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영화의 창'은 산업적으로 급성장하는 가운데 대작 시대극과 성장영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다룬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 올해 아시아 영화의 경향을 반영한다. 월드 시네마 부문에서는 유럽 영화계의 지각 변동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영화들과 동유럽 낯선 국가의 작품들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11월 9일 포문을 여는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도 푸짐한 잔칫상을 차렸다. 60개국 202편의 영화를 초청한 이번 영화제는 규모 면에서는 전년과 비슷하지만 보다 다양한 국가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럽 여러 나라의 영화를 초대했으며, 세계 영화계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아시아 영화의 흐름도 반영했다. 거장과 신인의 만남도 올해 부산영화제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칸, 베를린, 베니스에서 화제가 됐던 스타 감독들의 신작은 언제나 그렇듯이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그러나 올해는 급부상한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눈여겨 볼 일이다.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앞으로 세계 영화계를 이끌어갈 신인들의 걸출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각 부문별 화제작을 살펴보기로 하자.
개·폐막작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부산영화제는 “영화제 즈음 완성되는 좋은 한국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사진)이 일찌감치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낙점됐던 것도 이런 원칙이 반영된 것이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둘러싸고 일어난 비밀을 미스테리 형식으로 풀어낸다. 블록버스터급 규모에 굵직한 드라마를 담고 있지만, 배창호 감독은 역사의 비극에 상처받은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막작으로 선정된 태국영화 <수리요타이>는 한화 약 150억 원의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시대극이다. 태국 왕자 MC 차트리찰레름 유콘이 연출한 이 작품은 16세기 중반 태국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아유타야 왕국의 여왕 수리요타이의 일생을 중심으로 태국 왕실의 모습을 재연했으며, 버마군과의 전투 등을 화려하게 보여준다. 현재 태국영화사상 초유의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아시아 영화의 창
올해 아시아 영화는 대작 시대극과 성장영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장과 중견의 신작은 여전히 세계 영화계에서 환영받았으며, 뛰어난 신인감독들의 진출도 돋보였다. 이런 경향을 담고 있는‘아시아 영화의 창’은 27편의 영화를 선보인다. ‘새로운 물결’ 심사위원장으로 초청된 허우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를 비롯해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미라 네어의 <몬순 웨딩>, 차이 밍량의 <거기는 지금 몇 시니?>, 프루트 챈의 <할리우드, 홍콩>, 바박 파야미의 <비밀 투표> 등 칸과 베니스 화제작을 모두 만날 수 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오사마 빈 라덴의 은둔지로 유명해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목숨을 걸고 촬영한 <칸다하르>, 중국에서 개봉됐지만 전세계 영화제로는 처음 공개되는 장이모우의 신작 <행복한 날들>도 눈길을 끈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PPP 프로젝트로는 이와이 슈운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사진)과 다레잔 오미르바예프의 <길>, 장밍 감독의 <주말 음모>가 완성됐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촬영한 후루하타 야스오의 <반딧불이>, 스타맥스와 일본 도에이가 합작한 유키사다 이사오의 <고>도 첫선을 보인다. 올해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아슈토쉬 고와리커의 <라가안>과 <사좌>로 99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무랄리 나이르의 신작 <개의 날> 등 인도영화도 푸짐하다. 토론토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싱가폴 칙 감독의 <닭볶음밥 전쟁>, 베니스영화제 넷팩상을 수상한 중국 장양 감독의 <지난 날>, 베니스영화제 ‘현재의 영화’ 부문 진출작인 시오다 아키히코 감독의 <해충> 등은 아시아 영화의 젊은 힘을 보여줄 것이다.
새로운 물결
아시아 신인감독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인 ‘새로운 물결’은 11편의 작품을 준비했다. 김지석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는 “올해 소개하는 감독들은 향후 2~3년 내 중요한 작가로 부상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여성 신인감독의 행보를 주목하라”고 덧붙였다. 홍콩 출신의 여성감독 에밀리 탕은 천안문 사태를 배경으로 한 <동사변형>에서 중국 청년의 혼란을 다룬다. 오랫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갈채를 받은 인도네시아 여성감독 난 아크나스는 모녀의 갈등을 다룬 수작 <모래의 속삭임>을 선보인다. 베니스영화제 ‘현재의 영화’ 부문 특별상을 받은 주웬 감독의 디지털 영화 <해선>(사진), 인도 비쥬 비스와나스 감독이 영국 배우를 캐스팅해 만든 로카르노 영화제 초청작 <데자뷔>는 아시아 독립영화의 어떤 흐름을 보여준다. 토요다 토시야키 감독의 학원 청춘물 <우울한 청춘>, 츠카모토 신야가 출연하는 이치오 나오키 감독의 16밀리 영화 <욕조에 빠져 익사하다>는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구미를 당긴다. 인도 디그비자이 싱의 <마야>는 야만적인 전통 관습의 폐해를 고발하며, 이란 마지아르 미리의 <끝나지 않은 노래>는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에 대한 그리움을 담는다. 한국영화로는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와 송일곤 감독의 <꽃섬>이 초청됐다.
