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1
한 미남 청년을 짝사랑하다
바다에 몸을 던진 옛 그리스의 시인 사포
애기세줄나비,
학명은 Neptis sappho Pallas
불빛 속으로 날아드는 그 나비의 모습이
그녀를 연상시켰던 걸까
나비처럼 가벼운 영혼만이
열정 속으로 투신할 수 있다고, 노래하진 않겠다
나비는 불꽃이 자기를 태울 거라
생각진 않았으리라
혹, 불빛은 애기세줄나비에게
환한 거울 같은 건 아니었을까
2
조롱 속의 짝 잃은 문조,
그 안에 작은 거울을 넣어주었더니
거울에 비친 자기를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행복해 했다는 이야기
3
죽음을 걸었던, 너를 향한 내 구애의 말들
덧없음이여, 나는 나 이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날아들었던 당신이라는 불꽃
오랫동안 나는 알지 못했다, 실은 그 눈부신 불꽃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음을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당 신
오늘밤 나는 비 맞은 여치처럼 고통스럽다
라고 쓰려다, 너무 엄살 같아서 지운다
하지만 고통이여, 무심한 대지에서 칭얼대는 억새풀
마침내 푸른빛을 얻어내듯, 내 엄살이 없었다면
넌 아마 날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열매의 엄살인 꽃봉오리와
내 삶의 엄살인 당신,
난 오늘밤, 우주의 거대한 엄살인 별빛을 보며
피마자는 왜 제 몸을 쥐어짜 기름이 되는지
호박잎은 왜 넓은 가슴인지를 생각한다
입술을 달싹여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는 밑둥만 남은 팽나무 하나
얼마나 많은 엄살의 강을 건넌 것일까
느린 달팽이의 사랑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 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사랑의 흔적
생선을 발라 먹으며 생각한다
사랑은 연한 살코기 같지만
그래서 달콤하게 발라 먹지만
사랑의 흔적
생선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구나
나를 발라 먹는 죽음의 세상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열애가 지나간 흔적 하나
목젖의 생선가시처럼
기억해 주는 일
소나무의 사소한 흔들림으로
켁켁거려 주는 일
그러나 이 밤의 황홀한 순간이여,
죽음의 아가리에 발라 먹히는
고통의 위력을 빌려, 나
그대의 웃음소리로 잎새 우는
서러운 바람을 만들고
그대의 눈빛으로
교교한 달빛 한 올 만들어 냈으니
이 지상 가득히
내 사랑의 흔적 아닌 것 없지 않는가
땅의 목젖 내 한 몸으로
이다지도 울렁거리지 않는가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
바람이 낳은 달걀처럼
참새떼가 우르르 떨어져 내린
탱자나무 숲
기세등등 내뻗은 촘촘한 나무 가시 사이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참새들은 무사통과한다
(그 무사통과를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바람의 살결을 닮으려 애쓰는가)
기다란 탱자나무 숲
무성한 삶의 가시밭길을 뚫고
총총히 걸어가는 참새들의 행렬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가시의 마음을 닮으려 애쓰는가)
……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
그 열망 깊은 곳,
가시 무성하게 돋아난
선혈 낭자한 탱자나무 숲이여
그 빈 자리
미류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도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한마리 앉았던 빈 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류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함의 자리를 찾아
전 생애의 숲을 날아온 방울새의 마음이
한데 포개져
저물지 않는 한낮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
미류나무 가지 하나 있어
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그대 앉았던 빈 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
다만 명상처럼 환하고 환할 뿐입니다
먼 훗날 내 몸 사라진 뒤에도
그 빈자리, 그대 앉았던 환한 기억으로
저 홀로 세상의 한낮을 이루겠지요
그 사랑에 대해 쓴다
아름다운 시를 보면
그걸 닮은 삶 하나 낳고 싶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노을빛 열매를 낳는 능금나무처럼
한 여자의 미소가 나를 스쳤을 때
난 그녀를 닮은 사랑을 낳고 싶었다
