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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묵상글 들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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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녀 클라라 축일-나뿐 아니라 모두가 주님 정배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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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프란치스칸들에게는 큰 축일인 클라라 축일입니다. 클라라 본명을 가진 분들과 모든 프란치스칸들에게 축하드리며 또 같이 기뻐합니다. 오늘 강론은 클라라 성녀 축일 준비 9일 기도 중 여섯 번째 기도 때 한 강론을 다시 올린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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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녀 클라라의 축일을 준비하는 9일 기도 중 여섯 번째 날로
주제는 그리스도의 정배인 성녀 클라라이고,
그의 정결에 대해서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성녀 클라라가 그리스도의 정배였다는 것과
그래서 정결에서 뛰어난 성녀였다는 것에 대해 별로 강조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것은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정배보다 더 중요하고,
그래서 정결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녀 클라라가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정결을 잘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고 그래서 이 점을 강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녀 클라라도 자신은 물론 클라라의 자매들이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주님께 온전한 사랑을 드려야 함을 강조하였고
그래서 온전한 사랑을 강조하며 편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대는 이 거짓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눈먼 자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그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 전부를 내어 주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십시오."
이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향이 역력합니다.
프란치스코나 클라라 모두 정결을 갈림 없는 사랑 또는 나뉨 없는 사랑으로
생각하고 우리에게 자신을 전부 주신 분에게 전부를 내어드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같은 내용의 권고를 합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 클라라도 프란치스코처럼 세상 것을 멸시하라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마음의 정결과 주님 관상에 대한 권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의 것들을 멸시하고 천상의 것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정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세상 것에 대한 염세주의적인 멸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과 이 세상 것들은 그 급이 다르고,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그 급이 달라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클라라는 정결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언급을 하는데
프라하의 아네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더욱 깨끗해지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
이 말은 클라라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동정녀 아네스 축일 찬가에
나오는 것이지만 클라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정결이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기 위한 정배이기는 하지만
정결하기에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었기에 정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결혼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정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정배가 아닌 독신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결을 살더라도 클라라가 얘기한 것처럼
주님의 정배가 되기 위하여 정결해야 할 것이며
주님의 정배가 됨으로써 참으로 정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결과 관련하여 더 중요한 언급을 클라라는 합니다.
오늘 읽은 성녀 아네스에게 보낸 셋째 편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동정녀께서 그분을 낳으셨고, 낳으신 다음에도 동정녀로 남으셨습니다.
동정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태중인 작은 봉쇄 안에 그분을 모셨고,
처녀의 품으로 안으셨습니다."
이 얘기를 통해 마리아는 동정녀일 뿐 아니라 어머니었고,
주님의 정배일 뿐 아니라 주님의 어머니셨음을 얘기합니다.
내가 주님의 정배가 되는 것 뿐 아니라
주님의 어머니가 되어 주님을 세상에 낳아주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고한 내용과 일치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실한 영혼이 주님께 결합될 때 우리는 정배들입니다.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클라라 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나만 주님을 사랑하고 나만 주님의 정배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어 이웃을 위해 주님을 낳아주고
이웃도 주님의 정배가 되도록 정결한 사랑을 더욱 확장시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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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 19)
가난 속에
참된 행복이
있고
가난 속에
참된
기쁨이 있다.
가난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
가난이다.
가난이
회개의
삶이다.
가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받쳐주는
영적인
가난이다.
가난이
하늘이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열릴 수 없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난한 영혼이
된다는 것이다.
가난이
복음이다.
가난한
마음안에
탄생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인격들이다.
성녀 클라라는
하느님의
가난으로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온갖 기쁨은
가난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주어지는
선물이며
은총임을
믿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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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향기입니다. 아무리 숨겨도 멀리까지 퍼져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합니다”(이규경). 황홀한 사랑에로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성무일도 기도에 보면,“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생각해 보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 공자께서도 “충언은 사람을 바로 서게 한다.”하였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혹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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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것이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형제간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혹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고쳐주어야 하는가?” 하는 교정방법과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교정방법과 절차를 네 단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이여,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과 절차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거나 처벌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라”는 말을 되새겨 봅니다.
또한, 그는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나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불편 때문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잘못한 형제를 교정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교정 받으면서 한갓 잔소리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교정할 때는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하여 할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잘못한 형제를 위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사랑으로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마태 18,19 참조).
성 베네딕도도 그의 [규칙서]에서 바로 그들에게 “사랑을 더 베풀 것이며, 또 모든 이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규칙서 27,4)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는 않는지? 혹 사랑이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내 형제임을 알게 하소서!
형제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게 하소서.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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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자 많은 기적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 어느 기적보다도 하느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기억했던 라우렌시오를 비롯하여 이 표징의 뜻을 깨달은 성인들은 교회의 역사에서 간헐적으로 출현하기는 했지만, 교회의 역사 특히 서방 가톨릭교회의 대세를 돌리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과 그분을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 교회의 정체성에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표징을 알아듣지 못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했던 중세 서방 가톨릭교회는 극심한 부패에다가 비복음적인 내부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프란치스코였고, 클라라는 이 표징을 이해하고 함께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의 교회 역사에서도 몇몇 성인성녀들을 제외하고는 이 뜻이 교회의 흐름을 복음적으로 돌려놓지 못하다가, 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을 만큼 겪고 나서, 그리고 역시 서방 교회의 영향을 받았지만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는 서구 열강들의 정책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의 항의를 받고나서야 비로소 교황청은 2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반영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명제입니다.
