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제8장 태백편(泰伯篇) 제7절을 펼쳐보세요~
제1절
子曰, 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자왈, 태백기가위지덕야이의. 삼이천하양, 민무득이칭언.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태백은, 사람이름입니다. 주나라 문왕의 형님이죠. 맏형님이죠. 맏형님인데 문왕이 임금이 된 이유 자체가 이 양반이 스스로 양위를 하고 마치 세종의 큰 형님인 양녕대군 처럼 스스로 딱 버텨가지고 그 셋째가 임금이 돼서 문왕이 되고 주나라 기틀이 다져진 거죠. 그렇다고 해서 문왕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고 그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인 세종보다 못한 것이 아니었듯이 다만 그렇게 양보를 한 거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위대한 국가적 전통을 세운 거죠.
ㅇ 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이 때 그 其자가 나왔고 끝에 也已矣 이렇게 나왔는데 이 때 也는 살짝 짐작을 해주는, 其자와 也자가 왔으면 일단 약한 추측이 되죠. 아마도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可謂, 이를 수 있을 것이다. 至德, 지극한 진리스러움을 갖추고 계셨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아마가 될 텐데 끝에 말미를 다는 어미사 矣가 왔거든요. 矣는 강한 단정을 나타내거든요. 그러니까 약한 추측이 아니고 강한 추측이 되는 거죠. 그 其자와 끝에 也자가 붙으면 약한 추정인데 뒤에 矣자가 왔기 때문에 강한 추측이 되고 也矣하면 발음상 어색해집니다. 그래서 也와 矣를 연결시켜주기 위해 이미 已자가 들어갔을 뿐입니다. 이미 已자는 여기서 역할이 없고 약한 추정을 강한 추정으로 엮어주는, 也와 矣를 결합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문장적으로는. 그래서 여기서 의미 없는 글자들이 그 其자, 어조사 也자, 어조사 已자, 어조사 矣자 네 자가 나왔죠. 그래서 강한 추측이라는 뜻만 갖고 보면 可謂至德, 네 글자밖에 없죠. 그래서 지극한, 한없는 진리스러움을 갖고 계셨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추측이 되고요. 우리말로야 약한 추측이든 강한 추측이든 큰 차이는 안 나지만 서두요.
ㅇ 그리고 그 이유가 三以天下讓, 세 번 사양하셨다. 이해 되는데요. 무엇을 사양하셨냐 하면 천하를 세 번 사양하신 거죠. 그러면 三은 부사가 되고 讓은 동사가 되니까 목적어는 천하가 되죠. 즉 三讓天下 이렇게 돼야 될 텐데 목적어를, 영어에서도 부사와 동사가 같이 올 적에 목적어를 그 중간에 넣는 용법들이 있잖아요. 三, 讓 사이에 목적어를 집어넣고 도치를 시켰습니다. 도치를 시켜놓으니까 전치사에 해당되는 以자가 왔습니다. 도치됐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거구요. 도치가 안되면 三讓天下 그렇게 되겠죠. 三以天下讓, 세 번 천하를 양보하셨다. 그런 면에서 양녕 보다 낫네요.
ㅇ 民無得而稱焉. 得자는 얻을 득자 이지만 동시에 영어의 can에 해당되는 능할 能자의 뜻이 있으니까요. 대부분 그렇게 쓰입니다. 無得할 때는 can의 뜻으로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뒤에 焉자가 왔죠. 이건 문장이 끝났다는 강한 뜻도 있지만 문장을 끝나는 것을 일으키는 강한 조사는 앞에 矣도 있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굳이 焉을 쓸 때에는 목적어를 생략시키고 문장을 끝내버릴 적에 焉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焉자 속에는 대목적어에 해당되는 갈 之자 이런 것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and에 해당되는 而자가 왔으니까 無得, 무득 뒤에도 목적어가 있었을 것이고 無能之, 無得之 이렇게 있었을 것이고 而稱之도 있었겠죠. 이 때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이상의 목적어를 생략시키면서 문장을 마무리 지을 때 이렇게 焉자를 씁니다. 그러나 목적어 없이 서술형만 될 때는, 강한 단정을 나타낼 때 앞의 矣를 씁니다.
ㅇ 세 번이나 천하를 양보했는데도 백성들은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조차 알아서 칭할 수가 없었다. 즉,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칭송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극한 진리스러움이라 할 수 있다. 태백은 참 지극한 진리스러움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다. 세 번이나 천하를 양보했는데도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해서 民無稱, 또한 칭송조차 못했다.
