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90] [연재] 삼류무사-81 첨부파일 :
자다가 억지로 일어난다는 것처럼 짜증스런운 경우는 없다. 아무리 마음 좋
은 군자라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인상이 구겨지는건 어쩔도리가 없고 성격이
좀 안좋은 사람은 쌍소리가 튀어 나오기도 한다. 적당히 들어간 술과 안
돌아가는 머리를 나름대로 굴린탓에 심신이 노곤해질대로 노곤해진 장추삼
이 단잠에 빠져서 기분좋게 음냐거리고 있을때 들린 그 소리는 비록 아름다
웠지만 일단은 싫었다.
(“장형, 장형 ! 잠깐 일어나시오!”)
' 우웅... '
(“ 장형 ! 일어나라니까 !”)
‘웅... 뭐야?’
절대로 눈뜨기 싷어서 어떻게든 개겨보려 돌아눕는데 갑자기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뭐야? 전음이야?’
세상에, 전음으로 잠을 깨우다니...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전음으로 잠을 깨우는 사람은 정신이 나갔거나 매우 절박한 사정이 있을 것
이다. 그래도 일어나기는 싫어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제차 전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안 일어난다면 평생 그대를 저주 하겠어요. 좋은말 할때
눈뜨는게 좋을걸? 일어나욧!”)
' 아이고, 시끄러워. '
우건의 목소리였다. 무공을 한다는 것 쯤은 짐작을 하고 있었으니 별로 놀
랄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헤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들 다 자는 이시간에
올빼미처럼 사람을 부르느냐 이거다.
‘모르는체 하고 그냥 더 잘까?’
정말이지 파곤했다. 육체적으로 하는 노동보다 정신적인 그것이 주는 피로
도는 느껴본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큼 부담감을 준다. 이 삼일을 그
렇게 보내니까 사람꼴이 영 말이 아니다. 오늘만큼은 푹 자보려고 했는데.
("진짜 안 일어나네?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흥! 그 이후에 일에 대
해서 전적으로 장형이 책임져야 할꺼에요. 내가 뭐 할일이 없어서 이런 한
밤중에 숨바꼭질 하듯 장형을 부르는줄 알아요? 알고보면 나도 바쁜몸이라
구욧!“)
' 아이... 진짜. '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대충 옷을 입고 밖에 나왔다.
' 어딨는거야? '
(“아휴, 잠꾸러기! 이제야 일어난거에요? 좋아요, 오늘 한번은 넘어가 주
도록 하죠. 하지만 다음번에도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킨다면 , 흥! 가만안둘
꺼에요!”)
' 글쎄, 어딨냐구? '
큰소리도 못내는 것이 부친과 정혜란이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있을 것이다
.
“ 아!... ”
집뒤의 공터에서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곳과 집까지는 어림잡아도 십여장,
전음을 할줄은 모르나 들은 풍월로 얘기하자면 대략 오륙장 거리까지 전음
을 전달하는 수준을 일류로 본다고 했는데....
‘멀리서도 사람을 부르네. ’
과연 공터에는 우건이 서 있었다. 달빛을 마주하고 서있는 모습은 남 ,여
라는 구분을 떠나서 누구나 감탄을 자아내게 할 아름다움으로 초라한
공터를 빛내주었다.
‘ 사람하나 서있는 것 만으로 허름한 공터가 궁궐보다 화려하게 보이는 구
만. ’
칭찬하기는 싫고해서 어색한 헛기침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허험,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볼일이 남아서 날 부른거요? 우형도
꽤나 피곤해 하는 것 같던데. ”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던 우건이 고개를 돌려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 눈망
울의 아름다움이란!
당소소의 아름다움은 농염하면서도 세월의 무게가 실린 기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건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란 청순하면서도 세상에 있을
것 같지않은 신비감이다.
“장형, 아니 장공자.”
호칭도, 목소리도 변했다. 억지로 내리누르던 목소리를 본래의 음성 그대로
실어보내니 이른아침에 풀잎에 맺혔다가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이슬방울이
따로 없었다.
‘ ! ’
아무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장추삼을 한번보고 다시 하늘가
로 눈을돌린 우건이 탄식을 지었다.
“ 하아, 사실 나는 개인감정 같은건 가져서는 안돼는 몸이었어요. 처음 술
자리에서 말했었잖아요, 해야할 일이 있다고... 오늘 만약 장공자가 모두
잊었노라고 했다면 차라리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지낼수도
있었어요. 자신의 과거를, 그것도 사라이란 추억을 그렇게 간단히
지워버릴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과 앞으로 무얼 얘기하고 무얼
공유하겠어요? ”
여전히 장추삼은 말이 없었다. 완전히 깨지 않아서 약간은 흐리멍텅 하던
눈빛도 제자리를 찾았고 정신도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일단은 우건
에게 기회를 주었다.
슥.
우건이 늘 쓰고있던 유생건에 손을 가져갔다.
‘ ! ’
잠시 망설이더니 장추삼을 한번 보고는 눈을 질끈감고 풀 듯이 유생건을 벗
었다.
차르륵.
“ 아... ”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유생건 속에 감춰져 있던 그, 아니 그녀의 삼단같은
머리가 세상밖으로 외출을 하자 본래의 아름다웠던 얼굴과 하나가되어
인세의 그 누구도 감히 구경해 본적없는 미의 극치를 이루어냈다.
여전히 눈을 감고있는 우건에게 꽤나 조심스럽게 장추삼이 말을 했다. 단지
아름다움 때문이라면 이렇게 조심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아름답구려, 여자라는거....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이정도로 아름
다울줄은....”
‘? ’
“알았다구요? ”
꽤나 큰 결심으로 머리를 풀었는데 이자의 반응은!
“언제 알았어요? 언제에욧? ”
‘에구, 그냥 앞에 말만 할걸. ’
방금전 까지만 해도 선녀강림 이었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원녀재림이다.
잡아먹을 듯 장추삼을 노려보던 그녀가 무엇이 그리도 분한지 어깨마져 부
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자리에 폴짝 주저 앉았다.
' 에구... '
졸지에 좋던 분위기는 다 날아가고 공터에 남아있는건 어정쩡한 두 남녀와
황량함이 전부였다.
“ 미안... 하오. 그냥 가만히 있는건데... ”
여전히 묵묵부답, 쪼그려 앉아있는 그대로 반응이 없어서 장추산도 같이 쪼
그려 앉았다.
“ 그냥 알게 된거요. 그러니... 어? ”
'또 우는거야? 하... '
청승맞은 표정은 혼자서다 보이겠다는 듯 울고있는 우건을 보자니 앖는 미
안함까지 저절로 생겨날 판이다. 무언가 꺼림직 하기도 했다. 그것의 정체
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자가 여자를 울리는건 썩 보기 않좋다.
“미안하오, 소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한 건 절대로 아니었소. 본래 나
란놈은 생각나는데로 말을 뱉어내서 종종 오해도 사고 그런다오. 이해해주
시오. ”
그래도 대답이 없다. 어지간히 서운했나보다.
“기분이 많이 상했구려 그럼 이렇게 합시다. ”
그는 우건의 손목을 잡아서 자신의 가슴팍에 대었다.