지나간 시기에 저질러졌던 서방 가톨릭교회의 시행착오를 반성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 명제를 확정한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였지만,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르러서야 이 명제는 ‘공동합의성’과 평신도들의 ‘신앙감각’을 따라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의회에서 의도한 교회쇄신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서방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이 표징과 이 명제에 담긴 전환기적 흐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고, 이미 상당부분 서구화되어 버린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도 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못한 듯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메시아이시라는 표징만큼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계시가 없고, 이를 신자들의 재량에 맡겨주신 예수님의 오늘 말씀처럼 신자들이 신성을 반영할 수 있는 결정적 계시가 없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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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몇 달 전에, 하나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였습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한 남성이 담배를 피우자, 한 시민이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하냐면서 말렸습니다. 그래도 계속 담배를 피우자, 손에 든 담배를 빼앗았습니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말립니다. 그 뒤, 이 남성이 했던 말들입니다.
“그건 제 마음이잖아요.”, “솔직히 연기 마신다고 피해 많이 가요?”, “** 꼰대 같아.”….
술에 취해서 했던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맨정신에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에 그러한 행동을 했고 또 떳떳하다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살고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자기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함께 살아야 해서 당연히 공동의 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으며,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종 착각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면서 사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기에 그 많은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머무는 집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혼자서 만들 수 있나요? 아마 많은 이가 누가 만들어 준 집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먹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생산해서 만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생산한 것을 가지고 또 누가 요리해준 것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져봐도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많이 들어본 구절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마태 16,19에 나오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의 권한’이었습니다. 그 구절과 이 구절이 똑같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베드로에게 주어졌었던 권한이 이 말씀을 듣는 청중, 곧 공동체에게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만 사는 것처럼,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내세워야 할까요? 아닙니다. 나의 구원이 공동체에 주어졌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위한 나의 모습 자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지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바로 교회의 최소 구성원입니다. 모든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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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산을 이김으로써 자신을 양성시킵니다. 자신과 싸움은 반드시 존재하고 거에서 이겨야 한다(에드워드 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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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방법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아직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삶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솔직히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높은 곳에 올라야 행복할 것 같지만 이는 늘 순간의 행복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만족일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래서 영속적이고 자신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자신을 비난하지도 않고, 누가 훔쳐 갈 수 없는 그런 대상을 원해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대상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소유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려면 내면의 일치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그 해답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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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입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조건을 채우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채울 수 없는 조건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외모, 학력, 재산, 능력, 명예를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면 행복한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땀을 흘린다 해도, 노력한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얻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많은 조건을 채운 사람 앞에 서면 나의 행복은 사라지게 됩니다. 조건은 비교하게 되고, 비교를 통해서는 행복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1등이라는 자리는 언제나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 큰 아파트에서 살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더 많은 곳을 여행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더’라는 것은 늘 비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조건을 찾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아서 결국 방향을 바꾸어야합니다.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울수록 더욱 심한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볼리비아의 가난한 지역에서 선교사로 있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조건으로 보면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모습은 언제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선교사가 되고 싶어 했고, 선교사의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비포장 길을 낡고 오래된 차를 몰고 덜컹거리면서 달려도 행복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를 기다리는 공소의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맑게 웃으면서 선교사를 환영하는 신자들을 생각하면 비포장의 덜컹거리는 길도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를 타는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신문사의 일을 비롯해서,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 성당의 미사도 해 주고 있습니다. 몸은 피곤 하지만 저는 행복합니다. 제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강론을 듣기 위해서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어느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발견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구름, 들에 핀 꽃, 흐르는 시냇물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봄에 심었던 코스모스가 하얗고, 빨간 꽃망울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제 바람이 불면 예쁜 꽃잎이 나를 위해서 춤을 출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도 행복입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선택이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발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그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선택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말구유에서 사람으로 오신 것도, 하느님의 아들이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는 것도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는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아주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많은 행복을 발견하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거저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십시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클라라는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선택한 일에서 행복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행복을 발견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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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멋지고 아름다운 삶
- 기도가 답이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얼마전 8월 기도의 지향을 발표하셨습니다. 즉 모두를 교회의 변형을 위한 작업에 초대하셨습니다. 성령에 영감받아 기도와 애덕, 그리고 섬김을 통한 “우리 자신의 개혁(a reform of ourself)”을 시작하는 작업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새삼 무엇보다 우리의 개혁에, 내적혁명에 기도보다 우선적인 것은 없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원하십니까? 기도가 답입니다. 늘 기도에 늘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기도의 대가大家이자 달인達人인 모세를, 예수님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녀 클라라를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도반이었던 성녀 클라라 축일입니다. 성녀 클라라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61세를 사셨습니다. 성녀에 대한 약전略傳입니다.
-성녀는 40여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섬기며 살았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던 성녀의 삶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기도와 자문을 얻으려고 성녀를 찾았다.
