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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1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방탄소년단 ‘AMA’ 5년 연속 수상…‘K팝 부문상’까지 2관왕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5년 연속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 수상에 성공하며 ‘AMA’에 새 역사를 썼다.
방탄소년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시어터에서 열린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2022 American Music Awards, 이하 ‘AMA’)‘에서 ‘페이보릿 팝 듀오/그룹’ 부문과 올해 신설된 ‘페이보릿 K팝 아티스트’ 부문을 수상했다. 이로써 방탄소년단은 2관왕에 오르며 5년 연속 AMA 수상에 성공했다.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는 ‘빌보드 뮤직 어워드’, ‘그래미 어워드’와 함께 ‘미국의 3대 대중음악상’으로 꼽힌다. 100% 팬들의 투표로 수상자를 정하기 때문에 대중성을 보여주는 시상식으로 여겨진다.
방탄소년단은 2018년 ‘페이보릿 소셜 아티스트’ 부문에서 수상하면서 이 시상식과 첫 인연을 맺었으며 이날 수상으로 무려 5년 연속 수상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특히 ‘페이보릿 팝 듀오/그룹’ 부문에서는 2019년 이래 4년 연속으로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 지난해에는 K팝 가수 최초로 대상에 해당하는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를 거머쥐며 명실상부 현 시대 최고의 슈퍼스타임을 입증했다.
2022년 인도네시아 강도 5.6 지진발생 최소 160명 사망
2021년 문재인 대통령 국민과의 대화 시간 가져
2021년 설경구 자산어보의 영화로 황금영화상 3관왕
2018년 서울고법 박근혜 대통령 친박 총선 공천 개입 혐의에 징역 2년 선고
2016년 남한 거주 북한이탈주민 3만명 돌파
2013년 태풍 피해 필리핀에 공병·의무대 등 500여명 파병
2013년 국내 첫 적외선 우주관측 위성 '과학기술위성 3호 발사
국내 첫 적외선 우주관측 위성인 과학기술위성 3호(STSAT-3)가 최종 점검을 마치고 21일 오후 4시 10분 러시아 야스니 발사장에서 발사되었다. 우리나라 세 번째 우주관측용 위성인 과학기술위성 3호는 국내 기술로 개발한 다목적 적외선 영상시스템(MIRIS)을 처음으로 탑재했다.
이 위성은 앞으로 2년 동안 고도 600㎞ 궤도에서 97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한반도 지역의 해수온도를 파악하고, 산불·재난 상황 등을 감시하게 된다. 과학기술위성 3호는 2006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현 미래부) 주관으로 추진됐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카이스트, 한국천문연구원, 충남대, 우석대 등이 개발에 참여했으며, 모두 278억 36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2012년 사상 처음으로 1,000만 명 째 외국인 관광객 입국
2010년 아일랜드 IMF 구제금융 신청
2007년 북청사자놀음 보유자 여재성(88세) 사망
2004년 미국 NBC방송 케빈 사이츠 기자, ‘미군의 이라크인 포로 사살 ’ 보도 파문
케빈 사이츠 기자. “미 해병이 벽에 기댄 이라크 부상자를 향해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녀석이 죽은 척 하고 있어.’ 그가 이라크인을 겨냥하는 모습이 내 카메라에 잡혔다. 이라크인은 움직이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해병은 방아쇠를 당겼다. 벽에 피가 튀었고 다리가 축 늘어졌다. ‘이제야 죽었군.’”
미군이 지난 13일 이라크 팔루자의 한 이슬람 사원에서 부상한 이라크인을 사살한 장면을 특종한 미국 NBC방송 케빈 사이츠 기자가 21일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www.kevinsites.net)에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사이츠 기자는 미 해병들에게 띄우는 공개편지 형식의 글에서 자신은 반전운동가도 ‘한 건’에 눈 먼 기자도 아니며, 진실을 덮을 수 없다는 의무감 때문에 보도를 결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이츠는 지난 13일 해병 부대를 따라 이슬람 사원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사살 장면을 목격,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한때 테이프를 없애버릴까 생각했지만 “진실을 배반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고 했다. NBC방송은 이 테이프를 48시간 뒤 보도했다. 사이츠는 글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항복한 상태라면 해병 여러분은 그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 항복한 사람이 내 눈과 카메라 앞에서 살해됐다면, 나는 보도할 책임이 있다.”
2004년 안시현 2004년 미 LPGA ‘올해의 신인상’ 수상
2004년 한글재단 이사장 한갑수씨 별세
한글 운동에 평생을 바친 원로 국어학자 한갑수(韓甲洙·91 ·사진) 한글재단 이사장이 21일 오전 6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난 한 이사장은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와 미국 호놀룰루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서울대·중앙대 교수, 한글학회 회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 등을 지냈다. ‘원본 훈민정음 풀이’ ‘바른말 고운말 사전’ 등의 저서가 있으며 충무무공훈장, 은관문화훈장, 미국 동성훈장, 외솔상 등을 받았다.
