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옥 빌헴 프리드리히 히걸 (빌헬름 폰 아셰베르크 기록) - 미학 강의(베를린, 1820/21년) 2 (Vorlesungen über Ästhetik. Berlin 1820/21)
이렇게 특수한 현상들의 보편자를 대자적으로 확립하면서 이 현상들에 본질적으로 어떤 형태를 부여해 주려고 하는 예술에서 우선적으로 관건이 되는 것은, 이 현상들에 인간적인 형태를 부여 해 주고 이것들을 의인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인화는 처음에는 이 같은 상징물에서 단지 외면적인 것에만 해당되었으며, 정신적인 것은 여기서 자연현상들을 위한 형식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왜 예술가들이 자연 대상들을 의인화했는지 질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최선의 답은 다음과 같다.
예술가들은 자연현상들을 참된 상태로 파악하려고 했고, 자연현상들의 최고 진리는 생명성이며, 최고의 생명성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이 주관성이 외면성과 다양성을 일자로 합치하는 한 점을 이룬다.
또한 이러한 상징은 분해되고 타자와 접촉하며 타자에 의존하는 그러한 대상들만을 파악한다고 할 수 있다.
의인화를 하면 타자에 대한 이 의존성이 단절되어 대상들은 자립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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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유에서는 의미와 표현의 유한한 영역이 완결된다.
왜냐하면 직유에서 의미와 표현이라는 두 측면은 각기 자립적이라는 규정을 지니며, 동시에 이렇게 직접적인 대상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상태도 이 직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은 자립성은 의미를 이루는 모든 특수한 내용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적 의미는 자기 의식이며 사유 자체다.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은 직관에 대해 상대적이며 일시적으로만 자립적일 뿐이다.
예를 들어, 태양과 달, 별 그리고 다른 자연현상들은 이러한 의미의 절대적 자립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의미의 절대적 자립성은 내면적인 것으로서 외적인 자립성과는 다르다.
따라서 사유는 즉자대자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서, 절대적인 의미 부여자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유는 추상적인 형식에 갇혀 현존할 뿐이다.
그래서 사유는 참된 개체성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전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사유는 정신으로 현존하고 비로소 참되게 구체적으로 현존하게 된다.
그리고 사유는 스스로를 이중화해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스스로를 알며, 자연의 외면성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외화해 육체적인 방식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정신이 자신의 내면성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이다.
이상과 같은 것이 이제 우리가 고찰해야 하는 단계의 내용이며, 이 단계에서는 의미가 스스로를 외화해 육체적인 것으로 현현하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예술의 두 번째 주요 형식으로서, 고전적 예술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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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이며 유한한 것을 이렇게 확정할 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이 사물들의 과거 상태에 대
한 인정이며, 이는 예를 들어 시편 90편처럼 종종 매우 위대하고 숭고하게 드러난다.
이 시에서 신은 인간의 과거에 대비해 설정된다.
그리고 인간의 과거는 신이 지닌 위력의 결과물로 간주되며, 신의 위력은 분노로 표현된다.
이 유한성에 대한 의식은 종종 인륜성과 관련해 좀 더 자세히 표현되며, 좀 더 심오한 죄의 개념이 등장한다.
죄는 개별적인 범죄나 개별적인 나쁜 짓이나 개별적인 위력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오히려 신적인 것, 절대적인 것, 유일한 지배자에 대한 침해다.
한편으로는 불행, 고통, 질병 등등은 소행에 대한 형벌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의욕에 대한 형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이와 결부되어 있다.
유대 시인의 한탄과 열망에는 아주 숭고한 보편성이 스며들어 있다.
여기에는 아직까지 이렇게 부정적인 것에 대한 정신의 자기만족이 나타나지는 않으며, 오히려 최고의 만족은 욥기에서 볼 수 있듯이, 상실한 것을 획득하려고 할 때나 복수와 증오에서 추구된다.
유대 민족은 절대자와 맺는 관계에서 여타의 인접 민족들보다 고차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유대인의 민족적 자부심은 나중에는 완고함으로까지 변질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절대자와 인간의 이러한 관계와 이러한 의식도 일종의 숭고한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기적이라고 규정되는 좀 더 세부적인 형태를 지닌다.
