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입니다.)
인천 Sing Along-Y (인천싱어롱와이) - 오래된 노래
한국전쟁이 끝나고 국민은 가난한 살림에 힘들어하면서도,
과거의 상처를 잊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아가서 나라의 부흥을 위해
모두 일터로 나가 열심히 일했던 60년대.
일터에서 흐르는 라디오의 노래들은 늘 우울한 가사로 된 전통가요가 흘렀고,
사람들은 그런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하루의 피로를 젓가락을 두들기며
막걸리에 취해 보내는 날이 많았으며,
젊은이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팝송을 부르며 히피문화까지 따라갔습니다.
그 시대 몇 몇 뜻이 있는 사람들이 우울한 트로트나 외국의 팝송보다
밝고 건전한 노래를 젊은이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천의 YMCA 주관으로
당시 율목동에 있는 공보관에서 매주 목요일이면
다 함께 모여 노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이름이 ‘Sing Along Y’.
목요일이면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 그리고 대학생들이 모여들었죠.
처음 그 모임을 시작한 분이 지금도 인천의 볼음도에서 살고 계시는
‘전석환’ 선생님입니다.
그분은 직접 밝고 고운 노래를 작곡하기도 하고,
외국의 노래나 민요들을 개사하여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을 한 ‘건전 노래 부르기’ 모임은 당시 KBS TV 방송에서도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전석환 선생님께서 전국의 노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근로자들과 함께 모여 노래를 하는 ‘정든 그 노래’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매주 일요일 아침에 방송되었습니다.
인천의 공보관에서 시작한 노래 부르기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70년 중학교 3학년 시절 동네 친구와 함께 처음 찾아간 아이는
어머니를 졸라 겨우 받아 낸 30원으로
몇 곡의 노래를 손으로 직접 그려 등사한 악보가 있는 악보집을 살 수 있었죠.
공부보다 노래가 좋아하던 아이는 거의 매주 그 모임을 빠지지 않고 나갔으며,
이후 노래를 부르는 장소가 공보관에서 내리교회 앞에
새로 지은 인천 YMCA 회관으로 옮기고,
노래를 가르치는 사람이 몇 차례 바뀌어도 아이는 변함이 없이
매주 목요일이면 찾아오는 그 시간을 사랑했습니다.
그 아이는 목소리가 조금 컸어요.
그리고 남들보다 새 노래를 빨리 배웠습니다.
그래서 매번 새 노래를 배운 후 지도자의 요청으로
금방 배운 노래를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앞에 나와
시범적으로 혼자 노래하는 기회가 많아졌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다 보니
배운 노래들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부르고 전파하기 위해 기타를 배웠습니다.
이후 아이는 청년이 되어 어느 모임에 가든지 기타를 들고 앞에 나와
다른 이들에게 밝은 노래들을 가르쳐주고 같이 불렀으며
대학시절에는 전석환 선생님이 하시던 노래를 가르치는 일을 물려 받았습니다.
때로는 많은 여직원들이 일하고 있는 부평 공단의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점심시간에 이용하여 그들에게 즐거운 노래들을 가르쳐 주고 같이 부르는 봉사를 다녔지요.
그가 찾아다닌 곳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며,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노래방이라는 것이 생긴 뒤로 그런 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손으로 그린 악보를 찾는 사람들도 사라졌고
사람들은 손뼉치며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갇힌 공간에서 모니터 앞에 모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전처럼 사람들은 다 같이 모여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현란한 색채가 가득한 화면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지요.
이제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모아온 악보를 보며 노래 친구들과 함께
모여 앉아 화음을 맞추어 가며 노래하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마찬가지로 즐거웠습니다.
2015년 어느 날.
우연히 우상처럼 생각했던 전석환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남이섬에서 통기타 50주년 기념행사에 그분을 처음 만나
싱어롱 악보의 얘기를 말씀드리고 당시에 일일이 그렸던 악보들을 보여 드리니
무척이나 반가워하시고 남이섬에서 그분이 진행하는 싱어롱 행사에 아이를 불러
같이 공동 진행을 했습니다.
현재 80대 중반이신 그분은 아직도 현역인 것 같았습니다.
오래전, 그분의 생일 모임에 초대받았을 때
어릴 때 모은 악보 일부를 액자에 넣어 선물로 드렸더니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인천의 청년문화, 음악문화 그리고 젊은이들의 정서 향상에 크게 기여한
Sing Along Y 모임의 실체는 사라졌지만 악보는 남아 있습니다.
두터운 두 개의 청색 바인더에 가득한 악보는 세월이 지나며 누렇게 변해가고
조심히 넘기지 않으면 종이라 바스라 질 것처럼 낡아 버렸습니다.
아이는 700여곡에 달하는 그 노래를 모두 알고 있다는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평생 살았으며 나이만큼이나 늙어가고 색이 변해가는 악보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아이는 그 악보와 함께 했던 지난 50년 넘은 세월이 아주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악보를 보며 그 시절의 추억을 생각하는 인천 시민들이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
아이는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고 손때가 묻은 악보를 모두 인천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악보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남의 손에 넘어갔지만,
이제는 인천 시민들의 사랑의 추억의 눈길을 받을 것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올해 기증한 물품은 내년부터 전시된다고 하네요.
내년에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까르미나님의 감동적인 음악 인생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그 소중한 책을 기증하시다니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네요.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제 보물 1호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악보를 빌려 주면 어떤 이들은 필요한 부분을 찢어가더군요.
그 뒤부터 절대 악보를 빌려 주지 않았지요.
