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일곱째 이야기, 외세에 짓밟히고 조국에 버림받은 화냥년(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19)
[삽화-백소(白笑)]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 세 번째 세력이 우리인 것은, 우리의 오랜 인습 관념 편견 등 때문이라는 것이 연대사를 하는 발언자의 주장이었다. 성폭력이 일어나도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더 탓하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진실 규명을 어렵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 발언자는 ‘화냥년’이라는 말을 화두로 꺼냈다. 화냥년이 무슨 말인지 아느냐. 환향녀, 즉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다. 그 말의 어원이 그렇다는 것은 노동운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을 대부분 모를 것이다.
신돌석씨가 어렸을 때는 이 말이 참 많이 사용되었다. 주로 여자들이 쓰는 말이었다. 욕이었다. 여자들끼리 싸울 때 하는 말이다. 야 이 화냥년아.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니가 나 화냥질 하는 것 봤어 이년아. 이렇게 대거리를 하곤 했다. 그래서 그냥 그 말은 나쁜 말이구나. 욕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 몸을 파는 여자 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말인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깊이 들어갈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교육을 받을 때 이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때 강사는 몽골 때 공녀로 끌려갔던 여자,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던 여자들 이야기를 하면서 이들 대부분이 죽거나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운 좋게 고향에 돌아와도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병자호란 때는 양반 여자들도 많이 끌려갔는데 돌아오니 남편이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고통 속에 시달린 아내를 위로해주고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애쓰지는 못할망정 이혼을 요구한다니 말이 되는가?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은 무수히 많았다. 아니 당당하게 따뜻하게 아내나 딸, 누이를 맞은 이가 오히려 거의 없었다.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현대에까지 이어지면서 일본군 위안부라고 스스로 밝히는 이가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 당시 강사의 이야기였다. 그때는 아마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하기 이전일 것이다. 거기서 강의를 듣던 사람들은 모두 일본군 위안부가 있다고 믿었지만 그러면 왜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강의를 듣자 그럴 수 있다고들 생각했다.
이후에 일본군 위안부라고 밝힌 분들이 많이 나타났을 때 그 중에 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채로 결혼생활을 했다가 나중에 알려진 뒤 파경을 맞은 분도 계셨다. 아들이 그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방황했다는 분도 있었다고 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일본제국주의의 국가권력에 강제로 끌려가 험한 꼴을 당했는데 돌아와서까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왜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숨기면서 살아야 하나? 왜 전염병이라도 옮기는 사람처럼 외면을 당해야 하나? 그 모두가 우리의 잘못된 인식,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나가면 강제성이 없었다고 일본 정부나 극우세력은 말한다. 우리나라 정부여당은 차마 그렇게 말은 못하지만, 극우수구세력 중에는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우리나라 지식인 중에 그런 견해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극우도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있다. 팩트가 중요하다면서 이것저것 근거로 들면서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이 비판을 받으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동조하는 지식인들도 있다. 기울어진 마당을 보지 않은 채 왜 공정하지 못하냐고 하는 식이다.
일본제국주의가 성노예의 증거를 없애려고 엄청나게 노력했고, 우리나라 독재정권이 거의 반 세기 동안 그에 호응해 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노력과 민주화투쟁의 결과 덮여지고 감춰진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 몸이 증거다’라고 외치는 할머니들이 나왔다. 발언자는 할머니들도 소녀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아줌마를 지나 이제 할머니가 되어서야 이런 증언을 하게 된 것이다. 강제성이 없다면서 이것저것 학술적이라는 미명으로 들이대는 이들은 결국 성노예를 은폐하려는 역사적 범죄에 가담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리라.
