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13~22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의 신앙
지난 앞글에서 사람과 사람의 혼인이 아닌, 영적인 혼인, 즉 예수와 나의 영적으로 하나 되는 혼인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예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와 영적 한 몸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 그 혼례에 동참해야 함을 구원이라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이어진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신앙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나타나는 당시 유대교인들의 신앙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구약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회당을 중심으로 한 열심의 신앙이었으나, 예수의 눈에는 말씀의 본질을 벗어난 유대교의 기초를 둔 종교성을 가진 열심으로 위험한 신앙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바르게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신앙도 그럴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신앙은 오늘날처럼 회당, 즉 교회 중심의 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신앙의 나타남은 유월절 절기 지킴에 있습니다. 절기 지킴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성탄절 이상이며, 부활절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이 자기네 삶의 규범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경스럽게 대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더러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 삶이 그네들의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모이게 되어 있었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소나 양, 비둘기 등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인들 개중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 의해서 소나 양을 끌고 오기가 어려운 사람도 있었고, 이들의 이런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서 성전 안에 이방인의 뜰 같은 데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팔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유월절 기간 중에 성전에 오는 사람은 반드시 의무적으로 성전 세 반 세겔을 내야 하는데, 이러한 세금의 납부와 징수에 따르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돈 바꾸어 주는 환전소를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런 큰 절기에, 그것도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신앙을 나타내는 기간에, 예수의 행동이 놀라움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예수가 성전에 들어와서는 그들의 상을 모두 뒤집어엎고, 성전에서 다 내어 쫓았다는 것에는 저들의 신앙에 뭔가 잘못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2:17절]은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한 유월절 절기를 말씀에 근거해서 지키는 저들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환전소를 만들고 소와 양을 파는 무리를 들여 놓았다는 것이 문제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찾아오는 사람의 집이 아무리 멀더라도 유월절에 성전에 나아오려면 미리미리 양을 준비하고 돈을 준비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가 왜 유대교인들의 이런 행태들을 뒤집어엎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슨 이유로 이들을 모두 뒤집어엎은 것일까요?
우리가 예민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부분은, 먼저 예수의 성전 관부터 살펴야 합니다. 예수는 한 번도 이 지상에 “벽돌로 만들어 놓은 건물”을 ‘성전’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나타나 있는 사실이지만 [예수에게 있어 성전]은 건물이 아닌, 자신의 몸이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몸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사십육 년 동안 지은 그 건물이 저들에게는 분명한 성전이었지만 예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감안 하고 예수의 행동을 본다면, 예수가 ‘성전’을 청소했다는 말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앙에 대한 관심도 살펴보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전(교회를 중심 한)에서 경건한 삶을 살 것인가에 집중하지만(이기적인 종교인의 모습이 나타남), 사실은 “성전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2:19-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헐어버려야 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에게 있어 성전, 곧 ‘내 아버지의 집’은 그 벽돌 성전일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산다는 것을 근거로 했을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 하나님의 집은 예수 자신의 몸,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몸인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 사람들을 일러 하나님의 집이요 신성이 거하는 전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작 소제 되고 수리되어야 하는 것은 사십육 년 동안 지어진 벽돌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의 몸이며, 교회 중심의 열심을 근거한 종교 이기적인 그 생각이 아닐까요?
본문에서 예수가 유월절에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것은, 신앙이 습관화된 그네들의 경건치 않은 삶을 꾸짖는 것이 아니고, 그 벽돌집을 성전으로 생각하고, 거기 몰려들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유월절을 잘 지키는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유월절의 기원과 의미는 유대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출12:11~14)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 로라. 내가 애굽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유월이라는 말의 의미는 ‘넘어가다, 건너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무엇을 넘어갔다는 말인가요? 여기에 유월절의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즉, 유월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문설주에 발린 양의 피를 보고 유대인들을 넘어간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즉 유대인의 유월이 아니라 여호와의 유월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의 열심은 이 말씀에 근거한 신앙이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유월이란 여호와의 유월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결과적인 사건일 뿐,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넘어간 사건(반면에 애굽인 들의 집은 하나님이 넘어가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장자는 위로 바로의 아들로부터 아래로는 각종 짐승의 초태생까지 모조리 죽는다)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게(유월)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 예수의 십자가를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피흘림의 은혜를 말하면서 내가 내 건물교회에서 열심을 다하는 것을 성경 적인 믿음의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절기 지키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유월”에 초점을 모은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유월보다는 자기들의 유월에 더 관심을 가졌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는 과정입니다.
원인보다는 결과에, 감추어진 세계보다는 나타난 세계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성경의 믿음이란 인간들이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유월절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월절의 주인이라면 인간으로서는 아무런 할 일이 없습니다. 오직 가나안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유일하게 할 일입니다.
여호와의 유월로 말미암아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되면,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고 가나안을 향해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여호와의 유월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나 양, 혹은 비둘기 같은 예물도 필요 없으며, 성전 세나 헌금 따위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 애굽에서 내보내기 위해 무슨 일을 하셨나를 두 눈 크게 뜨고 바라봄이며, 그래서 애굽에 대한 하등의 미련이나 일말의 기대조차 팽개치고 가나안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본문은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과 출애굽기를 대조해 보면, 유월절의 주인공이 바뀌어 있습니다.