ㅇ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한 것이고, 공자의 사상이라는 게 결국은 어떤 질서 사상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후계자가 있으면 후계자에게 권력이 가야 되고 그리고 그런 기본적인 질서에 의해서 가야지만 그 질서에서 봤을 때 내가 그것을 감당하기 보다는 다른 자가 감당하는 게 낫다고 할 때는 감당하기 나은 자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러나 그런 당연한 위치를, 기득권을 갖고 있는 자를 협박해서 뺏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 위치를 갖고 있는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거죠. 현대정치라는 건 반대잖습니까. 후계자로 누가 지목돼있는데 그 사람은 무능하다. 예를 들어 이회창이 지목돼 있는데 이회창이 무능하다. 이인제는 유능하다 그럼 이인제가 이회창이 걸 뺏는 것이 아니라 이회창이가 이인제에게 주어야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형식을 지키면서도 그 형식의 유통성은, 형식이라는 건 하나의 시대문화 아니겠습니까. 이런 시대문화를 유지하는 방식은 결국 그것을 갖다가 자기가 받거나 말거나 해야 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알아서 해야 된다는 거죠. 그의 인격 됨의 문제라는 거죠. 단순히 양보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보할 사람이 했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마지막이 계력인데 계력이 와서 이거 내 자리요. 내가 더 능력이 있소 하고 뺏어갔더라면 안 된다는 거죠. 그리고 세종하고 또 다른 것은 태종이 아들이 넷 있어가지고 셋째가 영민하고 첫째가 호방하긴 해도 덜 영민하니까 첫째에게 자리를 뺏어가지고 셋째에게 줬잖습니까 결국은. 다르죠. 사실은 양녕은 아버지가 뺏기 전에 쉽게 뺏을 수 있도록 했지만 스스로 양위하지는 않았죠. 그건 다르죠. 책임질 자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이 해야 되는 것이지.
ㅇ 이 사상이 맹자에 가면 바뀌어버리죠. 능력이 있고 적당한 사람은 뺏을 수 있다가 되죠.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근본 유교와 원시유교의 차이점이 생길 수도 있겠죠. 부처님 시대처럼 근본불교, 근본유교. 예를 들면 원시불교, 원시유교 이렇게 굳이 비슷한 구분을 한다면 바로 근본유교와 원시유교의 차이점이 이런 데서 또한 나타난 거죠. 오늘날의 시대에는 이런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ㅇ 그러자면 그만큼 자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필요하죠. 태백이 자기자신을 그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또 자기와 함께 그 계열에 올라와 있는 동생들인 중옹이나 계력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건 자기자신과 남에 대한 고찰 그리고 국가일과 전체 공동체에 대한 고찰 그 속에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일의 판단, 그러니까 이제 지극한 진리스러움을 갖고 있었다라고 표현이 가능한 거죠.
ㅇ 두 번째 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살피는 내용들이겠죠. 살피면서 어떻게 하는 기준인가 이런 것이 나오겠죠. 진리스러움의 기준들이 나오겠죠. 진리스러움의 형태, 행동들 등등 실천적인 면에서의 기준들이 나오겠죠.
제2절
子曰,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君子篤於親,
자왈, 공이무례즉노, 신이무례즉사, 용이무례즉난, 직이무례즉교, 군자독어친,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
즉민흥어인, 고구불유, 즉민불투.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恭而無禮則勞, 恭은 공손하다, 두 손으로 이렇게 심장 위에 받쳐들어가지고 이렇게 하는 모습이 공이 아닙니까. 이 모양의 상형이 공이니까, 공손하면서 無禮. 시대문화, 시대정신이 없다면 공손하긴 하되 뭔가 시대문화로써 자기가 가져야 될 공동체의 보편적 또는 그 시대 인간의 보편적 척도가 없다면 則勞, 쓸데없이 힘만 쓰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은 禮라는 것은 사람이 공손할 수도 있고 또 이것저것 할 수도 있는데 禮라는 것은 한편으로 그 사람을 그 시대의 또는 자기자신의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이야기죠. 공손하되 예가 없다면 쓸데없는 힘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은 즉, 자기자신이 주인이 안되고 있다는 것이죠. 다만 공손하고 있다는 것이죠. 절도가 없다는 것이죠. 조절이라는 것, 절도라는 것, 조절하는 힘이라는 것. 그것은 결국은 자기자신의 주체력을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그 주체력의 기준으로써 제시되는 개념이 예가 되는 거구요.