성녀는 42년의 수도생활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냈으며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여 모든 일을 이루어냈다. 1253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는 마지막 임종어인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신 주님은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선종 2년만인 1255년에 교황 알렉산데로 4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성녀를 칭송했다.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
순전히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할 때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열려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점차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어제 방문한 도반道伴 사제에게 준 기도에 대한 조언이 생각납니다. 더불어 자기 본당 신부를 ‘보좌신부의 수호성인’이라 칭찬하던 모습이 기분 좋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신부님의 서품상본 성구가 기막히게 좋습니다. ”아빠! 아버지!“(마르14,36) 성구를 호흡에 맞춰 들숨시 “아빠!” 날숨시 “아버지!”하고 끊임없이 되뇌이며 바치면 저절로 참 좋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호흡하며 살 때 서서히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될 것입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작품이, 기도의 작품이 오늘 모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로서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세오경이 끝납니다. 그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신명기 마지막 34장 모세의 죽음이 감동적입니다. 참 파란만장한 삶을 참 멋지고 아름답게 살았던 기도의 달인, 모세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34,10ㄴ)란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다음 길다 싶지만 모세를 기리는 마음으로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에서 죽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모른다.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일 동안 곡하였다.‘(신명34,4-8)-
주님의 전사, 주님의 벗으로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살다가 떠나야 할 때 공동체의 애도속에 자취없이 잘 떠나는 모습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이 또한 잘 살아 온 결과에 대한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사실은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와의 관계입니다. 흡사 릴레이 경주시 바톤 텃치를 연상케 합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신명34,9)
말그대로 여호수아는 ‘신의 한 수’입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하느님의 뜻, 공동체의 뜻에 따라 제 바톤을 이어 받아 원장직에 충실한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제 사랑하고 신뢰하는 후배이자 현재의 원장인 파코미오 수사를 대할 때 마다 하느님 은총의 섭리에 놀라움과 더불어 연상되는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필시 모세 역시 인간적으로 서운하고 아쉬운 점이 있었겠듯이 저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공동체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섭리의 사랑이 하늘같이 크기에 저절로 하느님께 감사, 감동, 감탄하게 됩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모두가 기도의 열매이자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모세를 롤모델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모세도, 예수님도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이 분들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의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나 모세보다 위대하신 예수님이심을 히브리서는 다음처럼 고백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었듯이,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세우신 분께 충실하셨습니다. 그러나 집을 세우신 이가 집보다 더 존귀하듯이, 예수님도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셔야 마땅합니다.”(히브3,2-3)
바로 2천년 이상 계속되는 주님의 집인 가톨릭 교회가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기위해 모든 절차를 밟으며 최선을 다해 해결할 것을 권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공동체의 문제아 형제들에 대해서는 처벌이 아닌 화해와 치유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겸손과 분별의 지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서 가능합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갈 때 이런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입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 기도에 충실할 것을 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기도의 자리입니다.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공동체를 원하십니까? 모세를, 예수님을, 클라라를 닮고 싶습니까? 기도가 답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이름으로 모여 예수님과 함께 기도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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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형제애를 촉구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예수님께서 형제와 이웃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혹 화해에 이르지 못하면 증인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며, 그래도 안 될 경우 교회의 공적인 중재를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자칫 이 절차는 둘 사이에 해결하고 끝낼 일을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려 일을 크게 만들고, 교회 공동체까지 개입시켜 더 골이 깊어지는 게 아닐까 오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과정을 제시하시는 건, 둘 사이에서 어떤 내외적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감정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보다, 차근히 객관적 시선 앞에 스스로를 놓고 최선을 다해 화해의 노력을 다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 같아도, 우리가 땅에서 풀어 주고 탕감해 주는 마음씀씀이가 하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니 대단하지요. 그래서 더욱 힘을 다해 자신과 형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풀어 주는 만큼 우리 자신이 먼저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는 점이 이 방식의 신비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우리가 저마다 서로 다르고, 각자 불완전한 만큼 상대에게 오해받을 소지도 많은 죄인들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 그분께서 현존하십니다. 다수의 공동체여도, 두어 명의 소수여도 마찬가지이고, 친교 상태는 물론 갈등 상황이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죽음과, 그에 대한 성경 저자의 평가를 전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신명 34,10)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는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지상의 삶을 마칩니다. 성경은 모세가 므리바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그 탓을 모세에게 돌리지만(민수 20,2-13 참조), 이 안타까운 결함도 모세와 주님 사이의 사랑이나 모세의 존재적 가치를 희석시킬 수 없지요.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창조주와 피조물이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귄다는 건 참 놀랍고도 매혹적이지요. 하느님은 모세뿐 아니라, 피조물 중에서도 특별히 당신의 모상을 나눠주신 모든 인간과도 실상 이런 관계를 맺고 싶어하십니다. 주님과 모세가 나누었던 특별한 사랑은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열린 가능성인 셈이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 주고 싶어하시고, 당신 마음을 내어주고 싶어 우리 주변을 서성이십니다. 당신께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영혼을 찾고 계시지요. 그분은 우리(나)의 얼굴을 마주 보며 사귀고 싶어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녀 클라라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축복문을 남겼지요.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주께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시어 평화를 주소서..."
