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란의 부활과 성경의 부활
부활이란 죽은 자가 살아난 일이다. 코란과 성경의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코란과 성경의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호에서 코란의 부활과
성경의 부활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아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다시 한 번 아담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 보고난 다음,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성경적 이해
성경의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아담은 그 과실을 따 먹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자가 되었다. 또한 성경은 아담의 후손들도 아담 안에서 모두 다 죽은 자들이라고 선포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상). 성경은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에게서 태어나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한다.
2. 코란적 이해
코란은 성경 창세기 2:17하 말씀의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를 "너희가 죄인들 가운데 있게 되리라. "(코란7:19하)라고 수정했다. 그리하여, 코란의 아담은 성경의 아담처럼 이른바 선악과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 코란의 아담은 그의 육신의 수명이 다 되어 죽었을 때 마침내 '죽은 자'가 되었을 뿐이다.
1. 성경적 이해
성경의 아담은 이른바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죽게 되었다. 그 죽음은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의 죽음을 유발시켰던 뱀을 저주하는 가운데, 죽은 아담을 살리는 일, 곧 부활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 저주는 즉각적으로 뱀에게 임하여,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뱀의 머리가 박살나게 됨 것을 예언함으로 뱀에 대한 최종적인 저주가 선포되었다. 그 저주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의 아내가 뱀의 유혹을 받아 그의 남편에게도 그 선악과를 먹도록 하였던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그의 아내를 다스리도록 하였다(창3:16). 그의 다스림은 그의 아내를 '하와'라는 새 이름을 부여함으로 구체화되었다. 아담은 그 '후손을 낳을 여자'가 곧 자신의 아내임을 알게 되고, 그 아내 이름을 '모든 산자의 어미'라는 뜻을 지닌 '하와'라는 새로운 이름을 불렀다(창3:20). 그것은 아담이 그의 아내와 더불어 이미 '죽은 자'였지만, '그 후손'으로 말미암아,
다시 '산 자'가 되고, 또한 그의 자녀들도 '산 자들'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담은 다름 아닌 자기의 아내가 그 뱀을 저주할 후손을 잉태할 자요, 그와 그 모든 후손들이 그 후손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성경의 아담이 그의 아내를 하와라 부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곧 바로 그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아담이 가죽 옷을 입게 된 것은 그 가죽의 주인공인 짐승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짐승이 단지 아담에게 옷을 제공하기 위하여 죽게 된 것이 아니었다. 짐승의 죽음 속에 희생 제사 개념이 담겨져 있다. 희생제사 개념은 아담의 아들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궁극적으로, 그 희생 제물의 실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담이 가죽옷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아 입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죽었던 아담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는 증표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다시 살리는 역사, 즉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 신학적으로 부활을 기초로 하여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새 창조라고 한다. 반면에 엿새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창조를 첫 창조라 한다. 성경의 아담은 이른바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곧 바로 죽은 자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일, 곧 부활을 기초로 하는 새 창조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새창조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아담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새 창조 역사는 첫 사람 아담으로 씨가 뿌려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꽃을 피우고, 그의 재림으로 온전한 열매를 맺게 된다고 볼 수가 있겠다.
2. 코란적 이해
코란은 이른바 선악과 사건으로 말미암은 아담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그의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구비하여 주고 난 다음,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가죽옷을 부여받는 가운데,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하였다는 이해도 없다. 코란은 엿새 동안의 창조 역사만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담의 부활을 기초로 하는 시작된 새 창조 역사는 전혀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1. 성경적 이해
성경의 아브라함도 성경의 아담처럼 이 땅에 살면서 자신이 죽은 자임을 자각하고, 다시 살려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즉 부활의 믿음을 갖고 새 창조의 주인공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성경의 아브라함이 그의 삶의 여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그의 죽음을 경험하였는가?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빨리 주지 않으셨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로마서(롬4)와 히브리서(히11)가 각각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 내외가 자녀를 낳는 면에 있어서 '죽은 자들'과 같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아브라함은 노쇠하였고, 그의 아내 사래는 경수가 끊기고, 태가 죽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녀를 잉태하는 면에 있어서는 '죽은 자들'과 같이 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2. 코란적 이해
코란도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늙은 나이가 될 때까지 아들을 갖지 못하였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코란은 아브라함이 성경의 아브라함처럼 죽은 자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못하였다. 코란의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을 때 마침내 '죽은 자'가 되었을 뿐이다.
1. 성경적 이해
성경의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와 더불어 나이 많아 자녀를 갖는 면에 있어서는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즉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 이삭을 낳았다.