예를 들어 모세는 불타는 관목에서 신을 본다.
인간이 절대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하나의 도구가 되어 버리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로는 즉자대자적인 존재자이기도 한 이러한 관계는 철저하다.
이것은 예를 들어 모세 오경의 제2권 출애굽기 제4장과 제16장에 나와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숭고함의 계기들로서, 이미 말한 바처럼, 여기서 숭고함은 고전적 숭고함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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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생명체의 형태가 이제 더 이상 신 자신과 같은 즉자대자적인 절대자로 파악되지 않고, 오히려 정신성이 탁월한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동물적인 것은 단지 유한하고 불운한 것으로만 고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정신은 자연적이며 원소적인 것을 통해 직관되고 인식 될 수 없다.
이 둘째 부정적 계기는 우리가 나중에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처음부터 아름다움의 긍정적인 계기를 가정한다면, 신적인 것이 특별히 우세하기 때문에 자연의 요소도 이 신적인 것의 본질을 자체에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자연의 요소가 주요한 위력이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아름다운 것은 그 표현상 인간적인 것이지만 개별적으로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 행위,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셋째로 아름다운 것은 개체성으로도 나타나며 이로 인해 또 다시 유한성이 출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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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각을 몰형식적인 것으로부터 형식을 갖춘 것으로의 이행이자 정신적인 내용을 갖춘 것이
라고 생각해 왔으며, 사람들도 조각을 고대 그리스 예술의 중심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적인 것의 원리는 고대 그리스 예술의 원리를 이루며, 특히 여기서 정신적인 것은 실재와 이념의 통일이다.
정신적인 것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자연성이 정신에 의해서만 존립하며 즉자 존재로서는 스스로를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는 사실이 요구된다.
정신은 외적인 자연성과 자기 내면의 자연성 모두를 부정하고 자신의 지배에 둔다.
그렇게 하면 자연성은 더 이상 자립적이지 못하며, 오직 정신만을 표현하며 정신의 형식이 될 뿐이다.
여기서 미리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은, 정신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정신적인 것이자 예술의 대상으로 표현되도록 규정됨으로써 자연을 관통해 자연을 지배하는 위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아직 여기에는 추상적인 분리를 산출하는 지배는 현존하지 않으며, 신적인 것은 위력일 뿐이다.
그리고 자연적인 위력은 단지 정신적인 위력의 계기일 뿐이며, 절대적 정신과 자연이 맺는 관계는 아직 규정되지 않은 상태다.
여기서는 아직 정신이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구체적이며 자연에 대립한다는 사실이 현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자연이 경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이 동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본래적인 의미의 정신은 자연과 유한한 정신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비로소 생겨난 제우스의 새로운 지배권에 의해 고대 그리스 신들이 극복되는 일에서 자연과 정신의 이러한 대립이 출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새로운 신들은 정신적인 신들이며, 그들의 본질은 정신성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제우스는 신들과 인간들의 주인이고 왕이자 아버지이며, 인간 운명의 관리인이자 지도자이며, 정치적 통치권의 본질이다.
그리고 아폴론은 지적인 의식 일반이며, 팔라스는 특수한 의식이라는 등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규정들에서는 정신적인 요소가 본질을 이룬다.
그러나 그 이전의 오래된 신들은 사정이 정반대였다.
우라노스는 하늘이고, 크로노스는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모든 자식들을 삼켜 버렸다는 신화에는 자연적인 것의 무상함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
인륜과 국가 속에서만 비로소 확고한 것이 그대로 남으며, 므네모시네는 그것에 영속과 항구성을 부여한다.
티탄들과 오래된 신들에는 헬리오스나 셀레네가 속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그 본질상 천체들의 위력들을 의미했다.
더구나 오래된 신들에는 카오스도 속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아무렇게나 서로 뭉친 덩어리이자 자의적인 지배를 의미했다.
이 같은 자연의 요소들이 극복되는 것이 사티로스들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암시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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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요소는 상징적인 것 일반이다.