거기에 더해서 주님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서로 이러한 친밀한 유대가 이루어지길 바라십니다. 저마다 부족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늘 말도 많고 탈도 많기 마련이지만 원래 사람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이루라고 불리웠지요. 크고 작은 갈등과 부딪힘 속에서 답이 없는 듯 막막할 때가 더 많지만, 그건 아직 우리가 과정 중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지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하느님이 ...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형제를 위해 조금만 더 애써 보라고 우리를 다독이시는 듯합니다.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형제에게 다가가 경청하고 용서하여 그를 얻는 것은, 우리는 물론 주님께도 참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바로 그 자리에 당신께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니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마음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주님께 봉헌하고 용기를 내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으니 그 자리에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반드시 화해가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사랑으로 용기를 내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성녀 클라라가 그 축복에 함께 하실 겁니다.
성녀 클라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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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18,15)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인 '아씨시의 성녀 클라라'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는 깊은 영적 동반자 관계입니다. 그 중심에는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온전하게 닮으려고 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성녀 클라라는 철저한 가난을 추구했습니다.
자매들은 단순한 노동과 애긍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철저한 가난과 관상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성녀 클라라는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난하신 사부 성 프란치스코 때문에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어제는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삶과 신앙이 스며있는 안양 수리산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망나니의 칼 아래에서도 평화로웠던' 이성례마리아 복자를 만났습니다.
제12처와 13처 기도문을 통해 만난 복자 이성례마리아와 그 자녀들의 모습에 마음이 깊게 머물렀습니다.
사형판결을 받은 마리아는 옥으로 찾아온 자식들 얼굴을 보니 또 다시 순교에 장애가 될까 두려워 아이들을 돌려 보냅니다. "다 들 가거라. 그리고 특히 하느님과 성모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너희 큰 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라."(12처)
"사형 집행이 되는 날 아침, 야고보와 어린 세 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메고 망나니를 찾아가 부탁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많이 아프지 않게 단 칼에 하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13처)
우리도 성녀 클라라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사랑하고 가난을 추구합시다!
우리도 장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마리아 순교자처럼 나의 잘남을 죽이는 순교,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이겨내는 순교의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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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클라라 성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감동받아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사부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가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지금도 아시시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가보면 당시 수도 생활이 얼마나 단순 소박하며 가난과 기도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클라라 성녀의 침실은 맨바닥에 약간의 풀을 모아 침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녀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가난함을 얼마나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녀가 숨을 거둔 자리에 있는 장식 없는 십자가는 그녀가 한평생 얼마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한 예수님에 대한 관상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1240-1241년 사라센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심한 병 중에 있던 클라라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들과 수도원을 구하고자 성광에 성체를 모시고 나가 적군 앞에 섭니다. 성녀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흘러 나와 사라센 군대는 그만 두려움에 도망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성녀의 가장 큰 미덕은 겸손한 생활입니다. 40년을 수도원장으로 지낸 그녀가 가장 좋아한 일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씻어 주고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단장하십시오.” 매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라는 성녀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놀라운 겸손과 비할 수 없는 가난을 배웁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바라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거울 삼아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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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상처를 못 본 척할 수 있겠는가?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그의 곤경을 못 본 척한다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우리의 상처보다도 형제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가 비난받는다고 느끼면 잘못해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충고한다면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충고해 주질 않았다면 그는 파멸의 길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타일러야 한다. 이는 공동체가 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하신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속세의 이윤을 추구하며 사기와 거짓 맹세로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단죄를 받으면, 이것은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무효로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매인 채로 있다. 훈계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때는 풀리는 것이다. 매이는 사람은 충고를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하나가 되는 것은 생각과 의지의 일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참으로 일치하지 못했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평화와 일치와 화합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그것들은 주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그러니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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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네가 보기에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으로 해석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한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적인 잘못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가 나서야 할(17절) 공적인 죄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너에게’ 라는 말은 삭제를 하든지, 아니면 다르게 번역해야 합니다.
(그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는 상황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짓고 있다고 내가 판단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7,1).
그렇기 때문에 형제의 죄를 판단할 때에는 정말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고,
우선 먼저 ‘나 자신’의 죄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그를 타일러라.” 라는 말씀은 “그를 심판하여라.”가 아니라,
“그가 심판받지 않도록 그를 도와주어라.”입니다.
(사랑으로 회개를 권고하라는 뜻입니다.)
‘단둘이’ 만나라는 말씀은 그 형제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거나 망신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라는 뜻인데, 이 말씀도 ‘사랑으로’ 권고하라는 가르침에 포함됩니다.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막는 일은,
또 그 형제를 회개로 인도하는 일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권고하는 일은,
아픈 형제가 건강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를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셨을까?”
복음서에 기록은 없지만,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즉 유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그를 타일러서 바로잡으려고 애를 쓰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은,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 있었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갈라티아서를 보면, 베드로 사도가 ‘단죄 받을 일’을 했을 때(갈라 2,11),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 사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갈라 2,14).
왜 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라는 베드로 사도의 위치 때문에,
또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바르나바 사도도 잘못했고,
두 사도 외에도, 같은 행동을 한 사람들이 더 있었습니다(갈라 2,13).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 일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갈라티아서에는 베드로 사도 개인을 비판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갈라 2,14),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공적으로 함께 반성해야 할 교리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6-18).”