“내가 얄밉소? 그런 기분이 풀릴때까지 때리시오. 기꺼이 맞아주겠소. ”
우건이 조용히 손목을 빼서 옆의 바위에 장력을 날렸다. 물론 고개는 쳐박
은체로.
피슛.
꽝!
“허걱! ”
아이만한 바위가 그녀의 손짓 한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식은땀이 한방울 흘
려내렸지만 여전히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장추삼이 호기롭게 외쳤다.
“소저의 기분이 풀린다면 이깟 가슴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치시오, 마음
껏쳐요! 후련해질때까지 때려도 좋소이다! ”
“관둬요. 피하는 것 빼면 시체면서. ”
울면서도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우건이 말했다.
' 살았다... 엥? '
이번엔 장추산이 의혹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승세는 이미 그녀에게 넘어
가 있는 상태라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우건이 말했다.
“다 봤다구요, 당신이 싸우는 모습, 이상한 보법으로 피하기만 하던걸요?
그게뭐야, 박력없게. ”
그녀가 보았다면 모추와의 싸움일 것이다.
“그랬구려. ”
이제 다 울었다는 듯 ' 앞으로 그러지마요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못
헤아려 주면 나중에 고생해요 ' 어쩌구 하며 우건이 일어나자 그도 엉거주
춤 일어났다.
“어때요, 그냥 볼만은 한가요? ”
머리를 뒤로 제치며 그녀가 함초롭게 웃었다. 당연히 볼만했다!
이게 어디 볼만하기만 한가!
“최고요! ”
엄지손가락을 쭈욱 내밀어서 감탄의 표현을 대신했다. 말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그녀의 미에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 당신을 처음봤을때 누구나 한 목소리로 얘기하던 동네건달은 어디에도
없었고 내 눈에는 삶에대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청년이 앉아 있었어요.
또다시 보았을때는 강한 무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순진함이 좋았고....
마지막은 아까 얘기했지요. ”
그녀가 정추삼을 뜯어 보았다. 속눈썹 개수라도 세어 보겠다는둣.
“저는 아직 당신을 잘 몰라요. 당신도 역시 그러하겠지만... 우리 이렇게
해요”
그녀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요, 이거? ”
“걸어요! ”
애들도 아니고, 어쩌구 하던 장추삼이 우건의 냉엄한 눈길에 재빨리 손가락
을 걸었다.
“약속하세요. 당신이 중원으로 나가서 조금 더 큰 어깨가 되어 돌아오기
로. 제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돌아 오겠다고 말이에요.
그때까지, 그때까지 서로를 더욱더 생각해 보기로. 만약 우리다시
만났을때, 그때도 서로의 마음이 원한다면 우리의 얘기를 시작해봐요.
당신이나 저나 아직은 젊잖아요. ”
' 하! '
이렇게 마음에 드는말이 또 있을까? 그녀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미래를
말하고 있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속에 남자의 성장을 바라고 있다. 또한 그
것은 장추삼이 바라고 있는 스스로의 내일이다.
왈칵 껴안아주고 싶지만 겨우 자제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약속하리다. ”
“좋아요. ‘
손을 빼고는 그녀가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허리에 손을 척 얹고는 괜시리
턱을 주욱 뺐는데 딴에는 고고해 보일려고 했는지 모르나 그냥 귀여워 보였
다.
“ 당신은 지금 큰 행운을 잡은거에요.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무
림삼화중 한명이란걸 알아야 해요. ”
‘ ! ’
무림삼화!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명의 여인, 근데 중요한건...
' 난 당소저 외에는 잘모르는데? '
장추삼은 나머지 둘에관해 아는것이 전혀 없다는데 있었다.
수절 당소소야 너무 유명한 얘기고 화산의 가장 아름다운 꽃 이라는 검절
조소령이 그 둘째요, 천산에 있는데 볼수는 없는 꽃이라 하여 비절 이라 불
리는 이름모를 여인이 바로 우건을 일컫는 말이다.
“삼화든 뭐든 중요한게 아니지, 소저는 그런거에 들지않아도 충분히 아름
다우니까. ”
“흥! 그럼말로 여자를 꼬시나 보지요? ”
콧방귀를 날렸지만 싫지만은 않은 얼굴로 우건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무서운 오라버니가 계세요. ”
‘난 더 무서운 사람 많이 겪었네. 북궁 얼음덩이가 얼마나 무서운줄 알아
? ’
“나중에 뵙게되면 조심해야 할꺼요. ”
“알았소. 가슴깊이 새겨두리다. ”
내심이야 ‘제깟것이 ’지만.
그윽한 눈망울로 장추삼을 바라보던 우건이 신형을 둥실 띄웠다.
“이만 갈께요. 몸성히, 제발 몸성히 돌아와줘요. ”
그녀가 사라지자 공터는 삽시간에 을씨년스런 모습이 되었다. 사람 한명이
들고났을 뿐인데...
‘마치 꿈만 같구나! ’
선녀처럼 하늘로 오르던 우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방금전까지의 일은
무언가 비현실적으로 장추삼에게 다가왔다. 환상의 꽃길을 걸어도 이보다
더 몽환적일까.
‘어쨓든 무언가 시작된 것인가? ’
그것이 사랑인지 인연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오년동안 꽁꽁 봉인해놓은
무언가가 이제 터져 나왔다는것 뿐, 아직 미래를 말하기는 이르다.
‘ 일단은 더 자자...’
뒷머리를 긁으며 장추삼이 집으로 향했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접했기
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전에 좀 자야겠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발걸음 발걸음마다 우건의 영상이 겹쳐졌다.
[11672] [연재] 삼류무사-82 첨부파일 :
점심을 차려놓고 정혜란이 집을 나선건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이 들었던
장추삼이 강호로 나가는데 가만 있을수만은 없어서였다. ‘ 주인집 아들 ’
이었다면 떠나든 말든 신경쓰지 않아도 그만이었지만 전혀 ‘ 주인집 아들’
같지 않았기에 이렇게 시장에 왔다.
‘에구, 장가가가 괜한 객기로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장대인 아저씨
한테 피붙이라곤 하나밖에 없으니, 대사형께서 같이 가신다니까 그나마
안심이 좀 되기는 하지만. ’
삼류무사라고 강호유랑을 떠나지 말란법은 없다. 무공이 좀 딸리는게 문제지.
의협심 많은 장추삼이 괜히 무림인들간의 분쟁에 끼어들었다간 맞아죽기 딱
좋다고 생각해서 정혜란의 걱정은 탄식으로 바뀌었다.
‘ 내가 참으로 무심했구나, 제대로된 장법 한초식이나 권법 하나라도
어떻게든 둘러대고 가르치는 것인데, 언제나 옆에 있을것만 같아서 자연히
마음을 놓았었어. ’
이런저런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시장이었다.
‘쌉니다, 싸요! ’ 라든가 ‘ 이번기회에 ’부터 여러 가지 상인들의
호객소리와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과 고객들의 분주한 발걸음 속에 그녀도 아
까의 일은 잊기로 했다. 후회해 봐야 무었하겠는가, 차라리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깔스럽게 만들어 한상 차려두는게 낳지. 그래야 그녀의 마음도 좀
편할꺼 같고 말이다.