[삽화-백소(白笑)]
발언자가 연대사를 마무리했다. 전쟁폭력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일에는 항상 방해세력이 있다. 전쟁 성폭력 문제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민주화투쟁을 통해 방해세력의 억압을 뚫고 진실규명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던 잘못된 인습 관념조차 바꾸어 나갔다. 민주주의는 선거제도나 개개인의 권리 확보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의식조차 바꾸어 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요시위는 민주주의의 선봉에 서 있고, 우리는 그것을 지키고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연대사가 끝나자 사회자가 힘찬 발언에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이어서 두 번째 연대사가 있었다. 수도권 어느 도시에 있는 여성의 전화 대표였다. 여성의 전화는 신돌석씨가 사는 지역에도 있다. 여성이 당하는 폭력, 차별 등에 대해 상담해 주고, 권리 쟁취를 위해 지원을 해주는 곳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하는 수요시위라서 그런지 발언자가 조금 전 연대사를 한 시민사회단체 대표를 제외하면 전부 여성이었다. 사회자도 여성이고, 참가자의 2/3 이상이 여자였다. 그것도 상당수가 젊은 여자였다. 신돌석씨는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연대사가 끝난 뒤 사회자가 쉬었다 가자고 하면서 노래를 청해 들었다. 초청받은 가수가 무대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은 뒤 죄송스럽게도 수요시위는 말만 많이 들었지 처음 와 본다고 하였다. 자기가 노래도 부르고 지역에서 미디어도 운영하지만 그것만으로 생활이 안 돼서 직장도 다닌다면서 사실은 오늘 지방에 출장 갈 일이 있어서 사회자가 제안을 해 왔을 때 못 간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뭔가 잡아다니는 느낌이 있어서 결국 연차를 내고 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 달란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연대사 발언이 있었다. 독일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고 지키는 일을 하는 코리아협의회 회장이었다. 마이크를 잡자 오늘 한국에 도착했다면서 급하게 와서 원고도 준비하지 못했고, 편하게 여러분들에게 소식 전한다는 심정으로 말하겠다고 하였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문제는 앞에서 사무총장님이 충분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몇 가지 보충하는 식으로 말하겠다고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그는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문제가 부정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에게 잘 된 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어째서 그런가? 평화의 소녀상은 베를린시에 있지만 시 소관이 아니고, 미테 구의 소관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베를린 시장이 철거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월권이고, 이것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의 저열한 수법 등이 알려지고 독일 국민들 나아가서는 전세계 민주시민들에게 관심을 갖게 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것이 일본의 행위를 폭로하고, 평화의 소녀상 설립의 의의를 베를린과 독일을 넘어서서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일본 정부는 자국 대사관 등을 통해 전세계 곳곳에서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위한 공작을 벌여 왔습니다. 베를린 소녀상 철거를 위한 작업은 벌써 4년째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코리아협의회와 함께 전시회를 하지 말라는 등의 압력을 넣어 왔어요. 독일 내에서만도 베를린 시 이외의 지역까지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 공무원들과 박물관장 등에게 회유도 하고 압력도 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작업이 구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어도 막을 길이 없었어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베를린 시장의 약속은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된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그에게 고맙다고나 해야 할지요. 지난 4년 동안 재독 동포들이 중심이 된 코리아협의회는 3개국 정부를 상대로 싸워야 했어요.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외면하고 은근히 일본 정부를 옹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서 독일 정부의 공무원들은 일본의 회유와 압력이 너무 심하니까 귀찮아서 은근히 철거했으면 하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어요. 일본은 여전히 강대국이고, 믿고 의지해야 할 우리 정부가 외면하였습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독일 정부마저 그러니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 시장의 뜻밖의 발언으로 독일 시민들이 화가 났고, 이제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관심이 불붙기 시작했어요. 독일 시민들은 지금까지 전쟁 폭력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녀 왔습니다. 성폭력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일본이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부정하고 평화의 소녀상도 일방적으로 한 것이라고 계속 말하니까 혹시 한국 사람들이 없는 사실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어요.