정신적인 것이 절대적 내용이므로, 상징적인 것은 여기서 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특히 호메로스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의미에 대한 공명이 남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공명이 완전히 사라져 버려 동화와 같은 가치를 지닌다.
정신적인 것이 대자적으로 구축될수록, 정신적인 것은 직접 대자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끌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상징적인 것은 우연성의 영역에 들어선다.
이때 고전적 예술은 해체되고 이행하게 된다.
조각의 고요함에서 아름다움은 최고 표현에 도달했지만, 이 고요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여기서 고전적 예술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의식이 예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대립이 완전히 도야되면 대립하는 두 측면은 총체로서 나타난다.
한 측면에는 객관성, 최상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갖춘 형상이, 다른 측면에는 객관성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주관성이 나타난다.
후자의 측면에서 주관성은 완전히 대자적으로 도야되어 상대적 총체성으로 존립한다.
그러나 이 주관성에는 어떤 현실적인 정신도 대립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그것이 돌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바로 이때 고전적 예술은 좀 더 고차적인 영역으로 이행하며, 더구나 이 이행은 매우 특수한 종류로서, 현실의 의식적 투쟁이 있게 된다.
이 이행은 직접적인 의식에 의해 역사로 파악된다.
예술에 의해 비로소 직접적 의식은 본래적인 의식이 된다.
그리스도의 삶은 예술의 산물이 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역사적으로 현존했다.
육체성, 육신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신성시되고 명예롭게 여겨지고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근대 시인들은 고전적 예술 영역을 부각했고, 이 예술의 상실을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기독교의 고차적인 원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입장에 속하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실러의 시 <그리스의 신들> 이 있다.
이 속에 담긴 주요 사상은,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언제나 신들의 품 안에서 존재했다는 것이다.
실러가 이러한 사상에 대립한 것은 탈신화한 자연과 차가운 오성으로서, 이 오성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환상의 표상을 대신하게 되었다.
실러는 “아름다운 세 계! 너는 어디에 있느냐? 다시 되돌아오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말 속에 기독교에 대립하는 실러의 입장이 매우 분명하게 들어 있다.
실러가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에는, 신은 유일자이며 최고의 본질이며 아무 규정도 없는 자라고 하는 신에 대한 표상이 있었다.
이러한 표상은 오성의 차가운 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차가운 추상과 더불어 모든 삶은 말살되고 모든 사랑은 지양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경우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따르면 신적인 정신은 교구 공동체 속에 살아 있고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는 괴테의 <코린토스의 신부>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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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우리는 고전적 예술의 계기들을 살펴보았다.
첫째 단계인 상징적 예술의 원리는 자연이 정신성으로 상승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정신성은 단지 자연물에 내재한 형식일 뿐이었다.
둘째 단계인 고전적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은 기초가 되고, 자연적인 것은 단지 외적인 것, 형식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자연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에 의해 관철되었고, 정신적인 것에 딱 들어 맞게 되었다.
그리고 표현은 이념상적으로 되었지만, 여기서 정신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두 부분들은 각자의 진가를 보여 주지는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셋째 단계로 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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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두 측면들 상징적 예술과 고전적 예술은 고양된다.
정신적인 것은 이제 자신 속에서 실재성을 알게 되는데, 이 실재성은 정신적인 것이 이전에는 외면에서만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낭만적 예술에는 이념이 존재한다.
고전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전히 결함도 있었다.
왜냐하면 외면에 존립하는 실재가 정신적인 것에 적합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그 토대만 이 개념에 의해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토대 자체는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정신성은 실재의 적합성을 정신 자체에서만 발견하고 정립할 수 있다. 우리는 나중에 낭만적 예술에도 분열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정신은 스스로를 자신 속으로 되돌리고, 그렇게 해 오직 직접적인 동일성만이 발생한다.
그러나 사상 자체에 지적인 세계, 사상의 세계가 있는 단계가 좀 더 고차적이다.
정신은 사상 속에서 자신의 실재성을 지니며,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에 이르고, 스스로 자신의 타자가 된다.
