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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0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막
카타르에서 월드컵이 개막되었다 FJFA 랭킹 28위 인 대한민국은 H조에 편성되어 우르과이전 0대0 무승부, 가나전 2대3으로 패배, 포르투갈전 2대1 승리, 1승1무1패로 16강 까지 진출 하였으나 16강 전에서 브라질에 4대1로 패배하였다 대한민국은 역대 월드컵 총 10회 출전하여 34전 6승 9무 19패의 전적을 가지고 있다
2022년 공군 전투기 KF-16 전투기 1대 양평군 야산에 추락.
공군과 경기도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8시 5분쯤 공군 제19전투비행단 소속 KF-16C 전투기(사진) 1대가 전투초계 임무수행 도중 강원 원주 기지 서쪽 약 20㎞ 지점의 산악지역 상공에서 엔진에 이상이 발생, 조종사 1명이 비상탈출했다. 사고 전투기는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금왕리 인근 야산에 추락했다
2022년 미국 뉴욕주 17m 폭설 제설작업하다가 2명 사망
2018년 카를로스 곤 닛산자동차 회장 보수를 축소 허위신고해 검찰에 체포됨
2016년 검찰 최순실 안종범 정호성 기소하면서 현직 대통령 박근혜 헌정사상 첫 피의자 입건
2014년 손영조 씨 비전문산악인으로는 세계최초로 7대륙 최고봉 오름
2012년 한국영화 연간 관람객 사상처음 1억 돌파, 2006년 기록(9천174만 명) 갱신
2011년 나리타 前 한일축제한마당 실행위원장 별세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축제 한마당' 행사 실행위원장을 맡는 등 한일 교류에 큰 기여를 한 나리타 유타카(成田豊·82) 전 덴쓰(電通) 회장이 20일 오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철도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 경성중학교 3학년 때까지 서울에서 보낸 나리타씨는 도쿄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3년 일본 광고회사 덴쓰에 입사했다. 신문 광고를 주로 담당했던 나리타씨는 1993년 사장에 취임했으며 2001년 덴쓰를 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시키는 등 세계적인 광고회사로 키웠다.
1901년 창립한 덴쓰는 일본 1위의 광고회사로 한때 매출이 2조엔(약 30조원)이 넘는 등 세계적 광고업체로 도약했으며 그 과정에서 나리타씨가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는 2002년 회장, 2004년 그룹 회장, 2010년 명예상담역을 역임했다. 아시아 광고협회장 재임 시에는 아시아 광고협회 총회(2007년)를 제주도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실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주일 한국대사관이 2009~2010년 도쿄에서 개최한 한일축제 한마당의 일본 측 실행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는 한일 교류의 촉진을 위해 김포~하네다 직항(한일 셔틀) 개설에도 노력했다.
한일 교류 기여 공로 등이 인정돼 2009년 한국 정부의 수교훈장 광화장과 일본 정부의 훈장을 받았다.
2011년 희대의 사기범 조희팔 사망
'희대의 사기범' 조희팔의 최측근 강태용(55)씨가 도피 7년만에 중국 현지 공안에 검거돼
'조희팔 사건'은 조(58)씨 일당이 전국에 10여개의 유사수신 업체를 차리고 고수익을 낸다며 5년간 4만~5만명의 투자자를 모아 3억5000억원~4조원을 가로챈 국내 최대 규모의 다단계 사기 사건이다.
형제, 친구들을 핵심 임원으로 삼아 2004년 대구시 동구에 골반교정기와 찜질기 등 장비를 찜질방과 PC방에 빌려주는 업체를 차렸다.
조희팔은 회장 행세를 하면서 의료기기 대여업으로 낸 수익을 배당한다고 내세워 투자자를 모집했다.
그는 한 계좌에 440만원을 투자하면 매일 3만5000원씩 이자를 지급해 8개월만에 580여만원을 챙길 수 있다고 선전했다.
원금과 배당금이 꼬박꼬박 들어오자 투자자가 늘어났고, 조희팔은 부산과 경남, 서울, 인천 등지에 비슷한 회사와 센터를 만들었다. 투자한 사람들에게 수당을 주면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도록 하고, 모집한 사람 수에 따라 내부 직급도 올려줬다. 리브, 씨엔, 챌린, 아더스 등으로 회사 명칭을 바꾸고, 각 회사에 각기 다른 대표를 선임해 별개 기업처럼 움직여 단속망을 피했다.
