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계시록 21:4.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완전해질 때까지 천 년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 전까지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장점을 찾고 그들에게 참을성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땅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예수와 천사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따라서 이 땅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는 완전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때 그들이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도록 땅에서 선택되어 하늘로 간 자들이 자신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 인류가 유익을 얻을 때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계시록 4:4, 9-11; 5:9, 10) 또 병과 슬픔과 죽음이 영원히 사라져 고통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바뀔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날이 올 때까지 사랑 많고 지혜롭고 참을성 많은 우리 아버지 여호와를 본받겠다고 결심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처럼 여호와를 본받는다면 어떤 시련에 직면해도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야고보 1:2-4) “부활이 있으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 대해 우리는 참으로 감사합니다!—사도 24:15. 「파20.08」 19면 18-19항 |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the former things are passed away. Barnes' Notes on the Bible And God shall wipe away all tears from their eyes - This will be 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that blessed state, that not a tear shall ever be shed there. How different will that be from the condition here - for who is there here who has not learned to weep? See the notes on Revelation 7:17. Compare the notes on Isaiah 25:8. And there shall be no more death - In all that future world of glory, not one shall ever die; not a grave shall ever be dug! What a view do we begin to get of heaven, when we are told there shall be no "death" there! How different from earth, where death is so common; where it spares no one; where our best friends die; where the wise, the good, the useful, the lovely die; where fathers, mothers, wives, husbands, sons, daughters, all die; where we habitually feel that we must die. Assuredly we have here a view of heaven most glorious and animating to those who dwell in a world like this, and to whom nothing is more common than death. In all their endless and glorious career, the redeemed will never see death again; they will never themselves die. They will never follow a friend to the tomb, nor fear that an absent friend is dead. The slow funeral procession will never be witnessed there; nor will the soil ever open its bosom to furnish a grave. See the notes on 1 Corinthians 15:55. Neither sorrow - The word "sorrow" here - πένθος penthos - denotes sorrow or grief of any kind; sorrow for the loss of property or friends; sorrow for disappointment, persecution, or care; sorrow over our sins, or sorrow that we love God so little, and serve him so unfaithfully; sorrow that we are sick, or that we must die. How innumerable are the sources of sorrow here; how constant is it on the earth! Since the fall of man there has not been a day, an hour, a moment, in which this has not been a sorrowful world; there has not been a nation, a tribe - a city or a village - nay, not a family, where there has not been grief. There has been no individual who has been always perfectly happy. No one rises in the morning with any certainty that he may not end the day in grief; no one lies down at night with any assurance that it may not be a night of sorrow. How different would this world be if it were announced that henceforward there would be no sorrow! How different, therefore, will heaven be when we shall have the assurance that henceforward grief shall be at an end! 반즈의 성경주석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 이것은 그 축복받은 상태의 특징 중 하나가 될 것이며, 거기에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곳의 상황과 얼마나 다를까 - 여기 울음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7장 17절과 이사야 25장 8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더 이상의 죽음은 없을 것이다 - 미래의 영광의 세계에서,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무덤은 파헤쳐지지 않을 것이다. 천국에서 "죽음"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천국에 대해 어떤 전망을 갖기 시작하는가? 죽음이 그렇게 흔한 지구와는 얼마나 다른가; 아무도 살려주지 않는 곳;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죽는 곳; 현명한 사람들, 유용한 사람들,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죽는 곳;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남편, 아들, 딸들, 모두가 죽는 곳; 우리가 습관적으로 죽어야 한다고 느끼는 곳. 확실히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고 죽음보다 더 흔한 것은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영광스럽고 활기찬 천국의 경치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끝없이 영광스러운 생애 동안,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시는 죽음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친구를 따라 무덤까지 가지 않을 것이며, 부재중인 친구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느린 장례 행렬은 그곳에서 결코 목격되지 않을 것이고, 흙은 무덤을 마련하기 위해 가슴을 열지도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있는 주석들을 보라. 슬픔도 없을 것이다 - 여기서 "슬픔"이라는 단어는 어떤 종류의 슬픔, 재산이나 친구를 잃은 슬픔, 실망, 박해, 보살핌에 대한 슬픔, 죄에 대한 슬픔, 또는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적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불충분하게 섬기는 슬픔, 우리가 아프거나 죽어야 한다는 슬픔을 의미한다. 여기 슬픔의 근원이 무수히 많으니, 이 땅에서 슬픔이 얼마나 끊이지 않는가! 인간이 멸망한 이후로 하루, 한 시간, 한 순간도 슬픈 세상이 아니었다. 국가, 한 부족, 한 도시, 한 마을도, 한 가족도 슬픔이 없는 곳이 없었다. 항상 완벽하게 행복했던 사람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슬픔으로 하루를 끝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없고, 밤에 누워서는 슬픔의 밤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없다. 앞으로 슬픔이 없을 것이라고 발표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의 슬픔이 끝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 천국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
수동에서 능동으로 꽃을 바라볼 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정신이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동물에게는 꽃이 전혀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그 꽃 자체에 있다고 보는 것이 수동적 관점이라면, 우리의 정신이 그 꽃을 바라볼 때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주체라고 보는 것은 능동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의 모든 재료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지만, 수동적 관점을 가질 때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노력없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능동적 관점의 사람이라면 이미 주어진 재료일 망정 우리 스스로 그것을 내게 필요한 직접적인 노력을 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예로써 이해될 수 있다. 가령 농사를 생각해 보자 농사에 필요한 모든 재료인과 작용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즉, 볍씨와 물과 공기와 햇빛 그리고 적당한 온도 등은 이미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우리의 식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고 물주고 관리하여 추수할 때 비로소 우리 앞에는 근사한 밥상이 차려지게 될 것이다. 성서에서는 천국 또는 낙원이 우리 앞에 근사하게 펼쳐질 것을 약속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수동적으로 생각한다면 자칫 아무 것도 우리 앞에 놓여지지 않을 수 있다. 주어진 재료와 하나님의 마련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때만, 주어진 낙원은 우리 앞에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 11:11에서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 왕국은 침례자 요한의 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힘써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그리고 힘써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차지합니다.(마태11:12) 이 구절에서 의도하는 바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실질적으로 천국을 구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수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이 저절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으로 생각하고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마지못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첫번째 단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이 깊어짐에 따라 우리의 사고는 수동에서 능동으로 옮겨져 가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조정함으로써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능동적 생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기존의 대부분의 믿는 자들의 생각은 수동적이었다. 즉, 천국이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이므로 그 천국을 바라보는 삶에 불과했다. 오늘날 워치타워의 낙원관도 대동소이하다. 그들은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야 비로소 낙원이 설립될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아마겟돈을 두려워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마겟돈에서 죽지 않기 위해 율법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수동적 생각들도 당연히 자신의 삶을 틀잡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이상적인 세계는 비록 그 재료와 작용의 대부분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것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마지막 마무리인 농사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근사한 밥상이 차려지지 않듯이, 낙원은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을 것이며, 아마겟돈은 당연히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미 주어진 재료들을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천국 곧 낙원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우리의 능동적인 추구를 마태 11:12에서 힘써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천국 또는 낙원]을 차지합니다 라는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보다 발전된 사고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고, 좋은 인간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평화와 정의 그리고 사랑이 충만한 사회를 만들 수 있고, 그 사회가 바로 우리가 바라던 낙원이라는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