정신이 자신 속에서 자신과 함께 함으로써, 정신의 대상은 정신 자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대상은 정신에 어떤 제한도 되지 않으며, 정신은 자신의 무한성과 실체적 자유를 의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진리는 인간다움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기 위해 진리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가 인간 의식에서 자신의 현존을 지닌다
따라서 이 같은 점이 바로 낭만적 예술의 관점이다.
우리가 낭만적 예술에 존립하는 계기들을 좀 더 상세히 고찰해 보면, 이 계기들은 우리 자신에게 이 단계의 좀 더 상세한 기초들이 만들어 내는 형식을 명시해 줄 것인데, 이 기초들은 구체적인 표현에서가 아니라 완전히 추상적인 계기들로서 좀 더 상세히 고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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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측면은 내적인 아름다운 총체성일 수 있는데, 이 총체성은 자신의 현존에 출현하는 모순에 의해 해체될 수 있는 총체성이다.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들은, 무한히 아름답고 온전한 심정이 근거가 되지 못하고 단지 의지력이
지닌 형식적인 무한한 측면만이 근거가 됨으로써 반대 상황을 초래한다.
여기서 이 형식적인 무한한 측면은 자신의 제한성 속에서 스스로를 타당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의 성격과 관련해 제한되어 있는 그러한 인물들의 경우에, 우리는 이 제한이 그들 자신 속에 내재한 고귀하고 심오한 것의 운명일 뿐이라는 식의 견해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들이 원하는바, 이념상으로 고양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나야만 한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의지에 제한되어 있는 그러한 인물들을 통해서도 정신의 심오한 측면을 우리가 인식하도록 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이 자기 스스로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만들어내는 비유들을 보여 줌으로써, 셰익스피어는 그들이 스스로 어떤 존재인가를 반성할 줄 아는 자유로운 인간이며, 단지 상황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이 일상에서 직접 존재하듯이 그렇게만 우리에게 표현된다면, 이들은 순수한 자연적 본질들로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무미건조한 성격은 전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자신 속에 고귀함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현 상황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점을 반성을 통해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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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예술형식들을 두루 거치고 난 후, 이렇게 다양한 절대적 소재는 인간 심정의 무한성이 되어 버렸다.
신적인 것이 예술의 소재이지만, 예술에 의해 표현되기 위해서 이 소재는 특정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이 같은 일이 상이한 예술의 단계를 통해 발생한다.
상징적인 것에서 우리는 자연의 위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의미로 정립했다.
고전적 예술에서는 의미가 정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감각 형식을 띤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정신적인 것이 자신의 토대를 자기 자신 내에, 주관성 내에 지니게 되는 것 을 본다.
그러나 최종 단계는 정신이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가 근대 예술의 단계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시인 괴테가 완전한 방식으로 이 단계에 도달했다.
우리는 괴테에게서 참된 예술가는 단 하나의 소재에 결부되어 있으며, 그의 소재는 현재적인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다른 오래된 소재도 상상력을 발휘해 다루기는 했으나, 이렇게 함으로써 예술은 형식화될 뿐이었다.
왜냐하면 본래적인 소재는 표현 속에 투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제 오래된 과거의 소재를 모방하고 근대화하는 일에 이리저리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표현들이 과거의 소재가 지니는 진정한 가치를 지니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는 단테나 타소, 셰익스피어와 같은 작가는 결코 배출될 수가 없다.
과거 시대의 소재는 마무리되고 끝나 버렸고, 오직 현재적인 정신만이 신선하고 새로우며, 이러한 정신이 모든 표현 속에 드러나야만 한다.
우리는 프랑스인들이 모든 것을 프랑스화해 버린다고 비난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화하는 일이 고귀하기만 하다면 전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대의 개인들은 우리 정신의 형태들(등장인물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오직 그럴 경우에만 개인들은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진리를 지니게 된다.
인간의 가슴은 모든 실체와 진리의 영원한 반영이므로, 어느 시대이건 실체와 진리는 인간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의 최종적인 규정은 신적인 것이 인간의 심정들 속에서 현상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낭만적인 것이 최종적인 규정에서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보편적인 부분에 대한 고찰이 끝났다.
보편적인 부분에서는 항상 개념과 실재의 관계가 기초가 되었다.