점화된 성냥불빛 같았던 시절들, 뒤돌아보면
그 사랑을 손으로 빚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 열정의 몸짓들을 낳았던 걸까
꽃의 떨림과 떨림의 기차와
그 기차의 희망,
내가 앉았던 벤치의 햇살과
그 햇살의 짧은 키스
밤이면 그리움으로 날아가던
내 현 속의 푸른색
그리고 죽음조차도 놀랍지 않았던 나날들
그 사랑을 빚고 싶은 욕망이 나를 떠나자,
내 눈 속에 살던 그 모든 풍경들도 사라졌다
바람이 노을의 시간을 거두어 가면
능금나무 열매의 환한 빛도 꺼지듯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붉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 문득
그대 이름을 불러볼 때
단숨에 몰려오는, 생애 첫 가을
바람은 한짐 푸른 하늘을
내 눈 속에 부려놓는다
마음 닿는 곳이 반딧불일지라도
그대 단 한 번 눈길 속에
한세상이 피고 지는구나
나 이 순간, 살아 있다
나 지금 세상과 한없는 한 몸으로 서 있다
그리움을 견디는 힘으로
먼 곳의 새가 나를 통과한다
바람이 내 운명의 전부를 통과해낸다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같이
수천의 파도가
몰려와 부서집니다
수만의 파도가 한꺼번에
산산이 부서집니다
부서진 파도들 비로소
편안한 어깨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어이할 수 없어라
그렇듯 뒷모습으로 돌아간 파도들
또다시 부서지러 몰려 옵니다
한번 부서져본 사랑
대단한 권세인 줄 알았습니다
그대여
내 사랑 더도말고
저 파도 같을 겁니다
나는 물의 마을을 꿈꾼다
내 몸 물처럼 출렁이는 꿈을 꿉니다
내 몸 그대에게 물처럼 흐르는 꿈을 꿉니다
나 그대 앞에서 물처럼 투명한 꿈을 꿉니다
물처럼 투명한 내 몸 속, 물처럼 샘솟는 내 사랑 보입니다
내 사랑에 내가 놀라 화들짝 물방울로 맺힙니다
드맑은 그리움 온통 무거워지면
물방울로 맺힌 내 몸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수만 가지로 샘솟는 길을 따라 내가 흩어져 흘러갑니다
그러나 물방울의 기억이 그대 눈빛처럼 빛나는 시냇가에
내 사랑 고요히 모이게 합니다
오오, 달비늘로 미끄러지는 내 사랑
갈대 밑둥을 가만히 흔들고 지나갈 뿐입니다
바위 틈에 소리없이 스미고 스밀 뿐입니다
내 몸 투명한 물이기에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낮게 흐릅니다
이 세상 모오든 것을 비켜갑니다 그대마저도 비켜갑니다
그 비켜감의 끝간 데, 지고한 높이의 하늘이 있습니다
놀라워라, 그 순간 그대 가슴속에 끝없이
범람하고 있는 내 사랑 봅니다
나 그대 몸 속에서 오래도록 출렁입니다
나 그대 시내 같은 눈을 보며 물의 마을을 꿈꿉니다
그 물의 마을, 꿈꾸는 내 입천장에서 말라붙습니다
내 몸 물처럼 츨렁이다 증발되듯 깨어납니다
오늘도 그대를 비켜가지 못합니다
나무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 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비로소 한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날개를 위한 시
바람아 기억하는가
한때 나는 날개를 갖고 있었네
허공을 날며 사랑을 나누다
절정의 순간 몸이 터져 죽어버리는
수개미의 날개를
그러나 어느 날,
내 날개짓의 에너지였던 사랑은
태양의 지평선을 따라 사라지고
난 지금 암흑의 대지에 갇혀
떠나간 사랑에 대해 쓰네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 날개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생의 나머지를 견디네
내 마음의 고기 한 마리
- 양수리에서
늦가을 강바람 속으로 매순간
힘없이 메마른 숨결의 손을 놓는 나뭇잎들과 같이
지금 돌연 내가 죽어 없어진다 해도
저 강물은 계속 흐를 것이다 간혹
물 위에 떠가는 낙엽이나 갈대 부스러기처럼
내 죽음이 쓸쓸히 노을의 저편으로 흘러가도
강은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바로 눈앞으로 흐르는
강물이란 강물 다 지나가버려도
강의 호흡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듯,
영영 떠내려가버릴 것 같은 죽은 나뭇잎들
푸르름의 기억을 되살려 나무의 뿌리로 되돌아오듯,
내 육신의 죽음이 진정 나를 죽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본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려 해도
그대로 온통 강물인 양수리의 삶을
뭐 하나 뾰족할것 없는 생의 굴레를
하여, 살아온 날들의 온갖 희희낙락과 절망들이여
살아갈 날들의 하릴없는 기대감들이여
그만, 잔잔하라 고인 물처럼 잔잔하라
강물이 끝내 강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수백 생 동안 죽음의 진화 작용을 해왔을 내 모습
이제 그 깊은곳에 사는
마음의 참붕어 한 마리 보고 싶다.
