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북작가 리쾌대③ - 주제화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9)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북으로 간 여러 화가들은 정치 주제화를 그렸다. 사회주의국가에서의 문화예술은 선전선동의 도구이기 때문이므로, 북으로 간 대부분의 화가들이 정치 주제화를 그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리재현(1942~)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재판본)』에서 리쾌대 항목을 보면, 리쾌대는 1955년에 「대대장고지 방어전투」(218×291cm)를 그렸고, 1958년에는 「조중우의탑 벽화」(200×1,300cm)를 그렸다. 리쾌대가 북의 서울 점령시에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그가 북에서 「대대장고지 방어전투」와 「조중우의탑 벽화」를 그린 것이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쾌대와는 상대적으로 전쟁전에 북에서 살면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린 작가가 월남하여 남측의 전쟁기록화를 그린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고 그 작가에게 특수한 정치적 의미를 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림은 오직 그림으로 보고 평가하여야 한다.
1. 리쾌대의 「대대장고지 방어전투」
내가 수 년전에 중국의 한 지방도시에서 리쾌대의 작품을 수십여 점을 보았을 때 그 가운데는 리쾌대가 그린 「대대장고지 방어전투」도 들어 있었다. 이러한 그림을 우리는 전쟁기록화라고 한다. 남과 북의 전쟁기록화는 분단 미술로 정의할 수도 있다.
「대대장고지 방어전투」, 유화, 리쾌대, 1955년. 이 사진은 필자가 중국에서 직접 찍은 것이다. 그림을 벽면에 부칠 수가 없어 바닥에 놓고 찍어 왜곡된 시각 편차가 보인다. 이 작품은 리쾌대가 ‘건설성 미술제작소’에 있던 1955년에 북의 시각으로 한국전쟁의 전투를 그린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중국 모 대학의 L 교수를 통하여 제대로 찍은 사진을 입수하였지만, 필자가 작품을 관찰하기 위하여 찍은 사진은 부득이하게 바닥에 눕혀서 찍었으므로 사진의 왜곡이 크다. 필자가 리쾌대가 재북시에 그린 이 그림에서 구사한 필력이라든가 구성을 구체적으로 논할 경우에는 극우 세력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작품에 관한 최종 평가는 독자들에게 맡긴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리쾌대가 1948년에 그린 「군상-4」(177×216cm)와 대비하기를 바란다.
리쾌대, 「군상-4」, 유화, 1948년.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 「대대장고지 방어전투」, 유화, 1955년, 291X218cm.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의 1948년 작 「군상-4」는 배경 하늘을 덮고 있는 폭발 장면을 통해 절체절명의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근경의 삼각형 구도는 하나의 군상이지만 좌우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근경의 좌측은 화면 밖을 향하여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리로, 우측은 집착과 격렬한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구별된다.
「군상-4」 보다 7년후에 그린 「대대장고지 방어전투」는 「군상-4」에서 보이는 감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정도의 상대성(相對性)있는 상반적(相反的)인 작품이다. 그러나 구도라든가 화면의 좌우를 두 개의 대립으로 나눈 것 등등은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점은 리쾌대가 「대대장고지 방어전투」에서 묘사한 적군을 세부적으로 관찰하여 보면 국군이 아니라 미군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예상 밖의 아이러니한 일이다.
남에서의 이쾌대이든 북으로 가서의 리쾌대이든 그는 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가? 그 마음을 읽어야 한다.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 문제이다.
우리는 리쾌대의 「군상」 연작과 리쾌대의 「대대장고지 방어전투」를 통하여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의 전쟁 기간 중에 남북 간의 모든 문화는, 특히 남북 간의 미술은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가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 나가고 있음을 간파하여야 한다. 이러한 바뀌어 나가는 현상은 전쟁기간 중에 북에서 남으로 월남한 북측 출신의 재남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과 박수근(朴壽根, 1914~1965)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2. 「조중우의탑 벽화」
국내의 화상이 입수한(리재현이 편람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업급한) 10여 점의 유화 가운데는 「병사(습작)」(43×35.5cm)이 한 점있다. 리재현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작품은 「조중우의탑 벽화」를 그리기 위한 부분적인 초안의 하나라고 한다.