개인의 힘으로 안 된다면 공동체가 나서야 하는데,
몇 사람이 가서 권고하든지 교회 전체가 나서서 권고하든지 간에
‘잃은 형제를 되찾기 위한 일’이라는 원칙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말씀은,
“신자 자격을 정지시켜라.” 라는 뜻입니다.
(‘파문’하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신자 자격이 정지된 상태는 곧 ‘조당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는 ‘성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조당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회개해야 하고, 교회에서 정한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파문이나 조당은 영구 추방이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일시적으로 성사에 참여할 자격을 제한하는 것뿐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의 권한보다 땅의 권한이 위에 있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땅에서 행사하는 권한은 하느님 뜻에 합당해야 하고,
하느님 뜻을 실현하는 방법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파문이든지 조당이든지, 또는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하든지 간에, 그 모든 일은
‘하나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죄가 크더라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온 공동체가 그렇게 노력해도 ‘스스로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공동체는 그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 말씀을 ‘잃은 형제를 되찾는 일’에 적용하면,
‘마음을 모아’ 라는 말씀은, 사람들끼리 마음을 모으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또는 하나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일치시키라는 가르침으로,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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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혼의 병자를 사랑으로 품으며
살다보면 사랑의 질서를 교란시켜 공동체에 어려움을 주거나(18,15-20)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불화를 일으키는(18,21-35) 이들을 만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용서와 화해로 이끄시고자 하십니다. 오늘의 대목은 공동체가 죄지은 형제자매를 어떻게 죄를 뉘우치고 화해하여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인지 알려줍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공동체, 수도공동체 등 교회 공동체에서 공동체 내부 생활에 심각한 어려움과 혼란을 준다든가, 스캔들처럼 공적으로 공동체의 신용을 손상시키는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기쁘게 살아야 할 텐데 ‘눈총’을 받고 사는 이들이 늘 있지요. 수도자들 가운데도 ‘저 사람의 성소는 악표양을 보이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며 사는 이들도 있지요. 어디로 가도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며 분란을 일으키니, 십자가도 그런 십자가가 없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를 교란시키는 형제자매에 대해 다음 세 단계의 과정을 알려줍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죄지은 형제자매를 조용히 타이르고(18,15), 그가 말을 듣지 않거든 둘 혹은 셋이서 다시 대화하라는 것입니다(18,16). 그조차 받아들지 않거든 교회 공동체에 알리고, 그래도 별도리가 없으면 그가 회개할 때까지 공동체에서 격리하라 합니다(18,17).
이러한 절차는 일차적으로 죄인에 대한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화해와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고, 죄를 지은 형제자매가 주님의 심판에 놓이지 않도록 이끄는 사랑과 화해의 초대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맺고 푸는 권한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권이지요. 그러나 이 권위는 공동체를 통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화해의 장소입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이런 과정을 진행함에 있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18,19-20). 왜냐하면 죄인과 어려운 대화를 할 때에 공동체는 인간적 생각과 지혜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죄는 사랑의 결핍이기에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로 죄인의 마음을 듣고 그가 잘못을 뉘우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 참으로 골칫덩어리로 여겨지는 형제자매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이런 ‘형제적 교정’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랑의 십자가’이기도 함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런 경우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오신 주님께 기도하며, 사랑을 품고 또 사랑을 위해 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하면 사랑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사랑의 상처를 입은 영혼의 병자’이지 않습니까? 영혼의 병자를 사랑으로 다시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형제 하나를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권고를 거부한 죄인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영원한 이방인’이 아니기에, 그의 회개를 위해 더 큰 사랑을 품고 ‘한마음으로’ 기도해야겠지요. 단죄에는 빠르나 ‘영혼의 병자’를 사랑하는 데는 무딘 자신을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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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구원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평생을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보이는 느보산 피스가 꼭대기에 섭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충실했던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신명 34,4)
이미 광야 ‘시험’이라는 의미의 므리바, ‘다툼’이라는 의미의 마싸의 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한 사실을 들어 모세와 함께 그 세대의 사람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려주십니다.
민수기 저자는 불평사실과 연결해서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거닐 때, 르피딤에서 진을 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이 없다고 모세와 다투고 하느님을 시험한 적이 있습니다.
탈출기 저자는 그 장소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였다 해서,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 하였다.”(탈출 17,7) 시편저자도 므리바의 일을 회상하며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시편 81,8; 106,32)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의 마지막 삶의 이야기를 신명기 저자는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아 안수를 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나이 백스무 살이 되었을 때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모압 땅 벳프오르 맞은 쪽 골짜기에 묻히게 되었는데, 누구도 그 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모세에 대해서 최대의 찬사와 함께 이렇게 적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10-12절)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공동체에 관련되면서도 서로 독립된 세 가지 말씀들을 제자들에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단둘이 따로 만나 충고와 함께 타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세워 더 이야기해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마저 안 되면 교회 공동체에 알리고 그것도 또 안 되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권한에 대해서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그리고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9-20절)
거룩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의견도 제각각일 수 있고 또 잘못을 하는 형제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가끔씩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망스런 일들도 벌어질 수 있고 또 시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또 세상은 기회는 왔다고 신랄하게 교회가 이러서야 되겠느냐?며 시퍼런 칼을 대고 색깔이 없는 군중은 여기에 가담해서 한 마디씩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말들은 많은데 쓸데 있는 것이 많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므리바와 마싸에서 저지른 잘못은 불평하며 하느님께서 세우신 모세의 권위를 무너트리려 했던 것입니다.