눈부신 명상입니다
은행잎에 그대가 물들었습니다
그대 노란 눈부심으로
거리를 떠나갑니다
온 산에도 그대가 물들어갑니다
산을 내려온 그대 물든 걸음
사뿐 강물이 받아줍니다
강물 위에 그대 떠내려갑니다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그대 떠내려갑니다
지금껏 난 흘러가는 그대 붙잡으려 했습니다
지친 매미 울음처럼 붙잡으려 했습니다
아아 온 천지에 그대 수없이 물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대 떠내려가는 모습 내게 눈부심이었습니다
그대 떠나보내야 내 사랑 자란다는 걸 알았습니다
은행잎 하나에도
그대 얼굴 물드는 시간입니다
은행나무처럼 나 이제 그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대 노란 눈부심으로 나를 떠나갑니다
떠나는 그대 눈부신 명상입니다
잔잔한 강물 같은 명상입니다
눈을 위한 시
눈이 내린다 눈빛이 내린다
난 멀디먼 눈길 뒤에서 굴뚝새처럼 헤매었다
눈물 다 흘리고 아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무심한 눈발 그때 알아버렸다
컴컴하게 눈먼 하늘이 각혈하는 눈보라가
두고두고 이 세상 내 험한 눈길 속으로 가져다줄 눈빛을
그 눈시린 고통과 황홀의 눈빛을 그 후로
난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다 꿈속에서도 깨지 마라
깨지 마라 눈은 쏟아지고 눈뜨면 감은 눈 위로
거대한 설원이 기다림처럼 쌓이는 꿈을 꾸는 나를 보았다
아, 눈과 눈의 사랑 난 기어이 깨어났다
이 천지의 가믈고 가믄 숨소리 눈보라가
내 무거운 눈꺼풀을 벗겨갔다 난 보았다
그 무수한 눈송이가 무수한 눈물로 바뀌는 것을
눈은 땅으로 곤두박질치지만
눈물은 마침내 허공에 설원을 이룬다
눈발과 눈물의 가슴 시린 부딪침, 사랑
눈이 쌓인다 눈빛이 쌓인다 밤새
나는 잠들지 못하리라 저 황홀한 눈빛이
내 눈에 영원한 고통을 족쇄 채웠다 눈이 펑펑 내린다
나는 눈빛 쌓인 설원을 저물도록 떠돌아야 하리라
눈은 녹지만 끝끝내 당신, 눈빛은 녹지 않는 설원을
눈이 내린다 눈물이 솟아오른다
느낌
나 그대를 느끼네
한순간 햇살에 찔려.
그대,
내 몸이 아니기에
이 아픈 매혹이여.
나 그대를 느끼네
입 안에 맴도는 휘파람처럼.
그대,
소멸하지 않는 흥얼거림이여.
나 그대를 느끼네
한순간 물살에 두 무릎 꺾이듯.