실제로는 나중에 가입 하는 사람의 돈으로 예전 회원들에게 이자를 지급하는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던 영업이 한계에 달하면서 배당금 지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이에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내기 시작했다.
경찰은 2008년 10월 조씨를 비롯한 핵심 인물 9명을 수배했다.
그러나 조희팔은 2008년 12월초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충남 태안군 마검포항을 통해 중국으로 밀항했다.
조희팔를 추적하던 경찰은 2012년 5월 중국으로 밀항한 조희팔이 2011년 12월께 현지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후에는 '조희팔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과 검찰이 조희팔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대접받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9년 사이판, 관광지에서 총기난사 사건 발생
2009년 11월 20일(한국시간) 오전 10시 30분쯤 서태평양에 있는 미국령 사이판섬 관광지인 만세절벽(반자이절벽) 부근에서 신원 미상의 괴한이 관광객들에게 총기 10여발을 난사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현지를 관광 중이던 박모(29)씨 등 한국인 관광객 6명을 포함한 8명이 부상당했으며 괴한 본인을 포함해 5명이 사망했다. 한국인 부상자 가운데 4명은 21일 밤 한국으로 후송됐다.
이날 총기를 난사한 범인은 중국 국적의 조선족 리모(34)씨로 추정되며, 사업협상이 실패했다는 유서를 남겼다. 카나트타블라 지역의 사격장 종업원인 리씨는 AR-15 소총과 22구경 공기총, 권총, 실탄으로 무장한 채 사격장에서 총기를 한차례 난사해 4명의 사망자를 낸 후 만세절벽으로 이동해 한차례 더 총기를 난사한 후 자살했다
2008년 4조(兆)...사상 최대 '조희팔 다단계 사기' 적발
2008년 11월 20일 대구·부산·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2만5000여명의 투자자를 끌어모아 수조원대 피해를 입힌 불법다단계 업체가 적발됐다.
의료기기 대여사업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은 이 업체는 2008년 10월부터 투자자들에게 배당금을 주지 않은 채 운영자들이 종적을 감춰 운영이 마비됐으며 이로 인한 피해액이 약 4조원으로 추정됐다. 이는 2006년 발생한 ‘제이유’사건 피해 규모보다 2배 이상 큰 사상 최대의 다단계 사기 사건이었다.
대구경찰청은 회사 대표 권모(48)씨를 구속하고, 이 조직의 실질적 우두머리인 조모(51)씨 등 임직원 10명에 대해 출국금지조치를 내렸다.
이들은 2006년 10월 대구 동구 신천동에 ‘BMC’라는 회사를 차린 뒤 공기청정기나 안마기 등 건강용품을 1대당 440만원에 구입하면 이를 목욕탕이나 PC방 등에 대여해 생기는 이익을 배당금 형식으로 8개월 동안 581만원씩(수익률 32%) 나눠 준다고 유혹해 약 2년 동안 무려 2만5000여명을 끌어 모았다.
해당 회사는 투자자의 단계를 7개로 나눠놓고 다른 투자자를 모집해 올 경우 단계마다 정해진 수당을 건네는 전형적인 ‘피라미드 방식’으로 운영됐다. 대구에서는 ‘BMC’에서 ‘엘틴’, ‘벤스’, ‘씨엔’ 등으로 4차례나 회사이름을 바꿔가면서 1만5000여명으로부터 1조9000억원을 끌어 모았다.
사업이 성공하자 부산에 ㈜챌린, 인천에 ㈜리브 등의 법인을 만들어 제2, 제3의 거점으로 잡았고, 불과 2년 만에 전남·전북,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법인 15개와 지역센터 50여개를 개설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주부였으며, 1인당 적게는 500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억원까지 투자한 것으로 조사됐다.
2007년 진도씻김굿 보유자 박병천 사망
2005년 이수일 전 국가정보원 2차장 X-파일 수사 중 혐의 드러나자 자살
2002년 북한경비정, NLL(북방한계선) 침범
2001년 덴마크 총선, 70년 만에 우파승리
덴마크의 우파 야당 연합이 2001년 11월 20일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 사회민주당을 꺾고 70여년 만에 우파 정부 시대를 열었다. 포그 라스무센(Fogh Rasmussen) 자유당수가 이끄는 우파 연합은 전체 179석의 의회 의석 중 98석을 차지했고, 집권 사회민주당은 77석에 머물렀다. 자유당·보수당 등으로 구성된 우파 연합은 1929년 이후 처음으로 우파 정부를 구성하게 됐다.