ㅇ 愼而無禮則葸, 葸, ‘시’라고도 읽습니다만 ‘사’가 표준발음입니다. 愼이라는 건 삼가하다, 마음으로 참 조심하다, 마음으로 진심을 추구하다. 참 이런 것이 이렇게 있으면 좋을 텐데, 정말 무엇이 하늘의 뜻일까 하고 짐작하고 애쓰는 이런 마음이죠. 그러나 無禮, 그렇게 예가 배어있는 자기의 척도, 통제력, 자기주체력, 주체됨, 주인됨이 없다면, 시대문화가 없다면 則葸. 이건 쓸데없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전전긍긍하는 것이라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기 주인이 없으면 또한 하늘의 뜻을 두려워해봤자 이것이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겁내고 있는 것이 된다는 거죠.
ㅇ 勇而無禮則亂, 힘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용기가 있으나 또한 예가 없다면 무질서를 일으키게 된다. 무질서하게 된다. 그러니까 뭔가를 자로 처럼 열심히 는 하고 싶은데,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언제든지 튀어나와서 할 수 있는 자기 용기도 있는데 시대정신으로 무장이 안돼 있으면 이건 결국은 난리를 일으키게 된다.
ㅇ 直而無禮則絞, 사람이 직선적이고 정직하고 그러더라도 시대정신으로써 통제력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요것은 자기 목을 조르는 결과에 불과하다는 얘기입니다. 목 졸라 죽이는 것을 교살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실과 실이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니까 목 졸라 죽이는 거죠. 원래 교수형 그러면 목 졸라 죽이는 거죠. 목 치는 것은 효수고. 다르죠. 지금 대학 교수가 이 교자를 써가지고 교수라고 써야 돼요. 대학교수가 이 교자에다 머리 首자 써야 되요. 목 졸라 죽어야 될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경상도 사투리로 교수를 뭐라고 읽는지 아시죠. 괴수라고 읽습니다. 대학괴수예요. 용이무례즉난 할 때 난 하면 주로 괴수가 나오죠. 그래서 여하튼 대학에서 나왔을 적에 앞에 논어에서도 나왔습니다만 화합함을 화합함으로만 알고 시대정신으로 통제하지 않는다면 쓸모가 없다고 했듯이 바로 고것의 구체적인 모양새가 나오고 있는 셈입니다.
ㅇ 君子는 공도자는 篤於親, 독실하다, 돈독하다 하는 뜻이니까요. 이 篤자의 원래 의미는 자기 마음을 한 곳에 가둬놓고 못나가게 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단도리 하는 겁니다. 여기서 글자 그대로 보십시오. 대나무 울타리 속에 말이 들어있는 형상입니다. 이건 원래부터 상형문자 생길 때 동시에 생겼던 글자입니다. 후에 합성된 글자가 아니고요. 우리가 독실하다 이런 표현 쓰지만 신앙이라는 울타리 속에 자기자신을 넣어놓고 못 빠져나가게 하는 것이 독실한 거죠. 마찬가지로 독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을 잘 단도리 해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독이죠. 君子篤於親, 군자는 공도자는 먼저 자기 어버이라든가 자기 혈연, 친척에게 주로 자기 어른들에게 마음을 놓지 않고 돈독하고 있으면. 親이라는 건 어른도 되고 아이도 되고 다 되죠. 주로 어른으로 많이 쓰입니다만. 공도자가 자기 어른에게 그렇게 돈독하고 있다면.
ㅇ 則民興於仁, 興仁인데 於를 넣은 것은 강조했습니다. 仁이라는 목적어를 강조해서 쓰는 겁니다. 백성들은 仁을, 공도를 융성하게, 흥하게 할 것이다.
ㅇ 故舊不遺, 여기서 왜 목적어를 강조하는 식으로 왔는지는 뒤에 있는 것과 맞추려고 했을 텐데요. 연고 있는 것과 옛 것을, 목적어인데 도치됐죠. 해석을 합쳐서 하면 연고 있는 옛 것이죠. 옛 것으로써 우리의 현실에 연고를 갖게 되어 있는 것. 그런 것을 不遺, 버리지 아니한다면, 不遺故舊가 되겠죠. 옛 것을 버리지 아니한다면 현대가 과거 현대의 축적이 돼야 되지 단순한 현대로써의 ~~의 되지 않는다면.
ㅇ 則民不偸. 백성들은 투박해지지 않을 것이다. 偸라는 건 얇을 투입니다. 경박하다, 경솔하다 할 때 ‘투’자입니다. 물론 도둑질 할 때도 이 투자 씁니다. 무협지 같은데 神偸라고 나오죠. 그러면 귀신 같은 도둑놈이 신투죠. 일반적으로는 투박하다, 경박하다로 씁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얄팍하지는 않을 것이다.
ㅇ 우리 시대의 단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우리 시대가 고구붍유가 아니라 버릴 유자만 써가지고 옛 것이면 무조건 버리니까 백성들이 경박해져 있는 거죠.