그대,
흘러가도 흘러가도
마침내 그대로인
강물의 움직임이여.
느림
까치 한마리 나뭇가지를 물고 숲속으로 날아가네
한 마음의 뭉클함이여, 나 그대를 불러보네
새가 둥지를 짓기 위해 첫 나뭇가지를 얹어놓듯
그대라는 이름으로 불러보는 무수한 들꽃과 풀잎
그대 깃들이지 않은 곳 없네 저 휘파람새 울음
붉은 산수유 열매, 토끼풀꽃, 갈대의 흔들림
새들은 내 눈빛들의 메아리를 물어 온 숲에 둥지를 틀고,
나 빠른 시간의 물살 바깥에서 따스한 알로 정지하네
그토록 느린 저녁의 산책이여, 송진 내음의 사랑은
가슴에 환한 명상의 불빛을 밝히고, 나 그대의
이름들과 함께 이 저녁의 넓이를 한없이 키워가네
그대는 느린 달의 속삭임, 빛의 울타리로 나를 가두네
사람의 마을로 떠밀려가던 생은 멈추고,
기나긴 산책의 오솔길에서 나 그대를 불러보네
이 저녁 그리움 위에 첫 나의 미명에
삼킬 수 없는 노래
시크리드라는 이름의 물고기는
갓 부화한 새끼들을 제 입 속에 넣어 기른다
새끼들의 안전한 보금자리로
그들은 자신의 입을 택한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미소처럼 머금은
시크리드 물고기
사람들아, 응시하라
삼킬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머금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
이슬을 머금은 풀잎
봄비를 머금은 나무
그리고
끝내 삼킬 수 없는 노래의 목젖,
나도 한세상
그곳에 살다 가리라
* 시크리드: 시크리드과 물고기는 대다수가 아프리카 호수에 살고 있으며
마우스 브리딩, 즉 새끼들을 입 안에 넣어 기른다.
세상의 모든 저녁 1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과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의 라디오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러 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를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 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 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슬픔이여, 좋은 아침
- 빌리 할리데이에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에게 휴식이란 없다
그는 늘 고통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외출을 한다
벌새의 분주한 날개를 타고
상처받은 사람의 영혼은
언제나 몸 밖을 떠돈다
상처보다 깊은
어둠의 노래와 함께
하여 어느 날, 그대를 찾아온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일도
그대 영혼을 만날 수는 없었으리
열두 개의 달
나 홀로 저녁의 강가를 걸었네
그녀와 이 길을 걷던 날들은
강물과 함께 흘러가고
나는 열두 개의 달을 생각했지
우리들 산책가의 태양이었던 그 달을
그녀와 내 두 눈에 담긴 네 개의 달
강물에 내려앉은 달
한 마리 살랑대는 은어의 눈동자를 비추던 달
그리고 저 솔숲 부엉이의 두 눈과
그녀의 눈물에 고이던 노란 달빛
돌아올 수 없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버린 그녀, 긴 머리칼의 향기
우리들 산책가의 태양이었던
열두 개의 달도 사라졌지
그 옛날 바다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던
위대한 달의 힘도
나는 잊었네 아득히 잊었네
자갈밭을 걸으며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재잘거리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밞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터럭만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나는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 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감으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재즈 0
소니 롤린스, 뉴욕의 한 강가에서
밤이면 삶에 취해 색소폰을 불던 사내
쿨재즈라든가, 하드밥
그래, 인생의 반은 120%의 cool한 영혼,
나머지는 격정적인 하드밥의 육체
차디찬 영혼의 냉장고를 메고
하드밥의 리듬으로 날아가는 나방이여,
혼자서 상처의 끝까지 가보리라
별빛과 달, 나의 유일한 재즈 카페
호화 객석도 청중도 없다,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난 연주하고 연주할 뿐,
저 강물이 수만의 귀를 일으켜세울 때까지
재즈 3
옛사랑이란 노래가 있지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거야...