상징적인 것은 조화로운 형태를 찾으려는 시도였다.
고전적인 것은 개념과 실재의 완전한 일치 상태였다.
그리고 낭만적인 것은 이러한 통일 상태를 뛰어넘는 것으로서, 개념과 실재의 분리였으며,
최종적인 것은 자신의 토대를 인간의 심정들 속에 지니는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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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예술형식들과 특수한 예술형식들의 연관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조형 예술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형 예술들은 시각이나 청각과 관련된다.
시각에는 감각적 객관성이 현존하며, 이 감각적 객관성은 분산되어 하나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다른 하나가 들어선다.
조형 예술은 세 가지 종류를 포함한다.
1.비유기적이며 개체화되지 않은 주관적 본성의 계기이며, 2.이념상적인 신 자체이고, 3.이 신에 대립하면서 공동체에 속하는 주관적인 것이며, 이 주관성이 특수화되고 마침내 전체 직관의 주관성이 추상적 주관성 속으로 환수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건축을 다루는 데, 이 건축은 단순한 주변 조건이며, 단지 정신의 반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자체로 비정신적인 것으로서, 단순히 외적으로만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다음에 우리는 이념상적인 신을 조각 작품으로 다룬다.
상징적 예술형식은 건축을, 고전적 예술형식은 조각을 자체의 고유한 형식으로 삼는다.
그리고 건축은 고전적 예술이나 낭만적 예술에서는 단지 주변 조건적인 성격을 띨 뿐이다.
회화는 상징적 예술과 고전적 예술에 고유한 것이기는 하지만, 회화의 참된 자리는 낭만적 예술에 있다.
그리고 낭만적 예술은 주관적 예술로서, 이 주관적 예술에서는 사소하고 개별적인 것이 출현하며 신과 같은 대상이 아니라 그려지는 그림 자체를 숭배하는 일이 우세해진다.
또한 음악도 낭만적 예술에서 좀 더 독립적이며 기본적인 것이다.
회화에 비해 음악은 상징적 예술이나 고전적 예술과 같은 다른 예술형식들에서는 의존적일 뿐이며 보조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인에게는 음악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인들에게서 비참하고 슬픈 단 한 편의 노래 만을 인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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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 예술에는 건축, 조각 그리고 회화가 있다.
음악은 시 예술로의 이행 단계를 이룬다.
이 조형 예술들 각각은 그 자체로 인식의 세부 분야를 구성하는데, 이 분야에는 수많은 경험적 숙련이 필요하다.
근대에 예술 전문가인 듯하는 행태가 아주 유행이 되어 버렸다.
즉 한편으로 그것은 타인들이 예술에 대해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주시하고 알려고 하며,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역사적 지식들을 털어놓는 쾌적한 오락거리였다.
이러한 예술의 지식에 관여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는 오직 본질적인 관점들과, 보편적 이념에 대한 이 관점들의 연관에만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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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급했듯이, 건축술은 상징적 예술에 상응하며, 이 양자는 단 하나의 원리를 지닌다.
우리는 건축술부터 시작한다.
건축술은 어떤 재료를 수용해 정돈하고 다듬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료는 말하자면 예술에 투입되는 비유기적 자연이다.
그리고 재료는 어떤 상징적인 것이며,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것이 취해져서 이것에 외적인 형식이 가 해질 뿐이다.
건축술은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이 두 가지 관점의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건축은 마치 독립적인 예술 작품의 규정을 지닌 것처럼 간주해야 하며, 그런 다음 완전히 상징적인 것에 속하게 된다.
둘째, 건축 작품들은 중심점, 신성과 연관되거나, 아니면 이 작품들이 그 목적에 기여하는 인간에만 관련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상징적 건축, 2.본래적으로 아름다운 또는 고전적 건축, 3.고딕식 건축, 4.시민 건축술이 그것이다.
