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태백 매봉산에는 배추밭이 넒다. 40만 평이다. 400평도 4만 평도 아니고 40만 평이 해발 1250m 고산에 펼쳐져 있다. 산꼭대기의 높이는 1303m다. 산으로 운무가 올라오면 천지사방이 반짝이는 잿빛 장막 속에 숨는다. 장막 위로는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돌아간다. 산 아래 고개에 빗물이 떨어져 북으로 흐르면 한강, 동으로는 오십천, 남으로 흐르면 낙동강과 만난다. 고개 이름은 삼수령이다. 주변에는 자작나무 숲이 하얗다. 그 거대한 풍경 속에 집이 한 채 있다. 농부이자 철학자요 화가인 이정만과 한 살 아래 아내 최진영, 딸 곤지(12)와 아들 바우(10)가 사는 집이다. 가족은 매봉산에 사는 유일한 주민이다. 해마다 인구가 빠져나가는 이 작은 도시에 이정만은 귀향을 감행했다. 그 도시, 그 사내 이야기다.
광산촌 태백과 막걸리집 정병운 낙동강과 한강 발원지가 태백에 있다. 한강이 시작하는 샘물 이름은 검용소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낙동강 발원지 황지黃池는 비현실적으로 맑다. 거대 하천 발원지를 소유한 도시지만, 태백은 삼척시에 속해 있었다. 태백은 1981년에야 황지읍과 장성읍이 떨어져 나와 시로 독립했다. 매봉산 아래 삼수령은 피재라고도 했다. 곤궁하던 옛날, 삼척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인 황지를 찾아 넘었다고 해서 피재다. 전설은 일제강점기 이후 태백에서 석탄이 발견되면서 현실화됐다. "지나가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는" 석탄 부자의 시대가 온 것이다. 1960년대 대한민국이 성장을 시작하면서 태백은 자본주의적인 이상향이 되었다. 목숨을 걸었으되, 자식새끼들 다 키우고 큰돈도 거머쥐던 그 검은 시대가 태백을 관통했다. 피재에서 갈라진 세 줄기 강물은 1960년대 이후 온통 검디검었다. 도심을 흐르는 골지천도 검었고 태백을 빠져나가는 강물도 모두 검었다. 태백이라는 도시를 잉태했던 석탄산업이 만든 풍경이었다. 황지동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정병운(53)은 기억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집에서 막걸리 직매소를 했다. 똥 푸는 차와 똑같이 생긴 막걸리 차가 큰 호스로 막걸리를 부어 놓으면 짐자전거에 막걸리 통을 싣고 술집과 식당으로 배달했다. 막걸리 상했나 본다는 핑계로 한두 잔씩 먹는 재미로 친구들도 신나게 같이 다녔다." 그 막걸리, 광부들이 다 먹었다. 그 돈으로 병운네 집이 먹고살았고, 병운도 제대하고서 1년동안 광부로 일했다. 술집, 식당, 살림살이, 여행, 사랑, 이별, 어떤 방식으로든 태백의 삶은 석탄과 관계가 깊었다. 대신 아무도 신비한 샘물 검용소와 황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구 하나 숨긴 적 없지만, 근원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에 막장으로 향하는 남정네들 발걸음은 너무 바빴다.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정책과 함께 잿빛 이상향의 시대가 끝났다. 탄광은 모두 문을 닫았다. 부귀영화는 가뭄 때 갈라진 논바닥처럼 사라졌다. 10만 5000명이 넘던 인구는 순식간에 5만 명으로 급감했다.
