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식어 버린 커피를 홀짝 거리고 있는
수희는 보안경을 끼고, 컴퓨터 화면에 눈길을 주고 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번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니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는 거야."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차 지금 몇 시지... 어.. 밤 10시가 넘었네 이런..."
"나도 이젠 퇴근해야겠다."
사무실 전등 스위치를 끄고 마악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엄마?"
"지금 어디야?"
"혹시 집 근처?"
딸아이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낸다.
"아...미안 엄마 퇴근 중인데..."
"무슨 일 있니?...그게 아니고."
"오늘은 무슨 날인 줄 알아."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퇴근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엄마는 정말 일에 미친 거야."
그리고 전화가 툭 끊긴다.
나수희 한국 나이로 50살이다.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다.
회사에서는 직원 5명을 거느린 기획사 대표다.
기획사 대표 명함을 내밀면,
대단히 게 크게 성공한 여사업가로 알지만 속 빈 강정이다.
자동차를 주차를 하고 집에 들어 서니 저녁 10시 30 분이다.
가족들은 수희가 현관문 비밀 번호를 누르자 각기 방에서 있다 뛰어나온다.
수희 남편 김영우는 중견 기업 임원이다.
잠옷 바람으로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거실로 나온 영우는 아내의
늦은 귀가가 몹시 못마땅하다.
"오늘은 혼자 야근했어?"
"직원들 놔두고 왜 혼자 난리야."
수희 남편 영우가 이마를 찡그리며 인상을 쓴다.
그럴때 마다 수희는 남편에게 미안하다.
"그게 아니라..."
"뭐가 그게 아니야."
영우는 수희 팔을 붙잡고 어이 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 간다.
"직원들 월급 주면서 일을 시켜야지."
"바쁘면 함께 야근을 해야지 원, 허구한 날 대표가 야근하고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으니 그 모양이지..."
수희 남편 영우는 아내 회사 실적을 올려 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것을 아는 수희는 더욱 일에 매달리고 있다.
두사람의 실랑이를 보다 못한 딸 예은이 영우에게 눈짓을 보낸다.
그렇게 부부의 설전이 끝나고 나서
식탁에 둘러 않은 4사람....
늦은 시간 식탁에 케이크가 차려져 있고 알록 다록 예쁜 초가 타고 있다.
"축하한다 우리 딸 이번에 큰일 했다."
"앞으로는 더욱 잘 될 거야."
영우가 딸에게 축하를 건네자 수희는 딸 예은을 보며
괜스레 미안하다.
오늘도 조촐한 파티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지난번 발주받은 B사의 기획안을 들고 혼자서 컴퓨터와 씨름을 하다
퇴근이 늦은 것이었다. 엄마로서 0점에 가까운 수희는 남편 영우에게도
자식들인 예은과 아들 가람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수희와 영우의 딸 예은은 올해 25살이다
국문학을 전공을 하고 m사의 비서실에서 근무 중이다.
그녀는 틈틈이 영화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번 독립영화제 시나리오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 하게 되어
가족들과 조촐한 파티를 하고 있다.
"우리 딸 누구를 닮았을까?"
"이렇게 일에 집중을 하는 것은 아마도 엄마를 닮지 않았을까..."
"모르는 소리다."
"일에 집중하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너희 엄마처럼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고 오직 바깥일만 하는 것도 좋지 않아."
영우가 자식들을 앞에 두고 아내인 수희를 흴책을 하고 있다.
"아빠 그만 하세요."
"그래요 아빠 오늘은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인데
"우리 지금부터 파티 시작해요."
"알았어 내가 너희들 때문에 산다."
영우의 말에 수희는 할 말이 없다.
집안일을 늘 도맡아 하는 남편 영우에게 미안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밤잠을 설쳐가면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촛불이 타고 있고 케이크를 앞에 두고 식탁에 둘러앉아 있을 때
바이올린을 들고 나타난, 이 집의 둘째이며 막내아들인
가람이 축하 축하 연주를 하기 위해 플루트를 꺼내 왔다.
"아들 어쩐 일이야?"
"다시는 악기를 들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수희가 아들 가람을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자
옆에 있던 남편 영우도
"그래 이제 가람이도 성인이 된 거지."
"당연 하지 아빠."
"남자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제대했으면 성인이 된 거지요."
딸 예은이 가람의 어깨를 툭치며, 말하자 가람이 어깨를 으쓱한다.
가람의 연주가 끝나고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훈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람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예은도 피곤하다며 하품을 하다 방으로 들어갔다.
수희도 안방으로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남편 과일을 챙켜 들어갔다. 영우는 안방에 들어온 아내 수희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영우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살피다 아내 수희가 들어오자
리모컨을 끈다.