‘어디보자.... 장가가는 돼지고기 볶음을 좋아했었지? 장대인께서는 잉어회를
즐기시니까 이따가 어물전은 들르기로 하고... 음 술은 뭘 준비할까?’
바삐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양손에 묵직한 감촉이 왔다.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체워지지 않았다. 조금 더 살것이 있을 것이다.
검을 잡은지 올해로 십 육년, 천애고아였던 그녀의 인생에서 혈육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화산내의 식구들은 '사(師)' 자의 의미가 너무 강했다.
귀찮고 창피스러운, 그저 '임무' 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시비의 일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혈육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마음속은 물론 호칭조차도
시비라고 단 한번도 부르지 않는 부자(父子)에게서 말이다.
'빠진게 있을거야. 빠진게...'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웅얼거리던 정혜란이 사람들과 부딛쳤다. 아직은 시장이
바빠질만한 시간은 아닌데.
'뭐야... 어?'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 여섯의 여인네가 뭉쳐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얼씨구?'
쉽게 말하면 뭉롱한 상태라고 할까. 개중엔 '어쩌면 좋아' 까지 연발하는
처녀도 있었다.
'그래, 뭘 어쩌면 좋은데?'
정혜란이 키가 크다는건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여럿이 뭉쳐있다고 해봐야
그녀의 콧선대에도 미치지않는 높이라서 굳이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지
않아도 그녀는 소란스러움의 원인을 볼수 있었다. 그녀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건 패옥을 파는 노점에서 노리개를 고르고있는 남자였다.
'뭐야... 어!'
후리후리한 키와 긴 장발로 옆 얼굴을 가리고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인상이 낯이있어서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곳 양양에서 아는 남자라고는
장씨 부자와 대사형 하운, 시장에서 물건파는 아저씨들 정도. 그리고...
'장발 꺽다리!'
"이봐요, 장발 꺽다리!"
여인네들의 군집을 거의 파괴시키며 그녀가 장발청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 ? '
자신을 부르는 것 같긴 한데 누가있어서 그런 괴상한 호칭으로 소리칠까? 다소
의아한 얼굴로 북궁단야가 고개를 돌렸다.
"아!"
"아는 무슨 아예요. 노리개 고르고 있었어요? 정인(情人)에게 주려나보네?
누군지 모르지만 좋겠다!"
좋겠다는 부분을 과장되게 늘이며 정혜란이 싱글거리자 그가 다시 패옥에
눈길을 주었다. 생전에 이런걸 골라본적이 없으니 뭘 사야 좋을지 모르겠다.
"동생 줄거요."
왜 그순간 기분이 좋았을까. 하도 수유지간에 든 상념이기에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정혜란이 종알거렸다.
"그런건 여자가 골라야지. 이런 만남도 인연은 인연일테니 내가 골라줄게요.
동생은 어떤색을 좋아해요? 설마 당신처럼 무뚝뚝하진 않겠지요? 원판은
당신따라 간다면 걱정할거 없겠고, 좋아하는 동물은 뭐예요? 왜 멍하니
있는거예요? 에구, 관둬요. 내가 직접 고르는게 더 낫겠네. 어디보자..."
정인 줄거라면 절대 골라줬을리 없다!
"아니, 이보시..."
"됐네요. 여자맘은 여자가 잘 안다구요 내가 지금이야 이런꼴이지만 그래도
화산쌍화라고...읍!"
열심히 종알대던 그녀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화산....쌍화?'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명호다. 화산제일화라고 조소렵에 관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그 명호는 화산장문 구양승하고 정혜란밖에 모르니 북궁단야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생소할 수밖에 없지만 지레 놀란 그녀가 토끼눈이 되었다.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라 어쨌든 내가 골라줄게요. 음, 이건 좀 싸구려로
보이고, 이건 색깔이 좀 그래. 이건..."
'이것, 참!'
갑자기 끼어든 정혜란으로 인해 주위에 몰려있던 여인네들 사이에서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뭐 대부분 반응은 '재 뭐야?' 나 '아유 재수없어, 키만 큰게!' 로 압축
되어지는 부러움 반 투덜거림 반 이었는데 전혀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정혜란은 노리개 고르는데 열중이었다. 구경패중 얼굴에 자신이 있던 여인네
하나가 괜시리 정혜란 앞에 섰었는데 그녀는 곧 꼬리를 말고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혜란의 눈빛은 사람의 것이라고 부르기 어려웠었으니까!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던 북궁단야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정혜란이 손에
비취노리개 하나를 들고서 빙글 돌아섰다.
"어때요?"
"음!"
확실히 여자가 낫다고 생각했다. 반시진을 헤매도 갈피를 잡기 어려웠는데
그녀는 일다경도 안되서 훌륭한 장신구를 찾아낸 것이다. 색깔도 모양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과연... 고맙소이다."
계산을 치르고 가려는데 여전히 정혜란의 시선이 느껴져서 북궁단야가 고개를
들렸다. 그제서야 정혜란의 양손 가득 식료품을 발견했다. 저 정도면 제사나
잔치상에 어울리는 양이다.
'힘도 좋군!'
그가 어찌 정혜란을 알겠는가. 그녀는 화산에서도 통크기로 따지자면 누구에게
도지지 않는 여자였다. 양이 많다고? 아직이다!
"우리 장가가께서 강호유람 가시잖아요. 오늘 한번 배터지게 먹여줄라고요.
근데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어요? 진짜 실망이야."
"내가 뭘 말이오?"
'실망' 처럼 기분나쁜 소리도 없다.
"목소리 깔아봤자 하나도 안무서워요. 그래, 없는 시간 쪼개서 동생선물 골라
줬더니 과연 고맙소이다가 다에요? 선물을 안골라줬어도 그래, 아녀자가
이렇게 짐을 많이 들고 있는데 나몰라라 하고 갈려고 했어요? 세상 인심
야박해졌지."
'하..'
잠시 생각하던 북궁단야가 노리개를 품에 넣고 손을 내밀었다.
"주시오. 댁까지 들어다 주겠소."
"아직 집 안가요. 장볼거 더 남았다구요."
"아니, 이보시오. 소저!"
"따라와요."
양손에 들고있던 짐을 모조리 북궁단야에게 건내주고는 시장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옯기는 정혜란은 빙글빙글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야했다.
"하아..."
막연히 서있던 북궁단야가 고개를 한번 젓고는 터덜터덜 걸음을 옯겼다.
이런게 코를 뀐 상태라고 한다나?
"뭐예요? 사내가 그렇게 동작이 굼뜨면 나중에 처자식 어떻게 먹여살려고
그래요?"
"가고있소."
"장만, 잠깐! 생각해보니 오리를 안산 것 같아. 내가 또 오리요리라면
자신있지. 어서와요!"
"..."
그녀는 꽃밭에 놀러온 나비마냥 시장구석구석을 누볐는데 북궁단야도 처음으로
이런시간을 가지는 터라 내심 좋아했다.
