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과 문명) 7. 독감이 어떻게 전쟁의 승패를 결정했을까?
인간은 지구 생태계에서 어떤 존재일까? 절대강자일까? 매일 뉴스를 채우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이제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전쟁을 하지 않는 무소불위(無所不爲), 그야말로 생태계 사슬의 최상위층을 차지한 것인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비록 인류가 많은 동식물을 멸종시키며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지만, 아직 우리를 너무나 손쉽게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일 수 있는 생물체가 남아 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미생물들이다. 과연 미생물과의 전쟁에서 우리는 영원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미생물이 결국은 우리 위에 군림할 것인가? 그 실마리를 미생물과 인류가 겪어 온 질곡(桎梏)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 천종식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
▣ 보랏빛 죽음
제1차 세계대전은 중세부터 영광, 존경, 희생이라는 후광으로 전쟁을 뒤덮었던 기사도 정신의 이상을 소멸시키고 말았다. 세계 최초로 실제 산업화를 이용한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투는 정의로운 충돌이 아니라 학살의 아수라장임이 드러났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효과적인 대량 학살 기계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시작했다. 탱크, 길게 늘어선 대포, 기관총, 공중 폭격, 잠수함 그리고 독가스. 이 전투의 특성인 끔찍한 참호전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군인들이 몇 피트의 땅을 얻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 수십만 명 이상은 그것을 되찾기 위해 죽었다. 이 전쟁은 ‘대전’과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 등 여러 이름을 갖게 되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좋아하는 표현은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 평화를 지키는 전쟁’ 이었다.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즈는 그것을 ‘소시지 기계’ 라고 불렀는데, 왜냐면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잡아먹고, 시체를 대량 생산해 내고, 적절한 자리를 단단히 비틀어 놓기 때문” 이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1억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 중 9백만 명은 전장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몇 달 동안 인간이 고안해 낸 그 어떤 것보다 더 파괴력 있는 새로운 살인마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스페인 독감으로서 20세기의 가장 엄청난 유행병이었다. 보통 감기처럼,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열이 나고 아프게 된다. 그러나 이 계통의 독감에 감염된 많은 사람들의 증상은 회복단계로 접어들지 않고 폐를 피 거품으로 채우는 치명적인 폐렴으로 발전되었다. 몸의 조직에서 산소가 빠져나가서, 헐떡거리는 환자의 피부는 죽기 전에 병색이 짙은 보랏빛이 된다.
스페인 독감에는 다른 치명적인 특성이 있다. 대부분의 유행성 감기는 매우 어린 아이나 노인을 죽인다. 그러나 이 질병은 유럽의 전장에서 만나기 쉬운 사람들, 즉 스물에서 서른 살 정도의 사람들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10만여 명의 미국 군인들 중에서, 4만 3천 명은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다. 전 미국의 독감 사망률은 50만 명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사망자수는 200만에서 1억 명에 이르렀다. 인도에서만 200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알래스카와 태평양의 고립된 토착민들 중 일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보랏빛 죽음’은 상당수의 인간들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적인 사건을 만들어냈다. 그 유행병은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투들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했고 베르사유 평화조약을 성립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병은 정부가 살아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죽은 사람들을 묻도록 준비할 가능성마저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것은 오늘날의 세계 독감 감시 체계와 매년 가을에 시행되는 독감 예방 주사를 만드는데 촉매역할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페인 독감의 특질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로 인해 의학계에 혁명을 일으킨 전혀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것이 발견되었다. 바로 최초의 항생물질이다.
▣ 피 묻은 체스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오늘날 우리가 떠안고 있는 많은 갈등들을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14년 8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유럽은 낡은 질서의 잡동사니로서, 군주제와 제국주의가 흔들거리고 정략결혼으로 점철되고 비밀스런 조약으로 서로 동맹을 맺는 상황이었다. 전쟁은 1918년 11월 휴전으로 끝이 났다. 극적인 ‘열한 번째 달의 열한 번째 날의 열한 번째 시각’ 이었다. 차르의 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되었고,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역이 몇 개 합쳐서 이라크가 탄생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영국령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탄생과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문제들로 가는 길이 열렸다. 모든 재앙의 제공자로 여겨진 독일 제국은 패배로 굴욕을 당하고 식민지들을 빼앗기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되었다.