ㅇ 그래서 시대문화의 중요성, 시대문화라는 건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는 통제력이며, 恭하고, 愼하고, 勇하고, 直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것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주체성으로써의 시대문화, 예이며, 이 예라는 것은 가정에서의 문제를 공동체 전체의 문제로 확대시키는 것이고 확대시키는 기준표이고 나아가서 과거를 현대와 연결시키는 기준표이다. 그런 이야기죠. 모든 구체적인 덕목이 그 자체로써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대문화라는 주체성에 의해서 무장돼야 된다. 이 시대문화는 내 집안에서부터 사회로 나가듯이 공간적 확대의 기준점이며, 옛날로부터 지금으로 이어오는 또한 시간적인 기준점이다. 고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ㅇ 그 다음 그러면 고 중에서 뭐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공간적인 기준점, 내 공간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3절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증자유질. 소문제자왈, 계여족, 계여수. 시운, 전전긍긍, 여림심연, 여리박빙
而今以後, 吾知免夫, 小子.
이금이후, 오지면부, 소자.
ㅇ 曾子有疾. 증자께서 질병을 앓으셨다. 병이 있으셨다. 돌아가실 무렵입니다. 召門弟子曰, 자기 집에 드나드는, 자기 문하의 여러 젊은이들을 소집해서 가로되, 啓予足, 啓予手. 환자니까 이불을 푹 덮고 있거나 옷을 두텁게 입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자들 보고 하시는 말씀이 내 발을 좀 열어줘라. 내 손을 좀 열어주려무나. 그래서 제자들이 손을 열어줬겠죠. 그리고 다리를 열어주셨겠죠. 그러시자 말씀하시기를, 詩云. 시에 이렇게 말했도다. 戰戰兢兢, 전쟁이 날 것처럼, 전전긍긍이란 것은 표현 그대로 입니다. 전전이란 것은 전쟁이 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마음 졸이는 것이고, 긍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벌이 내리지 않을까, 천벌이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사회적인 재난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전전이고, 천재지변이 있을 가봐 두려워하는 것이 긍긍입니다. 전전긍긍이라고 쓰면서 우리는 전전긍긍이란 자체에서 의미가 대충 와 닿지 구분해서 의미가 분화돼 있지 않습니다. 인재가 올까 봐 걱정, 천재가 올까 봐 걱정.
ㅇ 如臨深淵, 그래서 깊은 연못가에 임하듯이, 如履薄氷. 밟을 ‘리’자니까요. 아까 경박, 투박할 때 ‘박’자가 이 박자죠. 얕은 얼음을 밟듯이, 깊은 연못에 임하듯이. 엷은 얼음을 밟듯이 그렇게 전전긍긍한다 했는데,
ㅇ 而今以後에, 자기 손발을 자기도 보셨고, 보여주신 거죠. 오늘 이후에. 보통 이금이후라 돼 있지만 而今日而後라고 많이 돼 있습니다. 今後라는 뜻이고 而, 而는 강조의 뜻이지만 다른 판본에 보면 今日以後라 돼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而今以後 이렇게 돼 있는 경우도 있고요. 오늘 후에, 이제 봤느냐 오늘 뒤부터,
ㅇ 吾知免夫, 나는 알겠다. 알겠구나. 끝에 어조사 夫자가 오면, 지아비 부자가 오면 뭐뭐 했구나 하는 감탄사에 해당되는 우리말로 ~~했구려. ~~했구나 이러듯이 감탄문에 해당되는 어조사죠. 吾知免夫. 나는 면했음을 알겠구나. 이제 내가 면했음을 알겠구나. 원래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이렇게 전전긍긍해서 내가 이렇게 끌고 왔다. 그래서 내 죽을 날이 다 왔는데 나는 그렇게 (불감회상) 안 했다. 감히 회상을 안 했다. 부모님이 주신 손발을. 그것을 이제야 내가 면한 줄 알겠구나, 小子야. 애들아. ~~했구나 얘들아. 夫小子가 아니고 吾知免夫, 小子야 이렇게 됩니다.
ㅇ 그래서 일단 먼저 몸을 아끼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면이 있는 거죠. 몸을 아낀다는 자체가 몸을 아낀다는 의미 이전에 부모를 아낀다는 거죠.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 그러니까 이것은 공간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시간적으로는 연고 있는 것이고 옛 것이죠. 그래서 자기 시대문화로써의 첫걸음을 요렇게 부모에게서 주어 받은 내 몸뚱이를 소중하게 굴려서 그것이 발현될 수 있는 모든 바를 발현하고, 그것이 그렇게 발현하지 않을까 감히 상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산다. 하는 것이 일단 먼저 덕목으로 나왔습니다.