[삽화-백소(白笑)]
특히 박근혜 때 위안부 합의가 이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일본이 사죄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배상이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치유금 등으로 돈을 내겠다는 의사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내건 조건이 무엇이었나요? 다시는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말로는 ‘불가역적’이라고 표현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독일 사람들은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에요. 자기가 잘못을 했으면 지속적으로 사죄를 하고 반성을 표명해야지 왜 거론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더욱이 이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한국 정부가 일본의 그러한 요구에 동의했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한국이 없는 것을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거예요. 왜 거짓말도 자꾸 하면 듣는 사람이 사실인가 하고 마음이 쏠리게 되지요. 바로 그것을 일본은 노렸고, 한국 정부의 멍청한 태도가 그걸 기정사실화한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생각해 보면 한국 정부가 멍청한 것보다 일본 못지 않게 친제국주의적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독일 시민들은 그것을 토론을 통해서 의견을 모아가려고 했어요. 그것이 독일이 일본과는 다른 긍정적인 점이지요.
독일이 일본에 비해 과거사 청산 잘 하지만 사실은 독일에 살고 있으면 과거사 청산은 끝이 없어요. 홀로코스트에서 독일인들은 유대인에 대해서만 사죄를 했습니다. 나치가 유대인만이 아니라 장애인, 한국에서는 흔히 집시라고 불리는 신티와 로마 종족들, 그리고 성소수자들도 학살했어요.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들도 종교적인 이유로 학살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민들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알기만 하면 반성하고 사죄하려고 노력은 합니다. 물론 독일도 권력자나 그들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반성이 어렵습니다.
또한 독일은 식민지 역사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았어요. 그 말만 나오면 자기들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늦게 시작했고, 1차 대전에서 패전했기 때문에 식민지 경영이 2-30년밖에 안 된다고 말했지요. 그래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어요. 최근에 와서 독일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사람들이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교과 과정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독일도 과거사에 대해 완벽하지 않아요. 하지만 노력을 합니다. 이것이 일본과 다른 점들이지요. 특히 시민들은 상당히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극우세력이 발 못 붙이게 하려고 애를 쓰지요
대한민국에는 평화의 소녀상의 정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저쪽에서 볼 수 있듯 터무니없이 훼방 놓는 사람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대한민국 국민 중 2천 만은 우리를 지지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 하나 제가 알려드리지요. 일본 정부가 베를린시 미테구의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한다고 공식 선포하니까 미테 구청장이 잘 모르고 실수로 철거하겠다고 동의했어요. 우리가 소송을 해서 재판에서 이겼습니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행태가 오히려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관심을 독일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불러일으키고 있어요.
최근에 독일뿐만 아니라 스위스에서까지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리포트를 쓰고 싶다고 고등학생들이 연락을 합니다. 석사 논문도 최근에 10개 정도가 나왔어요. 이전에 알려진 적이 없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전세계적 관심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탈식민주의 의미로 베를린에서 토론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30년 넘게 운동해 온 힘이 베를린과 독일 사회에 새롭게 기억의 문화, 여성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바꾸고 있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싸웁시다. 고맙습니다.
코리아협의회 대표의 연대사를 끝으로 발언은 끝을 맺었다. 이어서 성명서 낭독이 있었다. 지역시민연합의 공동대표 남녀가 나와서 성명서를 읽었다. 신돌석씨는 오늘 지역시민연합 상임대표와 사무국장의 요청으로 머릿수 채워 준다는 마음가짐으로 왔다가 뜻밖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이상향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물론 독일의 시민들은 훌륭하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역사를 개척해 나가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개척해 나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세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이야기였다.
민주주의는 우리 의식의 변화까지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이제 시작이라고 한 말에도 공감이 갔다. 그리고 우리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생각 속에 지니고 있는 인습, 편견 등 때문에 우리도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자기 성찰을 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민주화투쟁이 일본군 성노예였던 할머니들을 부활시켰고, 그분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민주주의가 좀더 진전되어 나갈 수 있었고, 그것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수요시위에 매번 못 오더라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뜻깊은 시간이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