성서 기자들은 이 사건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고 두고두고 곱씹어 보며 교훈을 갖게 합니다.
많은 불평은 다 이유가 있고 그 나름대로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악성 댓글은 자신들이 옳다고 하면서 이웃이 부서지는 것에는 무관심하거나 극단 이기주의로 흘러 갈 수 있습니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따라야 하고 정의와 사랑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보와 자기희생도 감안해야 성장과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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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원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언젠가 아시시에 들렀을 때의 경건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특히 클라라 성녀와 동료 수도자들이 기거했던 다미아노 성당에 들렀을 때, 그 가난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눈에 선합니다.
그 좁디좁은 공간에서, 처참할 정도의 청빈한 생활 가운데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매들과 함께 찬미가를 불렀던 그녀였습니다. 가난이라고 다 똑같은 가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웬일인지 그녀의 가난은 우리들의 옹색하고 남루한 가난과는 달리 찬란하고 영롱했습니다.
클라라 성녀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가난과 겸손의 성인이자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그가 지녔던 인간적 성품, 그가 추구했던 가치관, 그가 소유했던 신앙과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당대 수많은 청년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녀 역시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이 주도한 가난을 통한 영적 쇄신 운동에 흠뻑 매료된 그녀 역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귀족 가정 출신 자녀로서의 풍요와 특권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상속 재산도 자발적으로 포기했습니다.
출가 이후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영적 여정을 단 한 치 오차도 없이 충실히 따랐습니다. 클라라의 영성은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동일합니다. 가난과 겸손과 사랑입니다. 그녀가 자주 강조한 것은 그냥 가난이 아니라 겸손과 함께 하는 가난, 그리고 동시에 가난과 함께 하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애 안에서 가난과 겸손은 다정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 안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가난과 겸손의 실천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에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클라라의 삶이 스승 프란치스코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녀는 봉쇄구역 내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에 따라 관상 수도생활을 해나간 것입니다. 그녀가 평생토록 관상 수녀회 안에서 끊임없이 바라본 것은 프란치스코가 바라본 것과 동일입니다. 곧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동시에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사람들은 ‘복사판 프란치스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또는 ‘제2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의 영혼에서 나온 여인’, ‘프란치스코의 거울’, ‘프란치스코의 여성적 얼굴’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일컬어 ‘복되신 스승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클라라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당시 아시시의 교구장이셨던 귀도 주교님께서는 극구 사양하는 그녀를 수녀원장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 직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수녀원장인 그녀였지만 수녀원의 허드렛일은 당연히 자신의 일이려니 생각하고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해나갔습니다. 그녀가 유독 좋아하던 일이 한 가지 있었는데, 동료 수녀들이 식사할 때 ‘서빙’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밭일을 끝내고 흙 먼지투성이의 발로 들어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정성껏 씻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재빨리 수녀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클라라의 잠자리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바닥이었습니다. 냇가에서 주워온 돌이 베개였습니다. 작디작은 빵 한조각과 물 한잔이 매끼니 식사였습니다. 실내장식이나 난방은 고사하고 아무런 설비도 안 갖춰진 누추한 거처에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가난이 무엇인지, 추위에 떤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피로에 지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온 몸과 마음으로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더할 나위없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정원에 핀 첫 꽃송이로서 마치 빛나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희고도 순수한 봄꽃과도 같이 향기로웠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프란치스코의 딸이었으며 가난한 클라라회의 창설자였습니다.”
클라라는 한평생 봉쇄구역 안에서의 관상생활에 전념하였지만, 자신의 삶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의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하늘 아래에서 내가 바랐던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그 기쁨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주님 안에서 늘 즐거워하며, 슬픔이나 우울이 그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원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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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의 공동체에 꼭 머물러야 하는 이유: 사귐에 원한이 없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둘이나 셋,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개인적으로는 말할 자신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잘못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죄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말해줄 용기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 잘못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상대와의 감정이 상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내면에는 나의 감정도 다치기 싫고 상대도 잃기 싫은 복합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잘못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해 줄 용기가 없다면 어차피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집착이고 무관심입니다.
집착과 무관심은 반대 같지만 실상 같은 심리입니다. 애인이 없을 때는 결혼 안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애인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목을 맵니다. 그러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좋습니까? 매우 무섭습니다. 내가 떠나려고 할 때 어떤 일을 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떠날까 봐 나에게 잘못을 해도 그 잘못을 절대 말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상대가 나에게 잘못하는데도 그냥 참아내고 있는 것은 다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공동체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가족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살 수 없다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또 상처받기 싫어서 아예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혹은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니면 더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고, 자기 안에 고립되는 이유는 더는 아프기 싫어서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해도 그냥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던가를 선택합니다.