제4절
曾子有疾. 盟敬子問之. 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증자유질. 맹경자문지. 증자언왈, 조지장사, 기명야애. 인지장사, 기언야선.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漫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
군자소귀호도자삼. 동용모, 사원포만의. 정안색, 사근신의. 출사기, 사원비배의.
笾豆之事, 則有司存.
변두지사, 즉유사존.
ㅇ 曾子有疾. 증자께서 아프셨다. 같은 무렵입니다. 盟敬子問之. 노나라 대부들 중에 말썽꾸러기들이 많았죠. 맹경자는 그 말썽꾸러기 아들입니다. 아들인데 좀 나았습니다. 증자나 공자의 영향을 그 아들은 받았던 겁니다. 덜 말썽꾸러기인 맹경자가 와서 문병을 하셨다.
ㅇ 曾子言曰, 증자께서 말씀하여 가로사대, 言曰 하는 거와 증자왈 하는 거는 다릅니다. 증자언왈하면 증자께서 속담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하는 뜻입니다. 언이라고 하는 것은 속담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경우가 춘추시대에는 더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언왈하면 증자께서 속언을 또는 속담을 들어서 말씀하시기를, 예부터 풍속에 있는 말을 유행하는 말도 되겠죠. 떠돌아다니는 말을 예로 들어 말씀하시기를,
ㅇ 鳥之將死,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 갈 之자가 들어간 것은 물론 절로 만들기 위해서 들어간 거고, 새가 죽으려 할 때는 其鳴也哀. 그 울음소리가 애달프다. 人之將死,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其言也善. 그 말이 착하다 했다. 훌륭하다 했다. 모든 본말을 통틀어 본다고 했다. 착한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착하다 쓰지만 훌륭하다는 얘기죠.
ㅇ 君子所貴乎道者三. 그러면 무엇이 훌륭한 것인고, 이게 연결이 이렇게 돼야 됩니다. 군자가 所貴, 귀하게 여기는 바 어떤 것에 대해서, 군자가 공도자가 도에 대해서 귀하게 여기는 것. 그러니까 所貴者죠. 所貴者三, 어디에 대해서 도에 대해서, 공도자가 도에 대해서, 길에 대해서 귀하게 여기는 것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냐.
ㅇ 動容貌, 용모를 얼굴과 모습을 움직일 적에 斯遠暴漫矣. 이 때에는(斯) 포악하고 함부로 구는 것, 거들먹거리는 것이겠죠. 또한 건방진 것. 이런 비슷한 거겠죠. 포만한 것은 멀어야 하고,
ㅇ 正顔色, 얼굴 꾸밈새를, 모양새를 바로 잡아야 되는데, 이 때에는 斯近信矣. 믿음에 가깝게 믿음직스러운 것에 가깝게 해야 하며,
ㅇ 出辭氣, 말을 하거나 기운을 내뱉을 적에는, 辭氣면 그냥 말이죠. 말을 뱉을 적에는 斯遠鄙倍矣. 비루하고 배신스러운 말은 하지 않아야 된다. 鄙란 것은 비루한 말, 천한 말, 倍라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말, 요런 말은 멀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훌륭한 것이다.
ㅇ 笾豆之事, 대나무로 만든 제기가 변(笾)이고요. 나무로 만든 제기가 豆니까요. 제사 지내는 일이죠. 결국 변두지사는. 이 변두지사란 표현을 어떤 사람은 변은 ‘단’으로 읽기도 합니다. 단두지사라 읽기도 합니다.
ㅇ 변두지사는 則有司存. 즉, 벼슬살이를 맡은 사람이, 일을 맡은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존재하니까. 일을 맡은 사람이 있지 않느냐. 이런 것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 제사 지낼 때 이걸 이렇게 하고, 뭘 저렇게 하고 그런 법칙이나 세칙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 훌륭한 것이라는 건 최소한 얼굴에서 포만함이 없어야 하고 또한 신뢰스러움이 보여야 하고 또한 말함에 있어서 천박하거나 자가당착적인 것이 없는 것. 또 다른 사람의 것이 자기에게 잘 전달되게 해주는 겁니다. 나중에 유비도 죽을 적에 이거 인용하죠. 조지장사에 기명야애하고 인지장사에 그 말이 선하다 해가지고 내 아들이 신통치 않으면 내 진심으로 하니까 니가 해라. 제갈량보고 그랬죠.
