 곤아! 1인분 더 먹어도 되지?"
"응? 그.. 그래.. 1인분만 더 먹어랑.. 그리구 나.. 사실..정수기가 괜찮더라구.."
"괜히.. 헛수고 하지 마라.. 사귀기는커녕 아마 널 노비로 삼을지도 몰라!.. 킥킥.. 에구.. 술에 맛탱이 가기 전에
우리 은정이 한테 전화나 한 번 해야겠당! 전화하구 올께.. 커..어..억~"
후.. 이게 뭔가?
기분이 얼떨떨했다.
땡잡은 것 같기도 하고.. 갈비 값 괜히 날린 것 같기도 하구..
암튼.. 마음을 졸여 가며 고민고민 했던 것들이.. 이렇게 맥없이 끊나 다니..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구나..
내가 백수시절 드라마를 넘 많이 봤나? 술 취해 있는 유성이 고맙기도 하구 밉기도 했다.
하.. 그때 처음에 정수기가 내게 대쉬 했을 때.. 유성이하고 얘기나 한 번 해볼껄!..
그럼.. 후.. 노비가 되어 있진 않았을 텐데.. 흑흑..
난.. 사나이였는디.. 지금은 왜 쪽팔린지..
갈비집을 나와 술에 취해 집에 가겠다는 유성이를 끝끝내 붙잡아 50다마의 필승으로 유성이를 물리게 했다.
[제30화] D-DAY 한달
어느덧 매일같은 재수생활이 이제 한 달을 남짓 거린다.
날씨는 내가 언제 더웠냐며 내가 무슨 뜨거운 감자인줄 알았냐며 차가운 입김을 후~ 하고 불어댔다.
얼마 공부하지도 못했는데 학원강사들만 진도를 끝내 가고.. 마음만 조급해 진다..
마음은 조급하고 공부는 잘 안되고 이럴 땐 재수생활 진짜 재수없다.
아니.. 내가 무슨 과를 갈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체 재수라는 걸 시작한 게 한심스럽기도 했다.
광중이도 4개월을 공부해온 자체가 새삼스러웠는지 이제는 수업시간에 가끔 존다.
이자식이 벌써 마음에 헤이해진 건지..하기야 여기까지 온 자체가 기적이지.. 암 기적이야..
"참.. 이 녀석 밤에 진짜 운동하기는 하는 건가? 심히 의심스러워.."
"아하~함.. 아 졸리다.. 곤아 나 먼저 간다!"
복습을 하던 광중이가 운동하러 간다며 또 먼저 일어섰다.
"이녀석 혹시 한 달 남짓하구 성적은 안 오르고.. 포기한건 아닐까? 아니.. 밤에 당구나 치며 놀지도 몰라.."
확실 할 것 같은 마음에 야자를 조금 일찍 접고 광중이 평소 운동한다던 서울대로 미행을 감행했다.
혹시나 해서 PT음료수를 하나 사 들고 10시가 넘어서야 서울대에 도착했다..
"어.. 추워.. 이 시간에 운동하고 있을리가 없어.. 뻔한걸 괜히 왔나?"
몇 번 얘기 듣던 운동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 시간에도 공부를 하는지 도서실같은 건물에만 불이 켜져 있는데.. 이 놈의 학교가 뭐이리 넓은지..
간 큰 나로서도 깊은 밤에 혼자라 그런지 어두컴컴한 길이 무서벘다.
광중이가 말한 운동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과..광중이다..!"
왠 미친 녀석이 그 넓은 운동장을 죽어라 지그재그로 질주해댄다.
헉헉 거친 숨소리를 내며.. 이 어두운 밤에 혼자서..
"이..있었구나!"
오후 내내 의심했던 마음은 쪽팔렸는지 온데간데없이 종적을 감춰 버리고.. 그저.. 놀라웠다.
너무나도 죽을 듯이 달리는 광중이를 나도 모르게 잠시 계단에 앉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을 죽을 듯 운동장을 달리던 광중이 앉아 있는 벤츠까지 들리만큼 거친 호흡소리를 내다 기어이 땅바닥에 푹 쓰러졌다.
"주..죽었나?"
살아 있었다.
헉헉거리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광중이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광중이 한10여분을 죽은 척하며 누워 있었을까? 이내 다시 일어난다.. 반대편 벤츠로 간다.. 옷을 갈아 입는다..
아..아니.. 농구공을 잡는다..
"아직 안 끝났나?" 나도 모르게 몰래 보기는 계속 됐다.
농구공을 잡은 광중이 이내 농구코트로 뛰어 든다..
또다시 헉헉거린다..
무슨 형식을 맞춰 끝없이 움직이고 공을 뛰기며 레이업슛, 드라이브런닝슛, 프리드로우슛, 골밑슛등을 수십번씩
아니 수백번씩 해댄다.
"저 자식 쉬지도 않네.. 무서분 넘!"
오밤중에 혼자서 헉헉거리며 저 지랄을 얼마나 해대는지 으.. 밤 12시가 넘어간다..
"어..어.. 또 쓰러지네.."
끝없이 농구를 해대던 광중이 또 헉헉거리며 하늘을 향해 푹 쓰러진다..
광중에게 다가가고 싶었는데 호기심이 생겨 다가가지 않고 지켜본다..
"어휴.. 넘 무리하는 거 아냐.. 저자식 매일같이 이랬었구나.. 그래서 몇 번씩 졸았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또 한 10여분 정도 누워 있었을까? 광중이 힘들게 일어난다.. 이젠 옷 갈아 입구 갈 준비 하려나..
"어..어라.. 왠 철봉으로 가는가?"
이내 일어난 광중이 이번에는 철봉으로 간다..
으.. 이젠.. 턱.. 턱걸이를 해댄다..
숨이 턱에 걸릴 만큼 턱걸이를 해대더니 이내 서.. 서전트도 한다..
"미친넘.. 독한넘.." 광중인 새벽두시가 넘어서야 운동을 마쳤다.
헉헉대며 또 하늘을 향해 쓰러져 있는 광중이 이번에 오랜 동안 누워 있는다.
"저녀석 한 번 놀려 줄까?"
헉헉 거친 숨소리를 뱉는 광중이가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누워 있는 광중이를 우~왁! 하고 놀래 줄 요량으로 살금살금 얌생이 타법으로 그 녀석에게 다가간다..
조금씩.. 조금씩.. 거의 다와 가는데 내 무음을 발생하며 다가가는 얌생이 타법 덕으로 이녀석이 눈치를 못 채는 것 같다.
"히히.. 새벽 2시간 넘은 밤중에 깜짝 놀라겠지.. 흐흐"
거의 가까워 질 무렵이었다. 발 밑을 지나 광중의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왔을 무렵이었다.
울고 있다..
광중이 얼굴이 보이는 곳에 다다라서야 그녀석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광중인 그렇게 차가운 땅바닥에 혼자 누운 채로 울고 있었다..
난 깨울 수가 없었다..
새벽2시가 넘도록 그야말로 죽도록 운동을 한 후에 흐르는 광중이 눈물..
그 어떤 것이 그리도 서러웠는지 한 남자가 차가운 바닥에 홀로 흐느끼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광중이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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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또와-유나연재
[연애소설연재]
수학 중2때 포기한 놈과 국민학교 5학년 때 산수 포기한 두 꼴통 만나다(21~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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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13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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