"우리 둘만 남았네.""
"당신 모처럼 집에 일찍 오니 나는 너무 좋다.
영우가 수희의 손을 잡으며 얼굴을 쓰다 듬자 수희는 딴청을 피운다.
"나... 사실 일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남편의 은은한 눈길에 수희는. 바쁘다는 핑계를 댄다.
"당신 남편 얼굴 좀 봐주라..."
"여보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몰라서 물어?"
"우리 함께 하는 시간 정말 오랜만인 거 알아?"
샤워를 마친 수희기 화장대에 앉아 얼굴을 두드리고 있다.
거울 속 중년의 여자는 눈밑에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피곤에 절어 있었다.
오늘따라 피부가 꺼칠하게 보인다.
"피부관리 샾에 가야 하나."
"왜 이렇게 피부가 생기가 없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자
언제 옆으로 왔는지 영우가 수희 어깨에 손을 얹고 바라보고 있다.
"언제 왔어요?"
"함께 잠자리에 들려고 왔지."
영우가 수희를 안으려 하자 수희는 영우의 팔을 내리면서
"안돼... 나 지금 일해야 돼..."
"뭐어 지금이 몇 신데 잠 안 자고 일을 한다는 거야."
"당신 제정신이야."
"봐봐 지금 12시가 넘었어."
"내일 당신 출근하려면 잠을 자야지..."
"나 아직 졸리지 않은데 당신 먼저 잠자리에 들어."
수희가 남편을 달래고 있다.
영우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 대면서 침대로 향한다.
"모처럼 당신하고 자려고 하는데 여자가
무슨 목석도 아니고 말이야 결혼은 왜 한 거야 도대체..."
영우의 볼멘소리는 독백이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
수희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배고픔을 느끼고 냉장고로 향한다.
늦은 시간 허기를 달래기 위해 냉장고 앞에서 서성이던 수희는 자신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것 같아 냉장고를 뒤로 하고 서재로 들어 오려한다.
그러나 텅 빈 위장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멜로디가 되어 흐른다.
냉장고를 열고 차가운 물만 마시려던 생각을 하자
냉장고 문에는, 당구장 표시가 되어 있고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늦은 저녁에 야식을 즐기던 수희는
건강에 적신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도 빵을 우물거리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영우가 아무리 말려도 늦은 시간 야식을 먹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칼로리가 높은
빵을 입에 넣으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야식 때문에 몸무게가 자그마치 20킬로 그램이나 쪘다.
자동차를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사무실 비밀 번호를 누르자
문이 딸각하고 열린다. 출근 시간 전이라 사무실엔 아무도 없다.
정적이 감도는 빈 사무실에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 탕비실에서 커피 한잔을 내려 마셨다.
새벽까지 끝마치지 못한 일 처리를 위해 키보드를 부산스럽게 누르고 있다.
적막한 사무실에 수희의 컴퓨터 기계음만이 요란스레 움직이고 있다.
오전 9시가 가까워지자, 사무실이 수선스럽게 술렁거리 더 책상 끄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서로 아침 인사 주고받는 소리까지 요란스럽다.
"일찍 나오셨네요."
"커피 한잔 드릴까요?"
직원들이 출근하면서 커피를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젊은 직원들이 있어
금방 향긋한 커피 향이 전체 사무실로 퍼진다.
사장실에 앉아 있던 수희가 인터폰을 들고 숫자를 누르고 있다.
"예 대표님."
"알겠습니다"
회의실은 금방 남. 녀 직원들이 한 명씩 자리를 잡는다.
수희가 상석에 앉아 회의를 시작한다.
"모두 모였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회의를 진행 하지요."
며칠 전 수의 계약한 기획안의 아웃트라인을 잡고 상세 정보를 입력해서 의뢰인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짜야한다. 직원들이 준비한 회의 자료를 검토하던 수희는 중간중간 직원들의
말을 막고 자신의 의견을 끼워 넣는다.
그럴 때마다 직원들의 탄성이 터진다.
"대표님 말씀에 동감 하지만 직접 현지답사를 위해
현장에 다녀오고, 하려면 경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자료를 활용하는 방안이 어떨까요?"
회의는 약 2시간 만에 끝났다.
지친 표정이 역력한 수희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쉬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지금 회의 끝났는데, 통화 괜찮아요."
"엄마 미안한데, 그날은 내가 너무 바빠 내려갈 수가 없어요."
수희가 친정 엄마의 전화 통화를 하다 거절 의사를 밝히자 상대방에서 먼저 전화를 끊는다.
아직도 엄마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딸 얼굴 한번 보기가 이렇게 힘드냐..."
이번에도 친정 제사에 참석을 못할 것 같다.