때론 그렇게, 시보다 시적인 노래가 있지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들
세상은 왜 그만큼만 비유가 허용되는 걸까
내 맘보다 더 내 맘 같은 하늘
내 눈보다 더 내 눈 같은 별
내 노래보다 더 내 노래 같은 바람
돌아보면, 옛사랑
나는 개미처럼 절실했어
그래, 절망에 꿀을 입혀 꿀떡 삼킨 사랑
내가 사랑한 건 결국,
네가 아니라 그리움이었어
난 막연한 니힐리스트가 아니야
그림자보다 더 그림자다운 나를 분명히 보았거든
그리고 턴테이블의 거듭 튀는 음반처럼
나 지금 생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어요
학교에서 배운 것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시골 국민학교를 추억함
내 가슴엔 아직도 사루비아의 달콤함이 살고
여선생님 하얀 치아의 눈부심과 새 수련장
빠알간 색연필로 쓴 참 잘했어요가 산다
히말라야시다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놀러 온 햇볕도 다람쥐도 찌르레기도
어린 풍금 소리에 맞춰
가슴에 달린 손수건처럼 마음을 펄럭이던,
그래 생명의 모든 국민학교가 거기 있었지
아직도 내 입 안에 사는
철수와 영희, 아련하게 바둑이를 부르며
둥글게 둥글게
그 착한 영혼의 이름들로 충만한 운동장
아, 다시 가고 싶어라
환한 금빛,
모래알의 은하수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대나무숲,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본다
저 바람 속 모든 새집은
새라는 육체의, 타고난 휘발성을 닮아있다
머물음과 떠남의 욕망이, 한순간
망설임의 몸짓으로 겹쳐지는 곳에서
휘파람 소리처럼 둥지는 태어난다
새는 날아가고
집착은 휘파람의 여운처럼
둥지를 지그시 누른다
매혹의 고통은 종종
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
하여 나의 질투는 포기보다 가볍다
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휘파람새가 비상하기 직전의 날개,
그 소리없는 찰나의 전율을 빌려
난 너의 내부에 둥지를 튼다
사랑의 지옥
정신 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짖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리라
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곳으로
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
그러면 그 말알로,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
그대 손길 닿는 곳엔
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
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
그대 앞에 달콤한 비그늘을 드리우리
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몸인 땅에서
다만 별빛에 배부르리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뿐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우연의 음악
꽃 피는 소리, 민들레의 음표들,
브라스 밴드 행렬로
나무를 타고 오르는 나팔꽃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의 종달새 울음
그리고, 내 수만의 몸들을 빠져나와
달려가는 영혼의 바람소리
그대가 받은 이 生도
아주 우연한 음악
無의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1
두개의 은륜이 굴러간다
엔진도 기름도 없이 오직
두다리 힘만으로
은륜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빔이 바퀴살과 페달을 존재하게 하고
비로소 쓸모 있게 한다
텅 빔의 에너지가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언제나 은륜의 텅 빈 중심을 닮고 싶었다
은빛 바퀴살들이 텅 빈 중심에 모여
자전거를 굴리듯
내 상상력도 그 텅 빈 중심에 바쳐지길
그리하여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찬란한 시의 月輪을 굴리기를, 꿈꾸어왔다
놀라워라, 바퀴 안의 無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희망의 페달을 밟게 한다
바퀴의 내부를 이루는 무가
은륜처럼 둥근, 생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구르는 은륜 안의 무로
현현한 하늘이, 거센 바람이 지나간다
대붕의 날개가 놀다 간다
은륜의 비어 있음을, 무를 쓸모 없다 비웃지 마라
그 텅 빈 중심이 매연도 굉음도 쓰레기도 없이
시인의 상상력을 굴린다
비루한 일상을 날아올라 심오한 정신의 숲과 대지를 굴리고
마침내 우주를 굴린다
길이여, 나를 태운 은륜은 게으르되 게으르지 않다
무의 페달을 밟으며
내 영혼은 녹슬 결도 없이 自轉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