「병사(습작)」, 리쾌대, 유화, 1958년, 43×35.5cm.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중우의탑(朝中友誼塔)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우동에 있는 기념탑이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중국의 인민지원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8년에 건립을 시작하여 1959년 10월 25일에 완성되었다. 조선과 중국 간의 친선 관계를 상징하는 건물이라 한다.
이 조중우의탑은 조선건축가동맹의 리영이 설계를 맡았고, 조선미술가동맹 조각분과가 기념비 좌우측의 장식 부각에 투입되었다. 내부 입구 안쪽에는 석실 내벽에 넓은 공간을 마련하여 리쾌대(1913~1965, 유화)가 총괄하고 김진항, 류현숙(1922~1991, 유화), 민병제(1923~?, 유화), 림병삼(1932~1983, 유화), 최창식1920~?, 유화), 한기석, 홍성철(1928~1995, 유화) 등등이 참여해 우의탑의 좌측에 「전후복구건설 원조」를, 우측에 「조선인민군대와 중국인민지원군의 협동작전」을 묘사했다. 즉 집체작 벽화이다.
그런데 1959년에 건립한 조중우의탑은 후일 김정일의 지시로 허물고 재건축하여 1984년에 완공하였으므로, 리쾌대가 1958년에 총괄을 주도하여 그린 벽화는 이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현재 조중우의탑의 벽화는 리쾌대 외 7인의 손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리쾌대가 총괄하여 그렸던 벽화의 형태는 띠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리쾌대, 1955년, 「대대장고지 방어전투」 부분도. 1958년 작품 「병사(습작)」를 비교하면 두 작품의 연결성이 보인다. 두 작품은 분명히 같은 필치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은 바닥에 눕혀 놓고 필자가 찍은 사진이므로 왜곡된 시각 편차가 발생하고 있다.)
리쾌대 작이라고 전설이 된 「조중우의탑 벽화」는 그보다 3년 앞서 그린 「대대장고지 방어전투」를 통하여 짐작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므로 「조중우의탑 벽화」를 제대로 평할 수가 없다. 다행히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 리재현이 보관하고 있던 「병사(습작)」(1958년)이다.
3. 첨언 ; 리쾌대 화법은 변화했어도 작품의 완성 수준은 변함이 없다
지난번 제66회 연재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리쾌대의 재북시 화법은 재남시 화법과 일정한 차이가 있다. 특히 물감 쓰는 법에서의 차이는 상당하다. 그런데 리쾌대의 재북 생존 시기(1953~1965)의 북의 화단(畫壇)과 사회를 이해하면 이렇게 바뀌어 나가면서도 변함이 없는 리쾌대의 표현과 묘사력을 간파하게 된다.
통일뉴스에 이 글을 연재하는 중에 몇몇 조선미술품 수집가가 리쾌대의 작품이라며 사진을 보내왔다. 현재 남측에서 있는 리쾌대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것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한국의 수요에 맞추어 만들어진 위작이거나, 작가 미상의 북측 그림에 리쾌대의 서명을 넣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작품이다.
그러한 위작으로는 리쾌대의 천재성이 깃든 미술 세계를 도저히 가릴 수가 없다. 한마디로 말하여 리쾌대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수준의 그림은 모두 리쾌대의 작품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작품을 대하면 진위(眞僞)를 쉽게 판별할 수 있고, 위작을 사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된다.
이번 회에 소개하는 「대대장고지 방어전투」라든가 「병사(습작)」는 재북시절 리쾌대의 특별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2024.06.11.) / (리쾌대의 위작을 사진을 제시하며 지적하는 것은 타인의 재산권과 관련된 일이므로 리쾌대의 위작(僞作) 사진은 여기에 싣지 않는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