매년 친정아버지 제사에 참석을 못하는 바람에 가족들의 신임을 잃었다.
남편은 회사 일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잠시 다녀오라고 안심을 시키지만
수희는 한가 하게 가족의 기일을 챙길 수가 없다.
점심 식사를 마치죠 스케줄표를 확인을 하고 있더니, 자동차를 운전을 하고
현장으로 나간다.
마지막 영상 작업한 파일을 스크린으로 본부장과 함께 보면서 회의를 하고 있을때 였다.
갑자기 아랫배에 통증이 시작 되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
수희는 터지려는 신음을 참으며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평정심을 유지 하기가 힘들었다.
수희는 직원들이 눈치를 챌까봐, 호주머니에 있던 진통제를 꺼내어 삼켰다.
며칠전부터 시작된 통증과 하혈에도 일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약국에서 산 진통제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수희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부장이 달려와
"대표님 어디 편찮으세요?"
"아무래도 너무 안색이 창백합니다."
수희는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안심을 시켰다.
회의가 끝나고 혼자가 된 수희는 컴퓨터에 뭔가를 썼다.
잠시 후 자신도 모르게 끙 소리가 흘러 나왔다.
사실 하혈을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갱년기 여성이 생리를 했다면서 회춘이라고 기뻐 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 해도 생리 기간이 아닌데, 생리혈이 터지는 것은 경계를 해야 했다.
그리고는 일이 바빠 잊고 있었다. 요즘은 지방 관공서에서 발주한 기획안을 마무리 짓기 위해
전 직원이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번 작업은 연예인 섭외와 MC 까지 기획사에서 맡아서 하다 보니
직접 현장을 찾아서 취재를 하고 영상 파일에 넣을 ,현지 관광 상품을 짧은 1분간의
시간을 할애 하기로 했다. 잡다한 일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긁직한 일처리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수희 성격상 사무실에 앉아서 업무 보고만
받을 수 없어 직접 현장에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잠시 혼자 스케줄을 확인을 하다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 남편에게 사실을 말할까 하다 그만 두었다.
남편은 요즘 회사 일로 밤잠을 설치는 듯 했다.
영우도 아내인 수희에게, 회사일에 대한 것을 설명 하기를 싫어 한다는 것을 알기에 묻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다.
수희는 남편에게는 당분간 묻어 두고 싶었다.
몸의 이상 징후를 감지 했지만, 의사의 진단 결과에 따라, 가족들에게 알릴 것인지
아니면 혼자 가슴에 담을 것인지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 일을 한다는 핑계로 집안 일에 소홀한 자신에 대한 책망을, 피할수 없을 것 같아
그리고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주말이면 급한 일이 끝나 산부인과에 정기 검진을 받기로 했다.
잠시 혼자 스케줄을 확인을 하다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 남편에게 사실을 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50대 중반인 영우는 회사에서 창업 공신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언제 밀려 날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장은 70대 초반의 나이로 후계자를 자신의 장남으로 차기 회장으로
지목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있지만
회장의 장남이 회사를 장악을 하게 되면 영우도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명예퇴직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영우가 모시는 회장은 돌아 가신 자신의
아버지와 직장 동료로 인연을 맺어져, 아들을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시켜 지금에 이른 것이다.
며칠전 회장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영우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회사 일에 관여를 해서 지금의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는데
만약 현 회장이 경영 일선에 물러 나면, 다음 순서는 불을 보듯 뼌하다
회사에서는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현 회장의 측근들이 요직에 앉아
인사에 개입을 하고 있지만, 만약 회장의 장남이 차기 회장이 되면 창업 공신들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영우는 그동안 끊었던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직 40대인 회장의 장남이 새로운 회장에 추대가 되면
제일 먼저 자신의 목을 칠 것이라는 예상은 미리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우 자신도 쉽게 자리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자신은 늘 건강하다는 자부심에 빠져 있던 수희였다.
단 한 가지 체증이 남들보다 과 체중인 것만 조심하면 될 것 같은 자신이었다.
평상시 영우는 수희에게 다이어트를 제안을 했지만 추후에 검진 결과가 나오면 가족들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건강검진을 위해 아침을 거른, 그날 저녁 집으로 퇴근을 하니.
"무슨 일인데 아직 거실에 있는 거야?" "엄마 벌써 잊은 거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정말 모르는 거야?" "무슨 일인데 그래?"
"오늘은 아빠 엄마 두 분의 24주년 결혼기념일 이잖아."
"뭐라고..."
"정말..."
"내가 미쳤나 보다."
"결혼기념일을 잊다니."
"엄마는 못 말려."
"며칠 전에 내가 그랬잖아."