한국영화 파노라마
초청작을 선정하기가 가장 어렵고 골치 아픈 부문은 바로 한국영화가 아닐까? 올해 ‘한국영화 파노라마’ 상영작은 질적, 양적으로 폭발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영화계에 대한 부산영화제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한상준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국제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작품 위주로 선정했다”면서 “지금 한국영화의 경향과 변화를 대표하는 작품을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일본과 중국의 배우가 출연한 <순애보> <파이란>이 바로 ‘국제적으로 어필하는’ 영화가 아닐는지. 이 두 영화를 포함해 데뷔작으로 주목받은 감독들의 두 번째 작품이 다수 눈에 띈다. <모텔 선인장>의 박기용 감독은 모텔방 중년남녀의 하룻밤을 그린 흑백 디지털 영화 <낙타(들)>을, <벌이 날다>의 민병훈 감독은 빈털터리가 된 채 고향 타지키스탄으로 돌아온 청년의 이야기 <괜찮아, 울지마>(사진)를 처음으로 선보인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와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물론 초청됐다. 김기덕 감독은 베니스 진출작 <수취인불명>과 신작 <나쁜 남자>를 모두 상영하는 영예(?)를 누리게 됐다. 윤종찬 감독의 <소름>과 장현수 감독의 <라이방>은 올해의 수확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올해의 흥행작 가운데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 <조폭 마누라>가 모두 빠진 대신 <친구>가 초청된 이유는? ‘백퍼센트 부산영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월드 시네마
올해 부산영화제가 초청한 미주 유럽 영화들은 대부분 좀 낯선 편이다. 북미나 서유럽의 전통적인 영화 강국 대신 알려지지 않은 나라, 새로운 감독들의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의 프로그램은 유럽 영화계의 지각 변동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영화들과 동유럽 및 발칸 반도 여러 국가의 작품들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맛깔스러운 거장들의 신작도 골고루 식탁 위에 올랐다. 장 뤽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와 스티븐 프리어즈의 <리엄>, 아르투로 립스타인의 <남자들의 파멸>, 알렌산드르 소쿠로프의 <토러스> 등이 바로 그런 작품들. 줄리앙 슈나벨의 <비포 나잇 폴스>와 비가스 루나의 <쏜 데 마르>, 카트린느 브레이야의 <팻 걸>, 아모스 기타이의 <이든> 등 중견감독의 신작도 초청됐다.
무엇보다 올해는 북유럽 영화들에 주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잉마르 베리만, 보 비더버그와 함께 전후 스웨덴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얀 트로엘 감독은 <하얀 비행>에서 뛰어난 시각적 스타일을 보여준다. 70년대 후반 한 가족의 붕괴를 그린 <가족의 비밀>, 예테보리 영화제 관객상을 받은 코미디 <얄라! 얄라!>도 돋보이는 스웨덴 영화다. <정크 메일>을 만든 팔 슬레톤의 <록스타 유괴사건>, 여성감독이 도그마 기법으로 연출한 <캐빈 피버>는 노르웨이 블랙 코미디다. 올 베를린 영화제에서 돌풍을 일으킨 덴마크 영화 <초급 이태리어 강습>(사진)도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구 유고 및 체코 연방 국가에서 온 낯선 영화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알바니아 영화 <슬로건>과 슬로베니아 영화 <빵과 우유>는 각각 올 칸과 베니스에서 신인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다. 슬로바키아의 옴니버스 코미디 <풍경>과 크로아티아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로 불리는 달리보 마타니치의 <바다를 꿈꾸는 점원>도 발견의 줄거움을 줄 것이다.
올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치코>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크로아티아와 혁명기 칠레를 횡단하는 영화다. 지구의 반대편에 온 만큼 숨을 돌리고 남미 영화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괜찮다. 몬트리올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칠레 영화 <비오는 대관식>과 브라질리아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위도 0도>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 남미 영화의 도도한 힘을 보여준다. 전양준 세계영화 프로그래머가 강력히 추천한 우루과이 영화 <25와트>는 초저예산 독립영화지만 전세계 60개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수작이다. 아프리카에 관심이 간다면 미국에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의 뿌리를 추적하는 <리틀 세네갈>과 세 명의 아프리카 어머니에 관한 단편 모음인 <아프리카의 여인들>을 보자. 중년 사업가의 삶의 위기를 그린 <아이슬랜딕 드림>과 아마추어 축구단을 소재로 한 <오프사이드 반칙>은 각각 올해 아이슬란드와 터키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유럽권 신인감독들의 약진도 빛을 발한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적대적 관계에 놓인 두 청년의 이야기로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노 맨스 랜드>, 그리고 <퍼니 게임>의 미카엘 하네케를 사사한 오스트리아 여성감독 예시카 하이우스너의 <사랑스런 리타>는 최고의 데뷔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또 아일랜드 짐 셰리던 감독의 딸 커스턴 셰리던이 연출한 두 청소년의 위험한 사랑이야기 <디스코 피그>도 신선하다. 그밖에 한국계 캐나다 여성감독 헬렌 리의 신작 <우양의 간계>, <뽀네뜨>의 자크 드와이용 감독이 만든 <유혹 게임>, <존 말코비치 되기>의 찰리 카우프먼이 시나리오를 쓴 <휴먼 네이처>도 눈에 밟힌다.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수상작 <리스본행 노란색 시트로엥>은 포르투갈 군사혁명을 소재로 한 이탈리아 영화다. 유고슬라비아의 거장 두산 마카베예프의 대표작인 <정오에 목욕하는 고릴라> <스위트 무비>도 필름으로 볼 수 있다. 마카베예프는 새로운 물결 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미국 테러 사건 여파로 내한을 취소했다.