김창옥 강사가 ‘어쩌다 어른’에 나와서 ‘학창시절 많이 놀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강의한 것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학교 다닐 때 놀던 여자들이 시집을 잘 갈까요? 시집을 잘 간다는 것을 세속적으로 표현해 볼게요.
첫째 남편의 경제력이 매우 좋습니다. 둘째 남편과 너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셋째 그 여성은 이제 놀지 않습니다. 교회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회개했습니다. 많이 놀아봐서 원이 없습니다. 오빠들도 너무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러니 더는 한이 없습니다. 이제 만날 오빠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넷째 항상 감사합니다. 이것을 자족(自足)이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願)이 없습니다.
놀아봤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원(願)이 한(恨)으로 바뀝니다. 원과 한의 합성어가 무엇입니까? 원 + 한 = 원한. 원한이 있는 귀신은 어디를 떠돕니까? 구천! 현대 사회의 구천이 어디예요. 백화점. 아무것도 안 사면서 그냥 걸어 다닙니다.”
웃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은 언제 원한이 쌓일까요? 사랑받지 못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 원한으로 귀신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안에 고립되거나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도 못 하는 집착으로 휘둘리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마치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백화점을 계속 걷는 사람의 모습과 같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별의 아픔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나은 사람을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의 아픔이 감사함이 됩니다. 그 사람과 계속 사귀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누군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사람이 돌아갈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무슨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에게 잘못된 것을 말해주고 충고도 해 줍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자신을 떠나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쁜 남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그 안에 머물면 더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원도 없고 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꼭 속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용기 있게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꼭 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용기 있고 당당하고 또 이타적인 사랑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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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동시에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하는 죄인들의 공동체라고도 불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지만 불완전하고 인간의 나약함은 언제나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모인 두 세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과 우리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동행합니다. 부족함이 모여 서로가 채워주고 이끌어주는 가운데 사랑과 봉사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장소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몸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신비체이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순명하며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갑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 지도자들의 결정을 따르는 것도 모두 우리가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나약함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지침을 따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해서 또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뜻하신 계획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의 승인을 받아 활동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갑니다.
물론 지도자들 역시 인간적 나약함이 있기에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놓칠 수도 있고 때로는 인간적 애착으로 잘못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따르는 백성은 교회의 지도에 순명하며 자신의 삶으로 증명할 뿐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클라라 성녀 역시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동받았던 그녀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었지만, 가족의 반대와 복음적 가난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교회 지도자 때문에 어려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꾸준히 노력하며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봉헌된 삶은 자연스럽게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게 이끌었고 결국 수많은 은총의 전달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느님을 향해 동행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서로의 부족함을 서로가 끌어주며 하느님 안에서 삶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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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신명34,1~12)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7)
'기력도'로 번역된 '레호'(leho)의 기본형 '레아흐'(leah)는 '신선함'이라는 뜻으로서 여기만 나오는 단어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다른 형용사로 '라흐'(lah)가 나오는데, 이것은 과일의 신선함이나 즙이 많은 상태(민수6,3)를 묘사하며, 자라나는 나무 혹은 금방 베어 아직 싱싱함을 유지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푸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창세30,17; 에제17,24).
그리고 '없지', '쇠하지'로 번역된 '나쓰'(nas)는 '없어지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기력도 없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육체가 나이에 비해 여전히 건강을 유지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전쟁의 출전을 가리키는 '더 이상 나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신명31,2)라는 모세의 말과 신명기 34장 7절의 표현은 상충되지 않는다.
신명기 34장 7절의 의미는 그가 죽기 전까지 젊은이 같은 건강을 유지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까지 모든 신체의 기능이 성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죽음을 담대하게 맞이했다는 뜻이다.
한편 모세가 죽은 나이인 120세는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후에 인간의 수명으로 말씀하신 120년의 기간을 다 산 나이였다(창세6,3).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찼다.'(9)
성경 원문은 한글 성경의 번역 순서와 다르게 본절이 '여호수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도자의 권위가 이제 여호수아에게 옮겨졌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강조하는 문장 구조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혜의 영'으로 번역된 '루아흐 호크마'(ruah hokma; the spirit of wisdom)는 하느님께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일컫는 말이다(탈출28,3).
즉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안수'에 해당하는 '싸마크'(samak; '안수하였다'; had laid his hands on)라는 공식적인 의식을 통해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선포했을 뿐 아니라 내적으로 여호수아에게 민족을 이끌어 갈 지도력과 지혜의 은사를 부어 주신 것이다.
더군다나 '가득찼다'로 번역된 '말레'(malle; was filled with; was full of)는 '충만했다'는 뜻인데, 이 '말레'(malle)는 완료형이므로 이미 지도자의 권위가 그에게 옮겨졌음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이렇게 하여 모세를 중심으로 한 파란만장했던 출애굽 시대는 일단락되고, 후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가나안 정복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10)
신명기 18장 15절에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모세의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장차 모세와 견줄 수 없는 완전한 예언자이신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예언한 내용이다.