제5절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증자왈, 이능문어불능, 이다문어과, 유약무, 실약허, 범이불교,
昔者吾友, 嘗從事於斯矣
석자오우, 상종사어사의
ㅇ 증자가 계속 나옵니다. 曾子曰,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以能問於不能하고, 또 하나의 시대문화의 특징, 예의 특징이겠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서 능력이 없는 얘기도 물어보고, 능력이 있는데도 능력 없는 얘기도 물어보고, 以多問於寡,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없는 얘기를 또한 물어보고. 이때 많다 하는 것은 배운 것이 많다는 것이지 재산이 많다 이런 의미는 아닐 겁니다. 지혜로움이 많다 라든가. 그런 의미죠.
ㅇ 그 다음에 有若無, 도를 이룸이 있는데도 도를 이룸이 없는 것처럼 하고, 實若虛, 실질적으로 진실스러움이 있는데도 진리스러움이 없는 것처럼 하며 犯而不校, 모든 사물이 자기에게 범해와도 그것으로써 쫓아내지 않는, 校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 들어오면 바로 도전해서 응전해버리는 게 ‘교’입니다. 報復할 때 ‘보’자와 같은 뜻입니다, 이 교자는. 누가 나 한 대 때리면 같이 한 대 때려버리는 것. 그게 교입니다. 따라서 틀린 게 있으면 바로 잡는 게 또한 교죠. 교정 본다 그러는 게. 학교라는 것도 틀린 게 있으면 바로 잡아주는 게 학교의 교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무엇인가 외적 사물이 자신을 침범해 들어와도 그것에 대해서 함부로 맞받아치지 않는 것, 않았는데,
ㅇ 昔者에 옛적에 吾友가 내 친구가 嘗, 일찍이 상, 진실로 상, 이런 항상 상의 의미도 같이 있고요. 여기서는 진실로 상에 가깝겠죠. 옛적에 내 친구는 진실로, 참으로 從事於斯矣. 이곳에, 이런 일에 종사를 했었느니라. 그 친구야 뻔하죠. 안연이죠. 나이가 자기보다 저거 하더라도 안연이죠.
ㅇ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에 이를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에 이를 수 있는 힘을 못 갖춘 얘기도 물어보며, 지혜와 진리스러움을 많이 갖고 계시면서도 그것이 적은 사람에게 또한 물어봤고, 도를 이미 이룸이 있는데도 없는 듯이 보이셨고, 진리스러움이 열매를 맺었는데도 또한 없는 것처럼 하셨으며 외적 사물이 자신에게 범해와도 그것에 바로 맞받아치지 않으셨다. 옛적에 내 친구 하나가 진실로 이 일에 종사를 해왔었느니라.
ㅇ 이것도 시대문화의 중요한 특징이 되겠네요. 고구불유하는 그런 것의 특징이 되겠죠. 조절력이 있는 거죠. 앞에 조절력이 없으면, 통제력이 없으면, 예가 없으면 안 된다 그랬는데 이 통제력의 내용이 되겠죠.
제6절
曾子曰, 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증자왈, 가이탁육척지고, 가이기백리지명, 임대절이불가탈야, 군자인여, 군자인야.
ㅇ 曾子曰,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可以託六尺之孤, 可以託 맡길 수 있다. 육척 밖에 안 되는 고아를, 고아라는 것은 임금이 죽고, 여기서는 고아가 그냥 고아가 아니라 뭐 그냥 고아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열다섯 살 이하를 육 척이라 그럽니다. 육척이면 132cm 이하죠. 22cm가 한 척이니까요. 육 척의, 열다섯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맡길 수 있고 여기서는 군주를 뜻합니다.
ㅇ 그리고 可以寄百里之命, 마찬가지죠. 맡길 寄자, 의지할 寄자니까요. 백리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 백리를 다스릴 수 있는 천명을 맡길 수 있으며,
ㅇ 臨大節而不可奪也, 큰 절기에 이르러서 또한 그 시기를 뺏지 않을 수 있다면, 큰 절후에 있을 때 그 절후에 맞는 일을 시키지 그 절후에 맞지 않는 일을 시키면 뺏는 거죠. 흐름을 뺏는 거죠. 뺏는다는 것은 시간을 뺏는 것이며 이 시간은 흐름이니까 흐름을 뺏는 것을 의미하죠. 맹자에도 많이 나오죠. 不奪農時 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죠. 불탈농시는 불가탈의, 흐름을 뺏지 않는 것의 한 모양이죠.
ㅇ 그렇게 할 수 있다면 君子人與이까, 군자라고 공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있겠는가. 그리고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시기를 君子人也. 공도자라고 할 수 있느니라.
ㅇ 어린아이를 맡아서 사심 없이 키워서 그를 진정으로 참된 인간으로 키워낼 수 있으며, 문제는 그냥 맡아가지고 보호해주는 게 아니라 참된 인간으로 길러낼 수 있으며, 그를 길러가는 사이에 그의 땅을 맡아서 행위를 사심 없이 그대로 가지런히 펼 수 있으며 큰 행사나 큰 절후에 있어서 그 흐름을 뺏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을 공도자라 할 수 있겠는가? 공도자라 할 수 있지.
