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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1;1-11. 영광의 때를 위한 이 또한 지나가야 할 과정들. 2023. 4.2.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오늘이 무슨 주일입니까? 신앙인은 반드시 기억하고 알아야 하는 교회력입니다. 교회력으로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이고 부활절 전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 일주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종려주일인데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어떻게 들어가셨느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실 때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양을 하면서 환호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의 한 주간이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여려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3년간의 공생애 속에서 이미 3-4번 정도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오늘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의 그 때를 위하여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입성과 부활의 그 순간까지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여러 과정의 의미와 그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주시고자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1. 예루살렘의 입성의 의미입니다. 3가지가 있습니다. 예언의 성취와 메시아로 확정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의 완성입니다. 특별히 육체로 오신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은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고난이고 가르침이고 강론입니다. 그러면 이 내용이 무엇입니까?
1-1.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은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언을 했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예언은 성취가 되어야 열매가 됩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의 선지라가 선포하는 왕의 출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이었습니다.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기다리고 바라고 소망하던 구약의 예언의 성취가 왕으로서의 예루살렘입성인데 예수님이 메시아이셨음을 증거 한 사건입니다. 시온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왕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데 나귀를 탑니다. 그 나귀는 작은 나귀새끼입니다. 예언대로 그대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언의 성취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예루살렘의 입성을 예수님이 하시도록 했습니다. 메시야와 그리스도로서 들어 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그냥 우연히 교회에 나오고 그냥 우연히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주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섭리하시고 뜻하신 내용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지나가야 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서 구원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고 믿음으로 교제하고 허락하신 주어진 길을 가는 것 또한 예수님의 뜻하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항상 말씀하시고 부탁하신 예언을 성취하시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이 예언의 성취이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성취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의 성취는 미래를 위한 그 어떤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지지만 성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을 위하여 하는 시작입니다.
1-2.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곳 메시아인 사실을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공포하는 사건과 시점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갈릴리와 나사렛의 사람들과 제자들과의 사역이었습니다. 힐링과 프리칭과 티칭이 제한 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하시는지 일부만 알았습니다.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랐습니다. 어렵고 고난을 받고 힘이 들고 도움이 없이는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의 인정이었습니다. 말씀을 강론하셔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입성이 세상과 백성들에게 알리는 시점이고 공포하는 예식이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마21;11,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이 때에 증언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심을 확실하게 드러냈습니다. 어떤 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지 분명하게 세상과 사람들이 알게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일을 단독으로 행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나갈 때 혼자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어느 누구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십니다. 홍수 심판이 있을 때에는 노아에게 세상을 물로 정리할 것인데 너는 산에 방주를 지어 대비하라고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려 하실 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며 사랑하는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1년 뒤에 일어날 일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6개월이나 한 달이나, 하루 뒤의 일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일과 미래와 앞날이 궁금하고 불안해서 이리 저리 다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 앞의 일을 알지 못하지만, 감사하고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와 사랑을 입은 사람에게는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해야 할 일과 필요한 일들을 알려주시고, 위험과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를 알려주시고, 다 알지 못할 때에는 미리 징조로 보여주십니다.
왕상 17장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알려주신다고 했는데 1순위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어떤 사건을 어떤 일을 어떤 내용을 미리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역하는 것에는 선지자가 있고 제사장과 왕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아뢰고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서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 것이 선지자의 기능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면서 선지자이심을 세상과 사람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하는 시점이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그러면 이는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종려주일로부터 이제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과 함께 선지자 되심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거치면서 예수님을 믿는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의 몫이 됩니다. 그래서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어떻게 가르칠까요? 무엇으로 가르칠까요? 제사장의 역할이고 제사장의 기능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이고 선지자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기능은 확대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배를 드리고 매일 찬송을 하고 언제 어디서나 기도를 합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기능은 축소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선지자의 기능을 증거 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선지자의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르치고 지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에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단순한 입성이 아니고 선지자 되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미리 신호를 보내주십니다. 신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을 주시려고 보내시는 신호이고, 하나는 심판하시기 전에 주시는 신호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말씀에 예언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고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지자 되심에 대한 선포를 기억하고 은혜와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일하심과 말씀하심으로 변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는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고 회복을 주시고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선지자 되심으로 피할 갈과 복 받을 사건을 알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여러분에게 이런 선지자의 기능이 되살아나고 드러나고 선포되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은 예수님 자신의 마지막 사역의 완성입니다. 입성 이후에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가르침과 치유와 살리심과 선포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심판과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죄의 은총도 베풀었습니다. 깨닫고 더 늦지 않게 하기 위한 저주의 말씀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하신 마지막 사역이 무엇입니까? 그 것은 예루살렘입성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배반을 당하시고 결국에는 이 또한 지나가야만 하는 패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그 순간을 가장 고귀한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죽음을 당하신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 것이 궁극적인 사역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 뒤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모든 과정이 끝나고 부활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는 예배가 다짐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주여! 주님이 받으시는 고난과 과정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정숙한 마음으로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서 고난의 날을 보낸 엘리아처럼, 시내 산에 올라가 금식하며 기도한 모세처럼, 거친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그 모습의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을 위한 나의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슬픔에 잠기던 길 예루살렘의 그 거리와 죽음의 거리 골고다 언덕에서 붉은 피 흘리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기도와 참회와 절제와 경건한 마음으로 냉혹한 현실에서 내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주님 앞에 큰 빚 진자가 빚 갚은 자의 심정으로, 마음속에 버렸던 십자가와 쓰러졌던 나의 십자가를 다시 세우는 신앙의 성장과 영적인 성장의 뜻 깊은 사순절과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 것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노래하고 호산나를 외치는 것이고 고난 가운데 드러나는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고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고백이 이 시간에 있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리고 부탁을 드립니다.