"에이 비싸요. 조금 더 깍아주세요. 아님 딴 가게 갈거예요."
"이것봐 소저. 우리도 먹고 살아야하지 않겠나. 지금 그 가격도 완전 원가라고
원가! 손해를 볼수는 없지 않아?"
"딴 데 가야지 오리 파는 집이 여기 하난가...?"
"알았네! 알았어! 거 시원시원해 보이는 소저가 동전 일문 깎겠다고... 내가
손해를 보고 말지!"
푹풍검 정혜란이 시장에서 가격 흥정을 한다! 선머슴아 같은 그녀의 성격에
어느정도 노련함까지 가미되자 능란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던 북궁단야가 문득 정혜란을 불렀다.
"소저!"
' ? '
"소저는 장형을 퍽이나 좋아하는구려."
동생이 뭔지...
"그럼요, 내가 얼마나 장가가를 좋아 하는데!"
북궁단야의 얼굴이 싹변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혜란은 여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사실 고아예요. 피붙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죠. 그래서 더욱 강해야만
했어요. 정신적이든 외적이든 말이예요. 그거 알아요? 여자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려면 왠만한 독심(毒心) 가지고는 어렵다는거..."
몰랐다. 활기차고 당차보이는 내면에 그런 사연이 있었는줄은.
"그래요, 그렇게 살았어요. 남들도 인정하는 정도로 노력했어요. 하하, 잘은
몰랐는데 그게 힘들었었나봐요. 뭐, 어쨌든 그렇게 살다가 어떻게 장가가의
집에 오게 됐지요. 근데 이분들은 다르더군요,."
장유열 부자를 말하는 것 이리라.
"세상에 시비더러 소저라고 부르는 사람이 중원 천지에 어디있었어요? 그 집에
머물면서 단 한번도 자존심이 상한적이 없어요. 그분들은 정말로 절 가족처럼
대해주고 있어요. 장가가요? 좋지요. 언젠가 모든게 잘 해결되면 꼭
결의남매를 맺고말 거예요."
처음 물었던 의도마져 잊고 그녀의 얘기를 듣던 북궁단야가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정혜란이란 여인, 첫인상과 달리 건전한 사고와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어?"
북궁단야의 미소... 그거 마력이다. 거의 치명적이라고 부를 정도다. 좀처럼
보기 어려워서 그렇지.
'이런 젠장... 내가 왜 이러는거야!'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퍽!
'크윽!'
오른손으로 북궁단야의 가슴을 한번 치며 정혜란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봐요, 당신도 웃으니 그럭저럭 볼 만 하잖아요. 괜히 무게만
잡으려 하지 말고 자주 웃도록 해요. 남자가 경박한건 문제지만 너무 무게만
잡아도 땅속으로 파고든다구요."
장난이라고 친 것 같은데 장난이 아니다. 당황한 정혜란의 손에 힘이 좀
가해졌으리라.
"이번엔 절루 가봐요, 절루."
키큰 두남녀는 열심히도 시장을 누볐다. 한번도 이런 시간을 가져본적 없었던,
사문과 가문이란 이름아래 청춘을 저당잡혀 있던 그들 이었기에 정혜란의
웃음소리가, 북궁단야의 미소가 더 맑고 싱그러웠는지도 모르겠다.
[11841] [연재] 삼류무사-83 첨부파일 :
하운의 동행제의에 별달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연많은 남자라는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최소한 이 사람은 남을 어떻게 해볼려는 심산같은걸
가질 인물이 아니다.
사실 환영이다.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테니까.
"근데 하형은 뭐땜에 유람을 가는거요? 나야... 쩝, 나도 특별한 이유가
없구나."
말하다 멋적어서 한번 웃는 장추삼은 하운의 표정이 전에없이 굳어있다는데
놀랐다. 누가 있어 이렇게 올곧고 마음선한 인물의 심기를 건드렸단
말인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이에 맞지않는 포용력으로 감싸안는
하운인데 말이다.
혹시...
'실연?'
가능성 있다. 아주아주 가능성 많다. 보통 이런 사람들이 한번 마음 아프면
진짜로 오래간다. 술먹고 주정을 부리거나 하는 해소수단도 없기 때문에
그저 속으로만 삭여야 한다. 혼자서 모든걸 반추해서 지우거나
극복해내야만 한다는거... 힘든일이다.
'아, 이런거는 단도직입적으로 못 물어보는데... 하형이 술이라도 즐긴다면
어떻게 자리를 마련해서 말할 자신은 있는데.'
혼자서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장추삼을 돌아볼 겨를이 하운에겐
없었다. 장추삼의 생각대로 하운은 올곧고 마음이 선하다. 보통
이런 사람들이 한번 열받으면 진짜로 무섭다.
그리고 하운은 지금 화가 나 있다. 그가 백무량에게 건네받았던 쪽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기록부와도 같았던, 몇건의 사례와 화산삼로
- 즉선검인이겠지만 - 의 짧막한 소견과 거론된 단체 하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심하구나, 하운아! 너는 강호출행이란 한마디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지
않았더냐. 그러고도 스스로를 화산의 대사형이라 자처할 수 있겠느냐,
한심하구나!'
솔직히 강호로 나가라는 말에 아무생각없이 기뻤었다. 그 순간의 감정이
왜이리 부끄러운지.
으드득.
자책과 분노의 감정은 그의 턱 근육에 작용했고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엥?'
깜짝놀란 장추삼은 또다시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이를 간다는건 어떤
대항에 대한 적개심의 가장 솔직한 표현일테고 지금 그의 입장에서 분노의
상대라면...
"어허험, 내가 뭐 아는게 많아서, 허험, 그러는게 아니라, 허허험, 그 뭐냐
여자라는게 워, 원래, 험, 왜이리 말이 안되냐, 하여간 간사한거요. 나도
뭐, 허험..."
도데체 이게 무슨소린가? 하운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무시하고 장추삼이
버벅이면서도 끝끝내 말을 이었다.
"... 해서 잊는게 낫소. 우린 아직 젊잖소. 에구, 내가 무슨 말을 한건지."
'이런!'
그제서야 장추삼이 떠듬거리면서 지껄인 말의 요지를 깨닫고는 하운은
고소를 머금었다. 엉뚱한건 알았지만 이렇게 황당한 면이 있었다니.
"나 실연같은거 안했소. 장형이 뭔가 착각한것 같은데..."
"숨길필요 없어요.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혼자서 고민하려 하오? 자랑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그런 경험이 있어봐서 잘 알아요."
"정말 아니라니까."
"생각보다 고집이 세군. 좋소, 본인이 그렇게 감추려고 한다면 더 이상
캐물을 맘은 없으니 나중에 안정이 되거든 말해요. 혹시 알겠소? 내가
도움이 될지."
'하...'
졸지에 실연자가 된 하운이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묵묵히 말을 몰았다.
북궁단야의 말이 옳다. 이런 남자는 강호와 어울리지 않을것이다. 온갖
귀게와 음모가 난무하는 무림에서 본것을 그대로 믿고, 느끼고, 생각한 바
또한 가감없이 말로 토해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무림처럼 현실
논리가 정확히 반영되는 곳은 없다. 평화기 였다면 또 모르지만 지금은
삼백년만에 들이닥친 격동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하운이야 어떤 생각을
하고있든 장추삼은 여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표정에 대고 뭐라 말하겠나. 그냥 실연한 사람이 되고말지.'