(출 12:11)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요 2:1)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언제 누구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여호와의 유월절이 유대인의 유월절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즉 유대인의 유월절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삼켜버린 셈입니다.
예수가 소위 성전이라는 데 들어가서 모든 상들을 뒤집어엎은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세의 잘못 때문도 아니고, 그들의 열심의 부족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유월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유대인의 유월이라는 종교적 열심의 행위만 남아 있는 유대교가 역겨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전, 그 옛날 애굽을 빠져나오던 날 같은 생사를 넘나드는 심각함이 없는 유월절,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상징이 빠져버린 율법, 오로지 인간적인 열심과 세상 적인 윤리로 전락해버린 하나님의 말씀.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하나님께 감사요, 경배요, 찬양이니,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어리석음의 굴레를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가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내쫓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은 것은, 자신들의 열심의 신앙으로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그 썩어빠진 생각을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소를 예물로 드리고, 헌금을 바치고, 일 년에 몇 차례 절기를 지키는 열심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열심만 있으면 가능한 것들입니다.
성경의 믿음이란 인간의 열심을 말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서 인간의 열심만 살아 번득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에 생각할 것은 성경을 보면서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나 보다는,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기독교인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나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닌지 뒤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유대교는 여호와의 유월절을 유대인의 유월절로 바꾼 잘못밖에 없지만, 기독교는 눈 씻고 찾아봐도 그 어디에서도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목을 매고 우리의 축제일(?)로 즐기고 있으니……
그것도 예수의 성탄이고, 예수의 부활이면, 오죽 좋을까 마는 오늘날의 성탄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장사꾼들의 성탄절이 되어 버린지 오래고, 부활절 역시 이 땅의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는 절기에 불과할 뿐이니 말입니다.
지금 예수의 눈에 비친 유대교는 하나님이 그 주인공의 자리를 물러난 지 이미 오래였으며, 오직 그네들의 열심만이 그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유월절 같은 절기가 돌아오면 예루살렘 성전에는 그 열심과 충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인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한편에서는 그들의 그 열심과 충성을 빌미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열심을 내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죽이고 있었으며,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유월절이 유대인의 유월절로 변하게 된 근본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주의 전을 사모하는 유대인들의 열심.
유월절이 되어 경향각지의 성인 남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것도 사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그들의 열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비록 성전 안이지만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장소를 만들고 돈 바꾸는 환전소를 설치한 것도 따지고 보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그들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데, 그의 핏값으로 넘어간 건너간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회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어 놓고 자기 열심을 내고 있다면...
이 땅에 몇천몇만 명이 한자리에 앉아 예배드릴 수 있는 대형 성전이 하나 둘이 아닌데, 과연 이것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신자들의 열심’ 없이도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 모습을 본 재림의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일이면 성전의 강단을 치장하는 대형 꽃다발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신자들의 열심이요, 그 성전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자 전도에 힘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그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신자들의 교회를 중심한 열심이 예수의 구원의 길(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집어 삼켰다는 뜻이 아닌지요....
자기 열심을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열심인 그리스도를 죽여 버렸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이 예수의 십자가야 말로 인간의 열심, 그것도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하나님을 죽이고 하나님의 전을 삼켜버린 대표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지적이 이처럼 분명함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열심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와 양을 바치고, 주의 전을 건축하기 위한 헌금을 바치고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 모임에 참가하고, 여의도 광장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새벽잠을 멀리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금식하고, 전도하고, 심방하고, 철야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은 늘 교회 일 때문에 분주하고, 그리스도는 늘 자기 때문에 바쁜 신자의 주변에서 외롭기만 할 뿐입니다.
기독교는 그가 생성된 이래로 지금껏 그래왔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무리 이런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심을 버리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삼스러운 말도 아니지만 정말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심과 그들의 능력을 좋아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만들고, 성전을 짓고, 끼리끼리 어울려서 서로서로 영광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기독교 가운데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는 어디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자리는 또 어디인가요?
과연 오늘날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목수의 아들로 이 땅을 다시 방문하시면, 그 ‘인자(人子)’를 위하여 자기네 자리를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예수는 이 땅의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버릴 때까지, 두 번 죽고 싶지 않아서 이 땅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말을 그런 식으로만 볼 수 있느냐는 분들을 위하여, 이 말의 출전인 시편 69편을 간단히 살펴보면,
신약에 인용된 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항상 그 말씀이 인용된 본문의 흐름을 같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논리학에서 말하는 ‘강조의 오류’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 69:7 ~ 9)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客)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外人)이 되었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섬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이 시는 다윗의 시인데, 이 시편의 흐름 가운데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하는 본문의 흐름은 다윗이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훼방 받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신앙이 그의 형제들에게 거부되고 있으며,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곧 주를 훼방하는 그 훼방을 받을 수밖에 없고, 또한 주의 전을 위하는 사람들의 열심에 삼키움 당할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의 형제였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방인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불신자라는 딱지를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주의 전을 사모하지 않으며, 결코 유대인의 유월절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의 전은 곧 우리의 몸인데 우리가 그것을 왜 ‘사모’해야 하는가요? 사모한다는 것 자체가 주의 전과 우리 몸이 하나가 아닌 별개의 개체라는 말입니다.
오직 할 일이 있다면 주의 전인 나의 몸에 쓸데없는 것들이 찾아들지 않도록 ‘그리스도’만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킬 수 없으며, 또한 자연히 그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고.”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결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