이 마지막 건축술은 아름다움의 개념과 가장 소원한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편안함이나 유용함과 같은 다른 목적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 건축술은 여기서 생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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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상징적 조각에서 고찰했던 관점은, 하나의 형태가 단순히 표상만을 충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 직관을 충족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직관은 예술가의 완전한 자유의 표현과 표현의 생동성을 요구하며, 가장 사소한 개별적인 것들에서도 정신적인 것의 표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술가가 하는 구상이며 혼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예술은 주어진 대상에 구속되어 엄격하게 그것을 고수하는 예술과는 달리 자유롭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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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예술 분야로 이행할 수 있다.
고전적 예술에서는 개체적인 것, 진지하고 객관적인 것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여전히 전적으로 추상적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여전히 신으로?).
따라서 우리는 고전적 예술에서는 표현이 충분히 의인화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계기인 주관적 개별성, 특수하고 의존 상태에 있는 인간은 이제 객관성을 지녀야만 하는 계기가 되며, 따라서 최고로 확장된 상태의 개체성이 표현의 원리가 된다.
예술이 주관적 개체성을 자신 속에 지니게 됨으로써, 개체성이라는 표현의 이 원리는 다른 예술 방식의 시작과 혼이 되어야 하고, 바로 이 다른 예술 방식이 우리가 조각 다음에 고찰해야 하는 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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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왜 예술은 추상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이유를 들 수도 있다.
인간 예술의 유한성은 총체적인 자연의 작품들을 그렇게 산출해 낼 수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예술은 자연의 작품들을 산출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자연의 작품들보다 더 고차적이 며 정신으로부터 산출된 정신의 작품들을 산출해 낼 수 있다.
정신은 산출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상을 객관화한다.
정신의 내용이 이처럼 객관화됨으로써, 정신은 분열과 대상화의 계기로 드러나게 되며, 자신의 내용을 구별된 것들의 분야로 투사하게 된다.
이 구별된 것들의 분야는 정신 자체에서 현실적으로 구별되고 정돈되고 분류된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구별된 것들을 산출할 때 자연도 이러한 일을 행한다.
정신이 산출한다는 것은, 정신이 그러한 구별들, 유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별된 것들은 개념에 따라 규정되며, 이 개념의 구별들에 따라서 정신은 구별된 것들, 유들, 상이한 예술들을 갖추게 된다.
이같은 예술들은 추상적이다.
왜냐하면 표현이 분열의 요소, 구별된 것들의 요소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된 것들은 앞서 얘기했듯이 개념의 규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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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 다른 개체성은 한편으로는 자신과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세계와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극복한 주관성이 회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관성은 자기 자신의 부정성에서도 자기 스스로를 유지하며 보편자로 스스로를 확장하는데,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은 동시에 슬픔과 고통으로 덮여 감추어져 있는 사랑이다.
만일 아이나 아내 등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는 가능한 상실에 대한 염려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 중 최고는 종교적 사랑이다.
따라서 여전히 고통과 함께하는 이러한 자기 내로 복귀는 탈세속적이며 공평무사한 신성한 사랑이다.
앞서 말한바처럼, 이러한 사랑은 모성애와 가장 친근한 현실성을 띤다.
동시에 이러한 사랑은 겸허라는 특징을 보인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보시받은 선물이자 우연한 것이고, 이것을 유지하는 일도 우연하며 일종의 행운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이 표현되어야 한다면, 여기에는 유한자를 초월해 천상을 향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그녀의 고귀함과 더불어 동시에 어머니로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어떤 경향도 없으며,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영 혼의 경향만이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은 고대의 아프로 디테와는 다르다.
그것은 형제자매의 사랑에 가장 가깝다.
마리아도 부부 관계로 표현되지 않으며, 오히려 형제자매의 관계로 표현된다.
이러한 사랑이 인격성을 지니는 한, 거기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통일성이 있게 된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게 존재해야 하지만,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도 이 통일성의 의식은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통일성은 그들에게 제삼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스스로 제삼자에게서 이 통일성을 지니는 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이로부터 통일성은 결코 상실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유한한 관계는 결핍이 있는 관계로 나타날 수밖에 없어서, 상실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은 부정성을 포함하며 피안으로 가는 고양 과정을 포함하는데, 하지만 이 고양은 동경이나 욕망이 없는 고양이다.
