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술
삶의 이야기방 게시판에 비밀에 관한 글이 셋이나 올랐다.
모두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나에게도 비밀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몇 해 전 이재규 감독의 영화 <완벽한 타인>이 상영되었다.
37년 전 속초 바닷가의 개구쟁이들(유해진, 이서진, 조진웅, 윤경호)
그들이 성장해 사회의 일원으로 각 분야에 진출하고
완벽한 결혼생활도 직장생활도 하게 된다.
어느 날 그들이 어느 집들이에
부부 동반으로 초대되어 정담을 나누는데
저마다 부부 사이의 사랑과 화목을 자랑하게 된다.
한 남자는 외톨로 왔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화제를 돌려
각자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내놓고
걸려오는 문자와 메시지를 공유해보자 한다.
처음엔 생각 없이 그러기로 했지만
함께 공유하면 곤란할 문자나 전화가 하나 둘 걸려오면서
친구사이에, 부부사이에 긴장감이 돌고
불협화음이 조성된다.
그야말로 완벽한 부부, 친구사이가 완벽한 타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삶을 밀실과 광장의 영역으로 나누기도 한다(최인훈의 '광장')
밀실에서 홀로 靈肉을 살찌우게 하고
그러다가 됐다 싶으면 광장에 나가 겨루기도 하고
공유하기도 하는데
여기서의 밀실은 精進하는 시공간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실제의 삶, 사이버의 삶, 몽유의 삶으로 나누기도 한다.
(스코티)
실제의 삶이란 일상의 삶을 말하고
사이버 삶이란 가상공간의 삶을 말하며
몽유의 삶이란 음주에 취해보는 등의 삶을 말하지만
여기서도 모두 공개된 삶을 말한다.
육체의 삶과 정신의 삶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헤세의 나르시스와 골트문트)
영화에선 공인의 삶, 사인의 삶, 비밀의 삶으로 나눠본다고 했다.
바야흐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많은 정보가
실시간으로 유통 가능하고
개인정보도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비밀의 장벽으로 둘러치지 않는 한
개인성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화목이라면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하는 말인데
그 관계에서 비밀은 없어야 하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의 공개성을 받아들일 것인가?
케이스마다 다를 것이다.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떨리는 가슴을 거쳐서 당신의 촉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의 비밀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 마지막 비밀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비밀’)
만해의 비밀은 以心傳心에 이르지 못한 사랑일 것이다.
미처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비밀이라 했을 텐데
그런 비밀이라면야 비밀로 묻어두어도 괜찮으리라.
하지만 현대인의 사랑은 말로 표현해야 믿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열두 번 스마트폰에 대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리라.
비밀로 묻어두어도 좋을 사랑이나
말로 표현해야 하는 사랑 말고,
그런 사랑 말고 다른 비밀은 어떨까?
허나 세상에 나타난 일은 비밀일 수 없다.
언젠간 드러나게 마련이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라면
사라지지 않고 지구 어느 구석에 떠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이다.(2018. 10.)
술이 비밀의 문을 걷어낸다.
그것도 한두 잔으로 되는 건 아니지만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비밀의 문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대명천지에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
첫 직장에 들어가니 모두 선배들 뿐,
무어가 무언지 알 수 없았다.
더구나 부리부리한 그 눈망울 속을 어찌 알랴...
그래서 작전이다, 작전!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장모님에게 술을 담가달라 하고
아내에겐 홍어회와 전을 준비하라 했다.
직원은 열두 명,
집에 들이닥치자 응접실에 고스톱 판을 펼쳤다.
따는 사람에게 술 한 잔, 광 팔았다고 술 한 잔.
일진이 안 좋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에게 술 한 잔.
그러는 동안에 저녁상을 차려놓고
아내가 "이제 식사하셔야지요!" 하니
하나 둘 일어나는 듯, 비실비실, 어깨를 잡기도 하고
겨우겨우 안방으로 옮겨 앉더니 가관이었다.
무슨 님 무슨 님이 이형 김형... 이놈 저놈...
업무비밀까지 토해내며 술은 또 계속 들어갔다.
밤이 늦었으니 이젠 안전 귀가를 준비할 차례다.
차를 몇 대 불러 태워 보낸 기억인데
아침에 출근해서 보니 모두 눈이 게슴츠레한 게
그 비밀을 꼭꼭 숨겨뒀던 알 수 없는 눈망울들이
다 풀려, 그저 모두 거기서 거기였던 건데
술 때문이었던 거다.