동네 어귀까지 오며 그들은 한마디도 안했다. 장추삼은 하운의 아픈마음(?)
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고 하운은 할말이 없었다.
기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혼자 갈걸.'
그 모습이 북궁단야로는 의외였으리라.
"어째 표정들이 않좋군."
"어?"
"아... 북궁형? 여긴 왠일이시오."
관도로 통하는 초입에서 말을타고 서있는 북궁단야는 여전한 얼굴로 둘의
놀람을 무시했다. 그도 역시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그건 숨겨야할
부분이고 일단 해야할 일이었다.
"세상을 좀 보려고..."
동시에 하운과 장추삼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정도의 의미를 파악못할
바보들은 아니다. 무언가 껄끄러운 것을 만지고 있을때의 찝찝한 표정이
스친이도 있었고 백만원군의 출발보고라도 받은듯 화색이 돈 이도 있었다.
"뜻밖이오, 정말 뜻밖입니다. 나야 북궁형과 동행한다면 그보다 든든한
일이 어디있겠소, 환영하오."
하며 장추삼을 휙 돌아보니 그곳엔 석달을 굶은 똥개가 한마리 앉아
있었다.
'싫어!'
물론 절대 입밖에 내지 못했다. 아니, 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얼음덩어리의 눈빛에서 전에없는 스산함을 느꼈다. 특히 자신을 볼때는
그 강도가 몇곱절은 배가 된 상태로 말이다.
'세상에, 저 표정을 보니 사람하나 잡기 쉽겠군. 북궁형이 장형에게 뭐
기분 나쁜거라도 있나?'
하운까지도 눈치챌 정도였으니 긴 말이 필요없으리라.
보자마자 대뜸 인상을 구기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근데, 근데
말이다. 웬지 몰라도 반항할 수가 없다. 억울하지만, 원통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믈스믈 기어나오는 어떤 감정때문에 감히 대들지 못하고
엉뚱하게 눈을 내리깔게 된다.
"기분 나쁜가?"
말투는 물음인데 억양은 그런게 아니다. '너 여기서 한마디라도 뻥긋하는
날엔 죽음이야'가 따로 없다. 전에도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 얼음덩이만
보면 어쩐지 주눅이 든다.
"아니... 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횅하니 돌리고 선두에서 천천히 말을 모는
북궁단야의 등판에 장추삼이 무언의 주먹질을 해댔다. 속으로 오만
상소리를 곱씹으면서.
("장형에게 무슨 섭섭한 감정이라도 있으시오? 아까 우리더러 표정이
안좋아 보인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북궁형의 안색은 더없이
굳어있다오."
하운에게 이 둘의 관계는 더없이 재미있다. 세상에 거리낄것 없다는 듯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할말 다하는 - 심지어 절대오존중 최강이라는
적미천존도 늘상 도매급으로 씹힌다 - 장추삼이 북궁단야라면 저승사자보다
무섭고 어려워서 늘상 꼬리를 마는것도 그렇고, 냉막하지만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기에 표정에 변화가 거의 없는 북궁단야가 장추삼만 보면
쥐잡듯 인상쓰는 것도 웃긴다. 정말 재미있는건 그러면서도 북궁단야가
장추삼에게 쏟는 관심도이니...
'하연간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야."
내심 북궁단야도 미안한 것이 기분나쁜 일과 하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공연히 그가 나서는 것이다. 원래부터 이것저것 잘 챙기는 성격인건
알지만 하운도 사람인 이상 얼굴 굳은 사람과 같이 있는다는건 분명 피곤한
일일 것이다.
("왠만하면 기분 풀지 그러시오, 동네도 벗어나기 전에 손발이 안맞으면
나중에 더 힘들어지지 않겠소. 연장자의 입장에서 북궁형이 마음을 푼다면
얘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소이다.")
잠깐 하운을 돌아보고 북궁단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번 맞는 소리다.
저 멍청한 놈이야 강호를 보네, 무림인들을 겪겠네 하는 팔자 편한 목적의
여.행.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이건 유람같은 거랑은 거리가
멀다. 척 보기에 하운역시 자신과 비슷한 목적의 행로인것 같고.
앞으로 어떤 위협과 난관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무공에 대해 절대적이라고는 말 못해도 어느정도 자신이 있는 그 였지만
자만은 금물이다. 또한 무림은 너무나 거대하여 드러난게 감춰진 것에
삼분지 일도 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이런 험로를 목전에 두고 일행같지도
않은 일행이지만 장추삼과 얼굴을 붉히는건 여러모로 좋지않다.
'그렇긴 그런데...'
너무 기분이 나쁘다!
어떻게든 풀어야 겠다. 이대로 넘어가만 담아둔 울화가 원인이 되어
화병이라도 생길것 같은데 그냥 없었던 일로 할수는 없다.
우뚝.
말을 멈춘 북궁단야가 말잔등에서 내렸다.
"잠깐 내리게."
"나말이오?"
의아해하는 장추삼을 무시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북궁단야의 얼굴은
더없이 싸늘했다. 엉거주춤 내려선 장추삼이 '뭐야?' 하는 얼굴로 몸을
돌리는데 번개같은 일권이 그의 배에 꽂혔다.
퍽!
'헉!'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장추삼이 자리에 주저 앉았다. 물론 공력따윈 실리지
않았다. 아니, 공력보다 훨씬 무서운 '그 무엇'이 담겨있기에 방금전의
일권은 더없이 무겁고 강력했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실회조에서 신입이 들어오면 고참 하나가 인생의
매운맛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전통에 대해 말이야."
"그, 금시... 쿨럭... 초문인데..."
"그렇다면 그런줄 알아."
다소 황당한 하운에게 눈을 한번 찡긋해 주고 북궁단야가 말에 올라탔다.
실회조의 전통?
물론 그딴거 없다.
'한번만 더 울리면 그땐 죽을줄알아...'
[11897] [연재] 삼류무사-84 첨부파일 :
일행이 첫 행선지로 잡은곳은 북경이었다.
북경, 그 이전까지는 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던곳, 그전엔 진의 시황제에
게 자객을 보내거나 당말에 안록산이 현종과 양귀비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장소 정도로 기억되었던 북경은 금이 나라를 세웠을때는 중도라하여 동아시
아를 이분하는 세력의 중심이었고 원왕조 시대에는 연경이라 하여 나라의
도읍이었다. 명조에 수도는 남경이었는데 연왕 주치가 힘으로 제위를 찬탈
하며 수도마저 연경으로 바꾸고 이름을 북경이라 칭했다한다. 한마디로
수대에 걸쳐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서있는 도시이니 이곳을 첫 기착
지로 삼은건 당연할 것이다.
노구교에 서있는 장추삼의 표정은 지극히 행복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드믈게 아름다운 다리'라는 찬사를 듣는 돌다리. 영정하에 걸려있는 노구교
는 북경에 들른 외지인 이라면 한번쯤 꼭 가보는 곳이라고 했다.