2.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외친 호산나! 호산나! 찬송과 찬양의 의미입니다. 막11;9-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비 되어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습니다. 구원 사역을 위한 본격적인 여정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맞이하는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이 자기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예루살렘성이 떠들썩합니다. 제자들과 은혜를 받고 은총을 받고 그래서 고침을 받고 나음을 입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외치는 호산나가 무엇입니까?
호산나(Hosanna)는 시118; 25절에서 비롯된 기도의 외침입니다. 여호와여 구 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 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도우소서. 구원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호산나, 구원의 외침은 승리와 감격과 열매에 대한 외침이었습니다. 이유는 호산나가 축제를 의미하는 초막절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환호할 때 외쳤던 구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초막절이 무엇입니까? 신16;13-17,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 지니라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 지니라. 여러분, 초막절은 주신 복과 은혜와 수확에 대한 감사입니다. 승리와 감격과 열매에 대한 외침입니다. 이 승리와 감격과 열매를 호산나로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호산나로 찬송을 햇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백마가 아닌 나귀를 타시고, 레드카펫이 아닌 겉옷가지를 밟고 가셔야하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일지라도 승리의 상징인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의 입성하는 자체만으로도 이 사람들에게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승리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매이었습니다. 여러분, 많은 역사를 거치는 동안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서 환대를 받지 못했고, 때마다 멸시와 핍박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산나를 외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고, 모든 죄의 늪에서 건져 내셨으며,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신 승리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처한 가난과 핍박과 슬픔과 고통이 마음을 쉼 없이 흔들어 놓아도 영원한 승리를 위한 축제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외침을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시며, 우리와 늘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말이지요. 비록 내 손에 든 것이 종려나무 가지와 인생의 지팡이 와 겉옷뿐일지라도 호산나!(Hosanna!) 로 찬송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하신 왕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구원자 메시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치료하시며 가르치신 만민을 구원하신 왕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찬양합니까? 렘 3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여러분, 호산나는 구원 하시옵소서 라고 외치는 환호성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이 겉옷을 펴고 나뭇가지를 길에 까는 것은 구원하시는 왕을 영접하는 모습이었고, 앞서고 뒤따르는 사람들이 소리 질러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리가 외쳤습니다. 무리가 누구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고 다윗의 나라를 하늘 영광으로 구원하신 왕을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런 믿음과 이런 고백과 찬양이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예수님의 사역들인데 고난 주간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것입니다. 이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예수님의 고통과 배신당하심 입니다. 부활의 아침, 새벽 미명시간까지의 모든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의 예수님의 생각과 무리들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제자들과 무리들의 생각과 행동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예루살렘 입성 이전이나 이후가 같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호산나 찬양을 하고 찬송을 합니다.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말없이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입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자들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아끼는 척, 소중한 척, 못 들은 척, 못 본 척, 모르는 척 했습니다. 결국 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무리들이 떠나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결국에는 부인을 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새로운 시작이 이렇게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제자들과 따르던 무리들에 의해서요. 이 것이 제자들의 신앙이고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함께했던 기적과 능력은 어디로 갔습니다. 세상보다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격동의 시대에 함께 했습니다. 대처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제자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대처라고 합니다. 배려하는 척, 걱정하는 척, 관심이 있는 척, 도와주는 척. 사랑하는 척, 위로하는 척, 순종하는 척 했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척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주님은 실제입니다. 척이 아니고 진심이고 삶이었습니다. 갖은 고문을 당하시고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생명 드리는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아픔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내용을 통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53;4-9,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 또한 지나가야 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입니다. 그 질고와 슬픔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맞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당했습니다. 상함을 입었습니다. 징계를 받았습니다. 채찍에 맞았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갚는 것이었습니다. 곤욕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었고 죽음 앞에서는 털이 밀리고 심문을 당하고 끌려가 십자가에서 악인들과 함께 했습니다. 죽어서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첫째 날은 오늘입니다.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둘째 날 월요일은 성전 청소의 날입니다. 예배는 평안 가운데 그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예배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한 것이 성전의 순수한 예배를 변형시켰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편의를 빙자한 돈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을 향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었습니다. 제사장들의 이권개입 때문에 그들의 밥그릇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에 종교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이 주님에게 항의 하지만 예배가 중요하고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과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성전을 가리켜서 미래를 여는 주님의 몸이고 주님의 몸인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각인을 시켰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졌던 당시의 예배의 의미와 성전의 개념을 참 성전의 개념과 예배의 정의를 주님께서 올바르게 세웠던 날입니다.