2000년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 공식 사임
일본에 체류 중인 알베르토 후지모리(62) 페루 대통령이 21일 자신의 사임서를 의회에 공식 제출했다. 이로써 지난 90년 무명 대선후보에서 일약 대통령에 당선된 일본계 이민 2세 후지모리의 10년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됐다. 후지모리는 또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적 망명설은 부인했으나 “일본에 머무르고 싶다”고 밝혀, 망명 가능성을 짙게 했다.
1997년 한나라당 창당 (신한국당과 민주당 통합)
1997년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1997년 11월21일 정부가 국가부도 사태를 선언하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정부는 대외신인도를 높이고 외환시장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1997년 11월 21일 IMF(국제통화기금)에 긴급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IMF는 그 대가로 한국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개혁 조치를 요구했다.
임창열 부총리는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마친 뒤 미셸 캉드쉬 IMF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자금지원을 공식 요청했으며, 캉드쉬 총재로부터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IMF는 24일 실무협의단을 한국에 파견, 우리정부와 구체적인 지원협의를 시작, 실사작업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마련한 뒤 자금 지원을 시작했다.
부도의 벼랑끝에 몰린 한국정부는 금융불안, 기업도산, 대량실업 등 숱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이 밀어붙이는 개방압력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처지가 되었다. 결국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신청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은 사건이 되었다
1996년 이균영 교수 별세
중견작가 이균영 동덕여대 교수가 1996년 11월 21일 새벽1시 서울 이태원동 크라운호텔 앞길에서 타고 가던 택시가 중앙선을 넘어온 승용차와 정면충돌하는 바람에 숨졌다. 향년 45세였다. 이균영씨는 소설가이자 역사학자로서 두 방면에 모두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면서 장래가 촉망되던 인물이었다.
한양대 사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1984년 중편소설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제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현대인의 무의식에 감춰진 인간의 내면과 삶에 관한 깊은 통찰을 작품으로 형상화해왔다. 1986년 소설집 `멀리있는 빛` 발간 이후 10여년 동안 국사학 연구에 몰두한 이씨는 1995년 장편소설 `노자와 장자의 나라`를 발표, 소설적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씨는 일제시기의 대표적 민족연합운동단체인 신간회에 대해 10여년 간 집중 연구한 저술 `신간회연구`로 1994년 제8회 단재학술상을 수상하는 등 일제시기를 비롯한 한국근대사에 관한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1991년 독일-러시아 협력협정 체결
1991년 프랑스인 제라르 다보빌 나룻배로 노을 저어 최초로 태평양 횡단에 성공
1991년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에 선출
유엔안보리가 1991년 11월 21일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사무총장 후임에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이집트 부총리겸 외무담당 국무장관(62)을 선출했다.
갈리 신임 유엔 사무총장은 14년 간 이집트 외무담당 국무장관을 역임, 이집트·이스라엘 전쟁을 종결시킨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상에 이집트 대표로 나서 이를 성사시킨 베테랑 외교관이다. 그는 1946년 카이로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정치학과 국제법의 석사과정을 거쳤으며 1949년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후 1977년까지 카이로대학에서 국제법 교수로 일해왔다.
국제법 학자ㆍ언론인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그는 특히 중동평화회담의 주역으로 유명하다. 1977년 사다트 대통령 당시 전격적으로 마련된 예루살렘 평화회담에 참석했으며, 이후 워싱턴 회담 등지에서 팔레스타인 자치문제 해결을 위한 아랍 측 협상대표로 활약했다. 이번 사무총장 선거를 앞두고는 이스라엘 측 지지확보를 위해 지난 9월 파리에서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를 만난데 이어 곧바로 워싱턴을 방문, 부시 대통령의 지지를 당부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
1990년 소련 이에로플로트항공 여객기 시베리아 야쿠츠크시 추락 사망 176명
1987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창립
1983년 롯데호텔 미국여인 피살사건 발생
1983년 필리핀, 이멜다 집행위원직 사임
1982년 조선조 마지막 상궁의 한사람 박창복여사 사망
1982년 충북 청원군 경부고속도로서 관광버스 전복 사상 37명
1981년 중국, 서울올림픽 참가의사 표명
1980년 한일의원연맹 활동재개. 회장 박태준
1980년 미국 라스베가스 MGM그랜드호텔에 불 사망 84명 사망
1980년 김대중 재판(金大中裁判)
1980년 5․17조치와 함께 내란음모․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의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대중(金大中)이 계엄군법회의를 거쳐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사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된 뒤, 김대중(金大中)은 그해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되고, 이듬해 2월 사면 복권됨으로써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全斗煥) 군사정권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이른바 5․17조치를 감행하였는데, 김대중은 이때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수사기관에 연행되었다.
