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산 자락이 바다로 뻗어 내려오다 우뚝 멈춰선 땅!
그 땅에 1963년 12월 1일 미 제44포병 1대대 5포대가 주둔하였다.
비인 땅은 이제 국제 도시에 버금가는 발돋움을 하게 된 것이다. 120여명의 미군, 군속 200여명, 그에 따른 부양가족 800여명이 북적거리는 기지촌으로 변화를 거듭하여 갔다. 아니1914년 일제가 한산군, 비인군, 서천군을 합쳐 서천군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한 이래 처음으로 맞는 호황이 도래한 것이다.
불당곡 산성과 6백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비인 향교 사이에 자리한 소위 미군부대주변에 작은 기지촌이 만들어졌다. 아리랑 술집, 세븐세븐 클럽을 비롯한 다양한 시설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후 1980년 5월 31일 우리 공군이 미군부대를 인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약 40여년 동안 비인 땅에 존재한 미군부대 델타 배터리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아쉬움을 더한다. 어쩌면 그 역사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 역사의 단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인 미군부대의 역사는 우리 나라 현대사의 부분이며 비인 지역의 역사인 것이다. 미군은 6·25전쟁이래 비행장 최적지로 알려진 군산공군 기지를 방호할 목적으로 미사일 방공 포대를 서해로 돌출 된 서면 배다리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이 곳은 군산 군사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최상의 군사 작전지역으로 전략적 군사 요새였다. 이 부대를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하여 주둔한 부대가 바로 델타 배터리, 소위 비인 미군 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는 후방에서 보급, 수송, 취사, 정비 등을 담당하기 위한 병참 기지로 존재하였었다.
따라서 근무를 교대한 미군들의 휴식 공간으로 존재한 비인은 미군의 환락가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미군의 주둔은 비인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비인 미군부대는 40여년 동안 비인 경제를 활성화하였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먼저 고용을 창출하여 미군속으로 생활하는 비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비인 지역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것은 지금도 당시 미군속으로 살던 사람들이 꽤 남아 있다는 사실이 잘 증명하고 있다. 또한 미군과 관련된 물류들이 자연스럽게 유통되던 곳이다. 양주, 양담배, 음식, 심지어는 쓰레기까지 굉장한 부가가치를 창출한 사업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양담배는 당시 검열이 심했지만 암거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외지로 나가는 대부분의 선물은 양주이거나 양담배였다. 암달러 교환 역시 많은 돈을 챙기는 업종의 하나였다. 그리고 사채 업자가 대단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미군과 관련이 있는 소위 양색시들이 많이 있어,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고리대금을 취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양담배, 양주를 대신 받아 암거래하는 사람들이 있어 보이지 않는 비인 경제가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건대, 미군부대로 인하여 비인 경제는 활성화되었는지 모르지만 놀고 먹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들은 배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또 그 시절 그 모습은 비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또 한 단면은 기지촌으로 형성된 마을과 인접해 사춘기를 맞이한 비인중학교 학생들이 이꼴저꼴 다보고 학교를 다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중학교 일학년 때 호기심 많은 홍규는 양공주들이 사는 집을 훔쳐보다가 걸려서 두들겨 맞았던 일도 있었다. 또 뻐끔 담배 입질도 다른 지역 학생들과는 달리 양담배로 할 수 있는 혜택도 있었지만 청소년에게 미치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골목골목마다 양색시들의 생활은 중학생의 눈에도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특히 중학교 때는 알만한 동네 여자아이가 양색시들과 사는 모습을 보고 놀라기까지 하였다. 한때는 메기라는 애칭을 가진 정신나간 양색시가 비인 거리를 활보하여 청소년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이 여인과 오고가는 대화와 행동 속에서 이미 청소년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자랐다. 알 수 없는 욕지거리, 그녀의 미친 사연들, 미친 후 남정네들과 얽힌 뒷 이야기들은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델타 배터리와 기지촌은 비인의 청소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선사하였다. 그 시절 암울한 긴 터널을 잘 통과한 사람들도 있지만 좌절의 고배를 마신 사람들도 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는 꿈 많은 청소년기에 정서 장애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찍 배운 술, 담배와 성은 날고 싶은 날개를 접어야 했다. 이런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인 사람들은 미군들이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모습, 야구하는 모습, 벌을 받기 위해서 비인에서 서면까지 뛰어가는 모습, 성탄절이 되면 선물을 짊어지고 교회에 와서 나누어주던 모습, 그리고 고 모씨가 운영하던 고아원을 돕던 미군들의 모습, 어린이 날 미군부대를 공개하던 모습을 통하여 그들과 교감을 갖고 비인 사람들은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시절 우리는 미군에 대한 좋은 생각만 한것은 아닌것 같다.
지나가던 미군 차량을 보면 이것 먹으라는 손짓 발짓을 다하며 놀려댔다. 그러면 그들도 손짓 발짓으로 응해 왔다. 요즈음 미군이 주둔하는 부대에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그 추운 한겨울과 억수로 비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꼬불꼬불한 비포장 신장로를 따라 강 훈련을 하는 미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이 땅에 자유와 평화를 지켜준 점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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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인 주둔 부대는 본부 서면 주둔 부대는 전투부대 울어릴적 배다리 미군부대 앞에가서
미군들한테 시가리트 기부미 지금 생각하믄 서글픈 얘기지 이것또한 김일성이 그넘 때문에
맹글어진 서글픈 역사여 처죽일넘 김일성 통영댁 덕분에 좋은 역사자료 잘보고 갑니다~~
원사는 맨처음 배운 영어가 시가리트 기브미였구먼 나는 껌 기브미하고 니그루 였지 여자 친구들은
초크리트 기부미라고 소리쳤고... 그때 그시절이 그립네~~
미군트럭 지나가면 몽키 몽키 하던 기억이 난다.ㅋㅋ 그러면 깜둥이 넘들이 쑥덕 감자 주었었지 ㅎㅎ
ㅎㅎㅎ 약국 건너편이 미군기지여 이름하여 컴프리,,,,
그랬었구나 어려서부터 영어를 했네 ㅋ외국사람구경도 잘하구 좋았겠따 좋은자료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