"히야, 이게 금나라때 만들어졌다구요? 믿기지 않아,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아."
연방 감탄을 하는 장추삼을 보며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하운도 생각했다.
본래 그의 목적지는 이보다 좀 더 못미친 하냥땅이었으나 북궁단야의 강력
한 제의로 북경에 온것이다. 스스럼없이 경치에 관해 노닥거리는 장추삼과
하운은 망연한 북궁단야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협소한 호북땅에서 벗어나 하남을 거쳐 북경에 당도하면서 보게된 광활한
대륙과 수많은 사람들속에 그의 고립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천산
에서 양양까지 올때야 동생을 찾을 수 있다는 일념과 강호에 걸쳐져있는
암운따윈 생각도 안했기에 특별한 감정없이 눈에 들어왔던 정경이련만.
'이건 너무 넓구나. 차근차근 범위를 줄인다고 해도 성 단위로 나누어 진다
면 무슨수로 단서를 발견한단 말인가!'
옆에서는 돌다리 주위에 있는 사자상의 갯수에 관해 열띤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구교의 양 옆에 일렬로 세워져있는 사자상은 눈으로 파악하기 어
려울만큼 많았다.
"이백삼십팔, 이백삼십구... 어구, 헷갈리니까 하형은 속으로 세요."
"이백십오, 이백십육... 어, 장형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시오? 장형이나
조용히 종 세시오."
"에잇, 이런식이면 하루 온종일을 해도 끝이 없겠어."
손가락으로 먼곳부터 하나하나 가리키며 수를 헤아리던 장추삼이 벌떡 달려
나가 노구교의 절반쯤 되는 위치에 섰다.
"하형은 여기까지 세요, 난 여기부터 끝까지 셀테니!"
큰소리로 하운에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킨 장추삼이 몸을 돌려 다시 사자
상을 셌다.
'어린애들 같긴...'
절반만을 세어서일까? 둘은 서로가 확인한 갯수를 더하고는 갯수를 알아냈
다고 좋아했다.
"백지장도 맡드는게 낫다더니... 진작 이렇게 할걸 그랬소, 하핫."
"그러게 말이에요."
하며 북궁단야를 슬쩍 쳐다보는 장추삼의 얼굴에는 '너도 무게만 잡지말고
같이 세었다면 훨씬 빨리 끝냈잖아'라는 책망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렇구나!'
북궁단야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새겨졌다.
'강호는 넓다. 내가 찾아야 할 건 오리무중이고... 허나 나에게는 동료가
있지 않은가.'
그 미소를 보고 하운과 장추삼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어떻게들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강호로 나온건 목적이 있어서요."
객잔에 들어 간단한 식사와 술한잔을 곁들인 상을 받은 후에 북궁단야가 말
을 이었다. 객방으로 음식을 가져왔기에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수한 동기의 동행이 아니었던 것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이럴것 없소이다."
일어서서 포권으로 사과를 하는 북궁단야에게 하운도 맞포권을 하며 웃었다
.
"순수한 동기라는 것, 그런게 어디있겠소. 사람은 누구나 목적의식을 가지
고 행동을 하지요. 아무 생각도 없이 움직이는 것은 바보나 할 일이오."
바보가 하나 있기는 있다.
"어허험!"
재단엔 쑥스러워서 헛기침을 하는 장추삼을 무시하고 하운이 말을 이었다.
"북경까지 오면서 한마디도 하지않던 북궁형께서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한
건 우리들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일것 같소이다."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 생각하던 북궁단야가 술 한잔을 털어 넣었다. 이들이
자기의 말을 얼마나 사심없이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북궁단야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래서 부탁을 할 결심이 선 것이다.
"다소... 억지처럼 들리더라도 내 말을 이해해주시오."
그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서찰을 하나 꺼냈다.
" '왜?' 라고 묻는다면 다답해 드리지 못하오, 지금 당장은 말이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에 어느정도 다다랐다고 느꼈을때 얘기하리다. 여기..."
장추삼과 하운에게 종이를 한장씩 나누어 주고는 붓을 든 북궁단야가 그 종
이마다 대 여섯개씩의 이름을 써주었다. 사람의 이름, 혹은 문파나 단체의
이름이었는데 생소한 것이라 하운과 장추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본적이 없는데?"
자신의 종이에도 글자를 적어넣으며 북궁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거요."
뚱하니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바라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들었다. 뭘 시킬건
지는 알것 같은데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세명씩이나 나선다는 건가.
"별거 아닌것 같은데. 여기 적힌 사람이나 단체에 대해 알아보라는거 아니
오? 남들이 알고 있을 정도면 꽤나 유명했을텐데... 뭐, 일도 아니겠구먼."
"그럴까?"
씁씁한 어조로 말을 받고는 하운에게 눈을 돌린 북궁단야가 다시한번 포권
을 했다.
"북경을 상분하여 이름들을 써보았소. 두분이 해주셨으면 하는건 이들, 또
는 단체의 몰락원인에 대한 정확한 이유요. 사사로운 부탁으로 폐를 끼치는
점 다시한번 사과드리오."
"몰락... 원인?"
"그럼 지금 현존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포권을 받을 생각도 못한듯 하운과 장추삼이 북궁단야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몰락원인! 어떤어떤 사람이 누구와 비무를 해서 패한것이 원인이
되어 죽었다는지, 모모 단체, 또는 어떤어떤 사람과 충돌이 있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든지, 대를 잇지못해서 문을 닫았다는지... 하여튼간에 종이에
적힌 이름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이유에 대해 되도록이면 정확
하게 알아봐주시오. 덧붙여 종이에 적힌 이름들 중 현존하는 건 하나도
없소."
"그래도 북궁형이 알 정도라면 꽤나 유명했겠구려."
하운의 물음에 북궁단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최소한 그 지방에서는 무서운게 없는 이름들이었소. 한때는
말이오."
'한때는'에 힘을 주었지만 하운과 장추삼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둘의 생
각은 '쉽겠네'로 귀착되었으니까.
* * *
"그럼 모르신다는 거예요?"
"허, 참. 답답하구먼. 백년도 넘게 지난일을 어떻게 알아? 그때는 우리 부
친께서도 태어나시지 않으셨었어. 조양검파가 유명했던건 모르는 이가 없지
만 그들이 어떻게 망했는지 정확히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게야. 풍문으
로 떠도는 얘기야 많지만서두."
"하아..."
쉽겠다는 생각, 이거 완전 오판이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헤어져 부지런히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 얻은 성과는 단하나. '한때
는'의 의미가 최소한 백년전 이라는 거다. 말이 좋아 백년이다. 백년전이라
고...?
내공이 너무높아 주체불가능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백살이고 이백살이고
산다고 한다. 전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치고 백년정도는 우습게 본다. 그런
관점에서의 백년은 아무것도 아니다.허나 일반적으로 사람의 수명은 오십
에서 육십이다. 칠십을 넘기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고희라고 부르겠는가. 근
데 백년도 넘게 지난일을, 그것도 문파나 개인의 몰락이라면 민감하면서도
대체적으로 감춰지는것이 상례인 부분을 알아내란다.