아~까르미나님이 정든 그노래 보급현장에 있으셨다니 무척 반갑네요 저도 전석환님의 그노래를 무지 좋아했고 애시청자 였었습니다 '아름다운노래 정든그노래가 우리 마을에 메아리 쳐오면 어둡던 내마음 멀리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노래 불러봐요' 이렇게 시작하는 그노래를 젊었을적에도 지금도 늘 흥얼거리고 다녔었거든요 참반갑네요 ㅎ 그리고 소중한 그책을 인천시에 기증하셨다니 참 대단하고 잘 하셨네요 난 까르미나님이 합창만 하신줄 알았거든요 ^^
우린 같은 세대니까요...일요일 아침 TV를 켜면 전석환씨가 노동현장을 찾아가 노래를 같이 하는 프로그램을 보곤 했지요.
제게는 가장 소중한 자료지만 그냥 두면 가치를 잃어버릴 것 같아 박물관장님과 협의했더니 흔쾌히 인천 역사의 귀한 물건이라고 받아 주셨어요.
우리 시대의 귀중한 유물을 간직하고 보관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대단한 노력과 열정이십니다. 전석환 선생님은 어렸을 적 tv에서 "아름다운 노래 정든 그 노래" 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소중하고 귀한 악보 인천시 기증소식 에 존경을 표합니다.
흑백 TV 시절이지요.
처음에 인천에서 시작할 때는 전석환선생님이 하셨는데 이후 다른 이들이 이어 받다가 내가 대학생 시절에는 내가 가르치기도 했지요.
저는 1972년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종로 Ymca 건물에서 진행했던 싱어롱Y에 갔던 적이 있지요. 그때 한달에 한번 장기자랑 시간이 있었는데, 어느날 검정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용감하게 나가더니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을 용감하게 불러서 다들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대부분 포크송을 불렀는데 웬 트로트 하며 다들 의아해 했던 기억이..
1990년대 초에 마침 종로에 있는 직장에 다니느라 Sing Along Y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그 때는 이미 사양기에 접어 들었더군요. 그 날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를 배우고는
바로 곧 선운사로 혼자 여행간 기억이 있습니다.
까까머리 고딩 시절 태평양화장품 부산 지사 강당에서 전석환 선생님 지도로
건전가요 싱어롱이 있다 해서 가방 들고 하교 길에 저녁에 참석하여
TV로만 볼 수 있었던 전석환님을 직접 보고 아름다운 노래~~ 정든 그 노래가 ~~
가슴 가득 좋은 노래들을 배웠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ㅎ
한국 옛 민요 특히나 늘어지는 향토색이 좋지만 언제 그 많은 노랠 다 부르냐 하시며
경쾌 하고 맑고 건전한 고운 노래를 가슴 가득 노래 가득 불러라 하시며
교육하신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소중한 역사가 가득한 귀한 책자를 기증하신 까르미나님 께 존경을 표합니다 ~~
이 악보가 누구에게는 소중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악보 언제든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어 하며 버리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내겐 악보의 가치보다 노래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담긴 것이라 늘 내가 아끼던 물건이었죠.
그러나 지금이라도 문밖을 나가면 남에게는 가치없는 물건이 될 것 같아 기증했습니다.
@까르미나 까르미나님 동안도 잘 지내셨는지에^^
늦은 시각 사진을 둘러보다(별 생각은 없지만 ㅎ) 젤 아래 단체 싱어롱
기타 잡으신 까르미나님 앞에 나무가지에 동절기 보온겸 짚으로 둘러 싼거 같은데
둘러싼 위로 하얀 선들이 있는 게 가지 인지 아니면 구겨진 건지 알켜 주시면 합니다
옆에 계신 분의 나뭇가지 동절기 보온 짚에는 가지가 보이지 않는 비교가 되길래 그럽니다
까르미나님의 감동적이고도 귀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친구들 모여 정든 그 노래 정말 많이 부르고 좋아했었지요
그밖에도 밝고 힘찬 노래들 많이 따라 불렀네요(건전가요)
소중하게 간직 해온 귀한 책을 많은 이들을 위해 기증하셨으니
뿌듯 하시겠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악보를 두고 고민많이 했습니다.
누가 이 악보의 가치를 알아줄까 하는 고민이었죠.
악보를 박물관에서 받는다 하니 정말 뛸듯이 좋았어요.
사람이 힘들 때 그 힘든 시간 노래로 대신하는 우리 한국시대 아픔도 이제 치유가 되어 옛날 추억이 되었습니다.
노래와 음악은 힘든 때 곧 벗어날수 있다는 희망으로 변하고 그 희망이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배고픔의 아픔도 알고 풍요의 오늘도 함께 누립니다.
오늘 어느 기자가 미래의 한국을 그려 놓았더군요.
방글라데시 정도의 나라가 될거라고..
풍요만 아는 세대는 배고픈 줄 모르지요.
우리가 이런 노래를 부를때 우린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어떤 일이든 다해야만 했지요.
사람들이 헤드폰끼고 노래하는 현재의 모습은 소통이 없어
불완전한 세대가 될겁니다.
같이 합창하기를 좋아하는 유럽은 긴 세월동안 선진국의 모습이지요.
우리도 다깉이 합창하며 소통하는 시대가 다시 와야합니다.
오랫동안 까르미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소중하고 의미있는 일을 하시고 그 세월이 쌓여진 보물들을 기증하시다니 참으로 보람된 일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크게 쳐도 작겠지만 크으게 크게 박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악보를 모으던 초기에 누군기에게 빌려주었었는데 그게 돌아오지 않더군요.
다음부터 모은건 절대 내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걸 받아준 박물관장님이 고맙지요.
전석환 선생님... 그리고 기부
자랑 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그걸 보며 음악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