농부 이정만, 고원高原에서 깨닫다. 2005년, 쇠락할 대로 쇠락한 그 도시에 이정만이 돌아왔다. 원래 집은 태백 화전동에 있었다. 이정만이 말했다. "울 아버지가 절대로 땅속에서는 죽지 않겠다고 목재소를 차렸다. 그러고 내가 열두 살 때 서울로 떠났다." 이정만은 사춘기 동안 김소월을 읽었고 그림을 그렸다. 마흔이 될 때까지 이정만은 서울이며 포천에서 사업을 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았고 책 읽는 게 좋아 산천을 떠돌며 여행을 했다. 이유는 몰랐지만,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대신 서울 인사동 화랑에서 화가 김점선의 작품을 보고선 "열 달 할부로 살 테니 돈 다 치를 때까지는 다른 데 팔지 말라"고 큰소리치며 살았다.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사내에게 질려, 화랑은 "장사 방해하지 말고 가지고 가라"며 그림을 싸줬다. 그렇듯 근본이 도시생활과 거리가 먼 사내였다. 그러다 2004년 아내와 함께 매봉산을 찾았다가 정주를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풍광 좋고 물 좋은 곳은 많은데, 매봉산처럼 모기 없는 곳은 없더라." 부동산업자는 헛소리를 들은 줄 알았다. 이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조리 집을 팔겠다고 내놓은 사람들밖에 없었다. "정말인가." "정말이다. 나, 여기 살 작정이니 집 내놔라." 본인이야 그렇다 쳐도 아내 최진영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울 엄마가 그러더라. '억지로 서울 여자 만들어놨더니 네가 촌년이 돼서 거기까지 기어들어가겠다고?" 세월이 흘러 2015년 9월 현재 이정만은 매봉산 마을 영농회장이다. 딱 한 집 사니, 그러할 수밖에. 배추밭에 남아 있던 유일한 집주인을 설득해 집을 샀고, 이듬해에 두 아이를 끌고서 산으로 들어왔다. 마구간을 고쳐서 거실로, 창고를 고쳐서 부엌으로 만들고, 남들 하듯 텃밭에 배추를 심었다. 여름 한 철이야 그림 같은 풍경에 날씨까지 선선하지만, 겨울에는 영하 20도요 물 구하기도 힘든 고산이다. 지금도 설거지물, 세숫물, 빨랫물 모두 하루 일곱 바가지로 해결해야 한다. 눈이 쏟아지면 집 앞 돌배나무까지 100m 눈 치우는 데 3시간이 걸린다. 한동안 아내 최진영은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내가 첫사랑이 실패해서 너랑 만났으니 행복한 줄 알라"고 큰소리치는 남편이 기가 막혔지만, 어찌 하겠는가. 살아낼 수밖에. 첫 해 농사, 완전히 망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다음 해에 두 번째 추수를 했더니 마을 노인이 말했다. "팔 거 아니지?" 또 망했다. "내가, 머리만 쓸 줄 알았지 농사에 관해서는 불구자였던 거다. 그때 알았다. 내가 재능만 믿고 최선을 다했다고 깝죽대봤자, 우리 위에는 '하늘'이라는 섭리가 있음을." 그림이나 그리며 살려고 들어왔다가 농부가 되었고, 농부는 그 와중에 철학자로 변해갔다. 폭설이 내린 아침 문을 열면 건너편 설산에 나목裸木이 보였다. 눈밭 위에서도 나목이 또렷하게 보였다. "흰 눈 속 흰 나무들.... 그걸 어떻게 표현할까. 도시에서 못 본 풍경이 집 앞에 있었다." 섭리를 의식하며 농사를 짓고, 낯선 풍경에서 대장엄을 찾아 그림을 그리다보니 또 깨달았다. "능력?" 견디는 게 바로 힘이더라. 호랑이가 사람 됐나? 곰이 됐지. 곰이 능력자다. 남이랑 비교 않고 스스로 견뎌야 능력이 생긴다. 때를 기다리며 견뎌야 한다. 뱀이 때를 무시하고 지 멋대로 승천하려다가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는 거다. 매봉산에서 배웠다." 적응이 되고 나니 행복이 찾아왔다. 아내 최진영도, 딸 곤지와 아들 바우도, 이정만이 말했다. "토끼는 토끼답게 거북이는 거북이답게 살아야지, 세상에 토끼와 거북이가 어떻게 경주를 하나. 설정 자체가 모순이다. 우리는 매봉산에서 우리답게 산다. 배추를 보니 그렇더라. 돌을 다 골라내면 배추가 죽는다. 돌이 있어야 고산지대에 이슬이 맺히고 그걸 배추가 먹고 산다. 막말로, 그냥 놔둬도 잘 사는 생명체들이다. 때를 기다리고 하늘을 기다리면 되는데, 그걸 모르고 사십년을 살았다. "힘들었던 지난 가뭄 때, 이정만은 배추밭에 물을 대지 않았다. 배추가 말라죽지 않을 정도로 물맛만 보여줬다. 몇 주 늦긴 했지만, 배추는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예년과 똑같이 잘 자랐다. 이정만이 사는 매봉산은 바람의 언덕이라 불린다. 태백시와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풍력발전기 열일곱 대가 능선에서 돈다. 푸른 배추밭 40만 평과 거인처럼 버티고 선 풍차는 봄부터 가을까지 관광객을 부른다. 능선에서 보면 배추밭 한구석에 오렌지색 지붕이 보인다. 철학자 가족이 사는 집이다. 겨울이면 철학자의 언덕은 은빛 적막에 싸인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정만은 배추를 선물하고, 철학을 선물하고, 때로는 잠자리도 선물한다. 그리고 잊지 않는다. "비교하지 말고, 스스로 행복하자"고. 딱 한 집 사는 매봉산 바람의 언덕 풍경이다.
여행의 품격 -박종인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