'기가 막히네.'
응달진 바위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푹쉬던 장추삼이 품에서 어제 받았던 종
이를 펼쳐보았다. 일곱개의 이름이 북궁단야의 성격을 대변이라도 하듯 날
카로운 획을 그리며 씌어 있고 그중 확인한 건 셋. 모두 백년전 인물이거나
단체였고...
"어째 일을 시켜도 이따위걸 맡긴다냐. 백년전? 하... 나라도 그런건 모르
겠네."
이대로 풀숲에 들어가서 한숨잘까, 하던 장추삼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하기로 했으면 모르되 기왕 맡은 일이고 성과가 있든없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아는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듯 엄청 장수한 노인을 만나
서 둘이 잡아내지 못한 단서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릴지 말이다.
'여태껏 접근방법이 잘못되었을지도 몰라. 그 동네에서 가장 큰 무도관을
찾을게 아니라 가장 오래된 무도관을 찾자. 변설자들이 가장 빈번히 출입하
는 식당이나 반점이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산 노인들보다 짭잘한 정보를 줄
지도 몰라.'
스스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다음 마을로 향한 장추삼은 우선 가장 오래된
무도관을 찾기로했다.
'어디보자. 오라, 저녀석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골목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광경은 유년기를 거친 모든이에게 한번쯤 옛추억
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리라. 잠시 할일도 잊고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이 노는걸 지켜보던 장추삼이 그 중 술레가 된 아이에게 다가갔다.
"얘, 말좀묻자."
눈을 감고 벽을 향해 양손을 포개고 있던 아이는 깜짝 놀라 뒤를 바라
보았다.
"예?"
감자기 숨어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너, 졌어! 술레가 눈뜨는 법이 어딨냐?"
"웅이는 눈떴데요, 눈떴데요. 눈떴데요~."
"웅이는 또 술래래요. 또 술래래요. 또 술래래요."
'헉!'
술래였던 아이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왜 모르겠는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패배한다는게 얼마나 가슴아픈지 말이다.
"잠깐, 잠깐! 이건 공정치못해. 이녀석이 눈뜬건 아저씨가 말을 시켜서 그
랬던 것이니 무효다. 무효!"
"아녜요. 술래가 눈뜨면 안된다구요. 어저씬 어릴적에 숨바꼭질도 안해보셨
어요?"
"맞아요, 술래는 다 숨기전에 눈뜨면 안되요."
숨바꼭질을 안해봤냐구?
"무슨말이냐? 아저씨는 너희만한 나이에 숨바꼭질계에서는 그야말로 전설로
통했었다."
"에-"
"니들은 사나이지?"
아이들의 볼멘소리는 장추삼의 한마디에 일순 잦아들었다. 사나이... 아이
건 어른이건 사내로 태어난 이들에게 묘한 감흥을 일으키는 한마디.
"사나이는 어때야 하냐? 아저씨가 말해볼까? 우선 약자를 보호해야 하지?"
끄덕끄덕.
"그리고 정정당당 해야하지?"
끄덕끄덕.
"그럼 방금전에 정정당당했다고 말할 수 있어?"
"그래도 눈뜬건 눈뜬건데..."
"정정당당 했냐구?"
"......"
"좋아, 너희들이 깨끗이 인정하니까 아저씨가 기분이 좋아서 유과를 주마."
"와!"
유과를 나누어주며 이 판은 다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장추삼의 눈은 술래
였던 아이의 갸냘픈 다리를 쫒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간 뒤에도 체력이
약한 아이는 해가 저물도록 술래만 할지도 모른다. 그건 장추삼이 어떻게
할 부분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도 안된다. 그저 그는 박탈당한 기회를 다시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으니까.
[12286] [연재] 삼류무사-85 첨부파일 :
열심히 유과를 으적이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장추삼이 모두에게 물었다.
"근데 아저씨가 이 동네에 처음와서 길을 못찾고 있거든? 누구 요 근방에서
가장 오래된 무도관을 알고있는 사람 있으면 말해주지 않겠어?"
갑자기 아이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와하하' 웃었다. 애들은 유과를 먹으면
일각뒤에 발작증세를 보이나 했지만 일단은 암말않고 서 있는데 그중
술래였던 아이가 한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이런...'
그곳은 술래였던 아이가 눈을감고 수를 헤아리던 기둥의 바로 옆 대문이었다.
* * *
무해관주(武海館主) 오충양(吳忠梁)은 느닷없이 대문을 열고 들이닥친 청년
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북에서 왔다며 찢어진 눈으로 수련생들을
휙 둘러볼때는 기분이 얹짢아졌다. 그래도 대도(大都) 북경에서 무려 백사
십년이나 이어오고있는 전통의 무해관일진대 척 봐도 백수티가 역력히 흐르
는 녀석이 대뜸 '관주가 뉘시오' 했으니 배알이 꼬인건 당연했다.
"본인 이외다!"
일부러 내공을 실어서 대답했다.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청년이
그때서야 '아' 하는 표정으로 돌아섰는데 놈의눈은 자신의 배를 노골적으로
직시하고 있지않은가? 요즘 이것때문에 가뜩이나 심사가 사나운데 말이다.
"관주께 몇마디 도움을 청할까 하오."
'하오오?'
아니,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는가? 기껏해야 조카벌도 안되보이는
녀석이 초면에 '하오' 라니! 응대역시 고울리 없다.
"뭘?"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가? 포권으로 두번씩이나 에를 갖추었거늘
한다는 소리가 '뭘' 이라니! 기껏해야 '건강체조회' 정도를 운영하면서
말이다.
북경에서 백몇십년을 지켜왔는지는 모르지만 '무의바다' 란 휘황찬란한 이
름을 떡하니 걸고있는 무도관의 관주란 작자의 배를 한번 보라! 피둥피둥
찌다못해 옷밖으로 외출을 꿈꾸는 살들의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귓가에도 생
생할것 같지않은가! 뒤에서 흉보는것 같아 이런말하기 싫었지만 연무장에서
무술수련인지 보건체존지 알기어려운 움직임을 보이고있는 사람들도
가관이다. 에닐곱살부터 열 서너살 까지의 얼라들 아니면 환갑 전후의 노인
들로 갈라져 있고 가운데의 나이군(群)은 쏙 빠져있다.
'이름이 아깝다.이름이...'
뱃살과 거만함은 정비례관계인가? 배불뚝이 관주의 어의없을 정도로 거만한
눈빛은 평소의 그였다면 일각도 마주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아쉬운건
자신이다.
"이곳이 오랜전통의 무도관이라고 들었소이다."
"그런데?"
"끄응... 그래서 뭣좀 물어보..."
"뭘?"
잘만하면 한판 재대로 붙을것같은 분위기, 체조 비스무리한 동작을 반복하
던 노소들도 관주와 괴청년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둘의 하
는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씨, 질문이고 나발이고 확 관둬버릴까?'
오충양은 여전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뒷짐까지 떡하니 지고.
입을 꼭 다물고 콧구멍으로만 큰숨을 한번 내쉬고는 결심한듯 장추삼이
말을 이었다.