그런 반면에 신명기 34장 10절의 말씀은 예언자 자체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언자들이 나오지만 모세에 견줄만한 탁월한 예언자는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예언자로서 모세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18,15-20)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도덕과 윤리로 잘못 산 그 죄를 타이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하마트리아, 과녁을 벗어나다). 곧 하느님의 뜻인 구원의 길을 벗어나 인간들의 뜻을 구원의 길로 걷는 그 잘못을 타이르라는 말씀이신 것.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인간들의 계명, 규정과 교리 그 인간의 의로움의 길을 구원의 길로 잘못 알고 걷고 있다면~ 십자가의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이 구원의 진리라고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타일러라(아쿠오- 들려주다)
그러면 그를 살리는 곧 예수님의 지체로 한 형제를 얻는 것이다.
(에페3,6)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 둘은 선악의 두 법을(셋은 하늘의 숫자) 그리고 그 선악의 법을 구원으로 완성하시는 십자가 곧 선의 대속으로 악이 용서 받아 구원 받는 그 진리(성령)의 확정을 받는 것.
다시~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가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것을 뜻하며 성령께서 확정하신다. 그것이 또한 교회의 가르침인 것.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 세리 처럼~ 죄인으로 간주하여 죄인을 살피시는 하느님께 맏기는 것.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이 땅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인 이타의 사랑, 곧 십자가의 대속 그 구원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로마1,20참조) 그 구원의 약속 그 말씀을 깨달아 믿으면 하늘이 열릴 것이고 그것이 아닌 땅의 순리, 법을 중시하여 살기만 한다면 땅에서 잘 살다~ 영원히 땅에 갇히게 되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그 두 마음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 곧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한 마음으로 구하면 하느님의 뜻인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 둘이나 셋,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진리나 모두 예수님의 이름(말씀)으로 그분의 뜻으로 알아들으면, 깨달으면 하느님의 뜻인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21절이하 용서의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참조~(요한5,39-40)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 영원한 생명은 사람의 희생, 열심히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희생으로 얻는 것을 성경 전체를 통해 배우는 것, 깨닫는 것이다.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들을 위해 간구하여 주소서. 아멘.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8,15~2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으로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19)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0)
마태오 복음 18장 15~17절에서 형제의 죄에 대한 3단계 처리책에 대해 논했는데, 그 마지막 단계가 교회의 권면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공식적인 권면에 대해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교회에서 추방하는 징계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이 일은 교회 차원에서만 행해지고, 실로 신중하게 시행되어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18장 18~20절에서 교회의 징계 권한에 대한 합법성을 부여하심과 동시에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고 사려깊게 시행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마태오 복음 18장 18절은 동사가 복수 2인칭으로 쓰였다는 점만 빼고는,마태오 복음 16장 19절과 동일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에 주어진 권위를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매고 푸는 것'은 교회 구성원의 죄에 대한 징계 권한의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 명백하다.
한편, 마태오 복음 18장 19절에 대해서 한글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만일'로 번역될 수 있는 '에안'(ean; if)이 문장 서두에 기록되어 있어서, 합심하여 청하는 상황이 충족되기만 하면, 청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무엇이든'에 해당하는 '페리 판토스 프라그마토스'(peri pantos pragmatos; about anything)에서 '프라그마토스'(pragmatos)의 원형 '프라그마'(pragma)는 '일', '사건', '과업'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소송', '논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을 모아'에 해당하는 '쉼포네소신'(symphonesosin; agree)의 원형 '쉼포네오'(symphoneo)는 영어에서 '교향곡'이라는 뜻을 지니는 '심포니'(symphony)의 어원을 이루는 말로서, 서로 뜻을 같이 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19절의 '프라그마토스'(pragmatos)는 본 단락이 교회의 징계 권한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징계 권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쉼포네오'(symphoneo)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징계 권한이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며, 두 사람 이상의 합치된 의견과 한 마음으로 청하는 기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전제될 때, 비로소 교회의 징계 권한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권위있게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0)
본절은 교회의 구심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절이다.
여기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에 해당하는 '뒤오 에 트레이스'(dyo e treis; two or three)는 소수의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모이다'는 의미로 번역된 '쉬네그메노이'(synegmenoi; come together; gather together)의 원형 '쉬나고'(synago)는 '~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쉰'(syn)과 '오다', '가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아고'(ago)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함께 모이다'는 의미가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배우고 하느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집회소인 '회당'을 가리키는 '쉬나고게'(synagoge)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니까 '쉬나고'(synago)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이는 지향점은 바로 '예수의 이름'이다.
'내 이름으로'로 번역된 '에이스 토 에몬 오노마'(eis to emon onoma; in my name)에서 '~안으로'(into)라는 뜻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eis)가 쓰였는데, 이 '에이스'(eis)가 때로는 위치를 나타내는 전치사 '엔'(en; in)의 대용어로도 쓰이는데, 여기서는 방향과 위치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 안으로 함께 나아가야 하고, 예수님의 이름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 18장 20절은 교회의 지향점과 구심점이 예수님의 이름임을 잘 보여준다.
한편,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에서 '나도 ~있다'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 I am)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의 현재형이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예수님께서도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일반적인 진리나 습관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겠다는 뜻이다.
이 약속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마태28,20).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에 따라 오늘날에도 믿는 이들 가운데 영으로 현존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인격적으로 친교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구절이 교회가 시행하는 '징계 권한'의 문맥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믿는 이들의 일치된 뜻에 의한 교회의 '징계 권한'이 하느님의 인준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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