제7절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왈, 사불가이불홍의, 임중이도원. 인이위기임, 불역중호. 사이후이, 불역원호.
ㅇ 曾子曰,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士不可以不弘毅, 不이 두 번 나왔으니까 강한 긍정이죠. 해야만 한다는 의지가 있죠. 선비는 반드시 넓어야 하고 강해야 한다. 不可以不이라 했으니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당위가 오는 거죠. 선비는 반드시 넓어야 하고, 그 마음 씀이나 그 모든 것이 넓어야 하고 또한 그 마음 됨이 강해야 한다. 毅라는 것은 강할 ‘의’자죠. 그래서 옛날 역사책에 보면 주로 의종하고 붙은 임금들은 약한 임금들에게 의종이라고 붙죠. 얼마나 약하게 살았으면. 보통 고려 의종 그러면 맨날 신하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고 이런 분 아닙니까. 또 그렇게 의제, 의종 이렇게 붙는 임금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홍의, 넓어야 하고 또한 단단해야 한다.
ㅇ 왜냐 任重而道遠하기 때문이다. 맡은 일은 임무는 무겁고 도는 멀기 때문이다. 길은 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비가 맡아야 될 임무는 무겁고 선비가 가야 될 길음 멀기 때문에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넓지 않을 수 없고 먼 길을 가기 위해서 강하지 않을 수가 없다.
ㅇ 仁以爲己任하고, 以爲는 A를 B로 여기다죠. 以仁爲己任이 될 텐데 仁을 강조하느라고 앞으로 끌어내고 以爲를 붙였습니다. 仁이 A가 되고 己任이 B가 되죠. 仁을 공도를 자신의 임무로 여기니 不亦重乎. 이 또한 얼마나 무거운가. 무겁지 아니한가. 이런 뜻이니까. 이 얼마나 무겁단 말인가.
ㅇ 死而後已, 죽은 다음에야 已. 그칠 이. 죽은 다음에야 그칠 수 있으니 不亦遠乎. 멀지 아니한가. 근데 아마 공자가 하셨으면 죽은 후에도 끝나지 아니하리 하셨을지도 몰라요. 여하튼 이게 방편론이니까 마찬가지겠지만. 세상을 다 아우르는 것이 공도이니 모든 세상을 다 아울러야 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겼으니 어찌 무겁지 아니하겠는가. 또한 자기가 넓지 않아서 되겠는가. 죽은 다음에야 그칠까 말까 하는 일이니 이 얼마나 먼 일인가. 어찌 강하지 않고 할 수 있겠는가. 그 강함을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시대문화니라. 여기도 또한 생략되어 있는 겁니다. 증자가 하신 말씀이 끝나고요.
제8절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자왈,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興於詩, 마음속에서 싹이 터오는 것을 일러서 중국 발음으로 ‘시’라 그럽니다. 봄에 싹이 돋듯이 마음속에서 싹이 솟는 것을 일러 시라 그럽니다. 그것을 글로 표현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포의시’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싹이 트지 않았는데도 시를 쓸 수 있다면 이건 가짜 시죠. 싹이 터오지 않았는데 지식으로 갖다 썼으면 이건. 답시라고 하는 건 어떤 면에서는 가짜 시일 수 있죠. 시라는 것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싹이 트고 있을 때 그 싹을 문장으로 만든 것이 시죠. 그래서 마음에 싹이 트는 것. 따라서 그 마음에 싹이 뾰족뾰족 터오는 트고 난 마음이죠. 인간의 바탕 속에 있는 마음에서 노닐며, 일어나며, 몸을 일으키며,
ㅇ 立於禮, 시대문화로써 자신을 밝히며, 立이란 것은 밝히다는 의미도 있다 했잖습니까. 세우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주체를 세우다 즉, 자기자신을 밝히는 것이 주체를 세우는 것이니까요. 시대문화에서 자기 주체를 세우며,
ㅇ 成於樂. 음악에서부터 그 흐름에서부터 완성할 것이니라. 그래서 예를 흐름으로 완성시켜낼 것이니라. 그래서 여기서 詩니 禮니 樂이니 하는 것은 제쳐놓아 버리고 보면 먼저 마음의 ~~응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니라. 그리고 그것을 조절하는 시대문화에서부터 자기자신을 밝힐 것이니라. 그리고 그 문화를 마침내 자기 몸속에 체화되는 흐름으로 발전시킬 것이니라.