와이드 앵글
중단편과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독립영화의 향연인 ‘와이드 앵글’도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UN 국제농업개발기구의 요청을 받아 만든 다큐멘터리 <에이비씨 아프리카>, 에밀 쿠스투리차의 뮤직 다큐멘터리 <에밀 쿠스투리차와 노스모킹 밴드>(사진), <수자쿠>로 칸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나오미 카와세의 <캬카라바아>는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성전환자를 소재로 한 <서던 컴포트>, 위대한 네 명의 예술가를 다룬 <삶>은 각각 선댄스와 카를로비 바리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7명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린이를 통해 두 국가의 분쟁을 다룬 <약속>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지난해 <고조>를 들고 부산에 온 이시이 소고 감독이 '현재 작업중'이라 말했던 <일렉트릭 드라곤 80000 V>는 흑백으로 찍은 판타지 중편영화다. 애니메이션으로는 베를린 영화제 단편부문 대상 <검은 영혼>, 안시 애니메이션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빙산을 본 소년>과 <퍼펙트 블루>의 곤 사토시 감독의 신작 <천년여우>가 주목할 만하다.
오픈 시네마
올해 부산영화제 오픈 시네마는 수영만 요트경기장이 아닌 부산 전시 컨벤션 센터(BEXCO)에서 상영된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친근한 스타들이 출연하는 대중적인 감각의 영화 13편이 초청됐다. 베를린영화제 금곰상과 여우주연상을 휩쓴 파트리스 셰로의 <인티머시>는 영화 속 섹스에 대한 논쟁에 다시 불을 당긴 영화다. 올 칸영화제 화제작으로는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조엘 코엔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사진),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가 상영된다. 게리 올드먼과 제프 브리지스가 출연하는 정치영화 <컨텐더>, 유덕화 주연의 <풀타임 킬러>는 스릴감을 안겨줄 것이다. 일본 코미디계의 재주꾼 야구치 시노부의 신작 <워터 보이즈>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하는 남자 고등학생을 다룬 영화로, 올해 상영작 중 '가장 웃긴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영화제 기간 부산을 방문할 프랑스 여배우 잔 모로의 대표작인 프랑수아 트뤼포의 <쥘과 짐>, 루이 말의 <연인들>은 고전을 큰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기쁨을 줄 것이다.
특별기획 프로그램
(1) 신상옥 회고전
2년 전부터 기획돼온 신상옥 감독 회고전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됐다. 60여 편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이끌어온 신상옥 감독의 시기별 대표작 9편이 준비돼 있다. <지옥화>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사진)는 신감독의 초기 리얼리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작품. <내시> <천년호> <다정불심> <이조여인잔혹사> <연산군>은 사극의 거장으로서 신감독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들이다. 북한에서 만든 영화 7편 가운데서는 <소금>을 볼 수 있으며, 박정희 정권의 흥망성쇠를 다룬 94년작 <증발>도 상영된다.
(2) 타이영화 특별전
지금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태국영화의 물줄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장단편, 애니메이션을 포함해 모두 11편의 다양한 태국영화가 초청됐고, 태국영화 관련 영문 책자가 발간됐으며, 영화제 기간 중 특별 세미나도 열리기 때문이다. 또 태국영화 산업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태국 왕실의 영화인을 포함해 약 60여 명의 게스트가 참석할 예정이다. 폐막작인 <수리요타이>와 태국 뉴웨이브의 주역 논지 니미부트르의 야심작 <잔다라>(사진)가 가장 굵직한 작품이다. 올 상반기 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한 타니트 지트나쿤의 <방라잔>, 태국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불렸던 반디트 리타콘의 사회파 영화 <달사냥꾼>도 상영된다. 축구와 도박을 소재로 젊은이의 세계를 탄탄한 드라마에 녹인 <골 클럽>, ‘노장 킬러들의 수다’라 할 만한 <킬러 타투>는 보다 대중적인 재미를 줄 것이다. 단편 <흰색 자전거> <스케치북>과 애니메이션 <사이암 키드>, 뮤직비디오 <티-본 도시에 오다>는 깜찍한 보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