라스무센은 이번 총선에서 최대 쟁점인 이민 정책과 관련, 새 이민자들이 덴마크의 사회복지제도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7년의 유예기간을 두자는 등의 공약을 내걸고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덴마크 인구 5300만명 중 이민자는 5% 이하에 불과하지만, 외국인 이민 증가에 대한 덴마크 국민들의 불안이 점차 높아져 왔다.
2000년 인천국제공항을 잇는 영종대교 개통
인천 국제공항의 명물, 영종대교가 2000년 11월 20일 개통했다. 영종도와 인천 육지부를 연결하는 총 연장 4천4백20m, 주탑 높이 107m, 교각수 49개의 2층 다리인 영종대교는, 위층은 6차선 도로로 아래층은 4차선 도로와 복선 철도가 지나는 세계 최대의 통행능력을 자랑한다.
케이블이 다리의 하중을 지탱하는 현수교 방식으로 건설된 영종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최초로 2000m 이상의 현수교에 3차원 형상의 케이블이 적용됐다는 점이다. 3차원 케이블이란 기존 현수교가 다리 상판 좌우에서 서로 평행한 2개의 케이블로 연결하는 것과는 달리 평행하던 케이블이 주탑 꼭대기에서는 거의 붙었다가 다시 상판쪽에서는 벌어지는 것을 말한다. 상판을 지탱하는 별도의 구조물이 없는 만큼 주 케이블에는 지름 5.1㎜의 케이블 6,720가닥이 들어갔고, 케이블과 상판을 지탱하는 180개의 로프는 압력과 각도를 각각 달리 했다.
30m 바닷속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 주탑의 기초작업을 위해 국내처음으로 ‘뉴메틱케이슨’이라는 무인굴착방식을 동원했다. 진도 6의 지진과 초속 65m의 강풍에도 100년 이상 견디도록 설계된 영종대교는 주위의 바다경관과 어울리는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 다리모양을 우리나라의 전통적 기와지붕의 처마곡선을 본떠 만들었으며 주탑의 모양을 마름모꼴로 하여 전체적인 외관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영종대교의 또 다른 절경은 춘하추동 사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변하는 야경이다. 주탑주변과 현수교 구간에 설치된 322개의 색채조명등을 통해 봄에는 녹색, 여름에는 흰색, 가을에는 노란색, 겨울에는 붉은색으로 매일 일몰 직후부터 다음날 일출 직전까지 밤바다를 밝혀준다.
1998년 북한 간첩선 서해로 침투
1998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 김대중 대통령과 대북정책 집중 논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1998년 11월 20일 서울에 도착, 3박4일간의 방한 일정에 들어갔다. 11월 21일 두 정상은 단독 및 확대회담을 갖고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북한 지하시설의 핵개발 의혹이 시급히 해소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의혹해소를 위한 현장방문 수용을 북한에 촉구할 것을 합의하고, 동북아지역 평화와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차원에서 북한의 미사일개발에도 우려를 표시할 것을 논의했다.
회담 후 두 정상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경복궁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사회 각계 저명 인사 10여명과 원탁회의를 갖고 한국 여론주도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저녁에는 김대통령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22일엔 전방 미군부대를 시찰하고 오산공군기지 장병들을 격려한 뒤 23일 이한했다.
1997년 북한 일본인 처 고향방문
1994년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서울시가 1994년 11월 20일 오후 3시 남산의 남쪽 허리를 가로막고 있던 외인아파트를 15억원을 들여 폭파해체했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A동이 좌우 양측에서부터 중앙부로,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15초 만에 연달아 무너졌고, 이어 3분쯤후 옆에 있는 B동도 똑같은 과정으로 쓰러지면서 1972년 건축돼 22년동안 남산을 가로막고 있던 외인아파트는 과거의 기억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얏트호텔 주변 등 한남동 일대에 몰려나와 해체과정을 지켜본 수만명의 시민들은 아파트가 예고된 대로 좌우끝에서부터 무너지는 순간, 환호와 함께 탄성을 터뜨리며 모처럼만에 시원함과 뿌듯함을 만끽했다.