▣ 스페인 숙녀
제1차 세계대전은 질병을 자각한 전쟁이었다. 겨우 9년 전에 러일전쟁(파스퇴르와 코흐의 발견 이후 처음 일어난 주요 충돌)은 군대에서 적절한 위생을 지키면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전투로 인한 사망보다 낮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었다. 과거의 거의 모든 군사적 충돌에서 전투보다 감염성 질병으로 인해 더 많은 군인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를 염두에 두고, 제1차 세계대전의 양편 군사 지도자들은 군대에 유행병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례없는 경계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특히 벼룩과 인간 몸의 이가 옮기는 박테리아 질병인 발진티푸스를 경계했다. 그것은 규칙적으로 목용하거나 옷을 갈아입을 수 없는 환경에서 번식한다. 전쟁 초기에, 양편 군대는 특히 최전선에서 귀환하는 병사들의 이를 세심하게 제거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에서 위생 관리에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1914년에만 발진티푸스 유행병은 2백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전쟁이 끝난 뒤, 발진티푸스는 이제 막 생겨난 소비에트연방으로 퍼졌고 그곳에서 4년 동안 1억 명의 사망자를 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회주의가 이를 박멸하든지 이가 사회주의를 박멸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결국 사회주의가 이겼다.) 그러나 발진티푸스보다 더 나쁜 것은 독감이었다. 어떤 군대도 이 ‘스페인 숙녀’ 만큼 살인적인 질병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 스페인 신문에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왜일까? 스페인은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군대가 언론을 감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병에 걸렸지만 미국을 포함해서 전쟁 중인 국가들은, 적에게 유리한 것이면 어떤 소식이라도 통제하고 있었다.
최초로 기록된 스페인 독감은 1918년 3월 미국 갠자스의 라일리 요새에서 발생된 것이다. 유행성 독감이 처음 번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통증, 열, 오한 그리고 붉은 얼굴을 유발시키는 사흘간의 가벼운 증상과 일주일간의 숙취 정도였다. 전쟁 지역으로 퍼지자 의사들은 이 신생 독감을 ‘즐거운 질병’ 이라고 불렀는데(모두 아팠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으므로), 군인들은 그렇게 고마워하지는 않았다. 나라마다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렀는데, 프랑스는 ‘불 인플루엔자’로 괴로워했다. 영국은 ‘사흘간의 열’ 때문에 고통 받았다. 이탈리아는 ‘모레파리 열’ 때문에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은 ‘때려눕히는 열’로 쓰러졌다.
증상이 순해 보였지만 최초의 이 물결은 결정적인 순간에 독일에 도착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독일인들이 ‘번개 같은 독감’ 이라고 부르는 질병으로 적들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자,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그것이 전쟁에 이점을 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독일 군인들이 같은 질병으로 쓰러지기 시작하자, 루덴도르프 장군은 7월 ‘평화 공세’의 실패를 독감 탓으로 돌렸다. 이 결정적인 전투는 사실상 승리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였다. 나중에 미국 군인들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는 동맹군의 승리가 확실했다. 충돌은 1918년 몇 달간 더욱 거칠어졌지만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 마스크를 착용하라
1918년에 이르러, 그 유행병의 유순한 최초의 물결은 세계에서 사라져갔다. 8월에 질병의 두 번째 치명적인 물결이 시에라리온, 프랑스 그리고 메사추세츠의 군인들 사이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그것은 급속히 번져나갔다. 미국에서 수천 명이 독감 때문에 매주 죽어가기 시작했지만 미국인들은 질병보다는 전쟁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병을 전염시키는 행동을 많이 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군인들이 기지에서 기지로 옮겨 다녔다. 수십만 명은 전쟁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유대출보증금 퍼레이드에 참가하려고 몰려들었다. 9월까지 미국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는 감염되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유행병은 한 달 정도 지속되었다. 어떤 도시들에서는 질병이 두세 차례 일어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충분히 경고했다. 웨스트 코스트에서 유행병은 정점을 지나고 그 후 한 달 동안 동해안에 남아있었다. 공무원들은 필라델피아 같은 준비 되지 못한 도시들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했다. 의료진 등 일손이 부족한 그곳의 병원들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시의 시체 공시소(원래 36명 수용 가능)도 네 겹으로 쌓인 부패된 시신들 수백 구로 인해 초만원이었다. 유족들은 죽은 가족들의 무덤을 직접 파야 했고 장례식장은 요금을 두 배로 받았다. 피치 못할 상황임을 감지하고 샌프란시스코는 여분의 관을 주문하고 공동묘지를 준비했다. 감염을 늦추기 위해서 모든 시민들은 아기들마저도 공공장소에서는 항상 거즈로 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마스크 법령’이 발표되었다. 주의사항을 상기시켜 주는 시도 있었다. “법에 순종하라. 그리고 거즈를 착용하라, 턱을 조심하라. 전염의 손아귀로부터.”