제9절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자왈, 민가사유지, 불가사지지.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民可使由之, 이것도 공자를 오해시키는 문장 중에 한 문장인데요. 백성이란 可使由之. 由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냐 하면 주자의 경우에, 훈고학의 경우에 쓸 用자로 해석하거든요. 백성이란 것은 쓰게끔 부릴 수 있다. 不可使知之. 알게끔 부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이게 좀 문제시 됩니다.
ㅇ 그런데 由라는 것 자체가 from의 의미죠. 쫓을 從의 의미죠. 그래서 일단 앞 문장은 백성들은 더불어 함께, 可使라는 것은 시킬 수 있다라는 의미니까요. 수동이니까. 무엇으로부터 말미암게는 할 수 있다. 由之라는 것은 from이니까 당연히 ~~무엇으로부터라는 것이 ~~ 그러면 갈 之자가 뜻을 갖고 있는 겁니다. 갈 之자가 상당히 많은 의미를 함포하고 있겠죠. 앞에 있던 與於詩에 해당되는 내용이 있겠죠. 그래서 출발점이죠. 백성이란 것은 타고난 어떤 것, 타고난 본질로부터 말미암게 할 수는 있다. 不可使知之.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알게끔 할 수는 없다.어떻게 보면 이건 사람을 깨우칠 수는 없고 사람을 부려 먹을 수는 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 40년동안 숫한 많은 법설을 했어도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는 말과 같은 겁니다. 모든 중생을 다 구제했으나 한 중생도 구제한 적이 없다는 구절과 비슷한 구절입니다. 不可使知之. 알게끔 할 수 없다는 것은 그건 그 자신의 몫이라는 겁니다. 백성들 자신의 몫이란 겁니다. 다만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길에서부터 출발하도록 그렇게 조건을 지어줄 수는 없다. 나머지는 백성 스스로의 몫이지 백성으로 하여금 그 조건을 깨치고, 그 나머지 주체적인 몫까지 대신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禮라는 것의 한계이기도 한 거죠. 禮라는 것을 가지고 살게 함으로써 그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 시대문화를 익히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해줄 수 있으나, 요즘은 그것도 힘듭니다만. 그러나 그 조건 하에서 그가 스스로 깨치고 말고 하는 것은 공도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스스로가 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걸 갖다가 백성을 무시하는 그런 어떤 것은 아닙니다. 백성을 피지배계급으로 보고 무시한다. 이건 봉건계급의 이해다. 특히 근대 사회주의적 조선 하에서 이렇게 해석이 많이 됐습니다.
제10절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
자왈, 호용질빈, 난야. 인이불인, 질지이심, 난야.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好勇疾貧, 亂也. 용기를 좋아하되, 疾은 걱정한다, 근심으로 여기다 이런 거라 했잖습니까. 탈 난 것, 싫어한다는 의미도 있죠. 그래서 용기를 좋아하면서 가난한 것에 대해서 너무 걱정거리로 여기고 있다면, 밀고 나가려고 하면서 또한 가난한 것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고 있다면 이때는 틀림없이 난리 뻐꾹 을 피우게 돼 있다. 무질서하게 돼 있다. 도둑놈이 달리 생깁니까. 용기는 있는데 가난한 것이 싫으니까 용기를 가난한 것 없애는데 쓰느라고 도둑놈 되는 것 아닙니까. 간단하죠 뭐. 용기를 키우는 것보다는 가난한 것을 싫어하고 아닌 것에 대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죠.
ㅇ 人而不仁, 사람이 되어가지고 공도를 행하고 있지 않는 경우. 人, 자기가 아닙니다. 남입니다.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이 되어가지고 공도를 전혀 행하지 않고 있는 경우에 疾之已甚, 亂也. 그것을 싫어할 수 있잖습니까. 그것을 싫어함이 이미 심하면 즉, 너무 심하면. 사람이 앞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싫죠. 싫고 걱정거리죠. 근데 그게 너무 심하면 또한 난리를 피우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개혁을 바로 한다는 명분하에 쿠테타를 일으키게 돼있는 겁니다. 근데 요즘에는 人而不仁을 고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고요. 人而不仁을 명분으로 들고 있는 거죠. 사람이 앞에서 공도를 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걱정된다 하더라도 그 걱정이 너무 심하면 그것이 병이 되면 그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不仁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깨우쳐 줄려고 하지 않고 깨우쳐줌으로써 병이 안되게 풀려고 하지 않고 지나치게 미워하면 결국은 뚜드려 팰 수밖에 없잖아요. 폭력이 그래서 나오는 거죠. 폭력배와 도둑이 요래서 나오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그래서 이것도 또한 시대문화로써 문제점이 있겠습니다.
첫댓글 좋은 가르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