이어 그해 7월 31일 내란음모․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의 위반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기소된 뒤, 역시 같은 해 9월 17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1980년 11월 21일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일본 총리가 최경록(崔慶祿) 주일 대사에게 '김대중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이 문제가 내정간섭으로까지 비화되어 한국과 일본 간에 마찰이 일기도 하였다.
사형 확정 후 독일․미국․일본․프랑스 등에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서자, 군사정권은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이어 1982년 12월에는 그를 석방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해외에서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하였다.
1978년 중국에서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
1978년 행주대교 개통
1976년 한-루마니아, 무역-경제협력협정 조인
1972년 제3,6대 국회의원 김두한 세상 떠남
1972년 제7차 개헌안(유신헌법) 국민투표 실시, 가결-제4공화국 성립
1972년 10월 17일을 기해 단행된 이른바 `10월 유신`에 따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 선언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비상조치를 취했다.
그 후 자신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후속조치들을 속속 단행, 10월 27일에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 개헌 반대 발언이 완전히 봉쇄된 가운데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국민투표는 정부가 유신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지도계몽반을 편성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 결과, 헌법개정안은 91.9%의 투표율과 91.5%의 높은 찬성률로 통과됐다.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가 단독 출마,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가 출범하게 됐다.
1971년 한국식물학의 개척자 정태현 사망
1968년 주민등록증 발급 시작
현재의 주민등록 제도가 뿌리를 내린 것은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면서였다. 주민등록제도는 멀리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호패제도가 있었고 바로 전에는 6ㆍ25때 서울시와 각 도가 다급하게 발급한 시민증과 도민증이 있었다. 1962년 5월 10일 주민등록법이 공포됨으로써 주민등록 제도의 첫 윤곽이 드러났으나 몇년이 지나도록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1968년 1월에 1·21 무장공비침투사건이 터지면서 박정희 정부는 주민등록법 개정을 서둘렀다. 주민의 동태를 파악하고 남파간첩 등의 불온분자 색출이 용이하도록 모든 국민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한다는 내용의 개정안이었다. 1968년 5월 10일에 통과된 1차 개정안은 주민등록 제도의 양대 축을 이루는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입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11월 21일부터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면서 시민증과 도민증은 자동 폐지됐다. 주민등록번호는 주민등록증 발급과 함께 각 개인에게 부여됐다. 번호는 앞뒤 6자리씩 모두 12자리로 구성돼 예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경우는 110101-100001, 110101-200002였다. 앞 6자리는 지역, 뒤 6자리는 개인번호였다. 1975년부터 현재의 13자리 숫자 체제로 바뀌었다. 주민등록증의 재질은 1999년 종이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었으며, 2013년부터 IC칩이 내장된 전자주민등록증이 발급될 예정이다.
1968년 주민등록증 발급을 통해 법죄 예방 및 수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민감한 개인정보가 담긴 13자리의 개인식별번호가 주민등록증상에 직접 노출되어 있어 개인정보 유출 및 오·남용 가능성과 주민등록증의 위·변조 가능성, 주민번호를 통한 국가의 개인 통제 가능성 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1967년 간첩 김배영 사건
1964년 조선일보 필화사건. 선우휘 편집국장 등 2명 구속
1959년 미-소, 과학 기술 문화교류 협정에 조인
1957년 동-서독간 통상협정 성립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개최
1948년 국회, 미군주둔 요청 결의안을 통과
1945년 프랑스 드골수반의 사회-공산-인민의 3당내각 성립
1941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공포
1938년 화재신고 및 응급구호에 관한 전화통화의 건 제정시행
1935년 김구 등 한국독립당 결성
1928년 홍명희 소설 ‘임꺽정’ 조선일보 연재 시작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소설 ‘임꺽정’이 1928년 11월 21일부터 ‘林巨正傳’ 이란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벽초는 조선일보가 후원했던 신간회 간부를 맡아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유치장에서도 이 소설을 계속 집필했으나,건강 때문에 몇차례 연재를 중단했다.벽초는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자매지 ‘조광’으로 지면을 옮겨 연재를 계속했으나 끝내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첫회는 이렇게 시작된다."자, 임꺽정이의 이야기를 붓으로 쓰기 시작하겠습니다.쓴다 쓴다 하고 질감스럽게 쓰지 않고 끌어오던 이야기를 지금부터야 쓰기 시작합니다.각설, 명종대왕 시절 경기도 양주땅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란 장사가 있어...."