"다소 황당하겠지만..."
그 말을 듣던 무해관주 오충양은 어이가 없어서 장추삼의 전신을 쓱하고 한
번 훑터보았다. 말 그대로 황당하지 않은가?
"이것보시게, 그런걸 이제와 묻는 이유까지야 내 알바는 아니지만 무해도장
이 백사십년이 된 것이지 내가 백사십년을 산 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백년을 넘게 산 사람이 흔한것도 아니고... 가만?"
한심하다는듯 혀까지 차가며 훈계조로 장추삼에게 말을 하던 오충양이 순간
적으로 들고있던 부채를 소리나게 접었다.
"생각해보니 한군데가 있긴 하네만..."
은근슬쩍 말을 놓은 오충양의 거만함이 우스웠지만 단서를 준다는 한마디에
장추삼의 기분은 확 풀렸다. 하루 종일 품을 팔고도 낱알하나 건지지 못했
는데 이제야 무언가 비치나보다.
"어디를 말하는 거요?"
"검화관(劍畵館)!"
"검화관?"
그때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수련시간을 방해한건
사실이니 미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노인네들 끼리 검화관 운운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맞장구치며 얘기를 나누는데 '전통' 미니 '장수'
니 어쩌구 하는걸로 보아 꽤다 유명한가 보다.
"어디요, 거기가?"
급하게 묻는 장추삼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볼품없는 턱수염을 손으로
문지르며 오충양이 뜸을 들었다.
"꽤나 먼 거린데..."
"그런 걱정은 내가 하오. 관주께선 어딘지 말만 해주시오."
"정 원한다면... 저기 산 하나 보일걸세. 거기가 부악산 이라 하는데 겉
보기에는 만만하지만 들짐승들이 간간히 출몰해서 왠만한 담량 가지고는
넘기 힘들지. 산세도 험한 편이고..."
"저 산만 넘으면 되오?"
"아니지, 아니지."
부채를 쥔 손을 들어 좌우로 까닥까닥 움직이며 오충양은 노인들의 의아한
시선을 흘려보냈다.
"산을 넘으면 벽가촌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거길 지나서 진성촌이라는 마을로
가게. 진성촌에서 검화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니 찾기는 쉬울꺼야. 말해
놓고 보니 그렇게 먼거리도 아니였네 그려."
표권을 하고 급히 몸을 돌린 장추삼이 순간 몸을 움찔했다.
'핫! 처음에는 그렇게 틱틱거리다가 갑자기 자상해진 이유가 뭐지? 거리도
만만치 않은것 같은데 무턱대고 갈수는 없잖아?'
"왜그러시나?"
오충양이 뚱한 얼굴로 장추삼을 쳐다보았다. 완연히 '그만 가주었으면' 하
는 표정으로.
"자꾸 귀찮게해서 미안하오만 검화관이란곳에 도데체 뭐가 있다는 거요?"
순간 오충양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이런, 내가 그말을 하지 않았군! 가만보면 나도 정신이 없네. 허허허...
그곳엔 이 근방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 사신다네. 세수가 무려 백살
하고도 삼십을 헤아리시지. 게다가 그분 역시 부도관을 운영하셨으니 아까
들었던 얘기들에 관해 아실지도 모르지 않겠나."
"아..."
이보다 괜찮은 정보가 어디있을까? 장추삼의 얼굴은 벌써 한건 한 도박꾼마
냥 득의만만한 것이 되어 눈오는 겨울날 폴짝거리는 강아지처럼 경쾌한 발
걸음으로 무해도관을 나섰다. 그의 뒤를 오충양의 기이할 정도로 짖굿은 미
소가 배웅해 주었지만 들뜬 장추삼으로는 알도리가 없었다.
"근데 관주님..."
장추삼이 문을 닫자마자 웅성거리던 노인네들 중 하나가 오충양의 앞에섰다
. 노인은 문을 연방 힐끗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는데 의아한 기색이 역
력했다.
"전전대 검화관주님 이라면 백소유 대협을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그분은..."
오충양이 너털웃음으로 노인의 말을 막았다.
"아하하...저 역시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모든일에 '만약' 이란게 있는겁니
다. 혹시 압니까? 아까 소협이 원하는 정보을 우연찮게 얻을지 말이오.
사실 이 근방에서 그런 질문에 답할분이라고 백노대협 이외엔 아무도 없지
않소?"
노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그건 그래', '맞다' 어쩌고 하는 중에 오충양이
큰소리로 이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미꾸라지 같은 친구때문에 쉬실만큼 쉬셨으니 다시 시작합시다. 이
번에는 보법의 총체적 기본이라고 하는..."
여전히 그의 짖궂은 미소가 입꼬리에 달랑 걸려 있었지만 누구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존장의 예도 모르는 녀석은 고생좀 해봐야 돼.'
장추삼이 진성촌에 도착한것은 술시말(오후9시)가 다 되서였다. 미시(오후3
시)에 무해관을 나섰으니 꼬박 세시진을 쉬지도않고 걸음을 옮긴것인데 처
음에는 몰랐지만 벽가촌을 지나서부터 갑작스레 피로감이 쌓이고 걷는것도
지루해졌다.
원래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 목표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멀리있으면 그
저 아무생각 없이 그것을 향해 달려나간다. 피로감? 자신없음? 그딴건 아에
생각하지도 않고서 말이다. 실체를 보지 못하니 반응도 뒤따르지 않는것일
게다.
그런데 참 신기한것은 어느정도 목표에 구체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그때까지
어디 숨어있었는지도 모를 수많은 인간적인 감정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나를 봐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보통 이때가 '고비' 라고 하겠다.
이맘때 쯤이면 심신이 어느정도 느슨해져있는 상태이고 평상시라면 아무렇지
도 않게 지나칠 유혹들에 덜컥 자신을 맡기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진성촌
에 들어섰을때 아무 객잔에나 들어가서 허기를 체우고 한숨 잔후에 움직여
볼까도 생각했지만 기다리고 있을 하운들이 눈에 밟혀서 주린 배를 움켜쥐
고 물어물어 겨우 검화관이라는 곳을 찾았다.
'장추삼, 너 장족의 발전이다!'
검화관의 문고리를 잡으며 장추삼이 스스로에게 한마디 던졌다. 예전 같았
으면, 오년전 건달패 시절에는 이렇게 무언가를 위해 충실하지 못했었다.
귀찮은건 싫어하고 진득하니 뭐 하나에 메달리지 못했던 성격...무당의 속가
제자가 연적이었기에 그녀가 떠난건 아닐것이다. 그의 흐리멍텅하고 우유부
단한, 그래서 모든일에 행동보다 말이 앞서던 지난날의 성격이 이별의 가장
큰 원인이었으리라.
후회? 무수히 많은 후회를 했고 지금 이순간에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란 발전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 어떤 쓴약보다도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들어 - 기껏해야 동굴출도 이후이니 한달 남짓 기간이지만 - 장추삼은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버릇이 생겼다.
너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고...
상념은 일단 접어두고 문고리를 두드리며 그가 크게 외쳤다.
"계십니까?"
첫댓글 잘밨어요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