1) 로마서 4장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 이삭을 얻었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롬4:17-21). 그리고 그 부활의 믿음으로 아들을 얻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얻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의(義)이다. 그는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로 여김 받았다는 것이다(롬4:22). 바울은 이신득자(以信得子)를 기초로 하여 이신득의(以信得義)를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의를 얻었다는 것은 그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부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처럼 우리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임 당하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음을 천명하고 있다(롬4:23-25).
2) 히브리서 11장
히브리서 기자도 사도 바울처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갖는 면에 있어서, 그의 아내와 더불어 죽은 자임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부활의 믿음을 구비하게 되었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단히 중요하게 증거하고 있다(히11:11-12).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로마서 기자처럼 아브라함의 이신득자(以信得子)를 기초로 하여 이신득의(以信得義)를 증거하지 않고, 이신득천(以信得天)을 증거한다(히11:9-10,13-16). 무슨 말인가?. 아브라함 내외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한 것이 단지 가나안이 아니라 천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성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한 가운데, 새로운 가치관, 신령한 가치관, 신령한 기쁨을 갖고 살게 되었다고 증거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잉태하면서 구비하게 된 그 부활의 믿음의 씨가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발아하여, 더 큰 부활의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었음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드렸으니...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7). 사실, 아브라함 편에서 볼 때, 이삭은 3일 동안 '죽은 자'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8)
우리는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의 성경해석 원리 하나를 살펴 볼 수 있다. 바로 '비유컨대'적 해석이다. 사실 이삭은 죽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기 위하여, 칼을 내리 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그 뿔이 수풀에 달린 수양을 예비하여 두셨고, 그 수양이 제물이 되었다. 사실, 성경 66권은 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직접, 간접으로 증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이삭은 죽었던 것이 아니라, 죽을 뻔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편에서 볼 때는 이미 그는 사흘 동안 죽은 자나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순간 그는 이미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그가 아들 이삭을 데리고 걸었던 사흘 길은 그를 실제로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걸었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사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라고 선포할 때, 그 '성경대로'는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까지의 3일길을 염두해 두고,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3) 야고보서 2장
야고보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렸을 때, 바로 그 부활의 믿음으로 드렸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약 2:21-24)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의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부활의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믿음은 행함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구체화된 행함이 있어야 된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번제물된 이삭을 능히 다시 살리실 수 있으리라는 부활의 믿음을 확실히 갖고 있었기에, 행함이 뒤따랐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내졌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행위를 의로 여기셨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구비하는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를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야고보서는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의로 여김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부활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가운데,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더 선포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부활의 믿음을 갖고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어떤 근거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의 아들을 번제물로 드린 사건이 곧 그가 하나님의 벗으로 칭함 받은 사건이 되었다고 선포하였겠는가?
그 답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당장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않았겠는가?”에 대한 물음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브엘세바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에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다(창22:2).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30마일이다. 아브라함은 하루에 약 10마일을 걸어서 사흘 만에 모리아산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은 그 사흘 길을 혼자 걷지 않았다. 그는 그의 아들 이삭, 그 이삭이 제물로 드려질 때 사용할 나무를 짊어진 두 사환, 이렇게 3명과 더불어 그 사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세 명은 아브라함의 길동무가 되지 못하였다. 사실, 아브라함은 그 셋과 더불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받기를 원하신지,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서 그에게 주고자 하시는 멧세지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그 사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생각은 그 아들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드렸으니...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히11:17)
아브라함의 진정한 말동무는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아브라함이 사흘 길을 걷는 동안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한 가운데, 하나님의 벗이 되었던 것이다.
2. 코란적 이해 코란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잉태하고 낳는 면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는 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코란도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와 더불어 나이가 많았음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으로 아들 이삭을 갖게 되었음에 대해서는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특별하신 간섭을 기초로 하여 부활의 믿음을 구비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코란의 아브라함은 '새 창조'의 핵심 원리인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여 새창조의 주인공이 된 사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코란은 아브라함이 제물로 받치려고 하였던 아들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드리는 과정에서 부활의 믿음을 구비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코란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사탄의 방해가 심하여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힘을 합세해 사탄에게 돌을 집어 던져 대적하였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도 무슬림들은 메카 순례 중, 사탄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예식을 행하고 있다.
코란에는 성경 히브리서 저자가 사용한 '비유컨대'적 해석이 없다. 코란의 성경해석 원리는 문자적이라는 점이다. 문자를 통해서 상징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아담의 선악과 사건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다.
성경은 아담이 이른바 선악과 사건을 통하여 죽은 자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모두 다 죽은 자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다시 살려주는 역사, 즉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부활이야말로 새 창조 역사의
핵심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점에 대해서 아담의 선악과 사건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잉태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코란은 이른바 아담의 선악과 사건과 아브라함의 아들 잉태 사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해석을 따르지 않고 있다. 코란은 알라의 심판 날, 알라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될 것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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