이같은 사랑이 근대 예술 중 특히 회화의 내면, 영혼 충만한 실체적인 면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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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색이 세분화되어 조화가 방해받지는 않은 이 상태에 대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네덜란드인 대부분에게서 이러한 감각을 보게 된다.
후에 이러한 방식은 꽃 그림, 풍경화, 그리고 초상화와 같은 다양한 숙련성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그림 그리기 자체를 본질적인 즉면으로 유지하면서 대상을 점점 더 경시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가현의 마술을 보게 된다.
이것은 색의 조화이자, 소위 회화의 음악이다.
이 마술은 단순히 명암에만 관계하는 동판 조각술에서 또 다시 사라져 버린다.
여기가 회화가 음악으로 이행하는 지점이다.
회화의 최고 대상은 자기 스스로와 관계 맺는 영혼이다.
또 다른 극단은 자기 스스로와 관계 맺는 가상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육체가 없고 내용이 없는 관념성이 존재하며, 이미 말한 것처럼 이 관념성으로 인해 음악으로 이행한다.
회화는 공간성, 병존 상태에서 뒤로 물러서며, 가상은 본질로 남는다.
그리고 이것은 음악에 해당한다.
음악은 자신 밖에 전혀 내용을 지니지 않으며, 그 본질은 사라지는 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주관성은 울림으로 부가되어야 한다.
음악의 기본 요소는 소리로서, 이것은 외적이며 감각적인 실재이므로, 이렇게 감각적인 수단 자
체에 정신적인 규정이 더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 형식은 아름다움의 형식이 될 수 있고, 이 표현은 예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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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시간의 연관은 이 자아 속에 있다.
직관으로서 이렇게 추상적인 내면성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성은 형식적이며 주관적인 통일성이며, 한 점과 같은 것이며 완전히 부정적인 통일이고, 공간적인 것, 병존 상태의 지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아는 외면적인 것, 더구나 외면적인 것 그 자체로도 존재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어떤 외적인 표현이 현전하며, 이 표현은 곧 다양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단순히 외면성의 정점일 뿐이며, 표현될 때 사라져 버리고 만다.
바로 이것이 시간이며, 소리는 본질적으로 시간 속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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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단순히 우리를 이러한 감각 속으로 밀어 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그것을 초월하고 음악 자체를 향유하게 한다.
이것이 위대한 음악의 특징으로서, 음악은 즐거움치 속에서 흥청거리면서 떼를 지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새처럼 마음이 동시에 자신 속에서 영혼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에서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점으로서, 거기에는 인간이 기쁨과 슬픔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면서도 동시에 화해하는 감정의 순수한 직관이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 음악에 맞춰 종종 춤을 춘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멜로디와 노래다.
이에 비해 우리는 규정성도 요구한다.
그러나 좀 더 고차적인 것은 이 양자의 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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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음악이라는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역으로 이행한다.
음악은 감각적인 표현의 마지막 예술이다.
그러나 예술의 감각적 요소는 그 스스로 곧바로 사라지고 마는 소리다.
한쪽 극단은 비유기적 형태를 지닌 질료적인 것이며, 다른 쪽 극단은 소리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언어 예술로 이행한다.
언어 예술은 총체성의 예술이다.
건축은 그것을 구성하는 좋지 않은 요소들로 인해 그 속에 거주하는 신을 필요로 하며, 또한 이 신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와 같은 것의 정점인 주관성을 우리는 소리에서 보았다.
그러한 상태와 운동을 통해 채워지지 않는 것은 바로 공허한 주관성이다.
말로써 소리는 음악적 요소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채워 준다.
언어 예술은 두 극단을 포함하고 있고, 그 전체 규정에서 (드라마에서) 조형 예술의 형태를 띠며, 또한 음악의 형태, 자기 자신을 청취하는 형태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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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맹목적 힘이 무의식성에 존립하므로, 온전한 정신은 이러한 감각에서 교차되면서 그 감각과 동일하게 된다.
감각은 쾌락이든 고통이든 스스로를 파악하고 기술하며 표상함으로써, 가슴을 가볍게 해 준다. 이를 통해 감각의 대상성이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다.