남산외인아파트는 국내에서 처음 건축된 고층아파트로, 오늘날의 아파트문화를 선도했으며, 특히 기초공사부터 완공때까지 철저한 감독으로 완벽에 가까울만큼 튼튼하게 지어졌었다. 국민소득이 1백70달러, 연간수출액도 5억달러에 불과했을 때, 우리나라는 수출이 국가적 과제였다.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바이어 등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정작 이들이 머물 곳이 마땅하지 않아 남산외인 아파트를 짓게 된 것이었다
1994년 앙골라 19년 간의 내전 종식
앙골라 정부와 반군인 UNITA(앙골라 완전독립민족동맹)가 1994년 11월 20일 19년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킬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앙골라 정부의 베나치오 데 무라 외무장관과 UNITA를 대표한 에우제니오 마누바콜라 사무 총장은 이날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서 세계 29개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협정에 서명했다.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년 전인 1974년 시작된 앙골라 내전은 미국이 우익 반군인 UNITA를 지지하고 옛 소련이 당시의 앙골라 좌익정부를 지지함으로써 냉전의 대리전이 됐으며 1991년 유엔 주선으로 평화협정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UNITA가 1992년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에서 패배·인정을 거부함으로써 내전이 재연됐다.
1993년 마케도니아 비행기 스페인 공항에서 추락 승객과 승무원 116명 전원 사망
제네바를 떠나 스커페 공항 도착예정이던 아비오 임펙 항공 소속 여객기가 공항 상공에 안개가 끼어 남부 오흐리드 공항 착륙 시도하다 추락
1992년 태평양 해저케이블(TPC4) 개통
1992년 한국-우즈베키스탄, 무역협정-투자보장협정-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91년 우편물 차량배달제 시행
1991년 마케도니아 독립
1985년 5차 남북한경제회담 판문점서 열림
1985년 MS윈도우 1.01리테일 버전 출시
1983년 미 ABC-TV, 핵공포 가상영화 `그날 이후` 방영
1982년 박상은 살해용의자 정재파, 대법원서 무죄선고
1980년 정부, 공직자 재산등록제 및 사기앙양 종합대책 발표
1975년 프랑코 스페인 총통 사망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1975년 11월 20일 사망했다. 83세였다. 알카사르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09년 스페인령 모로코의 리프족 민족운동 진압을 위해 활약하는 등 프랑코는 1921년 유럽 최연소 장군이 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을 일으켜 사상최악의 피의 살육전 끝에 얻어낸 내전의 승리로 1939년 8월에 총통으로 취임한 프랑코는 그 후 40년 가까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프랑코 사망 이틀 뒤인 11월 22일 카를로스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함으로 스페인은 44년 만에 왕정이 부활됐고 서서히 민주적 체제로 변해갔다
1975년 대구 서문시장에 화재. 천팔백여 점포 전소
1970년 유엔총회, 중국대표권 문제 중요사항으로 채택
1969년 펠레 909경기 만에 1,000골 달성
축구황제 펠레(Pele, 본명: Edison Arantes do Nascimento 당시 29세)가 브라질 북쪽 살바도르에서 열린 경기서 909경기 만인 1969년 11월 20일 마침내 1,000골을 달성했다. 말라카낭 경기장에는 이 역사적인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외신기자들이 무려 1,5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날 경기는 펠레가 소속된 브라질의 산토스와 아르헨티나의 바스코다가마의 경기로 바스코다가마의 골키퍼 로베르토 아드라다는 전반전에 펠레의 슛 5개를 잘 막았으나, 후반전 22분 펠레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909경기 1,000골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였다.
당시까지 1,000골이상 보유자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빈더와 브라질의 아르투르 프리댄라이히로 펠레는 역사상 세번째 1000골 보유자가 되었다.
펠레의 통산 1000골 기록달성을 축하하며 기록달성 다음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우정당국은 우표2백만장을 발행했으며, 브라질 정부는 이 날을 공휴일로 선포하였다.