두 분 호텔 숙박권 준비했다고..."
딸 예은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옆에서 남편 영우가 그런 딸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엄마 여기..." 하고 봉투를 내밀며 웃는다.
남편 영우를 보니 괜히 멋쩍다
"당신은 항상 일이 먼저지."
"가족 일은 나중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결혼 기념일을 잊을 수가 있어.
예은이 선물한 호텔 숙박권을 받고 수희는 기뻤다.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꼬물꼬물 아주 작은 몸짓에 불과한 딸이 사회인이 되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글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는 예은이
그동안 틈틈이 쓴 시나리오가 독립영화 대본으로 채 책이 되면서 원고료를 받았다.
처음 받은 원고료를 부모의 결혼기념일 선물로 대신한 마음이 너무나 예뻤다.
그동안 회사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잘해주지도 못한 부모였는데
큰 효도를 받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담감이 생겼다.
남편은 지금 며칠째 들떠 있었다.
결혼기념일에 모처럼 집을 떠나 잠시 여행을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매일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무엇을 하면서 하루를 보낼 것인지에 대해
묻곤 했다. 그러나 수희는 너무 바쁘다 보니 영우와 하루를 보내기 위해
회사에서 늦게 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기획안 수정을 하고
영상에 음악 작업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수희는
호텔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주말 거실에서 들리는 분주한 소리에 잠을 깼다.
영우가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지 냄비 부딪치는 소리
가스레인지 켜는 소리가 단잠을 깨우는 바람에 수희는 잠에서 깨어
살짝 짜증이 났다. 새벽 3시 가까이 까지 마지막 기획안을 수정을 해서
회사 게시판에 올려놓은 뒤 잠자리에 들었기에, 아직은 몸이 개운치가 않다.
수희가 휴대폰을 보며 다음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당신 일어났어?"
"미안해 시끄럽게 해서 ."
"당신이 새벽까지 작업을 하는 줄 몰라서 잠을 깨게 했어 미안해."
수희는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뭐하는데 이렇게 소란스러워..."
"아니야."
"당신 그동안 나랑 결혼해서 살림하고 일하느라 시간이 없었잖아."
"그래서 오늘은 내가 특별히 몇 가지 반찬을 좀 만들었지."
식탁에는 꽃이 수희가 좋아하는 장미가 화병에 담겨 있고
갈비와 잡채까지 예쁜 접시에 세팅이 되어 있었다.
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간편식만 먹었던 수희는 남편의 정성에 그만 눈물이 나려고 한다.
" 어머 어쩜... 당신 이거 직접 만든 거야?"
"그럼 당신 내 솜씨를 못 믿는 모양인데,
"나 이래 봬도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3년 복무를 한 사람이야..."
"알았어요."
"그럼 맛 한번 볼까."
수희는 젓가락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영우는 수희의 표정을 보고 "어때 맛있지 그렇지..."
"응 간이 딱이네."
"애들아 너희들도 먹어."
주말이라 늦잠을 자던 예은과 가람이 나와서 맛있다고
아빠를 칭찬을 한다.
영우와 수희는 수영복을 사기 위해 함께 백화점에 갔다.
수희는 비싼 수영복을 사는 것보다는 렌털을 원했지만
영우는 남들이 입었던 수영복은 찜찜하다는 이유로 함께 쇼핑을 하기로 했다.
백화점은 주말이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실내 수영장용 수영복을 고르는데, 수희에게 어울리는 수영복이 없다.
영우는 이것저것을 찬찬히 살피며 수희에게 맞는 수영복을 고르고 있는데
수희의 시선을 딴 곳에 있었다.
"당신 정말 수영복 안 살 거야?"
"아니... "
"내가 너무 살이 쪄서 맞는 옷이 없으니 그렇지..."
수희는 수영복 매장에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몸매를 비춰 보며
기운이 빠진 모습이다.
영우는 아내의 기분을 풀어 주기 핸드백 매장으로 갔다.
"내가 여자들 핸드백을 고르지 못하니까 당신이 원하는 거 있으면
한 개 사도록 해..."
수희는 남편과 함께 백화점 쇼핑을 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영우와 수희는 호텔 프런트에 들러 예약 확인을 하고 체크인을 한 후 객실에 들어갔다.
카드키를 꽂자 방안에 불이 환하게 켜지며, 방안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호텔은 생각했던 것보다 방이 훨씬 넓고 아늑했다.
예은이 큰맘 먹고 호텔 예약을 했다더니 과연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 애를 쓴 것 같다.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남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푸른 산과 하늘이 맞닿아 마치 나무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
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 콧노래가 나온다.