조선시대 최대의 화적패였던 임꺽정 부대의 활동상을 그린 소설 ‘임꺽정’은 일제강점기 때 쓰여진 가장 방대한 규모의 대하장편역사 소설로, 봉단편·피장편·양반편·의형제편·화적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천민 임꺽정이 대꼬챙이의 명수 박유복, 백두산의 비호 황천왕동이, 쇠도리깨 장사 곽오주 등 7형제와 함께 청석골에 반역의 둥지를 튼 후 고난받는 백성을 위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식민지시대 민족의 해방에 대한 염원과 삶의 애환에 중첩적으로 닿아있다.
‘임꺽정’은 조선 시대 하층민의 저항과 생생한 삶의 묘사를 통해 근대적 한국리얼리즘 소설의 전형을 제시했고,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다. 벽초가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한 1928년 무렵은 이미 일제의 식민정책이 정치, 경제적인 측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화적인 측면에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제 민족의 고유한 전통이나 풍습, 언어까지 심각한 훼손의 위협 아래 놓여 있던 때였기에 더 큰 의미를 지닌다.
1912년 알바니아, 독립선언
1906년 청, 아편금지령 공포
1904년 두 번째 여기자 추계 최은선 태어남
1898년 황국협회, 만민공동회 습격
1894년 일본군, 청의 여순점령
1866년 조선조 고종, 천주교도 수색령
1806년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내려
유일하게 자신의 영향력 밖에 있는 섬나라 영국때문에 나폴레옹은 늘 속이 탔다. 1803년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동요시키기 위해 이집트 상륙작전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자신의 함대가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까지 넬슨의 영국 함대에 대패하자 부득불 군사작전을 포기하고 영국 고립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성공을 담보하려면 먼저 동쪽의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수중에 넣어야 했다. 1806년 8월 1000여년동안 이어온 신성로마제국의 숨통을 끊어놓았고, 10월에는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베를린 입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11월 21일,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통상·통신을 금지하고 영국의 상선이 유럽 땅에 정박하지 못하도록 폴란드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유럽의 전 해안을 봉쇄하는 이른바 ‘대륙봉쇄령’을 베를린에서 공포했다.
그러나 봉쇄령으로 영국보다 유럽 대륙이 오히려 더 큰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되자 유럽 각국은 영국과의 밀무역으로 어려움을 타개하려 했다. 특히 곡물과 목재를 영국에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해 경제를 꾸려 온 러시아로서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러시아에서 밀무역이 성행하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나섰으나 결과적으로 몰락을 자초한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1783년 피라돌 데 로제와 마키스 다르랑드 후작, 950m까지 상승 약 25분 동안 8km 비행. 인류 최초의 유인 비행
1783년11월21일 기구를 이용한 최초의 유인비행이 행해졌다.
장 프랑수아 필라트르 드 로지에와 프랑세스 로랑 아를랑데 후작이 몽골피에 기구로 파리를 횡단한 것이다.
이들은 양모와 짚을 태워 23분 동안 약 9㎞를 비행했다.
그해 12월 물리학자인 J. A. C. 샤를과 니콜라 루이 로베르는 수소를 넣은 기구로 2시간 동안 비행했다.
유인비행에 앞서, 1709년경 브라질의 바르톨로미 로렌소 데 구스망에 의해 최초로 기구의 실험이 있었고 프랑스 앙노네의 조제프 몽골피에와 에티엔 몽골피에 형제는 1783년 6월 4일 무인기구로 2.4㎞ 이상 비행한 뒤 9월 19일 더 큰 기구에 양․닭․오리 등을 태워 띄운 바 있었다.
기구는 군대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관측용 기구를 썼으며 미국 남북전쟁과 제1, 2차 세계대전 때도 기구가 이용되었다.
과학계에서는 1911~12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V. F. 헤스가 우주선(宇宙線)을 증명하기 위해 기구를 5,000m 상공까지 올려보내는 대담한 실험을 했다.
1931년 5월 스위스의 물리학자이며 교육자인 오귀스트 피카르는 기구에 여압실을 설치해 세계 최고의 고도비행기록을 세웠다.
1694년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 출생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1694년 11월 21일 출생했다. 볼테르는 흔히 프랑스 지성사에서 최초의 지식인으로 꼽힌다. 볼테르는 생전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이었고 다작에 능했지만, 명저를 남기진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지식인의 맨 앞에 위치하게 된 것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으로서의 지식인상을 모범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낸 `극단의 시대`의 종교적ㆍ정치적 광기에 맞서 투옥과 추방을 무릅쓰고 이성과 양식을 쫓았다.
프랑스 남부의 독실한 가톨릭 도시 툴루즈에서 한 개신교가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된 이른바 `칼라스 사건`(1761)을 볼테르가 용기와 지혜로 바로잡은 일은 볼테르를 진정한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778년 84세로 사망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 호 미국 프로빈스 타운 입항
1579년 영국의 금융업자 토머스 그레셤 사망
1394(조선 태조 3) 조선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김
204년 미국 소설가 아서 헤일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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