마스크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상인들은 몇 가지 스타일을 만들었다. 고전적인 병원 스타일 마스크(삼각건처럼 접혀진 반 야드 크기의 거즈), 착용한 사람을 돼지처럼 보이게 만드는 좀 더 편안하게 주둥이가 확장된 형태, 또는 턱 아래 늘어뜨리는 베일 형태. 결국 모두 쓸모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에서, 마스크는 필요 없었다. 그들은 식사를 위해서 마스크를 벗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독감 바이러스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서 아무도 조악하게 짜인 거즈의 구멍 하나 속으로 수백만 개의 작은 병원체가 미끄러져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도시들처럼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같은 사망률이 발생했다. 시 당국에서는 대처할 수가 없었다. 3만 명의 마스크를 쓴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휴전을 축하하기 위해 11월 11일 시청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깃발을 흔들어대는 장면은 정말 초현실적인 광경이었을 것이다.
▣ 패자와 승자
독감으로 인한 반향은 상당했다. 독감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상은 ‘뇌염’ 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환자가 가끔의 혼수상태를 동반하는 쉴 새 없는 잠에 빠지게 하는 병이었다. 1928년 병이 사라질 때까지 약 5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로 인해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들은 주변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움직일 수는 없게 되었다.
베르사유에서 열린 전후 평화 협상 중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독감에 결렸다. 당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였다. 미국 군대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상태였다. 의제를 밀어붙여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윌슨이었다. 그는 정말로 미래의 세계대전을 예방할 계획인 14조항을 밀어붙이기 위해 회담에 왔다. 그러나 윌슨이 병에 걸려 더 이상 협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다른 동맹국들은 독일에 감당할 수 없는 배상금을 강요하고 자신들을 위한 영토를 얻어냈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은 윌슨이 희망했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청사진이 아니었다. 그곳은 복수이자 ‘합법적 강탈’ 이었다. 상황은 더 악화되어, 미국 의회는 평화를 보장하는 국가 간의 동맹이라는 윌슨의 원대한 계획을 거부했다. 전쟁 중에 실업과 극도의 인플레이션이 독일 경제를 마비시켜서,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의 증오로 가득 찬 환상에라도 독일 사람들은 귀를 기울일 상황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아미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 발견! 페니실린
독감(influenza)은 영향(influence)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이다. 그 이름은 별과 행성이 건강을 포함해 인간의 성격과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성학 사상에서 나왔을 것이다. 독감은 처음에 새에게서 발견되어 진화된 고대 질병이다. 오늘날 바이러스의 주요 숙주는 오리, 거위 그리고 이동하면서 바이러스를 세계에 퍼뜨리는 갈매기와 같은 야생 물새 무리 속에 있다. 물새들은 먹이를 먹으면서 바이러스를 섭취하고 배설물과 함께 밖으로 내보낸다. 바이러스는 새들을 감염시키지는 않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로 지내왔을 것이다. 그러나 닭과 같은 가축 조류들은 바이러스에 잘 적응되어 있지 않다. 바이러스는 그것들을 죽게 한다. 닭이 한 번 감염되면, 그 병은 가끔씩은 무서울 정도로 무리 속으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다. 바이러스가 조류를 병들게 하면, 그들의 면역 체계는 병을 극복하기 위해 항체를 만들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압박 속에서 독감 바이러스는 변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각 세대는 지난 세대의 바이러스와 조금씩 달라진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바이러스는 일부 숙주들의 면역 체계를 무너뜨리는데 이것이 지역 유행병을 유발하게 된다. 수십 년마다, 독감 바이러스는 거의 모든 숙주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형태로 바뀐다. 이것으로 인해 세계적 범유행이 생겨난다. 스페인 독감도 그런 경우였다.