그동안 일에 파묻혀 사는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자신에게 오늘처럼 하늘을 날것처럼
기분이 붕 떠오르는 날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 출세를 위해 달려왔다.
이제 아이들도 성장을 하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았지만
늘 눈앞에 일이 우선시되는 것 같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어 본 적이 없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고 있어?"
"우리 이왕 호텔에 왔으니 오랜만에 푹 쉬면서 수영이나 즐길까?"
"수영?"
"정말 당신 수영하려고 해요."
"당연하지 우리 간단한 옷으로 갈아 입고 수영이나 같이 합시다."
수희는 남편 영우가 수영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
그냥 단순하게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즐길 거라는 생각은 접어 둔 체
하는 수 없이 수영복을 사긴 샀지만, 자신의 몸매를 생각하니
수영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왜 그래... 아까는 수영장에 가자고 하니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두 사람은 수영복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수영장으로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부터 다이어트를 하는 것인데...
라커룸에서 수영복으로 탈의를 하면서도 계속 다이어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수희가 옷을 갈아입으며 호텔에 온 숙박객들을 살펴보고 있으니
자신처럼 배불뚝이는 없는 것 같아 자꾸만 소심한 마음이 생긴다.
주말의 호텔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영우와 수희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치고 수영을 했다.
영우는 수영 강습을 한 덕분인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폼이 마치 수영 선수처럼 날렵하다.
수희도 남편 영우를 따라잡으려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영우는 가볍게 한 바퀴를 돌고 수희에게로 다가온다.
"어때! 오랜만에 수영을 하니 몸이 가벼워진 것 같지 않아?"
"그런것 같아 여보 재밌기는 한데 좀 부끄러워서..."
약 1시간에 걸쳐 수영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온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수희는 식사를 마치면 잠자리에 들 생각에 기초화장만 하려 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고 있던 영우가 한마디 툭 던진다.
"당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텐데, 맨얼굴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이왕 왔으니 가장 예쁘게 차리고 나가자."
"시간도 많은데 정성을 들여 화장을 하는 게 어때?"
영우가 시계를 보면서 웃고 있자
수희도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6시다.
"그러네 아직 6시밖에 안 됐네..."
레스토랑에 도착을 하니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빙을 담당한 직원들의 조심스럽게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그러나 정중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예약된 테이블에 앉았다.
직원들의 친절이 베인 몸짓에 수희는 기분이 좋았다.
늘 자신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친절을 기획을 했고, 음악과 분위기를 기획을 했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타인이 준비한 기획안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추천 메뉴는 무엇인가요?"
영우는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직원을 불러 오늘의 추천 요리에 대해 질문을 한다.
두 사람은 셰프가 추천한 연어 요리에 화이트 와인을 겸해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으며 연주 또한 너무나 감미로워서 평생 잊지 못할 결혼기념일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영우도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평상시에 술을 즐기지 않는 수희는 그만 식사와 곁들인 와인에 살짝 취기가 도는지
볼이 발그레하게 변해 간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운지 영우는 아내의 팔을 살짝 잡는다.
두 사람이 객실로 돌아왔다. 편안한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앉아 있을 때
룸서비스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벨이 울린다.
호텔 직원이 꽃바구니와 와인을 들고 서 있다.
그 모습을 본 수희는 깜짝 놀라서
"이것도 오늘의 이벤트야?"
"당신 놀라기는 아직 일러."
영우는 노트북을 꺼내어 키보드 조작을 하자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영우의 표정은 사뭇 진지 했다
"당신 왜 그래... 오늘따라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정말 그렇게 느낀 거야?
"응... 정말 다른 날과 다른 것 같아서 그래."
어쨌든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당신과 내가 사랑으로 결합한 날인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어." 영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내 수희에게 말했다.
수희는 남편 영우가 다른 날과 달리 이것저것 챙기는 것이 무슨 이벤트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미리 묻지는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고 있자
벨이 울린다. "당신 룸서비스 시킨 거야?"
"호텔 룸서비스는 비싼데..."
"괜찮아 여보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영우가 문을 열고 두 손 가득 꽃을 들고 들어 온다.
"어머 꽃다발이잖아."
"내가 꽃을 좋아한다고 해도 비싸다고 사 오지 않던 것을, 애 비싼 호텔에서 주문한 거야?"
"당신이 좋아하는 장미꽃이야."
빨간 장미 꽃다발을 들고 영우가 수희에게 말한다.
"당신 잠깐 앉아봐."
수희가 소파에 앉아 있자 영우는 꽃다발과 함께 반짝이는 반지를 꺼내어
수희의 손가락에 끼워 주며 말한다.
"사랑해"
"어머 이것은 다이아야?"
"당신 그동안 이 반지를 사기 위해 구두쇠처럼 행동한 거야?"