셋째 날 화요일은 변론의 날입니다. 제사장들은 기득권과 밥그릇을 건드린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많은 질문을 하고 공격을 하는데 어떤 공격을 받습니까? 이상한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마다 변론을 하고 성경적 바른 믿음과 지식과 신앙적 해석해 주십니다. 변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대적 예언을 합니다. 권세를 누구에게서? 혼인 잔치의 비유와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일과 부활과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 그런가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바르지 못한 믿음과 신앙에 대하여 꾸짖으면서 화 있을 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꾸짖는 내용을 7번씩이나 반복을 합니다.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한탄하시고, 성전이 무너질 것과 마지막 날과 심판의 때에 일어날 재난의 징조를 말씀합니다. 큰 환란이 지난 이후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말씀하시고, 그 유명한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을 말씀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곳에서 말세에 관한 유명한 감람산 설교를 행하십니다. 특별히 이날 아침에는 전날에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과 관련하여 참된 믿음은 '밖으로 말해져야 하는 것임을 또한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신앙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믿고 구한 것과 믿고 말한 것을 거두는 모든 열매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하면 그 말은 주님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되돌아오고,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넷째 날 수요일은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한 여인으로부터 받는 것과 함께 배신당하는 날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한 여인의 사랑이 있었고, 가롯 유다의 배신이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귀한 사랑이 있고, 참담한 배신이 있습니다. 여러분, 3일간 연속된 성전에서의 갈등으로 긴장감에 휩싸인 주님입니다. 앞으로 십자가를 지실 그래서 죽음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믿음을 받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의 정성이 주님께 얼마나 시원한 생수가 되었고, 그 순간 얼마나 필요한 행동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러분, 사랑은 기대하지 않은 것에서 나오고, 배신은 가장 가까이에서 발생합니다. 여러분, 가장 가까이 있지만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계산적이고, 물질적이고, 그래서 철학이 없고, 신앙도 없고, 믿음도 없고, 주위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율법사와 유대인 들이고 가롯 유다입니다.
다섯째 날 목요일은 최후 만찬입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과 성찬식과 유언 설교를 행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세족식을 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마지막을 아시면서도 침착한 주님입니다. 여러분, 이날의 주님의 모습에서 내일 이 땅의 마지막과 종말이 닥친다고 해도 흥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배우지 않습니까?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선생님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주님은 불신앙이 수치를 발견하는 그곳에 영광을 드러내고, 교만과 수치를 느끼는 그곳에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여러분, 복음 사역을 위하여 일할 사람이 누구 입니까? 결국 선봉에 설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끝까지 사랑 하셨습니다.
여섯째 날 금요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난의 날이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리 저리로 끌려 다니면서 재판을 받고, 그리고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십니다. 너무나 탈진이 되어서 보통의 사람보다 빨리 숨을 거두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내가 죽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내가 변하지 않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변화시키기보다 죽는 것이 쉽고 바른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셨는데 준비하지 않았지만 요셉에 의하여 준비 되어진 무덤에 묻히시게 되고 빌라도의 인봉과 함께 7곱 째 날이 지나게 됩니다. 이 것이 감당하시고 지나가야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7마디 표현을 합니다.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
눅23;43,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요19;26-27,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혼자 그 현장에 남아있던 요한에게 네 어머니니라.
마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요19;28, 내가 목마르다.
요19;30, 다 이루었다.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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