펠레는 은퇴할 때까지 선수시절을 통해 총1,364게임에 출전해 무려 1,281골을 성공시켰다 1998년 초 체육부 장관직을 던져버리고 축구해설가로 마이크를 잡은 펠레,
1967년 여야전권회담 성공, 합의의정서 발표
1966년 충남선 (논산-부여 간 24km) 기공
1963년 유엔총회, 인종차별철폐 선언을 채택
1962년 미국 케네디 쿠바 해상봉쇄 해제 선언
1961년 케네디-아데나워 서독수상 회담
1959년 서구7개국 자유무역연합(EFTA) 결성 가조인
1958년 농업협동조합 중앙회 발족
1954년 미 8군사령부 일본으로 이동
1952년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 사망
1948년 국가보안법 통과
1947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결혼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정
독일 전쟁지도자들의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한 역사상 첫 국제군사재판이 1945년 11월 20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개정됐다. 히틀러의 두뇌로 불린 헤르만 괴링과 루돌프 헤스, 외무장관 폰 리벤트로프 등 24명의 나치 고위 관료와 장성들이 반평화죄, 반인도죄, 전쟁 범죄, 범죄 음모죄 등 4개 죄목으로 기소됐다.
재판은 11개월 동안 403차례의 공판을 거쳐 1946년 10월 1일에 막을 내려 자살자와 정신이상자를 제외한 22명 가운데 19명에게 유죄, 3명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괴링 등 12명은 교수형, 헤스 등 3명은 종신형, 다른 4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은 1946년 10월 16일 폰 리벤트로프부터 집행됐다. 그는 “세계의 평화를 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졌으나 괴링은 처형 직전 청산가리를 삼키고 자살했다.
1942년 일본, 조선징병제도실험요강 결정
1922년 연합국-터키 간의 제1차 로잔회의 개최
1918년 미주교포단체, 미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요망진정서 제출
1915년 후야오방(호요방) 중국공산당 총서기 태어남
1910년 톨스토이 사망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톨스토이가 1910년 11월 20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가정의 계속된 불화를 못이겨 방랑 여행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병을 얻어 이날 아스타포보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톨스토이는 1828년 남러시아 툴라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그는 1847년 대학교육에 실망을 느껴 카잔대학을 중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지주의 입장에서 영지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잠시 방탕생활에 빠지기도 했다.
1952년 복무중인 군에서 처녀작 ‘유년시대’를 익명으로 발표해 격찬 받았으며, 1962년에는 소피아와 결혼하고 문학에 전념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연이어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 4,000여명의 미국이주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1899년에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부활’이다
1905년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제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큰 충격과 분노에 빠졌다
백성들은 대대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면 순국으로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지키려고 했다
을사늑약 체결 3일 뒤인 1905년 11월20일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란 제목의 장지연의 논문이 실렸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의 사장이자 주필이며 시일야방성대곡은 이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란 뜻이다
을사늑약의 굴욕적인 내용을 폭로하고 일본의 흉계를 통렬히 공박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대신들을 압박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조약 체결에 찬성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못한 대신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고종황제가 날인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불성립됐다는 주장도 펼쳤다
황성신문은 사전건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발행했다
평상시 3000부를 찍던 발행부수도 1만부로 늘렸다
일제는 그날 오후 5시 신문사를 급습했다
남아있던 신문을 몰수하고 장지연을 비롯한 직원 10여명을 압송했다
신문은 3개월간 정간됐으며 장지연은 90여일간 투옥되었다
그는190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듬해 곧바로 귀국, 경남일보 초대 주필로 언론인으로 복귀했으나 경남일보도 얼마 후 10일 간 정간되었다
1897년 독립문 준공
1897년 11월 20일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따 독립협회가 서대문구 현저동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협회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의 창건당시 면적은2,800㎡였다. 현재면적은 2,640㎡이다.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각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설계를 담당했고, 토목·건축공사는 심의석이 담당했다. 중국인 노무자가 노역을 맡았으며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독립문은 중앙에 14.28m, 너비 11.48m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 앞은 영은문의 주추였던 돌기둥이 두 개 있다. 문의 주재료는 화강암이다.
1978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80m정도 북서쪽으로 이동해서 복원시켜 놓은 것이 오늘날의 독립문이다.
1896(조선 고종 33) 독립협회 독립관 준공
1894년 러시아의 작곡가 루빈스타인 사망
1889년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 출생
1878년 아프가니스탄과 영국의 제2차 아프간전쟁 시작
1865(조선 고종 2) 친일파 윤치호 태어남
독립협회 주도, 서재필 이어 독립신문사장, 장지연과 함께 대한자강회 만들고 회장, 1911년 105인사건으로 체포 10년형 선고, 일제말기에 변절해 귀족원 의원 지냈고 광복후 친일파로 몰리자 자살
1873년 프랑스군, 하노이 점령
1815년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4국동맹 맺음
1737년 영국 왕비 캐롤라인 사망
1602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폰 게리케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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