"내가 당신과 결혼한 첫날밤에 약속했잖아."
"우리 결혼 25주년에 꼭 다이아몬드 반지를 당신 손가락에 끼워 주기로 약속했지
"그 약속 지금 지키는 거야..."
수희는 남편 말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멘다.
자신은 남편에게 소홀했는데, 남편은 그런 아내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여보 사랑해."
"우리 죽을 때까지 이 행복 쭈욱 이어가자..."
방안에는 은은한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투명한 유리잔에는 와인이 흔들거리고
두 손을 꼭 잡은 부부의 가슴은 요동을 친다.
술이 약한 수희는 와인 한잔에 볼이 발그레 변하기 시작한다.
"당신 벌써 취한 거야?"
"아니!"
"너무나 오랜만에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난다."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던 그때가 생각이 나네."
"그때는 지금처럼 뚱뚱하지도 않았는데..."
수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 이제 일에 몰두하지 마."
"이젠 자신의 인생을 살라고..."
"우리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을까?""
난 항상 우리가 처음 만나던 대학생 새내기 때가 생각이 나는데
"그래 그땐 너무나 청순했지."
"아! 맞아... 그땐 당신도 너무나 어린 소년이었지."
두 사람은 와인잔을 부딪치며 웃는다.
"그땐 참 아름다웠는데..."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워."
"정말이야 내가 날씬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하는 거지?"
"당연하지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할 거야."
영우가 수희의 입술에 키스를 하자 수희는, 남편 품으로 파고들며
열정으로 영우를 끌어안는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다른 요일보다 일찍 출근을 했다.
주말과 휴일 밀린 일을 처리하지 못한 수희는 휴대폰을 꺼내어
문자 메시지와 카톡을 확인을 했다.
남편 영우는 수희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을 못마땅해해서
결혼기념일 동안 호텔에서 남편과 보내면서 꾹 참고 2일을 보냈던 것이다.
사무실에 아침 8시에 도착해서 컴퓨터를 열고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최종 점검을 하고 나니 직원들이 한 명씩 사무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수희는 정각 9시가 되자 전체 직원들을 회의실로 소집을 했다.
오늘 아침 한건의 기획 오더가 들어와 미리 회의 소집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수희네 회사와 꾸준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E사의 모델하우스 오픈을 위한 기획안을 수희 회사에 맡긴 것이다.
모델하우스 오픈까지는 약 2달의 시간이 있다.
모델 하우스 오픈에 맞추어 내부를 실제 아파트 실내 인테리어와
아파트 분양 공고 그리고, 아파트 청약을 위한 책자와 팸플릿 등의
전반적인 것들을 검토를 해서 최종적으로 금액을 정해서 계약서를 작성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직접 아파트 부지가 있는 천안으로 내려가서, 그곳의 현지 부동산 답사를 위한 팀을 꾸려야 하는
수희는 마음이 바빠진다. 늘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수희는 잠시 회사 일이 없으면 불안과 초조로
혼자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하는지 고민을 했었다.
그런 그녀의 일중독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어서, 직원들도 일이 힘들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작년에는 신입 사원 한 명이 입사 6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다.
이유는 급여에 비해하는 일이 너무 많다 였다.
그래서 수희는 직원들의 업무를 줄이기 위해 자신이 직원들이 몫까지
일처리를 하는 바람에 어느 땐 직원들의 일을 대신하기도 했다.
오전 내내 회의를 마치고 점심은 간단한 도시락을 배달을 시켜서 먹으며
E사의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기획안 아우트라인을 잡고 있었다.
한참 일에 빠져 있는데 모르는 전화가 걸려 왔다.
수희는 일에 빠져 있을 때 휴대전화를 받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를 한 후 부재중 전화를 돌리니 병원이었다.
"여보세요."
수희가 컴튜터 자판을 치면서 전화를 걸었다.
"부재중 전화가 걸려와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 그러세요"
"여기 병원인데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저는 나 수희라고 합니다"
"나수희 씨 얼마 전에 저희 병원에서 건강검진받으신 적 있지요?"
"예 있어요."
상대방은 수희의 긴장 상태는 묻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 쏟아 낸다.
"다름이 아니라 나 수희 씨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저희 병원에 나오셔서 정밀 검사를 받으셨으면 합니다."
1회 시작
"정밀검사요?"
"지금 결과는 선생님의 몸 상태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가급적 빨리 병원에 오셔서 검사를 받으시고, 수술 날짜를 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라고요 암이라고요?"
"정말 내가 암이에요?"
"못 믿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날 저녁 수희는 퇴근 시간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도중에 집에 갈 수 조차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수희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앞으로 아이들은 어떻게 되지...