괴테는 이렇게 하는 것을 민간요법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러 관계에 얽혀 있고 내적인 불안과 불쾌를 느꼈을 때, 시 한 편을 지었다.
그는 '내가 시를 지으려고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쇄도하는 감각을 대상화해 이 감각에서 해방되었다.
그의 모든 소설이 여기서 출발한다.
그는 사랑하고 절망했으며, 자신의 수많은 열정을 총괄했다.
이 속에 시와 진리가 있다.
감각은 진실한 것이며, 그는 시적인 제한의 목적에 따라 상황들을 바꾸었다.
동기는 행위들 속에서 객관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감각이 그 자체로 표현된다.
따라서 서정적인 것의 내용은 주관적인 감각의 본성에 따라 완전히 무제한적인 범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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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예술[드라마 예술]은 언어 예술 중 최고 단계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극예술은 절대적인 내용이 그 속에서 표현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 바탕은 말이라는 가장 기품 있는 요소다.
여타의 모든 감각적인 것은 이런 저런 측면에서 결점이 있다.
언어 예술은 극시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객관성은 극시(드라마)에서는 단순히 어떤 행위일 뿐만 아니라, 기본 요소는 자기 자신을 동시에 표현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 행위에서 마음의 의식이 타당하게 된다.
신적이며 인륜적인 행위를 그 내용으로 삼는 것은 바로 이 고귀한 객관성이며, 동시에 행위로 진전되는 내면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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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인륜의 실체와 이 실체가 드러나는 과정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여기서 실체적 통일성은 그들의 평온과 합의를 교란하는 개인이 몰락함으로써 또 다시 산출된다.
여기서 인륜은 토대다.
희극에서는 실체적인 것의 몰락이 최상의 풍조로서, 개인들의 주관적인 관심에 의해 실체적인 것 이 해체되어 버린다.
주관적인 것은 실체적인 것을 자체 속에서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주관적인 것은 모순의 표현이며 모순의 직접적인 해소 상태에서 이 모순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은 그러한 성질을 띠기에,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은 곧바로 눈에 띤다.
희극에서는 개체성을 유지하고 그 개체성을 그 자체로 존립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러한 주관성에서 실체적인 것이 해체되는 모습이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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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는 풍부한 정신의 소유자이며 특출한 사람이자 시민이다.
그는 아테네 민중과 정치가, 신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와 그의 섬세한 감각 등등이 지닌 우둔함을 표현했다.
그의 강조점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지니는 강건한 확신이었지만, 여기서 주체는 그가 기획한 것을 자신이 직접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리스토파네스를 읽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주관적 확신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지닐 수가 없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주관적 확신은 미소를 짓는 올림포스 신들의 지극한 환희와도 같다.
또한 아리스토파네스는, 욕설이 입을 통해 나오는지 아니면 직장을 통해 쏟아지는지를 소크라테 스가 관찰했다는 식으로 그를 우스운 꼴로 극화해 버렸다.
동시에 민중과 바쿠스, 크레온, 특히 에우리피데스와 여성을 헐뜯었다.
결론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인물을 설정 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파괴되지 않으며, 파괴되는 것은 또한 본래부터 무실하다.
신적인 것에까지 펼쳐짐으로써 파괴되는 것은 오직 형태일 뿐이다.
이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음이며, 그 자신을 확신하는 자립성이다.
이렇게 확실한 주체성을 우리는 소크라테스 자신에게서는 아리스토파네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발견한다.
자기의식이 그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은 그에게 세계를 의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주관적 원리는 심정의 거리낌 없는 상태의 형식으로 아리스토파네스에게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원리에서 지적인 내면적 세계 직관의 사례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는 예술에 대립하는 것이므로, 감성적 직관은 신적인 것의 참된 실존이 아니게 된다.
그와 같은 내면성의 원리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는, 신적인 것이 내면적인 것 자체에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이러한 희극을 통해 조형적인 형태들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이라는 방식이 신적인 것의 최고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적인 것의 정신적인 앞은 종교 속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의 영역을 두루 거쳤고 이제 종교로 나아간다.
예술이 신적인 것의 필수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나가 버릴 수밖에 없는 한 단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