첫댓글
글을 쓰는 작가들은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 속에서 유희(遊戱)를 하며
영혼의 소리를 아름다운 색을 입히고 덧칠을 하면서
또 하나의 작품이라는 침묵의 유희 언어를 그려가는 마술사 이기도하지요
곤고한 삶에 중량감 있는 글을 읽어보니 오랜만에 삶에 좋은 글을 보게 되는군요
깊은 學問 의 여운이 풍기니 아주 좋습니다
글 맥이 밥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아름다운 개성이자
인품을 느껴 보며 그리고 그 깊이가 하해 같은 지고의
예술입니다.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상 속 삶의 서체가
정말 아름답네요..
마음이 결핍되는 요즘 감로수 같은 멋진 글을 만나고 있습니다.
마치 쟁반 위에 문맥이 옥구슬 굴러가듯.
순풍에 돛단배 미끄러지듯...
역시 영혼이 맑으면 글은 절로 되는 법
글 선물에 감사드리며
오늘도 고고렛츠고로요
아이구우 부끄럽습니다.
댓글이 본글보다 더 아름답네요.
고맙습니다.
술이 비밀의 문을 걷어낸다는 말씀처럼
술 마시면 말이 많아져서
비밀을 누설하기 쉽지요.
술 깨고 나면 후회 ㅋㅋ
나이들수록 비밀을 만들 일이 없어서
휴대폰 패턴도 서로 공유하고
전화를 대신 받아 주기도 해서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그냥 가족으로 살아지는거 같아요.
석촌님의 품격있는 글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그러시군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비밀이든 아니든 간에
긴장과 이완의 중간에 삶의 미묘한 맛이 있기도 하다고 해요.
완벽한 타인 보았어요
그러셨군요.
설 잘 쇠셨나요?
날씨가 춥지않아서 지내기도 좋은데
잘 지내세요.
비빌요.
저에게도 비밀은 있지만 죽는 날꺼정 가슴에 안고 갈 꺼요.
누구에게도 까발리거나 혹 술이라도 취해서 썰레발까지는 않을껍니다.
그렇다고 무슨 살인에 엃힌 추억은 아니고요.
이성에 관한 이야긴데요.
혹시 우리 마눌이 알면 저 즉각 이혼, 내지는 졸혼, 내지는 별거 내지는 퇴출 당해요.
아니 반성문 100장 정도 쓰야 돼요.
내가 박시인을 달리 봤는데
안되겠네요.
그거 올해 안에 떨고 가요.
비밀유지비가 만만치 않아요.
내앞에서 떨면 내가 술 한잔 사겠지만.
@석촌 위 건은 우리 마눌 만나기(결혼)전 이야기라서요.
사실 마눌한테 한 번쯤 털어놓을려고 했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고
차마 마눌한테는 야그를 몬하고 내 가슴에만 간직하고 삽니다.
때려죽여도 석촌 형님 아니라 성당의 신부한테도
고해성사는 몬, 안 할 낍니다요.
@박민순 ㅎㅎ
국가기밀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 보호할 필요가 없어지면 해제를 합니다.
개인의 비밀은 종종 죽을때까지 가져간다고 합니다만...
많은 경우 오랜시간이 지나고 잊혀질만 하면 비밀을 생산,
또는 공유한 사람이 스스로 밝히기도 합니다.
회고록같은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밀을 마구 발설히면 입이 가벼운 사람 취급을 받거나 경우에따라서는
범법을 하게돼 누구도 발설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선배님이 말씀하신 주석에선 자주 이러한 상례가 어긋나기도합니다.
음주는 허심탄회한 대화의 촉매역할도 하지만
지나치면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어 속에 있는 비밀까지 털어놓게 합니다.
이로인해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비밀의 공유자가 돼
서로 유대감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술과 비밀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리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선배님의 '비밀과 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맞네요.
비밀과 술은 안 맞기도 하고
맞기도 하는 관계이겠네요.
ㅎㅎ취중진담 완벽한 타인 그 영화 진짜 쫄깃한 재미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 작품도 수준있고 여튼 재밌게 의미심장? 하게 봤던 기억이 비밀이라기엔 거의 날아가버려서 잊었어요 간직해야 비밀이지 본인이 까먹고 사는데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