그날 영우는 회사에서 단체 회식이 있어 퇴근이 늦었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몇 번이고 영우에게 일찍 집으로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밤 11시가 다 되어 들어온 영우를 붙잡고 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당신 왜 그래?"
"오늘따라 얼굴도 이상 하고..."
"나 말이야 여보 나 암이라고 해 병원에서..."
"뭐어?"
"다시 말해봐 당신이 암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야?"
"진정해 일단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나서 의사와 상담을 하게 되면
방법이 생길 거야..."
영우는 아내 수희를 안고 침울하게 말했다.
"애들에게는 말을 해야 할 텐데..."
"예린은 괜찮은데, 지금 가람이는 유학 준비한다고 잔뜩 들떠 있는데. 엄마가 암이라고 하면
마음이 복잡할 거야."
"나 어떡하지 여보..." 수희가 남편을 붙잡고 흐느끼고 있다.
가람은 교환 학생으로 미국 주립대에 입학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권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던 터라, 가람의 학교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자매결연을 맺어, 미국의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내심 행복해하며 영어 공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희는 그런 가람을 위해, 현금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유학에 관심이 많은 아들을 위해, 읽기 쉬운 동화책을 구입해서, 독해 준비를 시켰으며,
원어민 강사를 채용해서, 자연스럽게 생활 속 영어를 체험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다음 학기로 예정된 교환 학생 연수를 위해 미국 대사관을 뛰어다니며
서류를 발급받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가람이 행여 자신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릴까 고민을 하는 수희는, 자신의 병을 아들 가람에게
당분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정밀 검사를 받기 위해, 아침을 굶고 병원으로 향하는 수희의 마음은 착잡했다.
자신의 병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이미 종합검진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보다 세밀한 검진을 위해서는 MRI 검사를 해야 했다.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실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숨이 턱턱 막혔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직원들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던, 수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회사 일이 걱정이 되어 병원에 앉아 있는 순간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회사 일은 계속 바빴다. 직원을 한 명 채용을 해야 하는 등 수희를 바쁘게 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을 좋게 했지만 가족들은 일에 골몰하는 수희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특히 남편 영우는, 일보다는 건강이 우선이라는 말과 함께 당분간 회사 일을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건강 회복에 신경을 쓰라고 했다.
MRI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건강 검진 결과를 통해 자궁암 진단을 받은 바 있어 이미 예상은 했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미 자궁에 악성 근종이 자라고 있는데 크기가 커서 방사선 치로보다는
절제술을 요한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다. 수희는 무너질듯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 종합검진 결과에 방사선 치료를 하면 입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고
회사를 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심을 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자궁경부암 외에도 고혈압과, 고지혈증, 당뇨병 등 성인병까지 수희를 괴롭히는데도.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일에 빠져 사느라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고단백과 고지방 음식 달콤한 음식은 체중 증가로 이어져 성인병을 가중시켰다.
의사는 당장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 날짜를 잡기를 원했다.
그러나 수희는 두려움이 앞섰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수술을 통해서 제거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앞섰다.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음습하게 다가왔다.
수술 날짜를 남편 영우의 설득으로
겨우 날짜를 잡았지만 두려움으로 밤이 두려웠고 순간순간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하늘을 찔렀다. 만약 자신이 혼자라면 진즉 집을 나와서 어디론가에서 혼자 시간을 죽일 것이었다.
약 20여 년 전 수희의 친정아버지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다 돌아가신 후
수희는 극도로 병원을 싫어했다. 그 당시 수희는 가람을 낳은 후
극심한 산후 우울증 때문에 삶을 포기할 정도로 상태가 심했다.
자신의 몸도 추스르지 못한 수희는 아버지의 건강 악화를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고 그 일로
수희는 많은 고통을 겪었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은 젊은 수희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 주었으며. 그로 인해 의사를 불신을 했다.
늦은 시간 수희가 작업을 하다 야식을 먹기 위해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온 예은은 수희 손에 들려 있던 케이크를 발견하곤
큰소리로 엄마를 말렸다.
"엄마?"
"생각이 있는 거야?"
"왜 그래 딸!"
"의사 선생님 말씀 기억 안 나는 거야?"
"엄마는 지금 환자야."
"수술을 앞둔 환자라고..."
"그런데... 늦은 시간에 몸에 해로운 음식을 먹으면 어떡해...."
"하지만 난 참을 수가 없는걸."
"엄마 제발 정신 차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주의 주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는 거잖아."
"엄마는 정말 다이어트가 필요하고, 지금이라도,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예은이 화를 냈지만 수희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딸 예은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 수술하다 죽으면, 어떡하니."
"우리 딸 얼굴 더 이상 볼 수 없는데..."