독감 바이러스는 어떻게 우리를 감염시키게 되었을까? 동물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많은 병원체들에게 숙주를 버꿀 기회를 준 셈이었다. 과거 어느 시점에, 독감 바이러스는 직접적으로 혹은 매개 숙주를 통해 조류에서 사람에게로 뛰어 들어왔다. 돼지들은 가장 가능성 있는 ‘혼합 용기’ 로서, 조류바이러스에 민감하다. 조류바이러스의 내부 환경은 독감 기생충을 불안정하게 만들어서 우리를 감염시킬 수 있도록 변화시킨다. 사람들, 가축 조류 그리고 돼지들이 가까이 사는 장소들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시골이다. 주요 독감 범유행의 대부분이 거기에서 시작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조차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깊은 참호를 파도록 수천 명의 중국 노동자들이 유럽으로 유입되어 왔는데 그들이 질병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스페인 독감이 수그러든 후에, 세계적 독감 감시망이 또 다른 범유행의 재발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감시망에 속한 과학자들은 이제 매년 독감 발발의 특질을 평가하고 이 정보를 제약 회사들에게 제공해서 그들이 효력 있는 백신을 개발할 수 있게 도와준다. 중국과 아시아는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몇 가지 치명적인 독감 유행병이 이런 식으로 진압되었는데 1957년 아시아 독감과 1968년 홍콩 독감 등이다. 1991년 홍콩 조류 독감과 2004년 아시아 조류 독감은 모두 사람에게 전염된 것인데 질병을 보유하고 있을지 모르는 닭 무리를 도살함으로써 그쳤다. 2004년 캐나다에서는 프레이저 계곡에서만 1천 9백만 마리의 조류들이 도살되었다. 2001년 이후, 미국의 질병통제센터는 국제 신흥 감염 퇴치 프로그램의 확립으로 독감 감시에 발전을 이루었다. 2003년, 태국에 있는 그 프로그램의 사무실은 지금까지 본적 없는 독감 종류의 범유행을 세상에 경고 했는데 바로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SARS(사스)이다. 그 범유행은 전 세계의 과학자들 사이의 유례없는 협력으로 부분 진압되었는데 이는 독감 감시망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런 협력은 미래에 가장 필수적일 것이다. 박식한 과학자들은 독감 바이러스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다른 치명적인 스페인 독감류가 발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임원들은 그런 일이 발생하면 세계인구의 10억 정도가 병으로 쓰러질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효과적인 대응이 없으면 18억 정도가 죽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18년과는 달리 우리는 이런 범유행이 다가올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다.
스페인 독감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은 면역학의 여파로서 페니실린의 발견이다. 독감은 1933년까지는 명확하게 바이러스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 전에 과학자들은 박테리아가 독감을 발생시킨다는 저명한 독일 생물학자 리처드 프리드리히 요한네스 파이퍼의 의견을 수긍하고 있었다. 1928년, 스코틀랜드 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스페인 독감 박테리아의 원인을 찾는 중이었다. 플레밍이 휴가를 간 사이 옆 실험실의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 포자가 포도상 구균으로 이미 오염되어 있었던 그의 페트리 접시로 날아왔다. 플레밍은 그것이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하는 독성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세계 최초의 항생물질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그는 박테리아를 죽일 독성 물질을 ‘페니실린’ 이라고 불렀다.
플레밍은 그의 발견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지 않았지만 10년 후에 다른 두 명의 영국 의사들인 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은 페니실린에 의료적 잠재력이 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부상당한 군인들의 치료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약이 필요해지자, 이런 실험들은 가속화되었다. 당시 군인들은 팔다리를 잃고 심지어 곪아서 탈저(혹은 괴저, 상처나 감염으로 인해 혈액 공급이 오랫동안 중단되어 조직이 부분적으로 죽은 상태)로 발전된 작은 상처들 때문에 죽기까지 했다.
바이러스에는 쓸모없는 페니실린이 거의 기적적인 힘으로 박테리아 감염을 저지했다. 이전 전쟁들에서 감염으로 사망했던 군인들은 이제 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연합군을 적군을 뛰어넘는 중요한 강점을 제공해 주었다. 페니실린 생산은 미국으로 옮겨졌고 생산 규모는 이전의 미생물 배양용 페트리 접시와 실험실 접시에서 이제 양조용 큰 통으로 백만 배가량 무섭게 확장되었다. 페니실리움의 계통 역시 플레밍의 페트리 접시에 있는 낮은 산출량의 균류에서 일리노이 주의 피오리아 시에 있는 보다 생산적인 곰팡내 나는 멜론 계통으로 변화했다(그 종의 돌연변이인 페니실리움 크리소제눔은 오늘날에도 쓰인다.). 1945년에 이르면 미국은 한 달에 25만 명을 치료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생산하게 되었다. 항생제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브린 바너드(지음), 김율희(옮김).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들. 다른(darun).
에이즈, 조류독감,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것은 지금도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감염성 질병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교만을 버리고, 더욱더 진화하고 있는 이들과의 결코 끝나지 않는 경주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 혹은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위생 수칙을 생활화하고, 청정 임산물로 면역력을 키우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