"엄마?"
"수술하다 누가 죽는 다고 그래."
"제발 엄마 정신 차려."
"아니야 예은아 나 죽기 싫어."
"그래서....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거 실컷 먹고 싶은데 안되니?"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수술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지만,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수희는 순간순간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아직 회사에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알리지 않고 태연 하게 일처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수술을 앞두고 병원을 찾은 수희는 긴장감으로 얼굴이 떨리고 손이 마비가 되는 증상을 겪었다.
검사는 아침부터 이어졌다. 부인암의 대가인 차병욱 박사와 마주 앉은 수희는 약물 치료를 원했다.
"내 말 잘 들어요 나수희 씨."
"여성으로 자궁을 적출하는 큰 수술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박사님?"
"이렇게 애원할게요."
"방사선 치료나 약물 치료는 안될까요?"
수희가 울면서 이야기를 꺼내자 차박 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차 말 이야기 하지만, 만일 종양이 더 넓게 전이가 된다면
자궁을 적출하는데서 끝나지 않아요."
"나수희 씨의 마음은 잘 압니다."
"여성으로 자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차 박사의 말을 중간에 자른 수희는 다시 한번 간곡하게 말을 이어갔다.
"자궁이 없는 없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의 의미가 있어요 박사님."
"박사님은 여자의 마음을 모르셔서 그래요."
"하지만 나수희 씨 앞날을 생각하셔야지요."
"한 번 수술로 예전의 활기찬 삶을 되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말씀드리기 뭐 하지만, 가임기 여성이 아니고 이미 폐경기에 접어 들어서
굳이 자궁을..."
"지금은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수희는 그날 병원 내진 후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 산소를 찾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바라본, 고속도로 옆 산에는 그동안 느끼지 못한 계절의 변화가 있었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어, 산에는 붉은 진달래가 방긋 웃고 있었다.
묘지는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수희 엄마와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다녀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희는 준비한 제수용품과 꽃을 아버지 산소에 바첬다.
한참 묘를 응시하던 수희는 묘지 앞에서, 털썩 주져 앉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불효를 용서해주세요."
"앞으로 아버지 앞에 앉아서 넋두리를 늘어놓을지 나도 몰라요."
수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너무나 예뻐해 주시던 아버지 산소 앞에서 펑펑 울었다.
한참 울고 난 수희 눈에 가녀린 할미꽃이 눈에 띄었다.
산골 할머니는 두 손녀와 함께 살았는데 첫째는 얼굴이 예쁘기는 한데 마음씨가 고약하였다.
둘째는 그와 반대였다. 가까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간 큰 손녀가 체면상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였다.
그러나 효도는커녕 구박이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견디다 못한 할머니는 고개 너머
먼 마을의 작은 손녀를 찾아갔다. 함박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 서럽고 굶주림에 지친 할머니는
작은 손녀의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흰 눈을 맞으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늦게 눈 속에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양지바른 곳에 할머니를 묻어 드렸다.
이듬해 봄 그 자리에 한송이 꽃이 피었는데 그 모습이 할머니의 흰머리 털과 같은 털로 뒤덮이고
허리는 구부러져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할머니를 묻어 드렸다.
이듬해 봄 그 자리에 한송이 꽃이 피었는데 그 모습이 할머니의 흰머리 털과 같은 털로 뒤덮이고
허리는 구부러져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할머니를 생각하며 할미꽃이라고 불렀다는 슬픈 전설이다.
할이꽃의 전설을 생각 하자 그동안 엄마에게도 늘 잔소리를 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 80 노모가
생각이 났다.
영우는 아내 수희가 걱정이 되었지만 회사를 쉬면서 까지, 아내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딸인 예은도 직장일에 쫓기면서도, 간간히 전화 통화를 했다.
수희는 가족들이 보기에,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마음은 갈등과 번민으로 복잡했다.
매일 일정표를 확인하면서, 몸의 변화를 인정하려 했다.
갑작스럽게 다이어트를 하려 하니 못 견디게 음식이 당긴다.
늦은 저녁 가족들이 모두 잠에 빠지면 혼자 잠에서 깨어 냉장고 음식을 먹다
들키기라도 하면 가족들은 버럭 화를 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수희는 일기장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직도 죽음의 공포와 수술 후 부작용에 대해 믿음이 생기지 않아 내심 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 참았다. 지금 자신이 도망 치면, 남은 가족들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엄마 괜찮아?"
"엄마 딴마음 먹은 것은 아니지."
오늘도 예은은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위로를 건넸다.
"엄마 걱정 말고 딸 오늘도 열심히..."
자식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수희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 영우와 함께 병원으로 가는 내내 수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